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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관료개혁, 4대 방안으로 실현하자
정대영 鄭大永
송현경제연구소장. 한국금융연수원 교수, 한국은행 금융안정분석국장 및 프랑크푸르트사무소장 역임. 저서로 『한국경제의 미필적 고의』 『신위험관리론』 『동전에는 옆면도 있다』 등이 있음. dyj@bok.or.kr
* 『창작과비평』 2014년 가을호에 이동걸 교수의 「대한민국 관료제의 대수술을 제안한다」가 실린 바 있다. 관료개혁의 엄중한 필요성에 대한 깊은 관심이 반영된 것이라 생각한다. 본고는 이동걸 교수의 문제의식에 주목하면서, 실현 가능성이 한층 높은 여러 대안을 제시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필자.
1. 들어가며
“관(官)은 치(治)하기 위해 존재한다.” 몇년 전 정통 고위관료가 한 말이다. 드러내놓고 말은 안해도 다른 관료들의 생각도 비슷할 것 같다. 관료에게 “공무원은 국민의 공복”이란 말은 그저 책에만 있는 내용일지 모른다. 대다수 관료는 자신을 나라를 다스리는 주체로, 국민을 다스림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선출직 공무원은 잠시 스쳐가는 사람일 뿐이다. 실제로도 관료는 시행령과 규칙 등의 제정, 법률안 제안, 예산안 수립 및 집행, 각종 인허가와 단속 등을 통해 나라를 다스리고 있다. 대통령도 집권 초기에만 관료를 통제하지, 후기에는 통제하기 어렵다. 일부 지방자치단체장은 선출 초기부터 관료와 잘 지내는 손쉬운 길을 택한다.
한국 경제와 사회에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재벌도 관료에게 약하기는 마찬가지다. 재벌이 가장 두려워하는 말은 무엇일까? 얼마 전까지 유행했던 ‘경제민주화’가 아니다. ‘법대로’라고 한다. 불법, 탈법 행위에 법대로 벌금과 세금을 매기고 형을 살게 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경제에 기여했다는 이유 따위로 특별대우를 하지 않고 일반인과 같이 법을 적용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법을 법대로 엄정하게 집행하는 일은 관료의 몫이다. 검찰, 법관 등 사법관료까지 포함하면 재벌에 가장 무서운 존재가 관료인 것은 더욱 확실하다.
관료는 이러한 권한과 영향력 때문에 재벌의 일차적 포획 대상일 뿐 아니라, 한국사회의 여러 좋은 자리를 쉽게 차지한다. 공기업과 협회 등의 기관장이나 감사는 거의 대부분 관료 출신의 몫이다. 금융기관, 대학, 대형 로펌, 국책연구소, 민간기업 등에도 관료 출신은 다양한 형태로 진출하고 있다. 이렇게 진출한 관료 출신과 현직 관료들은 선후배 또는 친구 사이로 ‘관피아’라 불리는 거대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된다. 관피아 집단은 서로 도움을 주면서 더 큰 힘을 갖는다. 밖에 있는 관료 출신은 소속기관에 유리한 법의 제정이나 집행을 유도할 수 있고, 현직 관료는 그들의 현장정보와 로비력을 이용할 수 있다.
이러한 관료집단은 자신의 힘을 이용하여 강력한 이익집단이 되고 있다. 규제와 재량권 확대 등을 통한 권한 강화, 공무원 보수 현실화란 이름의 임금인상, 신분보장과 모든 국민이 부러워하는 연금제도, 퇴직 후 고액연봉을 받는 낙하산 자리 등을 통해 공무원은 꿈의 직장이 되었다. 당연히 취업준비생이 가장 선호하는 직업이다. 2010년까지 행정고등고시라 불렸던 5급 공채는 젊은이가 인생을 거는 자리가, 교사는 최고의 배우자감이, 예전엔 고졸자가 주로 가던 9급 공무원은 웬만한 대기업 사무직보다 좋은 자리가 되었다. 한국은 관료가 다스리는 나라를 넘어 관료와 공무원을 위한 나라가 된 것 같다.
