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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박소희 朴邵熙
서울예대 학사과정 문예창작전공 1학년. 1992년생.
parksohee823@gmail.com
스물세번의 로베르또 미란다
로베르또 미란다 로베르또 미란다 로베르또 미란다 로베르또 미란다.
아리엘 도르프만의 희곡 「죽음과 소녀」는 “시간적 배경은 현재이며, 공간적 배경은 칠레일 수도 있지만 오랜 독재 기간이 끝난 직후 민주정부가 들어선 경우라면 어느 나라라도 무방하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등장인물은 빠울리나 쌀라스, 헤라르도 에스꼬바르, 그리고 로베르또 미란다. 빠울리나는 15년 전에 독재정권하에서 고문을 당했다. 당시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현재 남편인 헤라르도는 인권변호사로서 고문 피해자들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차가 고장나 도로에 멈춰 있던 헤라르도를 한 사내가 도와주게 되고, 그 일로 그는 헤라르도의 집에 들른다. 그의 이름은 로베르또 미란다. 빠울리나는 로베르또 미란다의 목소리를 듣고 그가 그 의사, 15년 전에 어둠 속에서 자신을 강간하고 고문했던 그 의사,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를 틀던 그 의사라고 한다. 그리고 그를 결박하고 총을 겨눈다. 로베르또 미란다는 자신은 절대 그 의사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빠울리나는 모든 것을 자백하라고 한다. 바로 여기서, 오늘, 내가 당신을 재판할 거라고. 진심으로 용서를 빌면 풀어주겠다고.
기울인 부분은 희곡 속 실제 대사들이다.
사실 빠울리나와 헤라르도는 지금 어딘가에 다른 이름으로 살아 있다.
나 역시도.
그리고 세상에는 나를 로베르또 미란다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한번의 로베르또 미란다. 형이 내게 와서 말했다. 도움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다. 우리는 형이 있는 곳으로 갔다. 얼마나 더 내려가야 해, 내가 물었다. 가장 깊은 데까지, 형이 말했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냉기가 묵직해졌다. 저 아래에 사람들이 있어. 나를 닮은 형은 말했다. 이제 제일 먼저 할 일은 이름을 지우는 거다. 여기선 나를 버드라고 불러. 버드? 그래, 버드. 난 너를 의사라고만 부를 거다. 우리 사이를 아는 사람은 없어. 내디딜 때마다 발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 아래로 형의 목소리가 한겹 더 울렸다. 저 아래에는 이름이 있는 사람들이 있고, 없는 사람들이 있어. 우린 없는 사람들인 거다. 그게 모든 걸 구별해. 기억해. 우리는 여기서 진짜 이름도 얼굴도 지운 거다. 어두운 불빛 아래에서 형의 눈은 잘 보이지 않았다. 얼굴을 지운다는 게 이런 뜻인가. 나는 어둠에 잠겨 턱 윤곽만 어렴풋한 형을 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닮았는지 가늠해보려고 했다. 무슨 말인지 알지? 저 사람들이 끝까지 버티다 죽을 것 같으면, 죽기 직전에 멈춰. 다른 사람들도 멈추게 해. 특히 전기, 그리고 물. 우린 죽이려는 게 아니라 단지 알아내려는 거니까. 가장 중요한 진실 말이다. 그리고 넌 공산당들이 아버지에게 한 짓을 갚아줄 수 있어. 저 아래에서, 전부 다.
두번의 로베르또 미란다. 형이 문을 열었다. 비리고 역한 냄새가 몰려들었다. 나는 코와 입을 막았다. 형이 말했다. 의사 선생님, 겨우 이 정도로 그래서 되겠어? 난 형을 올려다봤다. 복도에 있던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버드, 이런 약골을 데려와서 어떡하려고? 의사 선생이 맞기는 한 거야? 덩치가 큰 사내가 동료들을 향해 웃었다. 그리고 손톱을 물어뜯으면서 말했다. 스터드라고 불러주쇼. 나는 손을 내밀었다. 여기서 악수 같은 건 필요 없지, 의사 양반. 그는 어깨로 나를 가볍게 쳤다. 그런데 진짜 의사 맞아? 아니, 그냥 신기해서 그래. 병원 밖에서 의사를 만나는 건 처음이거든.
몇몇 사내들이 웃었다. 그 사이로 흰 와이셔츠를 입은 남자가 걸어왔다. 작은 체구에 포마드로 넘긴 희끗한 머리. 장화와 팔토시. 그가 팔에 낀 토시를 벗으며 말했다. 내 옷차림을 용서하시고…… 들어오세요, 닥터. 피와 물로 젖은 옷에서 비릿한 냄새가 났다. 그가 환하게 웃었다. 나는 알랭 들롱이라고 불러요. 여기선 다들 그렇게 부르거든, 닮지 않았나? 사내들이 시선을 교환하며 낮게 킬킬댔다. 그는 마지막 음절을 끌며 말했다. 버드에게 설명은 들었을 겁니다, 의사 선생님. 사람들이 죽어나가지 않게 해주세요. 죽은 사람을 처리하는 건 꽤 번거롭지 않겠습니까. 너무 유명한 말이긴 하지만, 죽은 자들은 말이 없어요. 우리는 말을 해줄 사람들이 필요한데 말이죠, 그게 뭐든 간에. 그러니까 닥터는 응급처치를 해주시면 됩니다.
우리는 길고 복잡한 복도를 계속 걷기 시작했다. 젖은 장화가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앞으로 갔다. 그가 중간중간 손을 마주치는 소리, 형의 발소리, 나의 숨소리. 버드는 믿음직한 비밀경찰입니다. 과묵하고 진지하죠. 아시다시피, 침묵은 힘이 세지 않습니까. 우리는 다시 무거운 문을 열고 들어가 수많은 방들을 지나쳤다. 빽빽한 문앞을 지날 때마다 각기 다른 비명이 새나왔다. 이 일을 할 때엔 더 그렇습니다, 나라를 위해선 이렇게 보이지 않는 데서 묵묵히 일하는 젊은이들이 필요한 법이죠. 그가 형을 향해 미소를 지었지만 형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가 좀 복잡하고 어두워도 금세 적응될 겁니다, 냄새도 익숙해져요. 사람의 감각 중에서 가장 빨리 적응하는 게 뭔지 당연히 아시겠죠, 의사 선생님? 그의 단정한 머리를 흘깃 봤다. 후각이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럼 가장 익숙해지지 않는 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통각 아닙니까. 저도 그렇게 배웠습니다만, 겪어보면 사람들은 고통에도 꽤 빨리 익숙해지는 것 같더군요. 저 사람들이 익숙해지지 않게 하는 게 우리의 일이기도 합니다. 저도 쉰이 넘었지만 여기에 있으면서 인간을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느낌이 곧잘 듭니다. 눈을 마주치며 그가 어떤 미소를 띠었다. 당신과 같은 사람들에 대해 알게 될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아마 닥터께서도 그러시게 될 겁니다. 자, 들어가십시다.
