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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중편 특집

 

황정은 黃貞殷

1976년 서울 출생. 200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파씨의 입문』, 장편소설 『百의 그림자』 『야만적인 앨리스씨』 『계속해보겠습니다』 등이 있음. aamudo@empal.com

 

 

 

웃는 남자

 

 

1

 

많은 밤을 보낸 뒤에 d는 차가워졌다.

젖은 얼굴을 닦으려고 수건을 잡았다가 d는 그 사실을 알았다. 수요일 오후 아홉시 직전이었다. 욕실 벽에 걸린 시계가 째깍거리는 소리를 냈다. 비누거품 섞인 물이 세면대에 고여 있었고 d는 맨발로 타일을 밟고 있었다. d가 조금 전에 잡았다가 흠칫 놀라 놓아버린 것, 그것은 평범한 수건이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집에 있던 물건으로 d는 매일 아무 때나 그걸로 얼굴이며 목을 닦은 뒤 수건걸이에 도로 걸거나 빨래바구니에 던져넣었다. 여러번 빨아 말리길 반복한 탓에 좀 뻣뻣해지고 납작해진 아이보리색 면직물. 무늬도 이니셜도 없어 d로서는 다른 수건과 구별하기도 어려웠다. 그것의 온도가 매우 낯설었다. 체온을 가진 것처럼 온기를 띠고 있었던 것이다. 불을 켜지 않은 부엌을 향해 욕실 문이 열려 있었다.

d는 컴컴한 부엌을 가로지르다가 식탁에 놓인 탁상달력을 떨어뜨렸다. 바닥을 더듬어 그것을 주웠을 때 d는 표지까지 열세장인 두꺼운 마분지와 좁은 간격으로 말린 스프링에서 온도를 느꼈다. 달력을 올려두고 식탁을 짚어보니 역시 미지근했다. 그밖에도 더 있었다. 가구와 식기, 유리, 각종 손잡이들. d는 서서히 그것을 눈치챘다. 공기보다는 싸늘해야 마땅한 사물들이 미묘한 생물처럼 미열을 품고 있었다. 그 미적지근한 온기를 참을 수 없어 d는 사물과의 접촉을 줄였다. 모든 것이 이렇게 될 수는 없으니 변한 것은 내 쪽이다. d는 생각했다.

내가 차가워졌다.

 

d의 아버지, 이승근은 한때 목수였다. 목공소에 붙은 다락방에서 이승근과 그의 아내 고경자, 그리고 d가 살았다. 목공소 구석에서 신발을 벗고 시멘트 계단을 세개 올라가면 그들이 먹고 자는 데 사용하는 방이었다. 옷장과 낮은 책상 하나, 브라운관 텔레비전이 있었다. 조그만 부엌이 딸려 있었는데 그 공간엔 창이 없어 고경자가 국을 끓이거나 고기를 삶으면 냄새 밴 수증기가 방을 거쳐 목공소로 내려왔다. 목공소에 쌓인 목재들엔 국과 밥과 고춧가루가 섞인 반찬 냄새가 배어 있었고 세 식구가 사용하는 방엔 목공소에서 올라온 목재 냄새가 배어 있었다. d가 어릴 적엔 목공소에서 자란다는 이유로 나무에 관해 질문해오는 선생이나 동급생이 있었는데 d는 나무에 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목공소에는 나무가 없었으니까. d가 생각하기에 목공소를 채운 것은 목재였지 나무가 아니었다. 이미 톱이나 날에 썰렸고 이윽고 다시 썰린 뒤 못이나 아교에 붙들려 형태가 바뀔 예정인 널빤지들, 껍질이 벗겨진 토막과 막대 들이었고 그것들은 생긴 것부터 나무와 전혀 닮지 않았잖아. 목공소 옆에는 바랜 색종이와 먼지 쌓인 고무풍선을 파는 문구점이 있었고 거무스름하게 마른 고기를 진열장에 내버려두는 정육점이 있었다. 비좁고 후미진 그 가게들과 마찬가지로 목공소는 사계절 밤낮으로 어두컴컴했다. 톱밥은 늘 매운 냄새를 풍겼고 구석에 쌓인 오래된 목재들은 시큼하게 썩어가며 부풀었다.

이승근은 솜씨가 별로 없는 목수였다. 고객들이 목공소로 찾아와 항의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결과물에 만족하지 못하는 고객이 많았으므로 고객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는 친절과 불안과 비굴함이 섞여 있었다. 예상된 상황이 벌어지면 품삯을 깎으려는 수작이라고 고객을 비난했다. 인간들 참 뻔하고 뻔뻔하다고 이승근은 불평했지만 d가 보기에도 아버지의 목공은 볼품없었다. 아버지가 만들어내는 것들은 정확하지 않았으며 안정적이지도 않았고 실용적이지도 아름답지도 기발하지도 심지어 기괴하지도 않았다. d는 그가 고객에게 왜 사실을 말하지 않는지, 목공소를 찾아온 고객에게 자신은 솜씨가 없다고 왜 고백하지 않는지, 그것을 제대로 말하지 않고 같은 상황을 왜 거듭해 겪는지를 의아하게 여겼다. 이승근은 d를 때리지 않았고 아내가 만든 음식을 불평하지 않고 남김없이 먹었으며 술이나 경마에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지만 자기 목공으로 세 사람이 먹고산다는 말을 끊임없이 했다. 그것이 얼마나 신성한 일인가도. 마끼따, 히따찌, 렉슨, 보시의 전동기구들, 끌과 망치와 대패, 접는 톱과 실톱. 이승근이 그것들을 사용해 목재를 절삭하고 구멍을 내고 깎아내고 문지르는 소리는 d에겐 세계의 배음(背音)이었다. 작업공간과 주거공간이 제대로 분리되어 있지 않아 d는 방에서 밥을 먹고 낮잠을 자고 텔레비전을 보고 숙제를 하는 동안 그 소리를 들었다. d가 특별히 끔찍하게 여겼던 것은 톱날의 회전으로 목재를 자르는 절삭기들이 내는 소리였다. 작업이 없는 순간에 목공소는 적막했지만, 어느 순간 그 소리가 시작되면, 어느 날에나 틀림없이 시작되고는 했는데, d는 어두운 방에서 연필을 쥐고 숙제를 하거나 낙서를 하면서, 귀가 빨개진 채로 생각했다. 나는 저 회전의 댓가로 먹고산다 아름답지 않고 솔직하지도 않은 목공의 댓가로. 은반처럼 돌아가는 톱날에 자신의 조그만 손가락을 올려보는 광경을 상상해보기도 하며 d는 기다렸다. 톱날이 아버지의 피로 흥건해진 채 멈추는 순간을. 아버지가 자신의 신성함을 그만 멈추고 목공소가 마침내 고요해질 순간을. 그런 순간에 관한 상상들은 d를 부끄럽게 만들곤 했고 죄책감을 느끼게 했으며 갑작스럽게 치솟는 분노로 아버지를 노려보거나 비슷한 정도의 환멸로 그를 외면하게 만들었다. d에게는 신성한 것이 없었다. 자주 귀를 붉혔고 잡음을 들었다. 쪼개진 목재를 잡아뜯는 듯한 소리, 쇠로 만든 종이를 찢는 듯한 소리일 때도 있었고 보푸라기들이 작은 뭉치로 귓속을 구르는 것처럼 부스럭거리는 소리일 때도 있었다. 고요한 장소에 있을 때 d는 자신이 듣고 있는 것이 정적이나 고요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소리의 흔적, 잡음들. 그것이 세계를 상시적으로 메우고 있었다. d는 별로 말하지 않는 어른으로 자랐고 많은 말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다시 말해 d에게는 세계가, 이미 너무 시끄러웠다.

 

dd를 만난 이후로는 ddd의 신성한 것이 되었다. ddd에게 계속되어야 하는 말, 처음 만난 상태 그대로, 온전해야 하는 몸이었다. ddd를 만나 자신의 노동이 신성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랑을 가진 인간이 아름다울 수 있으며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아름답다고 여길 수 있는 마음으로도 인간은 서글퍼지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d를 이따금 성가시게 했던 세계의 잡음들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행복해지자고 d는 생각했다. 더 행복해지자. 그들이 공유하는 생활의 부족함, 남루함, 고단함, 그럼에도 주고받을 수 있는 미소, 공감할 수 있는 유머와 슬픔, 서로의 뼈마디를 감각할 수 있는 손깍지, 쓰다듬을 수 있는 따뜻한 뒤통수, 어깨를 주무르고, 작고 평범한 색을 띠고 있는 귀를 손으로 감싸고, 따뜻한 목에 입술을 대고, 추운 날엔 외투를 입는 것을 서로 거들며, dd의 행복과 더불어, 행복해지자.

ddd는 양천구 목2505번지 B02호에 살았다. 대규모 아파트단지와는 거리가 있는 동네로 이십여년 된 빌라와 단독주택 들이 모인 곳이었다. 말하자면 양천구의 가장자리로, 정류장이 있는 대로에서 길을 건너면 강서구였다. 집들은 대체로 붉은색이었고 낮고 낡은 담에 둘러싸여 있었다. B02호의 문은 크고 두꺼웠으며 사람의 얼굴 높이에 불투명한 유리가 끼워진 창이 있었다. 녹슨 문턱을 넘으면 발바닥에서 발목 정도의 낙차로 지면보다 낮은 현관이 있었고 거실과 부엌과 욕실과 방이 있었는데 순서대로 모든 공간이 열차처럼 일렬로 이어져 있었다. 편의에 따라 B라고 칭하기는 합니다마는 이 정도 깊이는 반지하라고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사실 1층입니다? 부동산 중개인이 사실을 묻고 확인하듯 말했으나 집 자체가 미묘한 경사에 자리를 잡고 있어 가장 바깥쪽인 현관에서 가장 안쪽인 방으로 들어갈수록 지하로 완만하게 들어가는 구조였다. 방에는 옆으로 긴 창이 나 있었는데 창의 높이가 지면이었으므로 그쪽은 이미 반지하였다. 그러나 결국엔 지층이라는 핸디캡이 적용되지 않은 월세로 결정되었다. ddd가 그 방을 얻기로 결정한 이유는 각자의 직장에서 정확히 중간에 위치한 동네였고 다른 방들이 그 방보다 훨씬 비쌌기 때문이었다. 임대인인 김귀자는 글을 읽거나 쓸 줄 모르는 노인이었다. 그녀는 매월 집세를 입금받을 계좌를 알려달라는 중개인의 요구에 난처해하며 자신에게 직접 주면 된다고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자기가 문을 두드리면…… 문을 열고 손만 내밀어서 이 할미한테…… 주기만 하면 돼,라고 말하며 손바닥을 위로 해 손을 내밀어 보였다. 작고 흰 손이었다. d는 자신의 얼굴 앞으로 불쑥 다가온 그것을 보고 놀랐다. 노인의 얼굴이 d에게 낯익었고 익숙했다. 기괴한 방법으로 집세를 지불하는 방법을 일러주며 비굴하게 웃는 그 얼굴이. d는 언짢고 불쾌했지만 그 방을 얻을 수밖에 없었으므로 그 방을 얻었다. dd는 방을 얻을 때 채광을 중요하게 여겼고 그 집은 그 점에서 dd가 원하는 바에 별로 근접하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잘 적응했다. 잠을 자고 먹고 씻고 출근 준비를 하고 퇴근해 돌아오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고양이를 기르고 싶어하고 다육식물이 담긴 작은 화분을 모으고 그밖에 다가오는 겨울을 대비해 사고 싶은 외투와 d가 작업장에서 신을 부츠의 방수에 관해 말하고 d를 만지고 늦잠을 자고 고지서를 걱정하거나 이따금 불면하기도 하며 크게 바라거나 크게 비관하는 일 없이 그 집에 잘 적응해 살았다. 들뜬 벽지나 낡아서 도금이 벗겨진 손잡이에 손을 베이는 일이 잦았고 기묘하게도 일요일에, 일요일만 되면, 욕실 천장 한구석에서 흙탕물이 타일의 골을 따라 흘러내렸으며 보일러를 사용하지 않는 계절에는 눅눅해진 이불 위에서 등이 차가워진 채로 잠을 깨게 되는 방이었다. 그 방으로 돌아오다가 dd는 죽었다.

 

내동댕이쳐졌다.

d는 그것을 반복해 생각했다. 많은 것을 생각했는데 마지막엔 늘 그것을 생각했다. 내동댕이쳐졌지. 그 많은 사람이 타고 있던 버스에서. 정교하고도 무자비한 핀셋이 집어 내던진 것처럼 오로지 dd만, dd만 바깥으로. 충돌의 결과, 우리가 매일 오가던 딱딱한 도로 위로.

d는 거의 모든 사물에서 온기를 감각하게 된 뒤로 외출하지 않았다. 출근도 하지 않고 집에 머물렀다. 누구와도 통화하지 않고 그다지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면서 사물들을 부수고 쪼개고 버렸다. 공들여 그 일을 하다보면 사물들의 온기로 손이 뜨거워졌다. d는 작열감을 줄이려고 머리를 긁거나 몸에 손을 문질러가며 작업했다. 쓰레기를 계속 버려 골목을 지저분하게 만든다고 툴툴거리며 누군가 문을 두드리기도 했으나 d는 대꾸하지 않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상자를 채우고 물건을 버리고 상자를 채웠다. 사물들은 내내 기묘하고도 기괴한 생물들처럼 온기를 띠고 있었고 그것을 만질 때마다 d는 역겨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것들을 내버려둘 수 없는 이유는, 거짓말을 하니까.

d는 어리둥절한 채 한동안 기다렸다. 사물들은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급하게 외출할 일이 있을 때 dd가 머리에 눌러쓰곤 했던 모자가 옷장에 걸려 있었고 실내용 슬리퍼는 dd가 마지막으로 벗어둔 그대로 현관 매트 위에 남아 있었으며 출근하기 직전에 차를 담아 마셨던 컵은 갈색 차를 조금 담은 채 탁자에 놓여 있었다. 베란다에는 우산과 몇번 사용하지 않은 여행가방이 있었고 욕실엔 낡아서 교체할 때가 된 칫솔과 절반 넘게 남은 헤어제품이 있었으며 탁상 달력에는 dd의 필체로 메모가 적혀 있었고 이불과 베개에는 여전히 dd의 냄새가 배어 있었다. 그것들을 고스란히 남겨두고 dd는 잠시 외출한 것 같았다. 어딘가에 틀림없이 있는 것 같았고, 그래서 오늘 저녁이나 내일 아침, 혹은 며칠 뒤, 아무렇지 않게 그 공간으로 돌아올 것 같았다. 그것은 언제일까. 지금이 아니고 아직은 아니지만 다음에서 다음으로 건너가는 지금이자 다음. d는 매순간 벅차게 그 순간을 실감했고 매순간 그 실감을 배반당했다. 사물들은 그런 착각을, 나중에 몇배나 되는 상실감과 배신감으로 돌아오는 기대와 희망을 품게 만들었다. d는 물건을 버리며 그 기만적인 기대와 거짓된 실감을 버렸다.

예컨대 dd의 갈색 구두. 그것과 같은 구두는 세상에 없었다. dd의 발 모양으로 늘어났고 dd의 걸음걸이 습관 그대로 굽이 닳았으며 반복해 접혔고 주름졌으니까. 그것을 상자에 넣으며 d는 생각했다. 이것을 이 상자에 넣었으므로 저쪽 상자엔 넣을 수 없지. 동시에 있을 수는 없으니까 사물은…… 이 상자에 있는 동시에 저 상자에 있을 수는 없다. 이제 여기 담겼으니 저쪽엔 없다. 여기에 있으면 저기엔 없지. 사물이 그렇지만 구두를 신던 사람은…… 인간은 사물과는 달라서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을 수 있다고…… 내가 언젠가 그와 같은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은 것 같은데 적어도 들은 적이…… 누군가가 없어져도 그를 기억하는 인간이 있다면 그는 여기 없어도 여기 있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냐? 사기를 치지 마라…… 인간은 너무도 사물과 같이…… 없으면 없어. 있지 않으면 없고, 없으니 여기 없다…… 상자에 담긴 사물들을 바닥에 쏟기도 하고 도로 담기도 하며 d는 묵묵하게 작업했다. d가 판단하기에…… 도저히 버릴 수 없는 사물 몇가지는 dd의 가족에게 보내야 했는데 나중엔 어떤 사물이 도저히 버릴 수 없는 사물인지를 판단할 수 없었다. 마침내 모든 사물을 버리거나 상자에 넣은 뒤 나흘 동안 우체국을 오가며 dd의 물건을 담은 상자를 dd의 가족에게 부쳤다. 마지막 상자를 우체국에 맡긴 뒤 d는 집으로 돌아왔다. B02호에 머물렀다.

 

 

2

 

2505번지 건물은 장식 없는 외벽에 유약을 바른 검붉은 벽돌과 파란 기와로 덮였고 B층에 두 집, 1층에 두 집, 2층에 한 집이 있는 구조로 김귀자 노인은 2층에 홀로 살고 있었다. 김귀자의 마당엔 김귀자가 직접 흙을 나르고 벽돌로 가장자리를 둘러 만든 화단이 있었는데 샐비어, 맨드라미, 코스모스, 치자와 쑥갓, 노란 앵두가 열리는 아직 어린 앵두나무 하나…… 그리고 우연하게 발아했다가 김귀자가 씨를 받아 화단에 심은 양귀비가 자라고 있었다. 붉거나 노랗거나 흰 꽃들의 중심은 검었고 홑으로 피는 꽃이 지고 나면 올리브 모양의 씨방이 남았다. 동네 노파들이 양산을 쓰고 김귀자의 양귀비를 보러 왔다. 이것이 앵속이냐…… 배앓이나 치통이나 흉통엔 이만한 것이 없다 이게 진짜배기야…… 가장자리가 들쭉날쭉한 청록색 잎으로 둘러싸인 줄기는 무척 가늘었는데 꽃이 떨어지고도 꺾이거나 휘어지는 일 없이 바로 선 채 말라갔다. 김귀자는 덜 익은 씨방에 칼집을 내 유액을 수집했고 줄기와 씨방이 다 마르면 뿌리째 뽑아 다발로 보관해두었다. 김귀자의 마당으로 놀러 오는 노파들이 양귀비 달인 물을 나눠 마시고 마당에 드러누워 놀았다. d는 그녀들에게 떡과 수정과를 받아 먹었다. 그녀들이 햇빛을 피해 돗자리를 펼치는 응달이 B02호의 창 앞이었으므로.