세월호참사 이후 박근혜정부는 국면전환용인지 몰라도 관료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고시제도 개혁, 관피아 방지, 공무원 연금제도 개선 등이다. 개혁내용이 충분하지 못하지만 끝까지 추진되었으면 한다. 어려운 관료개혁을 시작했다는 데 나름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실현 가능하고 파급효과가 큰 관료개혁 방안을 찾아 제시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먼저 한국 관료제도의 폐해와 문제점, 문제의 원인과 개혁의 기본방향을 간단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구체적 개혁방안으로 행정고시 폐지 및 내부승진 확대, 정무직 공무원의 제대로 된 운영, 관피아 철폐와 새로운 대안 모색, 정치권과 시민단체의 정책역량 강화 등 네가지를 제시했다.
2. 한국 관료제도의 폐해와 문제점
한국 관료집단이 거의 통제받지 않고 실질적으로 나라를 다스리면서 만들어내는 폐해와 문제는 많다. 여기서는 대표적인 네가지만 들어보자.
첫째, 관료는 많은 혜택과 권한을 누리지만 책임은 지지 않는다. 관료는 뇌물수수나 공금횡령 등 명백한 범법행위가 드러나지 않는 한 정책실패, 권한의 남용, 예산낭비 같은 명목으로 신분에 큰 불이익을 받는 경우가 거의 없다. 나중에 줄만 잘 연결되면 오히려 승승장구한다. 1997년 재정경제원의 차관, 실장, 과장, 자문관 등으로 재직하면서 IMF(국제통화기금)사태를 초래한 주역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 뒤에 경제부총리, 위원장, 장관, 총재 등으로 승진했다. 외국환평형기금을 엄청나게 탕진한 담당 국장은 뒤에 청와대 경제수석과 장관을 지냈다. 외환은행을 론스타에 이상하게 판 장본인도 계속 승진해 금융위원장을 지냈다. 앞으로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할지도 모른다. 4대강사업이나 부실 해외자원 개발사업 관련 책임자도 비슷하다. 어찌되었든 정치인은 선거를 통해서라도 책임을 지는 데 비해, 관료가 책임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둘째, 이러다보니 관료는 법이나 제도를 재량권이 크고 불투명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것이 한국사회 전체를 불투명하게 만드는 큰 요인이 된다. 한국 법령에는‘기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기타 ◯◯ 장관이 정하는’ ‘◯◯ 등’의 문안이 아주 많다. 한국에서 어떤 일을 하려면 법령에 정해진 내용보다 이러한‘기타’와 ‘등’이 무엇인지를 잘 알아야 한다. 그게 무엇인지는 관료가 정한다. 관료는 ‘기타’와 ‘등’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해석하면서 나라를 주무른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3년 외환은행을 론스타에 기이하게 매각한 일이다. 외환은행 매각 근거는 당시 은행법시행령 제8조 2항 “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 제2조 제3호의 규정에 의한 부실 금융기관의 정리 등 특별한 사유”였다. 당시 외환은행은 ‘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 제2조 제3호의 규정’에 의한 부실 금융기관이 아니었기 때문에 역시 무엇인지 모를 ‘등’에 포함하여 은행 인수자격이 부족한 론스타에 매각을 허용한 것이다.
셋째는 관료들의 이러한 혜택과 권한으로 인해 공무원 등 공공부문이 한국에서 인재의 블랙홀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예전 과천 관가에 떠돌던 말이 있다. “5급시험은 37세, 7급시험은 32세까지 붙을 수 있다면, 대학졸업 후 바로 삼성전자에 들어가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것이다. 민간기업의 직업 안정성이 계속 낮아지고 있어 능력있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신림동이나 노량진 같은 고시촌에서 공무원시험 준비에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는 두가지 점에서 경제에 악영향을 준다. 하나는 한창 경제현장에서 일할 사람이 감소하여 그만큼 성장잠재력이 약화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뛰어난 인재가 공공부문으로 몰리면서 민간부문에서 인재 확보가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1960~70년대 정부주도의 개발시대와 달리 현재는 민간부문의 성과가 더 중요한 시대이다. 민간부문에 인재가 모여야 ‘창조경제’도 제대로 되고 경제가 좋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넷째는 관료들이 국민경제에 부담을 주면서 고령화시대에 역행하여 사회를 조로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20대 중후반에 고시(5급 공채)에 붙어 사무관이 돼 열심히 일하면 40대 후반에 관료의 꽃인 국장으로 승진한다. 사무관과 국장 사이에 실질적인 직책은 과장 하나만 있다. 10년 만에 한 직책씩 승진하는 셈이다. 야망있고 유능한 관료로서는 40대 후반에 국장이 되는 것도 답답한 일이다. 그러나 중앙부처 과장이나 국장직은 자리가 많지 않아 과장·국장급으로 승진을 하더라도 실제 보직이 있는 과장, 국장이 되는 것은 더 어렵다. 과장·국장급으로 승진한 관료 중 많은 사람은 국내외 여러 기관에 파견 형식으로 나가 민폐를 끼치면서 보직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파견받은 기관은 인맥활용을 통해 나중에 보상을 받겠지만, 국민경제는 불필요한 세금만 더 부담할 뿐이다.
