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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조명

 

시원(詩原), 하다

 

 

박민규 朴玟奎

소설가. 장편소설 『지구영웅전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핑퐁』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소설집 『카스테라』 『더블』이 있음. kazuyajun@hanmail.net

 

김사인 金思寅

시인. 1956년 충북 보은에서 태어나 대전고와 서울대 국문과에서 공부했다. 1981년 『시와 경제』 동인 결성에 참여하면서 시를 발표했으며, 1982년부터는 평론도 쓰기 시작했다. 시집 『밤에 쓰는 편지』 『가만히 좋아하는』 『어린 당나귀 곁에서』가 있고, 편저서 『박상륭 깊이 읽기』 『시를 어루만지다』 등이 있다. 신동엽문학상,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이십년째 고양시 일산에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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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암은 이제 어머니를 보내야 했다. 장례식, 노새 같은 찬양, 힝힝 소리, 돛폭 같은 귀지의 헛바람 진동*... 관이 내려지고 웨일즈의 흐린 하늘이 관과 함께 구덩이로 스민 그 순간 리암은 기도를 올렸다. 어머니를 위한 마지막 기도였다. 리암의 어머니는 9년이나 침대에 누워 있었다.무슨 병인지 모르겠다고 이곳 세인트 아이브스의 의사는 말했다. 런던의 큰 병원에 가보란 얘기도 들었으나 리암으로선 엄두를 못 낼 일이었다. 그는 가난했다. 가세는 이미 오래전에 기울었다. 그의 부친 라이언은 솔 전투(1차대전의 한 전장)에서 청력과 두 다리를 잃었는데 그리고 돌아와 19년을 더 살았다(살아야 했다). 오래전 죽은 아버지를... 또 지금 막 땅에 묻은 어머니를 리암은 추억했다. 과거의 망령에서 한시 바삐 벗어나고도 싶었고 그들을 와락 껴안고도 싶었다. 절로 많은 일들이 떠올랐는데 어머니의 조상 타령도 그중 한가지였다. 어머니의 할아버지, 또 그 할아버지는 웨일즈의 유명한 음유시인이었다고 했다. 창고에 분명 그분이 쓰시던 하프가 있을 게다, 잘 찾아보라고 그녀는 말했으나 하프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시를 좋아하는 어머니를 위해 리암은 이따금 그녀의 머리맡에서 시를 읽어주곤 했다. 모르는 단어가 태반이었으나 그에겐 어물쩍, 즉흥으로 말을 지어내는 17세기 웨일즈인의 재간이 남아 있었다. 분명 어머니의 할아버지, 또 그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재주였으나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삶은 끔찍했다. 특히 지난 9년의 시간이 그러했다. 리암은 종종 누워 있는 어머니를 향해 악담을 퍼부었다. 진심은 아니었다. 물론 진심인 적도 있었으나 그런 건 이제 하나 중요하지 않다. 이런저런 사람들이 위로의 말을 건네고 그를 스쳐 지나갔다. 진심어린 말에도, 그냥 가기가 그래서 하는 말에도 리암은 고개를 끄덕였다(끄덕여야 했다). 다시 한번 애도를 표하네. 마지막으로 먼 친척이자 이웃 마을에 사는 빌리 보가 다가와 말했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음, 음 하는 버릇은 여전했다. 음, 정말 좋은 분이셨는데... 먼 친척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말을 고르느라 빌리는 신중을 기하고 있었다(그는 리암에게 2파운드의 빚이 있었다). 음, 그러니까 음... 여길 지날 때마다 세인트 아이브스의 모두가 그녀를 기억할걸세,라고도 했다. 말로 2파운드를 갚겠다고 작정이라도 했는지 빌리는 우두커니 서서 자리를 뜨지 않았다. 음... 분명 편히 잠드실 게야. 암, 그렇고 말구. 리암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묘비명은 음, 음, 자네가 골랐나? 할 수 없이 리암이 고개를 끄덕이자 음, 앤 존스 여기 묻히다... 굳이 비명을 읽으며 빌리는 리암의 어깨를 두드렸다. 참으로 적절한 문구일세... 암, 그렇고 말구. 그리고 잠시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아니, 말없이 무덤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실은, 알고 있었다. 굳이 누가 말하지 않아도 리암의 어머니였던 앤 존스는 이제 여기 없다는 것을. 이를테면

