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목소리 | 창비에 바란다
탈중심시대 지성지의 역할
강릉원주대 이동기 교수 인터뷰
이동기 李東奇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 독일현대사. 저서 『20세기 평화텍스트 15선』, 역서 『근대세계체제』(공역) 『역사에서 도피한 거인들』 등이 있음. leedk@gwnu.ac.kr
백지운 白池雲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교수, 중문학. 본지 편집위원. 역서 『열렬한 책읽기』 『귀거래』, 편저 『양안에서 통일과 평화를 생각하다』(공편) 등이 있음. jiwoon-b@hanmail.net
창비 50주년을 기한 독자 인터뷰를 청하는 말을 꺼냈을 때 이동기 선생의 반응은 의외로 선선했다.
"제가 사실은 『창비』 열혈독자거든요. 어떤 때는 같은 호를 두권씩도 삽니다. 읽어야 하니까, 또 열심히 읽고 싶어서 샀는데, 바쁘게 지내다보면 산 걸 잊어버렸다가 읽어야지 싶어 사고 보면 집에 이미 있는 거예요."
냉전·평화 연구자인 이동기 선생과는 짧은 기간이지만 같은 직장에서 일한 인연이 있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굽힘과 거침이 없는 그는 언제나 열정적인 ‘청년’이다. 진지하지만 위트가 넘치는 그의 날선 독설이 주는 유쾌한 자극이 평소 즐거웠던 나지만, 『창비』의 편집위원으로서 만나려니 약간은 마음의 각오가 필요했다. 우선 지난봄에 나온 50주년 기념호에 대한 인상부터 물었다.
"전체적으로는 생각보다 소박해서 놀랐어요. 50주년이니까 뭔가 특별한 비전이나 전망을 제시할 줄 알았거든요. ‘대전환’을 말씀하셨지만, 이제까지 해온 것과 크게 다른 것 같지 않아서요. 한가지, 창비가 문학중심성 회복을 말한 것은 반가웠어요. 오랜 독자로서 제가 창비에서 지적·정서적 자극을 받은 것은 역시 문학 쪽이 컸으니까요. 그런데 현장성 강화를 내세운 점은 좀 당혹스러웠달까요. 기왕에 창비가 해온 비판적 지성의 역할을 구체적 현실과 접목한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겠지만, 그런 일은 다른 데서도 많이 하잖아요. 요즘은 팟캐스트 등으로 매체가 다양화되기도 했고요. 독자들이 창비에 바라는 것은 현장성을 가로질러 지적 지평을 넓혀줌으로써 정치적 전망의 지혜와 문화적 자극을 받는 게 아닐까 합니다. 어쩌면 창비가 현장성을 강조하는 건 일종의 알리바이가 아닐까 싶었어요. 학문적 비판성, 지적·문화적 담론생산의 문제를 소재적 현장주의로 대체할 순 없다고 봐요."
비판적 지성으로서의 역할에 더해 현장성/운동성을 강화하는 것은 지난 십년 창비가 지속적으로 고민해온 과제였다. 지식이 현실로부터 유리되어가는 풍토에 저항하여 엘리트주의적 폐쇄회로에 갇히는 것을 스스로 경계하고 독자 대중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힘쓰겠다는 다짐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아젠다가 사회를 보는 분석적 담론을 심화시켜 한국사회의 지적 수위를 끌어올리는 지성집단 본연의 임무에 소홀할 수 있다는 지적은, 어쩌면 당연하지만 그래서 자칫 소홀할 수 있는 맹점을 찌르는 것이었다. 결국 그것은 창비가 ‘비판성’을 회복한다고 할 때, 변화된 지적·사회적 환경 속에서 비판의 방향을 정확히 어디에 둘 것인지를 결정하는 문제일 것이다.
한국의 독일 연구자로서 그는 구 동독 지역에서 공부하고 온 드문 경우다. 학생시절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졌던 만큼 박사논문에서 노동사와 일상사의 문제를 더 깊게 파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 결정적으로 학문적 방향 전환의 계기가 된 것이 2000년의 6·15공동선언이었다. 남측의 연합제와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간 공통성을 인정하고 그 방향으로의 통일을 위해 함께 노력하기로 한 이 역사적인 선언이 마침 구 동독 지역에서 흡수통일의 후유증을 일상적으로 접하고 있던 개인적 경험과 겹치면서 학위논문 주제를 완전히 틀게 된 것이다.