좁은 방 안에는 피와 멍으로 물든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의식이 없었다. 놀랄 것 없어요, 닥터. 피를 좀 많이 흘리긴 했지만 단지 기절한 겁니다. 나도 그 정도는 알아볼 수 있지요. 나는 남자의 눈을 가린 검은 천을 벗겨냈다. 괜찮습니다, 저는 의사입니다, 들립니까? 남자의 동공을 손전등으로 비췄다. 앞으로 닥터를 부르는 곳으로 어디든, 달려와주시면 됩니다. 꼭 필요한 때를 빼고는 눈을 가려두도록 하세요. 그와 형은 문을 닫고 나갔다.
세번의 로베르또 미란다. 의사 양반, 나 가끔 왼쪽 배가 쿡쿡 쑤시곤 하는데 왜 그런 거요? 스터드가 히죽댔다. 죽을병에 걸린 건 아닌가 몰라. 중얼거리면서 스터드는 스위치를 올렸다. 잘못했다는 말만 계속하던 머리가 하얗게 센 남자는 경련했다. 그러곤 비명을 질렀다. 신을 믿어? 스터드가 남자에게 물었다. 남자는 비명 속에서 답했다. 믿어요. 나는 고문을 믿어, 그리고 너를 고문할 거야.*1)
남자를 바라볼 수 없었다. 스터드는 말했다. 저 늙은이 생각보다 질기데. 난 금방 나갈 줄 알았어. 나는 목소리를 높였다. 말을 하면 바로 풀어줍니까? 알잖아, 선생. 여기서 나가면 두가지뿐인 거. 땅 위거나 하늘 위거나. 난 저 노인네가 금방 날아갈 줄 알았지. 어떻게 해야 저들을 풀어주는 겁니까? 스터드는 물어뜯은 손톱을 뱉었다. 이제 선생이 있으니 두번째는 좀 줄겠어. 근데 형씨, 아무리 똑똑해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고. 계속 버티다가도 순식간에 꼴까닥한다니까? 남자의 비명이 커질수록 스터드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었다. 스터드가 외쳤다. 한 단계 더 올려도 되겠지? 내가 눈을 찌푸리자 그는 스위치를 조금 더 꺾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지린내에 눈을 떴다. 남자 아래로 피 섞인 오줌이 퍼지고 있었다. 입에선 거품이 흘렀다. 거참, 늙은이하고는. 대걸레 가져올 테니 잘 보고 있으쇼. 그만하라고 말하려다 나는 그 자리에서 토했다. 돌아온 스터드는 말했다. 우리 선생 비위가 꽤 약하네.
네번의 로베르또 미란다. 형을 찾았다. 이건 내가 생각한 일이 아니야. 사람들을 구하는 게 아니잖아. 형은 나를 데리고 빈방으로 들어갔다. 시큼한 냄새에 다시 구역질이 났다. 불을 켜려는 손을 형이 막았다. 처음엔 다 그래. 곧 적응될 거다. 형은 어둠 속에서 말했다. 원래 나라와 진실을 위해 봉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진실? 무슨 진실? 진정한 진실. 형은 그런 게 저 사람들 입에서 나온다고 생각해? 고문해서? 결국엔 나오게 될 거다. 형, 아니, 그래 버드, 진짜 진짜 진실이 뭔지 알아? 우리가 알아낼 수 있는 진실 같은 건 여기 없다는 거야. 그래도…… 아버지를 생각해라. 저 새끼들만 아니었어도 그렇게 되시지 않았다. 형, 그건 다른 얘기라고. 내가 여기서 누굴 위해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형의 목소리가 말했다. 그렇더라도, 네가 가면 저 사람들은 다시 죽을 거다.
다섯번의 로베르또 미란다. 나는 그 자리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여섯번의 로베르또 미란다. 테오와 루이스를 알게 되었다. 어깨가 두껍고 몸이 단단한 루이스. 그는 머리가 조금 벗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에게 어쩌다 이곳에 오게 됐느냐고 물었다. 루이스는 싱겁게 웃었다. 글쎄, 신의 뜻이었겠지. 루이스가 담배연기 속에서 계속 말했다. 나도 여기 처음 왔을 때 이름이 없었지. 의사 양반이 의사 양반인 것처럼 난 그냥 청소부였어. 그럼 왜 루이스가 되었습니까. 그냥. 내가 여기 와서 본, 처음으로 죽어나간 사람 이름이야.
나는, 의미 있어. 휴게실 소파에 걸터앉아 있던 테오가 끼어들었다. ‘테오’, 누구 생각나는 사람 없으신가? 그는 수염자국을 쓸었다. 고흐 말야, 빈센트 반 고흐의 동생. 나는 테오, 하고 작게 읊조려봤다. 그리고 고흐의 그림과 죽음을 떠올렸다. 그가 창백한 얼굴로 슬며시 웃었다. 왜 테오인지는, 말 안할 거라네. 의사 선생은 고흐 좋아하시나? 저는 에곤 실레를 좋아합니다. 오딜롱 르동도 좋아하고요. 에곤 실레가, 클림트랑 사제지간이었지? 클림트가 제자였나? 에곤 실레가 제자였습니다. 클림트가 난 더 좋던데. 그는 나를 빤히 보면서 물었다. 오딜롱 르동 그림은 뭘 제일 좋아하는데? 「침묵의 그리스도」요. 제목이 마음에 드네, 어떤 그림이야? 그리스도가 눈을 감고 있습니다. 뒤로는 노란빛이 후광이거나 태양처럼 있고요. 더 마음에 드네. 그의 웃음에서 쇳소리가 얕게 났다.
테오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선생은 고통에 대해서 얼마나 알아? 예? 의사여도 고통에 대해 잘 모를 수 있으니까. “고통은 잦아드는 것이 아니라 잠시 후 더 격렬한 형태로 되돌아오고 만다.” 들어본 적 있나? 잘 모르겠습니다. 이란 작가가 소설에서 한 말이야. 그 글을 읽고 너무 많이 자살해서, 금서가 됐단 얘기도 있지. 난 저 구절을 믿어. 그렇습니까. 그 작가가 이런 말도 했지—“이 세상은 나에게 어울리는 장소가 아니었다.”*2) 어때, 좋지? 나는 지금 이곳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그럼 이 말은? “고통 중에서도 스스로 택한 것이 가장 고통스러워 보이는 법이다.” 처음인가? 글쎄요. 의사 양반, 앞으론 그림만 보지 말고 책도 많이 읽는 게 좋겠어. 이건 「오이디푸스 왕」에도 나와. 소포클레스. 소포클레스는 정말 많은 걸 알고 있었을 거야, 느껴져. 테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는 물었다. 왜 다른 사람의 말을 계속 인용합니까. 그들의 권위를 빌려오고 싶은 것 아닙니까? 스스로 정당성이 없으니까요. 글쎄, 그렇게 생각해? 의사 선생은 아직 아닌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여기 있는 사람들은 고통을 아주 잘 알고 있어. 저 사람들 잘 기억해뒀어?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 그리고, 주는 사람들. 어떤 처지이든 간에 전부, 고통과 관련된 거라면 꿰뚫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지. 범위나 속성까지도 속속들이. 나는 그를 똑바로 봤다. 선생은 여기가 왜 있다고 생각해? 인간의 모든 모습을 다 보기에는 여기가 가장 좋은 곳이라는 생각, 안해봤어? 인간의 모든 면. 이 세상은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장소야. 테오는 마른 얼굴로 짧게 웃고는 말했다. 고통을 대하는 태도를 알면 그 사람을 알게 되지. 지금 다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아, 어차피 알게 될 테니까. 그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다시 루이스였다. 난 잘 모르지만, 이건 확실해. 고통은 오직 주는 쪽과 받는 쪽으로 나뉘는 거야. 어느 쪽이 될지는 스스로 택할 일이겠지. 그나저나 의사 선생은 뭐라고 불러드릴까? 저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저…… 버드는 왜 버드입니까? 루이스는 다 마신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던졌다. 직접 물어보지그래.