여기에다 막강한 권한을 가진 중앙부처 국장이 대부분 50세 전후이기 때문에 이들과 상대할 기업이나 다른 기관의 고위임원도 연령대가 낮아진다. 민간기업의 임원진이 젊어지는 것은 빠른 세대교체 등 기업 내부의 요인도 있지만 관료들과 나이차가 커지면 불편해진다는 점도 중요한 고려사항이다. 50대 초반에 많은 사람이 경제현장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은 고령화시대에 역행할 뿐 아니라 숙련된 전문인력의 조기 퇴역, 노동인구 감소 등 부작용이 있다.
이러한 문제는 고시제도를 통해 사무관이라는 꽤 높은 직급부터 공무원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관료시스템을 주도하는 한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문제이다. 또한 장·차관 등 정무직에 관료를 배제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고시 출신 관료들이 62세 정년까지 국장 정도에서 머물도록 승진욕구를 억누르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3. 문제 원인과 개혁의 기본 방향
한국 관료제가 무엇 때문에 많은 폐해와 문제를 낳고 있는지는 깊은 연구가 필요한 주제다. 역사적 유산과도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조선왕조 멸망과 일제 강점기, 이승만·박정희 등의 독재를 거친 후 어렵게 민주주의를 쟁취했지만 대통령과 국회의원 같은 정치인을 직접 뽑는 데서 멈추어버린 것 같다.
공적인 역할을 하는 공동체나 조직을 스스로 만들고 이를 민주적 방식으로 끌고 가는 일은 우리에게 문화적·역사적으로 익숙하지 않다. 조직을 이끄는 사람 또한 조직 구성원의 하나이자 공복이라는 생각도 거의 없다. 다스리는 사람이 외부에서 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자치보다는 관치가 더 익숙하다. 실제로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정부조직법상의 공무원만이 나라를 다스리는 일, 즉 공무를 담당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일반 국민이 공적인 일을 하는 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고 어색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러한 역사적·문화적 배경을 제외하면 한국 관료문제의 원인은 크게 두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고시제도이고 또하나는 정치권의 무능이다.
먼저, 고시제도는 신분상승의 사다리 역할, 공정한 채용 수단, 경제성장의 일꾼 배출 같은 긍정적인 면을 지녔다고 하나 현재는 다음과 같은 부정적 효과가 압도적이다. 고시제도는 조선시대 과거제도의 연장으로, 관료의 선민의식과 관치의 기초가 되고 있다. 젊은 인재의 블랙홀이며, 수많은 고시낭인을 만든다. 고시 준비생은 대략 수만명은 넘을 것인데, 고시 합격자는 곧 없어질 사법고시를 포함해 연간 600명 정도이다. 경제력이 없으면 고시 준비가 어려워 신분상승도 쉽지 않다. 30대 중반이 넘도록 고시에 붙지 못하면 예전에는 아주 우수한 인재였더라도 취직할 곳이 마땅치 않아진다. 전공과 관계없이 고시 준비생이 늘어 대학교육을 황폐화시킨다. 과거 ‘육사 ◯◯기’가 그랬듯이 ‘행시 ◯◯기’ 등의 형태로 관료집단을 이익공동체로 만든다. 이러한 부작용으로 인해 고시제도 축소와 폐지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공감대가 이루어져 있다.
