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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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정미경 鄭美景

1960년 경남 마산 출생.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나의 피투성이 연인』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 『내 아들의 연인』 『프랑스식 세탁소』, 장편 『장밋빛 인생』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 『아프리카의 별』 등이 있음. mkjung301@hanmail.net

 

 

 

새벽까지 희미하게

 

 

“이거 나만 그런가? 눈꺼풀 안에서 정전기가 일어나.”

정이 인공눈물을 정성껏 떨어뜨리고는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직업병이지. 내 피부는 뱀 껍데기 같아. 첫날밤이 걱정이야.”

그래픽 화면을 손질하며 천연덕스럽게 받는 오는 유부녀다. 직업병 맞다. 일본 출장이라도 다녀올 때면 면세점에서 안약을 한다스씩 사들고 와서 나눠주어야 했다. 누구는 눈 안에 미세한 모래알갱이가 구르는 것 같다며 이물감을 호소했다. 겨울이면 머리카락이 올올이 서 있기도 했다. 가습기도 소용없었다. 컴퓨터 때문이라는 오의 추측이 맞을지도 모르지. 한사람 앞에 모니터가 서너대씩 놓여 있으니.

“그래도 입이 건조한 것보단 낫지 않을까. 침이 안 나오면 맛을 모른대.”

유석의 농담을 무시하고 정이 제 모니터를 가리켰다. 실장님 얘 패션 어때요? 새로 출시할 게임 캐릭터일 것이다. 유석은 이제 개발 쪽 실무는 손을 놨다. 그래도 진행상황에 대해서는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강주 형이 언제 전화를 해서 무얼 질문할지 알 수 없으니까. 무기의 살상력은 매번 업그레이드되지만 여주인공은 좀체 상투적인 전형을 벗어나지 못한다. 9등신 몸매에 노출 패션. 화면에 보이는 금속제 속옷 역시 대동소이.

“이거 원조는 마돈나잖아. 저작권료나 내고 있나 몰라.”

“저희가 그런 얘기 할 입장은 아니잖아요. 스토리다 캐릭터다 뭐 아웃소싱 안하는 게 없는데. 저희도 뇌즙을 짜고 있어요. 획기적인 아이디어 있으면 실장님부터 까보세요.”

“치마도 거기서 더 짧아질 데가 없고…… 녹색당 성향의 여주인공은 어떨까?”

“녹색당? 포인트를 어떻게 잡으면 되는데요?”

정이 코를 살짝 찌푸리며 묻는다.

“포인트랄 게 있겠어. 패션의 일종이지. 안구 정화용 관엽 화분이나 하나 들려주고.”

“여자들은 뭣도 모르면서 이데올로기를 액세서리로 걸친다, 그거죠?”

얘가 또 그날인가. 한달이 빠르기도 하네. 문화 쪽 일하는 것들은 윗사람 존경할 줄을 통 몰라. 자리로 돌아와 유석도 고개를 젖히고 인공눈물 몇방울을 눈에 떨어뜨렸다. 쾌감이 한기처럼 퍼지다 이내 사라진다. 큰 제목만 훑어보며 신문을 슬슬 넘기던 유석의 손이 멈추었다.

송이.

그 송이인가. 맞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눈을 꾹 감았다 떠본 건 신문 지면과 이 낯익은 얼굴이 너무 멀고 느닷없었기 때문이다. 뉴질랜드 쿡마운틴 협곡에 사는 돌고래의 울음소리만큼이나.

 

송이는 유독 먼 곳의 얘기, 먼 데 사는 사람 얘기를 곧잘 했었다.

 

……북극 만년설 언저리에 사는 사람들은 화가 나거나 슬픔에 사로잡히면 그냥 눈밭 위를 걷는대요. 무작정 계속. 걷고 또 걷다가 마음이 다시 사그라들면 그 자리에 긴 막대를 하나 꽂아놓고 돌아온대요. 다음에 가면 그 막대들이 어떤 마음의 깃발인지 기억 안 날 것 같지 않아요?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은근 화려한 속옷을 입는다데요. 무뚝뚝하게 생긴 남자들도 놀랍도록 명랑한 색깔의 속옷을 입는대요. 일년의 절반이 밤이라면 그럴 것 같긴 해요. ……더블린 거리에 있는 아파트들은 현관문 색깔이 다 다르대요. 술꾼 남편들이 밤늦게 들어올 때 헷갈리지 말라고 그렇게 칠했다는데, 더 헷갈릴 것 같지 않아요? 뉴질랜드의 협만 얘기를 한 적도 있었다. 뉴질랜드는 새로운 네덜란드라는 뜻이래요. 처음 발견한 사람의 이름을 딴 쿡마운틴 협곡엔 일흔여섯마리의 돌고래가 살고 있대요. 그곳엔 오억년 동안 진화하지 않은 먹장어가 놀러다니고 백년에 일 센티미터 자라는 산호 가지에 물뱀이 노끈처럼 친친 감겨 있는데, 하여튼 그 돌고래 울음소리는 너무 아름다워서 우주로 보낸 타임머신에 그걸 실어 보냈대요. 사무실에서 송이가 그런 얘길 하면 유석은 퉁이나 주었다. 『먼나라 이웃나라』야? 가서 세어봤어? 일흔여섯마린지, 열여섯마린지……

 

납기에 쫓겨 며칠째 야근을 하는 중에 G1은 사후경직 상태의 피자를 콜라 속 탄산의 힘으로 분쇄하고 있고 G2는 어떻게든 오늘은 퇴근해보겠다는 각오로 라이트박스 위에 코를 박고 있고 G3은 마우스를 움켜쥐고 천진난만한 토막잠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송이가 툭 던지는 그 시공초월 대사가 나쁘지는 않았다. 물론 그 뜬금없는 얘길 듣고 있으면 이상하게 엉킨 마음이 빗질이 되더라는 Q1의 말은 좀 오버라고 생각했지만 그 얘기들을 깨알같이 써먹은 건 사실이다. 다단계업체의 교육용 영상, 여름성경학교 교재, 인터넷업체들의 스팟 영상에 그 이미지들을 약간 손보아서 사용하기도 했다.

그 특별할 것 없는 얘기들은 더이상 송이의 모습을 볼 일이 없어진 후에 오히려 더 또렷하게 떠오르곤 했다. 시간이 한동안 흐른 후에야 글자가 하나씩 떠올라 문장을 이루는, 어떤 특수용액으로 쓴 편지와 비슷하달까.

『미루나무 꼭대기에 걸린 팬티』. 유럽의 어느 아동도서전에서 큰 상을 받았다는 이 그림책은 송이의 책으로는 벌써 세번째란다. 송이는 그사이 그림책 작가가 되어 있었다. 몰랐다. 기사가 난 적도 없었고 유석이 아동서적 코너에 갈 일도 없었으니까.

 

봄소풍을 간 토끼가 찬 음료를 너무 먹어 배탈이 났다. 그만 팬티에 똥을 지리게 되어 당황한 나머지 몰래 산모퉁이를 돌아 팬티를 벗어 산 아래로 던져버렸다. 돌아오는 길에 동네 입구 미루나무 꼭대기에 제 똥 묻은 팬티가 걸려 나부끼는 걸 보게 된 토끼는 사색이 되고…… 그걸 남몰래 수거하기 위한 노력이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토끼는 팬티가 인도하는 낯선 곳으로 멀고도 눈물겨운 여행을 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토끼는……

 

간략한 소개 끝에 기자는 이렇게 써놓았다.

 

줄거리만 보면 화장실 유머인데 이 책 묘하게 따뜻하고 대책 없이 웃긴다. 옆에 두고 우울하거나 의기소침할 때면 한번씩 펼쳐보고 싶어지는 중독성 주의. 무엇보다 토끼와 함께 그 길을 같이 가고 싶게 만드는 책. 토끼는 그 부끄러운 팬티를 되찾을 수 있을까?

 

박스기사 가운데 실린 사진은 제법 큼지막했으나 작업실 풍경 전체를 담느라 그랬는지 송이 얼굴은 엄지손톱만 했다. 가무잡잡한 피부, 쌍꺼풀이 뚜렷한 눈, 높은 이마 때문에 수줍음 타는 인도소년 같았던 얼굴은 선이 살짝 무뎌지긴 했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림책 작가라니. 내 밑에 있은 덕을 뒤늦게 보네. 쌍꺼풀 아래 크고 까맣던 눈동자 역시 기억났다. 맨 처음 마주쳤을 때 그 눈동자는 차오른 물기 너머로 유석을 바라봤었다. 그렁그렁한 눈물은 유석이 던진 말 때문이었다. 뭐라 했더라.

