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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아즈마 히로키 『존재론적, 우편적』, 도서출판b 2015

데리다를 읽다 말기

 

 

진태원 陳泰元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jspinoza@empas.com

 

 

172_563우선 내게 아즈마 히로끼(東浩紀)는 매우 낯선 인물이라는 점을 밝혀두어야 할 것 같다. 서평 대상인 『존재론적, 우편적: 자크 데리다에 대하여』(存在論的,郵便的, 조영일 옮김)를 비롯해서 그의 책이 국내에 몇권 번역되어 있지만, 나는 아즈마 히로끼가 어떤 인물인지 잘 모른다. 사실 나는 일본의 문화계 및 학술계 전반에 관해 꽤 무지한 편이다. 우리나라에 많은 책이 번역되어 있는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의 책 두어권을 읽어본 정도이고, 그외에 니시까와 나가오(西川長夫)나 우까이 사또시(鵜飼哲) 같은 이들의 저작, 그리고 얼마 전에 국내에 소개된 사또오 요시유끼(佐藤嘉幸) 같은 젊은 연구자들의 현대 프랑스철학에 관한 연구서를 필요에 따라 한두권씩 읽어본 정도다.

그럼에도 이 책에 대해 서평을 써봐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이 책이 데리다(J. Derrida)에 관한 연구서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이 20대 중반의 아즈마 히로끼를 일약 카라따니 코오진의 후계자로 부각시킨 역작이라는 소문은 진작부터 듣고 있었기에, 과연 어떤 책일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읽었던 몇몇 일본 학자나 비평가 들의 책이 그다지 인상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이 책도 대단한 소문과는 달리 그저 그런 저서가 아닐까 하는 불안한 예상도 있었다. 결론부터 미리 말하자면, 이 책은 특이하게도 평자의 이 두가지 기대 내지 예상에 모두 들어맞았다. 역작이라고 볼 만한 장점과 자신의 지적 성취를 스스로 잠식하는 약점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4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의 첫 문장에서 저자는 “본서의 목적은 자크 데리다에 대한 해설”(9면)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한 데리다 해설서라기보다는 한가지 집요한 질문을 바탕으로 데리다 사상을 재구성하고, 더 나아가 그것을 탈구축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다. 이 책을 이끌어가는 주도적인 물음은 “도대체 데리다는 왜 그와 같은 기묘한 텍스트를 쓴 것일까?”(13면)이다. 여기서 기묘한 텍스트라고 지칭되는 것은 1970년대에 출간된 데리다의 『산종(散種)』(La dissémination, 1972), 『조종(弔鐘)』(Glas, 1974), 『회화에서의 진리』(La vérité en peinture, 1978), 『우편엽서』(La carte postale, 1980) 같은 저술이다. 이 저술들의 기묘함은 1960년대 저작들과 달리 더이상 “제도적인 ‘논문’, ‘저작’의 체계”를 지키지 않고, 극도의 실험적 스타일, 신조어들의 빈번한 출현, 데리다 자신의 여러 텍스트에 대한 암묵적 참조 등으로 인해 극도로 난해하다는 점에 있다. 저자에 따르면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이론화의 칸스터티브(constative)한 형태에서 에크리튀르(écriture)의 퍼포머티브(performative)한 양태”로의 전환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데리다 자신의 넘어짐”(15면)을 가리킨다.

어떤 ‘넘어짐’이 문제일까? 그리고 데리다는 ‘무엇에 걸려 넘어진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우리는 책의 후반부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데리다가 1970년대의 실험적 텍스트들을 통해 “하이데거처럼 심연에 대해 사색하는 ‘위대한’ 철학자”(263면)가 되는 것에 저항하려고 했지만, 아즈마가 “데리다파”(397면)라고 부르는 전이(轉移)의 메커니즘에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점이다. 곧 데리다는 자신이 스승으로 숭배되고 자신의 철학적 주제와 스타일이 모방됨으로써 자신을 중심으로 삼는 하나의(또는 여럿의) 학파가 만들어지는 것, 다시 말하면 자신이 일종의 초월론적 중심, 부재하면 부재할수록 더욱 숭고해지는 그런 중심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우편적 탈구축”(235면)을 시도했지만, 1980년대 이후 그는 전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아즈마 히로끼가 특히 『우편엽서』에서 읽고 있는 것은 이러한 전이를 둘러싼 철학적·정신분석적·정치적 쟁점이다.

