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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육사의 유언, 「광야」
‘죽어서도 쉬지 않으리’
도진순 都珍淳
창원대 사학과 교수. 저서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분단의 내일, 통일의 역사』 『주해 백범일지』 등이 있음. dodemy@hanmail.net
머리말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렷스랴
모든 山脉1)들이
바다를 戀慕해 휘달릴때도
참아 이곧을 犯하든 못하였으리라
끈임없는 光陰을
부지런한 季節이 픠여선 지고
큰 江물이 비로소 길을 연엇다
지금 눈 나리고
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千古의 뒤에
白馬타고 오는 超人이 있어
이 曠野에서 목노아 부르게하리라
이것은 1945년 12월 17일자 『자유신문』에 처음 소개된 「광야」의 전문(이하 인용시 현대 어법에 맞추어 일부 수정)이다. 박훈산(朴薰山)에 의하면 「광야」는 이육사(李陸史)가 1943년 일제 관헌에게 체포되어 “북경[베이징]으로 압송 도중 찻간에서 구상되었다”고 한다.2) 육사는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동창후통(東廠胡同) 1호에 위치한 일제의 유치장에서 순국하였고,3) 당일 유치장 지하실에서 시신을 확인한 이병희(李秉熙)는 그때 “마분지 조각에다가 쓴” “시집”을 수습하였다고 한다.4) 박훈산과 이병희의 증언을 연결하면 「광야」는 이 옥중의 마분지 시집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육사가 일제의 베이징 감옥에서 죽음을 앞두고 쓴 절명시, 이것이 「광야」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광야」는 육사의 대표작 중 하나일 뿐 아니라 비범한 기상과 빼어난 비유 등 육사 시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주는 걸작으로 꼽힌다. 그런 만큼 이 시에 대한 연구 또한 상당히 많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적지 않다. 예컨대 1연 3행의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를 두고 ‘닭이 울었다/울지 않았다’는 논쟁도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으며,5) 무엇보다 마지막 연의 “백마 타고 오는 초인”에 대해서는 논의가 분분하다. 이처럼 「광야」는 여전히 제대로 독해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글은 텍스트에 배어 있는 역사적인 요소를 충분히 감안하여 문제의 핵심적인 시구를 재해석함으로써 「광야」를 새롭게 조명하려는 시도이다.
육사는 1941년 늦여름 자신의 폐병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스스로 그 이전을 극채화(極彩畵) 시기, 이후를 수묵화(水墨畵) 시기로 구분하였다.6) 극채화 시기 그의 시는 「청포도」(1939.8)처럼 낭만적이고 「절정」(1940.1)처럼 힘찼다. 반면 수묵화 시기 그의 시 발표는 격감하였고, 시세계는 매우 사색적으로 변하였으며, 특히 시간과의 전쟁, 즉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의 문제를 주요한 화두로 다루었다.
「광야」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육사의 수묵화 시기의 ‘두가지 전선(戰線)’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라 생각된다. 하나는 극채화 시기부터 계속된 일제와의 전선인데, 이것은 일제의 검열에 대한 육사의 은유와 상징으로 나타난다. 신석초(申石艸)는 일찍이 육사가 “즐겨 은유의 상징을 사용한 것은 당시의 가혹한 관헌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서이고, 실은 그의 작품들의 밑바닥에는 예리한 현실감각과 강한 의지가 숨어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7) 삼엄한 베이징의 일제 감옥에서 항일시를 쓴다는 것은 최고의 검열과 최고의 은유가 대결하는 극한상황이었다. 또 하나의 전선은 수묵화 시기에 비로소 현저하게 나타나는 죽음과의 투쟁으로, 그의 시에는 영원을 갈망하는 처절한 몸부림이 깔려 있었다.
1. 「광야」의 공간
광야(曠野): wilderness, desert
시의 제목이 된 ‘광야’를 두고 만주 또는 요동 지방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디에서 이런 해석이 유래했는지 분명하진 않지만, 육사의 대륙적 풍모와 독립운동 경력을 상정해서, 또는 ‘曠野’라는 단어를 ‘廣野’로 혼동하여8) ‘넓은 벌판’을 연상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문학에서는 일찍이 김현승(金顯承)이 “육사는 중국의 대륙을 방랑하는 동안 가없는 저 만주 벌판이라도 바라보면서 이 광야를 착상하였을지도 모른다”고 추정한 바 있고, 김윤식(金允植)은 「광야」를 요동의 넓은 벌판에 가서 크게 우는 연암(燕巖)의 ‘호곡장(好哭場)’에 비교하였으며, 정우택(鄭雨澤)은 육사의 “북방의식은 「광야」에서 하나의 정점을 이룬다”고 규정한 바 있다.9)
광야를 만주로 비정(比定)한 것은 역사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장세윤(張世胤)은 심송화의 「백마 타고 사라진 허형식 할아버지」를 주요 근거로 「광야」의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육사의 당숙으로 북만주지역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 허형식(許享植)이라 특정한 바 있다.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여 박도(朴鍍)는 실록소설 『들꽃』을 연재했다.10)
하지만 ‘광야’라는 제목은 ‘넓은 들판’을 의미하는 廣野가 아니라, ‘황무지’ ‘거친 들판’이라는 뜻의 曠野이다. 「광야」 2연 “모든 산맥들이/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에서 ‘차마’라는 부사는 넓은 곳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넓은 곳이라면 산맥이 ‘아예’ 범하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광야’는 육사가 ‘윷판대’라는 곳에 올라서 본 고향 원촌(遠村)의 ‘앞들 벌판’이라는 주장이 있는데,11) 원촌 앞들은 그리 넓은 벌판이 아니다. 퇴계종택이나 육사생가가 있는 이 일대는 그야말로 산맥들이 ‘차마’ 범하지 못한 사이로 강이 굽이쳐 흐르고, 그 강가의 자그마한 벌판을 따라 옹기종기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광야(曠野)는 영어로는 wilderness 혹은 desert이며 성경에도 자주 등장하는 단어이다. 육사의 딸인 이옥비(李沃非) 여사의 증언에 의하면 육사의 유품 중에 중국어 성경책과 찬송가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질투의 반군성」(1937.3)에 “창세기의 첫날밤”, 「아편」(1938.11)에 “번제(燔祭)”와 “노아의 홍수” 등, 그의 시나 수필에 성경과 관련된 구절이 적지 않게 등장한다. 그리고 안동 원촌의 육사생가에서 두집 건너 이웃이 이원영(李源永) 목사(1886~1958) 댁인데, 그는 육사의 팔촌형으로, 3·1운동을 주도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다섯번이나 투옥된 적이 있는 저명한 항일목사이다. 요컨대 육사는 성경의 구절들을 숙지하고 있었으리라 볼 수 있다.