"예나대학으로 간 것은 우연이었어요. 루츠 니트함머(Lutz Niethammer)라는 일상사 분야의 권위있는 교수를 찾아간 것뿐이었거든요. 그런데 통일 이후 구 동독 지역의 실상을 피부로 접하면서 흡수통일이 아닌 다른 방식의 통일 구상에 대해 더 적극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마침 6·15선언에서 국가연합과 연방제를 제안한 걸 보면서, 왜 독일에서는 국가연합 방식의 통일안이 실패하고 흡수통일로 갈 수밖에 없었는지 궁금해졌죠. 지금도 제가 관심 갖고 있는 문제는 분단극복을 위한 다양한 모색들이에요. 이로부터 냉전과 평화에 관한 연구를 좀더 포괄적으로 해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했죠. 그래서 오랜 준비기간을 거쳐 작년에 여러 동료 학자들과 함께 ‘냉전학회’를 만들었어요. 지금 몸담고 있는 ‘아시아 평화와 역사교육 연대’ ‘진실과 정의 포럼’에서 하는 일도 냉전시대 폭력의 경험에 대한 분석과 평화정치 및 평화문화 형성에 관한 것입니다."
2014년부터 그는 『한겨레21』에 ‘이동기의 현대사 스틸컷’을 연재하고 있다. 냉전을 20세기 전반에 걸쳐 조망하면서, 폭력의 가해자와 동조자,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고 치유할 수 있는 행위주체 형성의 가능성을 탐색 중이다.
독일의 국가연합론을 전공한 그에게 창비의 분단체제론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탈냉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남북관계가 퇴보를 거듭하는 요즘의 상황을 보면서, 우리 사회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의미있는 토론을 위해서는 ‘통일’로 비약하기보다는 분석대상으로서 ‘분단’을 재점검하고 그 이론적 지평을 심화 확대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부쩍 들던 차다.
"창비가 분단체제론을 제기했던 1990년대초 저는 민중민주(PD) 그룹에 있었는데 분단체제론을 옹호하며 지인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죠. 한국 지성계가 이 의제를 받아 더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쉬워요. 창비에선 분단체제가 한반도의 고유한 질서라 보실지 모르지만, 사실 독일에서도 분단갈등이 심화되거나 화해가 지체될 때 유사한 논의들이 있었어요. 1950년대와 60년대, 그리고 80년대 서독에서도, 분단의 규정력에 의해 동서독 양 체제가 상호의존 속에 경화되어 민주주의를 비롯한 의미있는 사회발전이 지체된다는 것, 그래서 분단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사회변혁이 불가능하다는 논의가 꽤 있었거든요. 재미있는 것은 독일에서도 그런 방식으로 분단체제를 분석한 이들이 한결같이 ‘국가연합’을 대안으로 제시했다는 사실이에요. 제 박사논문의 주제이기도 한데, 서독에서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제시된 국가연합 통일안은 그 종류만 해도 삼십개가 넘습니다. 또 맥락은 좀 다르지만, 창비가 ‘변혁적 중도’를 제기한 것처럼, 독일에서도 빌리 브란트의 아들 페터 브란트(Peter Brandt) 같은 급진파 중 일부가 1980년대 중반에 ‘새로운 중도’라는 말을 썼거든요. 급진좌파 세력이 ‘사회해방 후 분단문제 해결’을 주장한 데 맞서, 분단극복을 위한 현실적 해결책으로 ‘중도’의 길을 제시했던 이들이 녹색당 내 ‘민족좌파’ 세력으로 결집했어요. 그들은 먼저 녹색당과 급진좌파가 사민당과 연합하여 정권을 장악한 다음 현실적 중도노선에 기반을 둔 국가연합 방식으로 분단문제를 해결하자고 주장했어요. 그러면서 독일 내부적으로 ‘제3의 길’로 사회를 변혁하고 지역적으로는 유럽평화공동체를 건설하자는 것이었죠. 소수파긴 하지만 주목할 만한 분석과 주장이었습니다."
이야기는 점점 독일의 분단문제와 국가연합을 둘러싼, 복잡하지만 흥미로운 논쟁지형으로 빠져들었다. 지면의 성격상 자세히 담지는 못하지만, 일국적 차원에서 사회변혁과 분단극복, 그리고 지역적인 차원에서 평화공동체 간의 독자성과 연관성이, 때로는 대결적으로 때로는 침투적으로 상호 길항했던 서독의 논쟁지형은 우리의 현실과 관련하여 한번 제대로 검토해볼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유럽현대사 전공자이지만 독일 내지 유럽의 지난 논의가 한국에 큰 의미나 교훈을 준다고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창비가 제기한 분단체제론 혹은 국가연합에 관한 논의와 결은 다르지만 유사한 함의를 지녔던 토론들이 분단 독일에서는 무성했던 데 반해, 분단의 질곡을 더 심하게 앓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빈약했다는 게 아쉬운 거죠. 꼭 분단체제론이나 국가연합으로 귀결되지 않더라도 분단현실 분석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정치적 사유와 논의를 더 발전시켜야 했다고 봅니다. 분단체제론에 입각하더라도 분단현실에 대한 분석은 얼마든지 다양할 수 있고, 국가연합도 하나의 형태만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분단체제 지지론자와 반대론자로 갈라지고 그러다 무관심으로 귀결되어버렸어요. 여기엔 한국 지성계에 대한 아쉬움도 있지만, 어떤 면에선 창비가 논의를 자기완결적으로 닫은 측면도 있지 않았나 싶어요. 사실 냉전·평화 연구를 하다보면 분단체제가 낳은 내적 경화의 문제를 다른 방식과 개념으로 만나곤 하거든요. 분단체제에 대한 더 나은 인식을 위해서는 냉전사나 평화학의 관점이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또 평화체제나 지역공동체 문제도 그 자체로 많은 논의와 상상력이 필요할 텐데 분단체제론이 발목을 잡고 있다는 인상도 받거든요. 요컨대 창비가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분단체제론이 한국사회나 한반도의 현실에 대한 지적 인식과 논의의 확장을 제어한 측면도 있었지 싶어요. 기왕에 의미있는 분석범주를 제기했는데, 그것을 현실정치의 강령 또는 실천적 지침으로 연결시키면서, 지적·학문적으로 확장되는 길을 스스로 막은 것은 아닌가, 정치적 개입을 위한 제언이나 전략적 구상의 직접적 근거로서가 아니라 현실분석의 매개 범주로 열어놓고 다양하고 복합적인 인식이 개입할 여지를 더 두었다면 어땠을까 합니다."