언니. 내가 여기 사장이야. 정수기 오더 내린 적 없어. 수돗물 먹어도 안 죽어. 아리수가 시판 생수보다 깨끗하단 논문도 못 봤어?

그러고 보니 칠년쯤 전의 일이다. 흘러가버린 시간에 비해서는 기억이 꽤나 또렷했다. 어쨌든 지금보단 젊었으니까.

그렁한 눈물을 보자 문득 아침부터 비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백 미터도 넘는 골목길을 이걸 들고 들어왔나 하는 생각이 연이어 들었다. 아침에 출근한 Q1 Q2 할 것 없이 다들 웅덩이에서 막 걸어나온 오리새끼들같이 머리카락이 함초롬히 들러붙어서는 아우성이었다. 구두 속까지 다 젖었어요. 머리에서 쉰내 나요. 눈오고 빙판 되면 여길 어떻게 걸어다녀요. 사무실 재계약일이 돌아오자 당장 임대료를 십 프로나 올려달라는 건물주 보란 듯 방을 빼 이쪽으로 옮길 때는 괜찮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큰길에서 조금만 걸으면 되는데 임대료는 오십만원 차이가 났다. 둘러보러 왔던 날 비가 왔더라면 절대 계약하지 않았을 것이다. 분화구처럼 팬 길을 걸어들어오느라 유석의 바지 뒷자락도 종아리에 척하니 들러붙어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에헤이 언니, 눈물로 밀어붙이면 안되지. 세일즈 하면서 눈물이라니. 최악이다, 최악. 유석이 눙치는 순간 눈물은 범람을 시작했다. 그때 유석의 뒤에 붙어서서 무어라무어라 속삭인 게 누구였더라. 어제 이삿짐 나르느라 정신이 없는데…… 사장님은 안 나오셨잖아요. 한참 옮기다보니 이분이 저희 짐을 같이 옮기고 있더라고요. 먼지구덩이에서 짐 다 풀고 그랬는데. 말이 이층이지 백번 넘게 오르내리다보니 다리가 진짜…… 우리 맘대로 결정 못한다 했는데 그래도 상관없다고. 그렇게 짐 다 올려놓고 커피라도 끓여마시려고 물을 트니까 녹물이 나와요. 건물이 너무 낡아서 그런지 아무리 틀어놔도 계속 녹물이…… 생수 사먹는 값이면 렌트할 수 있다 해서…… 오늘부터 당장 급할 것 같아 들고 오셨다고. 세상에, 이게 이십 킬로는 되는 거 같고. 우산 겸 이고 오셨다는데 참 안된다고 그러기도…… 이미 필터도 젖어버려서…… 사실 저희도 설치할 마음은 없었어요. 유석은 명색이 스토리 담당하는 애가 앞뒤 안 맞는 말을 밑도 끝도 없이 늘어놓는 데 열이 솟구쳤고 필터가 이미 젖었다는 말에 더럭 역정이 났다.

언니 사정은 딱한데 도로 가져가요. 언제부터 정수기야.

렌트비 삼만사천원 못 낼 지경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이 늙은 여우 셋이 사장 알기를 얼마나 우습게 알면 저희들 마음대로 이런단 말인가 싶었다. 범람하는 눈물보다 더 곤란했던 건 버벅거리며 항의를 하는 젖은 목소리였다.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으나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이러시면 안되죠. 사무실에 재고가 없어서 본사 가서 받아오는 길인데. 이거 들고 지하철 두번 갈아타고 왔고요. 포장 뜯은 필터는 반품도 안되고…… 뺨이 다 젖어 울먹이는데 유석의 짜증지수는 급상승을 했다. 에헤이 못한다니까 그러네. Q2가 심 박힌 목소리로 종알거렸다. 벼룩의 간을 내먹지. 유석도 지지 않았다. 벼룩의 간이 별미이긴 하지. 팩하는 성격이 있는 Q1이 분연히 외쳤다.

됐어요. 언니. 그냥 설치해놓고 가요. 우리 셋이 한달에 만원씩 부담할게요.

그 말에 Q2Q3이 확연히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Q1을 쳐다보았다. 우리가 물을 마시면 얼마나 마신다고, 하는 표정. 유석은 좀 당황했다. 그것마저 안된다 할 수도, 기다렸다는 듯 그럼 그래라 할 수도 없었다.

에헤이, 언니. 남의 사무실 이전한 날 화환은 못 보낼망정 눈물바람은 아니지. 고만 울어요. 그거 하나 팔아서 몇푼 남아. 정수기도 다 대기업들이 쥐고 있는데 인지도도 없는 그런 걸 누가 사주겠어. 백날 울고 다녀봤자 아무도 안 사. 그쪽 정리하고 여기 나와서 일해요.

말을 하고 보니 유석도 제가 왜 그랬나 싶었다. 막무가내로 버티기엔 송이가 너무도 서글프게 울고 있었다. 아니다. 그쯤에서 늙은 여우 셋이 유석을 싸이코패스 쳐다보듯 보기 시작했다. 일손이야 늘 모자랐지만 새로 사람을 더 들일 형편은 아니었다.

두어달 지나 야근을 마치고 단체로 몰려간 돼지껍데기 집에서 유석이 그 얘기를 끄집어내 놀렸더니 송이가 남 얘기하듯 그랬다.

그날 왜 그렇게 울었나 몰라요. 거절당한 게 처음도 아닌데. 그냥 내가 잡상인이 되어 있구나, 이게 앵벌이구나, 그 생각이 들었어요. 아휴, 사람들 앞에서 우는 건 그때가 끝이에요. 아니다. 혼자 있을 때도 끝.

주제에 막내랍시고 집게와 가위를 들고 익은 돼지껍데기를 자르던 송이는 하필 문 맞은편에 앉아 연기를 정통으로 맞으며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물을 철철 흘려 늙은 여우들의 지탄을 샀다.

유석은 그즈음 강주 형 밑에서 뛰쳐나온 걸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딴에는 어렵게 독립해보겠다 말을 꺼냈을 때 형이 아쉬워하는 기색 없이 그러라 했던 까닭을 막 깨달은 참이기도 했다. 서른여덟의 형이 왜 고지혈증과 당뇨 끝에 심장스턴트 시술까지 해야 했는지도. 어쨌든 형은 포르쉐를 타고 다녔고 밤마다 고급한 술자리에 있었고 발망 스니커즈를 신고 다녔다. 유석과 세살 차이였는데 유석이 앞으로 삼년 동안 어떤 방향 어떤 속도로 굴러도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지점에 형은 가 있었다.

강주 형은 처음에 애니메이션 원화 하청으로 시작했다. 하도급의 재하청이었다. 디즈니 쪽 일이었는데 섬세함과 완성도, 불가사의한 작업속도에 감명받은 그쪽으로부터 안정적으로 일을 받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노하우를 얻게 되면서 차츰 국내시장 쪽으로 눈을 돌렸다. 정보 전달의 소프트화가 시작되면서 데이터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인포그래픽에 대한 수요가 폭발하던 시기였다. 일감은 넘쳐났고 뒤늦게 업체들이 뛰어들었지만 전문성에서 확연히 차이가 났다. 제작 노하우와 숙련된 인적 시스템도 기반이 되었지만 성공의 가장 큰 디딤돌은 남보다 두발 앞을 내다보는 형의 감각이었다. 첫 사무실은 다섯평으로 시작했다는데 유석이 있을 땐 건물 두층을 쓰고 있었다. 이건 형한테 직접 들은 얘긴 아니고 업계에 떠도는 신화의 요약본이었다.

사무실엔 종일 상담전화만 응대하는 콜 직원이 하나 있었는데 나긋나긋한 그녀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사업규모가 거의 파악되었다. 대충 따져보아도 운영비 제하고 한달에 칠팔천 수익이 지속적으로 나올 것으로 추정되었다. 의뢰물의 콘텐츠는 매번 달라지지만 그 작업만을 위한 새 틀을 짤 필요도 없었다. 아이디어 회의를 하고 레이아웃 콘티를 짜고 나면 그다음은 기계적인 작업이었다. 유석의 눈에 그 시스템은 길이 잘 든 만능 떡기계와 비슷했다. 적당량의 팥이나 쑥, 찹쌀이나 수수를 넣고 기다리면 기계의 아래쪽으로 완성된 떡이 밀려나오는. 이년 남짓 근무하고 나니 이 정도 떡기계는 쎄팅할 자신이 생겼다. 사무실에 일렬로 앉아 종일 작업하는 직원들이 일개미나 일벌처럼 보였다. 헐값에 사용할 수 있는 IT인력은 주위에 얼마든지 있었다.

왜? 왜 나가려고. 형이 붙드는 기색 없이 그렇게 물었을 때 농담이랍시고 그랬다.

