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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박사랑
1984년 서울 출생. 2012년 『문예중앙』 신인상으로 등단. giparang-1@hanmail.net
#권태_이상
나는 달리고 싶었다. 티티 또한 그럴 것이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티티가 달릴 만한 길이 전혀 없었다. 아니 이곳까지 오는 내내 티티가 실력을 발휘할 기회는 한번도 없었다. 당연하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짜증이 일었다. 나는 괜히 아무도 없는 길에서 클랙슨을 울렸다. 빼앵, 클랙슨 소리마저도 참 기품 있었다. 티티는 석달 전 구입한 아우디사의 스포츠카였다. 원래는 람보르기니가 갖고 싶었으나 가격을 듣자 엄두도 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바로 눈을 낮췄다. 사실 람보르기니의 매력이라고는 잠자리 날개처럼 펼쳐지는 양쪽 문밖에 없는데 그건 달리는 거랑 아무 상관 없잖아? 겉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 순간에도 내 눈꺼풀은 잠자리 날개처럼 파르르 떨렸다.
아무튼 나는 중고차 시장에서 어렵게, 내 인생 최고의 적인 우유부단을 처음으로 무찌르고, 티티를 입양했다. 그렇지만 워낙 자식처럼 아끼느라 여태껏 집, 회사만 오갔을 뿐이다. 그러니까 오늘은 내가 티티와 함께하는 첫 장거리 여행이었다. 물론 나와 티티뿐이면 좋겠지만 조수석에는 대학 시절 단짝(이라 쓰고 웬수라 읽는다)인 매앵1이 코까지 골며 자고 있었다. 나는 매앵의 코를 비틀고 싶은 마음을 다스리며 전방을 주시했다. 여자가 아무 데서나 그렇게 퍼져 자고 싶냐, 이렇게 말하면 아마도 매앵은 남자답지도 못한 새끼가 마초 같은 소리나 한다고 설교를 늘어놓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게 아니었다. 문제는 날아갈 듯 달려야 하는 티티가 40km/h의 속도를 넘지 못하며 구부정대는 산길을 기어간다는 것이었다. 답답해서 문드러지는 속을 참을 수가 없는데 매앵의 코골이는 더 심해지고 있었다. 갑자기 손끝에서 심술 줄기가 뻗쳐나왔다. 남자답게 매앵을 흔들어 깨우든지 액셀러레이터를 밟든지 해야 했지만 나는 겨우 오픈 버튼을 눌렀을 뿐이다. 그러자 티티가 요동을 치며 뚜껑을 열었다. 매앵은 갑자기 들이치는 햇살에 못생김이 묻어난 얼굴로 일어나 말했다. 뭐야, 범블비 변신 중이냐?2
잠이 깬 매앵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금세 눈을 반짝였다. 와아, 너무 좋다. 온통 그륀이네? 나는 픽 웃을 뿐 대꾸하지 않았다. 매앵은 미국에서 단 삼년밖에 살지 않았지만 삼십년은 산 사람처럼 쓸데없이 발음을 굴렸다. 그것도 저런 세살짜리 조카도 알 만한 단어를. 음, 스멜즈 굿! 잇츠 풀 냄새. 매앵은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빠른 속도로 여러장 찍었다. 열장은 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대충 찍어서 사진이 나오냐? 하는 내 말에 사진은 촬영이 아니라 보정이야, 하고 대꾸하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심각하게 화면을 보며 사각틀에 사진을 넣고 효과 탭을 이리저리 눌러 사진을 올리고는 내 눈앞에 들이댔다. 푸른 숲이 펼쳐진 사진 아래에는 #Nature #so_cool #휴식에는그린,이라는 해시태그가 달려 있었다.
나는 매앵을 무시하며 내비게이션을 확인했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것 같았다. 야, 주소 검색이나 다시 해봐. 여기 아닌 것 같아. 매앵은 리얼뤼? 쏘 밷—을 외쳐가며 한글 주소를 꾹꾹 눌렀다. 내비게이션이 가르쳐준 대로 가도 계속 낯선 길만 이어졌다. 어렸을 때 봤던 길은 이제 없어진 건지, 아니면 내 기억이 잘못된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니 그저 내비게이션에 의지할 수밖에. 나는 의지 없이, 생각 없이, 희망 없이 삼무 정신으로 운전만 했다. 그러다 도착한 곳은 놀랍게도 내가 찾던 그곳, 할머니댁이었다. 내비게이션은 아직 더 가야 한다고 말했지만 나는 시동을 끄고 티티에서 내렸다. 저 비뚤어진 파란 대문은 할머니댁이 분명했다. 귀퉁이가 안 맞아 늘 닫히지 않던 문은 여전히 그렇게 비스듬히 열려 있었다.
마당에 들어서자 어릴 때 기억이 밀려들었다. 할머니는 항상 마루에 앉아 있다가 내가 오면 신발도 갖춰 신지 않고 걸어나오곤 했다. 포즈는 꼭 오래된 연속극에 나오는 할머니처럼 아이고, 우리 강아지! 할 것 같았지만 현실은 달랐다. 할머니는 나를 반기며 아이고, 우리 석을놈 왔냐, 했다. 쌍시옷 발음이 잘되지 않아 어쩐지 욕 같기도 하고 욕이 아닌 것 같기도 한 석을놈. 그게 여기서의 내 이름이었다. 괜히 마음이 시큰해져 할머니! 하고 허공에 외치고 싶었으나 뒤따라오는 매앵을 보고 꾹 삼켰다. 매앵은 마루에 드러누워 사람들 없으니까 좋다, 베리베리 귿귿, 하고 감탄사를 늘어놓았다.
