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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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박서혜 사진_fmt

박서혜 朴書慧

인하대 경제학과 2학년. 1991년생.

stella_oo@naver.com

 

 

 

대안가정 생태보고서

인물과 무대에 대하여

 

이 텍스트는 6-3-2-14등분 되어 있다.

등장하는 인물은 A, B, C, D, E, F다.

A, B, C는 여자배우가, D, E, F는 남자배우가 할 것을 권장한다.

필요한 배우의 숫자는 최소 여섯명이다.

 

6에서는 A, B, C, D, E, F가 모두 등장한다. A는 어머니, B는 할머니, C는 딸, D는 할아버지, E는 고모부, F는 아버지의 역할을 수행한다.

3에서는 A, B, D가 등장한다. 3은 재혼가정이다. A는 재혼가정의 새어머니, B는 딸, D는 친아버지다.

2에서는 CE가 등장한다.

1에서는 F가 등장한다.

6-3-2-1은 세대나 혈연으로 구성된 총체적 가계도로 볼 수도 있고 별개의 집안으로 볼 수도 있다. 다만 6-3-2-1은 시간적 흐름에 따라 배열되어 있다.

 

연출이 무대를 어떤 양식으로 다루건 이 텍스트는 크게 제약을 받지 않는다. 단 장면이 바뀔 때마다 여섯명, 세명, 두명, 한명이 각각 거주하는 집안의 거실이 배경임을 주목해주길 바란다. 조명의 움직임에 따라 무대가 축소되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과 일부 소품을 활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일부 적어두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텍스트에 대한 연출의 접근 양식일 것이다. 이 텍스트가 세계를 총체적으로 그렸다면 사실주의에 입각하여 무대를 만들어내면 될 것이고, 리얼리즘의 재현에 실패했다면 마술적 상상력을 행간마다 발현해도 무방하다.

 

맞지 않는 것은 과감히 삭제하고, 필요한 것은 차곡차곡 채워주길 부탁한다.

어쨌든 저자는 이것이 전적으로 현실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6-프롤로그

 

무대 중앙으로 핀 조명이 들어온다. 얼굴을 볼 수 있을 만큼 약간 밝아지면 A, B, D, F가 가족사진을 찍기 위한 대열로 모여 있다. A는 아기로 보이는 포대기를 안고 있다. E는 네사람 앞에 카메라를 들고 있다.

 

E 사진 찍겠습니다. 스마일, 김치, 치이즈. 자, 우리 화목한 가족 여러분. 아, 웃으세요. 오늘은 좋은 날이잖아요.

 

B (작은 소리로, 하지만 들으라는 듯) 좋은 날은 무신 좋은 날. 고추도 안 달린 년 돌잔치가 으데 좋다고.

D 이 사람아.

 

A, 표정 안 좋아지며 무리로부터 살짝 떨어진다. 굳어지는 F.

 

E (A에게) 아이, 아주머님 좀 붙으세요. 형님두요. 누가 보면 가족 아닌 줄 알겠어요. 웃으세요. 웃으시라니까요? 좋은 날이잖아요. 좋은 날이니까 무조건 웃어야죠. 자, 따라해보세요. 하하하!

 

잠시의 정적.

 

E (과장되게) 하, 하, 하!

 

다들 어색하게 하, 하, 하 하고 웃는다.

 

E 자, 찍겠습니다. 하나 셋!

 

셔터 터진다.

 

암전.

 

 

6-1

 

무대 밝아지면, 여섯명이 살고 있는 집의 거실이다.

거실 한쪽 벽면에는 앞에서 찍은 것으로 보이는 커다란 가족사진이 걸려있다.

무대 하수 쪽에는 주방이, 상수 쪽으로는 집으로 들어서는 현관이 있다.

무대 가운데에는 여섯사람 정도가 앉아서 먹을 수 있는 앉은뱅이 밥상이 놓여 있다.

밥 짓는 냄새가 난다.

 

A는 상을 닦고 그릇을 나른다. 외출복 차림의 A는 앞치마를 매고 있다.

신문을 든 D, 등장한다. 몸이 불편한 듯 어기적하게 걷는 D는 눈을 잔뜩 찌푸리고 있다.

 

D 에미야.

A 네, 아버님. 일어나셨어요?

D 돋보기 못 봤냐.

A 아까 어머님이 쓰시던데요.

D 돋보기 못 봤냐니까.

A 주방에서 어머님이 쓰고 계세요.

D 아, 돋보기 못 봤냐니까!

 

A, 다가가서 D의 귀에 대고 크게 말한다.

 

A 돋보기 못 봤어요. 아버님.

D 그래? 못 봤어? 그게 발이 달렸나 어디로 갔단 말이냐.

A 아버님.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D 뭐라고? 돋보기에 발이 달렸다고?

 

A, 떨어져서 D를 가만히 본다.

 

D 돋보기 어디 있냐? 돋보기!

A 어머님한테 여쭤보세요. 주방에 계세요.

D 그래? 이봐, 할멈!

 

D는 주방 쪽으로 들어간다.

A,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안에서 그릇을 나르기 시작한다.

반찬거리가 상 위에 하나씩 놓인다.

초인종 소리 들리면 A, 무대 상수 쪽으로 걸어간다. 양복 차림의 E, 들어온다.

 

A 일찍 오셨네요, 고모부.

E 네. 요즘 통 잠을 못 자네요. 뭐 그만큼 번다는 거죠. 오늘 아침은 토란국인가요?

 

E는 한쪽에 놓인 신문을 펼쳐 읽기 시작한다.

 

A 네, 친정에서 잔뜩 보내셨어요. (웃음) 지현이는 콩쿨 잘하고 있대요?

E 글쎄요. 회사 가서 메일 확인해봐야죠. 오늘 아침은 토란국인가요?

A 네, 토란국이요. 지현이가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하지 않았었나요, 아빠 보고 싶다고.

E 것두 하루이틀이죠. 요즘은 서로 바쁘기도 하고시차도 다르고. 근데 오늘도 토란국인 거죠, 아주머니?

A 네, 오늘 아침 메뉴는 토란국이에요, 고모부. 밥 뜸들이고 있어요. 조금 기다리세요.

E 네. (신문 넘기며) 지겨운데.

A 친정에서 잔뜩 보내셔서요.

E (혼잣말로) 토란국 지겨운데.

A 고모부?

E 아주머니, 토란국 말고는 딴거 없어요?

A 네. 오늘은 토란국뿐이에요. 근데 고모부,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는데.

E (신문 넘기며) 참 저, 아주머니. 부탁 하나만 드릴게요, 형님내외 사는 처가에서 아침 얻어먹는 처지인 기러기 아빠에게, 따뜻한 밥 차려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긴 한데요내일은 토란국 말고 다른 것 좀. 전 그 감자도 아니고 무도 아닌 그표현할 수 없는 말캉말캉한 게 영 거슬리더라구요.

A 네……

E (A를 보며) 뭐랄까, 영 애매하잖아요.

D (안에서) 이서방 왔나?

E 예, 장인어른 신문 가져다드릴까요?

D 이리 와서 돋보기 좀 찾아줘. 돋보기가 없어!

E 예? 예. (A에게) 아주머니, 부탁드릴게요. 토란국 말구 다른 걸로요.

A 고모부, 냉동실에 콩나물국 얼려둔 거 있는데. 그거라도……

E 아주머니, 제가 아무리 그래도 세전 700 중산층인데

D (안에서) 이서방! 돋보기가 없어!

E (대고) 예, 갑니다.

 

E, 안쪽으로 들어가면 조금 더 굳어진 얼굴의 A는 상을 마저 차린다.

교복 차림의 C, 방에서 나온다.

 

C 엄마, 실내화!

A 그거 빨았는데.

C 빨지 말랬잖아. 오늘만 신으면 고등학교 가니까 새로 살 거라고.

A 멀쩡한 걸 왜 버려.

