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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중편 특집
박민규 朴玟奎
1968년 출생. 장편소설 『지구영웅전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핑퐁』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소설집 『카스테라』 『더블』 등이 있음. kazuyajun@hanmail.net
홀리랜드
예수야...
너 언제 인간 될래?
고개를 떨군 채 예수는 답이 없다. 그는 20분이나 늦었다. 정확하게는 17분 55초 74지만 리허설까지 고려하면 펑크라고 봐야겠지. 투구를 벗고 나는 잠시 머리의 열을 식힌다. 서늘한 바람에 17분 55초 74는 식혀야 컨디션이 돌아올 것 같지만 그럴 시간이 없다. 진정하자고 나는 스스로를 다독인다. 그래, 우선은 이유를 아는 게 중요하다. 투구의 장식물을 건성으로 손질하며 온화한 얼굴로 괜찮다고, 나한테만 살짝 털어놓으라고 나는 말한다. 땜빵으로 올려보낸 성가단의 노랫소리에 묻혀 다른 스태프들은 우리의 대화를 듣지 못한다. 예수가 입을 연다. 다시 말해, 가라사대.
장자(莊子)랑 같이 컵라면 먹었습니다.
컵...라면?
예, 5게이트 쪽 휴게실에서요.
혹시... 국물까지 다 마셨니?
그럴 리가요... 국물은 남겼습니다.
왜? 악착같이 다 비우고 내년 봄에 오지 그랬냐?
장자가 또 무슨 퀴즈를 풀어보라고 해서...
차라리 똥 싸다 늦었다 그래라.
죄송합니다.
누가 먼저 먹자고 했는데?
장자가요.
장자랑 친하니?
아니요.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뭐. 나는 웃는다. 한소리 하고 싶지만 그럴 시간이 없다. 우리 회개하자. 예수의 손을 잡고 짧게 기도를 끝낸 후 나는 말〔馬〕에 오른다. 봐서 알겠지만 예수가... 착하다, 거짓말도 못하고... 또... 착한데 귀가 얇아... 아니, 그보다는 맘이 여려... 그러니까 내 말은... 장자 이 새끼가 까져가지고... 씹새끼. 언덕 위를 향해 나는 큐 사인을 보낸다. 분주히 스태프들이 행렬을 정비한다. 노래를 마친 합창단이 내려오면 바로 우리가 이 길을 올라야 한다. 면류관을 쓰고, 구레네 사람 시몬과 십자가를 나눠 지고 예수도 스탠바이에 돌입했다. 잘하자는 의미로 나는 예수에게 윙크를 보낸다. 잔뜩 쫄아 있던 스태프들의 표정이 풀어지고 예수의 얼굴도 어린아이처럼 환해진다. 어떤 경우에도 나는 예수와의 관계를 서먹하게 만들지 않는다. 존중해주고 포용해주고 보호해준다... 그러니까 거의... 친부모지 뭐. 이제 골고다에 오를 시간이다. 이랴, 하고 나는 앞장서서 언덕을 오른다. 도중에 마주친, 급히 땜빵을 해준 티모(성가대장)에게도 나는 윙크를 잊지 않는다.
탕.
이윽고 망치질이 시작된다. 메시아를... 유대인의 왕을 십자가에 못 박는 순간이다. 흠칫 놀라는 말의 고삐를 당겨주며 나는 자연스레 말이 십자가의 둘레를 따각따각 돌도록 유도한다. 언덕을 올라선 바람이 망토라도 펄럭여주면 그림이 더 살겠지... 이래저래 40분이 딜레이되었지만 사실 그런 건 중요치 않다. 핵심이 아니란 얘기지. 보라, 은혜에 찬 저 눈길들을... 흐느낌과 탄식을... 울먹이며 기도문을 읊조리는 신도들의 비통함을... 예수를 보기 위해 1.3AU1)를 건너온 저들이 바라는 건 오직 하나다. 살아 숨쉬는 예수를 만나는 것... 그와 대화를 나누고... 그의 최후를 목도하는 것... 그러니까 예수만 보여주면 만사 오케이다 이 얘기지. 지금이 그 마지막 프로그램이다. 흔히 말하는 클라이맥스!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보름 남짓한 체류를 끝내고 이제 곧 신도들은 이 성스러운 땅을 떠나야 한다. 우리야 늘상, 일년 열두달 되풀이하는 짓이지만 신도들에겐 일생 단 한번의 기회이다. 그래서 이 짓이 힘들다. 끝까지 저들을 홀라당 속여야 한다는 압박감... 남은 인생에 있어서도 길 잃은 어린양이 되지 않게끔 결속력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부담감...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이 짓 아무나 못한다. 어지간한 애국심으론 하루도 못 버틸 일이지. 암, 그렇고말고.
