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두번째 봄에 틔우는 질문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4.16연대 416인권선언제정특별위원회 위원. 416 세월호 참사 작가기록단 소속으로 『다시 봄이 올 거예요』 공동집필. phyting.miryu@gmail.com
매일 오후 4시 16분이면 내 스마트폰은 진동알람을 울린다. 세월호참사 1주기 무렵 만들어진 ‘진실과 안전을 깨우는 416알람’ 앱이다. 알람이 울릴 때마다 기억이 쌓였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알람을 끄는 손놀림만 빨라졌을 뿐이다. 그렇다고 앱을 지울 수는 없다. 가끔 알람 끄는 것을 놓치면 스마트폰은 화난 듯 뜨겁게 달구어진다. 그럴 때 망각을 일깨우는 것이 오히려 알람의 역할이 되었다.
얼마 전 희생학생의 형인 ㄱ을 만났다. 밥을 차릴 때 동생의 수저를 놓는다고 했다. ‘아직도’라는 말이 입안에 맴돌았지만 차마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오늘도 놓고 내일도 놓는다. 알람이 오늘도 울리고 내일도 울리듯. 습관처럼 수저를 치우고 알람을 끄지만 내일이면 똑같이 마주할 시간이다. 아직도 끝나지 않았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끝나지 않았다고 답하면서 내 안에 맴도는 질문이 있다. 언제쯤이면 우리는 끝낼 수 있을까? 내가 궁금한 건 오년이 걸릴지 이십년이 걸릴지가 아니다. 무엇을 끝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것이다.
갈라진 시간
2014년 4월 16일, ㄱ은 여느날처럼 출근해서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배가 어디 부딪혔나봐.” 동생에게서 카카오톡 메시지가 도착했다. 무슨 말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인터넷으로 속보가 뜨고 있었고 단원고에는 가족들이 모이고 있다고 했다. 단원고로 가서 상황을 확인한 ㄱ은 서둘러 진도로 내려갔다. 동생을 기다리는 동안 밤과 낮의 경계는 희미해졌다. 동생의 같은 반 친구들이 올라오는 걸 보면서 동생의 죽음을 예감할 수밖에 없었지만 살아 있으리라는 기대도 놓아버릴 수 없는 시간이었다. 며칠이 흘렀을까, ㄱ의 동생을 걱정하며 진도로 찾아온 친척이 이런저런 얘기 끝에 물었다. “장례비용은 어떡하니?” 해서는 안될 질문이었다. 아직 동생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채로 엉켜버린 4월 16일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후로도 어긋난 시간은 쉬이 만나지 못하고 유가족들에게 고스란히 상처로 남았다. 아직 슬퍼할 시간도 없었다는 사람들에게 아직도 슬퍼하고 있느냐 타박하는—때로는 진심어린 걱정일지라도—사람들의 시간차는 시간이 흐른다고 차차 메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참사의 한가운데로 끌려들어간 이들은 도저히 참사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됐다. 시간은 끊겼다. 우리가 그날 시작된 사건을 ‘참사’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도 그것이다. 피해의 규모 때문만이 아니다. ‘그렇겠거니’ 하고 믿어온 모든 것들이 무너졌다. 승객들이 기울어진 배에 남아 있는데 선장과 선원은 그들을 버린 채 도주했다. 사람들이 침몰해가는 배에 갇혀 있는데 해경은 밖에서만 멀뚱거릴 뿐 그들을 구조하지 않았다. 승객 전원을 구조했다고 방송사마다 보도를 내보냈는데 완전한 거짓이었다. 사회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다는 것은 이전의 경험에 기댈 수 없는 시간이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신뢰는 주관적 믿음의 문제가 아니다. 많은 아빠1)들이 하는 얘기가 있다. 누구 아빠라는 익숙한 이름으로 참사 이전에는 살지 못했다고. 아이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게 해주는 게 아빠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면서, 아이와 시간을 보내고 이야기를 나누기보다 돈 버는 일에 바빴다고, 그게 아이를 사랑하는 방법이었다고. 