C 버릴 건데. 갈아 신기도 귀찮고 쓰레빠 살 거야. 고딩은 쓰레빠 신어도 된대. 학교에서 오래 있잖아.

A 버릴 때 버리더라도 졸업식 날인데 깨끗하게 신어야 할 거 아냐.

C 누가 본다고. 할아버지 뒤치다꺼리한다고 오지도 않을 거잖아.

 

A, 일어선다.

 

A 실내화 지금 말리고 있어. 조금만 기다려— 금방 마를 거야.

 

천둥소리가 난다.

 

C 이 날씨에? 어딨어?

A 베란다. 조금만 기다려. 밥 금방 차리고, 엄마가 챙겨줄게.

C 됐어.

A 근데 지은아, 엄마가 할 말 있는데.

C 나중에 해. (가려다가) 오늘이야?

A 응, 짐 부치고 학교로 갈게. 너네 반으로 가면 되는 거지?

C 굳이 노력 안해도 되는데. 그런 거 지루하기만 하고. 알잖아.

A 그래도 가야지. 엄만데.

C 맘대로 해. 근데 몇반인지 알아?

A 3반.

C3학년 2반이야, 2학년 때 3반이었고.

C 나가면 F, 넥타이 매며 나온다. AF가 나오는 걸 봤지만 굳이 내색하지 않는다.

그런 A를 가만히 보는 F.

 

F 당신 예쁘네, 오늘.

A 고마워.

F 꼭 오늘 해야겠어?

A 당신도 예쁘다는 말을 오늘에서야 해야겠어?

F 당신도 참.

 

F는 굳은 얼굴로 상수 쪽으로 향한다.

 

A 밥 먹고 가.

F 됐어.

A 오늘까지 어머님 잔소리 들어야겠니너는 서방도 자식도 둘도 셋도 아니고 각각 하나씩인 단촐한 애가, 밥도 안 챙겨 먹이고 생각이 있는 애니 없는 애니하고

F ………

A 배려 좀 해주지. 앞으로 할 일 없을 거 아냐.

F 넌 했냐? 배려.

 

A, F를 노려본다. B, 나오며

 

B (A에게) 넌 남편 못 잡아먹어서 안달난 귀신이라도 붙었냐? 그리고 넌 밖에서 일도 안하는 애가 아침 댓바람부터 뭘 그렇게 차려입었냐?

A 어머님,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B 밥 먹고 해라. (안쪽에 대고) 이서방, 나와서 밥 먹게. 여보, 빨리 나와요.

D (안에서, 힘주는 소리로) 아, 끊고 나갈 순 없잖아!

B (인상 찌푸리며, A에게) 가서 밥 퍼와라.

 

E, C 각각 다른 방향에서 나온다.

 

C (E에게) 고모부 또 왔어? 여기가 무슨 고모부 하숙집이야? 밥때 되면 꼭 오더라.

B (C의 등짝을 때리며) 밥은 니가 하냐, 니가 해?

C 아 진짜, 할머니. 아파요!

 

EC는 상 앞에 나란히 앉는다. C는 영어 단어장 같은 것을 펼친다.

 

B (서 있는 F에게) 뭐하고 서 있니, 넌.

 

F는 우물쭈물 앉는다. 돋보기를 쓰고 있는 D, 영 개운치 못하다는 표정으로 들어와서 신문을 한쪽에 던져놓고 앉는다. B는 주방 쪽으로 들어간다.

밥과 국을 나르는 A.

 

E 지은이 너 오늘 졸업식이지? 배치고사는 잘 봤냐?

C 100점. 3월에 입학할 때 전교생 앞에서 선서를 하지. 대단하지?

E 학군 안 좋은데서 1등 하는 건 당연하지. 잘난 척은 금물이다.

C 그러는 우리 잘난 고모부 딸은?

E 지현 언니는.

C 지현 언니는?

E 거긴 점수를 공개 안해.

C 좋겠다. 나도 부자 아빠 있었음 유럽 가서 공부하고 있었을 텐데.

 

F는 그런 C를 흘끔 본다, 그걸 보고 헛기침을 하는 E.

 

C 나 고모부 딸 하면 안 돼?

B (주방에서 나오며) 망할 년. 멀쩡하게 살아 있는 지 애비 에미 놓고 못하는 소리가 없어. 니 부모 관에다가 집어넣고 하든가. 그리고 니는 지지배가 공부 잘하는 기 뭐 좋다고, 밥상머리에서 그러고 있냐? (앉는다)

C 할머니도 고모부가 아빠보다 훨씬 돈 잘 번다고 2학년 되면 무조건 이과 가라고 엊그제

D (엄하게) 지은아.

C 네?

 

사이.

 

D 니 내 돋보기 못 봤냐. 눈이 침침해서……

C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지금 쓰고 계시잖아요.

D 으잉?

 

CF의 시선이 마주친다. 그 사이로.

 

B (밥 먹으며) 느그 아빠 탓하지 말고 느그 엄마 탓해라. 지현이야 지 에미 닮아 악기 잘하니까 따라서 외국 간 기고.

D 지은이 에미가 외국 간다고?

C 닮긴 뭘 닮아. 수저 잘 물고 태어난 거지.

D 뭐라고?

C 토란국 맛있다구요, 할아버지. 많이 드세요.

E 넌 이게 맛있냐, 애매한 게, 감자도 아니고 무도 아닌데.

C 반찬 투정할 거면 오지 마. 애도 아니고 주는 대로 먹지. 스팸 구워서 햇반 돌려 먹는 게 그렇게 어려워?

B 시끄럽다.

 

A, 밥그릇 들고 나오는데 앉을 자리가 없다.

그대로 다시 퇴장하는 A.

 

C 엄만 밥 안 먹어?

A (안에서) 됐어.

C 나갈 거면 먹고 가지.

E (F에게) 형님, 이번에 저희 회사에 경력직 자리가 하나 나왔는데, 꽤 괜찮은 조건이에요— 어떠세요?

F 자넨 IT 벤처잖아. 나는 출판사 다니고.

C 그래, 아빤 문과고 고모분 이과잖아. 태생부터가 다르지.

B 닌 빨리 밥 먹고 학교 가라. 니 그러다 지각한다.

E IT 벤처래도 꼭 전공자만 있어야 하는 건 아니에요, 형님. 영업직인데, 외근이 잦긴 하지만 그래도 보수도 괜찮고.

C 얼만데?

E 세전 월 400 정도?

B 밥 먹어라, 밥. 학교 안 가나?

C 와, 아빠 월급 두배다. 아빠 이직해. 요즘 누가 종이책 읽어. 그리고 몇년 안에 핸드폰으로 책도 읽을 수 있을 거래. 글루 옮긴 담에 나도 유학 보내주면 안돼?

B 하이구, 그거 벌어도 니 유학 못 간다.

C 왜요? 할머니.

B 지지배가 무슨 유학. 그리고 니 유학 가면 니가 밥을 해먹을 거냐, 아니면 빨래를 할 거냐. 지 양말 한짝도 못 빨아 신는 게. 니도 지현이맨키로 엄마 달고 갈라고?

C 엄마 안 보내줄 거 아는데요. 혼자 갈 수 있어요.

B 하이구, 무슨.

C 할머니, 저도 악기 하잖아요. 악기 하는 사람한테 유학은 필수래요. 내신 잘 받아서 좋은 대학 가도 나중에 유학 다녀와야 돼요.

B 기집애가 시집 잘 가서 피아노 학원 차리면 됐지.

C 저 시집 안 갈 거거든요. 할머니 같은 딸 낳기도 싫고, 할머니처럼 며느리하고 딸 차별하는 시엄마랑 살기 싫어서. 그리고 피아노 학원도 안 차려요.

D (숟가락 탁 내려놓는다)

 

정적.

 

D 돋보기 못 봤냐.

B 당신이 쓰고 있잖아요. (F에게) 생각해봐라, 나쁜 조건도 아닌 것 같은데.