오랜 시간 운전을 해서인지 눕자마자 잠이 쏟아졌다. 나는 억지로 눈꺼풀을 몇번 들어올리다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편하게 숨을 내뱉자 코끝에 나무 냄새가 스몄다. 아주 오랜만에 맡는 냄새였다. 더 잘 맡으려고 숨을 크게 들이쉬다 곧 잠이 들었다. 얼마쯤 지나 잠에서 깼을 때 주위는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매앵은 차에서 그렇게 잤는데도 또다시 깊이 잠들어 쉽게 깰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나무 기둥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마당을 쳐다봤다. 몇년 전 시멘트를 발라 만들었던 수돗가가 바싹 말라 있었다. 아직도 물이 나오려나, 다가가 수도꼭지를 돌리자 아주 차고 맑은 물이 쏟아져내렸다. 나는 물을 처음 만지는 헬렌 켈러라도 된 것처럼 오래도록 물줄기에 손을 넣고 신기해했다.
두달 전,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시골집은 비어 있었다. 산골 낡은 집의 재산가치는 거의 없었기에 다들 처분할 생각조차 못하고 그냥 놓아두었다. 오랜만에 생긴 휴가에 시골집에 온 것은 매앵 때문이었다. 나는 중견기업에 입사한 후 오년 동안 한번도 쉬지 않고 일만 해왔다. 입사할 때는 거의 기적과 같은 천운으로 합격했다지만 입사하고 나서는 그저 밀려나지 않기 위해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매일 부채의 사북자리3였고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4이었다. 그러던 중 다음 달에 새로 생길 연구부서에 발령을 받았고 팀이 꾸려지는 동안 보름의 휴가가 주어졌다. 처음으로 생긴 긴 휴가에 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내게 매앵이 찾아와 말했다. 그냥 떠나는 거지, 뭐.
매앵은 나름 프로 여행가였다. 여행에도 프로가 있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어쨌든 여행으로 책을 낸 적이 있으니 프로가 합당했다. 그런데 여기서 강조할 부분은 ‘프로’가 아니라 ‘나름’이다. 매앵은 출판사의 계획에 맞춰 여행을 다녀와 부풀린 감상을 쓰고 다른 곳에서 산 사진들로 빈 공간을 채워 책을 만들었다. 다 그런 거라고 말하면서. 아무튼 공대 출신의 매앵은 대학 시절 글이란 것을 한줄도 써본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글밥을 먹고 사는 중이었다. 그에 반해 국문과 출신인 나는 졸업한 뒤 보고서만 줄줄이 써댈 뿐 문장다운 문장을 써본 지 오래였다.
매앵은 지난달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돌아온 뒤 쉬는 중이었고 내게 생긴 휴가에 나보다 더 들떠서 여행계획을 세웠다. 출장으로 중국, 일본을 각각 한번씩 가본 것을 빼고는 외국에 나가본 경험이 없는 나를 어디든 데려가려고 애썼다. 그러나 결국 지쳐 나가떨어졌다. 뭐든 상관없어, 괜찮아,만 되풀이하는 격한 결정장애자인 나를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쏘 스투핏! 넌 그냥 정선 산골에나 처박히는 게 낫겠어.
나는 화내듯 던진 매앵의 말에 엉뚱한 대답을 해버렸다. 우리 할머니네 집 거기 있는데. 그런데 그 말에 꽂힌 건 오히려 매앵이었다. 매앵은 다 때려치우고 정선에 내려가자고 난리였다. 앞서 말했듯 격한 결정장애에 우유부단이란 난치병을 앓고 있는 나는 설치는 매앵에게 그저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당장, 롸잇 나우!를 외치는 매앵을 멈출 수가 없어서 아무 계획도 없이 다음날 아침 대충 짐을 꾸려 출발했고, 그렇게 정선 산골집에 도착하게 되었다.
언제 깼는지 매앵이 내 손 위에 손을 올려 함께 물을 맞았다. 시원하다. 영어가 섞이지 않은 담백한 감탄사가 매앵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물을 잠그고 젖은 신발을 털었다. 이제 뭐하지, 하고 묻는 내게 매앵은 하품을 하며 뭉그러진 발음으로 말했다. 뭐하긴, 밥이나 먹자. 부엌으로 들어갔지만 아궁이에 가마솥이 있는 부엌은 그냥 정물에 지나지 않았다. 난감해하는 나를 지나쳐 나간 매앵은 가방에서 휴대용 가스버너를 꺼냈다. 입 벌리고 서 있지 말고 고기나 구워. 빞보다 퐄이 더 좋지?