그래서 늘 최선을 다한다.
나는
은하계 최고의
애국자기 때문이다.
당신이 만약 은하계에 살고 있다면, 일생에 부디 한번쯤은 나 같은 애국자의 삶에 대해 생각해주기 바란다. 이름을 감춘 희생과 헌신... 거룩한 발자취에 대해 말이다. 아틀라스의 고단한 어깨 위에서 니미 평생 잠만 디비 자지 말고, 말이다. 하기야 말해 뭐하겠는가. 나 같은 거인에겐 애당초 어울리지 않는 하소연이다. 따각따각. 말을 움직여 나는 자리를 이동한다. 무의미한 동작으로 보일지는 모르겠으나 실은 계산된 행동이다. 한마디로 킬각 선사... 예수의 손에서 솟구친 피가 십자가와 땅을 적시는 장면을 신도들에게 잘, 보여주기 위함이다.
물론 진짜 피는 아니다. 저 거룩한 피로 말할 것 같으면... 소품으로 준비한 못에서 방사되는 것이다. 놀라 뒈질까봐 단가는 차마 공개를 못하겠다. 그거 알아? 저 칙칙한 고대 로마의 쇠못 속에 23세기에 개발된 초정밀 중입자가속기술과 부속장치들... 25세기의 과학이 응축된 의료용 펌핑캡슐과 고농도 인공혈액... 피코폭약이며 잉곳분사노즐...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든 복잡한 메커니즘이 내재된 사실을... 이 말은 안 할까 했는데 잔뜩 찌푸린 저 하늘도 돈이다. 알랑가 몰라. 멀쩡한 하늘 찌푸리는 데 돈이 워~얼매나 드는지... 좀 전에 우두둑 예수의 팔을 뽑았지만 TAS 인공고관절이며 NM308 연골튜브... 또 거기 부속한 복잡한 인공신경조직망이 예수의 어깨에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할 거다. 예수? 예수는 하나도 안 아프다. 지금 저 손바닥은 어쩌냐구요? 걱정도 마시게 이 사람아. 수술로 마련해놓은 못구멍이 있지 말입니다. 발등도 마찬가지. 무식하게 그냥 뚫은 구멍이 아니라... 다~ 우리가 알아서... 또 뭐, 옆구리는 맨입으로 쑤시나? 창날이 들어갈 길고 좁은... 뭐였더라? 하여간에 무슨 수축터널이 있는데 다 말하자니 입이 아파 다 돈이란 말로 설명을 대신한다.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예수가 외친다. 낄낄대며 병사들이 예수의 오른손마저 못 박아버리자 해풍에 실린 신도들의 절규가 에코가 되어 돌아온다. 다가설 수 없기에... 그저 지켜봐야만 하기에 더 피 끓는 절규다. 오천명의 신도들이 지금 요나(Jonah)에 올라 있다. 요나는 배〔船〕다. 골고다는 야트막한 언덕이고 언덕 한쪽은 가파른 절벽으로 바다에 접해 있다. 요나는 무지 큰 배여서 갑판에 선 신도들은 어느 누구라도 한눈에 언덕을 볼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선상을 에워싼 줌 뷰 투명막은 눈앞의 일처럼 현장을 목도케 하며... 하나만 더 말하자, 절벽을 이룬 바위들이 실은 웅장한 음향시스템임을... 때문에 예수의 숨소리, 언덕을 올라서며 당하는 채찍질 소리까지 생생하게 그들에게 전달됨을... 즉 이 언덕은 잘 설계된 무대, 신도들은 관객인 셈이다. 그렇다. 이것은 극(劇)이다. 하지만 이곳을 다녀간 어느 누구도 이것이 극이란 사실을 알지 못한다. 보라,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예수의 고난을... 사실 그 자체인 피와 살의 실존적 희생을... 그러니까 누구라도... 오오 주여, 내가 다 눈물이 날라하네... 물론 맘만 먹으면 5초 만에 눈물 뚝뚝 할 수 있지만... 오천명의 신도들 앞에선 언제나 냉정을 유지해야 한다. 나 역시 이 장엄한 극의 일부이며 사건의 흐름이기 때문이다.
