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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신지영 『마이너리티 코뮌』, 갈무리 2016
이방의 마이너리티 꼬뮌에서 탈(근대)문명의 단초를 보다
이정진 李廷進
서울대 영문과 강사 godard1@naver.com
이 책을 읽는 내내 저자 신지영(申知瑛)이 부러웠다. 그런 마음은 같은 ‘수유+너머’ 출신으로 이 책에서도 종종 언급되는 고병권(高秉權)의 『점거, 새로운 거번먼트』(그린비 2012, 이하 『점거』)를 읽었을 때의 반응과 비슷했다. 두 저자 모두 우연히 체류 중이던 타국에서 중대한 역사적 사건을 목격하고 새로운 형태의 대중정치운동에 동참함으로써 그 현장의 한가운데에서 타전한 생생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이 기록들은 국외자이자 학자라는 그들의 독특한 위치가 촉발하는 겹겹의 시선으로 말미암아 근대정치의 기본범주들을 재사유하는 질문을 길어내고 있다. 애초에 현장통신이라는 이름으로 ‘위클리 수유너머’와 그린비 출판사 홈페이지 등의 온라인공간에서 연재되었던 글을 책으로 묶어낸 이유일 것이다.
나는 한국의 학자들이 저널리즘 형태의 글을 더 많이 쓰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즈음의 학문환경에서 사회적 책무감만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기에 각자의 전문적인 연구를 더욱 유용하고 두텁게 해줄 거리와 방식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때 제도권 학계와 긴장된 관계를 유지하는 ‘수유+너머’ 출신 학자들의 시도는 중요한 참조대상일 텐데, 일단 학문적인 관점에서 위의 두 책은 모범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수유+너머’는 급진적인 탈근대적 사유를 도입하고 그에 바탕한 여러 학문적 실험을 전개해왔다. 두 저자는 저널리스트로 활동함으로써 그간의 이론적 성과를 뒷받침하거나 재검토하는 데 긴요하게 쓰일 풍부한 사유의 재료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렇듯 두 책은 비슷한 지적·이념적 지향을 공유하는 저자들이 비슷한 상황에 맞닥뜨려 생산한 동일한 장르에 속하는바 어쩌면 『점거』는 『마이너리티 코뮌』(이하 『코뮌』)의 기획에 영감을 준 모델인 것 같다. 그러나 『코뮌』 쪽이 여러모로 좀더 풍부한 기록으로 보인다. 『점거』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불타오르다 소진된 월스트리트 점거운동에 집중한다. 반면 『코뮌』은 1장에서 야숙자(野宿者, 부정적인 함의의 홈리스 대신 쓰이는 용어) 꼬뮌(commune)을 중심으로 프리케리아트(precarious+proletariat, 불안정한 프롤레타리아트) 단체 등 이미 상당기간 활동해온 일본의 공동체·사회운동을 소개한 후, 2장에서는 2011년 토오호꾸(東北) 지역에서 발생한 원전대참사를 계기로 등장한 여러 성향의 탈원전운동에까지 시야를 넓힌다. 이때 저자는 특히 불안이라는 여성적인 감정구조에 기반한 새로운 흐름에 주목한다. 3,4장에 가면 이전까지 주로 토오꾜오에 머물던 저자의 이동궤적마저 큰 폭으로 확장되어 한국의 서울과 두물머리, 미국의 뉴욕을 아우르게 되고, 에필로그에서는 다시 토오꾜오로 돌아가 평화헌법 개정반대 시위를 주도한 대학생 단체 씰즈(SEALDs)를 다룬다. 그사이 시간도 많이 흘러서 2009년 중반에 시작해 대략 한달에 한번꼴로 온라인에 발표된 이 기록은 2015년 3월에서야 매듭지어졌다. 그간 생산된 500면 넘는 분량의 이 보고서는 (주로 사회운동이라는 한 단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는 하지만) 일대 전환의 과정을 통과하는 예민한 때에 일본사회의 실제 속사정을 풍부하게 보여주는 값진 기록이다.