다음으로 국민을 대표해야 하는 정치권이 무능해서 관료가 전횡을 하고 국민이 피해를 본다. 정치권의 무능은 정권 후반기 레임덕으로 빠져드는 단임 대통령제, 지역구의 표심에만 관심있는 사람이나 유명한 사람에게 유리한 국회의원 소선거구제, 정책능력이 없는 정당 등 한국정치의 여러 후진성 탓이다. 정치권이 유능해지고 관료를 통제할 수 있으려면 대대적인 정치개혁이 필요하다. 이는 관료제도의 역사적·문화적 유산 이상으로 바꾸기 어려운 과제이기도 하다. 이렇게 관료문제는 뿌리가 깊고, 관료 자체가 거대한 이익집단이기 때문에 개혁도 매우 어렵다. 그러나 관료개혁은 한국의 명운이 달린 과제로 힘들더라도 꼭 해내야 한다.
기본 방향은, 첫째, 관료개혁은 매우 힘든 과제로서 한번에 이루기 어렵기 때문에 작은 일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은 먼저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작은 개혁이 지속되면 큰 과제도 해결할 수 있다. 둘째, 다양한 방법을 통해 관료가 누리는 혜택과 권한을 축소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관료집단으로 사람, 돈, 세력 등이 덜 쏠려 개혁도 쉬워진다. 최근 추진되는 공무원연금 개혁과 관피아 방지도 이런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공무원연금 개혁이 잘되면 공무원과 민간 부문의 불균형이 축소되어 공무원으로의 인재 쏠림을 완화할 수 있고, 관피아 방지는 고위관료의 퇴직 후 한몫 챙기기와 민관유착을 대폭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4. 관료개혁 4대 방안
행정고시 폐지 및 내부승진 확대
한국 관료제의 근간이 행정고시 제도인 만큼 관료제의 폐해도 많은 부분 여기서 나온다. 고시제도의 문제점은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이 공감해왔고 개혁방안도 꽤 제시되어 있다. 박근혜정부도 2014년 5월 세월호참사 대책의 하나로 2017년까지 행정고시 선발인원을 절반으로 줄이고 나머지는 민간경력자로 충원하겠다는 방안을 발표했다. 고시의 원조격인 사법고시는 폐지 과정에 있고, 외무고시도 국립외교원 제도로 바뀌어 외형적으로는 사라졌다.
마지막 남은 행정고시도 폐지가 바람직하다. 인원만 줄이는 박근혜정부의 어정쩡한 개혁방안은 경쟁을 더 치열하게 하고 거기서 뽑힌 사람의 선민의식을 더 강화하여 관료제도의 폐해를 오히려 키울 수 있다. 계획대로 선발인원을 줄이는 데 그치지 말고 2019년까지 추가적으로 더 감축하여 2020년에는 행정고시로 뽑는 5급 공채를 완전히 없애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현재 5급 공채인원의 절반 정도를 7급과 9급의 몫으로 돌려 내부승진과 신규채용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현재 7급, 9급 공채 공무원도 과거와 달리 시험성적이 매우 우수한 자원이다. 이들 중에서 업무성과와 근무경력, 전문성, 학술지식 등을 평가하여 5급으로 승진할 수 있는 기회를 늘리면 된다.
나머지 절반은 민간부문에서 다양한 경력과 학력을 가진 사람 가운데 전문지식, 기본상식 등에 대한 객관적 평가과정을 거쳐 선발한다. 이들의 경력과 학력 등은 7급과 9급의 5급 승진에 필요한 근무경력과 비슷하게 적용해 특혜시비를 최소화한다. 민간부문의 경력은 학력이나 학위보다 담당업무와 유사한 분야의 실무경험을 우선해야 한다. 예를 들어 중소기업청은 중소기업, 금융위원회는 금융기관, 지식경제부는 기업체, 교육과학부는 교육·과학기술 분야, 농림수산부는 농업이나 어업 분야에서 실제 일한 사람을 우대하는 것이다.
행정고시 폐지에 대해 제기되는 대표적인 반론은 ‘개천에서 용 날’ 기회를 없앤다는 것과 현대판 음서제(蔭敍制, 고려·조선시대에 상류층 자손을 과거시험 없이 관리로 채용한 제도)가 될 수도 있다는 것 두가지이다. 이러한 비판도 다음과 같은 점에서 별 의미가 없다.