일곱번의 로베르또 미란다. 저 아이는 몇살입니까. 타일로 된 방에서 눈이 가려진 채 떨고 있는 여자애를 봤다. 갈색 치마, 작은 검은 구두. 저 귀여운 계집애? 열일곱이랬나 열여섯이랬나. 왜, 궁금해? 궁금하면, 말하쇼, 의사 양반. 스터드가 내 눈을 보며 웃었다.
여덟번의 로베르또 미란다. 여기에 의사는 나뿐이다. 나는 저들과 다르다.
오전 열시마다 창문이 없는 방들로 회진을 돈다. 그리고 깊은 저녁이 되면 오늘 더는 건드려서는 안되는 수감자들을 스터드와 테오와 그의 동료들에게 일러준다. 안된다, 그만해라, 돌이킬 수 없게 될 거다—나는 자주 말한다. 건강이 충분히 괜찮은 수감자들 앞에서도. 더이상 안됩니다, 절대적인 휴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스터드가 말한다. 형씨, 너무 겁이 많은 거 아니야? 객관적인 판단이에요. 혈압과 맥박이 불안정합니다, 겉보기와는 다르단 말입니다. 그러면 저들은 내 말을 잘 듣는다. 크고 순진한 어린아이처럼.
진회색 문을 열었다. 머리가 센 남자가 잠들어 있다. 온몸이 피멍인 그는 자면서도 손을 떤다. 그가 경련하던 모습이 짧게 겹쳐졌다. 인슐린을 놓으려는데 그가, 선생님이시군요, 한다. 내게 먼저 말을 걸어주는 유일한 수감자. 주무시는데 죄송합니다. 아뇨, 아닙니다. 그런데 저인 줄 어떻게 아셨습니까. 선생님의 체취도 있고 사람마다 걷는 소리와 박자가 있지요, 고유하게. 그렇군요. 눈을 가린다고 다 못 보는 것은 아니지요, 이 나라도 언젠가 그걸 알게 될 겁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했다. 빛을 못 본 지가 너무 오래됐어요…… 앞을 못 보면 시간감각을 잃는다고들 합디다. 의사 선생님, 저 혹시 잠깐 안대를 풀어주실 수 없겠습니까? 나는 오래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해해주십시오, 정말 죄송합니다.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럼요, 충분히, 제가 죄송하지요.
그의 굳은 나무 같은 팔에서 주사를 뺐다. 그리고 물었다. 여기 오기 전에는 어디에 계셨습니까. 저는 책을 읽고 책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학교를 평생 못 떠날 줄 알았는데…… 학교에 있다 이리로, 갑자기 끌려왔지요. 그의 입가가 옅게 떨렸다. 나는 한동안 말을 골랐다. 후회하십니까. 아닙니다, 오래 생각하고 했던 일들입니다, 저는 늘 생각하지 않고선 움직일 수 없는 부류였으니까요. 지금, 많이 힘드신 것 압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는 여전히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 선생님도, 그리고 여기 있는 사람들도 사실 다 힘들 겁니다, 그게 누구일지라도. 나는 어떤 얼굴들을 잠시 떠올렸다. 꼭 그렇지는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이 힘드실 때면, 숫자를 세면서 견디십시오, 저는 그렇게 합니다. 선생님, 그럼 숫자만큼 쌓인 고통을 직면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 숫자만큼 견뎌낸 것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고통만큼 견디다보면 지나가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어딘가를 응시하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문득 그의 눈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어릴 때 어떤 분이 가르쳐주신 방법입니다, 그분도 머리가 희었지요.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진통제를 좀더 드릴까요? 그러면 감사하지요.
방을 나왔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머리에 책을 얹고 서 있는 청년. 왔어? 루이스였다. 그는 청년을 턱으로 가리켰다. 법대생이라기에 특별히 법전을 얹어줬어, 조느라 책이 떨어지면 패서 깨우지. 저 청년은 얼마나 못 잤습니까? 지금 이틀쯤. 나는 포르노 잡지로 하자고 했고 스터드는 법전으로 하자고 했지. 근데 동전 던지기를 해서 스터드가 이겼어. 잡지는 너무 가볍고 법전은 너무 무거운데, 의사 선생은 둘 중 뭐가 조금이라도 더 힘들 것 같아? 의학적으로.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법전은 저 녀석 가방에 있던 건데 지금은 법이 저놈 머리 꼭대기에 있는 셈이지. 그는 웃고 있었다.
잠은 좀 주무셨습니까. 지금 여섯시간째야. 눈앞에 저게 있는데 못 자니까 고역이네. 구석에 있는 침대를 보며 그가 말했다. 침대는 왜 있는 겁니까? 저게 있어야 이놈들이 더 자고 싶어지거든. 안대를 한번씩 풀어 보여주지. 그런데 저걸 우리도 못 쓰게 하니까 짜증나는 거야. 왜죠? 몰라, 알랭 들롱이 그렇게 하래. 우리까지 고문시키고 싶은가봐. 그는 다시 웃었다. 그래도 의사 선생, 이게 가장 쉽고 효과 좋은 방법인 거 아나? 아무 상처도 안 남기면서 입을 술술 열게 한다니까. 가서 주무시고 오십쇼, 제가 지키고 있겠습니다. 선생 일은 따로 있잖아? 오늘은 다 끝났습니다. 난 선생을 잊지 못할 거야. 루이스는 내 어깨를 두드리고 나갔다.
청년에게 갔다. 그는 잠에 굶주린 채 무어라 느리게 중얼대고 있었다. 터지고 하얘진 입술로. 책을 내리고 청년을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문에 등을 기대고 섰다. 새벽 네시. 나는 이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 이들이 누구일지라도. 속으로 되뇌다보면 정신이 조금 맑아졌다. 그래도 졸음이 쏟아질 때면 내 뺨을 때렸다.
문을 열고 나왔다. 테오가 큰 개를 데리고 지나고 있었다. 비릿한 냄새를 풍기는 사냥개. 테오가 이쪽을 향해 속삭였다. 멋지지? 이 녀석 말이야, 훈련이 아주 잘됐어, 시키면 뭐든지 다 해. 겁을 줍니까? 사람을 뭅니까? ‘뭐든’이라니까 선생, 좀더 상상력을 발휘해봐. 여기선 다, 할 수 있다니까.
