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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데이비드 그레이버 『관료제 유토피아』, 메디치미디어 2016 ‧ 『아나키스트 인류학의 조각들』, 포도밭 2016
‘유토피아’에서 탈출하기 위한 낮은 이론
후지이 다케시 藤井たけし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takeshifj@hanmail.net
2006년에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 그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2009년에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서정은 옮김, 그린비)이 번역된 뒤, 여기서 소개하는 책들까지 그의 저작이 벌써 다섯권이나 번역 출간되었다. 여덟권이 번역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에 비하면 적은 편이지만, 일찍 그레이버가 소개되었던 일본에서 세권(편역서 포함), 대륙과 타이완을 합친 중국어권에서는 네권이니 동북아에서는 그레이버를 가장 많이 수용한 나라가 한국인 셈이다.
올해 들어 잇따라 번역된 『관료제 유토피아』(김영배 옮김) 『아나키스트 인류학의 조각들』(나현영 옮김)은 제목만 봐도 지금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과의 관련성을 짐작게 한다. 특히 2014년 이후 우리는 관료들의 무책임함과 뻔뻔함을 많이 보게 되었고, ‘우리를 지켜줄 국가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도대체 국가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 그레이버를 찾게 만든 것 같다. 하지만 그는 결코 쉬운 해법을 제시해주지는 않는다.
『관료제 유토피아』는 관료제의 문제를 주로 다루긴 하지만, 단순히 관료제를 비판한 책은 아니다. ‘규칙들의 유토피아’(The Utopia of Rules)라는 원제에서 보듯이, 그레이버가 문제삼는 것은 규칙을 따르고 있는 우리 스스로의 모습이다. 저자는 관료제 자체가 우둔한 것이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료제란 “이미 우둔해져 있는 사회적 상황”(94면, 이하 인용문은 필요에 따라 번역을 수정했음)을, 바꿔 말해 “극단적으로 불평등한 상상력의 구조에 의해 이미 특징지어진 관계를 관리하는 방법”(126~27면)으로 설명된다. 문제의 핵심은 관료제가 아니라 불평등한 상상력의 구조에 있는 것이다.
상상력이 평등하지 않다는 것은 위계화된 사회에서 누가 더 많은 상상력을 발휘하게 되는지 생각해보면 이해될 것이다. 남자들이 흔히 여자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까닭은 그들이 여자를 이해하지 않아도 되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상상력은 필수적이다. 저자는 이런 상상을 동반하는 행위를 ‘해석노동’(interpretive labor)이라고 부르며 그 중요성을 강조한다. “대부분의 인간관계들—특히 오랜 친구관계나 오랜 적대관계, 어느 쪽이든 지속적인 관계들—은 역사와 의미로 가득 찬 극단적으로 복잡한 것이다. 그 관계를 계속 유지하려면 지속적이고, 때로는 미묘한 상상력이 발휘되어야 한다. 세상을 타인들의 관점으로 보려는 부단한 시도도 필요할 것이다. 내가 앞서 ‘해석노동’이라고 일컬었던 것이 바로 이것”(108면)이라고 말한 것처럼, 지속적인 관계를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해석노동이기 때문이다.
물론 끊임없는 해석노동은 번거로운 일이다. 하지만 그런 감정이 바로 관료제의 토양이 된다. 관료제는 화폐와 마찬가지로 “갖가지 형태의 해석노동에 얽히지 않아도 되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대할 가능성”(224면)을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항상 관료들을 욕하면서도 관료제 자체를 근본적으로 없애려고 하지 않는 이유는 이런 데서 찾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원서에서 책 제목과 동일한 소제목을 단 3장 4절이 중요하다. 여기서 저자는 게임 이야기를 하면서 놀이(play)와 게임(이 책에서는 대체로 ‘시합’ 또는 ‘경기’로 번역)의 차이에 대해 집중적으로 이야기한다. 이 둘은, “한쪽은 자유로운 형태의 창조성, 다른 쪽은 규칙으로 비쳐진다”는 점에서 다르다. 저자는 게임이 “순전히 규칙에 의해 통제되는 행위”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즐긴다고 지적한다. 즉, 게임의 세계는 우리가 실제로 사는 세계와 크게 다르기 때문에 매력적인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 존재하는 규칙들은 항상 불분명해서 “우리는 항상 그것들 사이에서 협상하고, 다른 사람들이라면 동일한 것을 어떻게 할지를 예측하기 위한 어려운 일을 수행하고 있다.” 즉, 끊임없는 해석노동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게임의 세계에서는 규칙이 항상 명시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레이버는 게임을 “일종의 규칙들의 유토피아”라고 부른다. 그런데 게임과 달리 “놀이는 규칙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 자체는 본질적으로 규칙에 얽매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놀이는 창조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파괴적이기도 하다. “관료주의의 매력 뒤에 숨어 있는 것은 결국 놀이에 대한 공포”라고 저자가 지적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276~78면)
그런데 이것은 단지 놀이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저자가 곧바로 이 놀이와 닮은 것으로 주권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제헌권력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주권은 놀이와 마찬가지로 법을 제정하지만 스스로는 법에 구속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결국 관료제가 존속하는 이유는 우리가 주권자가 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주권이라는 자의적인 힘을 행사하는 것은 확실히 두려운 일이다. 주류 좌파가 관료제를 부정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인가? 저자는 여기서 상상력을 강조한다. 좌파 사상의 바탕을 “상상력의 정치적 존재론”(135면)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혁명적 변화에는 상상력이 중요하다. 하지만 저자는 단순히 유토피아 같은 것을 상상하자고 호소하지는 않는다. 마법의 세계에 대한 상상력이 아니라, 해석노동을 하거나 일상적으로 뭔가를 만들 때 우리가 구사하는 실천적 상상력(practical imagination)이 관건이다.
이런 실천적 상상력을 발전시키기 위한 이론으로 그레이버가 제시하는 것이 다름 아닌 ‘아나키스트 인류학’이다. 『아나키스트 인류학의 조각들』을 통해서 저자는 아나키스트 인류학이라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이론의 윤곽을 그려 보인다. 그런데 저자가 제시하는 이론은, 학계에서 주목받는 ‘고급 이론’(High Theory)이 아니라, “변혁을 위한 기획에서 발생하는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론”(46~47면)인 ‘낮은 이론’(Low Theory)이다. 『관료제 유토피아』에서 제시된 내재적이고 실천적인 상상력이 평범한 요리사나 간호사, 기술자 들의 상상력을 의미했듯이, 아나키스트 인류학은 초월적인 위치에서 대안을 구상하기보다 낮은 위치에서 다른 실천을 고민한다. 그 낮은 위치에서 볼 때, 우리의 세계는 높은 데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넓고 풍요롭다.
이 두 책은 대체로 잘 읽히고 번역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관료제 유토피아』에는 우리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번역이 군데군데 보인다. 예를 들어 ‘인민주권’에 대해 논하는 부분에서 그것을 ‘국민주권’이라고 옮긴 것은 거의 왜곡에 가깝다. 제헌권력의 특성은 그것이 ‘인민’(the people)이라는 불분명한 존재에서 비롯되는 데 있다. 그런 인민을 국민으로 한정시키는 것이야말로 우리 상상력의 족쇄가 된다. 또한 저자가 끊임없이 그 중요성을 언급하는 페미니즘이 “남녀평등주의”로 번역됐는데,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것이 과연 ‘남녀평등’일까. 우리의 실천적 상상력은 이런 데서도 발휘되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될 수 있을지, 이제 놀이를 시작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