삼겹살이 노릇하게 구워지자 매앵은 삼겹살 하나를 가리키고는 삼초 뒤에 이거 뒤집어, 하고 말했다. 어리둥절하면서도 시킨 대로 삼겹살을 뒤집는 내 손에 매앵의 스마트폰이 따라붙었다. 익어가는 고기를 다각도로 촬영한 뒤 매앵은 만족한 듯 쌈장에 푹 찍은 고기를 입에 넣었다. 그건 또 뭐냐, 하고 묻는 내게 동영상,이라 대답하며 재빠르게 버튼 몇개를 클릭해 동영상을 업로드했다. 그 밑에는 #삼겹살은진리 #먹스타그램,이라는 해시태그가 달렸다. 넌 귀찮지도 않냐? 하고 묻는 내게 매앵은 뭐, 습관이라, 하고는 말을 끊었다. 매앵의 인스타그램은 개인적인 용도라기보다는 책을 팔아먹기 위한 수단이었으므로 나는 더이상 말을 꺼내지 않고 새 고기를 올렸다. 치익, 하고 불판에 고기가 익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고이는 침을 삼켰다.
밤이 되자 집은 불빛 하나 없이 어두웠다. 전기는 이미 끊겼는지 방이고 마당이고 전부 깜깜했다. 매앵과 나는 작은 랜턴에 의지하며 마루에 앉아 있었다. 시골은 엄청 어둡구나, 사진도 안 나와. 투덜대던 매앵은 화장실에 간다며 랜턴을 들고 일어섰다. 랜턴 불빛마저 사라지자 어둠 속에는 나 혼자 남았다. 나는 누워서 하늘을 쳐다봤다. 시골은 별이 엄청 반짝일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겨우 흐릿하게 빛을 뿜는 별을 보며 시구절을 떠올렸다.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5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다른 시구절은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6 억지로 떠올린 마지막 시구절은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7였다. 더이상 생각나는 게 없었다. 시 대신 보고서의 구절들이 떠올랐다. 상반기 매출 상향조정을 위한 디자인 개선, 사내 인트라넷 수정을 통한 통합 관리체계 구축.
어처구니없는 머릿속 때문에 욕이라도 할까 하는데 마당에서 진짜 욕이 들려왔다. 쉣쉣! 매앵이 흙 묻은 랜턴을 들고 씩씩대며 걸어오고 있었다. 왜? 하고 묻자 붉게 부어오른 무릎을 내보이며 말했다. 수돗가에 걸려 넘어졌단 말이야. 짜증나, 불 좀 켜. 나는 여기서 불을 어떻게 켜, 하려다 아! 하고 벌떡 일어나 티티에게로 갔다. 전조등을 켜자 흰빛이 마당으로 쏟아졌다. 마치 세상에 빛이 처음으로 내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매앵은 갑자기 감성적인 눈을 하고는 말했다. 이야, 완전 도시 불빛이네. 그랬다, 그건 분명 도시 불빛이었고 우리는 금세 안락해졌다.
매앵은 안락한 빛에 둘러싸여 맥주를 늘어놓았다. 오는 길에 박스로 샀던 칼스버그를 빛이 들어오는 곳에 잘 세워놓고 사진부터 찍었다. 상표가 잘 나오게. 나는 촬영이 끝난 칼스버그를 내 쪽으로 끌어왔지만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병따개 없는데? 내 말에 매앵은 코웃음을 치며 나무젓가락으로 병을 땄다. 뻥, 소리가 청량했다. 이런 것도 할 줄 아냐? 하는 내게 이것도 트래벌 스킬이야, 하고 대꾸했다. 덴마크에 있을 때 진짜 많이 마셨는데,로 시작된 매앵의 덴마크 스토리를 들으며 나는 하늘을 쳐다봤다. 가물가물하던 별빛조차 이제 티티의 빛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자 매앵이 맥주병들과 함께 마루에서 뒹구는 장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수돗가로 가 대충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흐릿했던 눈이 찬물에 맑아졌다. 대체 몇시나 된 건지. 그냥 해가 떠 있고 잎이 푸르른 주변 환경으로는 도무지 시간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마루 구석에 있는 스마트폰을 집어들었지만 전원이 꺼져 있었다. 매앵 것도 마찬가지였고. 나는 티티에게로 걸어가 휴대폰 충전기 잭을 끼우다 악! 소리를 내고 말았다. 놀라서 깬 매앵이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절망한 나는 핸들에 머리를 박았다. 빼앵, 기품있는 클랙슨 소리도 내 슬픔을 달래주지 못했다. 배터리가 방전된 티티는 시동이 걸리지 않았으므로.
보험회사에 전화를 하려고 했으나 매앵과 나의 스마트폰은 모두 꺼져 있었고 당장 충전할 길도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자 아무것도 하기가 싫어졌다. 나는 마루에 벌렁 드러누웠다. 매앵이 옆에 누우며 위로랍시고 한마디 했다. 티티 니즈 브레잌 타임. 대꾸할 가치도 느껴지지 않아 몸을 돌려 누웠다. 괜찮아, 고장난 것도 아니고. 잠깐 쉬는 건데 뭘 그래. 그 말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스마트폰과 티티의 배터리가 나가자 내 배터리마저 방전되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매앵은 벌떡 일어나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커피나 마시자. 그래, 진한 커피로 마음을 달랠 필요가 있었다. 휴대용 가스버너 위에 냄비를 얹고 물을 끓이는데 불이 신통치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일어나 앉는 순간 불이 꺼져버렸다. 몇번이고 다시 밸브를 돌려보았지만 헛수고였다. 빈 가스통을 꺼내며 나는 다시 한번 절망을 느꼈다. 처량하게 빈 가스통을 들고 있는 나를 지나쳐 매앵은 가방을 들고 돌아왔다. 여기 있어, 맘껏 써. 가방에는 부탄가스 더미가 들어 있었다. 너, 뭐 폭파시킬 일 있냐? 매앵은 픽 웃고는 또다른 가방에서 맥심 골드믹스를 한다발 꺼내며 말했다. 자, 폭탄.