D (찡그리며 혼잣말로) 그런데 왜케 안 뵈여.

F (B에게) 저는 출판사가 좋습니다. (C에게) 그리고 유학은 차차 생각해보자.

A (나오며) 저 아버님, 어머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B (그릇 내밀며) 시끄럽고 국 더 가져온나.

 

A, B가 내민 국그릇 들고 들어간다.

 

E 형님, 이게 나쁜 조건도 아니고. 몇년 더 경력 쌓으면 내근 위주로 일하실 겁니다.

F 경력직으로 들어가는데 경력을 쌓으라고……?

E 아시면서 그러십니다. 형님 책도 많이 읽으셔서 아는 것도 많으실 텐데, 영업 나가면 아주 청산유수 아니시겠어요? 그러지 말고 저녁때 소주 한잔 어떠세요. 언제나 그랬듯 능력 있는 제가 사겠습니다.

F 생각은 해볼게.

B 생각은 무신 생각. 니는 도대체 언제 철들래, 잉? 니는 잘나가는 동생 내외 보기 부끄럽지도 않냐.

D 아, 돋보기 못 봤냐고!!

 

B, D가 쓰고 있는 돋보기를 빼서 D의 손에 꼭 쥐여준다. D는 잔뜩 인상을 쓰고 그것을 요리조리 확인한다.

 

B 사람이, 지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어찌 사나. 으잉?

 

A, 들어와 B 앞에 국 내려놓는다.

 

C 엄마, 밥 안 먹어?

A 나중에 먹을게. 어머니,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F 여보.

B 상 치우고 사내들 출근하고 해라. 니는 아침부터 시끄럽게 와 자꾸?

A 저희 이혼합니다.

D (돋보기 들고 환하게 웃으며) 찾았네!

B 이혼?

E 아주머니?

 

C, 새삼 놀랍지 않다는 듯 국 후루룩 마신다.

 

A 지은이한테는 미안하지만.

C 괜찮아.

A 친권은 제가 갖기로 했고……

D (쓰며) 내 게 맞는 것 같은데, 어째 허깨비 같아 잘 안 뵈인다.

A 양육권은 애 아빠가 갖기로 했습니다. 양육비는 월 30씩 보내기로 했구요. 뭐 이건 일단 구두로 합의해놓은 거고, 법원 가서 확정을 짓기로 했습니다.

C 엄만 서울 외가로 간다고 하는데 저는 굳이 이사하고 싶지 않아서요. 여기 있어야 내신 잘 나오거든요. (일어난다) 잘 먹었습니다. (들어간다)

A 그래서 오늘 떠난다고. 버스 정류장까진 멀고가지고 갈 짐은 많고, 살림하느라 운전면허도 못 따서콜택시 불렀고시간이 다 되었다고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계속 안 들으셔서요. 갑작스럽게 전하게 된 것 같아 죄송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쉽게 내린 결정은 아니었어요. 가정을 깬다는 게 하루아침에 내릴 수 있는 결론이 아니잖아요.

 

B, 부들부들 떨며 숟가락을 탁, 내려놓는다.

 

A 왠지 어머님이 지금 벌떡 일어나셔서 제 뺨을 때리실 것 같지만 너무 뻔해 보이니까 안하셨음 좋겠습니다. 우리 지금 연극하고 있는 거 아니잖아요. 그런 행동은 정말이지 유쾌하지가 않습니다. 어머님 맘에 꼭 드는 다른 여자가 며느리로 들어왔어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그리고 아버님, 앞으로 새 며느리 맞으시면 똥 누고 물 꼭 내리신 다음에 화장실 문 열어놓고 나가셨음 좋겠어요. 냄새가 그렇게 좋진 않거든요. 피 한방울 안 섞인 사이에 그런 냄새를 강요하는 건 폭력 아닌가요? 아무리 치매기가 있으셔도, 물 내릴 힘도 없으신 건 아니잖아요.

E (믿기지 않는다는 듯) 아주머니.

A 고모부. 토란국은 올해 들어 처음 끓였어요.

 

E는 숟가락을 밥그릇에 힘없이 툭, 떨군다.

 

A (F에게) 그리고, 당신은

F ………

A 됐다, 무슨 말을 더 할까.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가방 멘 C, 나와서 받는다.

 

C 콜택시 왔다는데. 엄마, 나 그거 같이 타고 가도 돼? 학교 근처에서 내려줘.

A 그래.

 

A, 방안에 들어간다. 외투를 입고 캐리어와 짐가방 챙겨들고 빠르게 나온다.

A 안녕히 계세요.

 

A, 떠난다.

 

C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따라 나간다)

 

E (쭈뼛쭈뼛 일어나며) 저도 출근시간이 다 돼서요저녁에 찾아뵙겠습니다. 아, 오늘 야근이…… 아니죠. 이런 일이라면 찾아와야지요. 가족이니까요. 하하하. 웃으세요, 좋은 날이잖아요. 좋은 날…… 가보겠습니다.

 

E, 나간다. B, D, F만 남았다.

한숨을 길게 내쉬며 일어나는 D.

 

D 할멈, 돋보기 하나 새로 사줘. 잘 안 뵈여.

B 일주일 전에 산 거잖아요.

 

D는 대답 없이 터덜터덜 안쪽으로 들어간다.

 

B 으여 먹어라. 출근하려면.

F 네.

B 국 더 주까.

F 아뇨. 괜찮습니다.

B 더 묵어, 팍팍 좀 묵어.

B, 국그릇을 들고 안으로 들어간다

D (안에서) 돋보기 어딨어! 안 보인다고.

B (안에서) 아, 당신이 쓰고 있잖아요!

 

F, 밥을 꾸역꾸역 먹는다. 그러다가 더이상은 못 먹겠는지 수저를 탁 하고 내려놓는다.

한숨을 길게 내쉰다. 잠시 후 그의 시선이 벽면에 걸린 가족사진을 향한다.

천천히 일어선다. 그것을 떼어내고 물끄러미 본다.

 

암전.

 

 

3

 

밝아지면 세사람이 사는 집의 거실이다.

밥 짓는 냄새가 난다.

 

6에서와 달리 싱크대가 조금 나와 있다든가 해서 주방이 약간 보일 수 있는 구조다.

무대 중앙에는 앞 장면보다 작은 크기의, 네사람 정도가 앉을 수 있는 앉은뱅이 밥상이 있다.

 

교복 차림의 B는 앞치마를 두르고 있다. 문득문득 휴대폰 진동소리가 울린다.

듣지 못하고 요리에 집중하고 있는 B, 칼질이 영 서툴다.

무를 자르다가 아야, 하고 손가락을 문다.

다치는 건 으레 있는 일이라는 듯 쪽쪽 빨고 다시 칼질을 한다.

띵동, 하고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B 누구세요?

 

B는 손을 대충 닦고 나간다.

A, 캐리어를 끌고 들어온다. (A6에서와 다른 차림이고, 다른 캐리어를 가지고 온다.)

BA를 향해 두 손을 공손히 모아 허리를 숙여 꾸벅, 인사한다.

 

B 처음 뵙겠습니다.

 

낯선지 우물쭈물하던 A, 역시 꾸벅 인사한다.

 

A 만나서 영광입니다.

 

B는 주방 쪽으로 가서 마저 요리하며

 

B 편하게 앉아 계세요. 아빠 곧 오실 거예요.

A 네.

 

어색한 침묵 속에서 B는 다른 야채를 썰기 시작한다.

A는 캐리어를 한쪽에 세워두고 주변을 천천히 둘러본다.

 

B 부치신 짐은 안방에 넣어뒀어요.

A 안방에?

B 그럼 제 방에 넣을까요? 제 것도 아닌데.

A ………

B 벌써부터 각방 쓰실 것도 아니잖아요. 어차피 방은 두갠데, 제가 아빠랑 잘 수도 없고.