저도 강남에서 저녁 먹고 강남에서 술 마시려고요.

그래? 어떤 강남? 강남에도 청담이 있고 잠실이 있는데. 미국서 살다 온 사람은 미국이라고 하지 않아. 미시간호 옆에 살았는데 뒈지게 추웠지,라든가 쌘디에이고에 한동안 있었는데 거기가 기후는 정말 천국이야. 애리조나에선 까만 애들하고 술 마신 기억밖엔 없어, 그렇게 장소를 특정해서 말하지.

왜 형이 빙긋 웃으며 그 말을 했는지 그땐 몰랐다. 중고로라도 포르쉐를 타보고 싶어서요,라는 유석의 마음을 읽었다면 또 그렇게 말했을지도. 어떤 포르쉐? 카이엔, 마칸, 파네마라…… 응?

사무실을 열었을 때 형은 공기정화용 선인장 화분을 하나 보내주었다. 썰렁한 사무실에 유일한 축하화분이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일감도 하나 주었다. 대형교회 여름성경학교에서 쓸 삼십초짜리 동영상 열두편이었다. 요청서 내용이 구체적이어서 일은 까다롭지 않았다. 음성 없는 2D 작업에 교회 측에서 보내준 문서를 자막 처리하는 수준이었다. 일 끝내고 정산하면서 보니 형 몫을 떼지 않았다. 사무실 삼개월 유지비는 되었다. 인사전화를 했더니 형은 그랬다. 그런 종류는 제작하는 쪽에서 내용에 개입하면 안돼. 튀어도 안되고. 가장 간단한 유형이야. 그냥 고객의 니즈에 충실하면 돼.

그럭저럭 꾸려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아는 사람 곶감 빼먹듯 하고 나자 연줄은 금세 바닥났다. 그 연줄이라는 것도 형 밑에서 이어진 줄이었으니 예견된 사태이긴 했다. 누군가 흘린 고기조각을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켠 하이에나가 되어야 했고 이 정도의 업체는 널려 있다는 걸, 매일 한두 업체는 문을 닫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골목 끝 사무실로 옮길 무렵엔 자신감을 잃었다기보다는 좀 절박해 있었다. 언젠가는 명작 애니메이션을 만들겠다는 포부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다. 있는 시스템으로 작업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조건 받았다. 유석은 자신이 왜 송이에게 여기서 일하란 말을 했는지 사실은 알고 있었다. 세상에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대개 그러하듯 제작 단가는 박했다. 작업량이 넘쳐도 사람을 더 쓸 순 없었다.

 

전에, 애니메이션 제작사에서 일한 적이 있어요. 거기서 원화 채색을 무한 반복하는 일을 한동안 했어요. 사실 개인적으로는 앞이 안 보이는 상황이었거든요. 그 단순한 반복이 절 버티게 해주었다는 생각을 나중에야 했어요. 그림 명상이라고나 할까. 색과 디자인이 어우러져 무한대에 가까운 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것. 색을 쓰는 방식. 글자로 감정을 표현하는 법. 실무적으로 배운 것도 많지만 무엇보다 제가 그 일을 좋아한다는 걸 거기서 알게 되었죠.

 

그랬나. 그럴 수도. 애초에 송이에게 기대한 건 일용직 도우미 정도의 역할이었다. 급한 상차림을 준비하는 옆에서 시키는 대로 마늘을 까거나 고기를 다지는 일 같은. 처음엔 세일즈 경력을 쳐주어 소모품 매입과 관리로 시작해 소소한 잡무까지 하나씩 떠넘겼다. 재활용품이나 쓰레기 배출은 기본이었고 언제부턴가 송이는 원화 채색을 하고 있었다.

그때 사무실에 있던 셋은 모두 대학을 나왔고 그중 하나는 유학파였다. 물론 하청받은 애니 밑그림 그리려고 간 유학은 아니었겠지만. 시간강사 한 칠년 다니다 끝이 안 보여 접었다는 그녀는 내가 캘리포니아에 있을 때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다. 식품영양학을 전공했다는데 어찌된 게 믹스커피 농도 하나를 못 맞추었다. 똑같은 일을 하지만 다른 직원들과는 급이 다르다는 현수막을 이마에 붙이고 살았는데, 저희들끼리 간식을 먹으며 키득거렸다. 열흘을 못 채운다. 아니다 어영부영 삼주는 버틸 것이다. 송이를 두고 하는 말이었는데 셋 다 한달을 넘기진 않는다는 데에 의견일치를 보는 듯했다. 가사도우미 수준의 보수를 두고 하는 소리였다. 유석 역시 송이에게 뭘 전공했나 그런 걸 물어보지 않았다.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일분짜리 동영상을 만드는 데 원래는 1,440장의 밑그림이 필요했다. 한 장면에 24장이 들어가면 자연스럽지만 요령껏 줄여서 제작을 했다. 그래도 시리즈물이라도 들어가면 당연히 야근이었다. 야근 끝에 송이 혼자 남아 일을 하기도 했다. 집이 가깝다는 이유였다. 걸어서 이십분 거리라는데 사실 이십분이란 걷기에 만만한 거리는 아니었다.

유석은 중고 컴퓨터에 기본 프로그램만 깔아 송이 책상을 마련해주었다.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제 뇌구조가 울트라 인문계거든요, 중학교 때 두 점 사이 거리를 구하라는 수학문제를 풀질 못하고 자로 잰 적도 있어요. 근데 희한하게 그게 맞은 거 있죠. 유석은 생각했다. 천진난만하긴. 그거랑 아무 상관 없단다. 첫 월급을 주면서는 좀 조마조마했다. 다음날 아침 송이가 제자리에 앉아 사장님 나오셨어요, 하는 소리에 눈시울이 다 뜨거워졌다. 눈시울이 뜨거운 거와는 별개로 유석은 그 시기에 신경질을 달고 살았다. 피티까지 하고선 막판에 다른 회사와 계약하는 업체가 있으면 그 자료 만든 직원이 눈물을 보일 때까지 꾸중을 했다. 콘텐츠가 마음에 안 든다며 퇴짜를 놓는 업체가 있으면 그거 하나를 못 맞춰주냐며 들들 볶았다. 이러면 안되는데 생각하면서도 분노조절이 되지 않았다. 아예 구체적으로 지시를 해주세요. 저희는 더이상 아이디어가 없어요. 목소리가 기어들어가는 직원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아이디어가 없어! 없다고! 그 머리엔 아이디어가 없지, 당연히. 당신들이 천재야? 레오나르도 다빈치야? 어디서건 가져와. 정 없으면 훔쳐와.

셋 다 유석과 나이가 비슷하거나 위여서 대놓고 반말은 못해도 대충 그렇게 윽박질렀다. 처음엔 긴장하는 눈치더니 언젠가부터 다들 복식호흡을 하며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는 표정으로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쁠 땐 담당이 따로 없었다. 송이가 아동용 국악 뮤지컬 광고에 쓰일 캐릭터와 삽화 이미지라며 들고 온 걸 흘깃 본 유석이 한숨부터 쉬었다. 이건 또 어디서 가지고 왔나. 어린이용 애니의 캐릭터는 너무 빤해서 그걸로 차별화를 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 송이가 가져온 스케치는 독특했다. 딱히 어디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마음을 사로잡았다. 유석은 속으로 감탄했다. 예술이네. 아이디어 드로잉에 불과한데도 생동감이 있었다. 소박하면서도 명료했다. 들고 있는 태평소, 피리, 장고, 소고 같은 것들에서는 날개옷처럼 가벼운 선율이 흘러나왔다. 이차원의 세계를 찢고 허공으로 날아오를 듯한 아이들의 옷깃에선 사삭사삭 소리가 들려왔다.

가져오랬다고 남들이 쓰는 거 막 들고 오고 그러면 우리 한방에 훅 간다.

제가 그냥 해봤어요.

명백히 제 일을 덜어주었는데도 S1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훔쳐온 거 아냐? 딴 사람은 몰라도 S1이 할 소리는 아니었다. 그때 사무실에서 디자인 담당이 하는 일이 그랬다. 일감을 슥 훑어보고는, 잠시 고민하다 자료실로 들어갔다. 자료실엔 오래된 디자인 잡지들, 해외판 미술 잡지, 사진집, 팸플릿 같은 것들이 선반에 정리되어 있었다. 거기서 적당한 사진이나 레터링 같은 걸 찾으면 그 자료의 일부분을 변형시키는 작업에 들어갔다. 가운데 혹은 가장자리 일부분을 잘라 그대로 확대해서 사용할 때도 있었고 바탕색을 바꾸거나 두세가지를 조합하는 식으로 시안을 세개쯤 만들었다. S1이 주로 그 일을 해냈다. 유석은 그 시안들을 살펴본 후에 하나를 골라주며 강주 형이 했던 말을 습관적으로 중얼거리곤 했다. 튀겠다는 생각은 하지 마. 중요한 건 고객의 니즈에 접근하는 거지. 독립하고 보니 그 고객의 니즈,라는 게 배고픈 호랑이였다.