자 자 이 떡을 드시오…… 젊은 양반 그리고 이것을 마셔보시오 계피를 듬뿍 넣고 끓여 이게 맵싸하니 가슴에 좋고…… 김귀자와 그녀의 방문객들은 인견으로 만들어진 여름옷을 입었고 각자 가지나 당초 문양이 그려진 부채로 얼굴을 부치며 떡과 마실 것을 d에게 권했다. d는 그녀들이 창 너머로 내미는 접시를 받았다. 그녀들이 창 너머로 접시를 내밀 때 접시 가장자리를 잡은 손과 부채를 쥔 나머지 손은 짙은 색이었고 부드러우면서도 질겨 보였다. 그들은 해가 있는 동안 응달에 머물면서 그들의 자식들과 날씨와 차츰 달아나는 입맛과 더는 장을 직접 담가 먹지 않는 세계와 전쟁에 관해 말했다. 김귀자 노인은 어제 오후에…… 낮잠을 자고 일어났다가 사이렌을 들었고 그녀가 분명하게 알기로 민방위훈련이 있는 날이 아니었으므로 틀림없는 공습경보라고 여기고 아이고 어머니…… 주저앉고 말았는데 조금 뒤에야 꽃과 화분을 파는 트럭 행상의 확성기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노파들은 크게 공감하면서 자신들도 그런 착각을 한 적이 있고 똑같은 이유로 가슴 철렁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더구나 그중에 한번은 실제 상황이기도 했으므로 그런 착각이 아주 터무니없지만은 않은 일이었다며 1983225일에 인천이 폭격당하고 있다는 오보로 시작된 이웅평 대위의 귀순 사건을 말했다. 당시 각각 서울과 오산과 경기도 광주에 살고 있던 그녀들은 신문과 텔레비전을 통해 이웅평 대위를 목격하고 너무나 경악하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너무나도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였으므로. 북한에 사는 모든 인간은 인민이나 군인이나 할 것 없이 모두 못 먹고 못사는 못생긴 인간, 즉 빨갱이 괴뢰들이라고 생각해왔는데 뜻밖에 세련된 전투기를 타고 나타난 북한군 대위는 괴뢰군이라기보다는 미남, 그러면 북쪽 상황은 생각만큼 괴뢰한 상태는 아닌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가도, 저 잘생긴 군인이 자유에 목말라 자신의 전투기로 북쪽에서 이륙한 뒤 단 한차례도 어딘가 기착하지 않은 채 논스톱으로 남한으로 날아와버렸다는 것은 다시, 북쪽이 얼마나 괴뢰한 상태인지를, 동시에 우리네 사는 이쪽이 얼마나 자유롭고 좋은 상태인지를 알게 해주는 증표였다고 그녀들은 서로의 첨언을 긍정해가며 말했다. 그래그래 그러나…… 그 좋은 것은 언제든 전쟁 한번으로, 하루 혹은 반나절도 되지 않는 폭격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 잿더미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지…… 젊은 양반은 그것을 아는가 우리는 사무치게 그것을 알아…… 젊었을 때 첫번째 전쟁을 겪은 그녀들은 자신들의 인생 중에 언제고 두번째 전쟁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생각이라기보다는 거의 무의식적인 확신과 예감을 지닌 채 살아왔기 때문에, 부지불식 그와 같은 방식으로 과거의 여전한 현재를 이따금 확인하게 되며, 그런 것을 보면 자신들의 내적 삶에서…… 그러니까 그 맴속에서…… 전쟁은 완전하게 중단된 적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 이유로 트럭 행상의 확성기 소리를 공습 사이렌으로 듣기도 하면서…… 이것이 꿈인가 생()인가…… 들어보시오 내가 사람 죽는 걸 처음으로다가 본 것이 19506월에 한강교가 끊어질 때였는데…… 그때에 내가 남편이 있었고 애가 둘 있었어. 애를 하나는 남편이 목에 태웠고 다른 하나를 내가 업고 무서우니까 밤중에 그 많은 사람에게 떠밀리듯 걷고 있었는데 다리를 다 건너기도 전에 등 뒤에서 꽝, 하니까 내가 앞으로 넘어졌고 조금 있다가 뭐가 내 손등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내가 넘어졌다가 겨우 일어나서 사람들에게 밀리니까 정신이 없고 아이고…… 뭐가 계속 미끈하게 밟히는 그 길을 나아가고 나아가고…… 뒤가 어떻게 됐는지 보지도 못하고 그냥 나아갔다. 강을 다 건너서 컴컴한 이짝에 도착하고 보니 바깥양반도 우리 큰애도 없어. 벌써 건넜겠지 어딘가 있겠지 돌아가지를 못하니 내가 그렇게 믿고 그저 걸었어.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사람들 가는 대로 걷고 뛰고. 그러다 지나던 사람이 알려줘서 죽은 아이를 업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 포대기를 풀어보니 애기 뒤통수가 다 벗겨졌어. 빨간 머리뼈가 다 보이고. 그걸 앞으로 둘렀으면 내 등이 그렇게 벗겨졌겠지. 이런 이야기를 해도 나는 안 울어. 못 운다. 그때도 못 울었고 지금도 못 운다. 그저 아이고 무섭지…… 너무 무서우니까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거길 벗어나고 보니 내가 컴컴한 데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혼자였어. 그래 무섭고 외로워…… 서둘러 사람을 만나 살림 차리고 딸을 낳았지. 그 딸이 딸을 낳아서 둘이 다 무사하게 현재 수색에 살아. 손녀가 나를 닮았다. 그런데 그년하고 그 에미년이 내 집에 올 때마다 지저분하다고 잔소리를 뭐라고 해. 뭐를 이렇게 쌓아두고 사느냐고 물건들을 지저분하게 두지 말고 좀 버리라고. 내가 볼 적에는 그게 다 소용이 있는 건데 이웃들 보기에 부끄럽다고. 젊은 양반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을 두어개 말해보시오. 그게 다 있어 뭐가 되었든 내 집에 그것이 다 있어…… 떡을 더 드시겠소? 그러면 더 들어보시오 나는 아주 남쪽까지 다녀왔어…… 낮엔 걸었고 밤에는 남자들이 내 배 위로 올라오지 못하도록 담이나 나무에 등을 기대고 선 채로 졸았다가 해가 뜨면 다시 꼬박 걸어 남쪽으로…… 이제 막 피난민들이 도착하기 시작한 그 시골 마을엔 아직 본격적인 전쟁이 당도하지 않아 부서진 것도 없고 너무 조용해, 김귀자는 마침내 거기서 깊게 자고 싶었다고 말했다. 어느 낮 어느 담벼락에 내가 기대 쉬고 있을 때…… 그 담이 너무 서늘하고 내가 너무 지치고 피곤해 이제 그만 영영 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담에 박이 자라고 있었어. 조롱박, 아직 어려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연한 박이…… 희고도 파랗게 그것이 어찌나 예뻤는지 손으로 쥐었다가 땄지. 내가 그것을 뚝 땄을 적에는 반드시 먹으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게 다만 탐스럽게 예뻐서, 십여개 열린 것 중에 한개를 쥐고 넝쿨에서 뚝 떼어낸 거야. 그랬더니 그 집 여편네가 벼락같이 문을 열고 나와서 우리 박을 따지 말라고 야 이 도둑년, 박 도둑년, 아주 그러며 내 손에 든 박을 싹 빼앗아갔지. 나하고 똑, 같은 나이를 먹은 것 같은 그년이 아주 말쑥한 얼굴과 머리를 하고 박 도둑년…… 그때에…… 대낮에 내가 너무 야속하고 부끄러워서 눈물이 났어. 그때 내가 매우 놀라며 깨달았지. 내가 우는구나 부끄러운 것을 다 느끼는구나 살아서 이렇게 있구나. 그러자 이번엔 그게 기쁘고 막막해 눈물이 났다. 내가 살아야겠다 이왕에 여기까지 살았으니 끝내 살아보자는 뚜렷한 맴이 들었어…… 그 확고하고도 뚜렷한 맴을 먹게 된 것이 부끄럼 덕이었으니 그것이 나를 살렸지 그러니까 그것이 보자 지금 내 나이가 하나 둘 서이 너이…… 하니 거의 백년의 일이로구나…… 이렇게 세월이 흐르고도 내가 그것을 잊지 못해. 그것 한가지 내가 그 맴을. 손녀하고 딸년은 내 사는 꼴이 지저분하다고 부끄럽다지만…… 그것이 무엇이 부끄러운가? 내가 아는 부끄러운 것 중에 그런 것은 없어. 산 사람의 살림이 오만잡종인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지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

정오를 넘어 늦은 오후로 진입하면 태양이 이동하면서 양달과 응달이 바뀌었다. 김귀자와 그녀의 방문객들의 발치에 놓인 수정과를 담은 유리 단지가 햇빛에 노출되었고 그 반사광이 d의 지하방으로 내려와 벽에서 일렁거렸다. 성긴 그물 같은 그 빛을 바라보며 d는 많은 것을 생각했고 d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그녀들은 거의 모든 것에 관해 말했다. 화분(花粉)과 흙과 전쟁과 염장(鹽藏)에 관해…… 한 사람이 하는 이야기 같고 세 사람이 번갈아 하는 이야기 같은 그 이야기들을 들을 때 d는 그녀들이 저리로 좀 갔으면, 이제 그만 자신의 창 앞에서 갈색 반점이 있는 자주색 입술들로 떠드는 것을 멈추었으면 하다가도 그녀들의 이야기에 매달려보고 싶었고 그러다가도 집세를 지불하는 날이 되면 문을 두드릴 테니 손만, 그러니까 문을 조금만 열고 돈을 쥔 손만 내밀면 된다고 말했던 김귀자, 첫 대면에서 불쑥 가슴 쪽으로 다가왔던 그녀의 흰 손이 떠올라 진절머리가 나기도 하다가 마지막엔 전부 꺼져버렸으면…… 그리고 당신의 잡동사니들은 따뜻하지 않냐고, 정말로 역겹게 따뜻하지 않냐고 실은 언제나 묻고 싶었는데, 심지어 그것들이 어째서 따뜻하지 않냐고 당장 소리를 질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난폭한 상태가 되어서도, 벽을 바라보는, 좀더 정확히는 벽에서 일렁이는 빛의 그물을 바라보는 d의 얼굴은 고요했고 눈빛도 그녀들의 눈빛처럼 고요하게 흐리멍덩했다. 여름이었다. d는 그녀들의 정오에 섞인 채 길쭉한 빈 자루 같은 한개의 공간으로 존재하면서…… 벽 위로 밤이 스미고 낮이 그보다 밝은 빛깔로 번졌다가 다시 차츰 밤이 배어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인간의 마음은 턱에 있다고 d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턱이 아팠으니까.

d는 종일 입을 다물고 있었고 때때로 피맛을 느끼고 입을 벌렸으나 아무리 혀로 더듬어도 출혈은 없었고 다만 그때마다, 그때까지 자신이 얼마나 입을, 턱을 세게 다물고 있었는지를 알았다. 특히 밤에, 입을 꽉 다물고 눈을 뜬 채 어둠 속에 있다보면 육체는 희박해지고 사물처럼 턱이 남았는데, 그런 것 같은 때가 있었는데, 그때에는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그리운 것도 만져지는 것도 서글픈 것도 없이, 오로지 턱이다, 지금은 턱이다, 이것만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최종적으로 마음은 턱에 있어. 마음은 언제나 결정적이고 최종적인 것이니까. 최종적으로 턱이 남았다면 마음은 여기에. 위턱과 아래턱, 턱을 짓누르는 턱, 그 간격에, 서로 다른 극끼리 붙은 자석처럼 꽉 달라붙은 그 간격에 간신히.

녹슨 자물쇠로 꽉 잠긴 듯한 입속에.

뻣뻣한 혀와 화약 맛이 도는 침에.

마음은 그런 데 있어.

1950628일에 한강교를 벗어날 때 김귀자 노인은 발에 밟히던 미끄러운 것 중에 한 조각을, 다리를 방금 작살낸 폭발의 잔광 속에서 우연하게 알아볼 수 있었고 그것은 누군가의 얼굴이었다고 말했지. 바가지 반의 반 조각 분량의, 뼛조각에 붙은 인간의 얼굴. d는 그 얼굴을 계속 생각했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누군가의 두개골에 연결된 채로 완전한 얼굴이었을 것이다. 스물여덟개의 뼈가 아름답게 맞물려 완전하게 닫혀 있던 두개골. 그는 그 두개골 속에 뇌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으로 열심히 생각하거나 무언가를, 누군가를 기억하기도 하고 망각하기도 하며 살았겠지. 뇌는 둥글지…… 그것이 둥근 이유는 두개골이라는 것이 아름답고도 단단한 구의 형태로 닫혀 있기 때문이야. 두개골이라는 틀이 있기에, 그것이 고유한 형태로, 저마다의 패턴으로 완벽하게 닫혀 있기에 뇌는 둥근 형태를 유지할 수 있는 거야. 말하자면 삶의 형태로…… 틀을 벗어나면 뇌는 그저 맥없이 풀어지는 구불구불한 끈일 뿐. 각각의 두개골은 각각의 패턴으로 맞물려 있지. 열명의 사람이 있다면 열가지, 백명의 사람이 있다면 백가지 패턴으로. 백만이라면 백만의 패턴으로. 각각은 오로지 그것 하나뿐이니까 한개의 두개골, 그것이 붕괴되었을 때 세계는 유일했던 한가지, 방금 부서진 그 패턴을 상실한다. 억겁으로 세월이 흐른다고 해도 돌아오지 않을 그 패턴을. 그러나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런 상실쯤 세계에…… 그런 일은 그렇게 일어난다. 그냥 그렇게. 어떻게 그렇게…… dd의 패턴은 아름다웠겠지. 만인 속에서도 내가 알아볼 수 있었던 그 얼굴 속에서 고유하게 맞물려 있었을 것이다. 그것, 유일하니까 다시는 돌아올 수 없고 살아 있는 동안에 내가 두번은 만날 수 없는…… 그것이 내 곁에서 슥 사라질 때, 슥 빠져나가 멀리, 튀어오르는 빗물로 지글지글 끓는 것 같았던 검은 길 위로 내동댕이쳐지기 직전에, 나는 dd를 붙들고 있지 않았고 이윽고 모든 것이 그 길 위에서…… 우리가 항상 오가던 길 위에서, 중단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무엇의 결과일까…… 무엇의, 결과이기는 한 걸까.

누군가 B02호의 문을 두드렸으나 d는 응답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다음날 다시 왔다. d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고 집 주변을 걸어다니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딱딱하고 얇은 밑창이 달린 남성용 구두를 신은 사람일 거라고 d는 짐작했다. 발가락이나 발볼 어딘가에 상당한 공간이 남는 구두를 신은 발로 걷는 소리였다. 그 구두가 매우 잘 닦여 있을 거라고 d는 생각했다. 매일 구두를 닦는 것이 그 구두를 신은 사람의 습관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저 구두는 오늘, 매우 잘 닦여 있을 것이다…… 김귀자의 마당 문이 열리고 누군가 마당을 걸어다녔다. 잠시 뒤 d는 마당을 향해 난 창이 조금씩 열리는 것을 보았다. 삐걱거리며 창이 조금 열렸고 조금 뒤엔 조금 더 열렸다. d는 창 앞에 쪼그리고 앉아 방을 들여다보는 남자를 보았다. 그의 뒤로 김귀자의 화단이 보였다. 양귀비와 샐비어와 맨드라미가 여러 날 물을 받지 못한 듯 축 늘어진 채 말라 있었다. d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누구냐고 묻는 대신에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눈과 입의 윤곽이 뚜렷했고 머리도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었는데 콧등이 왼쪽으로 휘어 있어 구겨져 보이는 얼굴이었다. 남자는 빈방과 d를 천천히 둘러본 뒤 자신을 집주인의 사위라고 밝히며, 있는데 왜 없는 척을 하느냐고 물었다. 월세가 상당히 밀렸고, 대답도 없어 사람이 없는 줄 알았다고 그는 말했다. d는 떡을 기다렸다. 그리고 김귀자의 수정과를. 남자는 두가지 중에 어느 것도 내놓지 않고 창 너머로 d를 내려다보았는데 김귀자 노인이 호스피스 병원으로 들어갔다고, 이제 합법적으로 다량의 모르핀을 투여받고 편안한 꿈에 잠겨 남은 인생을 무통하게 죽어갈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남자의 심상하고 무심한 눈에서 d는 그것을 다 알게 되었다. d가 무언가를 말하려는 순간 김귀자의 사위가 무릎을 짚으며 일어났다. 위쪽 창틀에 가려 이마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 방이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은 다음에 d가 대답하지 않자 이 방은 원래 이러했느냐고 물었다.

원래?

그러니까…… 본래 이러했느냐고.

d는 남자의 턱을 올려다보다가 이렇게 답했다. 그래요 진짜 그렇다 당신의 말씀 그대로, 이 방은 본래 이러했습니다.

 

d가 문을 열고 처음으로 들은 것은 모터 소리였다. 여전히 여름, 폭염주의보가 발령된 한낮이었고, 에어컨디셔너 실외기들이 윙윙거리고 징징거리며 곳곳에서 대기를 달구고 있었다. d는 걸어서 골목을 벗어났다. 콧속은 바싹 말랐고 옷이 헐겁게 여겨졌으며 실제로도 헐거웠지만, 발은 차갑고 걸음은 가벼웠다. 양지쪽에서 성큼성큼 걸었다. 거리가 뜨거웠고 그게 d의 마음에 들었다. 모든 것이 뜨거워 사물의 온도가 제대로 감각되지 않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걸을 때마다 넓적다리와 종아리와 배에 감기는 옷자락들, 신발, 그러한 사물의 온도가 그보다 뜨거운 대기에 훌륭하게 잠겨 있는 것이. 여름은 좋구나, 모든 것이 더 대기에 잠겼으면 좋겠다, 세계는 이 뜨거운 것에 내내 있는 것이 좋겠다고 d는 생각했다. 햇볕이 내리쬐는 거리를 겨울옷을 입고 걸었다. 며칠을 입고 지냈는지 모를 스웨터와 구겨진 면바지 차림에 홀쭉한 뺨은 성글게 자란 수염으로 덮여 있었고 가슴엔 며칠 전 새벽에 토할 때 묻은 자국이 길게 남아 있었다. 머리와 겨드랑이와 사타구니는 오랫동안 씻지 않아 냄새를 풍겼다. 그의 곁을 지나는 사람들이 짐승의 냄새를 맡고 얼굴을 찡그렸다. d는 아랑곳 않고 눈을 반짝였다. 한낮을 처음 맞은 것처럼 고개를 치켜들었다. d는 거의 기뻤다. 오랜만의 직립과 보행이라는 것을, 뚜렷하게 감각하면서 직진했다. 다리가 몹시 가벼웠다. 관절들이 매끄럽게 돌아가는 얇은 부속품들로 만들어진 것처럼 빠르고 가볍게 움직였다. 그러나 이내 혼란이 밀려왔다. 걷는 속도가 너무 빨라 감각이 뒤처졌다. 직진을 하는데도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 같았고 너무 빠르게 돌아가는 환등기처럼…… 거리의 풍경들이 색색으로 뒤섞인 채 밀려갔다가 되돌아오는 바람에 어느 것도 누구도, 결국엔 아무것도 빤히 바라볼 수 없었다. 발과 무릎이 뻣뻣해지고 마침내 통증으로 멈출 수밖에 없었을 때, 그때 d는 멈춰 섰다. 여기가 어디인가 어디쯤 왔는가를 생각해보지도 못할 정도로 지쳐 그대로 서 있었다. 정류장에서 종점행 6623번 지선 버스가 가스를 내뿜으며 출발했다. d의 발 앞에는 누군가 떨어뜨린 동전이 동그랗고 납작하게 바닥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것을 골똘하게 내려다보며 d는 바깥인데 조금도 바깥으로 여겨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방에 틀어박혔다가 스스로 문을 열고 나왔으나 여기는 여전히, 어딘가의 안쪽이고, 작은 주머니에서 조금 덜 작은 주머니로 이동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기가 놀랍도록 친밀하고도 구태의연했다. 그리고…… 그렇다 당신의 말씀 그대로, 이 방은 본래 이러했다.

d는 그동안 자신이 무언가를 잃었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세계가 변했다고 믿었다. 그런데 아니야. 본래 상태로 돌아왔을 뿐이라고 이제 생각했다. dd가 예외였다. dd가 세계에, d의 세계에 존재했던 시기가 d의 인생에서 예외. 따라서 나는 변한 것이 아니고 본래로 돌아왔다…… d는 벌어져 있던 입을 다물었다. 차가우면서 뜨거운 금속 창처럼 양쪽 귀를 꿰뚫는 것이 있었다. d는 그간의 흔적들이 멀고도 긴 궤적을 그린 끝에 자신에게 돌아왔음을 느꼈다. 세계는 잡음으로 가득했다.

 

 

3

 

d는 김귀자의 사위에게 밀린 집세를 지불하고 B02호를 나왔다. 강서구 방화동 580번지에 새로 방을 얻어서 여섯달치를 선불로 계산했다. 침대와 책상이 딸렸고 창문과 보증금은 없이, 월세로 삼십팔만원을 지불해야 하는 방이었다. 전에 머물던 사람의 벽지와 책상과 담요와 베개가 별도의 세탁이나 청소 없이 d의 몫이 되었다. 베개는 축축한 채로 얼룩졌고 담요엔 백발 몇가닥이 붙어 있었으며 책상 구석엔 굳은 빵 부스러기들이 흩어져 있었다. 삼성고시원 15번 방이었다. 그 방의 맞은편에는 그 방과 다를 게 없는 방이 있었고 좁은 복도를 따라 비슷한 방이 수십개가 있었는데 복도는 여러개의 모퉁이로 복잡하게 갈라져 미로 같았다. 바닥에 깔린 장판엔 먼지가 눌어붙었고 현관에는 공중목욕탕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거대한 신발장이 있었는데 빈자리가 없었다. 벽에 걸린 거울 앞엔 사슬로 묶인 소화기와 공중전화기가 있었다. 골동품점에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그 사물은 장식이 아닌 실용품으로, 전화카드는 사용할 수 없었고, 10원이나 50원이나 100원 동전을 넣고 사용할 수 있었다. 동전 떨어지는 속도가 너무 빨라 전화를 걸려는 사람들은 한주먹 가득 동전을 쥐고 있어야 했다. d의 방이 거기서 가까웠으므로 d는 자신의 방에서, 공중전화기로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 통화하는 중국인이나 한국인의 말을 들었다. 상대의 말이 들리지 않았으므로 일방적인 발성으로 들리는 말들이었다. 돈을 보냈다거나 돈을 더 보내달라거나. 건강을 묻거나 어딘가 좀 아프다거나. 보고 싶다거나 아주 죽여버릴 것이라거나. d는 매트리스에 눕거나 앉아 그 공동 공간의 잡음을 들었다. 동전 떨어지는 소리, 발을 끌며 걷는 소리, 한숨 소리, 누군가 문을 닫고, 코를 풀거나 기침을 하고, 맥락 없이 욕을 내뱉고, 면을 먹는 소리. 그 많은 사람이 그 정도의 밀도로 모였는데도 대화는 없었고 두 사람 이상 마주치는 일도 드물었다. 고요해서, 그들의 기척이 더욱 잘 들렸다. d는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장기간의 무단결근으로 이미 해고된 상태였으므로 d는 종로구 장사동 세운상가에 새로운 일자리를 얻었다. 상가에서 택배를 수집하고 상차하는 일이었다. 출근시간은 점심 무렵이었는데 매일 일찍 고시원을 나섰다. 편의점에서 도시락과 물 한 병을 사고,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있는 구민회관까지 걸어가서 수영장을 내려다보며 도시락을 먹었다. 대개는 불고기소스에 졸인 감자와 당근으로 덮인 덮밥을, 나무젓가락으로 천천히 떠먹으며, 수영하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오전 일곱시에서 일곱시 반 사이에. 구민회관에 딸린 수영장은 천장에서 바닥까지 3층 규모로, 회관의 중심이 되는 시설이었다. 물이 고인 푸른 수조는 지하 1층에 있었는데 너무 거대해 벽이나 다름없는 남쪽 창으로 종일 해가 들어 수면이 반짝거렸다. 여덟개의 레인이 그 창을 통해 내려다보였다. d는 접영으로 레인을 따라 나아가는 사람들의 머리와 팔이 조용히 물 밖으로 솟구쳤다가 다시 물속으로 잠기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이제 막 도착한 사람들이 등을 웅크리며 물로 들어갔다. 막 물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젖은 손으로 젖은 입을 닦았다. 그 입이 느낄 맛. 짜고 미지근한 물과 염소계 살균제. d도 그 맛을 알았다. 염소계 살균제가 섞인 짜고 미지근한 물의 맛.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매일 수영하는 사람들. 안전요원이 부는 호각소리가 창을 관통해 들려왔다. 이런 광경들이 유리 위로 흘러내리는 물처럼 어디로도 스며들지 못한 채 d의 표면에서 미끄러졌다. 그 맛…… 그 맛은 아무것도 아니었고 그냥 아무것도 아니었다. d는 밥을 먹고 물을 마시는 동안 바라볼 것이 필요해 그곳을 찾았고 보고 있는 것에 관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아무런, 인상을 주는 것도 동요하게 만드는 것도 없었다. 그 투명하고 깔끔한 공간이 눈앞에서 즉시 반으로 접힌다고 해도 d에게는 놀라울 것이 없었다. 밥을 먹고 물을 마셨다. 기계적으로 턱을 움직이다가 삼키면 삼킨 것이 명치에 쌓였다.

dd는 아주 오래전에 d와 자신이 함께 낙뢰 자국을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같은 교실에서 공부를 했던 어린 시절에, 방과 후 교실에서. 낙뢰가 교실 바닥에 떨어졌고 그 자국을 함께 들여다보았다는 것이다. d에게는 없는 기억이었다.