이거밖에 없어? 아메리카노는? 아니, 적어도 카누 정도는 가져왔어야 되는 거 아니냐? 투덜대는 나에게 매앵은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고향에 왔는데 고향의 맛으로 승부해야지. 이게 고향의 맛이냐. 매앵의 눈이 다시 감성적으로 변했다. 외국에 가면 이상하게 골드믹스가 땡기는 밤이 있어. 빠리 노트르담 성당 근처 유명 바리스타가 내려주는 에스프레소를 마시다가도 문득 골드믹스가 너무 먹고 싶다니까. 그래서 한국 오면 나는 이거밖에 안 먹어. 완전 고향의 맛이야. 매앵에게도 그런 구석이 있구나, 싶어서 헛웃음이 났다. 그런데 우리 고향은 여기 아니고 서울이잖아? 하는 내 반문에 매앵은 혀를 차며 대꾸했다. 이런 글로벌 시대에 한국이면 고향이지, 뭐, 서울 쌍문동 52번지라고 말할래? 웨얼 아 유 프롬, 하면 뭐라고 대답해? 나는 홀리듯 대답했다, 아임 프롬 코리아. 매앵은 그렇지, 하며 추임새를 넣었다. 유얼 홈타운 앤 마이 홈타운 이즈 코리아.
뭔가 대화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지만 딱히 개선 방향을 알 수 없어 그대로 두었다. 사실 매앵의 인스타그램에는 에스프레소만 잔뜩 올라와 있었다. 그것도 정통 이탈리안 바리스타가 내렸다나 뭐라나 하는. 물이 끓자 호쾌하게 골드믹스를 뜯어 종이컵에 넣는 매앵에게 커피는 블랙이라는 되도 않는 지조를 가진 내가 한마디 했다. 그럼 나는 슈거프리로 해줘. 그러자 매앵은 버럭 화를 내며 소리를 높였다. 맥심은 완벽해, 설탕 한톨 빼는 것도 맥심에 대한 모독이야! 아, 녜 녜, 그러시군요.
커피를 마시다 매앵은 갑자기 박수를 탁, 쳤다. 나는 하마터면 커피를 엎을 뻔했다. 왜 또, 하는 눈으로 보는 내게 매앵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어차피 며칠 뒤에 명진이랑 수지 오잖아! 그러면 다 해결이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름휴가를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던 명진과 수지가 우리의 휴가에 따라붙었던 것이 기억났다. 처음에 오겠다고 했을 때는 탐탁지 않았는데 지금은 다행이었다. 남은 커피를 한입에 털어넣으며 잠들어 있는 티티를 쳐다봤다. 왠지 깊게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것만 같은 티티를.
커피를 마시고 나자 또다시 멍해졌다. 이렇게 한가로운 시간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배운 적이 없었다. 나는 이번에도 매앵의 밖에 나가자,는 말이 떨어지고 나서야 움직였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산골의 오전은 고요했다. 너무 조용해서 그림 속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았다. 푹신한 흙길에선 발소리조차 잘 나지 않았다. 매앵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꽃향기를 맡고 풀들을 만졌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보기만 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눈앞에 나무가, 꽃이, 하늘이 가득히 펼쳐진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매앵은 여전히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 사진 찍어야 되는데. 그 말에 하늘이 재단되어 보이기 시작했다. 정사각형 틀에 담긴 파란 하늘. 거기에 좀더 파랗고 생기있어 보이게 Hudson이나 Walden으로 색 보정을 하고 주소 태그를 찍고 마지막으로 해시태그를 달았다. #치유 #맑은하늘아래에서 #넓은벌동쪽끝으로옛이야기지줄대는실개천이휘돌아나가고8 머리를 몇번 휘두르고는 다시 하늘을 봤다. 끝없이 이어지는 하늘이 어쩐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내게는 사진 속 하늘이 더 익숙할지도.
꽤 긴 산책을 하고 돌아왔는데 정오도 지나지 않았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너무 많은 시간이 당황스러웠다. 마루에 앉아 멍하니 있는 내 눈앞에 매앵이 주먹을 들이댔다. 뭐야, 하고 인상을 쓰는 내게 매앵은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아니 정신 차리고 있나 해서. 그런데 넌 보통 이 시간에 뭐해? 매앵의 물음에 내 일상이 떠올랐다. 지금쯤이면 회의자료를 만들면서 점심 메뉴를 고민하는 중이겠지. 선택지가 그리 많지도 않은데 매일 어이없을 정도로 신중히 고민했던 기억이 났다. 그냥 일하면서 점심 뭐 먹을지 생각하지. 내 대답에 매앵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대꾸했다. 역시 인류 최대의 고민은 오늘 뭐 먹지,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뭐 먹을래?