그리고 비교적 긴 시간대에 걸쳐 여러 운동을 포괄하는 그 규모 자체로 말미암아 이 기록에 스며 있는 이론적 사유에 긴장이 더해지는 면이 있다. 『점거』는 월스트리트 점거운동에 대한 예찬으로 기우는 면이 있어서 이 운동의 현실적 ‘실패’가 오히려 직접민주주의의 도래를 예비하는 미래의 유산을 남겼다고 정리한다. 반면 『코뮌』은 이 책의 열쇳말 중 하나인 ‘운동의 생로병사’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운동을 체제와의 대립적 관점에서만 파악하지 않으며 운동의 실제적인 지속을 도모하는 ‘생존법’, 특히 공동체 내부로부터 오는 ‘병’의 치료에 큰 관심을 둔다. 국가와 시민권 같은 근대적 범주 너머의 무정부주의적인 존재방식을 구현하고 있기에 저자가 친밀한 관계를 이어가려 애쓰는 야숙자 꼬뮌의 관점에서 볼 때 운동의 지속은 생존의 문제인 것이다. 이런 현실적 태도로 인해 얼마간 견제되고 있다고는 해도 저자 역시 급진적인 탈근대를 지향하는 것은 틀림없다. 예컨대 앞서 언급한 여성들이 주도하는 탈원전운동의 새로운 흐름을 묘사하는 핵심어휘는 ‘소문’과 ‘비밀’인데, 이 책은 불안이 야기하는 소문과 그 소문에 실려 퍼져나가는 비밀스런 공감을 권력의 통치수단으로 전락한 과학주의·합리주의·실증주의를 교란하는 저항적인 소통방식으로 본다. 모든 운동이 앓게 마련인 병의 유력한 치료법으로는 꼬뮌 간의 교류, 특히 국가 간 경계를 넘어서는 종류가 제시된다. 이런 탈국가의 비전이야말로 저자가 토오꾜오에 적(籍)을 두고 있으면서도 꾸준히 오끼나와 이슈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꿈꾸는 꼬뮌 간의 접속은 쉽게 달성되기 어려운 비전임이 이 책에서 거듭 증명된다. 3·11 이후 새로이 출현한 운동의 흐름은 저자가 사랑하는 야숙자 꼬뮌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각종 행정조치를 저지하는 연대를 낳기는커녕 오히려 그런 반동적인 경향을 부추기는 사회적 분위기의 형성에 일조한다. 당장 저자 본인부터 뉴욕에서 무고한 흑인들의 연이은 죽음을 야기한 이른바 경찰인종주의에 항의하는 시위에 참여하면서도 일상에서는 자기 안에 깊이 자리잡은 흑인에 대한 편견과 공포를 극복하는 것이 어렵다고 고백한다. 그리하여 이 책은 운동이 운동을 배제하고 위계화하는 지점을 예리하게 적시하는 한편으로 항상 그것이 사태의 전부가 아닐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런 가능성은 현재의 모순과 딜레마 속에 엉겨 있어서 그로부터 어떤 구체적인 희망을 속단하는 것은 거짓일 공산이 크기에 저자는 이런 경우 자주 강렬한 문학적 수사를 통해 희망에 대한 깊은 염원을 표현하는 데에서 그친다. 저자가 선명한 급진주의와 손쉬운 패배주의의 유혹 모두를 물리치며 착실히 희망을 발굴해내기를 고대한다.
지금까지의 요약이 이 책이 대단히 착잡한 내용으로만 채워져 있으리라는 잘못된 인상을 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든다. 스스로 시위에 매혹된 자라고 밝히는 저자는 일본과 미국의 창의적인 시위문화를 소개하는 데 열심이며, 시위에 참가한 구체적인 경험을 묘사하는 부분이야말로 이 책의 가장 활기찬 대목이다. 시위가 취미라 할 저자에게 시위는 낯선 도시, 낯선 문화와 속성으로 친해지는 방식이며 우연한 인연들이 우정으로 발전하는 계기이기도 한 듯하다. 그런 기쁨과 활력이 묘사에 묻어나오는 것이리라. 촛불집회라는 새로운 방식을 고안해내기도 했지만, 한국의 시위문화는 80년대적인 방식에 고착된 면이 있고 그로 인해 지배권력의 시위통제 씨나리오를 손쉽게 해주는 듯한 인상을 받기도 한다.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이 책은 아주 매력적인 자료집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저자도 쓰고 있다시피 각국의 시위문화는 그 나름의 역사와 전통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기에 그 형태 그대로 다른 문화로 이식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