그래놓고 S1은 시안 퇴짜맞으면 또 남의 탓을 했다. 담당 새끼가 작업공정에 대한 이해라곤 하나도 없이 뭐 절편 자르듯 잘라서 아무 데나 끼워넣으면 되는 줄 알아. 떡고물이나 챙기려 들고. S1이 입 하나는 남부럽지 않게 험했다. 그럴 때면 S2는 이상한 논리로 편을 들었다. 그래서 시안을 일찍 줄 필요 없다니까? 애들이 습관적으로 빠꾸를 놔요. S3이 마무리를 했다. 그러면 지가 감각있는 걸로 보이는 줄 알아.

이렇게 부르면 직원이 무척 많았던 것 같지만 이 셋이 다였다. 그러니까 1, 2, 3. 다만 새 프로젝트 들어갈 때마다 알파벳만 바꾸었다. 그건 유석의 아이디어였는데 제 생각에도 꽤나 합리적인 호명 방식이었다. 사무실 벽면의 화이트보드에 이름을 쓰고는 그 아래 작업내용, 일정, 특기사항 등을 기록해놓으면 진행 상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A, B, C 순이었는데 X는 사용하지 않았다. 일이 여러개 겹쳐도 호칭만으로 어떤 일에 대한 질문인지 지시인지 알 수 있었다. Z3B3은 그러니까 동일인물인 것이다. 알파벳은 변수이고 아라비아 숫자는 상수. 송이는, 그냥 송이였다.

모듈 인생, 레고쪼가리, 저글링, 마린. 내 몸값, 미네랄 오십…… B1이나 C3으로 부르면 그렇게 엄살들을 떨었지만 정말 미네랄 오십 정도로 부려먹었던 건 제 이름으로 불렸던 송이였다. 송이는, B4F4로 불리고 싶었을까. 언젠가 알파벳 A 차례가 돌아왔을 때 장난처럼 어이 에이포, 불렀을 때 송이 얼굴에 떠올랐던 웃음이 참 그랬지. 얼굴이 살짝 부서지듯 웃던. 계산도 격의도 없이. 이내 사라지긴 했지만.

 

두번째까진 사실 폭망이었죠. 상처요? 그건 별로. 워낙 제 인생이 폭망의 연속이었거든요. 작업은 즐겁게 했고 제 마음에도 들었고. 그럼 된 거죠. 어쨌든 그 두권이 있었으니 세번째가 나올 수 있었던 거고. 출판사에는, 미안했죠.

 

원래부터 애가 내숭이랄까 그런 게 없었다. 때로는 그게 지나쳐 상대방을 당황하게 하기도 했고 그런 것들이 모여 스스로의 존엄을 흩어버리기조차 했으니까. 송이의 폭망 인생에 대해선 그 시절에 이미 알고 있었다.

사무실 바로 옆에 손바닥공원이 있었다. 공원이라기엔 작은 공터에 불과한. 시유지라는데 한번도 건물을 안아본 적이 없는지 제법 둥치가 아름을 넘는 나무들이 뜬금없는 자리에 몇그루 서 있었다. 구석엔 플라스틱 미끄럼틀과 그네가 있었지만 주변이 상업지역으로 바뀐 지 오래라 거기서 노는 아이들을 본 적은 없었다. 점심시간이면 근처 사무실 사람들이 나와서 해바라기를 하며 담배를 피웠다. 밤늦게는 부둥켜안고 있는 중학생 커플들이 종종 보였다. 한마디로 심란한 장소였다. 어느 밤에 나오니 송이가 뭔가를 끌어안고 있었다. 놀이터 한가운데 있는 나무였다. 너 뭐하냐? 충전 중이에요. 듣고 보니 그렇게 보였다. 둥치가 제법 굵었다. 유석은 그쪽으로 담배연기를 뿜으며 놀렸다.

그걸로 충전이 돼?

워낙 텅 비어서 뭐로든 충전이 돼요.

좋겠다, 넌. 배터리가 아직 살아 있으니.

힘들다 소리 좀 입에 달고 살지 마세요. 말이 씨 된다잖아요.

거기까지만 하면 될 걸 송이는 또 제 밑천을 죄 들추었다. 그게 얼마나 남루한지 냄새나는지 징그러운지 저만 모르고.

그래도 사장님은 빚잔치가 뭔지 모르죠? 전 철들고만 세번이에요. 우리 엄마가 좀 그래요. 사주팔자가 무재(無財)라나 뭐라나. 벽에 달걀이 붙으면 붙었지 엄마한테는 돈이 안 모인대요. 그래도 그게 파산신청보다는 인간미가 있어요. 마지막 잔치 하고 탈탈 모으니 이백만원쯤 되더라고요. 남아서 남은 게 아니라…… 다 아는 사람들이니까. 이모고 삼촌이고 조카들이고…… 핏줄이니까. 다시 안 볼 듯 저주를 퍼붓던 끝에 또 제 몫에서 조금씩 떼놓고 일어서더라고요. 그래서 빚잔친가?

누가 지나가다 들으면 둘이 돌잔치 의논이라도 하는 줄 알았을 텐데 유석은 이 여자가 말끝에 돈이나 빌려달라 하면 어쩌나 그런 걱정도 했었고 또 좀체 남 앞에 드러내지 않는 제 얘기를 분위기에 휩쓸려 털어놓고는 후회를 하기도 했다.

속을 들여다보면 다 그래. 우리 아버지는 오년째 암투병 중이거든. 곧 돌아가실 것 같더니 병원에서 무슨 요법이라도 받고 나면 데쳐놓은 시래기 같긴 해도 또 고비를 넘기고. 요즘은 솔직히 마음이 그렇다. 왜 우리 아버지는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시나. 이 사무실 열면서 엄마한테는 곧 치킨집 차려준다 큰소리했는데 여전히 엄마는 남의 치킨집 주방보조 하고 있고.

매정하게도 송이는 나무를 끌어안고는 맞장구 한번 쳐주는 법이 없었고 유석은 미끄럼틀 위에 쪼그리고 앉아 그만해야지 하면서도 또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 밤이 몇번이었더라. 송이는 그 나무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직 그 나무였다. 나무를 껴안고 잠든 듯 가만히 있을 때도, 웃음명상이라도 하듯 혼자서 하하 웃고 있을 때도 있었다. 자꾸 보니 그냥 그런가보다 하게 되었다. 언젠가는 열시쯤 나갔더니 썬글라스를 끼고는 나무를 안고 있었다. 꺼멓긴 한데 렌즈가 크진 않아 어찌 보면 맹인용 안경 같았다. 그건 심오하게 웃기는 광경이었는데 왜 그걸 쓰고 있는지 물어보면 안될 것 같았다.

그게 무슨 나무야?

이거요. 모과나무예요.

어? 어떻게 알았어?

유석이 아는 건 꽃 핀 벚나무와 물든 단풍나무가 고작이었다. 송이가 마지못한 듯 손가락으로 하늘을 찔렀다. 올려다보니 노랗게 익은 모과 두개가 보였다. 내내 달려 있었을 텐데 유석은 보지 못했다. 송이는 또 그걸 노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느 저녁에 혼자 나갔더니 모과 하나가 모래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들고 왔더니 송이가 한숨을 푸 쉬었다.

그 모과 저 주시면 안돼요?

책상에 올려두면 한 열흘 향이 좋겠지만 나중엔 꺼멓게 될 거다. 차 담그려고? 건네주며 물었더니 뚱한 얼굴로 그랬다.

안고 자려고요.

 

한동안 그렇게 색칠하는 일에 푹 빠져서 지냈어요. 한참 빠져 있을 땐 지나가는 사람이 컷으로 미분돼서 보이기도 했죠. 아니마,라는 라틴어가 생기 숨결 뭐 그런 뜻이라는데 그 밑그림들에 색칠을 하고 그것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걸 보면 아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있구나, 그런 행복감도 분명 있었어요. 제 상황이 그렇다보니, 네, 마음이 갔죠. 작은 회사였어요. 가족적인 분위기였고 무엇보다도 같이 일했던 분들이 정말 좋았어요. 그분들이 참 여러가지로 도와주셨어요.

 

처음엔 그랬지.