 

이번 시집에 대해, 하고 말을 나누는 것은 기본적으로 위와 같은 행위이자 풍경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노새 같은 찬양, 힝힝 소리, 돛폭 같은 귀지의 헛바람 진동... 그런 게 다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자신을 관통한 시가 자신이라는 이름의 무덤에, 하물며 입을 비집고 나오는 말에 없다는 걸 시인은 안다. 그러나 난감하게도 또 이런저런 절차를... 예식을 치러야 한다는 것도 안다, 알고 있다. 그 궂은일을 대개 먼 친척이자 이웃 마을에 사는 평론가들이 맡아준다. 자, 웰시** 한잔 마시고... 그래, 고인은 참 좋은 분이셨지. 여길 지날 때마다 세인트 아이브스의 모두가 그녀를 기억할걸세... 세상일은 그렇게 굴러간다. 인정하고 말고의 문제도 아니다. 잠시

 

일 얘기를 해보자. 이상한 부탁을 받은 것은 아무튼 어느날 이부자리에서 눈을 뜬 직후였다. 하품을 참아가며 통화를 했다. 말인즉슨 『창비』 봄호의 <작가조명> 코너를 맡아달란 얘기였다. 하(아) 놔, 하고 나는 하품을 섞어 말했다. 김사인 선생이 직접 부탁을 한 거란 얘기도 들었다. 진짜 별일이 다 생기네, 하고 나는 중얼거렸다. 그 전날엔 소녀시대의 써니양과 저녁을 같이 먹었는데 그래서 더, 그런 기분이었다. 가정하자면

 

예컨대 ①써니양으로부터 아저씨, 우리 히트곡들 안무 한번 따라해보세요!란 부탁을 받는다. ②시인 김사인으로부터 이봐요 박민규씨, 내 시세계를 한번 조명해주시오!란 부탁을 받는다. 당신이라면 몇번을 택하겠는가? 나는 차라리 소녀시대의 안무를 택하겠다.

 

혹시 모른다.

가슴이 왜 이토록 뜨거워지지?

스스로도 방관했던

아이돌의 피?

 

무엇보다 나는 그를 모른다. 대화를 나눈 기억도 거의 없다. 그에게 2파운드의 빚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음, 음 하며 정말 좋은 분이셨는데... 이따위 말을 나누고 나면 발기부전이 온다는 이상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실은... 신간이 나온 작가를 해당 출판사가 조명하는 일이 싫다. 뭐, 거절해야 할 이유는 끝도 없지만 나는 오케이, 청탁을 수락했다. 이유는 한가지였다. 그러니까 나는

 

그가

아무 말도

하고 싶어하지 않는 거라고

이 상황을 이해했다.

 

“김태정은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나 201196일 해남에서 세상을 떠났다.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을 남겼다. 생전에 모 문화재단에서 오백만원을 지원하려 하자, 쓸데가 없노라고 한사코 받지 않았다. 그의 넋은 미황사가 거두어주었다.”(「김태정」, 『어린 당나귀 곁에서』 창비 2015. 이하 시집 제목 생략) 말인즉슨 나는 이런 유의 쓸데없는 이야기... 즉 쓸데가 없노라고 한사코 받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에 취약한 인간인데... 그것이 바로 시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를 돕기로 했다.

 

그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약속장소에 나타났다. 그런데 선생님, 저한테 왜 이러세요? 묻자 아이코 아이코 그냥 한나절 술이나 한잔 하자고요,라며 경어를 썼다. 선생을 뵐 때마다 받는 느낌이 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그가... 살짝 덜 마른 몽탁양말을 신고 계실 거 같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빨랫줄에 걸린 아버지나 삼촌의 몽탁양말을 몰래 신고... 아무도 몰라주는 보드라우면서도 까끌까끌한 마음으로 읍내에 들어선 청년의 얼굴을 본다. 그의 고향이 물속에 잠겨 있다는 기사도 어렴풋이 떠오른다. 살짝 덜 마른 몽탁양말을 신은 듯한 시어들도 떠오른다. “창틀에 먼지가 보얗던 금남여객”(「금남여객」) 타면 그의 고향에 도착하려나 상념에 잠겨보지만 몽탁양말 신으셨죠, 선생님? 하고 묻지는 않았다. 녹취를 하겠다는 편집자를 나는 만류했다. 그리고 나는 아무 질문도 안할 거라고, 미리 말했다. 그를 조명하겠다는 생각이 나에겐 요만큼도 없었다. 노새 같은 찬양, 힝힝 소리, 돛폭 같은 귀지의 헛바람 진동... 그 무엇도 없는 장례식 풍경을 떠올리며 나 혼자 속으로 흐뭇~ 했다. 늦은 오후였다. 실은 태양이 9년 만에 시집을 낸 한 시인을 조명하고 있었다.