후회는 뼈저리고 우리는 함께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지라는 공익광고 같은 말을 교훈으로 얻을 수는 없다. 아빠들의 잘못도 아니었고 여전히 우리는 그런 선택을 나무랄 수 없는 사회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저마다 살아내는 어떤 시간이 있다면 이날 시작된 참사의 시간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난데없이 침입한 시간이다. 그러나 참사의 시간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침입한 것은 아니었다. 내게도 언제쯤 어떻게 들어왔는지 잘 모르겠다. 참사 초기에—그때는 초기라고 생각하지도 못했고 뒤늦었다고 생각했지만—세월호참사 국민대책회의 활동을 하게 될 때에도 참사의 시간은 어지럽게 뒤섞인 시간이었다. 같이 무언가 해보자 할 때도 서걱대는 긴장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추모’를 말했지만 유가족들에게 추모라는 말은 자신의 것이 되기 어려웠다. 아마 죽음을 승인하는 말처럼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미수습자의 가족들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집회의 공식 명칭을 정할 때 추모라는 말을 피해야 했다. 그렇게 미끄러질 때마다 나는 유가족의 시간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음을 깨달았고 그만큼 참사를 이해하게 됐다.
한 희생학생의 언니는 가끔 주위에서 ‘이제 그만 제자리로 돌아와 너의 삶을 살라’는 충고를 듣는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언니는 말한다. “지금 이게 내 삶이에요. 참사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지금 이 자리가 내 자리고 이 삶이 내 삶이에요.” 세월호참사를 두고 사고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건의 성격에 관한 논쟁이 아니다. 우연히 발생한 일이니, 참으로 안타깝지만, 어서 참사 이전으로 돌아가라는,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은 내버려두라는 격리의 메시지다. 유가족들이 서명운동을 시작할 때 한 엄마는 나름 진보를 자처하는 대학 선배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한다. “애쓰는 건 알겠는데 해봤자 안돼.” 한국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응축된 사건이 세월호참사라는 인식은 ‘어차피 안되는’ 이유로 진화하기도 했다. ‘회복’을 참사 이전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생각했던 때가 있다. 그게 가능할까 질문하면서도 언젠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나는 이제 다르게 생각한다. 회복은 갈라진 시간이 만날 때 가능해진다. 참사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의 곁에서 ‘돌아갈 수도 있는’ 사람들이 함께 단절을 선언할 때 갈라진 시간은 만날 수 있다. 아직 떠나지도 못하고 머무르지도 못하는 시간을 살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참사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되새기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시 끝을 가늠해본다.
진실을 밝힐 때까지
무엇을 끝이라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잠정적으로 주어진 답은 ‘진실’이다. ‘아이들이 죽은 이유를 알고 싶다’는 부모가 진실에 닿는 길은 험했다. 2014년 5월, 대통령은 “모든 진상을 낱낱이 밝혀내고 엄정하게 처벌할 것”이라고 했지만 얼마 후 시작된 국회 국정조사 특위는 정부의 비협조와 여야 공방으로 난항을 겪다가 이렇다 할 결과를 내지 못하고 마무리됐다. 7월, 특별법이 필요하다며 부모들은 농성을 시작했다. 8월은 단식으로 뜨거웠으나 잇따른 여야 합의로 가을은 싸늘하게 식어갔다. 11월 제정된 특별법은 유가족이 제안했던 것에 못 미치는 반쪽짜리였다. 구멍난 법조항들 사이로 찬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겨울이었다. 