123이. 성냥팔이 소녀의 언 손을 녹여주고 싶어하는 마음으로. 정수기를 퇴짜놓은 유석을 한목소리로 닦아세운 것처럼.

송이는 참 여러가지를 팔아보았다 했다.

오오! 세일즈 아무나 하나. 세일즈는 자본주의의 꽃이지.

놀리는 줄도 모르고 송이가 하는 얘기를 오다가다 들어보면 세일즈라고 하기엔 좀 그랬다. 마지막 일자리는 오피스가 많은 이 동네에 맞춤한 만물상 같은 가게였다. 정수기만 판 건 아니라 했다. 다양한 사이즈의 서류봉투와 포스트잇, 접착제, 파일북이나 복사지 같은 소모품부터 페트병 가습기, 전동드릴 같은 소형가전도 취급했고 망하거나 이사하는 사무실 비품을 헐값으로 넘겨받아 프린터, 컴퓨터 등을 대여하기도 했는데 그리 크지 않은 가게 안에 없는 게 없다 했다. 그게 자기 가게도 아닌데 그날 울긴 왜 울었어? 위기탈출용 쑈? 아니면 전략? 사실 실적제라 아무래도 좀 필사적일 때가 있긴 했어요. 그날도 딱히 정수기 팔려던 게 아니라 고객확보 차원에서 나왔거든요. 전화하면 배달도 해주는데 다들 급해서 찾다보니 제법 센 가격에도 가게는 꽤 잘 돌아갔어요. 그 얘길 듣고 123은 단체로 몰려가서는 중고 소형가습기와 전기포트 같은 걸 싸게 샀다며 희희낙락 돌아오기도 했다.

정수기는 약과예요. 프린터 출력까지 해보고는 안하겠다는 데도 있어요.

아주 개새끼들이네. 컬러잉크가 돈이 얼만데. 별별 진상 다 있지?

들어와서 백가지를 물어보고는 멀티콘센트 하나 달랑 들고 반값으로 깎기도 하죠. 그런 사람 오전 오후에 하나씩 꼭 있어요.

다이소로 가든가.

안 판다고, 꺼지라고 했어요.

그때쯤은 꺼지란 말 대신 소심하게 고개를 저었을 뿐임을 알고 있었다. 123은 제 몫의 일들을 살짝살짝 송이한테 미루고는 가끔 쥐 생각해주는 고양이 같은 말을 던지기도 했다.

송이씨도 이제 자기를 좀 챙겨. 사람들이 이기적인데 그중에서도 가족이 제일 이기적이야. 끝없이 해줘봐. 이제 됐다고 그만하란 소리 하나.

그러고 있어요. 따로 저축도 좀 하려고요.

아니 그런 거 말고 셰이프적인 거. 체중관리도 하고 화장도 좀 하고. 월급 받아서 뭐해. 옷도 좀 사 입어. 너 그러다 젊어보지도 못하고 아줌마 된다?

앞에서 보면 동그란 눈매 때문에 그나마 나은데 뒤에서 보면 어째 애 하나 낳은 아줌마 느낌이긴 했다. 늘 생각없이 말부터 던지는 3의 입바른 소리에 송이의 대답이 참 무심했다.

아줌만데요, 뭐.

그 말끝에 이상하게 유석을 포함한 네사람은 더이상 말이 없었다. 질문 폭탄이 이어졌을 법한데도. 어머, 자기 결혼한 거야? 남편은 뭐해. 그렇게 일찍? 그런데 송이의 그 말을 썰렁한 농담으로 치부하겠다는 듯 반응이 없었다. 못 들은 걸로 할래, 뭐 그런 기류. 그게 처음은 아니었다. 조용한 실내로 송이가 가끔 통화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그래봤자 멀고 가까운 가족뻘인 듯했지만. 나한테 이러면 안돼요. 그럴 때의 목소리는 한껏 낮출수록 더 또렷이 들려왔다. 셋은 그 막무가내 인간이 누군지 묻지 않았다. 경멸이란 말은 정확하지 않다. 정체 모를 점성의 질퍽거림에서 얼마간 떨어져 있고 싶었던 건 유석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송이 탓도 없진 않았다. 어떤 얘기를 할 때면 유석도 속으로 생각했다.

저런 얘긴 밤에 썬글라스 끼고 나무한테나 들려주지.

어느 오후에는 누군가와 아주 반갑게 통화를 했다. 거기서 가까워. 나가진 못해. 잠시는 괜찮아. 얼마 되지 않아 누가 찾아왔는데 한눈에 딱 봐도 날라리였다. 친구 맞아? 싶었다. 믹스커피를 타들고 둘이 자료실에 들어가 삼십분쯤 있다 나와서는 그 친구는 돌아갔다. 바래다주고 돌아와서 그랬다. 죄송해요. 중학교 때 짝인데 진짜 오랜만에 연락이 돼서. 교우관계가 되게 유연한가봐. 그래야 인생이 재밌긴 하지. 중학교 때 보고 첨이야? 다단계 조심해. 아니, 그런 애 아니에요. 고삼 때도 한번 봤어요. 쟤가 제 생일이라고 찾아온 거예요. 전 생일인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수업 마치고 나오니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애는 참 착했는데. 고등학교는 중간에 그만뒀다 하더라고요. 생일이라고 저녁 사준다고 왔대요. 둘이 명동 나와서 명동 입구에서 잠시 기다리라 하더니 좀 이따 지갑을 세개나 들고 왔더라고요. 뭔 지갑? 1이 물었다. 송이가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남의 지갑이죠. 2가 입을 딱 벌렸다. 남의 지갑! 아무나 사무실 들이고 그러지 마, 송이씨. 1은 서랍 속에 넣어둔 초코바를 똑똑 분질러 제 입에만 넣으며 말했다. 거봐. 내가 뭐랬어. 3이 목소리를 착 깔았다. 출입문 비번 바꿔야 되는 거 아냐? 그만들 하라고, 당신들은 남의 지갑이라도 털어 생일 챙겨주는 그런 뜨거운 친구 돼본 적이 있느냐고 유석이 나섰는데 매사에 아는 척이 습관인 2가 끼어들었다. 그거 안도현 시잖아요. 광화문 글판에도 걸렸던. 연탄재 뭐 그거? 버스 타고 지나다 그 글판 보이면 기분이 좋아. 이렇게 저희들끼리 어쩌고 떠드는 바람에 그냥 넘어간 적도 있었다.

기사 전문이 실려 있다는 인터넷 페이지로 들어가보았다. 그림책 사진이 사이사이 들어가 있었다. 스토리에 맞춘 삽화는 그림이 아니라 사진이었다. 사진인데 그림처럼 보였다. 사진 속 아이템들은 송이가 직접 만들었다 했다. 재질은 아주 다양했다. 종이죽이나 점토로 만들어 색칠을 하거나 연근이나 딸기, 돌 같은 것들을 그대로 사용하기도 했다. 빗줄기는, 국수가닥을 썼다. 손박음질로 만든 헝겊 토끼는 썬글라스를 끼고 있었는데 검은색이라 토끼 눈은 보이지 않았다. 뭐 오밤중에도 쓰는데 비오는 날쯤이야.

 

시간 엄청 걸리긴 해요. 조금만 타협하면 진도도 빠르고 편해지는 거 아는데 그냥 다 만들어요. 제 손이 이래요. 찍히고 데고 피가 나고. 하고 있을 땐 몰라요. 제가 현실에서도 많이 무뎌요. 원래 무뎠나? 그렇기도 했겠지만 둔감해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굴곡이 좀 있었으니까.

 

솟구쳤다 푹 꺼지던, 푹 꺼지기 위해 잠시 평탄하곤 하던 그녀의 굴곡에 대해 유석은 안다. 그게 ‘좀’이 아니란 것도. 늦가을엔 한동안 점심시간에 조퇴가 잦았다. 아버지가 구치소에 들어가 있다 했다. 사정을 물어보면 참 소상히도 얘기를 했다.

산에서 같이 술 마시던 사람을 칼로 찔렀다데요. 그 사람이 술에 취해 무어라 큰 소리를 지르는 걸 자기한테 화를 낸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팔자 좋으시다. 산에 놀러다니시고. 그건 아니고 등산로에 아이스박스 놓고 뭘 좀 팔아요. 여름엔 아이스케키 박스 몇군데 두면 그게 괜찮거든요. 한개 이천원인데 밤에 맞춰보면 사람들이 되게 정직해요. 근데 아주 가끔씩 털어가는 놈도 있긴 해요. 아이스케키 팔면서 술은 왜 마셨대? 아이스케키는 여름 한철이죠. 컵라면이나 막걸리도 같이 파는데 그걸 조금씩…… 알코홀릭이셔? 중독이냐고. 그것보다는, 정신이 좀. 타인에 대한 공감력이 부족하대요. 그게 싸이코패슨데. 싸이코패스는 아니고요. 공사판에서 일하실 때 높은 데서 떨어진 적이 있거든요. 겉으로 티가 안 나서 그냥 넘어갔는데 그때 전두엽인가, 어디 뇌를 조금 다친 것 같대요. 멀쩡하다가 갑자기 폭발하듯 화를 막 낼 때가 있어요. 자주는 아닌데 그럴 땐 대화가 안돼요.