우선 개천에서 용 날 기회를 없앤다는 의미는 거꾸로 관료가 되면 엄청난 특혜와 특권을 얻는다는 현실의 반영이며 관료개혁이 그만큼 필요함을 말해준다. 또한 고시(과거시험)에 합격해서 입신양명하는 것을 선호하는 풍조는 아직도 우리의 사고가 왕조시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기도 하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선진화된 문명국가에서 ‘용’이 되는 길은 선거에 나가 시민의 지지를 받아 정치 지도자가 되는 것, 시장에서 경쟁을 통해 좋은 기업을 만드는 것,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예술작품을 만드는 것,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학문적 업적을 내는 데 있을 것이다. 개혁을 통해 관료가 누리는 특혜와 특권을 줄인다면 젊은이들이 자연스럽게 다른 방향에서 용이 될 수 있는 길을 찾을 것이다.
음서제 부활 가능성도 관료개혁이 잘 이루어지고 민간경력자 채용제도의 객관성과 투명성을 높인다면 거의 문제되지 않을 것이다. 특히 관직에서 물러난 후 국회의원, 은행장, 대학총장, 교수 등이 쉽게 될 수 있는 특혜를 줄이면 이른바 ‘좋은 집안’ 사람들이 관료를 하려는 욕구도 많이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5급 민간경력직 채용제도는 조금만 고민하면 투명성과 객관성을 높일 수 있다. 경력과 학력 등 채용조건의 구체화, 전문지식에 대한 필기시험, 다중면접 등의 시행과 함께 합격자의 학력, 경력, 혈연관계 등을 공개하는 식의 방법이 있을 것이다.
정무직 공무원을 제대로 운영하기
정무직은 국가공무원법상 선거로 취임하거나 그 임명에 국회 동의가 필요한 공무원, 그리고 고도의 정책결정 업무를 담당하거나 이러한 업무를 보조하는 공무원을 말한다. 선거로 취임하는 자리를 제외하고는 통상 장·차관, 청장, 국회사무처 등의 처장 및 차장, 정부 주요 위원회의 위원장 및 위원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자리를 정무직으로 운영하는 것은 정치적 소신이 있고 집권세력과 정치적 판단을 같이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정책결정을 담당케 하여 책임정치를 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무직에 임명되는 사람은 정치적 소신이 있기보다는 시키는 일을 잘할 것 같은 현직 관료나 관료 출신이 훨씬 많다. 특히 차관급 정무직의 경우 거의 대부분 관료가 바로 승진한다. 관료도 정치의식이 있겠지만 통상 그들이 더 중시하는 바는 누가 정권을 잡을지 감을 잘 잡고 거기에 줄을 대는 것이다. 즉 어떻게 해야 나라가 잘될까보다는 어떤 쪽에 줄을 서야 승진에 유리할지를 감지하는 것이 관료의 일반적인 정치의식이다.
이러한 관료를 정무직 공무원으로 대거 기용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정치권이 무능하기 때문이다. 정치권은 나라를 끌고 갈 경륜이나 정책 개발보다는 정권획득을 위한 선거운동과 이를 위한 구호 만들기에 주력해왔다. 이런 운동과 구호에 능한 사람이 정치권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머리는 빌려 쓰면 된다는 것이 정치인의 생각이다. 어느 정치집단이든 운 좋게 정권을 잡으면 정책의 개발과 집행은 대부분 관료를 통해 수행했다. 관료의 등에 업혀 나라를 끌고 가는 것은 어느 정부나 비슷했다. 어떻게 보면 정무직 공무원 중 관료 출신 비중이 클수록 그 정부는 무능하고 준비가 덜 됐다고도 할 수 있다.
제대로 된 정무직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첫째, 정치권이 유능해져 우수한 인적자원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정치지도자의 의지만 있으면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한국에는 기본적 자질과 정치의식을 갖춘 사람이 꽤 있기 때문에 이들이 조금만 준비되면 충분히 가능하다. 실무적으로 훈련이 다소 덜 되었더라도 정치의식과 소신을 갖춘 사람을 임명하는 것이, 정치적 소신이 전혀 다른 관료를 앉히는 것보다 부작용이 적다. 정치적 소신이 다른 관료는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길로 가거나, 디테일에서 완전히 상반된 정책을 추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적절한 예가 참여정부에서 정부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멀쩡한 외환은행을 론스타에 매각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다.
