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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김학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기쁨』, 문학동네 2016

바울, 세계를 전도시켜 세계의 본질을 드러내다

 

 

정용택 鄭龍澤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원 jungyongtaek@gmail.com

 

 

일단의 유럽 철학자들이 촉발시킨 서구 사상계의 바울 르네상스는 이제 국내 학계에서도 그리 새로운 이슈가 아니다. 이미 바울을 주제로 한 그들의 주요 저작 대부분이 번역되었고, 국내 연구자들에 의해 유럽 철학자들의 ‘바울로의 전회’를 소개·비평하는 글이 여러차례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제는 철학자들의 바울 읽기에 관한 국내외 신학자들의 본격적인 응답이 담긴 책들까지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 또 한명의 한국 신학자가 그려낸 흥미로운 바울의 초상이 우리 앞에 당도했다. 그동안 마태복음서 및 그 배후의 마태공동체를 중심으로 초기 그리스도교와 로마제국 지배체제의 관계를 주로 연구해온 저자 김학철(金學哲)은 시선을 옮겨 사도 바울이 실천한 사랑의 윤리를 로마제국의 통치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담론으로 읽어냄으로써 ‘지금 여기’의 관점에서 그 동시대성을 조명한다.

저자에 따르면, 바울의 ‘복음’은 하느님이 “세상에서 비천한 멸시받는 것들”, 곧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한 데에서 시작하는 이야기다.(13면) 본서의 전체 논의를 집약하는 핵심어인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라는 표현은 고린도전서 128절에서 가져온 것인데, 이는 바울이 편지의 수신자인 고린도 지역 교회(ecclesia)의 구성에 관해 설명하는 맥락에서 등장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구성원들 가운데 지식인이거나 권력자이거나 유력한 가문에 속한 사람은 ‘많지 않다’고 말한다. 오히려 그들은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 ‘세상의 약한 것들’ ‘세상에서 비천한 것들’ ‘멸시받는 것들’로서 당시 사회에서 아무런 존재감도 없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었다. 강하고 잘났다고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하느님은 세상에서 전혀 존재감 없는 사람들을 택하여 불렀다는 것이 바울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예수가 메시아라는 바울의 메시지가 어째서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게 ‘기쁨의 소식’이 될 수 있었을까? 그 답은 예수가 원래 누구이고, 이 땅에서 어떤 삶의 자리에 놓여 있었고, 나아가 누구의 곁에서 무엇을 말하고 어떻게 행동하다가 죽음으로 내몰렸는지를 밝혀낼 때 비로소 얻어진다. 빌립보서 2장에서 바울이 말하듯이, 본래 하느님 자신이었던 예수는 죄인이라 멸시받고 천대받는 사람들의 삶의 자리로 들어가서 그들과 ‘같이’ 되었고, 바로 그곳에서 자신을 낮추며 하느님의 뜻에 복종하는 삶을 살았으니, 그러한 삶의 종착점에서 마침내 십자가 죽음을 맞았다. 저자의 말을 빌리면, “하느님은 그리스도인 자신의 아들, 아니 자기 자신의 현현인 예수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게 보내서,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당하고 사는 폭력과 수치를 고스란히 함께하게” 한 것이다.(65면)

이처럼 저자가 제시하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기쁨’으로서의 복음 해석에서는 신분의 높고 낮음, 명예와 지식과 권력의 유무로 상징되는 사회적 위계관계가 철저하게 무효화된다. 따라서 복음의 주체인 예수가 궁극적으로는 십자가 죽음에 이르는 지상에서의 모든 삶의 궤적을 통해 자발적으로 당시 사회에서 그 존재를 부정당하던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역할을 감당했다는 사실에서부터 이미 바울의 복음은 그 정치적 급진성을 드러낸다. 예수가 그러한 길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데서부터 바울의 복음은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편에서 당시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체계를 전복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이 책이 강조하는 바울 복음의 급진성은 신의 ‘자기비움’(kenosis)에서 드러난 사랑의 급진성, 절대자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가는 데서 드러나는 급진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의 선교사역에서 드러난 윤리적·정치적 혁명성을 바울 자신이 믿고 전했던 복음 그 자체의 급진성과 연관시켜 해석한 것이야말로 이 책의 특별한 기여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저자는 바울을 주인공으로 한 이 책이 문학동네와 연세대 인문학연구원이 함께 발간하는 ‘위대한 순간’ 총서에 포함된 이유에 대해 “바울은 가장 극적인 전향의 순간을 맞은 사람들의 대표이며, 그 전향의 순간이 기독교를 탄생시켰다고 평가받기 때문”이라고 말한다.(17면)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정작 바울에게 ‘위대한 순간’이란 자신이 예수를 만나 전향한 순간이나 로마제국의 심장부에서 복음을 선포했던 순간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금방 깨닫게 된다. 바울이 생각했던 역사의 ‘위대한 순간’, 결코 그 이전으로 되돌릴 수도 되돌아갈 수도 없는 세계사의 불귀(不歸)의 지점이란 자신이 전향한 순간이 아니라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던 순간이기 때문이다.