지하철을 두번 갈아타고 의왕까지 가서 면회를 하고 돌아오면 오후가 다 지나갔다. 물론 빠진 시간만큼 야근을 하긴 했지만. 송이가 그렇게 의왕까지 뛰어다닐 때 셋은 또 송이를 뜨악하게 대했다. 송이가 멀쩡하다 갑자기 칼을 들고 덤비기라도 할 것처럼.

 

그해 초겨울에 강주 형이 한번 보자 전화를 했다. 청담동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유석 혼자 허겁지겁 먹다보니 형은 깨작거리기만 하고 별로 먹질 않았다. 소믈리에가 와서 와인을 추천하는데 자신은 와인에 대해 모른다며 그가 권하는 걸 주문하는 형이 되게 괜찮아 보였다. 형은 세계를 떠돌다 며칠 전에 돌아왔다 했다. 한걸음 앞서 미래를 맞이하기 위해. 연초부터 배낭을 메고 떠돌았다는 형이 시간여행자처럼 보였다.

런던과 토오꾜오와 상하이를 거쳐 여름부터는 뉴욕에서 머물렀어. 눈앞에 코를 박고 있다간 한순간 도태돼버릴 것 같아서.

아 진짜. 형이 그런 얘기 하면 어떡해. 뭐가 무서워요?

다 무서워. 가장 무서운 건 이거야. 유일무이한 신.

형은 손바닥에 놓인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멀찍이. 팔을 늘어뜨린 채.

사무실은 잘되니?

압구정에서 사람을 만나고 신사동에서 술을 마시지만 중고 포르쉐를 사지는 못했다는 농담을 할까 하다 그냥 웃었다.

지금 하는 걸로는 미래가 없어. 휴대폰을 플랫폼으로 하는 사업을 준비하고 있어. 먼저 매력적인 게임을 만들어 시장에 돌풍을 일으키고, 그걸로 애니메이션을 만들 거야. 그게 잘되면 캐릭터를 출시할 거고. 게임 자체는 아주 단순하게 갈 거야. 그렇지만 세상의 단순명료한 일들이 다 그렇듯이 엄청나게 복잡하고 힘든 준비작업이 필요하겠지.

게임은 형이 해온 일이 아닌데.

다행인 건 게임의 진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오히려 승산이 있어. 그걸 따라잡으려 하지 말고 다른 방향으로 슬쩍 디뎌보는 거지. 시스템도 거의 만들어놨고 앞으로는 회사도 클러스터 시스템으로 갈까 해. 각각 다른 일을 하는 팀을 모으는 거지. 포도송이처럼. 그래서.

형은 비로소 와인의 첫 모금을 마셨다.

너도 한번 참여해보라고.

에이 제가 어떻게요.

겸손이 아니라 실재로 깜냥이 안된다 생각했다.

너보고 직접 집까지 지으라는 게 아냐. 설계도를 그려보라는 거지. 한번 들어서면 출구를 찾고 싶지 않은 미로를 설계해봐. 결과와 상관없이 기본 경비는 부담해줄게. 출시까지 이어지게 되면 그때부턴 러닝개런티 방식이고.

형 목소리가 한층 달콤했다. 마스터플랜 제출 시한은 9주 후였다. 기본적인 업무를 하면서 가외로 작업을 해야 했으나 사무실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형은 약속대로 세부정산이 필요없는 사업비를 입금해주었고 유석은 그중 일부로 시간외근무 수당을 따로 지급했다.

뭐 스토리 시안만이라면 널널한 거 아니에요? 제작이 머리 쥐나는 거지. 2의 태평스런 전망과 달리 처음엔 막연했다. 우린 그냥 색칠하는 게 속 편해요. 그건 사장님이 해보세요. 3이 현실을 일깨웠다. 끼어들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송이가 조심스레 말했다. 어차피 채택 안될 거다 생각하고 자유롭게 의견들을 내다보면 뜻밖의 아이디어가 나올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이런 식이었다.

 

……로케이션은 외딴 섬. 도입부에서 위성 시점으로 섬을 내려다보면 아주 긴 다리로 육지와 연결된 섬은 막대사탕처럼 보여. 북쪽엔 무성한 방풍림이 있어. 그 반대편엔 휴양시설의 불빛이 화려하게 반짝이고. 계절은, 여름 저녁이 좋겠네요. 피서객을 위한 축제가 시작된 걸로 하면 자연스러우니까. 높이 쏘아올린 불꽃 하나가 펼친 우산모양 하늘에 잠시 머무는 걸 시작으로 미친 듯이 불꽃이 터져. 연기에 가려 한동안 섬이 보이지 않아. 암울한 상황에 대한 복선이야. 상징이겠지. 보는 사람의 간이 서늘해지도록 시점이 순간 낙하하면서 실내 장면으로 들어오는 거야. 축제를 끔찍이 싫어해서 당번을 자처한 여주인공이 새우깡을 먹으면서 만화를 읽고 있어. 벽 한면을 가득 채운 폐쇄회로 화면에 가끔 시선을 주면서. 과자종류나 만화는 사용자가 선택할 수 있어. 물론 비용이 들지. 뱅헤어에 패션은 흑백의 한복. 치렁한 거 말고 유관순 스타일. 오렌지색 머리는 가발이야. 나쁘지 않네. 제어시스템에서 경보가 울리고 여주인공이 만화책을 집어던지고 일어서면서 오렌지색 가발을 벗어던지는 걸로 오프닝. 갈등구조는요? 별일 있으랴 하고 활단층 위에 세운 구조물인데 가까운 대륙붕에서 진도 7의 지진이 발생한 거지. 이 구조물은 사실 핵폐기물 저장시설이고 유관순 한복은 핵 전문가야. 님비 때문에 시설의 존재는 국가기밀에 부쳐져 있어. 당황한 여주인공은 일단 사내 비밀연애 중인 연구원 유석에게 전화를 하지만 가족을 만나러 서울 간다고 거짓말하고는 휴양지 클럽으로 놀러간 그의 휴대폰은 꺼져 있어. 딱 우리 사장님 캐릭터네. 내가 뭘? 공포에 사로잡힌 여주인공은 스포츠카를 타고 시속 백팔십으로 섬을 탈출하다 결국은 다리 진입로에서 유턴을 해. 마침 심상찮은 흔들림을 느낀 유석도 급히 복귀하고. 나를 지킬 것인가 지구를 지킬 것인가 갈등하면서 상황을 타개하는 게 기본구조야. 차라리 시끌벅적한 여주인공의 스물아홉번째 생일을 오프닝으로 하면 어때요? 행복과 재앙의 보색대비 같은. 좋아, 첫 장면은 여주인공 생일파티로. 「반지의 제왕」 오프닝 씬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겠는데? 그런가, 생일파티는 누구나 하는 건데. 사실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은 거 맞아요. 그렇게 중구난방 떠들다가 누군가의 한숨과 비관론이 대두되고 종내는 무산되는 식이었다. 아휴 핵이라니. 너무 암울해요. 에헤이. 그거야 그냥 패션 같은 거지. 플랫폼이 스마트폰이라면 좀더 미니멀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숱한 스토리들이 만들어졌다가 다양한 이유로 폐기되었지만 괜찮은 방식이었다. 겨울 동안 사무실은 활기에 차 있었고 그중 출시까지 연결된 건 호박공주님 시리즈였다.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은 어때요? 송이가 처음 아이디어를 꺼냈을 땐 다들 반대하는 분위기였다. 아이고 그게 언제적 유행인데. 나 중3 때 전성기였지. 그거 하다 재수할 뻔했잖아. 일단 남자들은 안할 거 아냐? 거기다 주인공이 장애인이라니. 응? 송이가 은근히 고집을 부렸다. 새로운 살인 방식만 창조하느니 좀 살냄새 나는 것도 좋잖아요. 송이가 짜놓은 스토리를 보니 독특한 물건이 나올 것 같기도 했다. 그러네. 그러면 되겠네. 브레인스토밍이 이래서 필요하다니까. 유석이 애매하게 눙치고 나면 송이의 아이디어는 공동의 것이 되었다. 송이 말처럼 어차피 안될 거다 생각하면서 접근하니 조바심에서 나오는 자체 검열도 없었다.