그냥 단순하게, 그랬냐고 묻는 정도로만 들은 그 이야기를 d는 이제 와 돌이켰다. 자기가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면서 d는 그 이야기를 몇번이고 생각하고, 그와 유사한 상황에서 누군가와 말을 나눈 기억이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누군가와 낙뢰가 떨어진 자국을 들여다보았던 기억, 그렇지 그 기억이었다. 그러나 그게 누구였는지는 처음에 분명하지 않았고 풀 냄새, 접착제 냄새와도 유사한 땀 냄새를, 약간은 시큼한 냄새를 맡았다고 d는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 그 기억이 틀림없이 d에게 있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이따금 꿈에서 보았다. ddd. 두 아이가 작은 등을 웅크리고 앉아 교실 바닥을 골똘히 내려다보고 있는 뒷모습을. 그것을 자신이 바라보는 꿈이었다. dd는 그때에도 몹시 작아서 팔을 내밀어 안아올리면 그대로 들어올릴 수 있을 것 같고, 그렇게만 한다면 dd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 dd를 살릴 수 있다고 d는 꿈에서 생각했는데 그런데 그 꿈에서, d는 팔이 없었으므로 그것을 하지 못했다. 매번 그 꿈에서 깨어날 때 d는 자신이 듣곤 하는 소리, 세계의 잡음이 거센 물살처럼 그 뒷모습들을 쓸어버리는 광경을 목격했다. 속수무책이란 다름 아닌 그것이었다. d의 꿈은 엄청난 고함으로 끝났고, 그것이 끝나자마자 현실이 엄청난 고요 속에서 이어졌다.

매일 출근길에 d는 대형 광고판을 보았다. 그 길에 그게 있었다. 여배우의 상반신이 거대하게 출력된 화장품 브랜드 광고 사진이었다. 여배우의 코끝에 갈색 점이 있었는데 파우더를 발라 약간 흐릿해 보였다. d는 그걸 볼 때마다 dd의 손에 있던 점을 생각했다. dd는 깨끗한 손에 대해 약간 강박이 있었는데 특히 거스러미를 참지 못했고 그게 생기면 이로 물어뜯거나 손으로 뜯어냈다. 한번은 깊은 살까지 뜯어내는 바람에 출혈이 생겼다. 오른손 약지, 손톱 바로 위쪽에. 그 상처는 다갈색 흔적으로 남았다. 피부 아래 고인 피가 어디로도 흡수되지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 작은 점이 되었다. 물방울이나 아주 작은 빈디처럼 생긴 다갈색 점. 그렇게 작은 상처도 흔적을 남기는데 dd의 죽음은…… 하고 d는 생각했다. 그 죽음은 내게 조그만 점도 남기지 않았다. 다시 말해 이 삶이 내게, 알량한 점 하나 남겨주지 않았어.

한번은 d602번 버스로 출근하는 길에 버스기사가 몇차례 곡예하듯 차선을 넘어가며 운전했고 그때마다 사람들의 몸이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출렁거렸다. 버스가 다음 정류장으로 다가가려고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을 때 d는 운전석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똑바로 운전하라고 말했다. 뭐라고? 뭐라고요? 똑바로 운전하시라고요 제대로 하시라고. 네? 뭐라고요? 똑바로…… 똑바로 운전하라고 씹새끼야. 아 손님 뒤로 가 계세요 위험하니까 뒤로 가 계시라고요. d는 그가 몹시 뻔뻔하다고 생각했고 한사코 못 들은 척하는 그가 역겨워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나 자기 자리로 돌아가려고 뒤로 돌았을 때 d는 버스기사보다도 자신을 역겨워하고 경계하며 쳐다보는 탑승객들의 얼굴을 보았고 때마침 열린 문을 통해 목적지도 아닌 정류장에 내렸다. 한강과 안양천 사이 뚝방길이었다. 주말에나 한강변으로 내려가려는 소풍객이 더러 있을 뿐 평소엔 탑승객도 하차객도 드문 정류장이었다. 귀찮은 짐짝을 털어내듯 버스가 퉁탕거리며 d를 두고 출발했다. d는 증오에 몸을 떨면서 버스가 간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고 미친 듯 혼자 떠들다가 이윽고 잠잠해졌다. 강바람이 d의 얼굴을 말렸다. 환멸과 혐오. 그것이 d에게 가능했다. 왜 안 되는가. d는 그뒤로 가끔 걸어서 강을 건넜다. 가능한 감정을 품고 살았다.

d는 세운상가에서 수많은 물건들을 다루었다. 그곳은 남자들이 피우는 담배와 구정물과 사물의 세계였다. 상인들 말고 오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빈 가게도 많아 상가 전체가 거의 문을 닫기 직전, 같은 분위기였는데 밤이 되면 집하장으로 쓰이는 1층 주차장에 엄청난 양의 화물이 모였다. d가 하는 일은 그 화물들을 수집하고 분류하고 트럭에 상차하는 일이었다. d는 점심 무렵부터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송장 뭉치를 들고 다니며 사업장마다 방문해 부칠 짐이 있느냐고 물었다. 없다고 하면 다음 사업장으로 넘어갔고 있다는 대답을 들으면 즉시 송장을 써서 박스로 포장된 짐에 붙이고 사업주에게 원본을 떼어준 뒤 짐을 1층으로 가져갔다. 사물들은 여전히 꺼림칙하게 미지근했으나 너무 바쁘고 몸이 고되어 견딜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단 한대였고 택배나 음식을 배달하는 사람들이 그걸 타고 오르내리는 것을 수위들이 몹시 싫어했으므로 그들에게 욕을 먹고 다퉈가며 d1층부터 8층까지 오르내리기를 반복했다. 세운상가와 그 일대의 부품상 골목에서 나오는 택배상자들을 전담했다. 근무시간에 포함되지 않는 분류 작업부터 상차를 마칠 때까지, 매일 열시간 이상 일하는 중노동이었다. 퇴근할 무렵엔 배가 고파 종로에서 국수를 사 먹었고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각에 15번 방으로 돌아왔다. 방을 나섰을 때와 마찬가지로 빈손이었다. 짧은 잠을 자고 나면 아침을 먹으러 나갔다가 바로 출근했다. d는 혼자 지냈고 누구와도 긴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아무것도 기억에 남겨두지 않았고 하루는 그날의 수면으로 끝을 냈다. 그것이 d의 일상이고 패턴이 되었다.

 

어느 밤, d가 상가 1층에서 송장을 읽어가며 수집된 택배들을 상차하고 있을 때 누군가 등을 꾹 누른 뒤 말했다.

나 알지?

 

 

4

 

여소녀는 1946년에 여덟 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누나가 둘이었고 아래로 동생이 다섯이었다. 아버지 여중건은 막내가 태어난 해에 폐암으로 죽었고 어머니 노재순은 부족한 생계비를 보충하려고 서커스 단원들에게 숙박을 제공했다가 뜻밖의 재능을 발견하고 수제비를 팔아 여덟 남매를 키웠다. 옛날엔 눌어(訥語)리, 일제시대엔 송정리, 63년 이후로는 공항동이라고 이름 붙여진 곳에 그 집이 있었다.

여소녀는 성장기 내내 이름이 소녀라고 놀리거나 시비를 거는 동급생이며 선배를 상대하느라고 맷집을 키웠다. 땅딸막한 몸에 짧은 목 위로 머리는 단단했고 악력이 셌는데 여소녀 본인이 가장 자신있어하는 부분은 이였다. 그는 그걸로 파이프에 박힌 못도 뽑을 수 있다고 장담했고 사람들 앞에서나 혼자 있을 때, 과시하고 싶거나 심심하거나 장도리를 가지러 가기가 귀찮다는 등의 이유로, 자주 이를 사용해 못을 뽑았다.

그는 전자고등학교에서 기술을 배워 공항동에 있던 전파상에 견습공으로 취업했다. 눈썰미와 솜씨가 있어 고장을 잘 고쳤고 짧은 견습생활을 마친 뒤 누나들의 도움을 받아 청계천에 조그만 수리실을 열었다. 라디오, 텔레비전, 선풍기와 오디오, 가전제품이라면 무엇이든 받았지만 어느 겨울에 전자레인지를 수리하다가 팔뚝에 화상을 입은 뒤로는 스피커와 앰프만 받아 수리했다. 1967년은 세운상가의 일부인 가동과 나동이 완공된 해이자 여소녀가 청계천에 수리실을 연 해였다. 여소녀는 상가의 개관식이 있던 날을 기억했다. 박정희와 육영수가 양복을 예쁘게 입은 박지만 어린이를 데리고 상가 2층 양품점을 방문해 어린이용 바지를 고르고 있을 때 여소녀는 그것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상가를 둘러싼 인파 속에 섞여 이 꿈의 건축물을, 깎아지른 듯한 옥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목을 뒤로 젖혀가며 바라본 세운상가 가동은 4층까지가 일반상가, 5층부터는 중앙 홀이 딸린 주거공간이었다. 타일을 바른 부엌과 온수 공급 시스템과 벽에서 내려오는 침대가 딸린 대한민국 최초의 신식 데파트맨션. 여소녀는 상가의 번영과 동시에 진행된 주거공간의 쇠퇴를 바로 곁에서 지켜보다가, 70년대 후반, 턱없이 부족한 주차공간과 불량한 주변 환경을 이유로 아파트 입주민들이 이 신식 주거공간에서 빠져나간 시기에 5층으로 파고들었다. 여소녀는 이후 삼십육년 동안 아래층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90년대 이후 상권이 점차로 쇠락해 손님도 줄고 상인도 줄어 아래층에 빈 가게가 늘고 임대료가 더 저렴해졌는데도 5층 임대를 고집했는데 왜냐하면 4층까지는 자정이 넘으면 방화문이 자물쇠로 잠겼기 때문이었다. 늦게 출근하고 새벽에 퇴근하는 그에게는 늘 열려 있는 문이 필요했다. 여소녀는 564호에서 십년 일하다가 568호로 이전했고 수년 뒤 564호로 돌아갔다. 차양이 없어 비가 오면 창을 닫아도 빗물이 들이치고 구멍 뚫린 천장으로 이따금 쥐똥이 떨어지곤 했던 564호는 깨끗하게 수리되어 있었다. 차양도 달렸고 페인트칠도 예쁘게 되었고. 여소녀는 매우 만족하며 그 공간을 낡은 앰프들로 채우고, 늘 하던 대로 알전구 불빛 속으로 머리를 내밀고 앰프를 수리했다.

그런데 최근에 그는 한가지 질문을 받았다.

그의 딸이 그에게 물었다.

그 사람들 다 어디 갔어?

 

그러니까…… 세운상가에 사람이 많았잖아. 아빠가 알고 지낸 사람들. 아빠만큼 오랫동안 거기서 장사한 사람들. 내가 어렸을 때 엄마를 따라 수리실에 가 있으면 빵빠레나 감자칩이나 양갱을 사주던 아저씨들, 아줌마들. 그들이 지금은 상가에 거의 남아 있지 않은데 다 어디로 갔느냐고 딸은 묻고 있었다. 어디 갔느냐고? 여소녀는 내심 놀라며 답했다. 아니 글쎄…… 갔지. 다 갔지.

어디로?

어디 간 자도 있고 아예 가버린 자도 있고.

여소녀는 그 이야기를 길게 하고 싶지 않아 심드렁하게 대답했고 딸도 더는 캐묻지 않았다. 그러나 그뒤에 여소녀는 그 질문을 곱씹었다. 책상 앞에서 드라이버를 쥔 채로 자주 생각에 잠겼고 뭔가를 생각하다가 포기하고는 했으며 성가신 벌레를 쫓아내듯 드라이버로 머리 위쪽 허공을 휘저었다. 그리고 다시 드라이버를 쥔 채 생각에 잠겼다.

여소녀는 공항동에서 방화동으로, 방화동에서 다시 공항동으로 이사를 다녔고 강서구를 벗어난 곳에 집을 얻은 적이 없었으며 평생 서쪽에서 북쪽으로, 북쪽에서 서쪽으로, 겹쳐지는 동선을 그리며 살았다. 가족을 제외하고 여태 그가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세운상가에서 만난 사람들이었는데 그렇게 알고 지낸 사람 중에 지금은 그 장소에 남은 자가 별로 없었고 여소녀는 이제 와 그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영상 작업을 하는 유명사 유씨와 중고 오디오상 백선생, 도란스 이씨, 케이블 김씨, 5층 은성슈퍼 아줌마 김은성. 그 사람들이 여소녀처럼, 남은 사람들이었다. 그나마 김은성 여사는 5층을 오가는 사람 자체가 드물어 다른 사람에게 가게를 넘기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바로 지난주에 그녀가 피로한 얼굴을 하고 수리실로 가져와 보여준 외상 장부에는 수리실과의 첫 거래 날짜가 1996년으로 적혀 있었다. 컵라면 한개, 박카스 한개, 디스 한갑. 김은성 여사와 여소녀는 장부를 한장씩 넘겨가며 아직 갚지 않은 목록들을 확인했고 여소녀가 그녀에게 878백원을 현금으로 지불했다. 그때 김은성 여사가 떼준 8백원이 여태 여소녀의 작업대에 놓여 있었다.

몇년 전만 해도 언제든 수리실 밖으로 나가면 상가 어딘가에 갈 곳이 있었고 방문할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여소녀는 생각했다. 인사도 없이 쓱 들어가서 그거 달라고 하면 그거를 알아듣고 틀림없이 그거를 줄 수 있었던 사람들, 사기꾼 같은 놈들, 진짜 사기꾼들, 그래도 내가 보기에 썩 좋았던 사람들과 다음 생에 또 볼까 내내 재수없어하다가 낯익어버린 인간들…… 오디오 팔던 사람들, 부품상들, 도란스 기술자, 스피커 제조업자, 진짜와 똑같이 로고 라벨을 만드는 기술이 있던 노인들, 다른 기술자들. 그와 같은 공간에서 한 시절을 겪은 사람들. 그들이 다 어디 갔느냐고? 여소녀는 그 질문을 돌이킬 때마다 그들의 부재와 자신의 잔여와 이제 닥쳐올 자신의 부재를 한꺼번에 생각했다. 그렇게 만드는 질문이었다. 여소녀는 머쓱하게 외로워졌다. 내내 고장난 기계 속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고 보니 그의 수리실은 세상 적막한 곳에 당도해 있었다. 인기척 없는 황무지 기슭에.

여소녀는 저릿한 어금니를 혀로 밀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의자가 삐걱거리며 뒤로 기울어졌다. 오실로스코프 속에선 가느다란 녹색 파동이 자극을 기다리며 수평으로 흐르고 있었고 무질서가 질서인 작업대 위엔 오전에 여소녀가 껍데기를 벗겨둔 마란츠(Marantz) 2325가 먼지 쌓인 속을 드러낸 채 놓여 있었다. 납을 누를 때 사용하는 인두를 올려둔 쇠접시는 되는대로 담배를 눌러 끈 자국들로 어수선했다. 동전과 나사와 스프링과 검은색 혹은 은백색 쇳가루와 IC칩, 그런 것들이 한 움큼 집어 뿌린 것처럼 사물들 틈에 흩어지고 쌓여 있었다. 여소녀는 이제 이로 못을 뽑지 않았다.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자신이 가진 것 중에 가장 튼튼하다고 생각했던 이들은 벌써 여러해 전부터 부서지고 있었다. 처음 앞니에 푸르스름한 가로줄이 생긴 것이 팔년 전이었다. 썩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눈에 보이기 시작한 균열이었다. 한두개가 아니었다. 앞니들이 그 해묵은 균열을 따라 썩어가다가 뿌리를 남긴 채 뚝 떨어졌고 어금니 몇개는 그가 밥을 먹고 있을 때 석고 덩어리처럼 입속에서 부서졌다. 여소녀는 어금니가 있던 자리에 임플란트를 세개 박았는데 그걸로는 턱없이 부족했지만 잇몸뼈가 거의 없어 제대로 나사를 박을 수 있는 자리가 세군데뿐이었다. 무슨 딱딱한 거품 같은 것으로 잇몸뼈 대신 잇몸 속을 채우고 나사를 박는 방법도 있다고 치과 의사는 말했지만 여소녀는 왠지 미심쩍었고 비용도 부담스러워 몹시 툴툴거리며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 결과 부실하게 남은 이 몇개와 임플란트 어금니 세개로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다. 씹는 게 시원찮아 먹는 게 재미없었다. 탈부착이 가능한 틀니를 사용하면 좀더 흡족하게 씹을 수 있겠지만 틀니를 혐오하는 여소녀에게 죽는 날까지 그것을 사용할 일은 없었다.

여소녀는 마란츠 속을 비추고 있는 램프를 껐다. 깍지 낀 손으로 배를 누른 채 생각했다. 자 생각을 잘해보자 다들 말이야 다들…… 다 그저 그렇게 가버린 것은 아니지. 잘된 놈들은 진작 여길 벗어나서 자가용 끌고 주말엔 골프를 치러 다닌단 말이야. 그리고 나머지는. 내가 나머지지. 나는 남았어. 내가 지금도 이 건물을 내 손바닥 손금처럼 꿰고 있는데. 이제 이 큰 건물 안에서 나를 아는 인간이 열도 남지 않았다. 이런 경우를 뭐라고 하냐 음…… 여소녀는 공허해지려는 마음을 누르려고 얼굴을 찡그렸고 벌떡 일어나서 비좁은 통로를 왔다 갔다 하다가 전날과 전전날에 받은 택배상자들 위로 허리를 구부리고 송장을 하나씩 들여다보았다. 전주에서 강하연이 보내온 피셔(The Fisher) 250, 성북구 킴스오디오에서 보낸 알텍(Altec) 모노모노…… 그밖에도 작은 상자가 하나 있었는데 거기 붙은 송장을 읽다가 여소녀는 그게 잘못 배달된 물건임을 알았다. 청계천 건너 대림상가로 가야 할 상자였다. 사이즈에 비해 매우 묵직한 것으로 보아 트랜스인 듯했다. 여소녀는 커다란 주사위를 다루듯 이리저리 뒤집어보다가 상자를 쥐고 수리실을 나섰다.

 

오후 여덟시 반, 평범한 겨울 저녁이었다. 여소녀는 지게꾼들이 퇴근하면서 빈 지게를 세워둔 계단참을 등지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해 지기 전까지 진눈깨비가 내렸고 계단과 바닥은 젖은 발자국으로 질퍽하게 젖어 있었다. 상가는 이제 거의 문을 닫은 시각이었다. 입김이 하얗게 올라왔다. 여소녀는 점퍼를 입고 나올 걸 그랬다고 생각하며 1층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주차장으로 진입하는 화물차량들의 엔진소리가 주차장을 덮고 있는 천장에 부딪혀 우레처럼 울렸다. 3층 보행 데크의 바닥이기도 한 천장은 주차장을 드나드는 차량들의 배기가스로 새까맣게 그을어 있었다.

담배꽁초와 송장에서 잘라낸 종잇조각이 흩어진 바닥에 상자들이 쌓여 있었다. 오늘밤 상가에서 나갈 화물들이 전부 거기에 모여 있었다. 상가가 문을 닫을 시각부터는 거기가 화물들의 집하장이었다. 경동, 로젠, 옐로우, 현대, KGB, 그밖의 소규모 배송업체들이 화물을 분류하고 상차하는 집하장으로 주차장을 사용했다. 보통은 송장을 관리하는 사무장이 화물들을 지키는 동안 다른 직원들이 상가를 돌아다니며 화물을 가져왔다. 규모가 큰 택배회사는 저녁이 되면 길쭉한 궤짝처럼 생긴 컨테이너를 열어두고 화물을 받았다. 한 사람이 들어가 앉을 만한 공간에 책상 하나와 출력기가 놓였고 광대뼈가 솟은 여자아이가 그 안에 앉아서 무뚝뚝하게 배송비를 계산하고 송장을 출력했다. 화물들은 점심때부터 조금씩 모이기 시작해 저녁 무렵이 되면 어마어마한 양으로 쌓였다. 매일 그랬다. 여소녀는 경동택배 구역을 지나 종묘 쪽으로 걸으면서 괴이하다고 생각했다. 이 많은 화물이 이 사람 적은 상가에 이렇게 쌓일 수가 있나. 오가는 사람도 없는데 이걸 다 누가 샀나. 귀신들이 샀나.

상가는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변했고 그 변화의 방향은 쇠락이었다. 여소녀는 셔터를 내린 오디오 가게들 앞을 지나면서 이 가게들이 변화를 가장 뚜렷하게 느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전엔 상가를 어슬렁거리거나 일부러 와서 그거 좀 들어보자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듣고 가고 다음에 오고 그러다 하나씩 사가고. 지나가다가. 이제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았다. 오가는 사람 자체가 드물었으니까. 온라인에는 있었다. 조명기구, 전선, 전기난로, 전기장판, 선풍기, 빗자루, 콘센트 같은 생활용품을 사는 사람들. 그들이 매일 밤 집하장에 엄청난 규모로 쌓이는 화물들의 구매자였고 여소녀에게는 이들이 귀신들이었다. 발자국 소리도 없고, 얼굴도 없는.

상가는 창고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인간은 남았고 그럴 수 없는 인간은 떠났다. 여소녀는 여태 남았지만 명백히 후자 쪽이었다. 거래는 활발하지만 사람은 드물고 빈 가게는 늘어가고. 이거 참 괴이하다…… 하고 여소녀는 생각했다. 팔리는 물건들이 쌓인 창고와, 그 창고의 관리자만 소수로 남은 곳. 종국에는 거대한 창고와 단 한명의 관리자만 남지 않을까. 여소녀는 그 스산한 광경을 상상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목에 소름이 돋고 몸이 떨렸는데 그게 그 터무니없는 상상 때문인지 추위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화물트럭이 경고음을 내며 여소녀 쪽으로 후진했다. 여소녀는 구시렁거리며 오줌 빛깔의 구정물이 고인 웅덩이를 뛰어넘었다. 로젠 구역으로 갔다. 상차 작업이 한창이었다. 점퍼도 입지 않은 사람들이 땀에 젖은 셔츠 바람에 두건이나 마스크로 턱과 입을 가린 채 화물들을 나르고 있었다. 여소녀는 그중에서 매일 수리실에 들르는 사람을 어렵지 않게 찾아냈고 김이 오르는 그 등을 향해 다가갔다. 이봐.

나 알지?