 

오래전 나는 그의 시집을 읽은 적이 있다. 87년 겨울의 일이고 아마도 그 책이 그의 첫 시집이었을 것이다.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개표과정을 생중계하던 날이었다. 수개표를 하던 시절이라 꼬박 밤을 새우는 방송이었고 한편씩 한편씩 시를 읽으며 나는 말없이 결과를 기다렸다. 정독해내려간 시집의 마지막 장을 덮을 즈음에 당선자가 확정되었다. 그해의 일을 기억하는 사람도 이젠 많지 않을 것이다. 그냥 그랬다는 얘기다.

 

흑석동 후미진 골목의 한 호프에서 그를 본 적도 있었다. 직장생활을 할 때였고 직장은 무슨, 끝내 남아 글을 쓸 거라는 동기와 후배들이 불러낸 자리였다. 퇴근을 하고 밤 늦게 도착한 그 자리에 선생이 앉아 계셨다. 시로만 대하던 시인을 처음 본 자리였는데, 멀찌감치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다가 나는 말없이 자리를 일어섰다. 뭐랄까, 직장인이 앉아 있을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몇년 후 또 이상한 장소에서 선생을 뵌 적이 있다. 잡지사에서 사진을 찍을 때다. 프로필 사진을 찍어드렸단 이유로 박상륭(朴常隆) 선생께서 저녁 초대를 하신 자리였다. 홍대 주차장 골목 뒷길의 중국집이었고 어이없게도 나는 박상륭 선생의 테이블에 (강요에 의해) 앉게 되었다. 사실 앉으라고 해도 사양하고 뒤 테이블로 가야 할 자리였는데 나는 앉으라면 예, 자리에 앉는 성격이었다. 다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나는 당황하지 않았으므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거기 선생이 앉아 계셨다. 식사를 하는 내내 사진기자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밥만 많이 먹으면 된다는 생각이었기에 역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그래, 음식이, 입맛에, 맞으세요?

 

하고 김사인 선생이 물어왔다. 순간 나는 오싹했다. 꽤나 험한 인간들을 겪어본 경험 때문에 이런 식으로 조용히, 낮게, 느리게, 안해도 될 존대를 하는 인간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서였다. 느닷없이 찍혀버린 “구장집 셋째 아들”(「후일담」)이나 ‘부여 솜틀 오씨 영감’(「부여 솜틀 하늘 지점」)처럼, 나는 사바사바하는 기분으로 좋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세월이 한참 흐른 후 나는 다시 그의 시집을 읽었다. 가만히 좋아했던 시인의 두번째 시집(『가만히 좋아하는』, 창비 2006)이 무려 19년 만에 나왔다는 사실이 놀라웠지만, 시 쓰는 일이 무슨 숙제도 아니고 하는 생각으로 그의 시를 읽어나갔다. 87년 대선의 기억 같은 건 이제 떠오르지도 않았다. 다만 선생의 시를 추앙하던 몇몇 얼굴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먹고사느라 이제 시 쓰는 일 따위 잊어버린 그들에게 나는 선생의 시집을 선물했다. 그동안 시집을 안 내셨대요. 이게 19년 만에 나온 거라네요, 말하자 전화기 너머의 선배는 푸념을 했다. 이 양반도 참...

 

시가 무슨... 우담바라냐?

 

우담바라면 고려원에서 내지 왜 창비에서 내겠어요? 말하고 나니 이미 고려원이란 출판사도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그래, 많은 시간이 흘렀구나 했던 그 순간도 이미 한참이나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다. 절 한채 짓기가 어디 쉬우며 말 한마디 땅에 묻기가 어디 쉬우랴. 다시 9년 만에 나온 시집을 들추며 나는 풍경 소리를 듣는다, 듣게... 된다. 나는 시라는 것이 말씀이 묻힌 절이라고 생각한다. 오래된 생각이다.