사실 시제(詩題) ‘광야’는 성경의 ‘광야’와 깊은 관련이 있다. 성경에서 광야는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거친 곳이며, 세례자 요한이 ‘회개하라’고 외치고, 예수가 유혹을 받은 곳이기도 하다. 일제시기 성경 한글개역본(1938)에서 광야(wilderness, wasteland, desert)가 나오는 한두 구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이사야」 35장 1절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이사야」 43장 19절
여기서 ‘광야’는 육사가 읽었다는 중국어 번체 성경에 모두 ‘曠野’로 표기되어 있으며, 의미 또한 시 제목의 ‘광야’와 거의 같다. 즉 ‘광야’는 넓은 땅이 아니라 사람이 살 수 없는 거친 황무지를 의미한다.
녹야(綠野)와 항일
‘광야’의 의미는 육사가 사용한 반의어로 더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의 시 「한개의 별을 노래하자」에서 노래한 ‘옥야천리(沃野千里)’, 수필 「은하수」에서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을 회고하면서 자신의 고향을 “영원한 내 마음의 녹야”라고 표현한 것 등이 대표적이다.
무서리가 나리고 삼태성이 은하수를 막 건너선 때 먼 데 닭 우는 소리가 어즈러이 들리곤 했다. 이렇게 나의 소년시절에 정들인 그 은하수였마는 오늘날 내 슬픔만이 헛되히 장성하는 동안에 나는 그만 그 사랑하는 나의 은하수를 잃어바렸다. 딴이야 내 잃어바린 게 어찌 은하수뿐이리요. (…) 영원한 내 마음의 녹야! 이것만은 어데로 찾을 수가 없는 것 같고 누구에게도 말할 곳조차 없다.(「은하수」, 『이육사 전집』 173~74면)
이 녹야를 잃어버린 상태가 바로 다름 아닌 광야로, 그것은 일종의 ‘실낙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육사가 잃어버렸다고 한탄하는 “내 사랑하는 푸른 지평선”(「계절의 오행」, 『이육사 전집』 161면)도 녹야와 같은 의미이다. 물론 녹야는 단순히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옥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심상지리(心象地理)의 어휘이다.
녹야는 당나라 말기의 재상 배도(裴度)가 별장 이름을 짓는 데 활용한 뒤 유명한 단어가 되었다. 그는 환관이 권력을 독단하자, 재상을 그만두고 오교(午橋)에 별장을 지어 녹야당(綠野堂)이라 이름하고, 여기서 백거이(白居易) 유우석(劉禹錫) 등과 함께 술을 마시며 시를 즐겼다. 이후 ‘녹야’ ‘녹야당’ ‘녹야장’ ‘녹야별업’ 등은 모두 권력을 탐하지 않고 시문학을 즐기는 장소를 의미하게 되었다. 조선에서도 여러 사람이 ‘녹야당’이나 ‘오교’를 차용하여 자신의 뜻을 드러냈다. 예컨대 담양의 소쇄원(瀟灑園)에 붙어 있는 「광풍각중수기」에도 ‘오교’의 녹야당 고사가 나온다.
그러나 육사의 심상에서 ‘녹야’는 이런 음풍농월의 녹야는 아닐 것이다. 중국에서는 항일전쟁기에 들어와 ‘애국노인’ 마상보(馬相伯, 1840~1939)로 인해 녹야가 다시 유명해지게 되었다. 마상보는 1902년 전재산을 처분하고 상하이에 중국 최초의 사립대학인 푸단(復旦)대학을 설립하였고, 1925년 베이징의 푸런(輔仁)대학 설립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31년 9·18사변으로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자 그는 사흘 만에 강경한 투쟁선언을 발표하였고, 이후 넉달간 열두차례에 걸쳐 국난 극복을 호소하는 방송을 했다. 또한 1937년 7·7사변 이후에는 ‘목숨을 바쳐 일본군을 물리치자’고 열렬하게 호소하였다. 당시 그가 여러 애국지사들을 만나며 적극적인 애국운동을 전개하였던 요람이 바로 상하이의 ‘녹야당’이었다. 중국인들은 마상보를 ‘백세청년’이라 부르며 존경하였고, 녹야당은 항일운동의 정신적 성지가 되었다.12)
마상보가 베이징에 푸런대학을 설립한 이듬해인 1926년, 육사는 푸런대학에서 가까운 중궈(中國)대학으로 유학 가서 2년간 수학하였다. 또한 만주사변 발발 이후 마상보가 상하이의 녹야당을 중심으로 맹활약하던 시기에 육사는 9개월 정도 난징과 상하이에 있었다. 그는 1932년 9월에서 이듬해 4월 사이 난징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다녔는데, 이 학교는 조중합작에 의한 항일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이와 관련된 여러 정보를 수집하여 가르쳤다. 육사는 이 학교를 졸업한 이후 1933년 7월 상하이에서 ‘최후의 만찬’을 하고 귀국하였다. 때문에 육사는 마상보의 녹야당을 몰랐을 리가 없다.
광야와 꽃, 같은 공간의 다른 모습
「광야」의 시적공간을 좀더 구체적으로 특정할 수 있을까? 그 단서는 4연의 ‘매화향기’에서 찾을 수 있다. 매화의 주산지는 중국 본토의 양쯔강 이남으로, 황허(黃河) 이북, 특히 만주지역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매화는 황해도를 포함하는 중부지역 이남에서 주로 볼 수 있으며, 주 재배지는 역시 남부지역이다. 요컨대 「광야」의 시적공간은 중국 만주/동북 지역이 아니다. 육사가 중국의 베이징 유학생활을 추억하거나, 난징이나 상하이 등 ‘강남의 봄’을 그리워한 적은 있지만(「고란」, 『이육사 전집』 203면), 중국 만주/동북 지역은 이렇다 할 특별한 경험이 없어 각별하게 그리워하거나 추억한 바도 없다.
반면 육사는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 경북 안동의 원촌을 언제나 성경의 에덴동산처럼 묘사하였다. 그 고향집에 ‘작지 않은 화단’이 있었고, 여기에는 옥매화 분홍매화 등 매화가 있었다.
옛날 내 고장 우리집에는 그다지 크지는 못해두 허무히 적지 않은 화단이 있었다. (…) 요즘같이 ‘시크라맨’이나 ‘카—네손’이나 ‘쥬리프’[튤립] 같은 것은 없어도 옥매화 분홍매화 홍도 벽도 해당화 장미화 촉규화 백일홍 등등 빛도 보고 향내도 맡고 꽃도 보고 잎도 볼 만하면 1년을 다 즐길 수가 있는 것이였는데(「전조기」, 『이육사 전집』 148~49면)
육사는 「은하수」에서도 “삼태성이 우리 화단의 동편 옥매화 나무 우에 비칠 때”(『이육사 전집』 172면)처럼 옥매화를 각별하게 추억하였다. 육사의 고향 원촌은 퇴계종택과 아주 가까운데, 퇴계 이황이 매화를 좋아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이다. 육사에게 추억의 고향은 이처럼 옥매화를 비롯한 꽃으로 가득했다. 육사는 이러한 고향을 녹야라고 표현하였던 것이다.