 

 

5

 

d는 그가 너무 바짝 서 있다고 생각했다. 네모난 머리와 움츠린 목, 찡그린 얼굴. 왼쪽과 오른쪽의 길이가 다른 눈썹엔 흰 눈썹이 섞여 있었다. 담배 냄새. 처음에 d는 영문을 몰랐고 조금 뒤엔 그가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추위로 파랗게 질린 미간은 잔뜩 구겨져 있었고 검은 눈으로 d의 눈을 쏘아보며 툴툴거리듯 말하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는 뭔가를 쥔 손을 앞으로 내밀었고 엉겁결에 d가 그것을 받아들자 등을 돌려 가버렸다. d는 붉은색 깅엄 셔츠에 바랜 갈색 조끼를 입은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왼손에 쥔 상자의 무게로 팔이 처졌다. d는 멍하게 서 있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조금 전 불시에 눌린 자리가 여태 눌려 있었다. 그 부분이 가려웠다. 너를 아느냐고?

모르는 사람이었다.

나 알지?

d는 그의 말에서 그 말을 간신히 알아들었다. 활자 같은 말이었다. 들었다기보다는 본 것 같은 말.

상차 작업으로 돌아가서도 d는 그 말을 생각했고 그뒤로도 두고두고 그 순간을 생각했다.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d는 그를 몰랐고 그를 알았다. 그가 d의 등을 눌러 성가신 감촉을 남긴 때만 해도 그를 몰랐는데 그가 자신을 아느냐고 묻는 순간 d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자신이 그 남자를 알고 있었다. 아뇨 내가 어떻게 당신을 알아? 즉시 그렇게 반문하려고 했는데 그 질문을 듣고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아는 얼굴이라는 것을 알았다. d가 그를 알았다.

어떻게?

d는 그 남자의 가게로 가는 길을 알았다. 청계천 방향에서 엘리베이터를 탈 때는 5층에서 종로 방향으로 홀을 가로질렀고 종로 쪽에서 계단으로 올라갈 때는 높은 천장이 딸린 5층 홀로 들어서자마자 우회전한 뒤 우중충한 현관으로 곧장 뛰어들면 거기가 564호였고 세개의 방 중에서 두번째 방을 그 남자가 사용하고 있었다. d는 눈을 감고도 그 길을 갈 수 있었다.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지난 칠개월 동안 하루에 두번, 그 방에 들렀으니까.

 

그와 같이, d는 송장 다발을 쥐고 김정엽의 가게 앞을 지나갔다. 땀 냄새가 났다. 종로 쪽 주차장에서 3층 보행 데크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 시계골목으로 진입하는 모퉁이에 그의 케이블 가게가 있었다. 가늘고 굵고 길고 짧은 전선들을 다발로 걸어놓은 비좁은 가게 안에서, 김정엽은 종일 오디오로 클래식 음악 방송을 틀어놓고 아령 운동을 하는 남자였다. 그는 늘 팔뚝 근육을 드러낸 민소매 셔츠를 입었고 틈날 때마다 땀이 날 때까지 아령을 들어올리고 내리기를 반복했다. 그의 오디오는 꽤 성능이 좋아서 음질이 매끄럽고 묵직했으며 종로에서 청계천까지 연결된 긴 주차장을 바흐나 드보르자크가 관통하는 공간으로 만들어놓았다. 김정엽은 매일 셔터를 내리기 전에 오디오를 껐는데 그때가 저녁 일곱시쯤이었다. 이 남자의 오디오가 꺼지고 음악이 끊기면 택배트럭이 도착할 시간이라는 것을 d는 알고 있었다. d는 시계골목으로 들어갔다. 제대로 보수된 적 없는 비좁고 어두운 골목은 지난 시절 사람들의 발길과 오가는 짐의 무게로 중앙이 우묵하게 꺼져 있었다. 하수구를 덮은 콘크리트 뚜껑은 70년대의 물건이었고 푸르스름하게 이끼로 덮여 있었다. d는 낡은 손목시계와 바랜 시곗줄이 놓인 유리 진열대를 몇개 지나 전구상인 금호사에 들렀다. 백발의 노인이 탁자 앞에서 전구에 발을 붙이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d는 그의 이름이 윤충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윤충길 노인은 종일 입구 근처에 놓인 비뚤어진 탁자 앞에서 작은 전구들의 외부 도입선을, 그의 표현에 따르면 발을, 늘이는 작업을 했다. 주문받은 대로 발 없는 전구에 발을 붙이고, 발 짧은 전구의 발을 늘이고. 얼마 전까지는 혼자 그 작업을 했는데 어느날 d가 화물을 가져가려고 들러보니 윤충길 노인이 조수를 고용해 그만큼 늙은 노인이 한명 더 있었다. 이제 금호사에서는 백발의 노인 둘이 나란히 앉아 전구를 만들었고 d가 가져가야 하는 화물들은 그들의 발치에, 책상 곁에 쌓여 있었다. d는 손수레에 금호사의 화물을 싣고 집하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부품상 명인유통에 들렀다. 대부분 문을 닫거나 문을 닫기 직전인 가게들 틈에서 거의 유일하게 거래가 활발한 가게로, 자세가 꼿꼿하고 늘 비웃는 것처럼 입을 다물고 있는 중년 여성이 그 가게의 주인이었다. 그녀는 전자부품인 트랜지스터나 IC칩을 팔았는데 지금은 생산되지 않는 부품을 대체할 수 있는 부품을 독보적으로 풍부하게 알고 있었다. d는 그녀의 이름이 강숙진이고 그녀가 자기 이름의 마지막 받침인 ㄴ을 힘주어 눌러쓰는 필기 습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유리 진열장 위에 놓인 부품들을 작은 지퍼백에 나눠 담으면서 스피커폰으로 어떤 남자와 통화하고 있었다. 티아이피사십이 있어? 어 있어. 아줌마 근데 왜 반말이야. 너는 왜 반말인데? 그녀는 미련 없이 버튼을 눌러 통화를 마치며, 별꼴이야 그렇지?라고 하는 것처럼 눈을 크게 떠 보였다. 그와 같이, d는 중고 오디오상인 백산오디오에서 구둣방 아주머니와 마주쳤다. 그녀가 백산오디오의 사장인 백산의 구두를 두고 흥정하고 있었다. 어디 보자 사장님 구두가 많이 더러우니 좀 닦아야겠다고 그녀가 말했고 백산은 바로 지난주에 닦지 않았느냐고 대꾸했다. 아니 일주일이나 됐어? 사장님은 양치질을 일주일에 한번만 해요? 이는 매일 닦으면서 구두는 왜 한번만 닦아…… 그녀는 손수레에 실린 바구니에 슬리퍼를 잔뜩 싣고 다니면서 구두를 가져가고 슬리퍼를 내줬다. 그녀의 바구니엔 벌써 구두가 여러 켤레 실려 있었고 너덜너덜하게 닳은 슬리퍼들이 발바닥을 맞댄 채 바구니에 꽂혀 있었다. d는 그녀의 이름을 몰랐지만, 택배를 이용하지 않았으니까, 그녀의 얼굴을 알고 있었고 그녀가 구두를 모아 가져가는 장소인 부부구둣방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백산오디오에서는 오늘 나가는 택배가 없었다. 그뒤에 d는 그곳으로 갔다. d가 매일 가는 곳. 아는 곳. 알고 있는 얼굴과 목소리들이 있는, 그중의 누군가가 불시에 등을 꾹 찌르며 나를 알지 않느냐고 물으면 내가 어떻게 너를 아느냐고 반문할 수는 없는 사람들이 있는, 낡고 지저분하고 기묘하고 수많은 그곳들.

조명상가에서 가전상가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d는 지게꾼과 마주쳤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지게와. 스피커 두개와 마분지 상자를 실은 지게가 천천히 좌우로 흔들리며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d는 지나갈 공간을 찾지 못해 그뒤를 따라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지게에 실린 짐들은 작은 산처럼 높고 무거워 보였다. 아마도 그날의 마지막 짐일 것이다. 뒤쪽에서는 지게꾼의 얼굴이나 상체를 볼 수 없었고 지게 아래쪽으로, 계단을 딛는 그의 발과 종아리가 보였다. 계단 경사면과 거의 평행이 되도록 그는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그는 그 짐을 목적지에 내리고 나면 가동 5층 층계참으로 돌아가 자물쇠로 잠긴 자기 몫의 궤짝을 열 것이다. 그 속에 그가 가방과 옷을 보관한다는 것을 d는 알고 있었다. 그의 궤짝 곁에는 다른 지게꾼들의 궤짝이 있었다. 그들은 그 궤짝 곁에서 가림막 한장 없이 옷을 벗고 입었고 d는 오가며 몇번이나 그 광경을 보았다. 그들이 노동으로 불그스름해진 등이나 다리를 드러내며 탈의하는 광경을. 그런 뒤에 그들은 빈 지게를 궤짝 곁에 세워두고 퇴근했다. d는 지게꾼들이 짐을 지고 계단을 올라갈 때는 정방향으로 올라가고 내려갈 때는 균형을 잃고 넘어지더라도 짐에 깔리지 않도록 뒷걸음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주차장까지 등짐으로 물건을 옮겨주고 오천원권 지폐를 받는 것도 보았다.

그와 같이.

 

d가 그들을 알았다.

그래서 어쩌라고. d는 헐거워진 모자를 고쳐 쓰며 얼굴을 찌푸렸다. 너를 아느냐고? 이 장소를 벗어난 곳에서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누군가 등을 두드리며 자신을 아느냐고 물으면, d는 그 얼굴을 몰라볼 것이고 모른다고 대답할 것이다. 모르니까. 모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으며 알 이유도 없으니까. d가 혐오하는 다른 많은 사람들같이, 그들도 같을 것이다. 똑같이 혐오스러울 것이다. 혀를 내밀어 음식을 받아먹고 노골적으로 바라보고 미안하다고 말해야 할 때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고 빤히 쳐다보는 사람들, 치고 다니고, 자신이 지닌 사물로 사람을 찌르고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둔감하며, 알고도 굳이 개의치 않고, 비대한 자아와 형편없는 자존감이 뒤죽박죽 섞인 인격을 아무에게나 들이대고, 남의 얼굴을 향해 핸드폰을 처박을 것처럼 내민 채 이미 더러워진 액정 화면을 문지르는 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타인. 거짓말로 살아가는 사람들.

d3층 보행 데크와 지상을 잇는 계단에 걸터앉았다. 장갑을 벗고 사물과의 마찰로 뜨거워진 손을 식혔다. 해가 지고 있었다. 김정엽의 클래식은 아직 끊기지 않았다. 중성적인 음색을 가진 오페라 가수가 노래하고 있었다. d가 제목을 모르고 화음 한 부분을 아는 노래였다. 계단 난간에 균열이 보였다. 세로로 길고 굵게 벌어져서 그 틈으로 멀리 떨어진 가게의 간판을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 망치질 한번…… 발길질 몇번이면 떨어져나갈 것 같았다. d는 상가 사람들이 이 건물의 무지막지한 견고함에 관해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게 말이지 망치로 벽을 때리면 벽이 상하지 않고 망치가 상한다…… 이것을 설계한 놈들이 일본에서 건축을 배운 놈들이며 당대 최고의 기술과 최고의 자재가 엄청난 물량으로 동원되었으므로 튼튼할 수밖에 없고 90년대에 허물자는 시도도 몇번 있었으나 건물이 너무 단단해 부수는 것보다 그대로 두는 것이 돈이 덜 든다는 계산이 나오는 바람에 그대로 있게 되었을 정도로, 견고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d는 상가를 돌아다니는 동안 곳곳에서 균열을 보았다. 당장 이 계단은 올여름 폭우에 철골만 남고 사라져버린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꼴을 하고 있었다. d는 장갑을 끼고 계단을 마저 올라갔다.

이것은 망가지지 않는다.

자신있게 말하는 인간은 더러 보았지만 이것을 관리하는 인간, 망가지지 않도록 하는 인간을 d는 본 적이 없었다. 여기 사람들은 그저 망가지지 않는다고 말할 뿐이다. 농담처럼 그들의 믿음을, 그것도 부주의한 믿음을 말이다. 그러나 여기 이렇게 균열들이 있다. 멀쩡하다는 것과 더는 멀쩡하지 않게 되는 순간은 앞면과 뒷면일 뿐. 언젠가는 뒤집어진다. 믿음은 뒤집어지고, 거기서 쏟아져내린 것으로 사람들의 얼굴은 지저분해질 것이다……

d는 송장을 쥐고 564호로 들어섰다. 바닥에 깔린 낡은 부직포가 꺼끌하게 발에 밟혔다. 암모니아와 납땜 냄새가 났다. 들쭉날쭉한 모서리를 가진 기계들이 석순처럼 쌓인 곳. 어제 d의 등을 눌렀던 남자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때 보았던 차림 그대로 붉은색 깅엄 셔츠에 낡은 갈색 조끼를 입었고 조끼 앞주머니엔 작은 드라이버가 두개 꽂혀 있었다. 서 있을 때보다 앉아 있을 때 조금 더 커 보이는 체구였다. 사방으로 구부릴 수 있는 목이 달린 램프로 앰프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책상에 꼭 들어맞아 보였고 맥이 빠질 정도로 편안해 보였다.

d가 움직이지 않고 서 있자 그가 머리를 들고 d를 보았다.

아저씨는 나 알아요?

그가 뭔가를 씹으며 d를 보고 있다가 말했다.

알지.

어떻게 알아요.

봤지.

언제요.

매일?

이름은 알아요?

대체 궁금한 게 뭐야.

아느냐고요 내 이름이요……

 

여소녀는 조끼 주머니에 손을 넣고 드라이버를 만지작거리며 d를 바라보았다. 그는 d의 전임을 기억하고 있었다. 다른 택배기사에 비해 연령이 좀 있었는데 붙임성 있고 넉살이 좋은 남자였다. 그가 상인들에게 소개하려고 신임을 데리고 다닐 때 여소녀는 d를 처음 보았다. 앞으로는 이 친구가 제 구역을 담당할 거예요. 전임의 뒤에 신임이 서 있었다. 뭘 한다고?라고 물을 정도로 병약해 보이는 청년이었다. 머리털과 얼굴은 푸석푸석했고 관절들은 기름기 없이 불거져 있었다. 어디서 뭘 하다가 왔는지 턱에 뭉툭하게 찢어진 상처도 있었다. 말 없고 버릇도 없다고 여소녀는 생각했다. 전임이 인사를 시켜도 목을 조금 끄덕여 보인 게 다였다. 저래가지고 무슨 일을 한담. 여소녀는 혀를 찼다. 여소녀는 전임과 그전의 전임을, 그 전임의 전임을 기억하고 있었다. 모두 처음엔 의욕적이었고 생생했다. 건강하고 쾌활한 남자아이들도 시간이 좀 지나면 우울하고 과묵해졌다. 고된 노동강도에 괴로워하다가 짧게는 이틀에서 일주일, 길게는 몇달 내 그만두었다. 이 친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왔다가 금방 사라진 다른 아이들처럼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고 여소녀는 생각했는데 한두주를 넘기더니 가을을 넘기고 해를 넘겨 이제 겨울이었다. 그동안 d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수리실에 들렀다. 여소녀는 d의 변화를 흥미롭게 관찰했다. 창백했던 피부는 거무스름해졌고 시든 나무처럼 어정쩡했던 자세는 꼿꼿해졌다. 일부러 만든 근육이 아닌 생활근육으로 알맞게 단단해진 몸은 민첩하게 움직였다. 멍해 보였던 얼굴은 집중하는 얼굴이 되었고 무거운 짐을 나르는 요령도 터득한 것 같았으며 전담하는 구역도 넓어진 듯했다. 최근에 여소녀는 종로에서 화물용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d를 목격한 적이 있었다. 모자를 쓰지 않고 있었는데 조금 긴 듯한 검은 머리가 바람에 쓸려 뒤로 넘어간 덕분에 모자챙으로 늘 가려져 있던 얼굴이 다 드러나 있었다. 더 바람을 맞으려는 것처럼 턱을 약간 들고 있었다. 오토바이 안장에 안정감 있게 자리를 잡고 있었고 종로2가에서 청계천 쪽으로 크게 모퉁이를 돌아 가버렸다. 여소녀는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는데 왜 웃음이 났는지는 그도 모를 일이었다. 그날 뒤로 여소녀는 d를 조금 더 유심히 보게 되었다. 말 없고, 버릇없어 보일 정도로 무뚝뚝한 점은 여전했다. 거의 매일 보는 사람에게도 안녕하시냐는 인사 한마디 하지 않았고 농담을 들어도 웃지 않았다. 엎어지면 즉시 이마가 닿을 듯한 거리에서 송장을 쓰면서도 눈 한번 들어 사람을 바라보는 일이 없었다. 꾸준하고 일관성 있게 그러다보니 사람이 본래 그러하다고 믿게 되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자기 이름이나 아느냐고 물으며 눈을 새파랗게 뜨고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참 내가 뭘 어쨌다고 다짜고짜 새끼 진짜 버릇없네…… 여소녀는 어처구니가 없어 d를 바라보았다. 너를 언제 봤냐고? 매일 본다 이 새끼야 일상적으로다가……라고 쏘아붙이려다가 여소녀는 d의 낯빛이 한순간에 바뀌는 것을 보았다. 뭔가에 대단히 질리고 놀란 것처럼 창백해지더니 고개를 숙였다. 조금 전까지의 기세는 어디로 가고 몹시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손에 구겨쥔 모자와 송장을 만지작거리며 말없이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바로 갈 것처럼 모자를 머리에 눌러썼다.

이봐.

여소녀는 식사할 때 식탁으로 사용하는 JBL 스피커를 가리켜 보였다.

이거나 먹고 가.

허벅지 높이의 스피커에 울퉁불퉁한 알루미늄 쟁반이 놓여 있었고 d가 나타나기 직전에 배달된 짜장 그릇이 그 위에 있었다. 여소녀는 수화기를 들고 동해루로 전화를 걸었다. 나 짜장 하나 더 갖다줘. 전화를 끊고 하던 작업을 마치기 위해 작업대를 향해 앉았다. 보름 전에 여수에서 올라온 김모라는 사람이 맡기고 간 턴테이블이었다. 피치가 제멋대로 바뀌고 암이 자꾸 카트로 되돌아가는 증상이 있었는데 이제 수리를 마치고 테스트가 남아 있었다. 여소녀는 책상과 벽 사이에 아무렇게나 꽂아둔 LP 중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골라 턴테이블에 얹고 바늘을 조정했다. 모래를 씹는 듯한 잡음이 짧게 이어졌고 늘어진 첫음으로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d가 의자를 끌어와 짜장 앞에 앉았다. 모자를 벗어 근처 앰프에 올려두고 포장을 벗기고 짜장을 비볐다. 여소녀는 STOP 버튼을 눌렀다가 START 버튼을 눌렀다. 암이 안정된 각도로 거치대로 돌아갔다가 턴테이블로 이동했다. 여소녀는 LIFT 버튼을 눌러 바늘을 공중에 띄웠다가 적당한 위치에 맞춘 뒤 다시 LIFT 버튼을 눌렀다. 바늘이 첫번째 트랙을 향해 내려갔다. 음악이 다시 시작되었다.

동해루 사장이자 여소녀의 당구장 동무인 이철희가 짜장 한 그릇을 직접 가지고 왔다. 어, 그가 d를 발견하고 말했다. 로젠 여기 와 있네. 뭐 해 여기서.

 

 

6

 

한번 더 들을 수 있느냐고 d는 물었다.

Love me tender」를.

ddd는 매년 성탄절에 조금 사치스러운 저녁을 보냈고 밤이 되면 방으로 돌아와 비싼 와인과 치즈, 시럽에 졸인 과일을 듬뿍 넣은 커다란 케이크, 버터를 바른 빵과 연어와 가늘게 썬 양파를 접시에 잔뜩 쌓아두고 라디오로 캐럴을 들으며 먹고 마셨다. d가 기억하기로 아마도 지지난해…… 성탄절에 그 노래가 나왔고 와인을 두병쯤 마시고 늘어져 있던 dd가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d와 마찬가지로 dd는 엘비스 프레슬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곤 하는 이미지, 예컨대 성조기의 색인 빨강과 파랑 비즈로 장식된 흰 셔츠를 입고 풀어헤친 가슴엔 붉은 꽃목걸이를 걸고 허벅지를 불편하게 죄는 나팔바지를 입은 모습 같은 것이 조금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고 그의 흐느끼는 듯한 창법도 좋아하지 않았다. dd는 쿠션을 끌어안고 웃으면서, 그러므로 나는 이 사람의 노래를 좋아하지 않고, 굳이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 노래를 이미 많이 들었고, 들을 때마다 이게 뭐야…… 어떻게 이렇게 부드러운 방법으로 노래를 부를 수가 있느냐는 생각에 어처구니가 없는데도, 매번 행복해진다고 말했다. 이 노래를 듣게 되면 웃긴데, 서글플 정도로 웃긴데, 이상하게 행복해진다…… 여소녀의 수리실에서 전축 바늘이 LP에 닿고 뜻밖에 노래가 시작되었을 때, d는 가만히 앉아 그것을 들었다. 웃기지도 행복해지지도 않았다. 너무 유명하고 너무 익숙하고 너무 부드러워서, 더는 이상할 것도 없는 노래. 몇번이나 들어본 적 있는 노래였다. 그러나 들어본 적 없는 소리였다. d는 얼떨해 고개를 젖혔다.

소리.

그것을 들으려고 d는 전축을 바라보았고 스피커를 바라보았다. 작업대 앞으로 몸을 숙인 여소녀를 바라보았고 더러운 창틀을 가린 버티컬과 오만 잡동사니로 가려진 벽과 바닥에 쌓인 앰프들을 바라보았다. 공간과 그 공간의 모든 사물이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에 공명하고 있었다. 전축과 앰프와 스피커를 가져본 적이 없는 d는 그런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공간을 공간이 되게 하는 소리. dd는 그것을 들어보았을 것이라고 d는 생각했다. LP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d는 마지막까지 집중해서 듣고 한번 더 들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여소녀는 STOP 버튼을 누르고 조금 기다렸다가 START 버튼을 눌렀다. 불규칙하고도 일정하게 지글거리는 잡음이 내내 이어졌다. d는 그것이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바늘이 먼지를 긁거나 잡다한 흠()을 읽는 소리라고 여소녀가 답했다. 그 소리는…… d가 듣곤 하는 이명, 잡음과도 유사했는데 음악과 더불어 그것은 음악처럼…… 음악의 일부처럼 들렸다. d는 그것을 더 듣고 싶었고 가지고 싶었다. 이것을 어디서 구할 수 있느냐고 d는 물었다.

뭐를.

이거요.

이거가 뭔데.

이렇게…… 이런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것, 기계들이요.

빈티지?

빈티지……

아래층에 많지.

아래층 어디요.

많잖아.

거기 중에 어디요.