 

김사인_본문사진2_fmt

 서보세요, 선생님. 나는 선생을 세우고 사진을 한장 찍는다. 에이, 쓸데없이~ 하는 얼굴로... 왠지 몽탁양말을 신고 계실 듯한 얼굴로 그가 포즈를 취해준다. 차가 멋지네요. 선생의 덕담을 듣고 나는 기분이 업 된다. 2013년식이니 순간 연식으로 치면 어린 당나귀인 내 지프 랭글러에 선생을 태우고, “긴 머리 가시내”들도 뒤에 싣고 “부다당” 오프로드 모드로 “쌍”, 가까운 와우산 비탈이라도 “부다당, 부다다다당”(「8월」) 내달렸으면 싶었으나 8월도 아니고 1월이고 해서, 나는 참았다. 술을 마셔야 할 시간이었다. 부다당, 부다다다당.

 

1949년만 해도 위스콘신주의 인디언 보호구역은 매해 매해가 최악인 상황이었다. 조 콘티는 늦은 나이에 두 아들을 얻었는데 그는 그나마 선조인 치퍼와족의 말을 아는 유일한 인디언이었다. 하지만 그는 과묵했다. 인디언들은 과묵할 수밖에 없어요. 대부분의 이웃들이 말수가 없기 때문이죠. 아, 그러니까... 상황이 늘 안 좋거든요. 언제부터 그랬느냐고요? 제가 태어났을 때부터 죽 안 좋았죠. 1976년 ‘오지브와’란 제목의 다큐에서 그의 이웃인 터너가 말했듯이, 조 콘티는 이웃까지 과묵하게 만들 정도로 말수가 적은 남자였다. 큰아들인 빌은 그의 기념품 가게를 물려받았고 둘째인 윌리는 아버지와 형을 도왔는데, 그 실상은 통조림 콘이라도 먹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파리만 날리는 일이었다. 몸 쓰기를 좋아하는 빌과 달리 윌리는 책을 읽는 아이였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조의 마지막 바람은 그런 윌리에게 ‘말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뭐, 말고는 달리 해줄 일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막상 말을 가르치려드니 조는 말하는 법이 기억나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치퍼와의 말이 가득 담긴, 뚜껑을 딸 수 없는 통조림이 된 기분이었다. 의외로 의욕을 보인 것은 윌리였다. 선조들의 말하는 법에 매료된 윌리는 아버지를 도와, 아버지라는 통조림의 뚜껑을 따려 애를 썼다. 장남인 빌은 그것을 편애라고 생각했다. 늦은 밤 불을 켜고 노트에 뭔가를 끼적이는 동생을 향해 빌은 히죽이며 이렇게 소리쳤다. 난 백인 여자랑 잤다고, 알아? 아버지가 사망하자 윌리의 갈망은 더욱 커져갔다. 다행히 그에게 위스콘신 주립대의 한 교수가 후원을 해주었다. 위스콘신 곳곳을, 또 캐나다를 여행할 기회를 얻은 윌리는 돌아와 치퍼와의 말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어찌보면 그것은 영문학의 시와 비슷한 것이었다. 그러나 보다 과묵하고 빈 공간이 많은 것이었다. 윌리는 그 공간을 아버지라는 통조림에서 미처 꺼내지 못한 선조의 어원(語原)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와 묘지를 찾는다 해도 통조림을 열 방법이 있을 리 만무했다. 난 어제 토리랑 잤다고, 등신아! 오히려 빌의 백인 여자들이 구체적인 명사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 공간은 쉽게 메워지지 않았다. 대학신문에 몇차례 글을 싣고 두권의 책을 내기도 했으나 윌리는 그럴수록 자신의 갈망이 깊어만 진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발견한 가장 비슷한 성질의 것이 있다면 고대 중국의 갑골문자였다. 한자를 전혀 몰랐지만 그는 그것이 치퍼와의 ‘말하는 법’과 같은 공기, 같은 바람이 스민 말임을 직감했다.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거북의 등에 글을 새기듯 어원을, 혹은 시원(詩原)을 만드는 것뿐이었다. 상황은 여전히 좋지 않았고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는 점점 과묵한 인간이 되어갔다. 말을 만드는 법은 말하는 법과 또다른 것이어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날마다 그는 뭔가를 끄적였다. 보호구역에서의 견디기 힘든 삶을 알코올에 의존한 형의 요절도 지켜봐야 했다. 치퍼와의 말로는 위로할 길이 없어 그는 영어로 “많은 여자와 잤잖아 형, 그 기억을 떠올려”라며 형의 손을 잡아주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또 고개를 돌리며 빌은 등신! 백인 여자가 왜 나랑 자겠니? 하고 중얼거렸다. 그것이 빌의 마지막 말이었다. 윌리는 치켜뜬 형의 눈을 말없이 감겨주었다.