아홉번의 로베르또 미란다.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이제 소리만 들어도 모조리 알 수 있다.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비명. 전기침대의 스위치를 올릴 때 나는 그 소리. 어두운 조명. 온통 흰 벽들. 방들. 곳곳에 지층처럼 겹겹이 쌓인 흔적들—피 얼룩, 누군가의 손자국, 손톱자국. 고막이 찢어진 사람이 계속해서 지르는 절규. 그 사람은 자신의 절규를 듣지 못하고 우리는 항상 듣는다. 여기저기서 중얼거리는 소리, 고함치는 소리, 여자들의 날카로운 비명, 흐느낌. 어디선가 들리는 웃음들. 훈련된 사냥개들이 짖을 때마다 갈라졌다 다시 응축되는 허공. 거꾸로 매달린 여자가 계속 웅얼대는 말—시인지 다짐인지 증오인지 알 수 없는 것들. 나흘째 잠들지 못한 사내가 흘리는 표정. 크고 맹렬한 조명기 앞에 며칠째 묶여 있던 남자를 향해, 제가 보이십니까, 그의 눈앞에서 손을 움직여 보이고 멍한 눈을 들여다보고 그러다 초점 없는 눈에서 흐르는 것을 잠시 보고, 실명인 것 같습니다 영구적일 수도 있어요, 루이스에게 말하고. 어디선가 의자가 넘어지고 그 위에 있던 사람이 쓰러지고 아무데서나 쏟아지는 구둣발들. 여기저기서 의사를 길게 부르고 닥터— 이리 좀— 와봐요—, 급하게 나를 부르고. 나는 달려가 물에 젖은 몸을 누르고 입을 벌려 숨을 불어넣고 다시 심장을 압박하고 폐에 찬 물을 빼내고 그 사내가 쿨럭거리면서 숨을 토해내면 더 지켜보지 못하고 다른 방으로 뛰어가고, 피를 쏟는 젊은 여자에게 그녀를 고문하던 남자의 피를 수혈하고, 일어서지 못하게 된 열여덟 기껏해야 열아홉의 남자아이 앞에 선 그들에게 하반신의 감각을 잃은 것 같습니다 다리에 더 충격을 줘봤자 효과가 없을 겁니다 말하고, 손가락과 발가락이 하나씩 잘려나간 청년을 지혈하고, 실신한 여자, 눈앞에서 온몸의 핏줄이 터진 아들이 쓰러지자 정신을 잃은 여자에게 뛰어갔다 다시 돌아오면 젖은 몸의 그 사내는 전기침대 위에 묶여 있었다. 약하게 세게 약하게 약하게 세게 흐르는 전류를 따라 방금 살아난 그의 고함소리가 문을 비집고 나오고 나는 귀를 막고 주저앉았다.
인간이라는 말을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지 생각했다.
청진기로 내 심장소리를 들으면서 잠들었다. 잠들다 깼다. 깨면 다시 사람들에게 갔다. 죽음 근처로 자꾸 가닿는 사람들. 밖에서는 없어진 사람들. 남은 거라곤 이름밖에 없는 사람들을 살려도 살려도 내가 진짜로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열번의 로베르또 미란다. 루이스와 스터드는 복도 중간에 서 있었다. 흐린 전구가 그들을 비췄다. 오랜만에 몸을 풀어서 그러나, 영 뻐근해. 루이스가 허리를 두드리며 웃었다. 왜 돈 주고 하는 거야 형씨, 여기 널렸는데. 그래도, 맛이 다르지. 루이스는 콧수염을 쓰다듬었다. 스터드가 나를 봤다. 의사 양반 오늘 피곤해 보이는데? 선생도 어제 같이 다녀온 거야? 그들이 킥킥댔다. 인간다운 대화는 거의 하지 않는 사람들. 그래도 울부짖거나 하루에도 몇 번씩 실신하지 않는, 여기서 유일한 사람들. 나는 마른세수를 했다. 루이스, 버드는 어디에 있는 겁니까? 글쎄. 요새 다른 일로 바쁜 것 같던데. 그나저나 의사 선생, 병원이라도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점점 안색이 안 좋네. 스터드는 나를 흘깃 쳐다보곤 제 이두근을 가늠하면서 말했다. 여긴 책상 앞이 아니야 의사 선생, 그렇게 철학자 같은 표정 지을 필요 없대도.
몇몇 사내들이 우리를 지나쳐갔다. 그 속에서 테오가 장갑을 벗으면서 왔다. 옅게 배린 냄새가 풍겼다. 왜들 그래, 우리 닥터한테. 너무 힘들어하지 말자고, 닥터. 그의 얇은 뺨이 미소를 띠었다. 근데 누가 당신을 찾던데. 버드입니까? 아니, 유명한 사람이었어. 알랭— 들롱. 그들은 다시 웃었다.
열한번의 로베르또 미란다. 닥터께서는 어쩐지 저를 편하게 대해주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거 퍽 섭섭합니다. 그가 얼굴 가득 주름을 만들며 미소지었다. 들어오시죠.
환한 전등에 눈이 부셨다. 어딘가로 통하는 문이 두개 더 있는 방이었다. 여기서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평온했다. 편하게 별명을 불러주셔도 좋고, 아니면 상무라고 부르셔도 좋습니다. 누군가는 저를 그렇게 부르니까요. 어쩐 일로 부르셨습니까. 그가 테이블 위로 작은 찻잔을 내왔다. 옅은 향이 퍼졌다. 로즈힙 티입니다, 비타민이 많죠. 말끝을 늘이면서 그가 말을 이었다. 닥터께서는 술과 담배를 하시는 편인가요? 담배는 잘 안 핀 지 몇년 됐습니다. 술도 자주 마시지는 않습니다. 취하게 마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요. 닥터는 역시 자제력이 있으시군요. 그건 어떤 면에서 분명 쓸모가 있지요. 사실 전 언젠가부터 그 필요성을 그다지 못 느낍니다만, 필요한 세계도 있는 거겠죠.
그는 천천히 일어섰다. 음악 좋아하십니까? 닥터께서 누굴 좋아하실지 모르겠군요, 저는 주로 모차르트, 쇼팽, 슈만, 슈베르트……. 슈베르트, 나는 말했다. 역시 취향이 맞는군요, 닥터. 저는 이 부분을 가장 사랑합니다. 「죽음과 소녀」 2악장이 느리고 길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첫 선율을 듣는 순간 내가 이걸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말했다. 이 사중주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현악기의 애잔함과 슬픔을 이렇게 잘 표현해낸 곡도 아마 없을 겁니다. 뒤로 갈수록 힘이 생기죠, 죽음에 말입니다. 현악기의 나른한 움직임 위로 그의 목소리가 겹쳤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음악은 굉장합니다, 큰 힘이 되지요. 지금 닥터에게도 이 곡이 그랬으면 좋겠군요. 닥터가 저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 계신 뒤로 우리도, 저들도 많은 힘을 얻고 있어요. 그 부분에서 감사하게 생각하지요. 닥터께서도 많이 힘드신 것 잘 압니다, 그래도 곧 적응이 될 겁니다. 그게 우리가 가장 잘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내 어깨를 짚는 그의 손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그는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저는 이 일을 꽤 전부터 해왔어요. 이전 정권 때도 나는 여기에 있었죠. 그래서 잘 알고 있습니다. 버드와 각별한 관계이신 것도 알고 있지요, 걱정 말아요, 여기선 저밖에 모르죠. 서로에게 이름도 숨겨야 하는 사이들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나는 그의 눈가에 남은 미소의 흔적을 봤다. 그는 언제나처럼 말끝을 늘이면서 안정적인 어조로 말했다—버드는 곧 승진이 될 겁니다, 그럼 다른 관할지역으로 넘어가게 되지요, 형님께서는 닥터를 자랑스러워하십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법원에서 우리의 일을 입증하기 어려워야 합니다. 앞으론 피멍과 상처 치료에도 좀더 힘을 쏟아주세요. 저도 버드도, 닥터를 믿고 있습니다. 그의 미소 안에 축적되어 있는 것들을 가늠하고 싶었다. 그도 나를 오래 봤다. 원하신다면 저들에게 음악을 틀어주셔도 됩니다. 위로가 되어줄 수 있겠죠, 고통을 덜어준다거나. 음악의 힘은 크지 않겠습니까. 그가 오디오를 줄였다. 2악장이 잦아들고 있었다.