이런 거 사본 적 있어?

없는데요.

나 참.

이런 걸 다 갖추려면 얼마가 있어야 하느냐고 d는 물었다. 글쎄…… 턴테이블, 앰프…… 스피커까지? d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비싸거나 너무 저렴하지 않게 보통으로 맞춘다고 해도 백만원은 넘을 거라고 여소녀가 말했다. 그래도 가지고 싶어?

가지고 싶어요.

알아봐줘?

네.

그러면 기다려보자고 여소녀는 말했다. 적당한 기기를 찾아보자. 기다리겠다고 말한 뒤 d는 모자를 쓰고 집하장으로 내려갔다.

 

여소녀는 보름 걸려 d의 오디오를 마련했다. 전축은 듀얼(Dual) 731Q, 앰프는 피셔 440, 스피커는 JBL. 처음이니까, 욕심부리지 말고 이 정도로만 들어봐. 여소녀는 매우 만족스러운 기색으로 d에게 앰프를 보여주었다. 외부 흠도 거의 없고 버튼도 전부 깔끔하게 남아 있고 회로 상태도 깨끗하고. d는 퇴근할 때까지 오디오를 수리실에 맡겨두었다가 일할 때 사용하는 오토바이에 싣고 강을 건넜다. 바람이 매서웠다. d는 오토바이를 느리게 몰아 자정쯤 고시원에 당도했다. 고시원으로 올라가는 계단 입구에 오토바이를 세워두고 15번 방으로 앰프를 옮겼다. 스피커는 부둥켜안아 옮겼는데 너무 커서 계단을 올라갈 때 한번, 복도를 통과할 때 두번, 쉬어야 했다. 고시원 관리자는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부드러운 고무 슬리퍼를 신은 남자가 배스킨라빈스 파인트들이 종이컵과 생수병을 들고 복도 맞은편에서 걸어오다가 dd의 스피커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그는 잠시 당황하는 듯하더니 벽에 등을 붙이고 섰다. d가 그 곁을 지날 때 그가 뭐라고 툴툴거렸는데 d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고 상관하지도 않았다. 두번째 스피커까지 15번 방으로 옮긴 뒤 문을 닫았다.

문을 등지고 서서 d는 오디오의 위치를 고심했다. 스피커 두개와 전축과 앰프가 일인용 침대 위에 놓여 있었고 그 무게로 매트리스가 중앙을 향해 꺼져 있었다. 침대와 벽 사이에 오디오를 놓을 작정이었는데 스피커가 예상보다 컸다. d는 스피커가 쓰러지지 않도록 매트리스에 살짝 발을 올리고 앰프를 들어 바닥에 내렸다. 출입구에서 책상 앞으로 다가가려면 다리를 넓게 벌려 앰프를 건너야 하는 구조가 되었다. d는 조심스럽게 전축을 앰프 위에 얹어보았다. 전축이 앰프보다 컸다. 책상 앞으로 가려면 침대를 밟고 돌아가야 하는 구조가 되었다. 스피커 두개 중 한개를 바닥에 내렸다. 나머지 한개를 마저 내리면 방문을 여닫는 데 문제가 생길 게 뻔했다. d는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낮 동안 흘린 땀이 밴 작업복을 입은 채 침대 곁에 서서 팔짱을 꼈다. 땀과 먼지로 푸석푸석한 머리를 두 손으로 쓸어넘기고 책상을 바라보았다. 책상 위쪽엔 나사로 고정된 선반이 달려 있었는데 그걸 떼어내면 스피커 두개와 전축을 책상에 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d는 관리자가 돌아올 때까지 관리실 앞에서 기다렸다가 드라이버를 빌려달라고 말했다.

뭐에 쓰려고?

마뜩지 않은 기색으로 공구상자를 뒤지는 관리자 곁에 서 있다가 드라이버를 받아 방으로 돌아왔다. 선반 아래를 더듬어서 나사 네개를 찾아냈고 드라이버로 꾹꾹 눌러가며 나사들을 풀어냈다. 선반이 벽에서 분리되었다.

좌우로 스피커를 올리고 중앙에 앰프를, 그 위에 전축을 얹었다. 첫번째 전축을 가지게 된 기념이라며 여소녀가 선물로 준 트랜스까지 구석에 올리고 나자 일습이 다 갖추어졌다. 공들여 전선들을 연결하고 트랜스를 통해 전원을 넣었다. 즉시 스피커가 퍽, 소리를 냈고 앰프의 주파수 창에 어두운 주홍색 불이 들어왔다. 15번 방에 압도적인 기색으로 전류가 흘렀다. d는 뒤로 물러나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골똘하게 고집을 피우는 것처럼 전류를 품고 있는 앰프를 바라보았다. 냄새가 났다. 전류가 흐르는 쇳덩어리의 냄새. 납과 구리, 기계 속에 감춰진 코일이 달궈지는 냄새, 먼지 타는 냄새와…… 피 냄새.

d는 여소녀가 일러준 대로 셀렉터의 노브를 돌려 포노(Phono)에 맞췄다. 전축이 준비되었다. 전축에 달린 START 버튼을 누르자 조그맣고 동그란 버튼이 몸체로 들어갔다가 나오며 짤깍, 소리를 냈다. 작은 동전을 금속 탁자에 올려놓는 듯한 소리였다. 턴테이블이 빈 채로 슥 회전했고 바늘이 그 위로 이동했다. 턴테이블 아래 숨겨진 연두색 전구의 불빛이 보였다. 인색하고 침침한 빛이었다. 아주 작은 것으로 한개가 있는 듯했다. d는 그 작은 물건을 향한 애정이 샘솟는 것을 느꼈고 구역질이 났다. 이것은 사물이다. 다른 사물보다 나을 것 없는 사물. 그러나 d는 버튼을 다시 눌러보았다. ddLP를 되찾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토요일에 d는 장미맨숀을 방문했다. 비좁은 골목의 막다른 곳에 위치한 검붉은 건물로 반지하까지 포함해 5층이었다. 허리 높이로 올라오는 1층 쇠살문은 아랫부분이 녹슨 채 삭아 있었고 3층 외벽에 붙은 금속 활자들은 초록색으로 변색되고 ㄴ받침 두개가 탈락된 채, 장미매쇼로 남아 있었다. 삼십년이 넘은 다세대 주택이었다. dd의 부모가 전세를 끼고 대출을 받아 무작정 구입한 건물이었고 dd가 몇년 전까지도 이 건물의 대출금을 일정부분 감당하느라고 애를 먹었다는 것을 d는 알고 있었다. 부모의 방과 거실이 있는 4층에 dd의 방도 있었는데 dd는 그 방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때까지 살던 집의 세배에 달하는 넓이에 겁을 먹은 dd의 부모가 난방비를 아껴보려고 각 방으로 연결된 보일러 파이프를 잠가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낡은 건물에 들어간 첫해 겨울에 dd는 감기를 달고 살았다. dd는 부모를 애틋하게 생각하는 편이었지만 보답을 받은 적이 별로 없었고, 부모의 관심은, 예민한데다 뭘 해도 잘 풀리지 않는 장남에게 쏠려 있었으니까, 단념할 때가 되자 배낭 하나와 상자 한개에 짐을 꾸려 집을 나왔다. 정말 필요한 것만 가지고 나가자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없더라고 dd는 말했다. 상자를 열어두고 거기 넣을 것을 찾으려고 방을 한바퀴 둘러보았는데, 별로 없더라고. 정말 필요하고 꼭 가지고 가야겠다고 여겨지는 무언가가 그 방에. 그래도 뭔가를 가지고 나오고 싶었으니까…… 오기로라도. 용돈으로 차곡차곡 모은 음반과 필기구들을 dd는 상자에 담았고 이제 그 상자가 이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d는 쇠살문 앞에서 벨을 누르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4층으로 올라갔다. dd의 형제인 곽정은이 굳은 얼굴로 층계참에 나와 있었다. 맨발에 슬리퍼를 신었고 목 끝까지 지퍼를 올린 저지 차림이었다. 곽정은의 턱이 추위로 빨갰다. d는 그의 뒤를 따라 옥상으로 이어진 철제 계단을 올라갔다. 얼어 죽은 관상용 양배추들이 넝마처럼 늘어진 화분 곁을 지나 옥탑으로 들어섰다. 좁은 거실과 방이 두개 딸린 공간으로 방 하나는 창고로 사용되었고 다른 하나는 곽정은이 사용하고 있었다. 곽정은이 창고 문을 열어 보였다. 사용하지 않는 가구와 잡다한 물건들을 담은 상자가 쌓여 있었다. d는 그중에서 자신이 직접 봉하고 주소를 적은 상자 몇개를 알아보았다. 뜯지 않은 것도 있었다. 상자를 바닥에 내리고 테이프를 뜯었다. 세번째 상자에 d가 찾는 것들이 있었다. 해묵은 음반들. 너덜너덜하거나 먼지를 뒤집어쓰고 뻣뻣해진 마분지 껍데기들. Georges Moustaki, Neil Young, 시나위, NKOTB, 신해철, Boney M, Boston Symphony Orchestra가 연주한 Shostakovich, Vivaldi, Michael Jackson. 고르지 않은 취향. 그보다는, 취향이 되기 전에 중단된 취향.

d가 상자에서 그것들을 한장씩 꺼내 바닥에 쌓는 동안 곽정은은 팔짱을 낀 채 문에 기대서서 d의 뒤통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입은 다물었고 주먹은 바지주머니에 들어가 있었다. d는 그의 부모가 일부러 집을 비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곽정은이 금방이라도 주먹으로 목을 내리칠 것처럼 뚫어지게 자기를 보고 있다는 것도. 물을 마시겠느냐고 곽정은이 물었다. 목소리가 조금 잠겨 있었다. d는 돌아보지 않고, 괜찮다고 대답했다. 괜찮다고? 곽정은이 d의 말을 소리내 곱씹었다. d는 입을 다물었다. 얇은 장판을 깐 바닥은 싸늘했고 온기가 조금도 없었다. 곽정은이 입은 저지 냄새가 옥탑에 배어 있었다. 곽정은은 dd와 별로 닮지 않았지만 그가 잠을 잘 때, 눈을 감고 잘 때는 닮아 보일 거라고 d는 생각했다. d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얼굴이 그런 식으로 닮았고 d의 부모가 그런 식으로 서로를 닮았고 아마도 d 역시 부모와 그런 식으로 닮았을 것이다. 같은 공간에서 함께 산 사람들은, 가장 방심한 얼굴이 닮았다.

내 동생하고 나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곽정은이 말한 적 있었다. dd의 장례식장에서. 한밤이었고 그들은 잠시 바람을 쐬려고 마당에 나와 있었다. d는 곽정은이 그날 밤처럼 많이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삼일을 꽉 채운 장()이었다. 곽정은은 많은 땀을 흘렸다. 검은 저고리는 구겨지고 땀으로 축축해진 채 그의 등에 달라붙어 있었다. 곽정은은 구두코로 흙을 쑤셔 잔디 뿌리를 드러냈다가 발로 밟아 도로 덮기를 반복했다. 나는 걔를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고 곽정은은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우린 말이 통하지 않았고…… 같이 놀 것도 없었다. 나는 걔하고 별로 말하지 않았어. 뭐 아무하고도 말하지 않았지. 나는 빌어먹게 가난한 집안의 중학생이었으니까. 그냥 모든 게 거슬리고 하찮았다. 동생 같은 거…… 없는 게 낫다고 생각할 때나 생각했지 진짜 동생 같은 건…… 하루는 내가 하굣길에 걔를 봤다. 걔가 열살 때. 지저분하게 튀김을 쌓아둔 분식집 앞에서 튀김을 고르고 있더라. 한손엔 바구니를 들고 다른 손엔 집게를 쥐고 엄청 고심하면서 오백원어치를. 그 돈에서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게 바구니를 채우려고 거의 엄숙해 보일 정도로 집중하고 있었어. 내 동생. 지금 자꾸 그 생각이 난다. 그냥 생각이 나. 화장실에 다녀와서 손도 씻지 않고 튀김 반죽을 만드는…… 인정머리 없는 여자가 파는 튀김을 더러운 바구니에 신중하게 담던 모습, 그게 자꾸 생각이 나서 저 안에 있을 수가 없다. 영정을 보고 있을 수가 없어. 오백원어치. 걔가 들고 있었던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을 수 있는 튀김이 그게 전부였고 그것을 생각하면 아주 미칠 것 같다. 돌아버릴 것 같아. 자 이제 니가 말을 해봐라. 걔가 그래도 마지막엔 좀 넉넉하게 살았다고…… 부족한 거 별로 없이 그래도 마지막엔 좀, 어?

d는 네번째 상자를 끌어당겨 테이프를 뜯었다. 다른 상자에 눌려 위쪽이 찌그러진 상자였다. 안에 든 것이 얼마 없었다. 사용한 흔적이 있는 노트 몇권과 책, 독일어 초급 교본, 다갈색 종이끈으로 묶은 편지들. 아직까지도 미지근한 사물들. 구토가 치밀었다. d는 계속할 수가 없어 바닥에 쌓아둔 LP들을 그 상자에 담았다. 상자를 안고 돌아섰다. 곽정은은 d를 옥탑에 내버려두고 사라지고 없었다. d는 상자를 든 채 한동안 옥탑에 서 있다가 4층으로 내려갔다. 곽정은이 텔레비전을 틀어둔 채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턱과 코를 붉힌 채 텔레비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곽정은은 여전히 맨발이었고 왼쪽 발을 다 해진 갈색 쿠션에 올려두고 있었다. d는 어떤 말로 인사를 하고 떠나야 할지 알 수가 없어 상자를 안고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가냐? 곽정은이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찾고 싶은 건 다 찾았냐? 그래…… 가고…… 다시는 여기 나타나지 마라…… 쓰레기 버리듯이 걔 물건을 여기 보낼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야 가라 그만 가고…… 아니다 다음에 다시 와라…… 다음에 꼭 다시 와보라고 개썅놈의……

 

d는 턴테이블에 LP를 올렸다. 최초의 잡음이 들리자마자 눈을 감았다. 이제 음악이 시작된다는 신호였다. 바늘이 갉작거리며 홈을 따라 나아갔다. 음악이 시작되었다.

……

……

음악은 얇은 합판으로 덮인 벽들에 완전하게 반향되었다. d는 스피커를 향해 앉아 있었고 촘촘하고 신축성 있는 천으로 씌운 스피커에서 나온 소리가 아주 가늘고 섬세한 빗처럼 정수리를 쓸고 가는 것을 느꼈다. 드럼과 기타와 보컬. 소리가 너무 엄청나, d는 그것 말고 다른 것은 들을 수 없었다. 음악뿐이었다. 15번 방의 창 없는 구조는 성능 좋은 소리상자처럼 음악을 담고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는 침대, 그 위에 깔린 변색된 담요, d의 백팩과 점퍼를 걸쳐둔 의자, 근육통이 있는 몸. 그 방에 있는 모든 것이 음악에 공명하여 파장을 발산하고 있었고 그 파장들은 모든 벽에 부딪혀 반향이 되었다. 그게 모두 음악 속에서 음악이 되었다. d는 음반이 담긴 상자를 매트리스 위로 올리고 속을 뒤적였다. 방학 때 받은 엽서들, 직접 만든 크리스마스카드, 하드커버가 달린 일기장들. 삼분의 이 정도를 쓴 노트를 넘겨보았다. 그 한권의 노트에서도 dd의 필체는 변하고 있었다. 뒷장으로 넘어갈수록 세로획이 급격하게 꺾이는 필체에서 꺾임이 사라지고 조금 더 단순하고도 가벼운 필체로. dd는 필기구와 종이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고 단지 종이에 뭔가를 적으려고 꿈이나 생각들, 책에서 읽은 것, 그날의 지출이나 짧은 이야기들을 기록해두는 습관이 있었다. d는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글자로 가득한 페이지는 그렇지 않은 페이지보다 뻣뻣하고 무겁게 넘어갔다. d는 그런 페이지에서 꿈 이야기를 읽었다. 꿈이었고 도서관에 가게 되었고 거기서 책 몇권을 빌렸다는 이야기였다……

……

……

……

첫번째 트랙이 다 돌기도 전에 옆방에서 벽을 때렸다. d는 상자 바닥에서 REVOLUTION이라고 적힌 책을 발견했고 그걸 무릎에 올렸다. 두꺼운 갈색 책이었다. 거친 합성지로 감싼 하드커버 장정에 아무런 장식 없이 검은 글자로 제목이 적혔는데 두께에 비해 무게가 덜했고 노랑과 갈색으로 가름끈이 두개 달려 있었다. 첫 페이지에 누군가 붉은색으로 도장을 찍어두었다. 꼬불꼬불한 미로 같은 그 모양새를 한동안 보고 있다가 d는 그것을 읽어냈다. 이름이었고 d가 그 이름을 알았다. 박조배. dd의 동창이자 d의 동창이었다. 초등학교를 함께 졸업한 동기생. 명동 거리에서 음반을 판다고 들었는데 지금도 그 일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박조배의 책이 왜 여기에 있을까. d는 아무렇게나 책을 펼쳤다가 힘의 범람,이라는 구절을 보고 반복해서 그것을 읽었다. 범람. 힘의. 힘의 범람. 누군가 다시 벽을 때렸고 이번엔 다른쪽 방이었다.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이번에는 벽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오른쪽 방과 왼쪽 방에서. d는 옆방의 거주자들을 생각하고 미소지었다. 옆방을, 15번과 똑같은 16번과 17번의 구조를, 자신의 것과 다를 바 없거나 더 더러운 침구와 벽, 합판과 시트지로 구성된 싸구려 가구와 그 방을 가득 채우고 있을 허름한 생필품들을 생각했다. 나는 그 사물들의 일시적 소유자들에게 그들 자신의 것보다 혐오스러운 것, 좀더 견딜 수 없는 것, 말하자면 자신의 이웃을 향해, 그토록 열심으로 벽을 두들길 기회를 주고 있다. 재미있느냐고? 재미있다. 재미가 있다. d는 책장을 한장 더 넘기며 생각했다. 매트리스를 짓누를 때 말고는 존재감도 무게도 없어 무해한 그들, 내 이웃. 유령적이고도 관념적인 그 존재들은 드디어 물리적 존재가 되었다. 사악한 이웃의 벽을 두들기는 인간으로.

음악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튿날 일을 마치고 고시원으로 돌아온 d는 오디오가 복도에 나와 있는 것을 보았다.

15번 방 앞에.

빨대 꽂힌 스티로폼 컵이 보란 듯 스피커에 올려져 있었다.

 

 

7

 

여소녀는 가스난로를 끄고 창을 열었다. 가스 냄새가 밴 후덥지근한 공기가 찬 공기와 섞이며 바람이 일었다. 검고 단단한 먼지가 섞인 바람으로 버티컬이 흔들렸다. 종로 쪽으로 펼쳐진 나지막한 건물들이 내려다보였다. 평평하고 남루한 지붕들엔 지난달에 내린 눈의 흔적이 조금씩 남아 있었고 일광욕을 하러 나온 고양이 한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여소녀는 의자로 돌아와 신문을 다시 집어들었다. 여소녀는 시장을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보다 열살이나 어린데도 다섯살은 더 연장자처럼 보였고 모든 일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소녀에게도 믿음이 있었는데 그 믿음은 시장의 믿음보다 덜 선한 것처럼 보였다. 여소녀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울적한 얼굴로 여소녀는 신문을 마저 읽었다. 어쨌거나 시장의 계획대로, 2005년에 사라진 보행 데크를 복구한다는 뉴스가 실려 있었다. 청계천을 사이에 둔 세운상가와 청계상가를 잇고 그 위를 사람들이 오가게 만들어 도심에 활력을 부여하고 기술자들을 발굴해 세운상가 일대를 새로운 명소로 재정비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여소녀가 이해하기로는, 일단 지나가는 사람들을 늘리려는 프로젝트였다. 지나가다가. 그것이 다시 가능해질까? 지나가는 사람 자체가 없어 많은 가게들이 영업을 접었지만 여소녀는 새로운 프로젝트에 미적지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오간다고? 흠.

솜사탕 막대나 풍선을 묶은 가느다란 끈을 쥔 아이들, 데이트를 하는 젊은 사람들에게 이 상가에 있는 것들이 무슨 의미이며 무슨 상관인가. 나들이옷을 입고 가슴에 케첩 얼룩을 묻힌 다섯살배기 아이를 데리고 수리실을 방문해 빈티지 오디오에 관해 말하는 여자나 남자에 관해 여소녀는 상상할 수 없었다. 아니야 상상할 수는 있어도 그것은 상상으로나 가능한 광경 같았다. 산책하러 나온 젊은 연인이 3층 보행 데크를 걷다가 방열판이나 저항, IC, DC 모터, 스피커 유닛, 도란스를 둘러보는 광경은?

물론 사람이 늘면 상권은 형성될 것이다. 지금과는 뭔가 다른 형태의 상권이. 여소녀는 창을 통해 3층 보행 데크를 내려다보았다. 60년대에 그 이름처럼 원대한 계획으로 설계되었다가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애매하게 끊어진 형태로 구현되었고 한차례 그야말로 끊어졌다가 이제 다시 원대한 계획의 일부가 된 공중가로는 지금 2월 태양의 싸늘하고도 엷은 빛을 받고 있었다. 길거리 구둣방처럼 생긴 박스들이 데크 가장자리를 따라 늘어서 있었다. 대부분 문을 닫았고 문을 연 박스 속에서는 젊은 남자가 햇빛을 등지고 앉아 컴퓨터로 카드 게임을 하고 있었다. 비아그라나 담배, 감시용 카메라를 판다고 적힌 짧은 입간판이 그늘에 놓여 있었다. 어쨌거나 저곳을 오가는 사람이 늘고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면 임대인들은 즉시 세를 올려 받으려 할 것이다. 재정비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자들의 계획에 따르면 여소녀 자신과 같은 기술자들이 이 프로젝트의 중요한 콘텐츠였으나…… 기술자이자 상인인 그들 모두 결국은 세입자이며…… 세가 오르면 특별히 영세한 업체가 많은 이 상가에서 상인들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 일격이 될 수도 있었다. 여소녀는 생각했다. 상가가 사는 거지 내가 사는 것은 아니지.

무릎에 펼쳐진 신문이 바람에 부풀었다. 여소녀는 신문을 두번 접어서 조금 더 자세히 읽고 싶은 기사를 위로 오게 해두었다. 세운상가 활성화 종합 계획이 발표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본문에 다섯차례나 언급된 재생,이라는 말이 여소녀는 마음에 걸렸다. 무엇을 재생한다고?