 

이건 전부 내가 지어낸 말이고... 술자리에서 우리는 이렇다 할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 도리어 선생이 내게 자꾸만 이것저것을 물어왔다. 때문에 함경도에서 내려온 집안 내력을 줄줄이 늘어놓고 또 선생은 이를 흥미롭게 여겨주었다. 나는 순전히 내 얘기만 했다. 이제나 저제나 시집 얘기를 시작하려나 했던 창비의 편집자들이 너 지금... 너를 조명할 생각이냐? 하는 눈빛으로 쳐다봤지만 작가조명이 무슨 야리끼리냐? 하는 생각으로 나는 끝까지 내 얘기만 했다. 다섯명이 둘러앉은 식탁 한가운데서, 그래서 나는 외로웠다. 식탁 맞은편에서

 

또 몇년을

“다 공부지요”, “앉은뱅이책상 앞에 무릎 꿇”(「공부」)

거북이 중에서도 착한 거북이

최대한 안 아프게

울지 않게 죽여 얻은 그 등에

 

글 새겨갈 인간을 돕기가 쉽지는 않았다. 뭔가 그런 걸 만들고 싶었는데... 잘 안된 거 같아요. 식당을 나오면서 산전수전 다 겪어본 거북이 같은 표정으로 선생이 말했다. 그건 순전히 선생님 생각이고요,라고 말하려다 나는 또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고 해서 별말 하지 않았다. 뜬금없는 얘기지만 나는 사실 그에게 묻고픈 말이 하나 있었다. 용서란 게 가능하냐고, 혹은 어떻게 가능했냐고... 묻고 싶었다. 아울러 밤이었다. 아무 말 안해도 밤인 것이 나는 좋았다. 술집을 옮기는 중간에 어쩌다 그 옛날 「꽃반지 끼고」란 노래의 가수가 누구였더라 얘기가 돌았다. 은희씨 노래죠, 뚜아에무아. 내가 말씀드리자 그래, 뚜아에무아... 선생의 얼굴이 갑자기 아득해졌다. 앗차, 하고 나는 라나에로스포란 이름을 다시 떠올렸는데... 실은 은희씨의 다른 노래 ‘쌍뚜아마미’ 때문에 뚜아에무아란 이름이 나와버린 것인데... 이미 노래 한자락이 그의 표정을 흐르고 있어 내버려두었다.

 

생각난다 그 오솔길

그대가 만들어준 꽃반지 끼고

다정히 손잡고 거닐던 오솔길이

이제는

 

이제 더는 못 견디겠어. 절친인 이사벨을 향해 니키는 속삭였다. 나도야 같은 말은 하나마나이므로 이사벨은 껌을 짝짝 씹으며 정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둘은 니미 루브르 박물관에 들어와 있었다. 둘이 니미 가장 엿같이 생각함과 동시에 친() 이슬람 세력이 분명한데다 호모(그냥 마구 밉다는 뜻이다)인 미술교사 장 루이의 견학수업을 빠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좆도 여긴 초딩 때도 오지 않았냐? 니키가 묻자 나는 세살, 네살, 다섯살, 여섯살 해마다 왔다구 지랄아. 이사벨이 거들었다. 픽. 니키가 웃은 건 이사벨의 가정형편, 이른바 집안 꼬락서니를 생각할 때 이년이 미쳤나 생각이 들어서였다. 저년 진짜 재수 없다. 그래, 그래. 둘은 또 속삭였는데 학생들의 견학을 돕기 위해 열심히 설명 중인 큐레이터가 비싸 보이는 옷을 입고 있어서였다. 잘 빨게 생겼네 그년, 하고 니키는 레온의 아지트에서 배운 말을 써먹었다. 둘은 빨리 그곳으로 기어들어가 스파이스로 훅 간 다음에 꽝꽝 음악에 맞춰 열라 몸을 흔들어대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런데 니미, 지금 둘은

 

밀레의 「만종」 앞에 서 있었다.