해가 지난 1월 여당은 특조위(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세금도둑’이라며 시비를 걸더니 3월에는 반쪽짜리 특별법조차 옭아매는 시행령을 입법예고했다. 4월이 되자 정부는 보상금 액수로 언론을 도배시킴으로써 정부 시행령을 폐기하라 요구하는 피해자를 모욕하더니 5월에는 시행령을 강행처리했다. 8월에야 특조위에 예산이 지급되어 조사를 시작하려는데 조사 개시 결정을 두고 여당 추천 위원들이 사퇴했다. 정부의 조직적인 방해가 덜미를 잡혔지만 이를 처벌하지도 못한 채 12월 청문회가 열렸다. 증인으로 나온 참사 당시 해경 지휘부에 대한 수사 필요성이 확인됐으나 해가 다시 바뀌고 특검 요청안은 19대 국회 끄트머리에 겨우 걸려 있다. 여전히 정부는 특별법을 거스르고 특조위 활동기간을 종료시키려 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많은 의문과 알아내고 싶은 사실들이 있다. 그러나 진실을 두고 벌어지는 싸움의 쟁점은 사실 그 자체가 아니다. 두해 전 5월 대통령은 “초동대응 미숙으로 많은 혼란이 있었고, 불법 과적 등으로 이미 안전에 많은 문제가 예견되었는데도 바로잡지 못한 것”이 세월호참사를 낳았으며 “이번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은 선장과 일부 승무원들의 직무유기와 업체의 무리한 증축과 과적 등 비정상적인 사익추구”라고 확정했다. 해경이 구조에 실패했으니 해경을 해체하겠다고 했고 선장의 무책임한 행동은 “사실상 살인행위”라고 선포했다. ‘비정상적’으로 사익을 추구한 청해진해운의 실소유주로 세모그룹 유병언 회장을 지목하여 연일 수배전을 펼쳤다. 수배의 죄목도 횡령 및 배임과 같이 정상적인 사익추구 질서를 교란시킨 것이었을 뿐, 기업의 이윤추구가 생명을 담보로 한 점에 대해서는 죄를 묻지 않았다. 진실을 가로막는 자들은 사실만 숨기는 것이 아니다. 그들만의 진실을 우리에게 강요한다. 진실을 두고 우리는 그들과 겨루고 있다. 어둠 속에 봉인된 사실들을 찾아낸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사실들이 피해자의 시선과 관점에서 맥락을 얻어 배치될 때 진실이 구성된다. 이것은 치유와 회복의 조건이기도 하다. 피해자가 겪은 사건과, 그 사건을 재현하는 타인의 말들이 일치할 때 그것을 진실이라 부를 수 있다.
“친구들은 사고가 나서 죽은 게 아니라 사고 후 대처가 부족해서 죽은 것”이라고 한 생존학생이 말했다. ‘사고 후 부족한 대처’로 사람이 죽었다면 여기에 연루된 개인과 기관과 제도 등이 합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 진실과 정의는 연결되어 있다. 참사 이전의 법구조로는 충분하지 않다. 선형적 인과관계로 책임을 묻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세월호의 위기 징후를 놓친 관제센터의 직원들은 “근무를 소홀히한 정도를 넘어 자신이 담당하는 구체적인 직무를 의식적으로 포기하였다고 보기 어렵다”며 면죄되었다. 해경 123정장은 업무상 과실치사로 유죄판결을 받아 그나마 ‘과실’이 인정되었지만 당일 구조를 책임지는 지휘체계 안에 있던 목포해양경찰서장, 서해해경청장, 해경청장 등은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대법원은 현장 지휘자였던 123정장이 구조의 책임을 혼자 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며 감형해주었는데 줄어든 만큼의 책임은 아무도 지지 않고 있다. 선장과 선원이 도주한 9시 40분 전후에 승객들은 살아 있었다. 마지막 생존자가 탈출한 10시 20분경까지 약 40분 동안 해경은 사람을 살릴 수 있었으나 구하지 않았다. 아무리 훌륭한 정부인들 죽은 사람을 살려낼 수는 없다. 그러나 산 사람을 죽게 내버려둔 책임은 져야 한다. 참사의 책임은 구조업무를 맡았던 해경에 그칠 수 없다. 당일 청해진해운이 선내 대기 지시를 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고 청해진해운과 국정원의 ‘비정상적’ 관계를 짐작하게 하는 단서가 계속 나오고 있으니 붙들어매야 한다. 구조하는 내내 영상을 내놓으라며 구조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들어놓고, 승객들이 모두 바다에 가라앉은 다음에야 “한명의 인명피해도 없게 하라”는 지시를 내린 청와대도 책임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사라져버린 책임들을 다시 불러내는 것이 진실을 밝히는 길이다.