왜?

여소녀는 그것이 몹시 궁금했는데, 계획자들도 그것을 자신만큼 궁금하게 여길지 다시 궁금했다. 여소녀가 생각하기로는 세운(世運)이라는 이름 그대로, 이곳엔 세계의 기운이 이미 모여 있었다. 미래와 빤하게 연결된 현재, 이상에 이르지 못하는 실재, 비대하고 멋대가리 없는 외형, 시대의 돌봄을 받은 적은 거의 없지만 알아서 먹고살며 시대를 이루었고 이제 시대의 뒤꽁무니에 남은 사람들, 아 사기꾼들, 여소녀 자신을 비롯한 거짓말쟁이들, 그것도 조그맣고 하찮은 스케일의 사기밖에 칠 줄 몰라 여전히 보통 사람으로 여기 남은, 내 이웃들…… 여소녀가 이해하기로는 그것이 세계의 기운이었다. 여기를 제대로 재생하려면 거짓말하지 말고 그것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들이 되살리려는 것을 그들이 제대로 알아야 했다. 제대로 알려면 말이지 제대로 하려면…… 최소한 이 공간에서 인생을 보낸 사람들의 이야기 정도는 펼쳐져야 하는 거 아니냐…… 그들이 각자 어떤 질병을 앓고 있는지 여행은 몇번을 가보았는지를 알아보고 가족도 다 만나고 그들의 자녀는 어떤 학교를 다니고 어떤 직업을 얻었는지, 그중에 비정규직은 몇 퍼센트인지까지도 다 알아봐야 했다. 그 이야기들로 두루마리를 만들어 이 거대한 상가의 내벽과 외벽을 몽땅 덮어버려야 했다.

여소녀는 일주일 전에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진 구조물을 생각했다. 수요일이었다. 출근하고 보니 5층 홀에 기묘한 것이 있었다. 모니터며 선풍기며 낡은 전화기, 구멍 뚫린 스피커 같은 고철과 고물이 홀 중앙에 무더기로 쌓여 있었고 이끼와 꽃나무 가지가 그 사이사이를 장식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장식용 전구를 단 줄들이 천장 어딘가에 연결된 채 구조물 위로 늘어져 있었고 높고 투명한 천장이 그것 위로 뿌연 빛을 뿌리고 있었다. 여소녀는 즉시 서낭당을 떠올렸다. 정체불명의 거대한 생물이 고물상을 삼킨 뒤 밤새 싸둔 똥 무더기 같기도 했다. 저것이 무엇인가…… 떼를 입힌 것을 보니…… 만들다 만 무덤 같기도 했다. 남의 마당에 저런 것을 만들어두고 뭘 하자는 것인가…… 여소녀가 눈살을 찌푸리며 그 구조물을 돌아 수리실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남녀가 수리실로 불쑥 들어와 초대장이라며 종이 한장을 두고 갔다. 오늘 오후에 전시를 겸해 재생 프로젝트의 시작을 알리는 모임이 있을 거라는 내용이었다. 여소녀는 심드렁하게 그것을 받아두었다. 자기들끼리 뭔가 하고, 사진이나 찍어가겠지. 늘 하던 가락대로. 오후가 되자 과연 전에 본 적 없는 사람들이 5층 홀에 모여서 어수선하게 뭔가를 하고 사진을 찍고 갔다. 그들이 모두 가버린 뒤에 여소녀가 나가보니 구조물이 남아 있었다. 여소녀는 구조물로 다가가 종이에 적힌 글을 읽었다. 만지지 마시오. 여소녀는 반말에 비위가 상했다. 버르장머리 봐라…… 이것을 읽을 사람들이 결국은 너희들 계획의 콘텐츠들인데 그렇지 내가 콘텐츠이고 이것들아…… 내가 이 상가와 사십년간 맥을 함께한 인간인데 내게 질문 하나 해오지 않는 프로젝트는, 됐다고 여소녀는 생각했다. 담배를 피우며 구조물을 한바퀴 돌아보았다. 이것은 참으로…… 훌륭한 상징이라고 여소녀는 생각했다. 뜬금없고 남의 일 같다는 점에서 훌륭하게 상징하는 바가 있었다. 드문 일은 아니었다. 이번 것을 비롯해 도시의 이름으로 계획되는 프로젝트는 여소녀에겐 음모이자 꿍꿍이일 뿐이었다. 공적 기관의 예산이 책정되고 집행되는 프로젝트일 뿐. 나와는 무관한. 어디까지나 내가 소외된 상태로 전개되는. 언제나와 같이. 그 상징물엔 여소녀라는 맥락이 없었다. 564호와 568호, 531호, 540호, 536호의 맥락도 없었다. 그들은 그 맥락을 몰랐다. 그러니 남의 마당에 서낭당 같은 것을 만들어두는 것 아닌가…… 귀신을 쫓듯. 내가 귀신이여?

여소녀는 입맛이 써 신문을 치우고 창을 닫았다. 잇몸이 쑤셨다. 늘 문제를 일으키는 세번째 임플란트에 또 문제가 생긴 듯했다. 여소녀는 그 자리에 사정없이 나사를 박고 임플란트를 돌려 박은 치과의사를 떠올리며 투덜거렸다. 라디오를 좀더 깨끗한 소리로 들으려고 튜너를 조절했다. 여소녀의 수리실에서는 91.9 채널만 제대로 잡혔다. 나머지 채널은 지직거려 도저히 들을 수 없었다. 도심이라 전파가 많고 상가 건물이 낡아 전파를 제대로 수신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여소녀는 믿었다. 모든 채널을 제대로 들으려면 옥상에 장비를 설치해야 하는데 관리실에서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옛날 기계 몇대로 주파수를 잡자고 일부러 비용을 들여 장비를 설치할 수는 없고 미관상 지저분해진다는 입장이었다. 여소녀는 수리실에 라디오를 고치려는 사람이 오면 어디 사느냐고 물었다. 그 지역에서는 전파가 잘 잡힙니까. 전파가 잘 잡힌다는 대답을 들으면 진심으로 부러워했다. 인생 마지막엔 산골…… 같은 곳에 들어가 좋은 공기와 물을 마시며 시끄럽지 않게 살고 싶다는 것이 여소녀의 바람이었는데 기본 조건이 전파였다. 전파가 깨끗하게 잡혀야 한다…… 라디오가 지직거렸다. 맑은 날인데 수신 상태가 좋지 않았다.

 

어제와 오늘, 아래층 상가는 윤선오 노인의 일로 은근하게 떠들썩했다. 윤선오는 몇년 전부터 오디오 상가에 자주 나타나 상인들과 밥도 먹으러 다니고 술자리에도 종종 끼는 노신사였다. 오디오 상인들은 그를 좋아했다. 쓸데없이 어슬렁거리지 않았고 예의 발랐고 수수해 보이는 비싼 옷을 맵시있게 입고 다녔고 아는 게 많아 보이는데도 먼저 나서서 아는 척을 하지 않았으며 씀씀이도 인색하지 않았다. 최근 몇달 동안 상가에 나타나지 않아 그 형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냐고 궁금해하는 상인이 더러 있었는데 바로 지난주, 윤선오가 백산의 가게에 나타나 십분쯤 이야기를 하고 갔다. 그런데 그뒤에 백산의 기계 하나가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백산은 곧장 윤선오 노인을 의심했고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백산과 윤선오, 둘 중에 누군가를 믿지 말아야 한다면 압도적으로 백산이었다. 중고 오디오를 사고파는 그는 큰 체구에 괄괄한 목소리로 떠들썩하게 웃는 남자로 웃는 얼굴에서 바로 험악한 얼굴을 할 수 있었고 역으로도 가능했다. 뻔뻔하고 누구에게나 속임수를 쓰고 워낙 상도를 무시하는 인간이라서 대대적인 수리가 필요한 중고 오디오를 헐값에 매입해서 조금도 고치지 않고 비싼 가격에 팔아먹은 뒤 운 나쁜 구매자에게 수리비를 옴팡 뒤집어씌우고는 했다. 여소녀에게도 여러차례 수리비를 떼어먹었는데 자기에게 필요한 상황이 되면 사람 좋고 넉살 좋은 듯 수리실에 나타났다가 또 떼먹기를 반복했다. 사십년이 넘은 전자상가를 이루는 수많은 요소 중 하나로 그를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여소녀도 백산을 믿지는 않았다.

그런데 CCTV를 돌려보니 윤선오가 집어간 것이 맞는다는 이야기였다. 너무 낡고 상품가치도 별로 없어 가게 바깥에 쌓아둔 앰프들 위에 얹힌 것을, 백산오디오에서 나온 윤선오 노인이 그냥 들고 갔고, 그 장면이 영상에 찍혀 있었다. 상인들이 다 같이 모여 그걸 보았지만 어느 누구도 선뜻 믿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너무 이상하니까. 그들이 겪은 노인의 인품을 생각해도 그렇지만, 매킨토시(McIntosh)를 집에 몇대나 마련해두고 듣는다는 사람이 십만원짜리 CDP를 왜? 백산이 십만원에 팔 정도의 물건이면 그건 거의 껍데기라는 의미였다. 완전 썩은 거. 버려도 상관없는 기계니까 밖에 올려두었을 테고 그것을 윤선오 노인이 모를 리 없었다. 고가의 빈티지를 듣는 사람이 쓰레기나 다름없는 싸구려 기계를. 그것도 뭐에 쓴다고 CDP를.

오디오 상인들은 몇번이고 영상을 돌려 보고 어리둥절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영상을 들고 당장 경찰서로 가겠다는 백산을 달랜 뒤 중재에 나섰다.

그 과정을 보고 들은 사람들이 저녁에 수리실로 올라왔다.

 

한일사 사장이 전화를 했대. 제일 친하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전화를 받더래. 형님 혹시 그거 가져가셨냐고 물으니까 모른다고 잡아떼더래. CCTV 얘기를 했더니 아주 차분하게, 봤냐고 묻더래.

봤어?

아 봤다고.

그랬더니 인정을 하더래. 어 그것을 자기가 가져갔다고. 형님 CDP가 필요하셨냐고 물어보니까 아니,라고 하더래. 그런데 너무 아무렇지도 않더래.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 너무 차분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을 하더라는 거야. 한일사가 소름이 돋아가지고 그러면은 일 더 크게 만들지 말고 형님 돈 좀 보내라고 십만원을, 그랬대.

그런데 그 와중에 또 백산이 십오만원을 불렀어요.

그래서 받았어 십오만원을.

오후에 바로 입금했더라고.

이게 무슨 일일까.

그 형님이 왜 그랬을까.

돈 없는 양반도 아니고.

당장 돈이 없었나?

없었다고 쳐도 고급 기계 듣던 사람이 그 싸구려를 왜?

도벽이 있나?

이제 와서?

생겼나보지.

치매가 온 건가?

그렇다고 보기엔 너무 멀쩡하고.

그러면 왜?

왜?

왜 그랬는지를 계속 궁금해하면 답을 알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모여서 한참 서로에게 물었다.

 

내가 봤을 때는 말이야……

여소녀는 d와 둘이 남았을 때 말했다. 노인이 복수를 한 것 같아. 우리 모두한테 말이야.

여소녀는 CCTV 영상에서 두리번거리다가 CDP를 집어 앵글 밖으로 유유히 사라지던 윤선오 노인의 모습을 생각했다. 백산에게는 감기를 호되게 앓느라고 한동안 외출하지 못했다고 말했다는데 과연 얼굴이 조금 홀쭉해 보였다. 여소녀도 윤선오 노인과 친분이 있었다. 저녁을 같이 먹으러 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은 적이 더러 있었다. 형님은 무슨 일을 했느냐는 질문에는 매번 미소만 지을 뿐 대답은 않았지만 지방에서 교수로 일하는 아들이 하나 있으며 자신은 북촌에 마당 딸린 한옥을 한채 가지고 있고 거기서 산다는 이야기를 드문드문 들려주었다. 어느날 노인은 마당에 작은 폭포를 직접 만들 작정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물길을 낼 거라며 수리실로 설계도를 들고 와서 여소녀에게 보여주었다. 종이가 컸다. 여러번 접은 전지에 매직펜으로 그린 그림이었다. 위쪽은 갸름하고 아래쪽은 불룩한, 서양배 모양으로 이어진 물길이 그려져 있었다. 물길을 따라 작은 브로콜리들처럼 흩어진 것은 그의 마당에 있다는 장미 덤불과 나무들이었다.

폭포 같은 것을 왜 만드느냐고 묻자 물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싶다고 윤선오는 대답했다. 여름에 큼직한 흰 장미를 여러 송이 피우는 덤불 밑으로 흐르다가 당단풍 뒤를 돌아 벚나무 곁에서 무릎 높이의 낙차로 검은 돌 위로 떨어지는 물. 어떤 날에는 그 소리가 음악보다도 아름다울 것이며 내킬 때 마루에 드러누워 종일 그 소리를 듣는 것이 오랜 소망이었다고, 이제 한동안 집에서 그 소망을 이뤄볼 작정이라고 윤선오는 말했다. 다음에 그를 보았을 때 그것을 생각해낸 여소녀가 폭포가 어떻게, 잘 만들어졌느냐고 묻자 노인은 매우 씁쓸한 얼굴을 했다. 만들기야 만들었는데 물을 돌리려고 수도를 틀고 보니 수도관에서 물을 뽑아내는 소리가 워낙 요란해 평소엔 마른 채 내버려둔다는 것이었다. 비가 올 때를 기다린다고 노인은 말했다. 그것도 큰비가 내릴 때를. 그렇지 비가 내리면 저절로 물이 흐르겠지. 여소녀는 생각했다. 그런데 그 정도로 비가 내리면 빗소리에 가려 물소리는 이미 들리지 않는 게 아닐까, 하고도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고 이렇게 말했다. 형님은 좋겠소.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사니 말이오. 그러자 윤선오 노인의 흰 얼굴이 옹졸하게 일그러졌다. 역겨움을 참는 것 같기도 하고 경멸하는 것 같기도 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짧은 순간에 너무도 복잡한 표정이 떠올라 흰 얼굴이 몹시 좁아 보였던 것을 여소녀는 기억했다. 다음 순간엔 평소의 순한 얼굴로 돌아와 곰보냉면에서 갈비탕이나 한 그릇씩 먹자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지만 그 표정을 잊을 수 없었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그런 폭포가 있을까 정말로. 여소녀는 CCTV 영상 속에서 CDP를 집어들기 전에 카메라 쪽을 흘긋 바라보던 윤선오 노인의 모습을 생각했다. 여소녀는 그의 집을 몰랐다. 그의 작은 실패작이 있는 집. 가지고 있는 매킨토시 중에 하나가 말썽이라며 그 무거운 것을 종로까지 들고 나오기가 애매하니 언제 집으로 한번 와서 봐달라고 노인이 말한 적이 있었고 여소녀가 흔쾌히 그러마고 했으나 정작 오라고 하지는 않아 가본 적이 없었다. 노인을 아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가본 적이 없으니 모르지. 그 노인이 도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어 우리 중에 누구도. 거의 육년을 알고도. 그것을 생각하다가 여소녀는 말했다. 나도 그 노인이 그걸 훔쳤다는 걸 믿을 수가 없지만 봤으니 믿을 수밖에 없고, 본 것을 믿을수록 그 양반이 복수를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야…… 자기를 보여주고 모두의 믿음을…… 모두가 믿는 바를 놀려먹는 것으로 말이지 복수를…… 그러면 왜 복수를 하냐…… 내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노인이 갈 때가 되어서,라고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어. 어떤 사정이 있든 노인이 지금 자기 죽음을 골똘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 말고 다른 동기를 여소녀는 생각할 수 없었다. 여소녀는 윤선오 노인의 흰 얼굴을 골똘하게 생각하다가 죽음 이후를, 저세상을 상상해본 적이 있느냐고 d에게 물었다.

없어요.

d가 대답했다. 저녁마다 앉는 의자에 걸터앉아 검은 눈으로 여소녀를 보고 있었다. 솜을 약간 넣고 누빈 점퍼를 입었고 일하는 동안 머리에 쓰고 다녔던 모자를 왼쪽 무릎에 씌워둔 채로 방금 먹어치운 찐빵을 쌌던 포장지를 한손으로 구기고 있었다. 평온하고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d가 오디오를 도로 가지고 나타난 밤에도 저런 표정을 하고 있었던 것을 여소녀는 떠올렸다. 가져간 지 일주일도 되지 않은 기계들을 수리실 입구에 쌓아두고 이것을 여기 두고 들어도 괜찮겠느냐고 d는 물었다. 너무 뜻밖의 질문이라서…… 여소녀는 내용을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 뭘 어쩐다고? 그러니까…… 적당한 공간을 마련할 때까지 자기 오디오를 수리실에 두고 여기서 음악을 들으면 안되겠느냐는 부탁이었다. 아니 되나 마나 이미 가지고 나타나서는 뭘 묻고 있어 어쩌라고…… 그런데…… 음악을 듣겠다고? 여기서? 재차 묻자 꼭 지금과 같은 얼굴로 d는 여소녀를 바라보았다. 여소녀는 혀를 찼지만 옆방에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수리실과는 얇은 문짝으로 나뉜 공간이었는데 여소녀가 문짝을 떼어내고 창고로 사용하는 곳이었다. 택배로 도착하는 앰프를 담은 상자들이 구석에 쌓여 있었다. d가 직접 그 자리를 치우고 자기 오디오를 놓아두었다. 그뒤로 밤에 이따금 들러 거기서 음악을 듣고 갔다. 한곡을 듣고 갈 때도 있었고 아주 늦게까지 그 앞에 앉아 있을 때도 있었다. 여소녀는 수리 중인 앰프를 테스트할 때 무자비할 정도로 소리를 키우는 편이었는데 d는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여소녀의 작업대에서 갑작스럽게 큰 소리가 나도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그저 자기 음반을 틀어두었고 그것을 들었다. d의 오디오에서 나오는 소리에도 불구하고 여소녀는 곧 d의 존재를 잊었다. 난해하게 태워먹은 회로판을 향해 구시렁거리다가, 필요한 부품을 가져오려고 몸을 돌리다가, 창고 구석에 놓인 의자에 앉은 d의 옆모습을 발견하고 흠칫 놀랄 때도 있었다. d는 자기 오디오를 향해 앉아 있었고 그럴 때는 무엇에도 방해를 받지 않는 것 같았다. 뭘 듣고 있는 것이 아니고 완전한 적막 속에, 어딘가 다른 세계에 앉아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음, 하고 여소녀는 눈을 굴렸다. 그래 그것을 상상해본 적이……

없다고?

없어요.

한번도?

없어요.

그렇군…… 하고 여소녀는 생각했다. 그것을 상상해보지 않았다니 그것 참 신기하군. 누구나 한번쯤 상상해보지 않나 그것을. 나는 말이지…… 거길 미리 다녀왔다고 여겨지는 일을 한번 겪은 적이 있다고 여소녀는 말했다.

 

서너해 전에 내가 아래층 녀석들하고 술을 마신 적이 있었거든 여기서…… 족발이랑 막걸리랑 소주랑 누군가 가져온 절편을 먹었지. 자정을 넘겨 한시쯤 되었을 때 정전이 되었어. 창밖을 보니 멀리 종로1가 쪽은 불이 들어와 있었는데 말이야 여기 일대엔 불이 다 나가버렸어. 뭐 별수 있나. 어두운 채로 이 좁은 데서 술병과 접시를 더듬어가며 먹고 마셨지. 그래도 아주 어둡지는 않았어. 완전히 어둡지는 않아서 맞은편에 앉은 녀석들의 윤곽은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고 달빛에 얼핏얼핏 그 표정도 보였지. 마시다가 내가 잔을 쥐고 조금 졸았는데 같이 마시던 놈 중에 하나가 나를 깨웠어. 그놈까지 포함해서 다섯, 이것들이 상글상글 웃으면서 놀재. 뭘 놀아? 여태 놀았고 나는 좀 졸아야겠으니 내버려두라니깐 아이 형님 그러지 말고 놀재. 뭘 하고 노느냐고 물었더니 바깥으로 나가재. 어차피 어두운 것, 이렇게 수리실에 있지 말고 바깥에 나가서…… 술래잡기나 하자는 거야. 아니 이렇게 야심하고 아무도 없는데 무슨 술래잡기냐고 하니까 아무도 없으니까 숨기에도 좋고 찾기에도 좋으니 하자는 거야. 어렸을 때처럼 해보자고 술김에. 아이 뭐 알았다고 그래 누가 술래냐고 물었더니 나더러 하래. 형님이 술래, 우리가 먼저 나가서 숨을 테니 찾아보쇼, 하더니 줄줄이 나가. 내가 남아 술래를 했지. 술래의 말이 좀처럼 기억나지 않아서 애를 먹었지만 말이야. 여우야 여우야……였나?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무튼 꼭꼭 숨으라고 머리카락 보인다고…… 혼자 남아 중얼거리다가 찾으러 나갔어. 어처구니가 없었지. 내가 이 나이에 나와 마찬가지로 머리 허옇게 센 것들하고 지금 술래잡기를 말이야…… 그런데 그것이 재미있더라고. 술김에 배가 뜨뜻해서인가 그냥 조금 있었어 재미가. 여태 정전이었지. 불빛 한 점 없었으나 천창으로 달빛이 들어 푸르뎅뎅하니 공간은 넓고 그림자들은 짙고…… 아 여기가 이렇게 넓었구나. 내가 새삼 그렇게 놀랐던 것 같아. 그 밤에 보니 아주 넓고 아주 깜깜했어. 다섯 놈은 자취가 없었지. 내가 5층을 돌아다니며 찾았는데 없었어. 다섯 놈은 고사하고 아무도. 이것들이 아래층에 숨었나 하고 내려갔지. 보통은 방화문이 닫혀 있고 잠겨 있는데 말이야 갑자기 정전이 되어버려서인지 그날은 열려 있었어. 여기 어디 숨었고나 싶어 내가 상가를 죽 걸어다녔지. 불 꺼진 상가를 나 혼자. 그런데 묘하더라고. 걸을수록 말이야. 광진전자, 지구전자, 연음향, 반도전자, 고전사, 이화전자…… 늘 보던 가게들, 매일 오가는 복도인데도 아주 낯설었어. 간판들이며 유리벽 너머로 보이는 가게 내부며 어제 보고 그제 보고 오늘 본 것들인데 전혀 다른 장소 같은 거야. 인기척은 조금도 없고 컴컴하니…… 마른 우물에 돌 떨어지는 듯한 내 발자국 소리만 들리고 말이지. 어디어디 숨었냐고 아무리 돌아다녀도 찾지를 못하는 거지 아무도. 저승이란 이것과 같겠구나…… 내가 그런 생각을 했어. 어느 순간 말이야 저승일 수도 있겠구나. 어느 순간에 그냥 슥…… 그렇지 그렇게 슥…… 내가 이승에서 저승으로 넘어왔구나……

여기가 내 저승이로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는 마지막 말을 삼켰을 때 여소녀는 d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1983225일에…… 어디에 있었느냐고 d는 물었다.