나는 말문이 막혔다. 결정장애라는 난치병을 앓고 있기에 매일 메뉴 고민만 할 뿐 결정은 내리지 못했다. 그러다가 주위에서 이거 먹으러 갈래? 하고 말을 걸어오면 네, 하고 따라가는 게 고작이었다. 내 난감한 눈빛을 읽은 매앵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나를 등졌다. 혼자서 티티 쪽으로 걸어가는 매앵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여전히 멍했다. 매앵은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것처럼 내게 외쳤다. 야, 멍 때리지 말고 물이나 끓여. 나는 성질이라도 낼 듯이 슬리퍼를 찍찍 끌고 매앵에게 걸어갔다. 그러고는 딱 버티고 서서 당당하게 말했다. 야! 물 얼마나 넣어?
매앵의 가방에는 없는 게 없었다. 즉석밥, 각종 채소, 고추장, 은수저 세트가 줄줄이 나왔다. 나는 은수저를 들고 도대체 이건 왜 가지고 온 거냐 물었다. 매앵은 끓는 물에 즉석밥을 넣으며 마이 쏘울!이라고 대답했다. 은수저가 왜 매앵의 쏘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것도 상 위에 가지런히 얹어놓았다. 매앵은 즉석밥을 데워 양푼에 뒤집고는 상추, 오이 등을 적당히 잘라넣고 김치도 썰어넣고 마지막으로 고추장을 크게 한스푼 떠서 밥과 함께 비비기 시작했다. 나는 현란하게 움직이는 매앵의 숟가락을 보면서 침만 삼켰다.
그렇게 점심까지 해치우고 나자 또다시 무료한 시간이 돌아왔다. 시골집에 온 지 만 하루도 되지 않았는데 나는 벌써 무엇을 할지 몰라 쩔쩔맸다. 티티가 움직였으면 어디든 한바퀴 돌고 왔을 것이고 스마트폰이 켜졌으면 사탕 깨는 게임이라도 했을 텐데 아무것도 없는 지금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텔레비전도 없고 라디오도 없고 하다못해 장기판까지 없는 이런 시골에서는 어떻게 해야 시간이 가는지.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보고 매앵은 혀를 쯧쯧 차고는 책 한권을 던져주었다. 알랭 드 보똥의 『여행의 기술』이었다. 이런 것도 읽냐, 하고 묻는 내게 매앵은 어제와 같은 답을 들려주었다. 잇츠 트래벌 스킬.
책장을 넘기다 매앵이 줄을 쳐놓은 곳에 멈췄다.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모두가 태어날 때 바람에 흩뿌려져 이 나라 저 나라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플로베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어른이 되면 상상 속에서 우리의 충성심이 향하는 대상에 따라서 우리의 정체성을 재창조할 자유를 얻는다.’ 충성심이 향하는 대상,이라는 구절에 눈이 멈췄다. 내 경우를 떠올려봤다.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그렇듯 엄마였고, 군대에서는 조국이라고 강요당했다. 그리고 한때는 수지였다. 수지, 지금은 피부과 의사 명진의 아내가 된 나의 첫사랑.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 나를 보고 넌 책도 못 읽느냐며 매앵이 비웃었다.
나 옛날에 너 책 읽는 거 좋아했어. 또다시 매앵의 눈이 감성적으로 변했다. 나는 책을 덮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너 무인도에 가게 된다면 뭐 가지고 갈래? 세가지만. 갑자기 엉뚱한 곳으로 튀어버린 대화에 내가 눈만 크게 뜨고 있으니까 매앵이 빨리빨리, 하며 재촉했다. 나는 우물쭈물하며 대답했다. 라이터랑 스마트폰이랑 티티? 내 대답에 매앵은 피식 웃어버렸다.
“너도 많이 변했다. 너 예전에는 그렇게 대답 안했어.”
“내가 뭐라고 했는데?”
“책, 기타, 카메라.”
“뭐야, 다 쓸데없는 거잖아.”
“그래, 쓸데없는 거지. 그래서 그때도 물어봤어. 그렇게 쓸데없는 것만 가지고 가서 살 수 있겠냐고. 그랬더니 너한테는 그게 필수적인 거래.”
“내가 그렇게 허세 쩌는 말을 했냐.”
“너 요즘에는 책 자주 안 읽지?”
“거의 못 읽지. 바쁘니까.”
“뭐, 언제는 안 바빠서 책 읽었냐.”
돌이켜보면 바쁘지 않았던 적이 없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늘 학교와 학원에 치였고 대학교 때는 과제와 스펙에 치였다. 회사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일과 회식에 치이게 되었고. 늘 무언가에 쫓기듯이 살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기계처럼 일어나 씻고, 옷을 입고, 떠밀리듯 출근하고, 엑셀을 정리하고, 피피티를 수정하고, 내몰리듯 퇴근하고, 다시 아침이 되고. 그렇게 매일 정신없이 바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이상할 정도로 지루했다. 빠르게 돌아가는 일상도 반복되면 늘어진 테이프같이 느리게 도는 느낌이었다. 수도 없이 들어서 다음 곡이 무언지 아는 것처럼 흘러가는 내일이 궁금하지 않았다.