이 책의 핵심 주장은 데리다의 탈구축에는 두 종류가 존재한다는 점으로 집약된다. 아즈마가 카라따니 코오진을 따라 “괴델적 탈구축”(또는 부정신학적 탈구축)이라고 부르는 첫번째 탈구축은 어떤 하나의 체계에서 출발하여 그 체계의 내재적인 역설을 드러내는 것, 곧 “오브젝트레벨과 메타레벨 사이의 결정불가능성에 의해 텍스트의 최종적 심급을 무효화하는 전략”(111~12면)으로, 그는 특히 초기 데리다 작업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본다. 하지만 그는 데리다에게는 이것과 구별되는 또다른 탈구축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이 바로 우편적 탈구축이다. “우편〓오배(誤配) 시스템”(185면)이라고 지칭되는 우편적 탈구축은 하이데거, 라깡, 크립키, 지젝이 벗어나지 못한 부정신학적 탈구축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우편적 탈구축을 집약하는 “편지가 도착하지 않을 수 있다”는 명제는 “시니피앙의 분할 가능성”(117면)을 가리키며, 따라서 “비세계적 존재를 복수적이고 능동적으로 파악”(204면)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역으로, 괴델적 탈구축에서 부각되는 초월론적 시니피앙은 “우편공간이 야기한 ‘망령적 효과’, ‘불가능한’ 것의 복수성을 말소시”킨(155면) 결과이다.

데리다 자신은 명확히하지 않은 우편적 탈구축을 작업가설로 설정한 이후, 아즈마는 4장에서 데리다를 넘어 카르나프, 하이데거, 프로이트의 텍스트를 논리적 탈구축과 우편적 탈구축의 접목이라는 시각에서 검토한다. 그러다가 372면 이하에서 정신분석적인 “전이”의 문제를 제기한 뒤 그의 논의는 얼마 못 가 갑작스럽게 중단된다. 이는 앞서 말했듯이 그가 “전이” 작용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편적 탈구축의 핵심이라고 보기 때문이며, 데리다 및 데리다 학파에 관한 논의와 참조를 중단하는 것, 그리고 데리다 읽기를 중지하는 것이 “데리다파의 전이”(398면), 즉 서양 형이상학의 체계를 근원적으로 탈구축하려고 하면서도 끊임없이 탈구축적인 논문과 저서를 산출함으로써 오히려 그러한 형이상학의 제도를 지속하고 데리다를 포함한 탈구축 사상을 그 형이상학의 한 부분으로 동화시키는 결과와 절단하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 책의 독창성은 『우편엽서』를 데리다 사상의 중심(또는 중심 아닌 중심)으로 설정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특히 두가지 논의를 인상깊게 읽었다. 첫번째는 1장과 2장에서 제시된 쏠 크립키(Saul A. Kripke)의 명명이론에 대한 탈구축적인 독서로, 이는 지젝의 정신분석적 비평을 훨씬 넘어서는 흥미로운 분석이다. 두번째는 2장과 3장에서 전개된 우편적 탈구축에 관한 논의인데, 『우편엽서』에 관한 분석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반면 이 책은 뚜렷한 약점과 한계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 ‘괴델적 탈구축’에 대한 편집증적인 집착이라고 할 만큼 괴델적 탈구축, 부정신학적 탈구축에 대한 언급이 끝도 없이 나온다. 하지만 그 내용은 실상 매우 단순하고 빈곤하다. 유일한 초월론적 중심, 더욱이 역설로만 표시되기 때문에 접근 불가능한 중심을 설정하는 사상이 그가 말하는 괴델적 탈구축이기 때문이다. 초기 데리다 작업(및 더 나아가 하이데거와 라깡의 사상)이 과연 이러한 괴델적 탈구축으로 환원되는지 여부도 논란거리가 될 수 있지만, 괴델적 탈구축과 우편적 탈구축이라는 이원론적 문제설정이 데리다 사상을 분석하기에 적절한 것인지는 더 의심스럽다. 이런 점에서 보면 그가 “유사 초월론”(quasi-transcendentalism, 국역본에는 “의사 초월론”(258면)이라고 되어 있다)에 관해 단 한차례, 그것도 괴델적 탈구축의 한 표현에 불과하다고 언급하는 것은 매우 증상적이다. 왜냐하면 내가 보기에 유사 초월론이야말로 그가 작위적으로 설정한 괴델적 탈구축과 우편적 탈구축의 이분법을 ‘탈구축’할 수 있게 해주는 문제설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즈마 히로끼는 이 책의 논의를 중단하는 것이 그 자신의 관점에 일관된 태도라고 생각했겠지만, 그가 더 썼다 하더라도 데리다 사상에 관해 얼마나 더 많은 것을 밝혔을지는 의문이다.

상당히 전문적인 철학적 논의를 다루는 책인데 매끄럽게 잘 읽히는 것은 역자의 노고 덕분이다. 다소 아쉬운 점이 있다면, 한국에서 사용하지 않는 일본어 표현들(‘소행’ ‘폐역’ ‘쟁이’ ‘지견’ ‘비급’ 등)이 적지 않게 그대로 사용되어 독서를 방해한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