다시 침묵. B는 써는 것에 집중한다. 썬 무조각을 국통에 넣고 끓인다.

 

A (조심스럽게) 도와줄까요?

B 저희 할머니가 주방엔 아무나 들이는 게 아니랬어요.

A ……유정이라고 했죠?

B 네, 한유정. 아줌마는……

A 강미영.

B 네, 강미영 아줌마.

A 저번에 통화할 때도 부탁했지만, 엄마라고 불러줬으면 좋겠어요. 좀 그러면…… 새엄마라고 불러도 좋고. (눈치 살피며) 시간이 조금…… 아니 어쩌면 많이 필요하겠지만……

B 아줌마도 지금 저한테 말 못 놓고 있잖아요.

A 그건……

B 어색해서.

A 맞아요, 어색해요.

B 까요.

A ………

 

B, 뭇국의 간을 맞추며

 

B 제가 여러가지로 찾아보긴 했는데요. 애한테는 엄마라는 존재가 굉장히 절대적인 존재고, 자아를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한대요. 제3자가 가족 구성원으로 들어온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는 나이라면 왠지 모를 적대감이 형성돼좀 어렵죠. 제가 새엄마라는 걸 막 인터넷에 쳐보고 찾다가 아줌마 수준에 딱 맞춰서 쉽게 설명해드릴 수 있는 예시를 찾았는데요. 아이한테 어머니가 신적인 존재이것도 어렵네요. 그러니까 아줌마가 좋아하는 하느님 아버지요. 어느 날 갑자기 교회에 갔어요. 목사님이 불상 하나를 딱 가져다놓고, 말씀하시네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부터 이분이 하느님입니다.’

A ………

B 다시 말해, 미쳐버릴 상황이라는 거죠. 더 짜증나는 건 목사님은 입맛대로 바꿀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거고.

A 그런데 왜 허락했어요? 나랑 그 사람하고 얘기했던 것 같은데. 유정 학생이 좋지 않다면, 집에 들어오지 않기로.

 

B는 다시 재료를 썰기 시작한다.

 

B 음. 일단 전 외고에 붙었고 기숙사에 들어갈 거예요. 그럼 우리 아빠 밥해줄 사람은 필요하겠단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학부모총회에 매번 아무도 안 오는 건 힘들어요. 고등학교 가면 선생님한테 눈도장 잘 찍어야 한대요. 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쓰는 게 평생 가니까. 그리고 한부모가정이면 그렇게 된 사유를 ‘안타깝게도 어릴 때 엄마가 실종되었습니다’라고 해야 하는데. 재혼가정이면 뭐 구구절절 묻지도 않을 것 같구요. 굳이 한창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야, 니네 아빠는 불륜남이야’라고 규정하는 선생은 없으니까요. 바람직하지 못하잖아요. 간통죄 폐지된 지가 언젠데.

A ………

B 뭐, 저는 아빠의 삶은 아빠의 삶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첨엔 새엄마가 온다길래 아빠가 어디서 베트남 여자라도 데려왔나 싶었는데, 멀쩡한 한국 사람이라 차라리 나은 것도 같았고 아빠가 능력있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하지만 아줌마를 엄마로 부르는 건 좀 많이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아줌마 나랑 열살 차이밖에 안 나 악.

 

B, 또 베인 것 같다. AB에게 달려가 손을 잡는다.

 

A 괜찮아?

B 이거 놔요.

A 피나잖아.

 

A, 손수건 꺼내서 B의 손을 지혈해준다.

 

A 손 다 튼 거 봐. 내려놓고 가서 앉아 있어. 내가 마무리할게.

B 놔요.

A 말 들어.

B 놓으라고요.

 

도어락 여는 소리와 함께 D, 들어온다.

 

D 당신 벌써 왔어?

A 네.

D (B 눈치 살피며) 같이 오자니깐.

A 밖이 많이 추워서요.

D 냄새 좋네. 당신이 한 거야?

A 당신 딸 유정이가요.

D 난 또. (B에게) 넌 인사도 안하냐.

B 오셨어요.

D (캐리어 보며) 안으로 들여놓지 않고 주방부터 들어온 거야?

A 그게……

D (B에게) 한유정. 넌 왜 니 할머니를 쏙 빼닮아서. 새엄마 오자마자 주방으로 부르냐. 니가 시집살이시킬 군번은 아닌 거 알지?

B 뭔 소리래. 팔불출 나셨네. 철 좀 들어라.

D 예, 할마마마.

 

D, 한쪽에 놓인 캐리어 끌고 온다.

 

D 이거 들여놓을게.

A 네.

 

D는 안으로 들어간다.

 

A 미안해, 괜한 오해를 하게 한 것 같은데…… 잘 말해놓을게.

B 우리 부녀 대화하는 방식이 원래 이래요. 신경쓰지 마세요.

A 손은 괜찮니?

B 네.

 

D, 나오며

 

D (A에게) 자자, 당신은 앉아 있어. 오늘은 특별한 날이잖아.

 

A, 앉는다.

 

D 자, 쉐프 등장이요!

B ! 그럼 주방보조는 빠지겠습니다?

D 주방보조. 자네의 수고는 인정하네만 이제부터 상을 펴고 숟가락을 놓지 않겠나? 자네가 이렇게 불규칙적으로 썰어놓은 것들을 다듬으려면다시 해야 할 것 같네 (A에게) 미영아, 유정이 좀 도와줄래?

 

A 네, 그럴게요.

 

AB는 상 위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놓는다.

 

D (국물 떠먹고) 이야, 오늘 간 죽인다. 주방보조.

B MSG 파워! (손으로 뿌리는 동작 하며) 미원을, 요래요래 툭툭. 넣는 거쥬.

 

웃는 BD. A도 따라 웃지만 왠지 어색하다.

 

D 자, 플레이팅!

B , 제가 하겠습니다!

D 그래, 우리 주방보조 미적 감각 좀 볼까.

 

B, 음식을 접시에 예쁘게 담아 내간다. D도 밥을 떠서 상 위에 놓는다. 모두 앉는다.

 

A 우와.

D 어때?

A 유정이 솜씨가 대단하네요. 저보다 나은 것 같아요.

B 팥쥐 엄마는 사절인데요.

A 그게, 앞으로 내가 안하겠다는 게 아니라

 

B, 보면

 

A 조금은 서투르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야.

B (다친 손가락 들어 보이며) 사실 저도 그래요. (웃고) 요리 말고, 다른 것도 서툴러요. 살다보면 상처 입는 건 익숙해질 줄 알았는데

D 얼씨구, 야 중3. 중2병 걸린 소리 할래?

B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워오셨대. 그리고 이제 나 고1이야!

D 아직 졸업도 안한 게. 너 아직 중3이야.

B1이야. 예비 고1. 한국외고 수석합격!

D 그래, 니 똥 굵다.

B 밥 먹는데 드럽게, 진짜.

 

A, BD가 투닥이는 것을 본다. 왠지 낯설다. D는 그런 A를 잠시 보다가,

 

D 미영아, 우리 기념사진 찍을까?

B 뭔 기념사진.

D 첫 끼니를 위한 기념사진?

B 미쳤나봐.

A (B에게) 사진 찍어요. 가족사진.

 

B, 보면

 

A 익숙해지려면. 의식이 필요한 거니까. 오늘, 좋은 날이잖아요.

 

A, 핸드백에서 낡은 카메라 꺼낸다. B, 푸하핫 웃는다.

 

B 아줌마, 그거 뭐예요? 요샌 핸드폰으로도 찍는데…… (휴대폰 꺼낸다) 어? 전화했었네, 아빠. 그리고 010-768…… 이건 누구야.

D (콩 쥐어박으며) 아줌마가 뭐냐, 아줌마가. 그리고 넌 새엄마 번호도 모르냐.

B 아파, 톡으로 하지 뭔 전화야, 새삼.

D 니가 이러니까…… 걱정이 돼, 안돼.