열두번의 로베르또 미란다. 한 사내가 내게 말했다. 힘겹고도 명료하게. 그냥 놔둬, 나를 절대 살리지 마, 똑같은 새끼들, 너희 전부 신이 벌하실 거야, 한명도 빠짐없이. 나는 온몸이 뜨거워진 채로 그 말을 생각했다. 너희 전부. 우리. 어쩌면 나. 혹은, 나.
나는 그 사람을 살렸다. 안간힘으로. 그게 그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그는 살아났다. 그리고 절망했다.
열세번의 로베르또 미란다. 머리가 센 남자는 쉰 목으로 계속 비명을 질렀다.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그는 전기침대 위에서 온몸을 뒤틀고 있었다. 가려진 얼굴 아래로 그의 표정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나는 고통스러웠다. 그러면서 동시에, 보이지 않는데도 표정을 읽을 수 있는 게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표정, 우리가 똑같이 지닌 단 하나의 표정, 그런 게 있다면 절규할 때일까 웃을 때일까. 고통을 줄이면 그 표정도 약해지나.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테오의 강퍅해 보이는 입매가 물었다. 높여도 되겠지, 그가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15mA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테오는 늘 신중하게 단계를 올렸다. 그리고 손목시계를 봤다. 마음속으로 강도와 시간을 체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왜 그러는 걸까.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내가 물었고 테오는 나를 봤다. 그러곤 잠시 가져올 게 있다면서 방을 나갔다.
나는 머리가 센 남자에게 갔다. 고통이 줄어도 계속 비명을 지르십시오, 곧 전류가 약해질 겁니다. 남자의 귓가에 말했다. 그가 고개를 약간 끄덕이는 것 같았다. 고통을 덜어주는 방법. 스위치를 잡았다. 왼쪽으로 꺾으려는데 테오가 들어왔다. 그는 설핏 웃었다. 진작, 말하지. 그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꺾었다. 순식간에 25mA를 넘어섰다. 비명이 높아졌다. 남자가 격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뭐하는 겁니까! 손을 뗐다. 손끝에 남아있는 감각이 사라지지 않아서 주먹을 쥐었다. 팔을 타고 그 느낌이 온몸으로 퍼졌다. 테오의 손을 봤다. 그 손은 비어 있었다.
잠들 수 없었다. 청진기로 내 심장 소리를 오래 들었다. 그래도 계속 뒤척였다. 손안에 남아 있는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남자의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았다.
열네번의 로베르또 미란다. 형을 보고 싶다. 그러나 버드는 여기 없다. 대신 머리가 센 남자가 있는 방으로 갔다. 그는 여전히 손을 떨고 있었다. 뵙고 싶었습니다, 나는 말했다. 의지가 되어주는 사람이 있는데 지금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뵙고 싶었습니다. 그는 안대 아래에서 약간 미소지었다. 어쩌면. 전류반과 피멍이 어지럽게 뒤섞인 몸 위로 나는 약을 발랐다. 그가 쉰 목소리로 겨우 물었다. 지금 날씨는 어떻습니까. 가을볕이 강합니다. 벌써 가을인가요…… 요새는 계속 물속에 있는 것만 같습니다, 아주 깊은 물속에요. 입안에서, 코안에서 자꾸 물 냄새가 납니다. 앞도 보이지 않고 몸을 움직이는 것도 무겁지요. 내가 그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겁니다. 그는 낮게 말했다. 정말 그럴까요. 조금만 더, 참으십시오.
카세트를 틀었다. 「죽음과 소녀」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나는 더듬듯 말하기 시작했다. 현악 사중주입니다. 슈베르트죠. 슈베르트는 쉽게 상처를 받는 예민한 사람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다지 알려지지 못했고, 무언가에 시달렸고, 늘 불안하고 우울했죠. 그는 미친 사람처럼 곡만 썼어요. 정말 미친 사람처럼요. 한곡을 끝내면 바로 다음 곡으로, 그다음 곡으로. 서른두살에 죽을 때까지 아마 천곡이 조금 못되게 썼을 겁니다. 그런 사람이 이 곡을 만드는 데에는 2년이 걸렸다니 믿기지 않죠. …… 어쩌면, 이 음악이 제가 하지 못한 걸 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어떤 아주 작은, 위로일지라도요.
사중주는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그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아마 모르실 겁니다, 어둠 속에서 훌륭한 음악을 듣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는, 말로 할 수 없어요, 사람이 사흘간 굶었을 때, 몸이 갈가리 찢길 때, 그리고…….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진통제를, 좀더 드릴까요? 이제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 오늘 너무 감사해서,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 저…… 혹시 작은 부탁을 하나 해도 괜찮을까요. 죄송합니다만, 안대는 힘들 것 같습니다. 아아, 그게 아닙니다, 혹시 성함을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기억하고 싶습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그냥 닥터라고 불러주십쇼, 저는 거기까지입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이건 오늘 밤은 여기에 두고 가겠습니다. 쉬십시오. 문을 열기 직전에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지난번엔 너무나 죄송했습니다, 부디 용서하십시오. 아뇨, 선생님, 제가 미안합니다, 정말……. 문을 닫자 그의 목소리가 멎었다. 현악기의 음색만이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열다섯번의 로베르또 미란다. 하루종일 멍했다. 여기저기서 나는 고무 냄새. 머리가 깨질 것처럼 계속 조여왔다. 어제부터 잠들지 못했다. 깨어 있어도 잠든 것 같고 잠깐 잠들어도 깨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모든 방의 책상과 벽을 고무로 둘렀다. 그건 사람들이 어제 아침, 머리가 하얗게 센 남자의 시체를 빼간 뒤였다. 남자는 벽과 책상에 머리를 찧어 자살했다. 어제가 되던 새벽에. 닦아도 남아 있는 핏자국 위로 고무가 씌워졌다. 나는 카세트에 튄 핏자국을 지워야 했다. 시체를 수습하던 사내 둘이 주고받던 말들—여기선 함부로 죽을 수도 없지. 그런데 달랐을까? 뭐가. 이렇게 안 나갔더라면. 글쎄, 그다지.