책임을 묻기 어려운 것이 정부의 안간힘 때문만은 아니다. 푸꼬(M. Foucault)가 설명한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은 ‘죽게 내버려두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살아남지 못하는 책임은 개개인이 지게 된다. 참사 초기에는 한 목사가 “가난한 집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경주 불국사로 가면 될 일이지” 왜 제주도를 갔느냐고 탓하더니, 올해 3월 대학 강의실에서는 “아이들이 생각이 없어서” 그랬다는 어느 교수의 망언으로 이어졌다. 죽음은 ‘어쩔 수 없는’ 우연의 결과로 설명되고, 죽은 사람들은 죽게 내버려두어도 문제되지 않는 ‘잉여 인구’가 되어버린다. 세월호참사가 구조적 문제라면 우리에게는 법적 책임을 묻는 것으로 완결될 수 없는 과제가 있다. ‘죽게 내버려두는’ 권력에 책임을 묻기 위해 참사 이전과는 다른 책임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저마다 느끼는 어떤 책임감은 그 실마리가 될 수 있다. 구조적 문제일수록 어떤 책임을 져야 할지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쉽게 보이지 않을 때는 오히려 회피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팽목항으로 가던 ‘기다림의 버스’ 안에서 교사 한분을 만났다. 세월호참사로 희생된 교사 중 자신과 같은 과목을 가르치던 교사가 있어서 더욱 슬펐는데, 막상 자신이 아이들과 수학여행을 떠날 때 무엇을 해야 할지 여전히 모르겠다는 걸 깨닫고 나니 무섭더라고 했다. 세월호참사 이후 많은 학교가 수학여행 일정을 취소했다. 이것 역시 답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아직 서로를 어떻게 지켜줄 수 있는지 모른다.
아이리스 영(Iris M. Young)은 구조적 부정의와 관련된 책임의 문제를 탐구하며 법적 책임과 다른 ‘공유된 책임’을 제안한다. 법적 책임 공방이 누가 책임을 질 것인지 서로 떠넘기는 과정이라면, 책임의 공유는 내가 책임을 지지만 “다른 사람도 나와 함께 그 책임을 진다는 걸 자각하고서 지는 책임”이다. 그것은 “구조를 바꾸는 집단행동을 조직하기 위해 다른 이들과 협력하는 것”을 통해서 가능하며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구조에 대해 책임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조율된 행동을 할 수 있는 간접적 도구로 정부제도를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2) 침몰된 배로부터 고맙게도 살아 돌아온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지우기 어려운 죄책감을 새겼다. ‘당신 잘못이 아니다’라는 위로만으로는 덜어줄 수 없다. 그들이 공유한 책임의 결과를 실패로 만든 구조적 부정의에 대한 책임을 밝혀야 한다. 지금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어떤 책임감들이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없도록 하는 정부의 실패까지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
카를 야스퍼스(Karl Jaspers)는 2차대전 이후 독일 국민이 마주한 ‘죄의 문제’를 다루며 “스스로 책임을 인식하는 것이 정치적 자유에 대한 각성을 나타내는 최초의 징표”3)라고 했다. 책임을 공유하는 것은 의무와 다르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이 있음을 확인할 때 나는 책임을 질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은 권리이기도 하다. 죽게 내버려두는 것은 인과의 구조가 아니라 접합의 구조다. ‘나’는 어디에 있든 구조를 바꿀 수 있는 내 몫을 가지고 있다. 책임을 공유하려면 각자의 위치에서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지 발견해야 한다. 더욱 많은 권한을 가졌던 자들이 더욱 큰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도 우리의 책임이다.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안전사회 건설이라는 건조한 구호는 정책적·제도적 과제를 찾는 것으로 환원될 수 없다. 세월호참사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자리에 왔다고 할 수 있을 때 아마 우리는 끝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희미하게나마 책임을 발견해왔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부터 가능했다. 소설가 박민규(朴玟奎)가 세월호참사를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4)이라 단언했을 때 수많은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세월호참사라는 사건이 또다른 이름을 얻을 것이라 확신한다. 5·18이 국가가 국민을 죽인 사건에 머무르지 않고 광주민중항쟁이라는 이름을 얻었듯이. 싸르트르(J. P. Sartre)는 ‘사건’을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그것이 존재를 주고 그것이 시간을 준다.”5) 진도대교를 가로막은 경찰에 항의하며 출현을 예고하고, 청와대 앞에서 밤을 지새우며 현시한 존재는 ‘가만히 있지 않는 유가족’이었다. 가족을 잃고 목놓아 통곡하는, 슬픔에 잠식되어 애원만 하는 피해자가 아니었다. 그/녀들은 자신이 겪은 사건을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려 했고, 응당 뒤따랐어야 할 책임을 요구했고, 기다리지만 않고 직접 행동하기 시작했다.