B 아이구, 내가 아줌마 밖에 세워두기라도 할까봐?

D 어우, 이게. 자꾸 아줌마라고 할래?

A 전 괜찮아요.

B 아줌마를 아줌마라고 부르지 뭐라고 불러. 아가씨냐 그럼.

D 따박따박 말대꾸. 얌마.

A 시간이 지나면

B 시간이 지나도 아줌마는 아줌마고 저는 저죠.

 

침묵.

 

A 뭐, 괜찮을 것 같네. 음, 그래도 아줌마보단 언니는 어때?

D 언니 말고 엄니로 해.

B 하…… 진지하게 생각은 해볼게요. 번호는 저장할게요.

D 빨리 찍고 밥 먹자, 식겠다.

A (D에게) 여보가 찍을래요?

D 그래, 여봉.

B 생각한다는 거 취소!

D 자, 하나 둘 셋.

 

셔터 터진다. D, 휴대폰을 확인하더니 B에게 나지막이,

 

D 웃어라. 좋은 날이잖아.

B 네네.

D 자, 하나 둘 셋. 웃어라. 웃어라. 좋은 날이다!

AD. 활짝 웃는다. B, 억지로 웃는다. 환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싫지는 않은 미소다.

다시 셔터 터진다.

 

암전.

 

 

2

 

밝아지면, 원룸의 거실이다.

3에서 나왔던 싱크대는 중앙으로 더 나와 있어도 좋다.

 

거실 한가운데는 두명 정도가 쓸 수 있는 아주 작은 밥상이 있다.

밥상 앞에 C, E가 마주 앉아 서류를 넘기고 있다.

 

C 꼼꼼히 확인해.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기.

E 오케.

 

C, E는 서류를 다 넘기면 상 앞쪽으로 쌓는다.

(2의 장면이 진행될수록 서류뭉치가 높이 쌓여간다)

 

E 그러니까 정리 좀 해보자. 내일 동사무소에 가서 혼인신고를 하고, 전입신고를 하고.

C 컨셉은 부부로 가자는 거지. 너 소득확인증명서 어딨어?

E (밥상 위 서류뭉치에서 찾아 건넨다) 아, 여기.

C 소득확인증명서. 도호영. 0원. 좋아.

E 니 건?

C 잠깐만. (역시 찾아 건넨다) 여기.

E 남단미. 확인 완료. (서류 내려놓는다)

C 앞으로 소득이 생길 가능성에 대한 예측 보고서도 뒤에 있어. 꼼꼼히 읽어봐.

E 아, 잠깐만. (다시 서류 확인한다)

C 니 건?

E 없는데.

C 왜?

E 말해 뭐해. 넌 연극하면서 소득이 생길 것 같냐?

C 뭐, 그건 그래.

E 그래도 혹시 몰라서. (새로운 서류 건넨다) 이건 계약서.

C (받아 읽는다) 이혼할 때는 위자료나 합의금 없이 월세 보증금 100만원에 투자한 각자의 50만원만 가지고 나간다. 월세가 올라 이사를 해야 할 경우, 역시 반씩 투자하며 이후 나갈 때도 마찬가지로콜. 아, 근데 서른 넘으면 어떻게 하지?

E 응?

C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이 미친 짓, 그러니까 우리가 절차상의 결혼은 포기했어도 형식상으로 결혼하려는 건 다 호적에서 우리 이름 파내기 위해서잖아.

E 그렇지.

C 대한민국 호적법상, 부모가 없을 경우 혹은 소득이 있는 만 30세의 성인이거나, 결혼을 한 성인 남녀는 새로운 세대원을 구성할 수 있다는 건데. 우리는 단지 호적 세대원을 구성하기 위해 만났는데, 굳이 만 서른 넘어서까지 같이 살아야 되나 싶은 생각이 든다.

E 음. 근데 같이 살면 밥값이나 월세도 반띵 하니까 좋은 거 아닐까.

C 그거야 맞는 사람들 얘기고. 몇년씩 죽네 사네 하는 연인들도 결혼하면 웬수 된다는데, 너랑 나는 일주일 전에 인터넷으로 만난 사이야. 우리가 같이 산다고 해도 얼마나 안 맞을지 어떻게 알아? 넌 가정을 이루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아냐.

E 우리가 이루려고 하는 게 가정인가? 일종의 공동체 아닐까.

C 공동체?

E 가령 비정규직 예술인들이 생계보조비를 받기 위한…… 자구책?

C 넌 참 말을 어렵게 한다.

E 가정이라고 규정하면 그만큼 기대하는 게 생기잖아. 우리의 관계를 규정할 수 있는 좀 대안적인 말 같은 건 없을까공동체라든지.

C 대안가정은 어때?

E 근데 너랑 내가 진짜 부부는 아니잖아.

C 실제로는 가짜여도, 법적으로는 내일 동사무소 가서 도장 찍으면 서류상으론 진짜야. 어쩌면 그게 더 현실과 가까운 것일 수도 있고. 그리고 가정하고 가족은 다른 거야.

E 같은 개념 아냐?

C 가족은 씨족, 그러니까 혈연관계 중심. 가정보다 좁은 범위지.

E 야, 너 꽤 똑똑하다?

C 나 국문과 졸업했어. 똑똑해.

E 근데 왜 이러고 사냐.

C 낸들 아냐, 취업이 안되는데. 넌 왜 이러고 사냐.

 

침묵.

E는 말없이 종이뭉치를 넘긴다.

C 그러니까 작가한테 생계보조 지원금을 준다길래 신청하려고 했어. 근데 최저생계비 185%인가…… 하는 집이어야 된다는 거야. 옳다구나 했지. 내가 알기론 나는 외동딸에, 우리 엄마 아빠는 비정규직. 아빠는 건설업 망한 뒤로 일 안 나간 지 꽤 됐고, 엄마는 핸드폰 만드는 회사 다녔는데 요새 샤오민지 뭔지 만드는 나라로 물량이 다 넘어갔다나. 회사 망한 담에 엄마가 설거지하러 다니고 뭐 그랬는데. 나야 과외 몇개 뛰었었지, 요즘은 못하지만. 요새 누가 국어 과외를 하냐. 술 먹고 담날 날아다니는 대학생도 아니고. 암튼 대충 머리 굴려보니까 최저생계비 185% 안에는 충분히 들겠더라고. 근데 신청을 하니까, 세상에. 이백오십일만 오천사백이십삼원에서, 정확히 삼만 이천칠백이십칠원이 넘는 거야. 그래서 떨어졌지.

E 안타깝다.

C 이런 생각이 들더라. 아, 안됐어요. ‘당신은 흙수저가 맞습니다. 그런데 흙이 남들보다 좀 덜 묻었네요. 다행히도 굶어죽진 않을 거예요, 다음엔 수저에 흙을 더 묻혀오세요.’

E 너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사용된다고 생각해, 좋은 게 좋은 거지.

C 안 그래도 그렇게 생각해. 그냥 우리 집은 남들보다 벨기에산 돼지고기 정도는 더 구워 먹을 정도는 되는구나 하고. 근데 웃긴 건, 기준치를 넘을 정도로 모자르진 않다는데 왜 우리 가족은 대출이자 갚느라고 발발거리며 살아야 했을까. 근데 넌 이유가 뭐냐?

E 나야 뭐, 엄마가 자꾸 결혼하라고 하니까. 사실 결혼할 생각이 없거든.

C 너 게이야?

E 어?

C 아니든 맞든 크게 상관은 없는데, 맞으면 너한테는 이 가정이 오래오래 형식적으로 존속되는 게 유리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수저 색깔 못지않게 등쌀도 스트레스 아니냐? 그니까 생활비 6:4로 내는 건 어때?

E 너 참 계산적이다.

C 응, 나 계산 잘해.

 

침묵.

 

C 그냥 물어본 거야. 복잡해지는 거 싫어. 돈 더 내라고 안할 테니까 쫄지 마.

