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백은선 白恩善

1987년 서울 출생. 2012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가능세계』가 있음. viesecretek@naver.com

 

 

 

비좁은 원

 

 

아니요 아니요 구름 아니요 책 아니요 껌 아니요 소주 아니요 고양이 아니요 재미없어요 나는 속고 싶다 나를 속여줬으면 좋겠다 나는 웬만한 것에는 속지 않는다 나는 구름과 책과 껌과 소주와 고양이로 속지 않는다 나는 계속된다 아니요 아니요 나는 아니라는 말에 의해서만 계속될 것 같다 나는 확신이 없고 이제부터 겨울에 대해 생각할 것이고 겨울 하면 눈사람과 크리스마스와 캐럴이 생각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멀리멀리 가고 싶고 갈 수 있는지 써나가면서 확인해볼 것이다 그치?

 

너의 경쾌한 걸음걸이를 떠올린다 나는 너를 눈밭에 둔다 너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종종걸음으로 걷는다 춥지? 응 너무 춥다 너무 춥고 너무 추운 날에는 포스트록, 데스메탈 그런 것을 들어야 될 것 같다 난로 앞에 모여 앉아 뜨거운 차를 호호 불어 마셔야 할 것 같고 독한 술을 단숨에 들이켜야 할 것 같고 안락의자에는 할머니가 앉아 있을 것 같다 어쩌면 타란티노 영화 같은 시 막 써버리고 싶다 너 거기 있냐? 죽어! 너도? 죽어! 이렇게 막 죽이다가 아니아니 하고 한명은 남겨둘 것이다 그러면 남은 사람이 우와 나만 살았다 하고 좋아할지 혼자 남았어 하고 슬퍼할지 모르겠다

 

무엇이든 아니라고 먼저 말해볼 것이다 부정하고 부정한 다음 지켜볼 것이다 아니 어쩌면 아프다는 느낌만이 가장 확실할 것 같고 그 감각을 지키기 위해 고통 속에 머물 텐데 그 고집이 너를 계속 혼자 남게 할지 모른다 아니야 아니야 너는 아니야 그런 말 다음에도 나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 부정도 부정할 텐데

 

나는 그만둘 것이다

 

구름은 멈추고 책은 멈추고 껌도 고양이도 소주도 멈출 것이다

 

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새벽에 택시를 잡아탔다 기록적인 한파였다 길은 얼어 있었고 나는 네 손을 꼭 잡아 주머니 속에 넣었다 우리의 입김이 공중에서 하얗게 퍼졌다 이렇게 추운 건 처음인 것만 같다 너무너무 추워서 현실이 아닌 것 같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24시간 홈플러스였고 거의 아무도 없었지 나는 어려서부터 정지된 세계 속에 혼자 남는 꿈을 반복적으로 꿨다 마트에 가서 물건을 마음대로 훔치고 영업이 끝난 백화점 같은 곳에서 혼자 이것저것 입어봤다 홈플러스는 꿈같았다 꿈은 아니다 추운 곳에 있다 실내에 들어오니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우리는 잡은 손을 놓고 천천히 걸어 다녔다 이상하다 나는 아직도 내 일부가 그 밤 그곳에 남아 돌아다니고 있을 것 같은데

 

나는 네가 아니다 너도 내가 아니지 그걸 몰랐어 응 몰랐다 나는 열심히 네가 되려고 애를 쓰고 또 썼어 네가 나처럼 애쓰지 않는 게 너무 미웠다

 

아니

 

무엇을 알고 싶어? 무엇이 갖고 싶어? 어디에 가고 싶어? 응응 모르겠다 아니아니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가만히 누워 있고 싶어 아니야 아니야 그러지 마 그러지 말아 같이 있자 영화 볼까? 영화 보고 까페 가서 얘기할까? 그런 말을, 입김을 뿜으면서 반쯤 빌면서 천천히 걸으면서 나는 조금씩 지워졌어 아니 밀려났다 아니다 튕겨져 나왔다 처음부터 바깥이었어 나는 조금씩 줄어들다가 세포가 되고 그다음 소멸했다 거짓말 아니다 나는 더 사랑하니까 항상 가짜가 되고 싶다

 

처음

이 세계의 처음

 

없다 없다고 먼저 말하고 손도 없고 눈도 없고 홈플러스도 없고 택시도 없고 유령도 없고 군청색 코트도 없다 마음도 없다

 

기억이란 뭘까 초록색일까

기억이 동물이라면 코알라가 아닐까

 

너를 눈밭에 둔다 내게서 멀찍이 둔다 너를 달에 둔다 너를 화성에 둔다 너를 명왕성에 둔다 너를 은하계 밖에 둔다 내게서 가장 가까운 파도 아래 둔다 기침하는 빛 열감기에 시달리는 어둠 너를 옮기자 너는 깜박인다 아니…아니, 아니…아니 마지막까지 식물처럼 동그랗고 뾰족하고 차갑고 사라질 것처럼 피어난다

 

사라진다

 

죽은 사람의 냄새를 맡는 개 빙글빙글 돌며 발끝 손끝 눈두덩을 핥는 개 너는 노력하지 않는다 너는 중력에 무심하고 너는 멈췄다가 출발할 때 발끝과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순간을 모른다 나는 너를 팔짱낀 구름이라고 쓴 다음 내 미움에 대해 눈과 눈이라고 쓴다 이것은 작곡가가 잊은 노래 잠들기 직전 들뜬 기분 갈고리에 걸린 거대한 고깃덩어리 축 늘어진 고깃덩어리 고깃덩어리의 물성