둘째, 정무직 공무원은 정치적 소신의 변화나 건강 등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한번 임명되면 정권과 임기를 같이해야 한다. 이것이 책임정치이고, 대다수 선진국에서도 그렇게 한다. 전문성이 좀 떨어지더라도 기본적 자질이 있으면 시간이 지나면서 업무지식이 늘고 관료 장악력이 커진다. 관료 입장에서는 장·차관이 자주 바뀔수록 좋다. 승진기회가 생기는데다 업무를 잘 모르는 정치인이 장관으로 오면 재량권이 늘기 때문이다. 관료들은 언론을 이용하여 마음에 들지 않는 장관을 흔들고 자신에게 유리한 하마평이 실리게 한다. 이렇게 보면 장·차관 임기가 짧은 정권일수록 관료에 휘둘린 정권이라고도 평가할 수 있다. 장·차관 등의 임기가 대통령 임기와 같은 5년이라면 관료는 자신의 승진이나 뒷자리를 위해 더욱 말을 잘 듣고 협조적으로 바뀐다. 일이년이라면 마음에 맞지 않는 장관을 피해 한직에서 잠시 쉬다가 장관이 바뀌면 재기할 수 있지만 사오년을 쉬면 그러기 어렵기 때문이다.
셋째는 관료가 장·차관이 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관료는 전문성을 가진 우수한 집단이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 있어야 한다. 다만 지금처럼 과장, 국장, 실장, 차관보 같은 단계를 거쳐 위험부담 없이 바로 장·차관이 되게 해서는 안된다. 장·차관이 되려는 관료는 국장급 전후로 전문성을 쌓은 다음 퇴직하여 정당, 시민단체, 연구소 등에서 경쟁력과 정치적 소신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이런 사람이 장·차관 등 정무직 공무원에 많이 임명되면 관료 통제도 쉬워지고 정당이나 시민단체의 전문성과 정책역량도 높아진다. 그야말로 일석이조의 효과다.
장기적으로 정무직 공무원의 범위를 차관보, 실장, 외청의 차장 등으로 점진적으로 확대하면 관료개혁의 효과가 더 커질 것이다. 그리고 정무직 공무원을 지낸 사람이 지금처럼 주로 대형 로펌이나 기업 등에서 로비스트로 일하게 두기보다 연구소나 시민단체 등에서 정책방향을 제시하고 젊은 세대를 교육하는 데 열중하게 하는 분위기도 만들 필요가 있다.
관피아 철폐와 새로운 대안 모색
관료는 퇴직 후 산하 공기업, 관련 협회, 금융기관, 법무법인과 회계법인, 대학, 언론, 민간기업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자리를 얻는다. 이것은 민관유착인 동시에 관료집단의 또다른 정보력과 힘의 원천이 된다. 세월호참사 이후 이른바 관피아 철폐 움직임이 강하다. 관료들이 퇴직 후 관련 기관에 낙하산으로 내려가는 것은 확실히 금지해야 한다. 요즘은 관료가 가던 자리에 정치인이 간다고 해서‘정피아’란 말이 나오고 있다. 이것도 좋은 일은 아니지만 관료가 가는 것보다는 낫다. 관료가 감독 대상기관에 낙하산으로 가지 못하면 어찌 되었든 관리·감독이라도 좀더 객관적으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 공기업에 고령의 코미디언이 감사로 간 일이나, 치매기가 있는 사람이 공기업 사장으로 간 사례처럼 정치적 연이 있다고 아무나 가게 해선 안된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기관장 등을 맡아야 하는데 관료 출신이 아니라면 누가 가게 될까? 아마 정계, 관계, 언론계 등에서 ‘마당발’로 불리는 인맥 많은 사람이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마당발들은 술자리와 인맥, 로비력을 이용하여 민원해결, 예산확보 등으로 조직에 기여해 승진이나 출세가 빠르다. 개인이나 개별 조직의 입장에서는 마당발이 내는 이런 성과가 의미있고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국민경제 전체로 보면 이들은 다른 사람이나 조직으로 갈 것을 빼앗아오는 역할에 불과하다. 즉 제로썸 게임의 승자일 뿐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여 국민경제를 키우지는 못한다. 마당발들은 이권을 따먹는 경제에서는 뛰어나겠지만 창조경제에서는 쓸모가 없다. 또한 이들이 섭외나 로비에 돈을 많이 쓰면 다른 사람도 그와 비슷하게 써야 하기 때문에 고비용 구조를 낳고 국가경쟁력이 떨어진다.
