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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신예시인 특집
심지아 沈智兒
1978년 전북 익산 출생. 2010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raindropsgarden@gmail.com
자라나는 페이지
그날 언니의 머리에서 연기 가득한 성단이 태어났는데요 우리는 들키지 않게 두툼한 벨벳 커튼을 내렸는데요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시곗바늘을 삼켰는데요 부풀지 않고도 터질 수 있어 우리는 마법사가 되기도 했는데요 막내는 검은 모자 속으로 들어가 머리를 넣었다가 빼었다가 하는데요 까꿍이라고 말하면 쥐고 있던 모빌을 던집니다 모빌은 빙그르 날아오르며 푸드득 새가 되기도 하는데요 갓 태어난 성단이 새의 다리를 물고 놓질 않는데요 우악스럽게 앙 무는데요 엄마는 자꾸만 사각형의 방을 낳고 코를 곱니다 누나 저 소리를 견딜 수 없어 막내는 가르쳐주지도 않은 말을 합니다
삼년째 같은 그림을 그리던 셋째가 캔버스를 우그러뜨립니다 구겨지는 자화상에서 셋째의 손목들만 우수수 쏟아지는데요 손목들이 부딪치며 바닥에 수북한 언니의 머리카락을 움켜쥐는데요 바닥에 붓질을 하는데요 물이 고이고 수초가 자라는데요 넷째는 물에 비친 제 얼굴을 미워하느라 노래를 흥얼거리는데요 수초를 쥐어뜯는데요 물고기들이 귀를 막고 물속에서 뛰쳐나옵니다 늙은 고양이가 물고기를 입에 물고 벽 속으로 뛰어드는데요 셋째가 그 위에 액자틀을 겁니다
언니는 저런 걸 머리에 이고 무겁지도 않은 걸까요 막내는 모자 속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너무나 뜨거워서 가볍다고 말하기도 전에 언니가 열기구처럼 떠오르는데요 천장에 쿵쿵 부딪히는데요 다리 물린 새가 날개를 움직이는데요 우리는 지루해서 열기구 속으로 들어갑니다 막내가 담긴 모자를 쓰고 천장이 부서집니다 고양이가 잘 발린 생선뼈를 높이 던집니다 영문도 모른 채 엄마는 얇게 썬 양파 같은 표정을 짓습니다 막내는 가르쳐주지도 않은 말을 하려 입술을 움직이는데요
유년기
여기 낱말들이 작은 어깨를 떨며 누운 곳
빈집 찬장 속의 젖은 그릇들처럼
노인의 서랍 속에서 밀가루 반죽처럼 부푸는
전할 수 없는 안부 인사처럼
나는 잘 지냅니다
찬장 깊이 아끼던 나무스푼이 있었어
사라진 코와 외팔을 이불 밖으로 내밀고
꽁꽁 언 젤리 같은 밤의 과육을 떠먹던
나는 밤의 놀이터
기찻길을 떠돌던 경적들이 고여든다
무엇을 향한 소리입니까
아주 많은 계단이 있었는데
물이 반쯤 담긴 수통처럼
출렁이며 넘어졌는데
목이 긴 빗자루를 쥐고 건반을 쓸던 쥐들은
낡은 악보 위에서 휘파람을 분다
언덕에는 오후와 오전의 성벽들
괴물의 이빨처럼 쓸쓸하게 자라난다
커다란 떡갈나무 잎이 떨어진다
나는 의자에 앉는다
왜소한 그림자들이 발끝으로 새어나간다
한밤중 같은 눈을 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