나는 늘 배우들에게 말한다. 스스로의 내면에 집중하라고. 의식의 흐름이 마르지 않는 강줄기가 되도록 유지하고... 자연스레 다른 강들과 만나 바다를 이루는 물결이 되라고... 물살이 섞이듯 대사를 나누고... 자연스런 내면의 흐름을 동작으로 확장하라고... 사건이라는 파도는 그렇게 발생하며... 이는 다름 아닌, 각자의 내면에 담긴 작은 출렁임의 합산이라고... 그러니 자연을 통해 연기를 배우라고... 아무리 작은 파도에도 우연과 필연 모두가 존재하듯... 자신의 연기 속에 즉흥과 설계가 유기적으로 공존해야 한다고... 좋은 연기란 무엇인가? 물론 정답은 없지만 끝내 이를 추구하는 자만이 정답의 근처에 다다를 수 있다고... 나는 말한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흐느끼는 오천명의 시선 앞에서... 숨소리조차 섣불리 낼 수 없는 환경 속에서... 모든 긴장감을 이겨내고 자신의 내면을 컨트롤할 수 있는 배우는 흔치 않다. 배우는 아니지만
나는 이러한 것들을 알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메소드 연기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그 정답을 쓱싹, 제일 먼저 답지에 적을 수 있었는지 스스로도 의문이다. 예컨대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즉흥과 설계가 유기적으로 공존하는 내면의 울림을... 자연스런 흐름, 내지는 하나의 물결로 승화시켜... 극이라는 거대한 바다에 소리 없이 합류 중이다. 뭔 소리냐고? 그래, 백문이불여일견이지. 만약 당신이 연기에 관심이 있다면 지금부터 내가 행할 연기를 똑똑히 눈여겨보면 좋을 것이다. 교과서를 보는 마음으로... 하지만 내게 말을 걸면 안 돼, 예컨대 휘슬을 불거나 박수 짝짝 같은 거 말이야. 그러니까 나 모르게 몰래 보란 말이지. 왜냐구? 우선 그러면... 내가 부끄럽자나. 또 누구라도, 누군가를 의식하는 순간 내면 속 우연과 필연의 비율이 흐트러지며 장이루2)가 얘기한 ‘인위적인 연기’로 전락하기 때문이지. 자, 잘 봐봐. 마음의준비마음의준비 5, 4, 3, 2, 1... 지금 나는 고삐를 거머쥔 채 고개를 떨궜는데—고뇌에 찬 지도자의 모습보다 지금 이 순간을 대변해주는 게 또 있을까—즉흥적으로 떠오른 생각 때문이지. 어때? 이 속에 담긴 우연과 필연의 황금비율... 즉흥과 설계의 유기적 공존을 알아챘다면 자네에겐 좋은 배우가 될 자질이 있는 셈이지. 하지만 중요한 건 지금부터야. 자, 잘 보라구. 나는 이미 당신을 의식하지 않아.
잊는다 잊는다 잊는다 잊었다...
모든 걸 잊고 나는 스스로의 내면에 집중한다.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메시아의 형(刑)을 집도해야만 하는 지도자의 내면을... 카타콤처럼, 또 크레타의 미궁처럼 얽혀 있는 그 심연을... 그러나 드러나지 않게... 강의 가장 밑바닥을 흐르는 물과 같이... 무거우면서도 심도있게... 절제되고 치밀하며... 완성도 높은 연기의 물결을... 극이라는 바다에 고요히 보태는... 지극히 헌신적인 5번 경추의 움직임을 통해... 나는 고개를 치켜든다. 그리고 햄릿의 광기... 맥베스의 엄격함... 리어왕의 권위... 오셀로의 번민... 게다가 이들을 창안한 셰익스피어의 전지적 작가시점까지를 모두 담은 시선으로... 나는 예수를 본다, 응시한다. 짜릿하다. 가끔 이럴 때가 있다. 나 자신의 연기에 스스로가 매료되는... 이봐, 빌! 하고 나는 스스로에게 말을 건다. 정말 자네라는 남자... 그 끝이 보이지 않는군. 별말씀을, 하고 나는 또 스스로에게 화답한다. 난들 어쩌란 말인가. 타고났는데.
애국자로서
내게 단점이 있다면 한가지다.
그 내면이
너무 깊다는 것이다.
세상이 눈여겨보는 것은
나처럼 깊이를 지닌 애국자가 아니다.
애국자인 척하는 내시들
예컨대 딱 지금 같은 상황에서
말 궁둥이만 살짝 돌리고
여전히 자기가 중심에 선 채
자, 잘 보시오 여러분~ 이것이 메시아의 피요, 피!
이거 우짜지? 예수님 디지겠네? 꽥꽥 생색을 내는
극을 망치는 내시들이다.