「광야」를 읽어보면 그 시적공간은 절대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 아니다. 그것은 자주 보거나 생각한 적이 있어, 그 공간의 탄생과 전체 역사를 숙지하고 있는 고향과 같이 익숙한 곳이어야 한다. 「광야」의 시상지(詩想地)를 원촌의 ‘윷판대’로 특정할 수는 없지만, 「광야」는 육사가 죽음의 현장인 베이징 감옥에서, 태어난 고향 원촌 일대의 산과 벌판 그리고 낙동강을 추억하면서 쓴 것이라 여겨진다. 그는 1943년 6월경 모친과 맏형의 소상(小祥)에 참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잠깐 귀국하였을 때에도 고향 마을 원촌을 다녀갔다.13) 그리고 서울로 가서 체포되었으니, 이것이 그의 생애 마지막 고향 방문이었다. 박훈산의 증언과 같이 「광야」가 “북경으로 압송 도중 찻간에서 구상되었다”면, 생애 마지막으로 본 고향의 풍경이 육사의 뇌리에 생생했을 것이다. 그의 고향 일대는 도산서원, 퇴계종택, 도산구곡 등이 있는 아름다운 지역으로 가히 조선 성리학의 ‘성지’라 할 수 있다.14)
마지막으로 지적할 것은, 「광야」의 시적공간이 비록 고향 원촌이지만 시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동일한 공간 이미지가 제시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광야’라는 표현은 시의 마지막 행인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에 비로소 등장한다. 그렇다고 해서, 1연의 “까마득한 날에”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의 시적공간이나, 2연의 “모든 산맥들이/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의 시적공간도 자동적으로 광야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광야」의 특징은 같은 시적공간이 시간에 따라 이미지와 의미가 전환된다는 데 있다. 육사는 이미 「계절의 오행」에서 “얼마 안 있어 국화가 만발할 화단도 나는 잃었고 내 요람도 고목에 걸린 거미줄처럼 날려 보냈나이다”(『이육사 전집』 152면)라며, 녹야였던 고향이 광야로 바뀐 것을 통탄한 바 있다. 같은 공간의 의미가 대대적으로 전환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경우, 광야를 시종 ‘신성한 공간’으로 오독하게 된다.15)
육사는 이미 「해조사(海潮詞)」에서 ‘광야’를 사용하여, ‘해조’의 우렁찬 소리를 “광야를 울리는 불 맞은 사자(獅子)의 신음인가?”라고 묘사한 바 있는데, 여기서 광야도 ‘동물의 왕국’과 같은 야생의 황무지를 말한다. ‘불 맞은’은 ‘총 맞은’이란 의미이니, 위의 구절은 광야에서 행해지는 사냥에 맞서는 사자의 거대한 마지막 포효를 묘사한 것이다.
육사의 고향 원촌과 안동 일대는 우리나라에서 독립운동가를 가장 많이 배출한 곳으로, 일본 경찰에 쫓기던 이들이 밤사이 붙들려가는 일도 숱하게 벌어졌다. 저간의 이러한 사정 때문에 육사는 녹야였던 고향을 광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광야의 일반적인 의미는 황무지이지만, 육사는 이를 제국의 억압에서 해방되어야 하는 식민지로 확장하였다. 다시 강조하지만, 「광야」의 시적공간은 중국의 만주나 요동 지역이 아니라, 그의 정신적 ‘녹야’였던 고향, 또는 이로 대표되는 조국이다.
2. 「광야」의 시간
일찍이 원나라의 범팽(范梈)은 한시(漢詩)에서 “무릇 기(起)는 평이해야 하고, 승(承)은 은은히 널리 퍼져야 하며, 전(轉)은 변화를 일으켜야 하고, 결(結)은 연못처럼 깊고 아득해야 한다”라고 정곡을 찌른 바 있다.16)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광야」는 시간을 축으로 전개되는데, “까마득한 날에”로 시작하여〔起〕, 3연 “끊임없는 광음”으로 이어지며〔承〕, 4연 “지금”에서 시가 대대적으로 전환하고〔轉〕, 5연 “다시 천고의 뒤에”로 아득하게 마무리된다〔結〕. 「광야」를 바로 독해하기 위해서는 전(轉)에 해당하는 4연 “지금”에서 그 전환의 의미를 파악하고, 결(結)에 해당하는 “다시 천고의 뒤에”가 지니는 깊고 아득한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여기서는 「광야」의 시간을 4연의 “지금”을 경계로 나누어 살펴본다.
1~3연: 천지창조에서 녹야로 가는 길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광야」는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열리는 장엄한 순간으로 시작된다. 앞서 광야의 시적공간을 설명하면서 성경을 인용하였는데, 사실 1연의 주제는 성경의 서두인 ‘태초’와 ‘창세’ 부분이다.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로 시작한다. 반면에 「광야」 1~2연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렇게, 즉 신의 말씀에 의해 천지가 창조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 소리나 말씀도, 어떠한 신도 없었다는 것이다.
신(神)은 아무것도 없는 공(空)과 허(虛)에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였다고 그리고 자기의 뜻대로 만들었다고 사람들은 말하거니, 나도 이 공과 허에서 나의 세계를 나의 의사대로 바둑이나 장기를 두는 것처럼 손쉽게 창조한들 엇덜랴. 그래서 이 지상의 모든 용납될 수 없는 존재를 그곳에 그려본다 해도 그것은 나의 자유이여라.(「창공에 그리는 마음」, 『이육사 전집』 134면)
이것은 신이 천지를 창조했다면 자신도 그런 천지를 창조하고 싶다는 반박이다. 육사는 자신이 창조하는 새로운 세상을 「한개의 별을 노래하자」에서 이렇게 노래하였다.
렴리한 사람들을 다스리는 신(神)이란 항상 거룩합시니
새 별을 차저가는 이민들의 그 틈엔 안 끼여 갈 테니
새로운 지구에 단죄(罪)없는 노래를 진주처름 흩이자17)
신이 없는 새로운 별, 새로운 지구로 이민 가서, 기독교식 원죄 따위가 없는 노래를 불러보자는 것이다. 「광야」의 1~2연은 이처럼 신이 없는, 성경과는 전혀 다른 천지창조를 노래한다. 그러니 태초에 말씀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무 소리도 없었다는 것이며, 인간세상이 시작되고 난 뒤에 등장하여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닭 울음소리 같은 것이 어디 있었겠는가 하는 것이다. 앞서 인용한 수필 「은하수」에서 육사는 어린 시절 밤새워 밤하늘의 별과 은하수를 보고 난 뒤, “삼태성이 은하수를 막 건너선 때 먼 데 닭 우는 소리가 어즈러이 들리곤 했다”고 회상한 바 있다. 그러니까 육사가 들은 “닭 우는 소리”는 천지창조의 1~2연이 아니라, 3연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고 난 이후의 일이다.