 

그러니까 32년 전에, 자신은 서해에 있었다고 d는 말했다. 바다는 멀리 있었고 다갈색으로 젖은 개펄은 단단하고 차가웠죠. 어른들과 어린 사촌들이 그 바닷가에 함께 있었어요. 무슨 일로 우리가 거기 모여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아요. 가족 모임이 있지 않았나 싶어요. 나는 조개 같은 것을 캐내려고 조그만 삽으로 바닥을 파내다가 막 일어선 참이었고요 어른들이 근처에 서 있었어요. 삽이나 양동이를 들고 말이죠. 바람이 좀 불었던 것 같아요. 우리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죠. 어른들이 몹시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게 기억나요. 어른들이 모두 하늘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도 모두 하늘을 보고 있었죠.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어요. 하늘 말고는 아무것도. 우리는 사이렌을 듣고 있었어요. 바닷가 전체에 울려퍼지고 있었죠. 1983225일에 북한의 공군이었던 이웅평 대위가 러시아제 미그기를 몰고 남한으로 귀순한 일이 있었죠. 남한에서는 북한이 전투기로 공습을 시작했다고 난리가 났고요. 내 기억에요 이것은 그날의 광경이에요. 나는 어느 노인들에게 이웅평 귀순 사건을 들었고 내게 그런 기억이 있다는 것을 최근에 떠올리게 되었는데 이것이 내가 만들어낸 기억인지 본래 가지고 있던 기억인지 확실하지는 않아도 그 광경은 매우 선명하고 매우 정지되어 있어요. 긴 사이렌과 더불어 멈춰 있죠. 죽음을 생각할 때 나는 그런 광경이 떠올라요. 분명히 있었거나 너무 있었던 것 같은 순간들이요. 그것은 모두 과거이고 정지되어 있죠. 지금과는 완전하게 동떨어지고 무관한 채로 영원히 그뒤가 없는 것처럼…… 멈춰 있고 중단되어 있어요. 실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거나 움직일 때,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생각하지 않을 때, 나는 죽음을 느껴요. 매우 정지된 지금을요. 너무 정지되어서, 지금 바로 뒤를 나는 상상할 수 없고요 궁금하지도 않아요. 지금이라는 것은 이미 여기 와 있잖아요. 그냥 슥…… 그렇죠 아저씨 말대로 이미 슥…… 따로 상상할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나는 이 세계 이후의 저 세계라는 것을 상상하지 않습니다. 내가 현재나 과거를 생각할 때, 그것은 매번 죽음이고, 죽음을 경계로 이 세계와 저 세계로 나뉘는 것이 아니고 죽음엔 죽음뿐이며, 모든 죽음은 오로지 두개로 나눌 수 있을 뿐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목격되거나 목격되지 못하거나. 그렇지 않나요?

 

그런데 그것을 아시나요? 이웅평 대위가 전투기를 몰고 남한으로 넘어온 이유가 환멸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북측에서 해변을 산책하다가 남쪽에서 생산된 라면 봉지를 주웠는데 이런 안내문이 적혀 있었대요. 불량품은 판매처에서 교환이나 환불을 해드립니다. 그것을 읽고 남쪽엔 라면을 쌓아놓고 파는 장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기가 속한 체제에 깊은 환멸을 느끼게 된 나머지 귀순을 결심했다고 하네요. 그 내용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그가 부러웠습니다. 두 손으로 조종간을 붙들고 목적지를 향해 전투기를 몰아갔을 그 새끼가 너무 부럽다…… 남쪽의 가요를 방송하는 라디오 채널에 주파수를 맞춰두고 음악이 흐르는 전투기에 실려 북측과 남측의 경계를 향해 날아가던 순간, 그 아득한 허공을 날던 순간의 그가 말입니다. 죽음과는 얇은 금속판 한 겹만을 남겨둔 채 체공하고 있었지만 그는 분명히 환멸의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었어요. 그는 그것을 가지게 된 거죠. 탈출의 경험을.

내게는 그것이 없어.

나는 내 환멸로부터 탈출하여 향해 갈 곳도 없는데요.

 

 

8

 

d는 박조배의 책을 침대 옆 바닥에 두었다가 잠들기 전에 펼쳐보았다. 노란색 가름끈이 책 중간에, 갈색 가름끈이 마지막 페이지에 끼워져 있었다. d는 가름끈이 두개 달린 책을 처음 보았다. 처음엔 아마도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나보다고 생각했지만 끈의 색이 다르고 거의 같은 자리에 나란히 달린 것을 보니 일부러 두개를 단 것이라고, 아마도 책의 두께 때문인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ddd가 갈색이 아닌 노란색 가름끈으로 나뉜 페이지까지 읽었을 것이라고 여겼다. 다 읽었다면 늘 하던 습관대로 맨 앞장이나 맨 뒷장에 가름끈을 모아두었을 것이다.

노란색 가름끈은 246페이지와 247페이지 사이에 깊게 끼워져 있었다. 246페이지의 마지막 문장은 이것이었다. 이것은 자기가 하는 일을 잘 모르는 사람들의 구차한 변명에 불과하다. 247페이지의 첫번째 문장은 이것이었다. 사실은 그와 정반대다.

ddd가 어디까지 읽었는지, 왼쪽 면인지 오른쪽 면인지, 왼쪽이라면 몇번째 줄인지, 오른쪽이라면 어느 문단까지인지를 궁금하게 여기며 책을 펼치고 있다가 책장을 넘겨보았다. 종이가 두꺼웠으나 가벼웠고 거칠었다. 노란색 가름끈 뒤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은 다른 사물에 비해 덜 미지근하게 여겨졌다. d는 매일 일을 마치고 돌아와 밤에 조금씩 독서를 이어갔다. 내용은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책의 무게와 냄새, 글자의 색이 잠드는 데 도움이 되었다. d는 마지막 페이지에 끼워져 있던 갈색 가름끈으로 자기가 읽은 곳을 표시해두었고 다음에 책을 손에 들면 거기부터 이어서 읽은 뒤 그날 읽은 페이지에 갈색 가름끈을 끼워두었다. 갈색 가름끈이 본래 위치로 돌아간 뒤엔 첫장부터 시작해 노란색 가름끈까지를 읽었다. 이것은 자기가 하는 일을 잘 모르는 사람들의 구차한 변명에 불과하다. 246페이지의 마지막 문장에 이른 뒤 갈색 가름끈을 노란색 가름끈과 나란히 두고 책을 덮었다.

d는 박조배의 책을 배낭에 넣고 출근했다가 다른 날보다 조금 이르게 퇴근했다. 땀에 젖은 작업복을 배낭에 넣고 책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팔과 옆구리 사이에 끼고 명동으로 박조배를 찾아갔다. 목요일이었고 약간 싸늘한 봄밤이었다. 박조배는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명동 거리에서 여전히 음반과 양말을 팔고 있었다. 감자를 튀기는 수레와 티셔츠를 파는 수레 사이에 박조배의 작은 수레가 있었다. 중국어와 일본어로 호객하는 소리와 서로 다른 음악 소리가 뒤죽박죽으로 섞인 거리였다. 박조배는 두 손을 넓적다리 사이에 끼운 채 퇴계로 쪽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오랜만이다. 박조배가 잠시 멍하니 d를 보았다. 이것을 돌려주러 왔다고 말하며 d가 책을 내밀자 박조배가 미간을 조금 찡그리며 그것을 받았다. 어…… 그래 이거 내 책이다. 박조배는 오래전에 dd에게 그 책을 빌려줬다고 말했다. dd가 초대를 하러 명동으로 찾아온 적이 있었다고 박조배는 말했다. 너희들 옥탑으로 이사했을 때…… 집들이한다고 오라고.

그래. d는 고개를 끄덕였다. dd는 왜 같이 오지 않았느냐고 박조배가 물었다. 어 같이 오지 못했다고 d는 대답했다. 그래…… d는 박조배를, 박조배가 자기 넓적다리 위에 올려둔 갈색 책을 내려다보았다. 커버에 손가락 자국이 길게 남아 있었다. 저것은 누구의 것일까. d는 생각했다. 내 것일까 dd의 것일까 박조배의 것일까. 구급차 한대가 사이렌을 울리며 퇴계로를 지나갔다. 저녁 먹었느냐고 박조배가 물었다. d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가볼 데가 있어서 장사를 일찍 접을 참이었는데, 그전에 국수나 먹으러 갈 테냐고 박조배가 물었다.

 

d는 회현사거리에서 박조배를 기다렸다. 수레를 두고 올 테니 거기서 기다리라고 박조배가 말했으니까. 잠시 가지고 있으라며 도로 넘겨받아서 박조배의 책은 다시 d의 옆구리와 팔 사이에 있었다. 박조배가 대연각 빌딩 쪽 횡단보도 앞에 나타났다. 신호가 바뀌자 양손을 바지주머니에 찌른 채 길을 건너왔다. 크고 묵직해 보이는 스포츠백을 한쪽 어깨에 걸고 있었다. 그들은 박조배가 자주 들른다는 소공로 국숫집에서 국수를 한 그릇씩 시켜 먹었다. 실처럼 가늘게 자른 김과 파를 뿌려서. d는 국수를 먹는 내내 박조배의 책을 넓적다리 위에 얹어두고 있었다. 박조배는 공부를 하려고 이딸리아에 머문 적이 있었는데 한국에 있는 뭔가가 그리운 적은 거의 없었지만 김은 몹시 아쉬웠다고 말하며 반쯤 먹은 국수에 다시 김을 듬뿍 뿌렸다. 나 김을 되게 좋아하거든. 어렸을 때 엄마 몰래 마른 김 한톳을 다 먹어치우고 토한 적도 있었다. 애가 핏덩이를 토했다고 그날 얼마나 난리가 났는지……

더럽다 먹는데……

어 미안하다.

d는 그릇 바닥에 남은 국수를 젓가락으로 긁어 먹으며 이딸리아에서는 어디에 있었느냐고 물었다. 북부에 있었다고 박조배는 말했다. 남부엔 늪이 많아. 그리고 마피아도. 나는 습한 것도 총격전도 질색이라서 남부엔 내려가지 않았어. 박조배는 밀라노에서 일년 동안 건축을 공부했는데 성적이 무척 좋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수사들이 관리하는 기숙사에서 묵으며 나쁜 룸메이트들과 베드 벅에 시달렸기 때문이며 그때 물린 흔적이 등과 넓적다리에 남아 있다고 박조배는 말했다. 박조배의 얼굴은 핏기가 없어 보였다. 숱 많은 곱슬머리가 기름진 채 머리를 덮었고 콧잔등을 중심으로 이마부터 두 뺨까지 주근깨로 덮여 있었다. d는 박조배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그 얼굴에서 약간 길어졌을 뿐 거의 그대로인 것처럼 보였다. 오른손 검지가 안쪽으로 조금 굽어 있었는데 침묵할 때마다 왼손으로 검지를 비트는 버릇 때문인 것 같았다. 내 룸메이트들…… 박조배가 말했다. 걔들도 어떤 면에서는 나를 물었다고 할 수 있지. 걔들은 수사들에게 내 사생활을 일러바치고 나하고 같은 방을 쓰기 싫다고 돌아가면서 불평을 했어. 내가 자꾸 자기들에게…… 혁명 이야기를 한다고 뒷담화를 하고 다녔다. 정신 나간 놈마냥 걸핏하면 정치 얘기에,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며 자기들을 괴롭힌다고……

혁명에 관심이 있느냐고 d는 물었다. 박조배는 깍두기를 젓가락으로 집어 먹으며, 혁명가들을 좋아했다고 말했다.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던 사람들이고 그 믿음에 따라 바꾸려고 했거나 정말 바꿔버렸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진짜 감탄스럽지…… 특히 전간기와 2차대전 이후의 예술가들에게 관심이 많았어. 더는 근본도 없고 존나 바닥도 없던 시대에 혁명적 예술가들이 그것을 음…… 그 존나 없음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되게 궁금했거든……

박조배와 d는 국숫집을 나와 소공로를 바라보며 잠시 서 있었다. 오가는 차량 없이 도로는 거의 비어 있었다. d가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책을 내밀자 박조배는 그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가 돌려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했다.

너 가져.

그래도 되냐.

나는 이제 그런 건 읽지 않는다. 남의 나라 혁명사를 무용담처럼 읽어봤자……

박조배는 스포츠백을 고쳐 메면서 자신은 광화문 쪽으로 갈 거라며 너는 어디로 가느냐고 d에게 물었다. d는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버스를 타면 방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면 같이 갈까? 박조배가 말했다. 그들은 플라자호텔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플라자호텔 측면으로 소공로를 빠져나가자 서울광장이었다. 시청 삼거리 방향으로 거대한 무대가 설치되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잔디 위를 서성이고 있었다. 그들은 무대 앞을 떠나 세종대로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무대 위쪽에 모형배 한척이 조명을 받고 떠 있었다. 아래쪽이 파랗고 위쪽이 흰 그 배를 d는 알아보았다. 오늘이 1주기라고 박조배는 말했다. 그 배가 가라앉은 지 1년이 되는 날. 추모 행사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저녁 장사를 완전히 놓을 수는 없어 광화문 분향소에나 가자고 마음먹고 있었다고, 네가 온 덕분에 조금 일찍 나왔다고 박조배는 말했다. d는 국화를 들고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깃대에 달린 커다란 깃발 수십개가 그들의 머리 위에 있었다. 소풍을 나온 것처럼 돗자리와 배낭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고 근처 빌딩에서 바로 쏟아져 나온 듯한 직장인들도 있었다. 세종대로엔 이미 차량이 통제되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도로를 통해 광화문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박조배와 d는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광화문으로 다가갈수록 사람이 늘었고 흐름이 느려졌다. 청계광장 교차로에 이른 박조배와 d는 거기까지 걸어간 사람들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파란색 폴리스라인을 두른 차벽이 세종대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도로는 젖어 있었고 우비를 입거나 우산을 펼친 사람들이 길을 트라고 외치고 있었다. 매캐한 냄새가 났다. 목의 점막을 따갑게 자극하는 입자가 공기에 섞여 있었다. d는 트럭 위에서 차벽 너머로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둥근 헬멧들을 보았다. 광화문 쪽으로는 건너갈 수 없었다.

박조배는 전철역을 통해 광화문으로 건너가고자 했으나 지상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가 막혀 있었다. 형광 녹색 덧옷을 입고 헬멧을 쓴 전투경찰들이 계단을 메우고 서 있었다. 전철역 안에서 위로 올라오지 못하는 사람들과 지상에서 전철역으로 내려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경찰에게 항의하고 있었으나 대답도 움직임도 없었다. 버스정류장은 경찰 버스로 가로막혀 쓸모없게 되어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할까…… 역으로 내려가는 계단 끝에서 회색 배낭을 멘 남자가 아이 씨발 집에는 가야 할 것 아니냐고 항의하고 있었다. 박조배와 d는 시민들의 통행을 막지 말라고 외치는 사람들 뒤에 서 있었다. 어떡할 테냐고 박조배가 물었다. d는 걸어서 한강을 넘어갈 수도 있다고 대답했다. 그럼 지금 갈 테냐고 박조배가 물었다. d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파이낸스센터 앞이 소란스러웠다. 청계천로 방향으로 깃발과 사람들이 이동하고 있었다.

자 나랑 좀 걷자…… 박조배가 말했다.

 

내가 이딸리아를 떠날 무렵에…… 그 무렵에 이딸리아는 총선 중이었거든. 선거 내내 내가 이딸리아 친구들에게 말했다. 베를루스꼬니가 당선되면 끝이다…… 수차례 얘기했는데도 제대로 듣는 놈이 없더라. 나는 결과를 보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뭐 왜긴 왜냐 돈이 없어서지…… 2008년 이딸리아 총선에서 이딸리아의 거부이자 포르짜 이딸리아당의 창당 멤버인 실비오 베를루스꼬니가 승리해 네번째로 총리직에 올랐을 때…… 그때에 내가 이딸리아의 친구들에게, 예전 룸메이트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었다. 내가 뭐라고 했느냐면…… 너희는 이제 끝장났다, 어 이제 두고 보라고…… 진짜 두고 보라고. 베를루스꼬니는 대강 말하자면…… 이명박 같은 놈이었다. 여기는 이명박이었고, 거기는 이제 베를루스꼬니였지. 너네랑 우리는 똑같다고 내가 말했다. 이제 보라고 똑같은 꼴로 망할 거라고. 내가 그렇게 경고를 했는데 그 씹새끼들은 아 제발, 그게 다였지. 나를 내버려둬 병신아, 그게 다였어. 그래서 어떻게 됐는지를 봐라. 걔들은 망했지. 우리는 어…… 나는 그때가 최악일 거라고 생각했다……

박조배는 청계천로를 통해 종로로 우회할 작정이었고 종로를 통해 광화문으로 갈 생각이라고 말했으나 청계천로를 따라 이미 경찰 버스들이 늘어서 있었다. 모든 버스들이 시동을 건 채 대기하고 있었고 그 배기가스로 청계천 인근의 공기가 몹시 탁했다. 박조배와 d는 모전교 부근에서 조금 넓게 벌어진 틈을 발견했으나 틈 사이로 헬멧을 쓴 경찰들이 빽빽하게 대기하고 있는 것을 보고 조금 더 걷기로 했다. 뒤에서 밀려오는 사람들을 헤치고 되돌아갈 수도 없었으므로 경찰 버스들로 이루어진 흰 벽을 왼편에 두고 좁은 보도를 따라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평화행진을 보장하라는 구호가 반복되었다. 청계천을 건넌 쪽에서도 많은 사람과 깃발들이 이동하고 있었다. 박조배는 예전엔 음반을 팔았지만 최근엔 양말 위주로 장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너도 알다시피…… 요즘 사람들은 CD로 음악을 듣지는 않잖아. 중국인이나 일본인이 아이돌 음반을 가끔 사가지만 그래도 압도적으로는 양말이다…… 아이돌 얼굴하고 동물 캐릭터가 그려진 양말이 잘 팔린다고 박조배는 말했다. 박조배의 운동화끈이 자꾸 풀어졌고 그때마다 박조배와 d는 청계천 철책 쪽으로 비켜섰다. 세번째로 끈이 풀어졌을 때 d는 손을 내밀어 박조배의 스포츠백을 받았다. 박조배가 발등 위로 조금 조급하게 매듭을 묶는 동안 d는 박조배의 스포츠백을 어깨에 걸고 있었다. 무거워 보였는데 보이는 것보다도 훨씬 무거웠다. 박조배가 숨을 들이마시며 등을 펴고 일어났다. 스포츠백을 도로 내주며 d는 가방이 왜 이렇게 무겁냐고 물었다. 박조배는 스포츠백을 툭툭 두드리며 이 가방에 전재산이 있다고 말했다. 개인적인 수집품이지만 견본으로 매대에 올리기도 하는 희귀한 음반 몇장, 현금과 금목걸이, 요즘 읽는 책, 속옷과 세면도구. 물과 에너지바도 있으니 유사시에 나는 이 가방만 챙기면 된다고, 여기 든 것으로 며칠은 버틸 수 있다고 박조배는 말했다.

유사시라면 예컨대?

전쟁이나 방사능 유출이지.

d와 박조배는 속도가 느려진 인파와 더불어 잠시 서 있다가 다시 천천히 이동했다. 박조배는 조금 전에 묶은 매듭이 다시 헐거워지지는 않았는지 살피며 걷고 있었다. 여기 사람들은 그런 일들이 아주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굴지만, 그런 일들은 그렇게 벌어진다고 박조배는 말했다. 불시에 어…… 사람들이 방심하고 있을 때. 그러면 사람은 증발하고 그들의 방과 물건들이 남는다. 유럽에서는 지금도 오래된 빌라에서 그런 방들이 발견되고는 한다. 내가 이딸리아에 있을 때…… 빠리나 런던 어딘가에서 그런 방이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가끔 보았다고 박조배는 말했다. 전쟁 때 떠난 사람이 돌아오지 않아 칠십년 동안 문이 닫힌 채로 방치되어 있다가 발견되는 방들. 그런 방에 남은 사물들은 그 자체가 유령들인 것처럼 보여. 뚜껑 열린 향수병과 분첩이 놓인 화장대, 박제된 타조의 등 위로 급하게 던져진 숄…… 마지막으로 차를 마신 흔적이 그대로 남은 탁자나 불 꺼진 난로 앞으로 내던져진 장화, 그런 것들은 어떤 순간의 직전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만들고…… 그 순간까지 그 방에 머물던 사람이 어딘가에서 영영 증발했다는 것을 말해주는데 그 증발의 순간이 아주 갑자기,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박조배는 말했다. 그들은 광통교를 지나 광교사거리에서 왼쪽 길로 접어들려고 했으나 우정국로 역시 경찰 버스로 가로막혀 있었다. 헬멧을 쓰고 방패를 든 경찰들이 버스 앞에 서 있었고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버스 너머를 가리켜 보이며 우리 목적지가 바로 저 앞의 펍인데 여기를 이렇게 왜 막고 있느냐고 따지고 있었다. 박조배와 d는 잠시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조금 더 걸어갔다. 보신각 방향으로 이어진 종로8길이 막혀 있었고 종로10길도 헬멧을 쓴 경찰들로 꽉 막혀 있었다. 어디까지 막힌 거냐…… 우리가 아무래도 이 길에 갇힌 것 같다고 박조배가 말했다. 전경 버스들이 뿜어내는 매연 때문에 박조배는 계속 기침을 했다.