1세기의 유대인들 사이에서 널리 공유되던 종말론이 미래에 일어나리라 생각했던 일, 즉 메시아적인 구원의 사건들이 십자가 사건에서 이미 개시되었기에 이제 그전으로 역사를 되돌릴 수 없다는 것, 하느님과 세상 모두 십자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 바울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 역시 바울에게 예수의 십자가란 하느님의 진정한 계시가 일어난 곳, 또는 하느님의 능력과 지혜가 나타난 곳이었다고 해석한다.(131면) 여기서 십자가는 세상의 본질과 하느님의 본질을 모두 드러낸 하느님의 계시로 설명되는데, 특히 십자가가 세상의 본질을 드러낸다고 주장하는 대목이 인상적이다.(137~40면) 맑스(K. Marx)에 따르면, 모든 비판적 사유는 신비화된 사물들의 숨겨진 본질을 인간의 실천 속에서 드러냄으로써 그것들을 탈신비화할 때 비로소 그 비판적 급진성을 담보할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자신이 속해 있던 세계의 본질을 십자가를 통해 드러낸 바울 또한 충분히 그 시대의 비판이론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대적하는 이 세상이 본질적으로 죄와 악의 세력에 붙들려 있고, 이 세상에서 성공한 이들은 결코 참된 신의 대리자가 아니라는 것을 드러낸다.” 로마제국이 선전하듯 세상은 정의롭고 평화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아들마저 죽여버릴 만큼 이기적 폭력이 지배”하는 곳이었다. 따라서 그런 세상을 만들어온 로마제국의 통치자들은 “신들의 대리자가 아니라 그저 죄와 악의 대리자일 뿐”이며, 로마제국으로 대표되는 “이 죄와 악의 세상은 옳은 것도 아니고, 신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십자가가 드러낸 세상의 본질이었다.(136면) 이는 당시 로마제국의 ‘황제 제의’(imperial cult)에 대해 바울이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의 문제와 직결된다. 로마제국 전역에서 시행되고 있었던 황제 제의는 제국의 사회들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통합하는 중요한 상징체계였는데, 바울은 그러한 제의에서 숭배되는 모든 대상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우상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바울의 급진성은 로마제국의 많은 사람이 섬기고 있던 그리스-로마의 신들이 원래 존재하지 않는 것, 즉 신격화된 아우구스투스처럼 사람들이 스스로 미혹되어 만들어낸 가공의 괴물에 불과하다는 점을 단순히 지적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바울의 관점에서, 황제 숭배를 포함한 로마제국 내의 모든 종교적 제의는 한편으로는 그가 사탄이라 부르는 어둠의 권세에 속한 영적인 세력들을 불러내는 통로로 기능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을 빌려 로마제국의 평화와 번영을 선언함으로써 실제로 그 사회에 내재된 온갖 종류의 모순과 폭력을 은폐하는 장치로 활용되고 있었다. 따라서 바울에게 황제 제의의 본질적인 문제는 그것이 존재하지도 않는 우상들에 대한 미신적 숭배라는 사실을 넘어 불의한 로마제국을 ‘평화와 번영’의 세계로 정당화함으로써 사람들이 그 세계의 질서에 순응하도록 만든다는 데 있었다.

우상숭배를 통해 역사(役事)하는 사탄의 마법에 걸려 이미 모든 가치가 전도(顚倒)된 세계에서 그 세계의 본질, 이를테면 체제의 폭력성, 민중의 고통, 지배계급의 도덕적 타락 등은 단지 제의라고 하는 ‘하나의 사물’로 현상됨으로써 그 흔적을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제국은 황제와 통치자들을 신성화하는 황제 제의를 통하여, 개인 간의 사회적 관계를 개인과 신 사이의 종교적 관계로 또는 신들 사이의 영적인 관계로 물신화했고, 그같은 물신화가 로마제국의 사회적 통합과 지배이데올로기의 재생산을 가능하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세계의 본질을 다시 전도시켜 십자가 위에 그것을 옮겨놓고, 그 십자가에서 수많은 사람을 ‘아무것도 아닌 것들’로 만들어내는 지배체제의 본질이 계시되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로마제국이 황제 제의를 통해 대상화(Vergegenständlichung)하고 있는 세계란 인간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가 신격화된 통치자와 민중의 관계로 물신화된 세계이자, 세계의 본질이 현상 속에서 사라지고 인간의 실천이 우상화된 사물들 자체의 파생물로 전도된 세계였다. 따라서 제국의 통치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는 바울의 복음은 우상파괴의 차원에서 결국 당대 세계의 종교적 외양 및 사회의 본질적 구성에 관한 물신주의(fetishism) 비판의 일환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러한 관점에서, 이 책은 로마제국 그 이상으로 물신화된 세계, 곧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물신주의 비판의 논리로 바울의 복음을 전유할 수 있게 해주는, 한국적 ‘성서인문학’의 주목할 만한 성과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