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목소리 | 창비에 바란다
전환기를 돌파할 수 있는 창의적 공유지가 되길
페미니스트 문화인류학자 조한혜정 인터뷰
조한혜정 趙韓惠貞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 (사)또하나의문화 창단 멤버, 하자센터 설립자. 저서 『글 읽기와 삶 읽기』 『학교를 찾는 아이 아이를 찾는 사회』 『다시, 마을이다』 등이 있음. haejoang@gmail.com
백영경 白英瓊
한국방송통신대 문화교양학과 교수, 본지 편집위원. 논문 「지식의 정치와 새로운 인문학: ‘공공’ 연구의 확장을 위하여」 「성적 시민권의 부재와 사회적 고통」 등이 있음. paix@knou.ac.kr
창비에서, 그것도 창비에 대한 인터뷰를 청한 것이 약간 뜻밖인 듯했다. 글쎄 무슨 말을 하지,라며 조금 망설이던 조한혜정 선생은 막상 만나는 자리에는 꼼꼼하게 생각을 정리한 작은 쪽지까지 준비해왔다. 조한혜정 선생은 여성과 청소년, 공동체와 돌봄의 삶에 대해 많은 실천과 저술활동을 해온 한국의 대표적인 페미니스트 문화인류학자다. 1980년대 초반부터 ‘또하나의문화’, 흔히 부르기로는 ‘또문’이라는 모임을 통해 여성주의에 뿌리를 둔 대안적인 삶을 고민하며 출판사를 만들고 여러 문화활동을 조직해왔고, 90년대 후반부터는 서울시립 청소년직업체험센터 ‘하자’를 이끌면서 창의적 공유지대를 만들고 확장하기 위한 실천활동에 앞서왔다. 이런 조한혜정 선생이 50주년을 맞아 변화를 모색하는 창비에 해줄 수 있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궁금해하며 인터뷰를 청했다. 최근 선생이 공저자로 참여한 『노오력의 배신: 청년을 거부하는 국가, 사회를 거부하는 청년』이 창비에서 출간된 것도 마침 좋은 구실이 되어주었다. 인터뷰는 선생이 2014년 연세대에서 정년을 마친 후 손자를 만나러 매달 오간다는 제주에서 이루어졌다. 선생은 제주에서 양성평등위원회 위원장을 맡는 등 다양한 경로로 지역활동에 참가하고 있기도 하다.
나는 요즘 오십대 이상 남성에게 관심이 많아요. ‘오십대 플러스 인생학교’라는 곳이 있어요. 이우학교를 만든 정광필 선생님이 교장인데요, 그 세대가 아주 열심히 살기는 살았는데 정말 제대로 살았는가라는 의문을 던지면서 함께 인문학 공부를 하는 곳입니다. 그분들이 힘도 있고 자원도 있는 세대라 제대로 성찰을 해야 할 것 같아서 기웃거리기 시작했어요. 사실 젊어서는 페미니스트들끼리 모여 우리가 원하는 대안적인 세상을 돌보고 가꾸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남자들 이야기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청년 이슈를 다루다보니 요즘의 청년들은 가진 자원이 너무 없거니와 경험 자체가 부족하고, 또 경험을 좀 한 친구들도 윗세대와 소통하기 어려워하는 벽이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똑똑하기는 하지만 생각하고 실천하는 문법이 윗세대와 다르다보니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윗세대에게 ‘꼰대질’당한 경험도 많아요. 또 촛불시위 등 여러 활동에서는 자기 행동을 윗세대들이 그들 식으로 해석해서 전유해버리고 마는 일들을 겪으면서 축적된 분노와 좌절도 있어요. 그래서 청년들과 함께 활동하기가 생각보다 매우 어렵습니다. 나는 오륙십대가 청년들과 뭘 함께하려고 하기보다는 그들에게 어떻게든 자원을 주는 식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시민배당이나 공공재 등을 얘기하면서 말이죠. 이것은 단지 청년세대만을 움직여서 될 일이 아닌지라 요즘은 오륙십대 이상 남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해보려 애쓰고 있습니다.