E 응.

C (서류 건네며) 아, 이건 앞으로의 근로활동에 대한 협약서. 절대 국세청에 잡힐 만한 정규직은 하면 안돼. 근로계약서 쓰는 알바도 안돼. 그럼 소득분위가 넘어가서 지원이 어렵댄다.

E 하면 안되는 게 아니라, 안 시켜주니까 못하는 거겠지.

C 뭐 그건 그래.

 

사이.

서류 쌓여간다. E, 피곤한 듯 기지개를 켜며

 

E (둘러보며) 근데 방이 생각보다 좁다.

C 뭐 우리 둘 다 잠만 잘 건데 어때. 그래도 구역은 나누는 게 좋겠지.

E 그럴까?

 

E, 밥상 위의 서류들을 이미 쌓여 있는 종이뭉텅이 위로 올려놓고 상을 접는다.

서류뭉치들은 마치 탑처럼 보인다.

그 위에 상 위에 있던 볼펜도 올려놓는 E.

C는 바닥에 분필로 선을 그으며 구역을 나누기 시작한다.

 

C 자, 여기까진 내 구역, (표시하고) 그리고 저기서부턴 니 구역. 화장실이나 주방은 공용이니까. (표시한다) 각자 없는 시간에 각자의 구역에 가는 건 좋은데 개인적인 물건은 만지지 말기 동의하지?

E (서류 맨 위에 메모하듯 적는다) 오케이. 이것도 서류로 만들어놔야겠다.

C 좋은 생각이야. 그리고 신체적 접촉은 금지. 알지?

E 야, 너 같으면 널 만지고 싶겠냐.

C 그런 성희롱적인 발언도, 금지.

E 오케, 미안.

C 괜찮아, 별로 기분 안 나빴어.

E 가구는 더 필요한 거 있나?

C 없을걸. 각자 이불하고 베개만 더 들여놓으면 되지 않을까.

E 참, 빨래는?

C 물세는 월세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참, 근데 세탁기 돌리면 전기세 들잖아.

E 전기 많이 먹지.

C 그럼 같은 날 같이 돌리자. 너 빨래 자주 해?

E 너보단 덜 하지 않을까?

C 얼마나 하는데?

E 일주일에 두번?

C 난 이주일에 한번인데.

E 왜?

C 옷 열네벌. 다 입고 빨아.

E 여자네.

C 그럼 여자지.

E 난 옷이 몇벌 안돼서.

C 복잡하네. 그럼 내 라이프 스타일을 바꿔보든지 아니면 이불이라도 더 빨지 뭐.

E 그래, 그럼.

C 도배는 안해도 되겠지?

E (창가 쪽으로 가며) 근데 방충망에 구멍이 뚫려 있는데 집주인한테 바꿔달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C 안 바꿔줄걸. 저번에 물어봤는데, ‘다이소 가면 방충망 스티커 있으니까 그거 사다 붙여, 학생’ 하더라. 야, 대학가에 월세 놓는 집주인들이 그렇게까지 천사는 아니야.

E 아, 내 박스에 야광테이프 있는데.

C 야광테이프?

E 응, 무대 바닥에 바르는 거야.

C 그럼 밤에 불빛 보고 벌레들 모이지 않을까.

E (웃으며) 그렇게 밝지는 않아.

C 한번 해보고 안되면 이따 다이소라도 가자. 필요한 것도 사고.

E 좋을 대로. (밖 보며) 1층 같은 반지하는 무슨. 햇빛이 반토막인데. 그래도 오늘 날 좋네. 와, 진짜 원룸 많다. 빽빽하다. 하늘이 이 방만큼 좁아.

C 대학가잖아.

E 근데 방이 이렇게 싸? 10020?

C 원래는 20인데 두 사람 사니까 22. 그래도 서울보다는 싸.

E 전에 방 보러 올 때도 느꼈던 건데, 공사하는 데 진짜 많다.

C 매년 저래.

E 여기서 산 적 있어?

C 학부 때. 그땐 이 동네 뜨는 게 소원이었는데, 아직도 못 떠나고 있네.

E 그렇군.

C 몇년 전만 해도 학생들 싹 빠지는 방학 때만 공사했는데 요새는 사시사철이야.

E 야, 난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나면 반드시 건물주로 태어날 거야.

C 좋은 생각이야. 저렇게 건물 공사하면 반년도 안돼서 뚝딱 지어. 너가 건물주로 다시 태어날 때쯤엔 일주일이면 뚝딱 하지 않을까?

E 진짜 빨리 짓네.

C 다 때려부순다기보다는 거의 리모델링 수준이랄까. 근데 방 크기는 여기보다 반만 해지는데, 보증금은 세배, 월세는 두배 정도 올라. 신축 풀옵션 원룸이라서.

E 여기도 거의 풀옵션 아냐?

C 통돌이세탁기와 드럼세탁기의 차이인 것이지.

E 여기도 언젠간.

C 집주인이 그럴 생각이 있었던 것 같긴 한데, 접은 것 같아. 나이도 많이 드셨고, 여기는 다른 신축보다 방이 큰 편이라 잘 빠지기도 하고. 또 월세도 안 밀리니까.

E 월세가 안 밀려?

C 하루만 밀려도 집주인이 닦달이야. 그리고 이런 데는 부모들이 보통 이체시키지.

E 너 많이 밀렸었나보다.

C 가끔? 과외비가 밀리면 월세도 같이 밀리는 거지. 야, 문 닫아. 습기 없애느라 보일러 켜놨어.

E 어, 미안.

 

E는 창문을 닫는다. 휴대폰 벨소리가 울린다. E 받는다.

 

E 배달이 밀린다는데?

C 시킨 지 한시간이나 됐는데, 뭔 소리래. 야, 됐다 그래.

E (전화에 대고) 그럼 취소할게요. 네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끊는다)

C 감사하긴 개뿔.

E 팍팍한 세상이라도 예의는 갖추고 살아야지. 졸업식 날이라 박터진대.

C 그럼 나가서 밥버거나 먹자.

E 오늘 같은 날에 하필 밥버거야? 왠지 꿀꿀이죽 딱딱하게 굳혀서 먹는 것 같아서 싫더라.

C 너 꿀꿀이죽 먹어본 적은 있냐?

E 아니.

C 이 근처에 맛있게 하는 주먹밥집 있어. 아줌마가 맨날 ‘우리 공주 왔어?’ 그러신다. 공주 소리 눈 뜨고 거기서 처음 들어봤어.

E 보기 힘든 따뜻함이네. 화장품 가게 들어갈 때나 공주님, 왕자님 소리 듣지 않냐.

C 너도 가면 ‘우리 왕자 왔어?’ 소리 들을 거야. 주먹밥 뭉치는 시간이라도 따뜻한 남쪽 나라 공주 왕자 코스프레 할 수 있으면 좋은 거지 뭐, 화장품보다 값도 싸고. 참, 근데 물어볼 게 있어.

E 뭔데.

C 넌 왜 진짜 결혼을 거부하는 거야?

E 넌?

C 지금까지 말했던 이유를 조합한다면?

E 난.

C 넌.

E 어렸을 때, 우리 아버지 나 버리고 도망갔어. 난 그러고 싶지 않아.

C 그랬구나.

E 반응 참 쿨하네. 예상은 했지만.

C 너의 일만은 아니야. 버리고 도망가는 것만이 부재의 방식은 아니니까.

E 책임질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 같은 거?

C 연극적으로 말하면 그렇겠네.

E 연극적으로.

C 그럼 확인할 건 다 했으니까 사진 찍자. 가지고 왔지?

E 응? 아, 신분증.

 

C, E는 서로의 신분증을 교환한다.

각자의 신분증에 자신의 휴대폰을 가져다 대고 사진 찍는 CE.

 

휴대폰 셔터가 터진다(혹은 촬영음이 들린다).

 

암전.