마루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허공을 쳐다봤다. 딱히 시선을 둘 데가 없어 여기저기 쳐다봐도 다 비슷비슷해 보였다. 그것마저 귀찮아 눈을 감았다. 잠도 오지 않았다. 휴가가 생기면 하고 싶은 게 엄청 많을 줄 알았다. 하지만 정작 쉬는 시간이 찾아오자 어떻게 쉬어야 할지 막막했다. 오히려 일하는 게 더 쉽게 느껴질 정도였다. 호기롭게 정선까지 온 게 우스워졌다. 매앵도 지루한지 몸을 이리 꼬고 저리 꼬며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뭐하지? 하는 내 물음에 매앵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날이 어두워졌다. 매앵과 나는 어제처럼 고기를 굽고 어제처럼 맥주를 마시고 어제처럼 하늘을 보고 누웠다. 랜턴 불빛은 어제보다 더 어두워 서로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지루함의 끝에 서 있었다. 이런 지루함은 경험해본 적이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래서 대처 방법을 몰랐다. 지루함에 지친 매앵의 발이 내 종아리를 건드렸다. 너무 오랫동안 늘어져 있던 다리는 작은 자극에도 크게 반응했다. 종아리를 문지르던 매앵의 발이 허벅지까지 올라왔다. 나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매앵을 끌어당겼다. 아, 정확하게 해두자면 내가 참지 못했던 건 욕정이 아니라 지루함이었다. 그건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
매앵의 티셔츠를 벗기고 내 티셔츠마저 훌렁 벗어버렸다. 한 손으로는 계속 나머지 옷을 벗으면서 다른 손으로는 매앵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매앵은 어느때보다 조용했다. 예전에도 그랬다. 섹스를 할 때만큼은 한마디 말도 없었다. 매앵의 어깨뼈에 입을 맞추며 ‘그날’을 떠올렸다. 매앵과 내가 처음으로 섹스를 하던 그날. 술에 엄청 취해서 정확히 남아 있는 기억은 없지만 도드라진 어깨뼈의 감촉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은 짐승이라도 된 것처럼 매앵의 어깨뼈를 물어뜯고 싶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딱히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나도 매앵도 서로를 존중한 의례적인 섹스를, 정중히 마쳤다.
매앵과 나는 옆에 널려 있던 옷을 다시 주워 입고는 나란히 누웠다. 별일이지만 별일 아닌 일이 지나고도 큰 변화는 없었다. 매앵이 허공에 대고 말했다. 너 그날 수지 때문에 엄청 울었지. 대답을 요구한 말 같지 않아서 나는 가만히 있었다. 네가 우니까 수지 머리채를 잡아뜯고 싶더라. 그 말에는 더이상 대꾸하지 않을 수가 없어 코웃음을 쳤다. 웃기지 마, 나 때문이 아니라 명진이 때문이잖아. 수지가 내 첫사랑이었듯 명진은 매앵의 첫사랑이었다. 서로의 첫사랑이 씨씨로 맺어진 뒤 우리는 밤새 붙잡고 울다 섹스를 했다. 하지만 매앵과 나는 다음날에도 달라질 것 없이 친구로 지냈다. 패배자끼리 만나는 건 아무래도 싫다는 암묵적 동의였다. 매앵은 손깍지를 껴 머리를 받치며 말했다. 아무튼 지금의 너보단 그때의 네가 훨씬 나았어. 나는 다시 한번 코웃음을 치며 받아쳤다. 넌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야. 매앵의 눈빛에서 잠시 살기가 뿜어져나왔다.
밤은 낮보다 더 길고 지루했다. 늘어지게 하품을 해보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매앵도 잠이 오지 않는지 뒤척였다. 풀벌레 소리가 써라운드로 들려왔다. 같은 텀으로 길게 우는 풀벌레 소리도 지겨워질 때쯤 매앵이 입을 열었다. 쇼펜하우어가 그러는데 인간은 곤궁하거나 권태롭거나 두가지 상태밖에 없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곤궁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면서 버티는 서울에서의 내가 떠올랐다. 늘 필사적이었지만 곤궁하지 않은 시간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 곤궁을 뛰어넘고 내 손에 들어오는 것이 겨우 권태라고? 생각이 깊어지자 이는 건 짜증뿐이었다. 그런 건 어디서 들었느냐고 묻는 내 말에 매앵은 철학과 수업이라고 답했다.
“그건 왜 들었는데?”
“그냥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 책, 멋있어 보여서.”
“그래서 차라투스트라가 뭐라고 말하든?”
“말종인간이 되지 말라고.”
“말종인간이 뭔데?”
“몰라. 그냥 어감상 알 거 같지 않냐? 느낌적인 느낌이 있잖아.”
다음날 아침 내가 일어나서 제일 처음 본 것은 맥주병과 매앵이 마루에서 뒹굴고 있는 장면이었다. 어제도 똑같은 걸 본 것 같은데. 나는 머리를 갸웃하며 수돗가에 가서 세수를 했다. 물소리 때문인지 매앵도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았다. 매앵과 나는 함께 마루에 앉아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을 뜨고 있었지만 아무 데도 시선을 두지 않았고 귀를 열고 있었지만 아무 소리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무기력하고 멍한 시간이 지나갔다. 그사이로 문득 이상의 수필 「권태」가 떠올랐다. 이상은 매일매일 이어지는 뻔한 시골 생활에 지쳐 그 글을 썼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상의 문장에서는 냉소와 함께 두려움이 묻어났다.