육사는 중궈대학과 베이징대학에서 유학하던 시절, ‘Y교수’(마유자오, 馬裕藻)18)와 교류하면서 야금학(冶金學)에 심취하여 이에 대한 책을 읽는 버릇이 생겼다고 한다(「계절의 오행」, 『이육사 전집』 157면). 당시의 ‘야금술’이나 ‘연금술’은 노장사상(老莊思想)과도 친연관계에 있는바, 「광야」 1~2연의 천지창조 부분은 아래 인용한 노자의 『도덕경』 25장의 내용과 유사하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자연에서 도(道)가, 도에서 하늘이, 하늘에서 땅이, 땅에서 인간이 본을 받게 된다〔法〕는 것이다. 육사의 시 「한개의 별을 노래하자」, 수필 「창공」 등에 나타나는 세계관도 이러한 노장(老莊)의 천지관에서 영향을 받은 듯하다.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여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광야」의 3연에서 강과 더불어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다. ‘큰 강물’은 피어선 지기를 그치지 않은 긴 세월의 도움을 받아 비로소 이 땅에 자신의 길을 낼 수 있었다. 그 세월이 “부지런”하다는 것은 그 기간 내내 강물의 노력이 또한 그렇게 부단했다는 뜻이기도 하며, 강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들의 삶 또한 부지런하게 노력하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19) 이 구절은 앞서 인용한 성경의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와 유사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그것을 만들어내는 주어이다. 즉 「광야」의 주체는 성경처럼 ‘신’이 아니라 “부지런한 계절”이라는 인간의 역사와 ‘강’이라는 대자연이다. 19)
실제 육사의 고향 원촌 또는 원천(遠川)은 진성(眞成) 이씨 가문이 낙동강 줄기를 따라 내려가면서 개척한 곳이다. 퇴계의 증조부 이계양(李繼陽)이 15세기에 현재 도산온천이 있는 온혜(溫惠, 옛이름 온계溫溪)에 들어갔고, 이곳에서 태어난 퇴계가 16세기에 상계(上溪)를 개척하였으며, 퇴계의 손자 이영도(李詠道)가 17세기에 하계(河溪)를 열었고, 이영도의 증손자 이구(李榘)가 18세기에 육사의 고향 원천(遠川)을 개척했다. 대략 100년 간격으로 강줄기를 따라 열어나간 셈이며,20) 마을 이름에 모두 계(溪) 또는 천(川)이 들어가 있다. 이처럼 강은 인간이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녹야로 이끄는 희망과 해방의 인도자였다. 육사도 일찍이 이러한 낙동강을 경험하였다.
이때가 되면 어느 사이에 들에는 오곡이 익고 동리집 지붕마다 고지박이 드렁드렁 굵어가는 사이로 늦게 핀 박꽃이 한결 더 희게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면 우리들은 오언고풍을 짓든 것을 파접을 한다고 왼동리가 모여서 잔치를 하며 야단법석을 하는 것이였다. (…) 그래서 나는 어린 마음에도 지상에는 낙동강이 제일 좋은 강이였고 창공에는 아름다운 은하수가 있거니 하면 형상할 수 없는 한개의 자랑을 느끼곤 했다.(「은하수」, 『이육사 전집』 172~73면)
그에게 낙동강은 마치 하늘의 은하수가 내려온 것 같은 요람의 상징이었다. 이 강이 없는 곳은 은하수가 없는, 하늘도 다 끝난 곳이며, 다름 아닌 사막이며 광야였다.
4~5연: 수평적 시간?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황현산(黃鉉産)은 5연의 “다시 천고의 뒤”가 이 시의 ‘눈’이 된다고 하면서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이 “천고”는 저 태고의 “까마득한 날”을 미래의 아득한 날과 연결시킨다. 그 까마득한 날에 하늘과 땅의 새벽이 있었다면 이제 아득한 날을 거쳐서 와야 할 것은 ‘인간의 새벽’이다. 인간은 저마다 자유인이 되어 제 새벽을 맞는다. 이 새로운 천고에, 아득한 미래의 새벽에, 초인이 목놓아 부를 노래는 바로 그 인간 개벽의 ‘닭 울음소리’가 된다.(『우물에서 하늘 보기』 19~20면)
황현산은 「광야」의 시간을 ‘까마득한 날-지금-다시 천고의 뒤’로 이어지는 시간, 즉 우리가 사용하는 일반적인 ‘시간’의 개념인 수평적(horizontal)이며 물리적 시간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천년 뒤’의 경우 ‘민족독립’이 아니라 ‘저마다 자유인’이 되는 ‘인간 개벽’으로 보고, 과감하게 “선생[이육사]이 프랑스대혁명기의 수학자이자 정치가인 콩도르세의 유작 『인간 정신 진보의 역사도표 개요』를 비록 읽지는 않았어도, 그 내용을 개설한 글을 읽거나 강의를 들었을 것으로 믿는다”고 주장하였다(『우물에서 하늘 보기』 21~22면). 황현산이 말하는 꽁도르세(M. de Condorcet, 1743~94)의 유작은 1795년에 발간된 Esquisse d’un tableau historique des progrès de l’esprit humain이다.21) 이 책의 개요는 황현산이 요약한 바와 같이, 인류의 역사가 끊임없이 진보하여 끝내 ‘완전한 인격’에 도달한다는, 진보에 대한 영원한 믿음이다.
육사가 베이징의 일제 감옥에서 「광야」를 쓸 당시 ‘인류가 끝없이 진보하여’ ‘천고의 뒤에’ 민족해방을 넘어 인간해방이 올 것으로 과연 믿었을까? 프랑스대혁명 이후 인류 역사의 직선적 진보를 낙관하였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전혀 아니다!
1924년 4월, 21세의 육사는 과학과 이성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의 근대화 노선을 따라 일본 토오꾜오로 건너갔다. 그해 가을 『플루타르크 영웅전』 『시저』 『나폴레옹』 등을 다 읽었지만, 그는 얼마 안 있어 화단도 잃고 요람도 날려 보냈다고 통탄하였다.