통상 공기업, 협회 등의 기관장, 부기관장, 감사는 공모-추천-검증 과정을 거쳐 임명된다. 마당발은 인맥이 좋은데다 대필로 책을 내거나 칼럼을 쓰는 경우도 있고,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도 많아 유리할 수밖에 없다. 이들 중에서 전문성이나 업무지식은 거의 없고 인맥관리만 한 사람을 걸러낼 수 있어야 관피아 철폐의 효과가 제대로 난다. 이들이 관료 출신의 자리를 메우면 인맥과 로비를 우선하게 되어 관피아의 폐습이 계속된다. 여기에다 전문성 부족 탓에 업무에 문제가 생기면 관료 출신이 차라리 나았다는 말이 바로 나온다.
끼리끼리 나눠 먹기가 만연한 한국사회에서 능력 없는 마당발의 발호를 막기 위해서는 두가지가 꼭 필요하다. 먼저 과도하게 부풀려진 공기업 기관장 등의 보수를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 대폭 낮추는 일이다. 이러면 제사보다 젯밥에만 관심있는 사람들의 발호를 어느정도 막을 수 있다. 다음은 좀 생경할 수 있지만 가칭 ‘기관장 등 취임을 위한 국가자격시험’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다. 유사한 제도가 군 장교들이 전역 후 예비군 지휘관이나 민간기관의 비상계획관으로 가는 배정순서를 결정하는 방법으로 운영되고 있다. 군에서는 이러한 시험제도의 시행 후 자리 배정의 투명성과 대상자의 수용성이 높아졌다고 한다.
구체적 시행방안은 많은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대략의 안은 다음과 같다. 응시자격은 기업(비정규직 포함), 공공기관, 농림어업, 자영업, 시민단체, 예술활동 등의 사회활동을 일정기간(15년 정도) 이상 한 사람으로서 학력이나 자격증의 제한을 두지 않는다. 시험과목은 한국사, 조직 및 인사관리, 일반상식, 전공(여러 분야 중 선택), 논술 정도로 하면 좋을 것 같다. 출제방식은 논술을 제외하고는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 수능처럼 5지선다형이 좋다. 시험 난이도는 아주 쉬워서는 안되고 변별력을 확보할 수 있는 수준은 되어야 한다. 시험 관리는 수능이나 고시 수준으로 엄격하게 해 부정시비를 없앤다. 이 자격시험 적용 대상이 되는 기관은 정부 부처와 고도의 정책결정을 담당하는 일부 공공기관을 제외한 모든 공공기관, 공기업과 공공성이 있는 협회 등으로 한다. 민간부문은 자율에 맡기면 될 것이다. 적용 대상자는 기관장, 부기관장, 감사 정도로 한다. 그리고 적용 대상기관의 중요성에 따라 공모 대상자의 최저점수를 차등화할 수도 있다.
이 제도는 많은 긍정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첫째, 정피아 등이 가는 낙하산 인사의 자질시비를 줄이고 국민의 수용성을 조금은 높일 수 있다. 둘째, 정치적 연은 없지만 자격시험 성적이 아주 우수한 인재가 임명된다면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는 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일이 된다. 셋째, 외부에서 오는 기관장도 지금보다는 떳떳해져서 조직 장악력이 커지고 공공부문 개혁도 쉬워진다. 넷째, 나라를 끌고 가는 사람들이 술집 등에서 로비하고 인맥을 만들기보다 공부에 관심을 갖게 되어 사회가 건전해지고 지식수준도 올라간다. 그밖에 행정고시 폐지 후 대안이 되는 시험으로서의 의미와 함께, 청년기의 시험으로 인생이 결정되던 것을 40대 이후로 분산시켜 평생학습과 현장교육이 강화되는 장점도 찾을 수 있다. 다소의 거부감이 있더라도 이 제도는 관피아 철폐 이후 한국사회의 투명성과 신뢰성이 높아지기 전까지는 꼭 필요하다.
정치권과 시민단체 등의 정책역량 강화
관료집단이 한국사회를 전횡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정치권과 시민단체 등의 실력 부족에 있다. 정당은 표 얻기에, 시민단체는 구호와 운동에 주력하기 때문인지 구체적인 정책대안을 개발할 인재와 능력이 거의 없다. 그래서 정권을 잡았을 때 정치권이나 시민단체 출신은 점차 관료와의 경쟁에서 밀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관료가 국정을 주도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이른바 민주정부에서 더 심했던 것 같다. 구체적인 정책대안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전문인력을 확보하고 당장 문제가 되지 않는 과제에 대해서도 장기간 자세한 부분까지 연구해야 하기 때문에 비용이 많이 들지만 생색은 나지 않는다.