 

 

1-프롤로그

 

핀 조명 아래 F. 셀카봉을 들고 있다. 요리조리 각도를 맞추려고 애쓴다.

 

F 자, 사진 찍자. 하나, 둘, 셋.

 

셔터 터진다. 암전.

 

 

1-1

 

밝아지면, 좁은 집의 거실이다. 6B, D의 영정사진 액자가 한쪽에 걸려 있다.

 

F 여긴 우리 집입니다. 저는 55세 최대현입니다. 양친께선 몇년 전에 차례로 돌아가셨고. 전 오래전에 이혼을 했습니다. 이유야 대개 그렇듯 성격차이였지요. 딸이 하나 있었는데 ‘악기를 하는 사람은 유학을 가야 한다’ 해서 외국에 가 있습니다. 가끔 돈 떨어질 때가 될 쯤, 편지를 합니다. 급하면 전화를 하구요.

지금 저는 아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늘그막에 새로 생긴 아들인데요. 새엄마, 새아빠란 말은 있는데 새로 생긴 아들은,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뭐 아이를 낳는 세가지 방법이 있다고 하대요. 자연분만, 제왕절개, 입양. 우리 아들에게 입양이라는 표현은 어째 남사스럽긴 하지만요. 어쨌든 저는 우리 아들을 몇해 전 겨울, 거리에서 ‘입양’했습니다. 부들부들 떨고 있던 작고 하얀 그 녀석은 이제는 다리도 길쭉길쭉하고 늠름한 청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루종일 집에서 저를 기다리지요. 다른 집들도 마찬가지니 남다른 것은 아닙니다.

피는 한방울도 안 섞인 아들이지만, 어떨 땐 자식보다 낫습니다. 사실 피가 섞였다면 딸년처럼 원수가 졌을지도 모릅니다. 등골을 빼먹는 또다른 자식놈이 되었을 수도 있지요. 요즘은 자식한테 얹혀살지 않을 만큼 노후가 보장되어 있으면, 온몸으로 기쁨의 춤을 추는 세상이랍디다이만해도 다행인 겁니다.

저는 설비회사를 다니다 권고사직을 당했고, 현재는 공사장에서 일용직 근로를 하고 있습니다. 보통 공사장에는 해뜰 무렵 나가서 해가 지면 들어옵니다. 저는 더운 여름보다는 겨울이 좋습니다겨울엔 해가 늦게 뜨고 또 빨리 떨어지니까요저는 집 앞에서 만두 한봉지를 사서 집으로 갑니다. 가끔 백선생을 보며 뜨끈뜨끈한 국물을 끓이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건 아주 특별한 날에나 가능한 일입니다. 제사상이라면 모를까, 저를 위한 요리를 직접 해먹는 것은 아무래도 쉽지가 않습니다.

우리 아들은 매일 저쪽 골목에서부터 헐레벌떡 달려나와서는 저를 꼭 안아줍니다. 그러고는 봉지에 대고 코를 킁킁댑니다. 나의 아들은 만두 냄새를 통해, 나를 통해 세상을 봅니다. 나는 저녁으로 사온 만두를 우리 아들과 나눠 먹습니다. 한번은 딸년한테 댄 유학비 때문에 집에 빨간딱지들이 붙은 적도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우리 아들을 보낼 순 없었습니다. 우리 아들은 나한테 남은 유일한 가족이니까요. 내 아들은 내가 없으면 세상을 볼 수 없을 테니까요.

 

사이. 남자는 멍하니 정면을 바라본다. 슬픈 웃음이 천천히 번진다.

 

F 오늘도 우리 아들은 세상을 향해 달려옵니다.

나는 그를 향해 손을 이렇게 흔듭니다. 아들이 웃습니다.

나도 달려갑니다.

그런데 순간 트럭이 달려와.

번쩍하는 불빛과 함께, 꽝 하는 소리가 들린다.

F 목이 왼쪽으로 돌아가서 꺾입니다. 팔다리가, 떨려오고 꿀렁꿀렁한 것이 튀어나와요. 다급하게. 119를. 119를. 여기요!! 여기, 여기

D 선생님 말씀하세요.

F 여기, 여기

D 선생님?

F 우리 아들이 죽어가요!

D 거기가 어디십니까, 선생님.

F 길, 거리, 도로, 차도. 우리 아들이 차에 치여 죽어갑니다. 우리 아들 우리 아들이 죽는다구요!!

D 선생님, 진정하시구요. 그러니까 어느 동네 어느 길—도로명 표지판 보이시죠?

F 죽는다니까요! 우리 뽀삐가요!

D 뽀삐요? 사람인가요?

F 아니요. 우리 집 강아지.

D (혼잣말로) 니미.

F 우리 아들.

D 선생님? 지금 이 지역에 화재가 발생해서 당장 출동하긴 어렵습니다. 112에 신고를 하시면 경찰이

 

F 나는 아무말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피칠갑을 한 녀석이 부들부들 떱니다.

A 어머, 재수없게. (퉤하고 침을 뱉는다)

F 그 망할년의 주둥이를 한대 쳐버리고 싶지만 내 아들이 부들부들 품안에서 떨고 있습니다. 이럴 땐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나는 그것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도로 한복판에서 그러고 있으니 저쪽에서 교통정리를 하고 있던 경찰관들이 달려옵니다.

 

B 아저씨, 저기 마트에 가면 지하에 동물병원이 있어요!

F 나는 뜁니다. 아들을 안고. 달립니다. 지하로, 지하로 달려가는 에스컬레이터 꼭대기에서 경찰이 외칩니다. ‘여러분, 비켜주세요, 잠시만요’ 딸아이뻘 되는 여자애가 축 늘어진 우리 아들을 보더니

 

C (고개를 홱 돌린다) 어머, 세상에

F 나는 울부짖으며 사람들, 사람들 아래로 달려가고 있는 에스컬레이터 위를사람들을 헤집어가며달립니다. 우리 아들 좀 살려주세요! 제발 우리 아들을 살려주세요! 나의 아들이 죽어갑니다! 길을 비켜주세요, 제발! 내 새끼가 죽어간다고!!

 

사이.

 

F 피냄새가, 손에 묻은 저릿한 피냄새가.

내 가족의 피냄새가.

눈에서 생기가 사라집니다.

나는 늑대처럼 울었습니다.

빙글빙글 도는 세상. 마트의 사람들.

가격표를 단 생물들.

열세자리 각기 다른 바코드를 단 인간들이.

구경거리라도 난 듯.

욕과 울음이 섞인 피눈물을.

내뱉는 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시선들을

나는

읽을 수 있습니다.

 

남자의 주변으로 서는 A, B, C, D, E

각자의 소리가 뭉쳐졌다가 흩어진다.

 

사람들 당신, 참 딱한데.

오바하고 있네. 고작 개 한마리 죽은 거 가지고.

아저씨, 참 안되셨네요.

괜찮으세요? 병원에 가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고객님? 심정은 이해합니다만, 여기서 이렇게 소란 피우시면 곤란합니다. 나가주셔야겠어요.

 

F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습니다.

 

소진된 남자는

한가운데에 놓인 술병과 연탄을 말간 얼굴로 한참을 바라본다. 흐흐 하고 웃는다.

햇볕 한줌이 남자의 손에 닿는다.

 

F 날이 좋습니다.

 

연탄 앞으로 다가가 앉는 남자.

라이터를 탁탁, 당긴다.

 

멍한 동공이 천천히 허공을 향한다.

바로 그때.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눈물이 흐른다.

 

막.

 

 

 

희곡 | 심사평

 

이번에 응모된 희곡은 총 67편으로 작년 69편과 비슷했다. 주제는 친구문제에서부터 부모자식 관계, 폭력과 살인이 일어나는 보험이나 범죄 이야기까지 다양했으며, 극의 전개도 흥미로운 점이 많았다. 그러나 다양한 소재에 비해서 정작 질문과 문제의식은 단편적인 인상이었다. 다사다난한 사건들로 어지러운 이 시기에 우리 사회에서 문제가 되었던 사건들이 하나도 언급되지 않은 것은 의아하게 느껴졌다. 대학생 작가로서 현실을 날카롭게 바라보고 깊이있는 문제의식을 갖는다면 더 의미있는 글을 쓸 수 있을 것인데 아쉬웠다.