그때 나는 그[낙동강] 물소리를 따라 어데든지 가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없어 동해를 건넜고 어느 사이 뿌류닭—크의 영웅전도 읽고, 씨—저나 나포레옹을 다 읽은 때는 모두 가을이였읍니다마는 눈물이 무엇입니까 얼마 안 있어 국화가 만발할 화단도 나는 잃었고 내 요람도 고목에 걸린 거미줄처럼 날려 보냈나이다.(「계절의 오행」, 『이육사 전집』 152면)
육사는 근대화 노선이 광야를 녹야로 열어주던 낙동강과 같은 것인 줄 알고 토오꾜오로 유학을 갔지만, 당시 그곳의 분위기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1923년 9월 1일 칸또오대지진(關東大震災)이 일어났고, 일본 민간인과 군경은 약 6000여명의 조선인을 무참히 학살하였다. 지진이 일어나던 그날 새벽 조선인 무정부주의자 박열(朴烈)과 그의 아내 카네꼬 후미꼬(金子文子) 등은 ‘보호검속’으로 체포되었다. 박열은 안동과 가까운 문경 출신으로, 당시 토오꾜오에서 무정부주의자 조직인 흑우회(黑友會)와 불령사(不逞社)를 이끌며 이른바 ‘대역사건’으로 ‘일왕폭살’을 계획, 중국에 있는 의열단과 연결하여 폭탄을 구하고 있었다. 박열과 카네꼬는 이 대역사건으로 1923년 10월 24일부터 1925년 6월 6일까지 혹심한 심문을 받았는데, 그 심문과 재판은 일본 국내는 물론 조선에서도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22)
1924년 1월 5일, 김지섭(金祉燮)은 칸또오대지진 당시 학살된 조선인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 천황이 있는 황거(皇居)의 니주우바시(二重橋)에 폭탄을 던졌다. 김지섭은 육사와 같은 안동 출신이며, 박열과 연결되어 있던 의열단의 단원이었다. 육사가 토오꾜오에 체류하는 내내 박열과 김지섭에 대한 심문과 재판이 진행되었고, 흑우회 등이 중심이 되어 옥중의 박열과 김지섭을 후원하고 있었다. 김지섭은 11월 6일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자 항소하였고, 육사가 귀국하는 1925년 1월 옥중에서 생명을 건 단식투쟁을 벌이면서 ‘무죄 아니면 사형’을 요구하고 있었다.23)
1924년 봄 육사는 ‘낙동강’을 따라 일본 토오꾜오로 건너갔지만, 그곳에서 얼마 안 있어 목도한 것은 일제의 무자비한 조선인 학살 문제의 여파와, 박열의 대역사건 및 김지섭의 궁성폭탄사건에 대한 심문과 재판이었다. 육사는 박열이 주도한 흑우회에 참여하였다고 하며,24) 안동 선배인 김지섭을 통해 훗날 중국에 가서 찾아가게 되는 의열단의 모습을 보았다.
육사는 결국 1925년 1월 토오꾜오 유학을 청산하고, 조선으로 돌아와 대구 조양회관(朝陽會館)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대구에서도 민족운동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9월, 서동성(徐東星)은 박열의 대역사건에 연루되어 면소(免訴) 판결을 받고 난 뒤 귀국하여 대구에서 무정부주의와 의열투쟁을 결합한 진우동맹(眞友同盟)을 결성하였다.25) 또한 같은 달, 육사는 이정기(李定基)의 권유로 형·동생과 함께 암살단(暗殺團)이라는 비밀결사에 가입하였다.26)
이런 육사가 “다시 천고의 뒤에” 꽁도르세의 저작과 같은 근대화 코스가 재림하기를 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육사는 서구의 근대화 노선이 이미 ‘정신적 위기’에 빠졌다고 생각했으며, 그리하여 니체(F. Nietzsche)와 예이츠(W. B. Yeats) 등 근대화에 비판적이었던 서양 지성과, 한국과 동양의 고대문화를 통해 서구의 근대문화가 당면한 정신적 위기도 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27) 꽁도르세의 길은 육사를 광야에서 해방시키는 길이 아니라, 광야로 되돌리는 길이었다.
카이로스: 지금과 영원
황현산의 착오는 ‘시의 눈’이 된다는 ‘천고’를 수평적, 물리적 시간으로 파악한 데서 비롯된다. 서양 고대의 시간 개념에는 ‘크로노스’(kronos)와 ‘카이로스’(kairos) 두가지가 있다. ‘크로노스’는 수평적, 물리적 시간 개념으로, 달력에 표시되는 실제 시간을 의미한다. 반면 ‘카이로스’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때나 기회를 나타내는 것으로, 그것이 영원으로 이어지는 수직적(vertical)인 시간이다.28)
「광야」는 “까마득한 날”에서 시작하여 장구한 수평적 역사의 시간, 즉 ‘크로노스’로 내려오다가, 전(轉)에 해당하는 4연의 “지금”에 이르러 “노래”와 결합한다. 여기에서부터 시간은 더이상 수평적으로 흘러가지 않고, 수직적으로 올라가는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영원에 접목되는 것이다. 엘리엇(T. S. Eliot)의 표현을 빌리자면, 「광야」 4연의 “지금”은 “시간과 무시간의 교차점”이다.29)
육사는 수묵화 시기에 들어와 제1전선인 항일과 더불어, 제2전선인 죽음과의 투쟁에 들어갔으며 ‘영원에의 사모’를 간절하게 희원하였다. ‘영원에의 사모’에서 육사가 관심을 둔 것은 니체와 예이츠, 그리고 불교 등의 동양사상이었다. 「광야」의 4연 “지금” “여기”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이제 가장 고귀한 희망을 위해 씨앗을 심어야 할 때가 왔습니다”30)라는 구절을 연상시킨다.
여기서 차라투스트라가 “고귀한 희망을 위해 씨앗을 심”는다는 것은 ‘나의 노래를 들려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노래를 불러야 하는 ‘때’가 바로 ‘현재 순간’(this moment), 곧 지금이다. 즉 차라투스트라의 노래를 통해 ‘지금’은 ‘과거의 영원’과 ‘미래의 영원’으로 이어지는 관문이 된다.
우리가 지나온 이쪽은 까마득한 과거의 영원까지 이어져.
관문을 지나 뻗어 있는 저쪽은 까마득한 미래의 영원까지 이어져.
두 길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뻗어 있지.
두 길은 바로 이 관문에서 서로 만나.
이 관문의 이름은 ‘지금’(this moment)이지.31)
차라투스트라의 노래는 바로 ‘지금’에서 영원으로 회귀하는, 즉 초인에 이르는 “무지개 길과 계단”32)을 보여준다. 수묵화 시기 육사의 시에서 “나의 뮤즈”가 내려오는 “별 계단(階段)”(「나의 뮤-즈」), 별들이 내리는 “비취계단(翡翠階段)”(「해후」), 파초의 넋과 만나고 헤어지는 “새벽하늘의 무지개”(「파초」) 등은 바로 니체가 말하는 영원에 이르는 계단이자 무지개이다. 이를 통해 ‘지금’ 여기서 부르는 나의 노래는 영원으로 올라간다. “과거의 영원”으로 연결된 것이 “천겁(千劫)”을 노래한 「나의 뮤-즈」였다면, “미래의 영원”으로 연결되는 것이 바로 「광야」의 “다시 천고의 뒤”이다.
