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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은희경다움’의 최대치를 기대하며
은희경 장편소설 『소년을 위로해줘』
정여울
문학평론가. 평론집 『내 서재에 꽂은 작은 안테나』 『미디어 아라크네』 등이 있음. suburbs@hanmail.net
은희경(殷熙耕)의 신작 『소년을 위로해줘』(문학동네 2010)는 그의 장편을 기다리던 독자들에게 『새의 선물』(1996) 그후의 이야기 혹은 『새의 선물』 21세기 버전으로 다가온다. 이 작품은 성장소설의 뉘앙스를 풍기면서도 은희경 소설 특유의 서정적 씨니씨즘을 간직하고 있다. 소설집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2007)에서 절정을 구가한 은희경의 치밀한 내면성의 탐구는 이번 소설을 통해 새로운 터닝포인트를 통과한다. 동시대의 문화적 트렌드에 예민한 촉각을 세우면서 더불어 기왕의 독자들의 문학적 취향과 기대를 충족시키려는 작가의 기획이 이번 신작으로 최대한 실현된 것 같다. 기성작가들의 장편소설 출간 러시와 신인작가들의 첫번째 장편 홍수 속에서 은희경의 신작은 일종의 문화적 완충재 역할을 한다. 『소년을 위로해줘』는 문단 데뷔 15년차 중견작가에게 기대되는 완숙미나 노련미보다는 처음 길 위에 선 신인작가의 참신함을 지향하는 듯하다. 단지 작품의 주인공이 열일곱살 소년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 소설의 모든 인물을 관통하고 있는 감수성 자체가 ‘소년성’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소년성’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내재된 본원적인 순수성을 가리킨다. 이 소설의 주저음으로 울리는 ‘힙합’의 감수성 또한 이런 소년적 감수성을 극대화하는 원동력이다.
‘힙합의 혁명’이라고 대변되는 이 ‘소년성’의 대척점에 위치한 관념은 바로 ‘마초성’일 것이다. 남자다워지는 것, 여성을 보호하고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원초적 육식성. 이 마초성은 이 세상의 ‘메이저리그’에 기꺼이 속하고자 하는 욕망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씽글맘 신민아와 함께 살아가는 17세 소년 연우는 ‘바람직한 아버지’가 되고 싶은 욕망이나 ‘남자다워야 한다’는 지상명령과는 어울리지 않는, 어떻게든 타인의 무리 속에서 튀고 싶지 않아하는, 여리고 유순한 캐릭터다. 작가는 『소년을 위로해줘』를 통해 ‘작가로서 누린 메이저의 세계’에 안주하지 않고 ‘기득권을 지닌 어른들의 보수성과 폭력성’을 넘어서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 극복의 원동력이 되는 키워드 중 하나가 바로 ‘힙합의 혁명성’일 텐데, 아쉽게도 이 소설에서 힙합의 ‘감수성’은 크게 부각되지만 그 ‘혁명성’이 무엇인지가 철저하게 규명되지는 않았다. 힙합음악을 소설에서 비중있게 다룬다는 것 자체가 혁명적일 수는 없으며 그 혁명성을 통해 ‘무엇을 할 것인가’가 드러나고 나아가 그 혁명이 지향하는 역사성과 사회성이 규명되지 않는 한, 힙합의 의미는 감성적인 울림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물론 모든 혁명이 거대한 정치성이나 역사성을 담보로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혁명’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은 이 소설이 감당하고 있는 문학적 테마와 사회인식만으로는 제어되지 않는다. 연우의 고민은 풍부한 감성과 세련된 이미지로 채색되어 있긴 하지만 구체적 사회현실과 밀착되어 있지 않고 모호하게 추상화되어 있다. 독자들의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잠들어 있는 소년성’을 깨우는 일 또한 ‘감수성’의 차원을 넘어 강력한 호소력을 자아내지는 못한다.
『소년을 위로해줘』는 작품의 외부를 둘러싼 매체성이 더욱 부각되는 소설이기도 하다. 전자출판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면서 이 소설은 전자책으로도 출시돼 베스트쎌러 상위에 링크되었고, 작품의 예술적 완성도보다는 일종의 문화적 콘텐츠로서의 높은 대중성이 두드러진다. 이 작품은 손가락으로 종이책장을 넘기는 행위보다는 스마트폰의 어플리케이션에 어울리는 ‘미디어 컨텐츠로서의 문학’의 한국적 신호탄이 될 것 같다.
『새의 선물』의 참신한 감각이나 『비밀과 거짓말』(2005)의 중후한 스토리텔링을 기대했던 독자라면 ‘은희경다움’의 ‘최신 버전’이라 할 이번 소설에서 아쉬움이 느껴질 수 있다. 은희경의 충실한 독자들은 그녀의 소설 자체가 품어내는 문학적 긴장감, 예술적 포용력이 더욱 깊어지기를 바란다. 은희경 특유의 저돌적 상상력과 치밀한 플롯이 살아 있는 소설을 기대했던 독자라면, 그녀의 다음 소설이 ‘은희경다움’의 최대치를 추구하기를 바랄 것이다. 신인의 참신성과 기성작가의 노련미를 모두 갖춘 그녀의 다음 소설이 ‘엄혹한 이 세계에서 사랑받기’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을 사랑하는’ 드넓은 문학적 용량을 보여주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