나는 그를 살려야 하고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통증이 머리를 짓눌렀다. 복도 벽에 머리를 기대고 섰다. 괜찮지? 옆에 있는 문을 열면서 테오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뭘 묻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스터드가 우리를 지나치면서 말했다. 의사면서 뭘 그래? 죽는 거 많이 봤잖아. 그의 목소리가 길게 사라지고 테오가 들어간 방에서 문 잠그는 소리가 났다. 안에서는 간단한 소리들이 들렸다. 그리고 여자의 울음 섞인 신음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서늘한 벽을 타고 퍼졌다. 말릴까. 나는 문고리를 쥐었다. 냉랭했다. 그런데 막을 수 있나. 내가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데도. 여자의 새된 울음이 몽롱한 정신을 찧어대는 것 같았다. 머리를 감쌌다. 버겁다. 서 있는 것도. 전부 다. 저런 비명 같은 것. 괴로움은 누구에게나 있는 건데. 고통은 너희의 전유물이 아니다. 간격이 짧아지는 울음. 그런데 저런 상황에서도 오르가즘을 느낄 수 있을까? 낯선 힘 같은 게 파고드는 것 같았다. 머릿속에 있는 필라멘트가 쉽게 끊어졌다. 피가 쏠리고 있다. 묵직해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화장실로 갔다. 그리고 수음했다.
열여섯번의 로베르또 미란다. 두통은 그대로였다. 물을 내리고 나왔다. 녹슨 세면대 앞에 서 있는 스터드. 그가 손톱을 물어뜯으면서 웃었다. 어디서 토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봐. 그가 내 눈을 향해 말했다. 의사 양반, 공짜 고기를 거절하지는 않겠지. 쟤들은 그걸 좋아해. 이년들은 모두 그걸 좋아해. 쟤들은 우리가 누군지도 몰라, 그렇게 평생 우릴 기억할 거야. 길에서, 횡단보도나 식당에서 다시 만나는 상상 해본 적 있어? 쟤네는 우릴 못 알아보고 우린 한눈에 알아볼 텐데. 재밌지? 다른 사람들은 어차피 모르거나 알아도 잊게 될 거고, 관심 없다고. 사냥개들도 쟤넬 즐기는데 뭐 어때?
스터드는 나갔다. 나는 그대로 서 있었다.
열일곱번의 로베르또 미란다. 여전히 잠들지 못했다. 모든 게 뒤섞이는 것 같았다. 완전히 처음부터. 여러 이유로. 카세트를 틀었다. 현악기의 선율을 들으며 여자의 작은 맨발을 바라봤다. 재갈이 물린 입과 가려진 눈도. 열일곱, 혹은 열여섯. 그리고 말하기 시작했다.
이 사중주 정말 놀랍지 않아요? 「죽음과 소녀」. 미술을 공부했다고 했죠? 이 제목으로 그림이 제법 있지요. 어떤 걸 좋아해요? 해골이 여자 뒤에서 키스하는 거? 아니면 뭉크? 나는 에곤 실레가 그린 게 제일 좋더라고요. 진짜 진짜 진실을 슬쩍 보여주는 것 같거든. 슈베르트는 삶이 불행했죠. 죽음이 항상 가까이에 있다고 생각했어요. 죽음, 그리고 소녀. 가장 가깝고, 아름다운 것에 대해 곡을 쓴 거죠. 어린 숙녀분도 그렇게 생각해요? 여기서 나간 뒤에 이 곡을 들으면, 그리고 그 그림들을 다시 보면 다르게 느껴질지도 모르지.
지금이 며칠인지 알아요? 몇시인지는? 눈이 가려지면 시간감각을 잃는다고 한 사람이 있었는데 진짜 그런지 솔직히 난 잘 몰라요. 차라리 시간을 모르면 여기가 그나마 견딜 만하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그 사람 눈이 궁금했는데 끝내 못 봤어요. 날 기억할까봐. 기억하고 싶단 말이 그런 뜻이었는지도 모르고. 우습죠. 여기서 시간을 잃는 건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밖으로 나가면, 갑자기 햇빛 아래에 버려지면 당신들은 어리둥절할지도 모르죠. 낯설겠지, 평생 봐오던 건데도. 우리도 밖에 나갈 때마다 그럽니다. 가끔 올라갈 때면 낯설어서 못 견디겠어요. 그 빛도, 다른 것들도. 당신들은 그걸 딱 한번 경험할거고 우리는 자주 겪어요. 쬐그만 차이죠. 큰 차이일 수도 있고. 어쩌면 당신들은 지옥을 한번 다녀온 것일 테고 우리는 그걸 드나드는 걸지도 모르죠. 지옥을 드나든다고 해서 다 악마는 아니겠죠. 만약 그런 거라면 너무 쉽지 않아요? 어느 연극에선가 착한 사람들이 가는 지옥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유진 오닐이었나,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아무튼 그런 게 있을 것 같아요? 착한 사람들을 위한 지옥. 만약 당신과 나 둘 중 한명이 거길 가야 한다면 누가 될까요. 아, 제 앞에선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겁먹을 것 없어요, 저는 의사예요. 여기에서도 침착하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사람들이 제일 안타깝더라고요. 나도 잘 몰랐지만.
나는요, 지옥에서 천국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의사라고 생각했어요. 어릴 때 형이 아주 크게 다쳤는데—어떤 놈들의 차에 치였어요. 갈비뼈가 부러지고 턱뼈가 나가서 큰 수술을 했죠. 치아도 망가졌고. 응급실로 달려갔죠. 나는 형이 꼼짝없이 죽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내가 죽기라도 하는 것처럼 울었어요. 그런데 백발인 의사 선생님이 나를 붙잡고 말하더군요. 형은 괜찮을 거라고, 자기가 그렇게 해주겠다고. 그러곤 머리를 쓰다듬으면서—꼬마야 여기가 지옥처럼 느껴지겠지, 사실 맞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천국을 다시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란다, 말했어요. 나는 그 말을 계속 생각했죠. 아주 마음이 편하진 않았지만 꽤 견딜 만해졌으니까. 그게 니체의 말과 좀 비슷한 구석이 있다는 건 아주 나중에 알았어요. ‘언젠가 새로운 천국을 세워본 적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것을 세우기 위한 힘을 그 자신의 지옥에서 발견했다.’ 맞죠? 니체는 인간이 뭔지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죠. 나는, 고통의 얼굴을 마주 보면서 견디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그럴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근데 견고한 착각이었죠. 난 여기서, 누구보다도 나에 대해 가장 많이 알게 된 것 같아요.