한시에서 전(轉)은 시의 성패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시 전체의 주인’이라 불린다.33) 「광야」의 4연은 전(轉)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과연 여기서 시공간 모두 대대적으로 전환된다. 강과 인간의 오랜 노력으로 녹야로 나아가던 길은 4연 1행에서 “지금” 눈 내리는 광야로 돌연 전환된다. 물론 여기서 “눈〔雪〕”은 「절정」의 “겨울”이나 「꽃」의 “툰드라”와 마찬가지로 일제의 폭압을 상징하지만, 이어지는 2행의 “매화향기”를 통해 다시 광야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의 싹을 남기고 있다. 그리고 3행에서는 시적화자인 “내”가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림으로써, 광야의 시간은 ‘크로노스’의 시간에서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전환하여, 5연의 “다시 천고의 뒤” 즉 ‘영원한 미래’로 이어지는 것이다.
천고(千古): 죽음과 영원
5연에서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은 “천고의 뒤”와 결합되는 공간이 “이 광야”라는 점이다. 4연에서 “지금” “내”가 “여기”에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렸는데, 5연의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목놓아 부르게” 하는 곳이 다름 아닌 “이 광야”이다. 즉 4~5연에 등장하는 시적공간의 이미지는 동일하게 광야이다. 광야의 의미가 앞서 언급한 황무지나 식민 조선을 의미한다면, 영원에 가까운 긴 세월 동안 광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미 앞에서 ‘천고’는 ‘지금’과 결합하여 물리적 시간이 아니라 영원으로 이어지는 카이로스의 시간이라고 지적한 바 있지만, 여기에서 천고의 의미를 죽음과 관련하여 하나 더 추가하고자 한다. 천고는 본래 의미인 ‘영원히 긴 시간’에서 비롯되어, 죽은 자를 애도하며 ‘영원한 안식을 취하라’는 만사(輓詞)로 흔히 사용된다. 즉 어떤 분이 죽으면 ‘모모선생천고(某某先生千古)’라는 만사를 쓴다. 예컨대 중국의 저명한 소설가 바진(巴金)의 소설 『한야(寒夜)』에 ‘안선생천고(安先生千古)’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것은 ‘안선생이여 이제 영원히 안식하소서!’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천고(千古)’는 죽음, 또는 그 이후의 영원을 의미한다.
육사는 이미 천년 전에 두보(杜甫)가 죽음을 넘어서려 몸부림쳤음을 잘 알고 있었다. 시 외에 아무것도 남길 것이 없었던 두보는 만년에 인생을 회고하면서 “문장이 천년 가는가는 스스로 안다(文章千古事/得失寸心知)” 하였고, “시어가 남을 놀라게 하지 않으면 죽어도 쉬지 않으리라(語不驚人死不休)” 하고 노래하였다.34) 이 절절한 구절들은 『두시언해(杜詩諺解)』에도 번역되어 실려 있다.35) 육사는 한시에 정통하였으며, 한글시 발표가 금지된 일제의 폭압기에 두보의 “죽어도 쉬지 않으리라”라는 구절을 좌우명처럼 소중히 여기며 한시 모임을 이끌었다.36)
이상을 고려하여 「광야」의 4~5연을 보면, 4연에서 시적화자가 살아서 “지금” “여기”(광야)에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고, 5연에서는 ‘죽어서도’(“천고의 뒤에”) 안식을 취하지 않고 “백마 타고 오는 초인”으로 하여금 “이 광야에서” 노래를 “다시” “목놓아 부르게 하”겠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3. 백마 타고 오는 초인
이상에서 5연의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누구인가는 이미 대강 밝혀진 셈이다. 그것은 역사적 인간인 김일성(金日成)—김경천(金擎川)37)이나 허형식 또는 나폴레옹38)이 될 수 없으며, ‘작가’ 또는 ‘시적화자’와 관련된다.
「광야」에서는 4연 마지막 행에서 시적화자인 “내”가 등장하여,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하고, 다시 5연 마지막 행에서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한다. 즉 시적화자가 초인으로 하여금 노래를 목놓아 부르게 하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표명되어 있다. 이것이 명령인지 부탁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나’와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모두 작가 육사의 ‘또다른 자아’(alter ego)이기 때문이다. 그 살아생전의 모습이 4연의 ‘나’라면, 죽어서도 쉬지 않는 영혼의 화신이 바로 ‘초인’이다. 이 대목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다음 구절을 연상케 한다.
너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간청한 것!
노래를 부르라고 간청했다? 음, 음.
우리 중의 누가 누구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어야지?
간청한 사람이 고맙다는 말을 들어야 하나?
간청 받은 사람이 고맙다는 말을 들어야 하나?
하여간 노래해, 날 위해 노래해! 아! 내 <영혼>!
내가 고맙다고 할게!39)
그런데 육사는 극채화 시기의 시 「해조사」에서 「광야」의 ‘초인’과 비슷한 ‘거인(巨人)’을 노래한 바 있다.
이 밤에 날 부를 이 없거늘! 고이한 소리!
광야(曠野)를 울리는 불 맞은 사자(獅子)의 신음(呻吟)인가?
오, 소리는 장엄한 네 생애의 마지막 포효(咆哮)!
내 고도(孤島)의 매태 낀 성곽(城郭)을 깨뜨려다오!
산실(産室)을 새어나오는 분만(妢娩)의 큰 괴로움!
한밤에 찾아올 귀여운 손님을 맞이하자
소리! 고이한 소리! 지축(地軸)이 메지게 달려와
고요한 섬 밤을 지새게 하는구나.
거인(巨人)의 탄생을 축복하는 노래의 합주!
하늘에 사무치는 거룩한 기쁨의 소리!
해조(海潮)는 가을을 불러 내 가슴을 어루만지며
잠드는 넋을 부르다 오 해조! 해조의 소리!
—「해조사」 일부
「해조사」는 여러가지로 「광야」와 유사한 점이 있다. 먼저, “산실을 새어나오는 분만” “거인의 탄생” 등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다음 구절을 연상시킨다.
이제야 비로소 인류의 미래라는 산이 산통으로 괴로워하는구나.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는 소망한다. 초인(위버멘쉬)이 태어나기를.40)
「해조사」에서 시적화자인 ‘나’는 총 맞은 사자의 “마지막 포효”처럼 우렁찬 해조의 장엄한 소리에게, 자신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자신의 “잠드는 넋”을 불러, 자신이 거인으로 탄생할 수 있기를 요청한다. 여기서도 “거인”은 곧 시적화자이며, 육사의 또다른 자아이다. 그러나 「해조사」의 거인과 「광야」의 초인은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해조사」의 거인이 극채화 시기 살아 있는 육사 자신의 모습이라면, 「광야」의 초인은 육사가 죽음을 넘어 영원에 접목하려는 수묵화 시기의 또다른 자아이다.