 

나는 피가 아니다

나는 피가 아니다

나는 피가 아니다

 

거짓말 전문가 너와 나는 초록 담요 안에 웅크리고 누워 각자의 절망을 각자의 방식대로 즐겼다 치즈가 몽땅 썩고 책장이 한장씩 찢겨나가고 대화를 하던 사람들이 말을 멈추고 서로의 표정 밖을 맴돌 때까지 떨어진 말들이 바람에 흩날려 부서지고 먼지가 되어 사라질 때까지

 

어린 신이 세계가 지겨워

유리구슬을 절벽 아래로 내팽개칠 때까지

 

하얗고 탐스러운 눈이 펑펑 내렸다

 

모두가 죽었으면 좋겠어

모든 게 사라지면 좋겠어

 

무서운 속도 무서운 속도 무서운 속도 무서운 속도 무서운 속도 속에서 무서운 속도 무서운 속도 무서운 속도 무서운 속도로 무서운 속도 속에서 무서운 속도 무서운 속도 무서운 속도 무서운 속도로

 

손을 든 것은 내가 아니다 손을 내린 것도 내가 아니다 기지개를 켠 것도 촛불을 불어 끈 것도 빨래를 돌린 것도 갈가리 찢긴 책장을 그러모아 마음 가는 대로 늘어놓고

너는 읽는다 소리를 만진다 계속…가죽장화를…심장에…돌 주머니…여자의 옆모습…지독한…극장에…사려 깊은…베들레헴…누나, 운다…영원한…사건은…물고기를 놓아준…너는 산다…방사선량 기준치의…환승역…추웠다…흘러간…세네갈…평생이…한계로부터…여름에…개 같은…레비나스…알쏭달쏭한…강 나는 듣는다 안 듣는다 발아하는 씨앗처럼 보송보송한 소리의 기분 견딜 수 없다 아니야 끝이 없을 것처럼 끝나버린다 나는 네가 옷을 벗고 화장실로 들어가는 것을 침대에 누워서 본다 개새끼

 

이불을 끌어모아 얼굴을 덮는다 지겨워 죽겠어 지겨워서 숨이 막힌다 회전하는 시간과 끝없이 늘어선 시간 잔디 돋는다 죽은 몸 위에 죽은 네 안에 나는 여기까지 쓰고 잠이 들었다 잠이 들었지만 나는 꿈속에서도 시를 써야 되는데 시를 써야 되는데 생각하면서 백지 앞에 앉아 있었다 그러자 아버지가 도끼를 들고 눈 쌓인 들판으로 걸어 내려왔다 그래 네가 미워하는 사람들이 이 사람들이냐? 오른손잡이에게서는 오른손을 왼손잡이에게서는 왼손을 빼앗을 것이다 아버지가 나무둥치에 놓인 사람들의 팔을 도끼로 하나씩 내려쳤다 너는 오른손잡이냐? 왼손잡이는 뒤로 가서 서 있어 피 피 눈 위로 새빨간 피가 예쁘게 피 피 하고 쏟아졌다 나는 그걸 보면서 웃었다 웃으면서 우와 미쳤다 이러면 안 돼 나는 왜 웃지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닌데 나는 벌을 주고 싶지 않은데 나는 자꾸 웃음이 난다

 

아름다운 빛들

눈물의 온도로

선언을 배운다

다섯시에 옥상에서 만나

다섯시에 옥상에서 만나

 

나는 아이의 엄마 너는 아이의 아빠 우리 그렇게 낮은 곳을 헤매다가 다 잃은 것처럼 그렇게 죄를 지었지

죽어버려 죽도록 아파하지 말고 그냥 죽어버려라 이게 내가 하고 싶은 마지막 말인가? 아니지 아니지 미움은 사랑의 다음 너는 줄곧 재고 있었던 거지 타란티노 스타일로 우리는 죽음을 배웠잖아 응? 아니아니 처음부터 혼자였던 거지

 

모든 것이 멈춘다

 

모든 것의 바깥에서

 

고가도로를 올라가며 엑셀을 힘껏 밟을 때, 기분이 좋았다 그럴 때 맥락 없이 다 끝났다는 이상한 안도감도 들곤 했다 아니야 아니야 나는 그냥 버릇처럼 말해본다 계속된다 계속된다 씨앗에서 나무로 나무에서 숲으로 숲에서 섬으로 섬에서 대륙으로 대륙에서 행성으로 행성에서 우주로 우주에서 우주 너머까지 점점 팽창한다 그러다가 문득 거꾸로 버튼을 누른 것처럼 우주 너머에서……씨앗까지 다시 작아지면서 다시 작아지면서 깜박였지 힘껏 페달을 밟았다 뗄 때

 

나는 이불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물소리가 들렸다 빠져나가는 바람의 색을 보았다 그걸 영혼이라고 쓰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팔 잘린 사람들이 눈밭 위를 하나둘하나둘 휘적거리며 걸어 올라간다 뚝뚝 피를 흘리며 뒤뚱뒤뚱 걸어 올라간다 나는 점점 멀어지면서 그걸 본다 그걸 보는 것이 슬프고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