논의 선상에 오른 희곡은 「대안가정 생태보고서」 「사인, 미상」 「嘶浡(시발)」 「이상적인 사회」 「봄눈」이었다.

「봄눈」은 구성과 전개가 유연하여 논의에는 올랐으나 등장인물의 정황과 사건의 전개에서 새로운 시선이 보이지 않고 티브이의 멜로드라마 방식에 그치고 만 점이 단점으로 지적되었다. 「이상적인 사회」는 과거의 잘못을 기억하고 친구를 찾는 이야기의 흐름이 흥미로웠고, 우물과 빨간색, 파란색의 상징성이 배치돼 있었으나 결말이 해결되지 못한 채 억지스러웠다.

「시발」은 선산을 팔고 이장하는 문제로 갈등하는 남매들의 이야기로 대사가 짧고 간결하면서 상황이 극단을 향해 직진하고 있었다. 작가가 가진 도발적인 문체는 인물들과 사건진행에 관심을 유발시켰다. 그러나 그를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는 그만한 힘을 만들지 못했다. 선산을 지키려는 큰형의 입장에서 동생들의 절박한 현실적 요구에 대립할 만한 새로운 의의나 가치를 발견할 수 없었으며, 자극적인 상황을 통해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잘 구축되어 있지 않았다. 극단으로 치닫는 인물들과 상황의 설득력도 약했다. 전반적으로 내용이 받쳐주지 않아 의미가 약했다.

「사인, 미상」은 문체가 깔끔하고 일상을 들여다보는 차분하고도 예리한 시선이 있었다. 보험살인이라는 통속적인 소재를 가지고도 일상적인 상황과 언어로 긴장감을 주고 극을 전개시킨 점을 높이 살 만하다. 죽은자와 산자의 대화, 현재와 과거의 교차 및 사건의 전개도 유려하며 리듬감이 있었고, 등장인물들의 처지와 아픔에 공감되었다. 그러나 일상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결말의 반전에 극적 효과를 주었다는 평과, 아들, 딸, 며느리가 가진 전형적인 성격이 이야기 진행에 힘을 주지 못하고 반전을 약화시켰다는 평으로 심사위원들의 견해 차이가 있었다.

「대안가정 생태보고서」는 소재의 처리와 희곡의 전개방식에 신선함이 있었다. 장면별 등장인물의 수가 6, 3, 2, 1로 줄면서 가족 구성원의 양상이 달라지고 결합의 방식도 달라지는 모습을 통해 가정이라는 집단의 다양한 측면과 의미 변화를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다. 메커니즘처럼 이야기의 전개방식으로 주제를 제시하고 있었고, 구조 속에서 메시지를 드러내며 뚜렷한 주제의식으로 귀결되고 있는 점이 단연 돋보였다. 장면의 설정이 특수한 상황이고 짧아서 등장인물들이 표피적인 감이 있으나 대사가 깔끔하고 속도감 있게 극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심사위원은 「사인, 미상」과 「대안가정 생태보고서」를 놓고 의견을 더 나누었다. 두 작품 모두 잘 쓴 희곡인 것에 동의했지만 전자가 다소 감상적이라면 후자는 구조의 힘이 강하고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이 담겨 있어, 「대안가정 생태보고서」를 흔쾌히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희곡 한편을 완성하였다는 것은 큰일을 해낸 것이다. 언급되지 않은 응모작 중에도 재능이 있어 보이는 작품들이 여럿 있었다. 더욱 매진한다면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응모한 모두에게 격려를 보낸다.

이성열 최진아

 

 

 

희곡 | 당선소감

 

현실을 보이는 대로 나열하여 기술하기와 현상을 총체적으로 담아 그려내기. 묘하게 다른 이 두가지의 서술방식을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대안가정 생태보고서」는 현실에 대한 적극적 반영이기도, 현상에 대한 소극적 저항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다른 것에 닿아 있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삶의 파편들이 부딪혀 생긴 파장이 일렁이는 대로 무작정 받아적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무력감과 절망이 들어찬 시대에 약간의 희망과 어떤 대안을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괴로웠던 적도 있습니다. 끝을 내야 한다는 두려움과 끝이 날지도 모른다는 다른 종류의 두려움이 모순적으로 부딪히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어찌어찌 빛 한줄기 정도는 꾸역꾸역 채워넣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글을 쓴다는 사람조차 두려움 따위에 잡아먹혀서 희망을 상상하지 못한다면 너무 슬플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치열하게 쓰겠습니다’라는 말은 제가 할 수 있는 거짓말 중 가장 진부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과연 내가 글을 써도 되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에 매몰될 때도 있지만 앞으로도 글을 쓸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먹고 자고 싸고 까고, 이런 것 외에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스스로를 파고 파고 파먹으며 쓰고 쓰고 쓰는 것밖에 없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어느 모던보이처럼 겨드랑이가 간지러워 이따금씩 끝도 없는 권태로 침잠할 때도 있기에, 매일매일 치열하게 쓰겠다는 것은 영 지키지 못할 약속이란 생각이 듭니다.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쓰고 싶습니다’ 이 정도의 표현이 좋을 것 같습니다.

희곡의 문법을 선택하여 연극적인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지도 꽤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이곳은 해괴하고 이상하며 낯선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차갑고 난해한 세계에서 함께하는 사람들, 곁에서 지켜봐주며 따뜻한 응원을 보내준 사람들이 있었기에 찬란함을 기다리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 있어 연극은, 여러분 모두의 것입니다.

 

나의 문법에 항상 ‘날선 시선’을 던져주며 ‘날 세워준’ 효주. 거대한 벽을 함께 깨주었던 용감한 ‘페르쏘냐’ 연아. 도서관 한구석에 틀어박혀 불면의 밤을 ‘기록’하게 도와주었던 ‘꿈꾸어 닿는 도서관’ 인하대 17대 생활도서관과 멋진 관장, 호영.

민금, 동주, 서경, 승민, 태식, 명철. ‘시작하는 극단 위선자’와 ‘하나만 프로젝트’의 사랑하는 친구들. 선혁, 지은, 민영. 연극 「채연곡」을 같이 만들며 추운 겨울을 함께 이겨내고 있는 소중한 동료들.

현, 대우, 혁준, 성철, 진우, 한길, 영환, 경민, 권지, 미리, 윤지 그리고 규진. 인하대 ‘독서삼매경’과 정윤, 지현, 소리. 학교 안에서 또 학교 밖에서 함께 술술, 읽읽, 술술, 읽읽했던 여러 사람들.

수많은 스토리 콘텐츠와 색다른 접근방식을 알려주셨던 인하대 문화콘텐츠학과 김만수 선생님과 지난 삼년간, 부끄럼 많은 타과생에게 너그러이 청강을 허해주시며 텍스트에 대한 사악하고 섬세한 독법을 심어주셨던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김동식 선생님.

‘현대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예술적 감수성도 있겠지만 어쩌면 이 세상에 맞서서 나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용기일지도 모른다’라고 하셨던 지난 봄학기의 강론과, 선생님의 수업에서 마주쳤던 인문적 세계들. 잊지 않겠습니다. 일러주신 대로 저는 텍스트를 읽어내고 쓰는 사람이니 언젠가는 반드시 ‘텍스트를 장악’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미안하고 고마운 어머니, 안순옥 여사님과 하나의 문을 열어주신 이성열, 최진아 선생님과 대산 관계자분들께

 

미처 호명하지 못한

내가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과

내가 사랑하지만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연극과 구조의 세계로 안내해준 모든 ‘관계’들에게

감사함을 전합니다.

박서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