수묵화 시기로 전환되는 1941년 가을 어느날, 육사는 죽음의 병마에 맞서 몸부림치면서 자신이 “또 언제 이 세상에 태여날는지도 모르는 현현(玄玄)한 존재”라고 항변한 바 있다(「계절의 표정」, 『이육사 전집』 197면). 그리고 「나의 뮤-즈」에서 불교에서 음악의 신인 ‘건달바’(Gandharva, 乾闥婆)와 함께 “몇천겁 동안” 향연을 가지고, “목청이 외골수”인 노래를 불렀다고 하였다. 「나의 뮤-즈」의 건달바가 자신의 ‘영원한 과거’, 즉 본래면목이라면, 「광야」의 초인은 죽음 이후 ‘영원한 미래’의 자기현신인 것이다.
「광야」에는 니체의 영향이 적지 않지만,41)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니체의 ‘위버멘쉬’(Übermensch, overman, 초인)와는 다른 것이다. 위버멘쉬를 일본에서 ‘초인’이라 번역하면서 본래 어감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어졌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같은 것의 영원한 되풀이’(eternal return of the same)이며, 초인(위버멘쉬)은 이러한 참을 수 없는 현실 내지 존재의 실상을 과감히 긍정함으로써 기존 인간의 한계를 돌파하는 인물이다. 즉 니체의 초인은 사람이 죽었다 다시 태어나는 힌두교나 불교의 환생(還生, reincarnation)이나, 신이 어떤 모습으로 내려오는 화신(化身, avatar)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42)
그러나 「광야」에서 초인은 “다시 천고의 뒤에” 즉 사후에 나타나는 모습으로, 니체의 초인과는 달리 화신이나 환생에 가깝다. 육사는 「나의 뮤-즈」를 통해 자신의 화신으로 불교의 ‘건달바’를 차용하였지만, 그의 환생관은 불교의 그것과도 매우 다르다. 불교는 불멸의 영혼을 인정하지 않는 무아론(無我論)이지만, 「광야」의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시적화자 내지 육사 자신의 강력한 의지가 표출된 환생을 의미한다.
육사는 수묵화 시기에 들어와 예이츠의 ‘영원에의 사모’를 특히 좋아하였다. 예이츠는 사망하기 넉달 전(1938.9.4)에 자신의 묘비명으로 끝나는, 자신에 대한 만가(輓歌) 「불벤 산 아래」(“Under Ben Bulben”)를 썼다. 이 시의 1부에 등장하는 불사불멸의 초인(superhuman)들은 모두 말을 타고 있으며, 이어서 2부에서는 인간의 ‘환생’(reincarnation)을 노래하였다. 육사의 「광야」는 예이츠의 이 시와 시세계가 사뭇 다르지만, 말을 탄 초인이 등장하고, 환생을 노래하며, 자신에 대한 만가라는 점에서는 유사하다.43)
그 초인이 하필이면 ‘백마’를 타고 오는 것은 역시 ‘청포백마(靑袍白馬)’와 관련될 것이다. 한시에서 백마는 다양한 이미지로 사용되지만, 그것이 청포와 결합하여 ‘청포백마(靑袍白馬)’가 되면 두보의 시에서 볼 수 있듯이 대체로 ‘난신적자(亂臣賊子)’를 의미한다. 그러나 일제와 맞서는 육사는 이러한 청포백마를 난신적자가 아닌 ‘혁명가’로 환호하였다.44)
맺음말: ‘죽어서도 쉬지 않으리’
육사는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면서 “살아가며 온갖 고독이나 비애를 맛볼지라도 ‘시 한편’만 부끄럽지 않게 쓰면 될 것”(「계절의 오행」, 『이육사 전집』 161면)이라 다짐한 바 있다. 일제 및 죽음과 투쟁하는 수묵화 시기에 들어와 그는 그의 노래(시)가 ‘죽음’을 넘어 ‘영원’으로 접목되기를 갈망하였고, 니체의 ‘영원회귀’와 예이츠의 ‘영원에의 사모’ 그리고 불교의 윤회에 대해서도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그리하여 이 수묵화 시기부터 ‘천겁’ ‘천년’ ‘천고’ 등의 구절이 시에 등장한다.
그의 절명시 「광야」는 「나의 뮤-즈」와 여러모로 짝을 이룬다. 「나의 뮤-즈」에서는 불교의 팔부중신 중 하나인 ‘음악의 신’ 건달바와 교감하면서 ‘몇천겁’으로 이어지는 자신의 ‘영원한 과거’, 즉 “목청이 외골수”인 자신의 본래면목을 고백하였다. 「나의 뮤-즈」가 자신의 일대기를 시로 표현한 비명(碑銘)이라면, 「광야」는 “다시 천고의 뒤”, 죽어서도 영원히 이 노래를 목놓아 부르겠다는 유언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육사는 「계절의 오행」(1938.12)에서 자신은 결코 유언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한 바 있다.
정면으로 달려드는 표범을 겁내서는 한 발자국이라도 물러서지 않으려는 내 길을 사랑할 뿐이오. 그렇소이다. 내 길을 사랑하는 마음, 그것은 나 자신에 희생을 요구하는 노력이오. 이래서 나는 내 기백을 키우고 길러서 금강심(金剛心)에서 나오는 내 시를 쓸지언정 유언은 쓰지 않겠소 (…) 다만 나에게는 행동의 연속만이 있을 따름이오. 행동은 말이 아니고, 나에게는 시를 생각한다는 것도 행동이 되는 까닭이오.(『이육사 전집』 162면)
육사는 남기는 말에 지나지 않는 “유언” 대신, “자신의 희생을 요구하는 노력”으로 “기백을 키우고 길러서” 말이 아닌 “행동의 연속”으로 “금강심에서 나오는 시를” 쓰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리하여 행동의 일환인 유언시 「광야」는 두보의 ‘문장천고사(文章千古事)’와 ‘죽어도 쉬지 않으리라(死不休)’를 결합시킨 듯 깊고 아득할 뿐만 아니라, 읽는 이들을 촉발케 하는 기개가 서려 있다.
베이징의 차디찬 감옥, 그 절명의 시공간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육사가 일제에 맞서 남긴 행동의 유언이 「광야」이다. 자신의 죽음의 장소인 감옥에서, 녹야에서 광야로 변해버린 태어난 고향과 조국을 생각하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고, 죽어서도 이 노래를 더욱 목놓아 부르겠노라 다짐하였다. 그러니 「광야」는 절명의 순간 남기는 유언인 동시에 자신의 죽음에 보내는 만가이며, 녹야였던 고향과 조국의 본래면목을 그리는 망향가이기도 하다.
1) 원본에 등장하는 ‘산맥(山脉)’의 ‘脉’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산맥(山脈)’의 ‘脈’과 다른 글자로 보이지만(박현수 편 『원전주해 이육사 시전집』, 예옥 2008, 164면), 『강희자전(康熙字典)』에서 ‘脉’은 ‘俗脈字’라 하듯이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2) 박훈산 「항쟁의 시인: 육사의 시와 생애」, 『조선일보』 1956.5.25(『원전주해 이육사 시전집』 263~
65면)
3) 유치장이라고 하지만 감옥과 같은 곳이었기 때문에 이하 일제의 ‘베이징 감옥’이라 부른다.