어쨌든 간에, 그 의사 선생님이 이어서 말했어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뱉으렴, 그러면서 숫자를 세는 거야. 한번, 두번, 세번, 네번…… 하다보면 마음이 좀 괜찮아질 거다, 나는 힘들 때마다 그렇게 한단다. 그래서 나도 그렇게 했어요. 뭐 뻔한 생각들이었지만—한번, 저 아저씨가 형을 구해줄 거야, 두번, 금방 괜찮아질 거야, 세번, 형은 지금 많이 힘들겠지, 네번, 속이 울렁거려, 다섯번, 그런데 못 구하면 어쩌지, 여섯번, 형을 마지막으로 부른 게 언제였지……, 아, 미안, 미안. 갑자기 웃음이 나와서. 숙녀 앞에서 실례를 했네. 웃음이 왜 이렇게 안 멈추지. 있잖아, 그때 난 뭐가 그렇게 심각했을까? 아니, 심각할 건 맞지. 근데 그땐 어쩜 그렇게 순진했던 거지? 여하튼 난 계속 생각했어요. 스물하나, 언젠가 농담처럼 얘기하게 될 거야, 스물둘, 나중엔 아팠던 것도 잊게 될걸, 스물셋, 나도 천국을 만들어줄 거야, 스물넷, 내가 구해줄 거야……
긴 수술이 끝났고, 사실 그냥 길다고 하기엔 부족한 수술이었고, 다행히 형은 일어났어요. 형이 깨어나서 처음으로 한 말은 ‘배고파’였는데 그 말을 듣자 모든 게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형은 얼굴이 팅팅 부어서 아주 못생겨졌죠. 그때 사진을 더 찍어놨어야 하는데. 붓기가 빠지고 멍이 풀리면서 천천히 내 형으로 돌아오더군요. 부러졌다던 턱과 갈비뼈와 어깨뼈도 이제 다 붙어간다고 했죠. 신기했어요. 도대체 어떻게 한 거지? 몸속에 있는데, 산산조각이 났는데, 그걸 어떻게 붙이는 거야? 장난감 자동차 같은 걸 고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라는 걸 그때도 알았죠. 나는 정말 궁금했어요. 그리고 경이로웠어요. 수많은 뼈들, 수많은 근육들, 살아 숨쉬고 있는 장기들, 그 엄청난 흐름, 균형.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아주 강렬하게. 몸에 대해 모든 걸 다 알고, 그래서 다른 사람의 삶을 바꿀 수도 있는 사람. 누군가를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줄 수 있는 사람.
나는 미친 듯이 궁금해하고 알아갔어요. 알수록 신기했어요. 그리고 대단했죠. 그러다보면 어른들이 아직은 안된다고, 혹은 절대 안된다고 하는 것들도 생겨갔지만. 우리는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르지? 모든 건 사람마다 다른가? 얼마나 다를까? 이건 왜 안되고 저건 왜 되는 거지? 차이는 어디서 오나? 기준은 뭐고 누가 정하는 건가? 어디까지 받아들이고 견뎌야 하는 건가? 모두에게 공통된 인간이란 게 있나? 그런데, 그리고, 그래서…… 이 사람은 얼마나 견딜 수 있나? 다른 사람보다 더 견딜 수 있나? ……그런데 우습지 않아? 내가 이 모든 걸 네가 고해신부라도 되는 양 털어놓고 있다는 게 말이야. 그나저나 이 사중주 정말이지 놀랍지 않아? 좋지? 난 어쩌면, 여기서 뭔가를 찾아낸 걸지도 모르겠어. 이 안에도 천국이 있을지 모르지. 내가 알던 것과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나는 가속도를 느끼고 있었다. 여자의 옷을 벗겼다.
열여덟번의 로베르또 미란다. 기분이 좋다. 오랜만에 취했다. 주저앉아 벽에 등을 기댔다. 스터드는 말했다. 거봐, 좋잖아, 그년도 그랬을 거야. 스터드가 방에서 나갔다. 루이스는 말없이 지나갔다. 그리고 테오가 왔다. 그는 쭈그려 앉아 내게 눈을 맞췄다. 창백한 그가 미소지었다. 나도 옅게 웃어 보였다. 그는 담배를 물었다. 내 입에도 담배를 대주곤 불을 붙였다. 내가 한모금 빨자 그가 뺨을 때렸다. 그러곤 쿡 웃었다. 나도 웃었다. 참으려고 했는데 자꾸 새나왔다. 우리는 터지듯 웃었다. 허탈한 듯 즐거운 듯 이상한 웃음들. 웃음과 연기가 함께 퍼졌다. 그는 내 어깨를 치고 바닥을 치면서 못 참겠다는 듯이 계속 웃어댔다. 그리고 겨우 숨을 고르면서—친구, 괜찮지? 했다. 나는 낄낄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냥 놀이야, 심각할 것 없다니까. 배를 움켜쥐고 나굴다가 떨어진 담배를 짚었다. 얼른 손을 뗐다. 그 꼴을 보고 테오가 더 미친놈처럼 웃어댔다. 핏발 선 목과 일그러진 얼굴로. 덴 손을 들여다보는 동안 턱이 당기고 배가 아파왔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나는 눈을 비볐다.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았다. 우리의 소리가 끝나지 않을 것처럼 방안에서 울렸다.
열아홉번의 로베르또 미란다. 상무는 머리가 센 남자의 사인(死因)을 고질적인 정신질환과 착란에 의한 자살로 해줄 수 있겠느냐고 했다. 나는 사인했다.
스무번의 로베르또 미란다. 그년에게 좀더 해줘, 이 화냥년은 좀더 견딜 수 있어. 그년에게 더 해줘. 확실해, 의사 선생? 이년이 우리 손에서 죽으면 어떡하려고? 이년은 기절할 정도도 안 갔어. 더 해줘, 한 단계 올려.
스물한번의 로베르또 미란다. 모든 게 반복되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스물두번의 로베르또 미란다. 너희는 나를 아마 평생 기억할 거야. 그런데 나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를 거야. 아무것도. 원래 그런 거잖아? 진짜 진짜 진실은 알 수 없지. 그건 각자 다르거나, 서로 알 수 없는 거니까. 알려고 한 적이 있기는 한가. 사실 그건 아주 별로야. 행복을 원한다면 진짜 진짜로부터 가장 멀리 도망쳐야해.
그래도 난 진짜 표정이 뭔지는 알아. 사람들이 가진 단 하나의 표정. 다들 보통 모르잖아? 나는 최선을 다했어. 진심이었어. 그런데 진심도 진실도, 답은 아니었지. 음악, 내가 베푼 친절, 그게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길이라는 걸 난 알고 있었어, 그게 수감자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방법이라는 걸 믿어줘야 해—나 때문에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 남자 중에도 하나 없고, 여자 중에도 없어.
그리고 빠울리나 쌀라스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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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3~4년간 이라크의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에서 미군이 이라크인을 상대로 행한 고문에 관한 증언 기록 참조(http://media.washingtonpost.com/wp-srv/world/iraq/abughraib/151362.pdf).
2) 사데크 헤다야트 『눈먼 부엉이』(배수아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3)에서 인용.
소설 | 심사평
젊은 언어감성으로 무장한 패기 넘치는 신인작가들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대산대학문학상 심사의 자리는 늘 설렌다. 상상력의 지평에서 동시대 한국문학과 치열하게 교통하고, 사회와의 긴장을 지치지 않고 유지하며, 그리하여 우리 문학의 우듬지에 꽃필 수 있는 예비된 신인을 만나는 심정으로 심사위원들은 응모작들을 읽어나갔다. 올해는 취업, 알바, 생활고 등 다소 어두운 청춘의 기록들이 많았는데 시류적인 글쓰기라기보다 시대상에 대한 정직한 반영으로 읽혔다. 수준작들이 무국적이거나 이국 취향 소재의 작품들이 대세인 점도 최근 경향과 궤를 같이했다.