여당이나 야당의 정책연구소, 시민단체의 각종 위원회, 조그만 민간연구소 등의 인적자원과 재원 활용구조를 생각하면, 이들은 훈수하기는 쉬울지 몰라도 국정을 끌고 가기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정치권과 시민단체의 정책역량이 강화되어야 관료개혁이 가능하고 집권 후에 성공한 정권으로 남을 수 있다. 이 또한 어렵고 실질적인 대안이 많지 않지만 다음 세가지 방안이 큰 도움이 될 듯하다.
첫째는 정치지도자나 시민단체를 이끄는 이들이 정책역량과 구체적 대안, 디테일 등의 중요성을 인식해 스스로 공부하고 관심을 갖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제한된 인적·물적 자원도 이러한 분야에 조금씩 더 많이 투입될 수 있다.
둘째는 인재를 영입할 때 명망가보다는 실질적인 정책역량 보유자 중심으로 전환하는 일이다. 정당 등이 우선적으로 영입하는 대상은 정부기관이나 민간기업의 고위직이나 이름난 교수, 명사 등이다. 이들을 통해 조직의 세를 불리고 지명도 및 지지도를 높이려는 전략이겠지만 이들은 앞서 봤듯이 마당발인 경우가 많고 실무에서 손을 놓은 지 오래된 사람이 대부분이다. 덕담을 해주고 아이디어는 줄 수 있을지 몰라도 구체적인 정책대안을 개발할 능력은 거의 없다.
정부기관 등의 실무책임자 출신, 기업 출신 전문가 중에서 정책개발 능력이 있고 사회·정치의식을 갖춘 사람을 찾아 영입해야 한다. 이런 조건을 갖춘 사람이 많지는 않겠지만 분명 찾을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직책, 호칭 등에서 충분한 대우를 해 초빙할 필요가 있다. 필요하다면 이러한 인재 영입을 위한 조직도 만들어야 한다. 한국정치에서 우선 필요한 것은 명망가 등으로 구성된 ‘그림자 내각’이 아니다. 각 정치세력의 비전과 이를 실현할 구체적 정책대안이다.
셋째는 영입된 전문인력의 활동을 지원하고 충분히 활용하는 것이다. 이들이 정치권이나 시민단체 등의 젊은이들과 손잡고 정책개발과 현안에 대한 연구를 담당케 하는 것이다. 정책개발과 함께 젊은 세대의 실질적인 업무능력 개발도 기대할 수 있다. 강의를 통해 배우는 것보다 일을 하면서 배우는 바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이렇게 육성된 인재가 가령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일할 수 있다면 효과는 더 클 것이다. 이런 정도는 제1, 2당이나 대형 시민단체에서 뜻이 있다면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다.
5. 맺는말
관료개혁에 필요한 과제는 이밖에도 많다. 관료의 재량권을 축소하고 투명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법과 제도를 개선하는 일, 정부 부처의 성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하여 이를 보수와 승진에 연계하는 일, 공무원의 경직적인 신분보장을 완화하여 ‘철밥통’ 문화를 개선하는 일, 9급 공채에 고졸자의 합격을 늘리는 일 등이다. 이와 함께 검사장 직선제 등 사법관료의 개혁, 교수와 교사의 폐쇄성 완화 등도 절실히 필요하다. 하나하나가 오랜 노력과 시간이 요구되는 과제이고 기득권자의 저항도 매우 클 것이다. 전선을 처음부터 넓히면 성공 가능성이 낮아진다. 그러니 이들은 장기과제로 남겨두자.
본문에서 제시한 고시 폐지와 내부승진 확대, 관피아 철폐 등 네가지 과제를 우선적으로 추진해보자. 이 중 일부라도 이루어지면 개혁의 파급효과가 생긴다. 관료는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이익집단의 하나이다. 관료개혁이 어느정도 이루어지면 다른 이익집단인 재벌, 임대소득자, 전문직, 공기업, 대기업 정규직 개혁도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