4) 김은실 「발굴: 여성독립운동가 이병희씨」, 『여성신문』 2003.7.4.
5) 박순원 「이육사의 광야 연구」, 『비평문학』 40호, 2011.6, 95~104면.
6) 이육사 「고란」(1942.12.1), 김용직·손병희 엮음 『이육사 전집』, 깊은샘 2004, 200~201면.
7) 신석초 「이육사의 생애와 시」, 『사상계』 1964년 7월호 249면.
8) 홍영희는 曠野와 廣野를 혼용하고 있다. 홍영희 「거경궁리(居敬窮理)의 정신과 예언자적 지성」, 『이육사의 문학과 저항정신』, 이육사문학관 2014, 80~81면.
9) 김현승 『한국현대시해설』, 관동출판사 1972, 141면; 김윤식 「육사의 ‘광야’와 연암의 ‘호곡장’」, 『문학동네』 2004년 봄호; 정우택 「이육사 시에서 北方意識의 의미: 호 ‘육사’의 새로운 해석을 중심으로」, 『어문연구』 33권 1호(2005) 211면.
10) 장세윤 「허형식, 북만주 최후의 항일 투쟁가: “백마 타고 오는 초인”」, 『내일을 여는 역사』 제27호(2007); 박도 「박도 실록소설 ‘들꽃’: 제9장 광야의 초인」, 『오마이뉴스』, 2015.1.31, 2.3, 2.5, 2.7.
11) 이성원 『천년의 선비를 찾아서: 농암 17대 종손이 들려주는 종택 이야기』, 푸른역사 2008, 270면.
12) 2010년 상하이 엑스포에서 중국이 야심차게 세운 ‘중국관(中國館)’이 바로 녹야당 자리였다. 김명호 「상하이 엑스포 중국관은 ‘애국노인’ 마상보 칩거 장소」, 『중앙일보』 2010.8.7.
13) 김희곤 『이육사 평전』, 푸른역사 2010, 232면.
14) 이성원, 앞의 책 330면.
15) 박호영은 “광야의 현장”이 “육사의 고향, 안동군 도산면 원촌리”라고 논증하였지만, 광야가 녹야의 반대 의미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여 ‘신성한 공간’으로 해석하였다. 박호영 「이육사의 ‘광야’에 대한 실증적 접근」, 『한국시학연구』 5호(2001) 94~96면.
16) 구본현 「漢詩 絶句의 기승전결 구성에 대하여」, 『국문학연구』 제30호(2014) 266면.
17) ‘렴리(厭離)’는 ‘더렵혀진 세상을 버리고 떠난다’는 ‘염리례토(厭離穢土)’의 준말로 보며, 3행의 “지구에단罪없는노래” 부분에 대해서는 다양한 띄어쓰기가 있다. 심원섭 편주 『원본 이육사전집』, 집문당 1986, 287~89면 참고.
18) 야오란(姚然)은 Y교수가 마유자오라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마유자오는 일본 와세다대학과 토오꾜오제국대학에서 유학하였고, 육사가 중국에 유학할 당시 베이징대학 중문과 교수였다. 루쉰(魯迅)을 존경하여 그를 베이징대학 중문과 교수로 초빙하기도 하였다. 육사가 루쉰을 특별하게 존경한 것에는 마유자오의 영향도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야오란 「이육사 문학의 사상적 배경 연구: 중국 유학체험을 중심으로」, 서울대 대학원 석사논문, 2012, 24~29면.
19) 황현산 「이육사의 광야를 읽는다」, 『우물에서 하늘 보기』, 삼인 2015, 18면.
20) 이성원, 앞의 책 267~68면.
21) 꽁도르세의 이 책은 국내에서 ‘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요’란 제목으로 번역되었다(장세룡 옮김, 책세상 2002).
22) 김명섭 「박열의 일왕폭살계획 추진과 옥중투쟁」,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8호(2014).
23)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추강 김지섭』,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2014, 41~152면.
24) 김희곤, 앞의 책 80~81면.
25) 허재훈 「대구·경북 지역 아나키즘 사상운동의 전개」, 『철학논총』 40호(2005) 367~72면.
26) 김희곤, 앞의 책 84~108면.
27) 이육사 「朝鮮文化는 世界文化의 一倫」(1938.11), 『이육사 전집』 344면.
28) 민영진 「카이로스와 크로노스」, 『기독교사상』 43권 12호(1999).
29) 이상섭 「시간과 무시간의 교차점: 엘리엇의 휴머니즘 비판의 시」, 『기독교사상』 36권 7호(1992).
30) F. Nietzsche, Also sprach Zarathustra, 1885(프리드리히 니체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박성현 옮김, 심볼리쿠스 2012, 47면). 이 글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번역은 정동호 옮김(책세상 2000), 박성현 옮김 두권과 영역본(Thus Spoke Zarathustra, Thomas Common tr., Bill Chapko ed., feedbooks, 2010)을 참고하였다. 한글 번역은 주로 박성현 번역본을 인용하였지만, 필자가 수정한 경우 다른 판본도 같이 밝혔다.
31) Nietzsche, 1885(박성현 옮김 365면, 정동호 옮김 125면).
32) Nietzsche, 1885(박성현 옮김 61면, 영역본 22면).
33) 구본현, 앞의 글 266면, 275면.
34) 杜甫, (淸)仇兆鰲 編, 1693, 『杜詩詳註』, 北京: 中華書局 1999, 810면, 1541면.
35) 두보 『두시언해』(중간본), 대제각 1985, 84면, 405면.
36) 신석초 「이육사의 인물」, 『나라사랑』 16호(1974) 106면; 졸고 「육사의 한시 「晩登東山」과 「酒暖興餘」: 그의 두 돌기둥, 石正 윤세주와 石艸 신응식」, 『한국근현대사연구』 제76집(2016) 참고.
37) 유길만 『조선민중의 전설적 영웅 김일성』, 광성 2006; 최현수 「김경천 후손 귀화신청」, 『국민일보』 2015.7.21.
38) 장세윤, 앞의 글; 박도, 앞의 글; 박노균 「니체와 한국문학(2): 이육사를 중심으로」, 『개신어문연구』 제31집(2010) 221~23면.
39) Nietzsche, 1885(박성현 옮김 521~22면).
40) Nietzsche, 1885(박성현 옮김 649면, 정동호 옮김 470면, 영역본 223면).
41) 동시영 「육사(陸史) 시(詩)의 니체철학 영향 연구」, 『동악어문학』 30호(1995).
42) 정동호 『니체』, 책세상 2014, 473~78면.
43)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예이츠 서정시 전집(3): 상상력』, 김상무 옮김,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4, 582~83면.
44) 졸고 「육사의 「청포도」 재검토: ‘청포도’와 ‘청포’, 그리고 윤세주」, 『역사비평』 2016년 봄호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