매앵이 부스럭거리며 일어나 신발을 끌고 대문 밖으로 나갔다. 나는 습관적으로 그뒤를 따랐다. 어제와 같은 초록이 이어지고 있었다. 매앵이 감탄해 마지않던 ‘그륀’이었으나 그것은 이미 빛을 잃은 것 같아 보였다. 나는 이상이 느꼈을 참담한 권태에 대해 생각했다. 이것은 권태보다 더한, 권태 이상이었다. 아니다, 권태에도 끼지 못할 권태 이하인가. 아무튼 이 지독히도 푸르고 맑은 공간에서 나는 더이상 생각할 일조차 없었다. 모든 생각을 지웠는데도 배는 고팠다. 꾸륵대는 배를 내려다보자 어제 매앵이 떠들었던 쇼펜하우어의 말이 기억났다. 인간은 곤궁하거나 권태롭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쇼펜하우어가 살던 때에는 인간이 곤궁하거나 권태로웠는지 몰라도 지금의 나는 곤궁하면서도 권태로웠다.
그저 앞만 보며 길을 걷고 있는데 매앵이 저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어, 저거 논 아니야? 정선에도 논이 있어? 매앵이 가리킨 곳에는 그냥 푸른 것이 있었다. 나는 대충 보고 그런가보지, 하고 대꾸했다. 논인지 아닌지 모를 푸른 공간을 쳐다보다 사진을 찍듯 네모틀에 담았다. 넓은 공간에서 손바닥만 한 네모만 떼어냈다. 그러고는 그 밑에 해시태그를 달았다. #여전히엄청그린 #저게논인지밭인지궁금하지도않음 #논이야기9 매앵이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겼고 나도 뒤따라 걸으며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어디를 봐도 다 똑같은 풍경이어서 결국 내 발끝만 보고 걸었다. 걸음 따라 날리는 흙먼지에 인상을 찌푸려가며.
어제처럼 대충 밥을 지어 먹고 어제처럼 맥심 모카골드 커피를 마시고 어제처럼 허공을 보며 멍하니 있는 사이 날이 어두워졌다. 그냥 그렇게 가버리는 하루가 크게 아쉽지도 아깝지도 않았다. 그래도 오늘 밤에 명진과 수지가 온다는 것은 잊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버스 정류장까지 마중이나 나가자는 매앵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나섰다. 매앵과 나는 하나뿐인 랜턴에 의지해 어두운 시골길을 걸었다. 차로 올 때는 금방이었는데 걸으려니 길고도 길었다. 반쯤 걸었을 때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러나 다시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생각을 멈췄다. 그렇게 나는 의지 없이, 생각 없이, 희망 없이 삼무 정신으로 걷기만 했다.
마침내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시멘트로 만든 차갑고 딱딱한 의자에 앉아 멀리 도로를 쳐다봤다. 오가는 차는 한대도 없었다. 몇시에 온대? 하고 물었지만 매앵은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또다시 무료한 시간이 시작되었다. 매앵과 나는 가끔 달려드는 모기를 잡을 때만 착착 손뼉 치는 소리를 낼 뿐 아무 말도 없이 앉아만 있었다. 지루함에 지친 내가 벌떡 일어나 랜턴을 도로 쪽으로 비춰보았다. 랜턴의 불빛은 며칠 사이에 부쩍 어두워져 저만치도 잘 보이지 않았다. 별수 없이 다시 주저앉았다.
매앵이 발장난을 하기 시작했다. 신발에 흙이 긁히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좀 있어, 하는 내 말에 매앵은 오히려 더 큰 소리가 나게 발을 문질렀다. 나는 더이상 말하는 게 의미가 없을 거 같아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시 뒤 발장난도 재미가 없어진 매앵이 뜬금없는 것을 내게 물었다. 넌 장래희망이 뭐야? 장래희망이라는 단어 자체가 너무 어색해 생각이 멈춰버렸다. 어린 시절에는 장래희망을 주제로 그림도 그리고 글쓰기도 했던 것 같은데. 그때 무엇을 그리고 무엇에 대해 썼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무 말 없는 내게 매앵은 재촉하듯이 다시 물었다.
“꿈이 뭐냐고.”
“티티 할부금 갚게, 회사 안 잘리는 거?”
“많이 소박해졌네.”
“내 꿈이야 원래부터 소박했지. 대학 가는 거, 회사 가는 거, 그 회사에서 안 잘리는 거.”
“그럼 넌 꿈을 이룬 거네.”
“그러네.”
거기서 대화가 끊겼다. 나는 말없이 어두운 랜턴 불빛을 쳐다보다 픽, 웃었다. 왜 웃느냐는 매앵의 말에 그냥 꿈 같은 거 누가 물어보는 게 오랜만인 것 같아서, 하고 대답했다. 누군가의 꿈에 대해 묻거나 들어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꿈이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하게 여겨졌다. 꿈이라는 해시태그를 검색해보면 무엇이 나올지. 무대 위로 쏟아지는 빛, 고3 학생의 어질러진 책상, 베이지색 크레마가 두툼하게 떠 있는 커피, 할 수 있다는 문구가 씌어진 파란 노트. 이제는 상상력마저 얕아져서 더이상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꿈이라는 해시태그를 걸고 무언가를 쓰고 생각하고 그리던 시절이 내게는 없었던 건지.