종로12길까지 막힌 것을 보고 박조배와 d는 청계천으로 내려갔다. 매연을 피해 내려간 것인데 매연은 벌써 청계천 바닥으로 내려가 고여 있었다. 좆도…… 괜히 내려왔다고 불평하면서도 박조배는 어딘지 신이 나 있었다. 바닥에 거품이 섞인 침을 뱉고 스포츠백을 등 뒤로 넘기고 두 손을 바지주머니에 넣은 채 성큼성큼 걸었다. 달도 별도 없었으나 환한 밤이었다. 청계천은 검게 반짝거리며 동대문 방향으로 흘렀고 이제 막 잎을 낸 버드나무와 꽃을 피운 벚나무가 조명을 받고 아름답게 그늘져 있었다. 청계천 건너편에서 깃발과 함께 이동하는 사람들이 구호를 외쳤다. 시행령을 폐기하라. 세월호를 인양하라. 이제 막 당도한 경찰들이 장통교를 꾸역꾸역 채우기 시작했다. 종로 방향으로 가려던 사람들과 경찰들이 장통교 위에서 만났다. 박조배와 d는 걸음을 멈추고 장통교를 올려다보았다. 방패와 헬멧들이 가로등 불빛을 받고 번쩍였다. 고함과 비명이 이어졌다. 밀고 밀리는 발소리와 몸싸움으로 장통교가 소란스러웠다.

조짐은 늘 있다고 박조배가 말했다.

조짐?

d는 박조배를 돌아보았다. 매연 때문에 눈이 몹시 뻑뻑했다. 유사시라는 말은 비상한 일이 벌어지는 때라는 뜻인데 비상한 일은 늘 일상에서 조짐을 보이게 마련이라고 박조배는 말했다. 갑자기……라는 것은 실은 그다지 갑자기는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불시에……라는 것은 내 생각에…… 우리가 모르는 척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우리 일상을 말이다. 일상에 조짐이 다 있잖아. 전쟁을 봐라. 맥락 없는 전쟁이 없고…… 방사능도 마찬가지, 원전이라는 조짐이 있으니까 유출도 있는 거잖아. 지금도 그렇다. 내게는 언제나 지금이 그래…… 지금은 꼭 전간기 같다. 1차대전과 2차대전, 두개의 거대 전쟁 사이엔 조짐이 아주 충만했지. 그런 조짐을 느껴. 세계가 곧 한번 더 망할 것이라는 예감이 있는데 그게 굉장히 확실하다. 또 망할 것 같고 이번이 되게 결정적일 것 같다는…… 그런 예감이 있어. 너 전간기 예술가들의 작업을 봐라. 특히 음악하는 사람들, 클래식 재즈 할 것 없이…… 종말을 앞둔 사람들처럼 노래하고 연주를 해. 그들은 확실히 뭔가를 느낀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말하자면 내가 지금 느끼는 것, 대기 속에서 다가오는 재앙을. 나는 지금이 그때와 비슷하다고 생각해…… 한마디로, 직전이고…… 그래서 이런 광경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한다며 박조배는 장통교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턱으로 가리켜 보였다.

이 상황을 봐라. 얼마나 투명하고…… 얼마나 좆같냐. 그리고 그 좆같음이 눈에 보이잖아? 그냥 조용히 아닌 척하고 망해가는 것보다는 낫다고 나는 생각한다……

수표교에서 박조배와 d는 도로로 올라가려고 했으나 청계천에서 도로로 올라가는 좁은 계단이 경찰들로 막혀 있었다. 박조배와 d처럼 청계천으로 내려왔던 사람들이 철제 난간이 달린 계단에서 경찰들에게 화를 내고 있었지만 경찰들은 대답을 하지 않았고 길을 터줄 조짐도 보이지 않았다. 계단 위쪽의 상황을 지켜보던 여성이 마지막 단에 털썩 앉아 구두를 벗은 뒤 스타킹을 신은 종아리를 주물렀다. 몇 사람이 청계천 측벽으로 풀쩍 뛰어 철쭉이 자라는 화단 위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박조배와 d도 나뭇가지를 쥐고 화단에 오른 뒤 철책을 넘었다. 그들은 수표교 근처에서 막히지 않은 샛길을 발견하고 그 길을 통해 종로로 나갔다. 종로3가역이었다. d는 퇴근한 지 두시간 만에 세운상가 근처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았다.

종로2가 사거리에서 그들은 보신각 방향으로 길을 건넜다. 종로2가는 다른 날과 다름없이 평온하고 번화했다. 금강제화, 유니클로, 지오다노, 귀금속 도매상가 모두 환하게 조명을 밝혀두고 영업을 하고 있었다. 조금 전에 1차를 마쳤거나 2차를 가려는 사람들이 시큼한 냄새를 풍기며 거리를 걷고 있었고 잡화점이나 봄 특선 메뉴를 파는 음식점들은 투명한 문을 열고 음악을 틀어두고 있었다. 공기에 KFC의 닭튀김 냄새가 배어 있었다. 도로는 거의 비었고 청계천을 빠져나온 사람들이 점점이 광화문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경찰이 호각을 불며 도로에 남은 차들을 동대문 쪽으로 돌려보내고 있었다. 박조배와 d는 취한 사람들과 데이트를 하러 나온 연인과 봄을 맞아 겨울 외투를 벗고 나온 사람들 틈에서 걸었다. 보신각 근처로 갈수록 보도는 한산해졌다. 종각을 지나면서 그들은 도로로 내려갔다. 양쪽 보도는 경찰 버스와 병력으로 막혀 있었다. 박조배와 d는 차량 통행이 완전히 사라진 도로를 걸어 세종대로 사거리에 이르렀다.

그곳에 당도해서야 그들은 그들이 청계광장 쪽에서 목격한 차벽 뒤로 몇겹의 벽이 더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북쪽과 남쪽을 잇는 세종대로는 두 겹의 차벽으로 가로막혀 북쪽으로도 남쪽으로도 갈 수 없게 되어 있었다. d는 오가는 차도 행인도 없이 넓은 도로가 깨끗하게 비어 있는 것을 보았다. 국화를 쥔 젊은 여성과 남성이 차벽 사이를 들여다보며 광화문광장 쪽으로 나갈 틈을 찾고 있었다. d는 그들이 틈을 찾아내지 못하고 달각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종각 쪽으로 점점 이동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세종대로 사거리는 두개의 긴 벽을 사이에 둔 공간(空間)이 되어 있었다. 너무 밝고 고요하게 정지되어 있어 진공이나 다름없었다. 사십여분 전에 박조배와 d가 머물고 있던 청계광장 쪽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d는 경찰 버스 너머로 솟은 이순신 장군 동상을 바라보았다. 저 소리는 이 간격을, 이 진공을 도저히 통과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배야 이것이 혁명이로구나. d는 생각했다. 우리는 우회한 것이 아니고 저 차벽이 만들어낸 흐름을 충실하게 따라 찌꺼기처럼 여기 도착했구나. 혁명은 이미 도래했고 이것이 그것 아니냐고 d는 생각했다. 혁명을 거의 가능하지 않도록 하는 혁명…… 격벽을 발명해낸 사람들이 만들어낸 혁명…… 밤공기가 싸늘했다.

박조배는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고 서서 교보빌딩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 저기가 이 도시의 1번지라는 것을 아느냐고 박조배가 말했다.

 

 

9

 

비상한 일이 벌어지는 때.

d는 그 말을 생각할 때마다 작은 유백색 단지를 생각했다. dd의 뼛가루를 담은 유골단지. 그것을 본 지도 일년이 넘었으나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d의 손 안에 있었다. 두 손 안에. 그리고 그것이 매우 미지근할 거라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워 d는 눈을 감았다. 그 몸이 모두 그 작고 단순한 단지 안에 담겼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d에게는 박조배의 배낭 같은 것이 필요없었다. 비상한 일이 벌어지는 때……라는 것이 따로 있을까? 그것이 따로 있다면, 이렇게 끝날 조짐도 없이 계속 이어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 이어지고 있다. 조짐도 무엇도 없이 이것은 이렇게 이어진다. 박조배는 금방이라도 세계가 망할 것처럼 이야기했으나 d는 의아했다. 망한다고?

왜 망해.

내내 이어질 것이다. 더는 아름답지 않고 솔직하지도 않은, 삶이. 거기엔 망함조차 없고…… 그냥 다만 적나라한 채 이어질 뿐. 버스가 커브를 돌아 정류장에 섰다. d는 버스에서 내려 낡은 아파트단지로 들어갔다. 사과와 딸기를 샀다. 이승근과 고경자를 보러 가는 길이었다. 이승근은 서너해 전에 통풍을 이유로 목수를 그만두었다. 그는 부천에 그의 명의로 허름한 집을 한채 가지고 있었고 지금은 그 집에서 나오는 월세 수입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그의 집에서는 목수의 흔적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고 그의 아내인 고경자는 극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이승근과 고경자와 d는 거실 소파에 앉아 사과와 딸기를 먹었다. 이승근은 거의 일년 만에 나타난 d에게 친절하게 굴려고 노력하다가도 갑자기 입을 다물었고 모든 것에 정나미가 떨어진 사람처럼 냉담해졌다. 그는 자신의 세입자들이 요즘 월세를 제때에 지불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생활비가 부족하다. 이승근이 d를 책망하듯 말했다. 고경자는 줄곧 접시 가장자리를 노려보며 딸기를 먹고 있었다. d는 그녀가 한쪽 발에만 실내용 슬리퍼를 신은 것을 보았다. 녹색 줄무늬가 있는 소프트 슬리퍼였다. 그녀가 한동안 바가지에 밥을 담아 먹었다는 것을 d는 알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의 먹을 것을 감추는 것처럼, 밥상 아래 바가지를 두고 다리 사이에 끼우고 힘껏 비벼 먹었다. d는 어느날 그것을 목격했고 왜 그렇게 먹느냐고 물었다. 아버지와 내 밥은 밥그릇에 담아주고 왜 본인의 밥은 바가지에 넣어서 바닥에 두고 아무렇게나 비벼 먹느냐고. 고경자는 몹시 당황하면서, 이렇게 먹으니까 좋다고, 너도 이렇게 먹어보라고 우리 이렇게 먹자고 하면서 호소하듯 이런 말을 덧붙였다.

옛날 생각하면서.

언제적 옛날을 말하는 것이냐고 d가 묻자 고경자는 그것을 새삼 왜 묻느냐고 묻는 것처럼 d를 바라보았다. 어렸을 때…… 이렇게 먹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고경자가 친척의 집에서 식모로 자랐다는 사실은 d도 조금씩 들어 아는 일이었다. 그녀의 부모는 황해도 전쟁난민 출신으로 경기도 강화에 정착한 뒤로 별다른 기술도 재산도 없이 품팔이로 먹고살았는데, 아들을 하나, 딸을 둘 낳았다가 장녀를 폐결핵으로 잃었다. 고경자는 이들 남매 중에서 막내로 자라다가 고등교육을 받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포목점을 하는 친척에게 맡겨졌으나 고등교육은커녕 공부는 일절 없었고 식모로 지내면서 친척 내외와 사촌들이 먹고 남긴 반찬들을 바가지에 모아 밥과 비벼 먹는 생활을 했다. 너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살림이 너무 가난해 그녀를 친척에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고 했지만 아들은 두고 딸을 보냈어. 가난 탓을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녀가 계집아이였기 때문이야. 그들은 식비를 줄이고 오히려 생활비를 보태는 노동을 하는 데 아들을 보내는 대신 딸을 보냈고 그 선택에는 아마…… 조금의 망설임도 후회도 없었을 거라는 게 고경자의 어린 시절을 d에게 전해들은 dd의 생각이었다는 것을…… d는 떠올리면서 고경자가 먹고 남긴 딸기 꼭지를 바라보았다. 그 옛날의 무엇을 어머니는 그 정도로 애타게 그리워했을까. 바가지에 밥을 비비며 꼬마 시절의 자신을 흉내낼 정도로 옛날, 거기엔 특별한 무엇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고 d는 생각했다. 거기엔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나. 꼬마 고경자가 있고, 현재의 고경자가 없지…… 어머니가 요즘도 밥을 비벼 먹느냐고 d는 물었다. 이승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밥을 잘 먹는다, 아주 잘 먹는다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d는 세시간가량 그 집에 머물다가 일어났다. 고경자는 소파에 누워 잠들었고 이승근이 현관에서 d를 배웅했다. d는 아버지의 바지에 밴 지린내를 맡았다. 실내 구석구석에 부부의 배설물 냄새가 배어 있었다. d는 전에도 이 공간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뒤섞였으면서도 각자 구별되는 냄새를 맡았고 그들이 그 냄새를 모를 리 없다고 생각했으며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 두 사람이 상대의 냄새를 견디며 같은 공간을 나눠 쓰는 것에 관해 생각하느라고 어머니나 아버지의 말을 건성으로 듣고는 했던 것을 떠올렸다. 신발장이 현관에 놓여 있었고 그 컴컴한 궤짝에 든 사물들의 냄새가 났다. d는 그 속에 낡은 구두와 운동화와 누구도 신지 않는 남성용 여성용 샌들 같은 것들이 저절로 납작하게 눌린 채 엎치락뒤치락 놓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뒤죽박죽으로 섞인 채…… 조금씩 부서지고 있는 이승근과 고경자의 삶을 d는 생각했고 dd가 살았다면, 그래서 그들 공동의 삶이 계속되었더라면, 자신과 dd도 마침내 이런 광경에 도달하게 되었을지를 생각해보았다. 잔혹한 광경이었다. 보잘것없고 혐오스러웠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얼마나 아름다울까. dd와 더불어 삶에 권태롭게 되는 것. 두 사람 각자와 공동의 사물에 둘러싸인 채 조금씩 닳아 사라져가는 것. 삶이 없고, 닳아 없어질 물리적 형태도 없으므로 dd에게는 내내 도래하지 않을 광경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것이 올 것이다. d는 현관에 서서 이승근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것을 깨달았다. 권태, 환멸, 한조각의 정나미도 남지 않은 삶. 이와 같은 얼굴이 나에게 올 것이고, 나는 혼자 그것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d가 현관에서 한참 움직이지 않자 센서등이 꺼졌다. 이승근이 d를 향해 너의 애인은 왜 함께 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러게요, d는 생각했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은 왜 함께 오지 않았나.

모르겠다고 d는 대답하려고 했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말을 하려니 입에 힘이 들어가고 턱이 벌어지지 않았다. 아마도 웃는 얼굴이 되었을 거라고 d는 생각했다. 귀가 딱딱하게 뒤로 젖혀지고 입이 당기고 턱이 굳고 눈도 좁아졌다. 이것이 웃음일까? d는 생각했다. 지금 내 얼굴의 상태, 이 불편한 긴장감, 이것이 웃음일까? 그런데 뭐가 웃겼지? 아버지의 질문이 웃겼나? 명치가 간질거렸다. d는 폭소를 터뜨릴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모르겠다고 d는 대답할 수도 있었다. 모르겠는데 실은 모르지 않아서 모르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 왜 함께 오지 않았느냐…… 왜냐하면 너무 하찮기 때문이라고. 나도 dd도 그리고 당신도. 우리가 너무 하찮아서, 충돌 한번에 내동댕이쳐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10

 

5월도 중순을 넘어설 무렵 상가에서 노인이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창고나 빈방이 많아 인적이 드문 꼭대기 층에 방을 몇년째 빌려 누구도 모르게 드나들며 생활하던 노인이었는데 상가를 관리하는 수위에게 발견되어 무연고 시신으로 실려 갔다는 소문이었다. 그 노인의 성이 윤씨라는 이야기를 들은 여소녀가 5층 관리실로 찾아가 죽었다는 사람의 이름을 물었으나 이 상가에서 그렇게 죽은 사람은 없고 괜한 소문일 뿐이며 단지 소문으로 바쁜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지 말라는 핀잔을 들었을 뿐이었다. d가 일을 마치고 수리실로 올라갔을 때 여소녀는 작업대 앞에 놓인 의자를 짓누르듯 앉아 앰프를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ddd의 음반 중에서 한장을 골라 턴테이블에 얹었다. 배낭을 바닥에 내리고 의자에 앉았다.

음악을 들었다.

종일 짐을 나르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데 동원된 근육과 관절들이 툭, 툭, 소리를 내며 늘어졌다.

오전부터 내내 비가 내리고 있었다. 검은 먼지로 덮인 창은 닫혀 있었고 밤이 되도록 그치지 않은 빗줄기 때문에 종로 쪽 불빛들이 번져 보였다. 여소녀는 테스터 바늘로 기판의 상태를 확인했다. 탄 것들은 완전히 죽었고 아래쪽에도 흐름이 시원치 않은 콘덴서가 있었다. 더는 생산되지 않는 부품들이었지만 다른 기계에서 떼어낸 비교적 멀쩡한 것을 여소녀가 몇개 가지고 있었다. 여소녀는 인두를 쥐고 새카맣게 탄 저항들 주변의 납을 녹였다. 죽은 것과 수상한 것을 떼어내고 부품을 새로 붙인 뒤 납땜으로 고정했다. 납 연기가 작업대 위에 자욱하게 고였다. 여소녀는 창을 열었다. 공기가 순식간에 뒤섞였다. 앰프를 뒤집어 바로 하려다가 너무 묵직한데다 작업대 위의 공간이 애매해 d에게 도움을 구했다. d가 오디오를 끄고 작업대 앞으로 와서 거들었다. 앰프를 90도로 세웠다가 바로 눕혔고, 빼두었던 진공관들을 제자리에 꽂았다. 전원을 켜자 진공관 다섯개에 연하고 어둑하게 불이 들어왔다. 여소녀는 진공관들이 예열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라디오 다이얼을 이리저리 돌렸다. Zion.T의 「꺼내 먹어요」, 전직 개그맨이 20대 남성을 성추행한 혐의로 구속되었고,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두명의 환자가,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중동호흡기증후군 확진 판정을 받았습니다 세명은 격리, 일본의 국민걸그룹 AKB48의 총선거 열풍이 대단하며, 강변북로에서 트럭과 택시 추돌사고로 양방향 지체…… 어째서 앰프에 전구가 달려 있느냐고 d는 물었다.

전구?

진공관은 전구가 아니라고 여소녀는 말했다. 구조가 다르고 역할도 다르다. 전구는 소리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진공관은 소리를 좌우한다고 그는 말했다. 정류와 증폭이라고…… 들어봤나? 정류는 산만하게 흩어진 것을 한 방향으로 흐르게 하는 것이고, 증폭은 신호의 진폭을 늘리는 것인데 말이야, 이 앰프에서 그걸 하는 게 얘네들이야. 이게 제대로 켜져야 이 앰프가 사는 것이고, 모든 게 제대로 흐르는 거라고.

여소녀는 날이 종일 궂어 몸이 다 구겨진 것 같다며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했다. d가 진공관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더니 들어볼 테냐며 다이얼을 조절해 가장 깨끗한 소리가 나오는 채널을 잡았다. 브람스의 「사포의 송가」(Sapphische Ode op.94-4).

어떠냐 다르냐.

모르겠어요.

들어봐.

……다른 것 같기도 하고.

그래?

소리가 좀, 다르다고 말하자 여소녀가 즐거운 기색으로 물었다.

다르냐? 다르게 들리냐?

이게 더 좋은 것이냐고 묻자 여소녀는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그건 모르지,라고 대답했다.

예전엔 TR이 없었으니까 이런 걸 달았지. 진공관은 다루기 힘들고 깨지기 쉬우니까 실리콘이 발명되고 나온 것이 TR인데…… TR을 뭉친 것이 IC이고…… 집적회로라고도 하지. 그러니까 이 기계는 TR이나 IC가 발명되기 전에 나온 빈티지야. 지금은 TR 앰프도 빈티지가 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TR에는 진공관에 있는 낭만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 하지만 힘이 좋다고 TR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 이유로 그걸 싫어하고 이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 어느 쪽이 더 좋다고 말하기는 애매해.

여소녀가 다시 다이얼을 돌렸고 그들은 미스 엘라 피츠제럴드가 부르는 「Blue Moon」을 들었다. d는 눈을 뗄 수가 없어 진공관을 바라보았다. 너무 쉽게 깨지거나 터질 수 있는 사물. 그 진공을 통과한 소리들에도 잡음이 섞여 있었다. d는 위태로워 보일 정도로 얇은 유리 껍질 속 진공을 들여다보며 수일 전 박조배와 머물렀던 공간을 생각했다. 그 진공을. 그것은 넓고 어둡고 고요하게 정지해 있었으나 이 작고 사소한 진공은 흐르는 빛과 신호로 채워져 있었다. d는 다시, 세종대로 사거리에서 느꼈던 진공을, 문득 흐름이 사라진 그 공간과 그 너머, 거기 머물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들과 d에게는 같은 것이 거의 없었다. 다른 장소, 다른 삶, 다른 죽음을 겪은 사람들. 그들은 연인을 잃었고 나도 연인을 잃었다. 그것이 유일한 공통점이었다. 그들이 싸우고 있다는 것을 d는 알고 있었다. 그들은 무엇에 저항하고 있나. 하찮음에 하찮음에.

 

나의 사랑하는 사람은 왜 함께 오지 않았나.

d는 목이 뻣뻣해 침을 삼켰다.

 

너의 오디오가 이제 좀 특별해졌느냐고 여소녀는 물었다.

같은 모델이라도, 그 기기를 다룬 사람에 따라 소리가 다르다고 여소녀는 말했다. 세상에 오직 그거 한대뿐이니까, 빈티지를 고치려는 사람들은 고친다고 말하지 않는다. 살린다고 말하지.

음악이 이어졌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수리실 안으로 불어 들었다. 비가 들이치자 여소녀는 창을 닫았다. 거무스름하게 그을린 유리 벌브 속에 불빛이 있었다. d는 무심코 손을 내밀어 그 투명한 구()를 잡아보았다. 섬뜩한 열을 느끼고 손을 뗐다.

쓰라렸다.

d는 놀라 진공관을 바라보았다. 이미 손을 뗐는데도 그 얇고 뜨거운 유리막이 달라붙어 있는 듯했다. 통증은 피부를 뚫고 들어온 가시처럼 집요하게 남아 있었다. 우습게 보지 말라고 여소녀가 말했다. 그것이 무척 뜨거우니, 조심을 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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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은 「디디의 우산」(『파씨의 입문』, 창비 2012)과 「웃는 남자」(『아무도 아닌』, 문학동네 2016 출간 예정)의 후속작입니다. 본문에 언급된 책(REVOLUTION)은 크리스토퍼 알렉산더(Christopher Alexander)의 『영원의 건축』(The Timeless Way of Building)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