50주년을 맞아 이후를 고민하는 창비가 미래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청년세대와의 소통이 필수적인데, 늘 청년들과 함께해온 선생도 이들과 같이 활동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하니 막막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오륙십대는 어떻게 이삼십대와 만나야 하며, 창비가 청년세대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그 질문에 대한 조한혜정 선생의 답변은 생각보다 단호하고 날카로웠다.
오륙십대들은 스스로가 가진 지식권력에 대해 자각하고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전의 386은 이제 586이 되었는데, 이 586들이 갑자기 이십대가 너무 예쁘다면서 도와준다고 해요. 그런데 지금의 이십대는 사실 어느 세대보다도 지식권력 같은 ‘권력’에 대한 감각이 발달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오륙십대가 이십대와 직접 뭘 같이한다는 건 권력관계로 느껴지기 쉽기 때문에 대단히 불편하게 다가옵니다. 오륙십대는 자기가 가진 자원으로 간접적으로 지원을 하고, 실제 활동은 청년들 스스로 질문을 던지면서 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판은 이제까지 후배들에게 관심 없던 사람들이 자기들 외롭다고 갑자기 이십대에게 매달리는 것 같은 인상을 주거든요. 이런 양상을 신기해하면서도 나름 진지하게 관찰 중이고, 굉장히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창비도 여유가 있다면, 가령 청년들 활동에 창비서교빌딩의 50주년홀 같은 공간을 언제든 빌려준다, 이런 식의 행동을 취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청년들이나 여성들이 자율적으로 내는 잡지도 만들고 하면 좋지 않겠어요?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창비에 대한 아쉬움으로 넘어갔다. 현재 한국사회에 만연한 이분법적 사고에 창비의 책임은 없을까, 창비 자체가 그렇게 주장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과거 반독재투쟁에서 굳어진 이미지와 수사학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부족했던 것은 아닌가라는 지적이었다. 정반대로 최근의 창비가 저항의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듣는 형편이고 보면, 창비가 제 역할을 찾는 과제는 점점 쉽지 않게 느껴졌다.
한국의 지식인들을 보면 글로벌 지식인운동의 동시대성을 지니지 못한다는 점이 아쉬워요. 일본만 해도 그렇지 않습니다. 해외에서 68운동이 일어날 때도 우리는 박정희 때문에 싸워야 했지, 68 같은 다양한 성격의 운동을 하지는 못했어요. 비슷한 운동을 시도한 것이 또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당시 한국의 지식인운동은 대부분 이를 굉장히 나쁘게 보고, 문화적 자유든 사회적 자유든 자유라는 논의를 부르주아 내지는 개량주의로 몰아갔던 것 같아요. 창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박정희정권을 무너뜨리는 데는 기여했다고 보지만, 그때 그 운동권 문화가 좀더 열려 있고 여자들 얘기도 좀 듣고 그랬으면 지금 우리나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요즘 제주평화축제라는 걸 함께하고 있어요. 흔히 일본을 획일적인 사회라고 하지만 사실 상당한 다양성이 있습니다. 축제만 해도 밑에서부터 함께 즐기는 문화가 있죠. 그러면서도 하나의 사회를 만드는 면모가 있고. 유럽은 말할 것도 없고, 대만도 축제에 가보면 우리와 달라요. 한국은 굉장히 획일적인 면이 있는데요, 물론 분단이나 냉전의 경험과도 관련 있겠지만, 이 획일성과 흑백논리, 적대감을 어떻게 해결해나갈지를 생각하면 아주 걱정되고 막막합니다. 창비가 남북문제와 통일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해왔지만, 이러한 획일성과 적대감을 완화하는 데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이 사실 아닌가 싶어요. 여하튼 저는 어떻게 이러한 지점을 넘어설지 고민인데, 우리 사회가 그걸 포기한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획일성의 사회에서 성장한 청년들이 과연 내가 원하는 사회나 사회적 자유에 대한 감각을 가질 수 있겠는가, 또한 자유에 대한 감각이 없는 기성세대가 과연 청년세대가 어렵게 성취한 새로운 삶의 전망들을 용인할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 조한혜정 선생의 계속된 지적이었다.