4월 16일 이후 유가족들만 외롭게 견디는 듯했던 참사의 시간은 무너진 것을 다시 세우는 시간대(帶)가 되었다.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국회 농성은 곁자리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에도 유가족들의 경계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자기 일도 아닌데 왜 저러고 있을까?’ ‘우리를 돕는 척하며 뭘 얻으려는 걸까?’ 이런 마음이었다는 말은 나중에서야 들었지만 농성을 지원하러 갔을 때 이미 느끼던 시선이다. 그러나 마음이 이끌린 시민들은 생수와 과일을 들고 끊임없이 유가족을 찾아오기 시작했고, 유가족은 시민들과 손을 잡기 시작했다. 무너져버린 사회를 대신해 서로에게 기댈 언덕이 되어주는 연대(連帶)의 시간. 하늘이 뚫린 듯 비가 쏟아지던 2주기 촛불문화제에서 만여명의 시민이 자리를 뜨지 않고 광화문광장에서 함께한 기억은 모두에게 감동을 주었다. 참사가 시작된 날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강해지기 시작한 날이기도 하다.
희생학생의 형제자매와 생존학생의 이야기를 담은 책 『다시 봄이 올 거예요』(창비 2016) 작업에 함께하면서 만나게 된 한 생존학생은 탈출 당시의 기억을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내게 가장 강렬했던 이야기는 어쩌면 사소한 것이었다. 바닥으로 물이 들어오기 시작해 발이 시렸는데도 가만히 있었다는 이야기. 가만히 있기 위해 온몸의 근육을 수축시키며 떨고 있었을 순간을 짐작하면서 ‘가만히 있음’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안내방송을 하는 선원들이 더 잘 알 거라는 기대도, 제각각 움직이다가 상황이 더욱 악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시키는 대로만 따른 것이 아니라 친구들과 함께 살아 나가기 위해 주어진 조건에서 온힘을 다했다. 다른 승객들도 그랬다. 구명조끼를 찾아주고 서로 입혀주고 끈을 묶어주었다. 부모와 헤어져 우는 아이를 달래며 밖으로 밀어올렸다. 손을 쓸 수가 없으니 내 발을 잡으라며 서로를 지켰고 친구를 찾으러 배 안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잘못된 지시를 그냥 따르다가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이 죽은 사건이 아니다. 함께 살려던 사람들을 제각각 살아남도록 강요해 죽인 사건이다.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약속은 연대의 약속이어야 한다.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은, 구조가 강요하는 네 위치를 벗어나 감히 타인과 관계 맺기를 시도하지 말라는 명령이다. 이 싸움의 끝까지 함께하는 것이 연대라면, 그것은 권리이기도 하다. 더욱 많은 책임을 발견하며 세상을 바꿔갈 수 있기 때문이다. 연대는 말하기와 듣기에서 시작된다. 미수습자 가족이 말했다. “미안해서 말을 못 건네겠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럼 우리는 누구랑 얘기해야 돼요?” ‘말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다’거나 ‘듣고만 앉아 있다’는 흔한 말은 자칫 말하기와 듣기도 행동이라는 점을 놓치게 한다. 세월호참사는 언론 참사이기도 했다. 말하고 듣는 관계와 조건을 만들어내는 만큼 참사 이후의 사회가 열릴 것이다. 국민간담회를 열어 유가족들과 만나거나 안산으로 광화문으로 찾아가 함께 이야기 나누거나 하는 것도 이미 행동이다. 또한 여전히 우리가 듣지 못한 이야기가 많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두번째 봄에 희생학생의 형제자매와 생존학생의 이야기가 찾아왔듯이, 또다른 이야기들이 남아 있다.