「브로카와 베르니케」는 종말을 앞두고 풍비박산 난 한 가정을 보여주는 한편의 잘 짜인 부조리극이었다. 기성작가들에게서 익숙하게 목격되는 서사 패턴, 무국적 소설들의 약점으로 지적되는 이른바 내력 없는 인물들이 주는 현실과의 긴장감 없는 설정이 흠으로 남았다.
「2인승 픽업트럭」은 동유럽작가 소설선집의 한편이라고 해도 무방할 유려한 번역소설 같았다. 체르노빌 원전 사태에서 비롯한 피폭 후유증, 내전의 참상과 신(新)나치의 발흥 등 현대사의 민얼굴들을 만날 수 있었으나 이들 인물들을 어느 언어권의 소설에 갖다놓아도 무방할 만큼 새로운 서사랄 게 없었다. 익숙한 설정과 안정된 문장으로 만들어진 기성품과 같은 작품이었다.
「멜티드 아이스크림」은 작가가 보여주려 하는 것과 드러난 것이 낭비 없이 적절히 녹아든 감각적인 작품이었다. 고통에 대한 공감력이라는 당대적 주제에 대한 끈질긴 탐색이 빛났는데 사형수의 마지막 식사와 자살자의 마지막 식사가 소재의 특이성으로 나란히 병치되어 있을 뿐 서로 몸을 섞이며 서사가 확산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그 점에서 이 작품은 소재주의 작품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기도 했다.
「돌멩이」는 가난과 무관심 속에 노출된 어린 인물들의 비극을 그린 작품이다. 작은 상징적 장치들, 냉정한 묘사력 등 작가의 섬세한 언어 감수성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어린 인물들의 비극이 실상 미학주의자의 필치에 의해 낭만화되지 않았는지 의심스러웠다. 어린 인물들을 둘러싼 폭력의 세계가 낯익은 방식으로 처리된 점 역시 아쉬움으로 지적되었다. 작가가 자신의 탁월한 언어감각마저 해체하고 삶의 이면과 본질에 더욱 육박하는 힘을 길러낸다면 좋은 작가로 성장할 수 있으리라 기대되었다.
당선작 「스물세번의 로베르또 미란다」는 아리엘 도르프만의 희곡 「죽음과 소녀」를 패러디한 일종의 메타소설이다. 소설은 고문실을 무대로 펼쳐진다. 작가는 고문실의 피해자인 빠울리나뿐 아니라 가해자인 로베르또마저 ‘사건 전’인 고문실로 데려가 원작의 근원, 혹은 트라우마의 현장을 복원하려는 욕망을 드러낸다. 고문실의 의사로 가해자 입장에서 선 로베르또를 화자로 내세워 나약한 지식인이 공범자가 되는 과정을 섬세하게 포착해낸 점도 인상적일 뿐 아니라 ‘죽음이 차라리 안식일지 모른다’는 원작의 실존적인 주제를 좀더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심화하고 있다. 이처럼 소설은 원작의 주제를 계승하면서도 다양한 인물들이 폭력과 죽음, 무기력에 노출된 모습들을 한층 직접적이고 다양하게 보여줌으로써 다시쓰기의 자의식을 선취하고 있다. 인물들의 대화가 ‘사건 이후’로 열리는 지점들이 주는 통증도 선뜩할 뿐 아니라, 우리의 현실적 인식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힘도 강력했다. 이 작가의 젊은 비판의식과 이지적이고 섬세한 필력을 높이 평가했다. 우리는 긴 논의 없이 이 작가의 작품에 신뢰를 보냈다. 당선을 축하하며 작가의 활약을 열렬히 응원한다.
강영숙 김종광 전성태
소설 | 당선소감
어쩌다 지금이 된 걸까. 나는, 너는, 우리는. 가끔 궁금했다. 사실 ‘가끔’과 ‘자꾸’ 사이 어디쯤일 것이다. 다만 궁금했고 들여다보고 싶었다.
2014년 늦은 가을에 한 연극을 만났다. 그 안에 빠울리나와 헤라르도와 로베르또가 살아 있었다. 그들의 숨소리를 따라가는 동안, 우리가 잊은 흔적을 들추어내거나 어딘가에 새롭게 새기는 것 같았고, 그사이 무언가 진짜가 잠시 옆얼굴을 보여준 것 같았다. 착각이었겠지만 그렇게 느꼈다. 어쩌다 지금이 되었을까—빠울리나는, 헤라르도는, 그리고 로베르또는. 그 이름들을 웅얼거리기 위해 낡게 가라앉은 골목을 괜히 걸었다.
이 소설은 연극 「죽음과 소녀」가 아니었다면 없었을 것이다. 혹은 지금과 아주 다른 표정의 글이 되었을 것이다. 연극 역시 아리엘 도르프만의 희곡이 아니었다면 그랬을 거고, 희곡은 슈베르트의 사중주에, 사중주는 다시 가곡에……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아득했다. 그리고 그 연쇄가 나를 만든 것과 비슷한 방식일 거라고 여겨졌다. 곁에 있는 이들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지금의 나와 많이 달랐을 것이다. 정말이지 나는 여러 의미로, 수많은 당신들로 이루어져 있다. 당신들로 인해 글을 쓰게 되었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같이 밥과 술과 차를 나누었던 얼굴들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우선 엄마와 아빠와 언니와 고양이 두 녀석. 당연히 제일 먼저 이야기하고 싶었다. 무병장수하시옵소서. 24년차 죽마고우이기도 한 언니에게는 특별히, 내 모든 초고를 읽어야 할 숙명에 대해 심심한 애도를 표한다. 그리고 서울예대 문창과 11학번 동기들, 올해를 같이 보낸 학사학위과정 동기들. 애정이 많다. 엉망진창인 나의 글과 그보다 훨씬 엉망진창인 나를 잘 견뎌줘서 고맙다. 우리 모두 각자의 빛으로 깊어질 거라고 믿는다. 합정동에서 열여덟 열아홉부터 같이 글을 썼던 친구들도. 지금까지 서로의 글을 함께 볼 수 있어서 때로 신기하다. 그리고 자주 고맙다. 그 친구들 곁에서 지켜봐주신 유용선 선생님께도 많이 감사하다.
4년 동안 학교에서 정말 소중한 부분들을 배웠다. 교수님 한분 한분께 감사하다. 특히 2년 동안 지도해주신 한강 교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고 싶다. 귀한 가르침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글을 쓰는 마음에 대해서 정말이지 많이 배웠다. 늘 중심점이 되어주셔서 감사하다. 많고도 따뜻한 응원을 해주셨던 이병률 선배님과, 부족한 글에서 가능성을 찾고 격려해주신 대산대학문학상 심사위원분들께도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나는 너무 부족한데도 많은 응원과 축하를 받았다. 그 이름을 모두 말하지는 못해도 진심으로 고맙다. 고마운 이름들이 곁에 좀더 오래 머물러준다면 좋겠다. 그리고 나는, 매혹적인 허구의 세계에서 앞으로도 감탄하고 부러워하고 참담해하고 행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리라고 믿을 거다. 좋은 글을 쓰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부지런히, 애쓰겠다.
박소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