단순함의 미학이 있네. 뭐 이쪽으로 전공한 거 아냐?

유석이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아보겠다고 날린 립서비스였는데 송이가 면접생 분위기로 대답했다.

전공까지는 아니고요. 특성화고가 있어요. 애니메이션 고등학교라고……

주도권을 빼앗겼다 생각했는지 은근히 불편한 기색이었던 123이 기다렸다는 듯 각을 세웠다. 어머, 왜 여태 얘기 안했어? 우리 하는 게 속으로 되게 우스웠겠다? 1이 그게 아니라, 하는 송이의 말을 자르고 단정했다. 감쪽같이 속였네! 에헤이 그게 뭘. 속이긴 뭘 속여. 유석의 말에 2가 퍼르르했다. 말 안하는 게 속이는 거죠. 송이가 없는 데선 더했다. 애가 비밀이 많아. 미혼모 아니겠어? 사실 우리야 디자인이지 애니 쪽은 아니잖아. 셋은 급조된 결속감으로 뭉쳐서는 심지어 송이가 뭘 쳐다보는 방식까지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사람하고 눈을 못 맞춘다? 애가 좀 습해.

결정적으로 틀어진 건 출근한 1이 제 모니터에서 낯선 씨놉시스와 캐릭터를 발견한 일 때문이었다. 누가 내 컴퓨터 해킹했나? 1의 말에 송이가 아, 하면서 벌떡 일어섰다. 어제 제가 좀…… 죄송해요. 일요일에 나와서 거기서 뭘 좀 만들어본 모양이었다. 제 컴퓨터엔 깔려 있지 않은 프로그램이 필요했겠지. 저장장치에 옮기고는 지우는 걸 깜박한 것 같았다. 그 자리에선 아무 대답을 안해 송이를 더 불편하게 해놓고는 뒷말을 했다. 쟤 다른 일 받아와서 하나봐. 월급 받으면서 그러면 안되지. 애가 사람을 배신할 눈빛이야. 자료실에라도 들어가면 문이 닫히기도 전에 차갑게 그랬다.

내가 쟤 뒤통수만 봐도 갑상선 기능이 떨어지는 거 같아. 막 오슬오슬 떨려.

 

최종적으로 네편의 씨놉시스를 보냈다. 설마 그게 채택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형은 호박공주님 스토리가 아주 좋다고 했다.

사실 청각장애인용 게임은 이미 나온 게 있어. 내용은 이거와 완전 다르지만. 이이노 겐지라는 일본사람이 만들었지. 소리를 시각적 자극으로 바꾸어서 보여주는 아이디어가 아주 신선했는데.

잠시 화면 멈추고 피를 걸레로 훔쳐내고 싶어지던 그 살상게임 만든 애요?

그렇지. 애는 아니고. 이미 고인이야. 이건 또다른 감성이네. 캐릭터도 아주 매력적이고 진짜 장애인 가족이 만든 것 같아. 디테일이 좋아. 몇가지 수익장치 넣기도 좋은 구조야.

기술적으로 가능해요? 소리를 시각이미지로 만든다는 게?

뭐, 장애인을 위한 게임이라는 이미지가 중요한 거지. 실제 청각장애인을 위한 건 아니지. 몇가지 포인트만 살리면 돼. 예를 들면 가쁜 숨소리를 가슴의 오르내림으로 표현한다든가 바람소리 대신 헐렁한 외투자락을 펄럭이게 하는 식이지.

짐작은 했지만 형이 프로젝트에 참여를 권유한 팀은 유석만이 아니었다. 스마트폰 기반의 게임은 동시에 세종이 출시되었다. 셋 다 시장 반응이 기대 이상이었지만 호박공주님은 여러가지로 이슈가 되었다. 청각장애인용이라는 호기심으로 촉발된 시장은 정상인들이 더 열광하면서 기대 이상의 파란을 일으켰다. 셋 중에서 캐릭터 판매가 가장 많이 된 것도, 배너광고가 가장 많이 들어온 것도 호박공주님이었다. 유석으로선 기쁜 한편 어리둥절했다. 게임 영상은 일부러 그런 듯 실사 느낌을 덜어낸 터라 첫인상이 철지난 만화 느낌이었다. 부진을 예언했던 게임평론가들 역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형은 아이디어가 좋았다고 공을 유석에게 돌렸다.

무엇보다 청각장애인용이라는, 엄청나게 작은 시장규모를 알면서도 개발했다는 공적 가치가 기폭제가 된 거지. 한번 거품이 흘러넘치면 사소한 결점들은 다 덮여버리게 되는 거고. 정치적 올바름이라고나 할까. 조금 각도가 다르긴 하지만. 네가 트렌드에 대한 감각이 있어.

정신없는 시간이 지나고 형이 한번 찾아왔다. 오후에 와서 사무실을 둘러보고는 저녁을 거하게 샀는데 생선회와 초밥이 차려진 식탁 앞에서 어찌나 이야기를 재미있게 했는지. 게임에서 뮤지컬로, 영화로, 세상의 모든 애니 캐릭터를 만나볼 수 있는 시부야의 쇼핑몰로 종횡무진 오간 대화에 늙은 여우들의 눈에선 하트가 비눗방울처럼 퐁퐁 솟아나왔다. 헤어지고 밤늦게 형은 따로 전화를 했다.

잘 들어갔지? 그럼요. 형 고마웠어요. 고맙긴. 내가 고맙지. 근데, 네가 원래 여자사람 취향이 좀 빈티지했나? 그건 아니고요. 월급도 많이 못 주고 하니까. 그래도 다들 성실하긴 해요. 네가 인간성이 좋다. 너도 알겠지만 여기 직원들 지난해부터 공채야. 유학파도 여럿 있고. 일단 너 혼자 전략본부로 들어와. 총괄업무를 맡게 될 거야. 한명만 데리고 가는 건 어때요? 파티에 가면서 식은 도시락 들고 가겠니.

형은 처음의 두가지 약속을 지킨 셈이다. 출시한 첫 분기부터 러닝개런티를 지급했다. 개발비용과 경상비 분담금, 광고비 등을 제하고 계산한데다 세금까지 원천징수하고 나니 예상보단 적은 액수이긴 했으나 유석이 벌던 것과는 규모가 달랐다. 통화할 때와는 달리 클러스터로 들어오는 방식에 대해선 유석에게 알아서 하라고 했다. 팀으로 오든 혼자 오든. 유석은 일단 혼자 들어가기로 했다. 제 팀을 따로 관리한다는 게 얼마나 고달픈 일인지 뼈저리게 느낀 끝이기도 했고 혼자 온다면 개발팀 아닌 전략본부 쪽 일을 맡기겠다는 형의 말이 유혹적이었다. 봄이 한창일 때 저간의 사정을 쏙 빼고 경영난으로 사무실을 접는 걸로 마무리했다. 단체로 마지막 회식을 했고 송이와는 따로 한번 저녁을 먹었다. 밥집에서 나와 헤어지기 전 유석이 바퀴벌레 턱 넘어가듯 말했다.

자기도 열심히 해서 앞으로 성공해야지.

그래야죠.

말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어째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 있던 인사. 말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전혀 믿지 않았던 인사를 나누고 걸어가다 뒤를 돌아보았다. 사람들 사이로 섞여드는 뒷모습에 무슨 계시처럼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저 여자, 앞으로의 삶도 지금과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같은 건물에 있는데도 강주 형의 얼굴을 회사보다는 신문지면에서 보는 일이 더 잦아졌다. 회사 이름은 미래전략 기업으로 오르내렸고 지난해 가을엔 서초동의 오층짜리 건물을 사들여 사옥을 이전했다. 그래놓고는 형은 배낭을 메고 바깥으로 떠돌았다. 미국인지 중국인지, 상하인지 뉴욕인지, 왕징 거리인지 맨해튼인지 행선지는 말하지 않았다. 불안해서. 무엇에 대한 불안인지는 정작 모르겠고. 확실한 건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새로운 플랫폼이 나온다는 것, 그게 무언지 짐작할 수도 없다는 것뿐이야. 화두처럼 그런 말을 던져놓고는. 대학과 기업의 특강초청을 가려서 거절하고 대출을 해주겠다는 지점장들의 전화를 요령껏 피하는 일은 유석이 맡았다. 그외에도 유석이 하는 일은 아주 다양했다.

 

언젠가는 그곳 얘기를 그림책으로 만들어보고 싶긴 해요. 그 시간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저도 없을 테니까. 캐릭터는 다 만들어놨는데. 별명도 있어요. 알고보면소심쟁이, 입냄새대박, 수전노, 어차피대머리. 아, 그분들이 이 기사 보면 안되는데.(웃음)

 

활짝 웃는 송이 손바닥에 인형 네개가 놓여 있었다.