‘416인권선언’을 만들기 위한 풀뿌리토론이 열렸을 때 사람들은 말할 수 있는 자리가 열려 좋았다는 소감을 나눠주었다. 말하려면 아프고, 괴로워서 말할 수 없고, 말하지 않다보니 잊어가는 것 같아 미안하고, 그래서 할 말이 더욱 없어져 뒤척이던 시간. 그런데 함께 말하니 서로 위로를 받고 힘을 얻고 각자의 다짐을 더욱 벼릴 수 있었다고 한다. 말하기와 듣기의 장소가 열리는 것이 연대다. 말들은 흩어질 수 있지만 연대는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무엇이 문제인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깨닫게 하는 말들은 피해자로부터 전해져왔다. 사건의 한가운데서 발신을 멈추지 않았던 이들의 목소리에 수신확인하며 우리는 서명을 했고 특별법 제정에 함께했고 거리와 광장에서 만났다. 평범한 말들을 나누는 보통의 존재들 사이에서 세월호참사 이후의 시간을 예감하게 하는 보편의 순간들이 만들어져왔다. 이제 한발 더 나아가서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는지, 무엇을 질문하는지 각자의 목소리로 말해야 한다. 배가 어디 부딪혔나보다 하며 공포에 떨다가 멈춰버린 동생의 시간. ㄱ이 차리는 동생의 밥상에 수저 대신 올려놓을 말을 함께 찾아가야 한다.
1차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온 해경 한명이 참사 당시 상황을 설명하다가 “애들이 철이 없어서”라는 말을 흘렸다. 방청 중이던 가족들의 항의가 빗발치던 중 한 아빠는 이런 생각을 했다. ‘철없으면 죽어도 되나?’ 아이들이 철없지 않았다는 항변은 죽음의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는 구조에 갇힌 것일 수도 있다. 새로운 질문은 새로운 책임의 구조를 찾아갈 실마리를 준다. 질문도 해답도 참사 이전의 시간에 기대서는 찾기 어렵다. 혼자서도 찾기 어렵다. 그러나 함께라면 가능하다. 진실도, 새로운 책임의 구조도 결국 연대의 질서로부터 선언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싸움에 희망이 있느냐고 묻지 않는다. 그저 이 싸움의 끝에 우리가 모두 함께 서 있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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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글에서 ‘엄마’나 ‘아빠’ 같은 표현은 단원고 희생학생의 부모를 일컫는 말이다. 교사나 학생과 같이 일반명사로 쓰기에는 어색하고, 그들을 ‘가족’으로만 보는 것도 부적절하지만 달리 지칭할 말이 없어 그냥 쓴다. 그동안 그들과 함께하면서 입에 붙어버린 말이기도 하다.
2) 아이리스 M. 영 『정치적 책임에 관하여』, 허라금·김양희·천수정 옮김, 이후 2013, 194~95면.
3) 카를 야스퍼스 『죄의 문제』, 이재승 옮김, 앨피 2014, 153면.
4) 박민규 「눈먼 자들의 국가」, 『눈먼 자들의 국가』, 문학동네 2014, 56면.
5) 이진경 『대중과 흐름』, 그린비 2012, 75~7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