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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서경식 『나의 조선미술 순례』, 반비 2014
‘우리’를 찾는 순례
김남시 金楠時
이화여대 조형예술학부 교수 namseekim@ewha.ac.kr
제목만 보고는 ‘서경식(徐京植) 선생이 드디어 조선시대 미술까지 다루는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목차에 나온 이름 중 ‘조선시대 미술가’는 신윤복(申潤福) 한명뿐이다. 일본유학 후 인민군 종군화가로 활동하다 월북한 이쾌대(李快大), 간호사로 파견된 독일에서 미술작가가 된 송현숙(宋賢淑), ‘현실과 발언’ 동인 신경호(申炅浩)와 민중미술가 홍성담(洪性淡), 벨기에에 입양된 후 작가가 된 미희, 제1세대 페미니스트 화가 윤석남(尹錫男), 그리고 동시대 대한민국 미술작가 정연두(鄭然斗). 저자는 이렇게 다양한 시대와 연령, 성장배경을 지닌 미술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조선미술’로 칭하고 싶어한다. ‘한국미술’이라는 말은 여기서 다루는 월북자, 이민자, 입양자, 나아가 조선족 미술가들의 활동을 포괄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이를 십분 이해한다 해도 의문이 남았다. 태어난 배경도, 살아온 시대와 장소도, 당연히 작업 내용과 방식도 다른 이 작가들을 저자는 왜, 구태여 ‘조선미술’로 묶어 부르고 싶어할까? 이들이 ‘한국인’과 인종적, 유전적 동질성을 가졌기 때문일까? 역사의 우여곡절 속에서 흩어져 살아왔지만, 그럼에도 이들의 작품에서 ‘조선적’이라 지칭될 만한 고유의 미의식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일까? 만일 그렇다면 ‘한국인’과의 유전적 동질성을 갖지 않는, 예를 들어 대한민국에 사는 외국인 노동자나 이민자의 미술은 ‘조선미술’에 포함되지 않는 것일까?
이런 의문을 품고 책(최재혁 옮김)을 읽다보니, 여기서 ‘조선미술’이란, 사실상 부재하는, 그래서 지금부터 탐색하고 찾아나서야 할 열린 개념임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저자가 광주 출신으로 5·18을 경험한 화가 신경호의 작품에 흥미를 느끼는 이유는 이러하다.
“나는 신 선생의 작품에 큰 흥미를 느낀다. 하지만 그 끌림은 자신의 ‘근원에 내재하는 리얼한 것’과 ‘우리의 전통에 숨 쉬는 미감’을 발견했다는 기쁨과는 조금 다르다. ‘내가 잃어버리고 만 것은 이런 것이었던가……’ 하는 생각에서 오는, 이미 잃어버린 리얼리티를 거슬러 올라가 탐색하고 재구성하기 위한 흥미이다.”
‘한국인’의 유전자는 공유하겠지만 “언어, 문화, 풍습에 그치지 않고 미감과 음감까지도” 다른(59면) 저자에게 신경호의 작품이 갖는 매력은 인종적 동질성에 근거한 어떤 종류의 초월적 미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저자가 ‘잃어버렸다’고 느끼는, 그래서 부재한, 이제부터 “거슬러올라가 탐색하고 재구성”해야 할 ‘리얼리티’에 대한 흥미 때문이다.
일본에서 교육받는 동안 저자는, “언어와 습관에 머물지 않고 미의식의 수준까지도 완전히 일본인에게 동화되”(243면)는 데 거부감을 가질 만큼 ‘조선인’으로서의 강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그는 자신이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던 ‘일본적 미의식’이라는 것이, 그가 힘겹게 지키려 애썼던 ‘조선적 미의식’만큼이나 어떤 “실체 내지 본질이 존재할 리는 없”는 “이데올로기”(244면)임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내부적으로는 다층적이고 다양한 계급과 젠더의 차이를 보이지 않게 만들고, 외부적으로는 자신과 ‘타자’를 ‘우열’의 기준에 따라 구분하는 “자민족 중심주의”(245면)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계급과 젠더, 계층과 지역을 초월하는 ‘미적 공동체’가 근대 국민국가의 이상으로 추구되었고, “미술사와 미학이라는 영역은 국수주의의 배양지”(246면)였던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러한 저자에게 ‘조선미술’의 정체성이 “특정한 민족이나 인종이 본질적으로(유전적으로) 공유한 고유의 미의식”에 기반하는 것일 리 없다. 그것은 “오히려 그러한 이데올로기에 반대하는 데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어느 지역과 민족이 지닌 특징적인 미의식은 어떠한〔특정한—평자〕 정치적, 사회적, 풍토적 조건에 의해 형성되고 변용되어가는”(245면), 삶의 ‘문맥’에서 유래한다. 주유소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일하는 젊은이들이나 댄스교실에서 춤을 배우는 중년 남녀, ‘크레용팝’ 같은 아이돌 그룹이 등장하는 정연두의 작품을 저자가 ‘한국적’이라 말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정연두의 작품이 ‘한국적’인 이유는 “한국이라는 본질을 주장하기 때문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문맥’을 살아가는 사람들”(121면)을 잘 잡아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를 ‘한국’이라고, ‘우리’를 ‘한국인’이라고 부를 때, 우리는 구체적으로 누구를 떠올리는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물론이고 재일과 재중동포 등 코리안 디아스포라”(8면)는, 부지불식간 거기서 배제되고 있지 않은가? 저자는 ‘한국’이라는 호칭과 결부된 ‘우리’가 이 역사의 문맥을 담아낼 만큼 더 넓어질 것을 요청한다.
예를 들어 한국인 어머니와 일본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작가 미희는 어렸을 때 벨기에로 입양되었으나 지금은 양부모와 헤어져 살아간다. 코리안 입양인이지만 아버지가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한국에서도 경계 밖으로 추방된다. “미희는 ‘우리’에 포함될 수 있을까? 미희의 국적은 벨기에, 혈통의 반은 ‘일본인’인 듯하다. 10년 이상 한국에서 살았지만 우리말(한국어)을 능숙하게 쓸 수는 없다. 김치를 먹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런 미희를 ‘우리’의 일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미희의 미술은 ‘우리 미술’에 포함될 수 있을까?”(326~27면)
미희를 ‘우리’로 받아들이고 그의 미술을 ‘우리 미술’로 포섭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넓어질 것이다. 저자는 언젠가 그 ‘우리’가 “남북 동포는 말할 것도 없고, 코리안 디아스포라까지 평등한 구성원으로 참여하는 민족 공동체”(9면)로 확장되기를 바란다. 저자가 제안한 ‘조선’과 ‘조선미술’이라는 명칭은 그때가 되어야 비로소 지금은 부재하는 삶의 문맥들로 채워질 것이다. (그런데 나는 ‘조선’이라는 명칭이 대한민국을 ‘이민국’이나 ‘남편의 나라’로 맞이한 사람들까지 포용하는 공동체를 지칭하기에는 여전히 어딘가 부적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저자의 이전 저작들(『나의 서양미술 순례』 『나의 서양음악 순례』) 제목에도 등장한 단어 ‘순례’는 이 책에서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여기서 저자는 이미 존재하는 ‘조선미술’을 둘러보는 관람자가 아니라, ‘조선미술’로 묶일 수 있을 ‘우리’란 누구이고, 누가 되어야 하는지 고심하며 작가를 찾아다니는 순례자이기 때문이다. 그가 찾은 이들 대부분이 저자처럼, 자의건 타의건 내/외적 디아스포라를 겪었거나 겪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