그 시절, 간이침대에서 자고 일어나 손바닥으로 얼굴을 쓱 비비고는 그만이었던, 야식 사오라며 만원 한장을 내밀던, 떡진 머리카락 사이로 두피가 허옇게 드러나 있던 유석은 그 넷 전부이기도 했다. 그래도 유석은 저를 곧바로 알아보았다. 실제보다 머리카락이 많이 부족하고 실제보다 나이 들어 보이고 실제보다 약아 보이지만 남자인형은 하나뿐이었다. 그땐 빠지는 머리카락쯤은 신경쓸 상황이 아니었지. 그러니까 선택의 여지 없이 ‘어차피대머리’. 하지만 머리카락보다는 그 양손에 하나씩 들려 있는 당근.

 

그 밤의 놀이터가 떠올랐다.

청담동에서 강주 형을 만나기 전날 밤. 아니다. 자정을 훌쩍 넘겼으니 같은 날이구나. 다들 돌아가고 집이 가까운 송이와 둘이서 끝이 안 보이는 노가다를 하고 있었다. 바람 좀 쐬고 오겠다고 나간 송이가 들어오질 않아 슬그머니 찾아나선 참이었다. 송이는 예의 썬글라스를 쓰고 모과나무를 껴안고 있었다. 날도 추운데. 유석은 미끄럼틀 위에 올라앉아 담배를 한대 피웠다. 달이 떠 있었고 날이 흐린지 달의 윤곽은 희미했다. 흐릿한 달은 아득히 멀어 손닿지 않는 어떤 구멍, 여기보단 환하고 따뜻한 곳으로의 출구 같기도 했다. 언제쯤부터 유석은 옷소매로 눈두덩을 문지르고 있었다. 눈두덩을 문지르며 속 얘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그때쯤 피차 속을 너무 까발리는 바람에 더이상 털어놓을 게 없으면 좋았으련만 둘 다 그러질 못했다.

송이는 또 무슨 얘기를 더했더라. 하나 있는 남동생이 장애가 있다는 얘기. 지금 엄마와는 같이 살지 않는다는 얘기. 아버지도 동생도 가끔은 저도 모르게 송이를 엄마라고 부른다는 얘기. 동생은 안 보이니 그런다지만 아버지가 눈 번히 뜨고 그럴 땐 참 무어라 말로 할 수 없는 마음이라는 얘기. 뭐 그런 것들. 송이가 아줌마도 미혼모도 아니라는 얘길 사무실 여우들에게 해주진 않았다. 유석이 보기엔 그게 그거였다. 그나마 송이의 아버지는 구치소를 나와 집으로 돌아왔는데 유석의 아버지는 다시 병원에 들어갔고 엄마는 치킨집 주방보조마저 내려놓고 간병을 하러 따라갔다. 뭐 그런 얘기도.

사무실은 남은 보증금을 까면 봄까지는 버틸 수 있는데도 건물주는 월세 삼개월치가 연체된 시점부터 착실히 내용증명을 보냈다. 월급날이 다가오면 두피에 쥐가 났다. 납기가 정해진 일을 받을 땐 스케줄을 확인하며 받아야 하는데 당시엔 그럴 수가 없었다. 어떻게 되겠지. 쫓길 줄 뻔히 알면서 학습교재 신제품 론칭에 쓸 영상물을 덥석 계약한 게 있었는데 말도 안되게 까다롭게 굴었다. 기본적인 스토리보드를 주면서 나머지는 자유롭게 해달라더니 절반쯤 진행된 상태에서 바뀐 스토리보드를 보내왔다. 어찌어찌 마무리해서 쌤플을 보냈더니 엄청 맘에 든다 해놓고는 말끝에 자잘한 요구사항을 덧붙였다. 전무님 영상 레퍼런스 하나만 짧게 넣어주세요. 타이포 좀 강하게 고쳐주세요. 저희는 괜찮은데 사장님이 마음에 안 드신다 해서. 다른 시안을 하나 더…… 피드백 들어갈 때마다 말짱한 얼굴로 사람 팔짝 뛰게 만들었다. 인건비와 디자인 비용을 추가로 요구했더니 계약서를 내밀었다. 추가비용 협상은 없다는 조항까진 괜찮은데 납기가 늦어지면 하루에 일 프로씩 위약금이 부과되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설마 이렇게 늦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그런 조항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어떻게 인간이 이럴 수 있어, 엉? 사무실에서 하소연하면 까만 눈동자 네쌍이 그런 유석을 강 건너 불 보듯 쳐다보았다. 자료실에서 쪽잠을 자면서 버티는 중이었다. 너무 피곤한데도 누우면 밀린 일감이 가슴에 턱 얹히면서 눈이 말똥말똥해졌다. 전날 오후에 유석은 열한번째 퇴짜를 맞고 돌아왔다. 그 밤에 유석은 다 집어치우고 어디로 달아나버리고 싶었다. 달을 올려다보고 있으니 앞뒤 없는 말이 불쑥 나왔다.

아까 내가, 양손에 총이 있었으면 거기 있는 놈들 다 쏴죽이고 나도 죽었을 거야.

송이는 모과나무를 끌어안은 채로 언제나처럼 못 들은 척 제 얘기만 했다.

아버지가요. 같이 술 마시던 사람을 칼로 찌른 얘긴 했죠? 그게 원래 구형이 세다데요. 근데 멘탈이 정상이 아니란 진단을 받았어요. 나라에서 다 해주더라고요. 그게 참작이 돼서 그냥 나왔거든요. 선택할 수 있는 거면, 사장님은 어떤 걸 선택하시겠어요?

그 새끼들이 생글생글 웃으며 얘기하는 게 한두번 돈 떼어먹은 내공이 아니야. 결국은 잔금 안 주겠다는 거지.

그러니까 말짱한 정신으로 형기를 꽉 채우는 게 나을까요, 실성한 사람이라는 표식을 붙이고 바깥에 있는 게 나을까요? 아버지 입장이 아니라 제 입장에서요. 네?

지난여름에 왜, 원화를 너무 줄여서 영상이 툭툭 끊기는 성경학교 교재 있었잖아. 암말 않고 받아간 전도사님들이 천사였다는 생각이 새삼 들더라니까.

쌘드백을 끌어안은 권투선수처럼 나무를 안은 채로 송이가 달래듯 그랬다.

사장님이나 저나, 그래서 양손에 총이 아니라 당근을 들고 있어야 되는 거예요. 네?

눈앞이 희끗하더니 콧등에 무언가 내려앉았다. 차가운 점. 첫눈이었다. 올려다본 하늘엔 여전히 달이 떠 있었다.

 

그러니까 썬글라스를 낀 채로 모과나무를 안고 있던 송이.

기억의 멀고 가까움이란 물리적인 시간이 아니라 강렬함으로 정해지는 거라면 그건 아마도 가장 가까운 기억이겠다. 새벽까지 희미하게 달이 떠 있던 놀이터는 줄이 한량없이 긴 괘종시계의 추처럼 예고 없이 스윽 떠오르곤 했다. 날것의 밑바닥을 누군가에게 들켰다고 느끼는 순간, 무릎이 꺾일 만큼 힘든 순간, 어떤 석연치 않은 순간, 그리고 또…… 그 새벽에 송이는 서로가 한층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을까? 유석은? 잘 모르겠다. 다만 그 새벽에 유석이 가장 힘든 시간을 지나고 있었던 건 사실이다.

유석은 자잘한 모래알갱이가 굴러다니는 듯한 눈에 인공눈물을 한방울씩 떨어뜨렸다. 쾌감이 한기처럼 퍼져나갔고 언제나처럼 빠르게 사라졌다. 유석은 그림책 페이지를 확대해 숨은 그림이라도 찾듯 들여다보았다.

근데 얘들은 똥 묻은 팬티를 찾아 어디까지 가고 있는 거야? 도로도 없는 어디 황량한 사막. 성한 데가 한군데도 없는 지프를 타고. 앞유리는 왕창 깨져 달아나버렸는데, 비는 쏟아지는데. 조수석에 앉은 토끼는 깜깜한 썬글라스를 끼고 대가 긴 우산을 바깥으로 펼쳐들어 들이치는 비를 막아주고 있었다. 근데 사막에 비는 또 왜 와? 유석은 송이가 옆에 있는 것처럼 뚱하게 중얼거렸다. 그거야 시적 허용이죠. 옆에 있었다면 언제나처럼 또 멀고 뜬금없는 소리를했겠지. 새벽까지 희미하게 떠 있던 달만큼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