 

물론 맨 뒤로 빠져 팔짱을 낀 채였지만, 호시탐탐 뒤를 확인하는 장 루이 좆밥 때문에 더 화가 나 있었다. 니키의 논리는 이랬다. 저 새끼는 호모고 우리가 남자가 아니라서 더 미워하는 거라고. 이사벨의 생각은 이랬다. 저 새끼는 어떻게든 우릴 퇴학시킨 후 조용히 IS 가입을 권유할지 모른다고. 어쨌거나 그래서 둘은 그림을 보고 있었다. 이 그림을 보면, 하고 잘 빨게 생긴 큐레이터는 말을 이어나갔다. 무슨 생각이 드시나요? 하루 일과를 마친 부부의 발밑에는 내일의 수확을 기대할 수 있는 씨감자가 든 바구니가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교회 종소리... 두 사람은 함께 손을 모아 기도를 올립니다. 이보다 평화로운 풍경이 또 있을까요?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과학은 새로운 사실을 밝혀냅니다. 자외선 투시 결과 씨감자가 든 바구니 밑에 그려진 원래의 초벌 그림을 확인할 수 있었던 거죠. 그것은 아기의 시체가 담긴 작은 나무관이었습니다. 즉 굶어죽은 아기의 관을 놓고 부부가 마지막 기도를 올리는 풍경이었던 거죠.

 

우씨, 애기래... 졸라 재수 없어 진짜. 이사벨이 속삭였다. 능력도 안되면서 왜 애를 싸고 지랄이냐고! 니키도 거들었다. 감자칩 먹고 싶다 졸라. 껌을 짝짝 씹으며 이사벨이 말했다. 춤추고 싶다... 말했지만 니키는 사실 스파이스로 훅 가고 싶어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냥 그러면 그만인데도... 니키는 그림을 보면서 또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사벨도 그랬다. 하지만 이런 감정이야말로 졸라 재수 없는 일이기에 더 씨발씨발 거리며 확, IS에나 가입해버릴까? 키득거렸다. 우웩, 그럼 니 면상이 방송에 대문짝만하게 날걸? 둘은 키득거렸다. 이사벨은 자신이 지금 임신 3개월째임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레온의 아기면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물론 이런 대화를 나눈 것은 아니고, 나는 가끔 시간을 초월하는 일이 가능한 일일까? 윌리 콘티가 몰두했을 법할 고민을 해보고는 한다. 한폭의 풍경에 들어 있는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해 또 근원과 종말의 교차점에 대해 생각해보곤 한다. 나는 늙은 나귀인가 어린 나귀인가 그 전부를 지닌 그냥 나귀인가 생각해본다. 그래도 숙제 하나 끝내신 기분이겠어요? 선생께 묻자 이것이 짐을 내려놓은 건지 또 내가 나귀는 나귀인지 하는 표정으로 선생은 허허 웃었다. 느닷없이 세월호사건이 있고 나서 두 딸을 불러다 앉혀놓고 내가 미안하다, 너희한테 정말 미안하다 그랬다며 선생은 한숨을 쉰다. 어린 나귀 곁에서, 어린 나귀에게 말하는 법을 가르쳐야 할지

 

내지는 짐 지는 법을 가르쳐야 할지 누구도 판단키 어려운 문제이다. 짐을 내려놓고, 더 무거운 짐을 지게 된 나귀처럼 혹은 술 취한 마부처럼 나는 그와 작별을 했다. 노새 같은 찬양, 힝힝 소리, 돛폭 같은 귀지의 헛바람 진동... 뒤로하고 그는 또 다 공부지요, 돌아가 책상에 앉을 테지만... 더러 이런 쓸데없는 보조를 하기에는 또 드물게 이 밤이 참 쓸모도 있었다는 생각에 나는 달을 바라보았다.

 

문득, 나는

감자가 먹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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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런 토머스의 시 「장례식 뒤에」의 한 구절.

** Welsh Whisky의 준말. 영국 웨일즈 지방의 위스키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