논의가 분단체제론으로 쏠린 감이 없지 않았으나 대화 중 많은 생각이 들었다. 어느샌가 분단체제론이라는 말은 한국 지식계에서 많이 통용되지 않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나날이 악화되는 분단현실을 제대로 해석하고 전망을 세우는 더 진전된 논의가 나온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분단체제론과 동아시아론을 창비의 지나간 족적으로 넘길 게 아니라, 지금이야말로 현실분석의 틀로서 더 적극적으로 사고해야 하는 게 아닐까. 과거의 논쟁을 반성적으로 점검하고 변화된 국내외 현실에 맞추어 새로운 단계로 진전시키는 것, 이는 비단 창비만의 문제를 넘어 한국의 지성사적 과제이기도 한 것이다.
그는 지금은 『창비』의 정기구독자가 아니다. 독일 유학 전까지 정기구독자였던 그에게 매호마다 『창비』를 읽고 지인들과 토론하는 것은 지적 발전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유학에서 돌아온 후 그는 『창비』의 ‘열혈독자’로 남기로 했다고 한다. ‘정기독자’와 ‘열혈독자’의 차이란 무엇일까?
"창비 30주년 무렵 『길』지 편집인이, 정확하진 않지만 이런 말을 했어요. “모든 다른 운동진영과 비판적 지식인 그룹들은 다 소멸해가는데 유일하게 화려한 성채로 남은 것이 창비이다. 너무나 부러우면서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따져봐야 한다.” 오랜 독자 입장에서 저 역시도 창비의 역사가 뿌듯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그 말이 항상 기억에 남았어요. 제가 2008년 독일에서 귀국한 다음 몇번 고민하다 그냥 ‘열혈독자’로 남기로 한 것은, 창비의 ‘화려한 성채’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두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현실은 창비와는 달리 팍팍하니까요."
이동기 선생처럼 ‘정기독자’에서 ‘열혈독자’로 전환한 『창비』의 독자들은, 어쩌면 적지 않을 것이다. 창비가 ‘화려했던’ 시절로부터도 어언 20년이 흘렀다. 그동안 시대는 더 변했고 그만큼 창비의 위상도 달라졌을 터다. 그는 50주년을 맞은 창비의 지성사적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창비가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도 중요하지만, 역사적 대상으로서 창비를 보는 지식인사회의 평가에 귀 기울일 필요도 있다고 조언했다.
"지금처럼 지식인사회가 분화된 현실에선 과거 창비가 추구했던 구심적 역할은 불가능하고, 또 가능하다고 해도 오히려 문제겠죠. 저는 창비가 한국 지성계에서 여전히 ‘중요한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중요하지만, 이슈를 주도하고 향도하는 구심이라서가 아니라 다원화된 지적 스펙트럼 속에서 의미있는 한몫을 한다는 의미에서예요. 중요한 ‘일부’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효율적인 지적 소통의 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분야의 지식을 하나의 센 담론으로, 유기적·총체적으로 모으겠다는 인습적 강박에서 벗어나 분업과 협력을 통해 각자의 전문성을 강화하고 개방성을 넓힌다면, 분명 다른 데선 할 수 없는, 창비만이 가능한 ‘담론의 마당’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지면의 제한 탓에 대화 내용을 반밖에 담지 못했다. 워낙에 달변이기도 하지만 이 짧은 인터뷰를 위해 준비해온 그의 정성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것은 창비와 한 시대를 살아온 오랜 독자의, 창비에 대한 애정과 경계가 공존하는 복잡한 마음의 오롯한 표현이기도 했을 것이다. 헤어지면서 그는,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쓰세요,라고 말했다. 직설이 마음에 걸리긴 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