이십대들 역시 획일성과 이분법적 흑백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나이 든 세대는 자신들의 논리를 따르는 청년들 위주로 끌어준다는 것이 내가 아주 위험하게 보는 현상이지요. 90년대 학번들은 굉장한 다양성 속에서 성장한 최초의 ‘다양성 세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2002년 월드컵으로 열린 소통의 장을 경험하기도 했고, 시민적 공공성까지는 못 가더라도, 어떤 사회적 자유랄까 시민성의 개념을 가졌어요. 보면 586들이 제일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게 이 세대고, 이 친구들도 그쪽을 제일 싫어해요. 흑백논리적이고 권력적이라고 느끼지요. 그래서 586은 그보다 젊은 신자유주의 세대, 말 잘 듣고 온순하면서 권력에 민감한 사람들을 선호합니다. 사고를 풍성하게 하거나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자기 의견을 말하기보다는 탁탁 정리해서 어젠다를 찾는 청년들을 지원하는 겁니다. 지금 박근혜 대통령을 물러나게 해서 바뀔 수 있는 부분이 있지만, 그걸로만 해결되지 않을 부분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악셀 호네트(Axel Honneth)가 『사회주의의 재발명』(사월의책 2016)이라는 책에서 사회적 자유를 얘기하는데, 우리의 문제는 내가 원하는 사회를 만들 자유에 대한 감각이 다 사라졌다는 거죠. 그러면 아무것도 안 남는 거거든요. 사람이 기본적으로 살아 있으려면 내가 원하는 사회, 사회까지도 아니고, 내가 원하는 관계가 뭐고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해요. 창비가 무엇보다 그런 수준에서 논의를 다시 펼쳐주면 좋겠어요.
꼭 여성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거나 청년과 함께해야 한다고 조언하는 것이 아니라 창비가 이제까지 해온 분야를 더욱 수준있게 다루어주면 좋겠다는 조한혜정 선생의 지적은 신선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이야기하는, 사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감각, 인간의 존재나 자유에 대한 감각은 문학이 탐구하는 본령이 아니던가. 사회담론과 함께 문학을 중심축으로 삼아온 창비의 작업을 두루 살핀다면, 창비가 자유를 등한시했다는 선생의 평가에 이견을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상업적으로 성공하면서 창비가 변했다는 일각의 비판을 포함해서 세간의 평가에 대해 조한혜정 선생이 주문한 바는 이번에도 창비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서 더욱 잘해달라는 것이었다.
일본의 여성가극인 타까라즈까(寶塚)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해요. 한국은 여성국극이 거의 망해서 남은 게 없는데, 타까라즈까는 기업이 되면서 잘 살아남았어요. 살아남은 것 자체로 고맙더라고요. 비슷한 맥락에서 창비도 고맙게 느껴져요. 내 욕심으로 보면 좀 아쉬운 면도 많지만. 여자들, 청년들에 비해서 남자들, 노·장년이 자원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이 부분을 어떻게 제대로 활용해서 우리 같은 사람들이 관심 갖는 창의적 공유지(creative commons)로 살려낼 것이냐 하는 과제가 있어요. 하지만 이런 이야기도 계속 자기의 권위를 유지할 수 있는 방식으로 시혜적으로 나눠주듯이 하면 안 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더 뒤의 미래세대까지 고려하는 사유의 훈련이 필요한 때예요. 지금은 하나의 문명이 막을 내리고 근원적인 전환점을 맞는 시기입니다. 이 전환점을 위기에서 더 좋은 것을 찾아낼 수 있는 ‘해방적 파국’으로 만들어야 해요. 이러한 시점에서 창비가 할 일이 분명히 있고, 말하자면 사회를 계몽하는 역할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50주년을 맞은 지금의 창비가 속한 시대는 어디인가 하는 고민이 시작되었다. 문명의 전환점을 맞아 공공의 가치를 복원하고 새로운 시민적 질서를 만들어내야 할 과제를 감당함에 있어서, 과연 어떻게 창비의 지난 50년을 자산과 연륜으로 살리는 동시에 사고의 혁신을 통해 새로운 세대와 시대적 과제에 접속할 것인가라는 질문의 무게가 새삼 다가온 것이다. 사실 조한혜정 선생과의 대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구체적인 말보다 미래세대를 생각하는 책임 있는 어른세대의 자세였다. 그가 창비에 주문한 핵심도 위기의 시대에 불안한 미래세대의 삶에 발판이 될 수 있는 창의적 공유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해달라는 것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