그러는 넌 꿈이 뭔데, 하고 묻자 매앵은 빙글빙글 웃기만 했다. 세계여행하면서 꿈같이 사는데 꿈이 무슨 소용이겠어, 하는 내 말에도 대답이 없었다. 아무 말 없는 매앵에게 부럽다, 나도 너처럼 살고 싶어, 인스타그램에 맨날 여행 사진이나 올리면서, 하고 말했다. 매앵은 웃으며 대꾸했다. 하긴 나도 인스타 속에 있는 나는 부럽긴 하더라. 내가 봐도 부러운 인생이야. 그러고 나서는 나를 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너도 남부럽지 않게 잘 살면서, 뭐. 그런가? 거기서 다시 대화가 끊겼다. 그때 도로 저편에서 차 한대가 달려왔다. 갑자기 쏟아지는 빛에 매앵과 나는 고개를 숙였다. 명진의 차인가 해서 뒤늦게 고개를 들어봤지만 차는 이미 지나가버린 뒤였다. 명진이 차 아니었어? 하는 내 물음에 매앵은 몰라, 못 봤어, 하고 말았다.
어두워진 도로를 쳐다보며 나는 또다시 이상의 「권태」를 떠올렸다. 이상은 불나비가 달려드는 것을 보며 불나비는 그래도 사는 방법을 아는 녀석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불나비도 잠잠했다. 불빛이 너무 어두워 불나비조차 달려들 곳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 나는 내일을 생각했다. 내일도 오늘과 같은 하루가 이어지겠지. 도시로 돌아간 뒤의 내일도 생각했다. 그 내일 또한 나의 어제들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나는 이상과는 다른 결말을 지었다. 이상은 다르지 않을 내일에 오들오들 떨었지만 나는 내일이 달라질까 오들오들 떨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어둠 속에서.
1 매앵과 나는 대학 동아리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 교환학생으로 와 있던 미국인 쌤이 매앵의 본명인 맹주은을 매앵쥰으로 발음하면서 우리 모두 그녀를 매앵이라 부르게 되었다. 매앵은 하얗고 깡마른 몸을 갖고 있었다. 매앵을 처음 본 날 나는 백석의 시에 나오는 나타샤를 떠올렸다.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그 구절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런데 이제와 돌이켜보면 나타샤보다는 당나귀 때문에 그 시를 떠올린 것 같기도 하다.
2 매앵과 나는 어엿한 삼십대 성인이었지만 만나면 스무살 수준의 대화를 이어갔다. 사실 우리는 스무살 때부터 이문열이나 이청준의 소설 속 대화처럼 철학적이고 비판적인 얘기를 하려 애썼지만 마무리는 꼭 되도 않는 농담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농담이 주를 이뤘다. 현재 우리는 그것을 시대 풍자적이면서도 다분히 해학적인 구석이 있는 농담이라고 생각하며 이어가고 있다.
3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서 ‘사북자리’라는 표현을 처음 접했다. 고3 6월 모의고사에서 사북자리의 의미에 관해 묻는 문제를 틀렸다. 그때는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부채의 끝부분을 머리로만 이해했다. 어쨌든 그 문제를 틀리고도 나는 국문학을 전공했고 국문학을 전공하면 사북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아무래도 패기가 있었다.
4 이육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었다. 그중에서도 「절정」은 처음으로 다 외운 시였다. 특히 마지막 구절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볼밖에/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보다”를 외울 때는 늘 눈을 감았다. 그런 행동은 허세라기보다는 문학적 순정에 가까웠다고 반추해본다.
5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처음 접한 것은 한컴 타자연습에서였다. 중학생이 된 나는 이상할 정도로 컴퓨터 타자 빨리 치기에 열을 올렸는데 그때 가장 자주 연습했던 것이 바로 이 시였다. 지금 다른 구절은 기억나지 않지만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만은 이상하게도 기억에 남아 있다.
6 윤동주의 「서시」는 노래로 처음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 시가 처음에는 시인 줄도 몰랐다. 가사 치고는 심오하다는 생각을 그 어린 나이에도 했는데 나중에 문학교과서에서 보고는 멈칫했었다. 아무튼 그래서 그런지 이 시를 보면 자연스레 귓가에 노래가 들려온다.
7 정지용의 「유리창1」은 마지막 구절 덕에 좋아한 시였다. 마지막 행인 ‘아아 늬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를 읽으며 ‘늬’라는 단어에 빠진 적이 있었다. 대학 때 창작수업 시간에 한번 써먹었는데 모두의 냉대를 받고 조용히 접었다.
8 대학 때 ‘문학의 이해’라는 수업을 수지와 함께 들었다. 나는 수지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조별 과제에서 수지 몫까지 도맡았다. 정지용의 「향수」는 수지가 맡은 부분이었다. 어찌나 열심히 했는지 내 것보다 더 잘해서 수지는 에이플러스를 받았다. 수지는 고맙다며 반달눈으로 웃었지만 다음 학기에 의대생 명진과 씨씨가 되어 내 앞에 나타났다. 그날 밤 술독에 빠진 채 이 시를 암송했는데 그 곁에서 매앵은 꺼져,라는 말을 스물세번쯤 했다.
9 채만식의 소설 제목이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 녀석이 ‘논 이야기’라는 제목을 보고 눈을 반짝이며 책을 뽑아 들었다. 그 녀석은 논에 대한 이야기를 ‘놀았던 이야기’라고 생각해 책을 빌렸다는 말을 했다. 어이가 없어서 웃고 말았지만 그 뒤로도 녀석은 카프카의 『성』을 ‘성(性)’으로 착각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역시 그 무렵 청소년의 해석력이란 그 언저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새삼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