불만을 토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가끔, 이런 기분이 강하게 들 때가 있다. 사실 요 며칠 컨디션이 좋지 않다. 뭔가 흐트러진 듯한 이 느낌... 완벽하지 못하고... 자꾸만 뭔가가 어긋난다는 불안감... 다른 누구도 아닌 예수가... 지각을 했기 때문도 아니다. 그래, 어쩌면 극과는 상관없이... 여기저기 불거지고 있는 작금의 정치적 현안이 원인일지 모른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결국 나 같은 애국자는 그런 일들로 인해 깊은 내상을 입는 거니까... 숨길 수 없는 사실이고... 답답한 현실이다. 상부를 향해 나는 외치고 싶다. 진짜 거인이 누군지... 누가 진정 이 세계를 떠받치고 있으며... 책임이란 걸 질 줄 아는 진짜 애국자인지... 가려보는 눈을 제발 키우라고 말이다. 맘 같아선 당장 지구로 날아가 저 여깄습니다, 여깄어요 손들어 출세한 내시 몇놈... 리어네이키드 초크로 두둑, 해버리고 싶지만 나는 참는다. 늘... 참아왔다. 내가 떠나는 순간 무너지는, 그래서 한순간도 손을 뗄 수 없는... 나만의 십자가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거인의 운명이라 생각하게나 빌. 나는 결국 스스로를 위로한다. 내면이 깊은 것이 어찌 죄가 될 수 있겠는가,라고도 한다. 이런다고 내가
잡념에 빠졌다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 몸께서는 말이다... 다~ 보고 계시다. 예컨대 좀 전에 이코(로마 병사) 녀석이 보인 연기의 미숙함이란... 그러니까 십자가의 구멍에 예수의 손과 못을 포개고—주저 없이—망치를 치켜들 때였다. 70점, 하고 나는 속으로 점수를 매겼는데 사실 이렇다 할 실수는 아니었다. 도리어 할 만큼 했다고도 할 수 있는 연기였지. 암, 그렇고말고. 병사 역할은 대개 2류 배우들에게 주어지는데 사실 별다른 연기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극이 끝나면 나는 이코를 불러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자네의 문제점이 뭔지 아나? 주저함이 없어도 너무 없다는 거라네. 말하자면 인간과 기계의 차이랄까? 묻겠는데 로마 병사는 인간인가 기계인가? 그렇지 인간! 어떤 상황에서도 존재의 경계선을 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훌륭한 연기의 기본이라네... 덜덜 떨며 감사의 눈물을 흘릴 이코의 표정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므흣해진다. 나는 늘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그리고 조언이란, 보드라운 깃털에 둘러싸인 예리한 칼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훌륭한 조언 없이 배우는 성장할 수 없고 배우들의 성장 없이 극은 절대로 나아지지 않는다. 혹자는 말할지 모른다. 당신은 지나칠 정도로 완벽을 추구한다고. 지극히 옳은 말이다. 나는 완벽하지 않으면 똥이 안 나오는 사람이다. 매사에 그렇다. 물론 또다른 이유가 있긴 하지. 모두에게, 그러니까 저분은 모든 걸 보고 계신다—라는 느낌을 줄 때의 그 기분이
나는 좋은 것이다. 어떤 극에도 옥에 티는 존재한다. 신께서 만드신 이 세계에도 티끌이 태산이듯이, 말이다. 거기 비한다면 지금의 이 무대야말로 40분 늦긴 했지만 완벽에 가까운 세계가 아닌가, 나는 자부한다. 보라! 먼발치에 선 제사장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바리새인들... 흥분한 군중들... 어린 요한과 마리아... 구레네 사람 시몬... 돌 뒤에 몸을 숨긴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의 발치에 디딤목을 설치 중인 로마의 병사들을... 오오, 주여! 야리(막달라 마리아)의 연기는 진짜 물이 올랐다. 18세기 바로크 오페라학의 권위자이자 수석배우인 카를(제사장)의 눈빛엔 그 깊이가 더해졌으며... 뭐, 물론 이 몸과 비교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바리새인 역을 맡은 중견들의 연기도 흠잡을 데가 없다. 그리고 저... 우매한 유대인 군중을 보라. 스따니슬랍스끼3)가 환생한다 해도 백여명에 달하는 엑스트라들에게 이처럼 총체적인 ‘역할의 구현’을 이뤄낼 수 있을지는... 글쎄,올시다요. 그리고 무엇보다 오오, 베네치아(마리아) 여사의 저 표정을 보라! 당장 나라도 말에서 뛰어내려... 질질 짜며 달려가 엄마 맘마 찌찌 주세요 품에 안겨 우쭈쭈쭈 찌찌를 물고픈 어머니... 그 자체가 아닌가. 나는 감탄해 마지않는다. 도대체
이 놀라운 극을 관장하는 게 누구란 말인가?
그건 나.
예수의 발등에 못질이 가해진다. 아버지, 나의 아버지시여... 저들은 지금 자신이 무슨 일을 행하는지 모르고 있나이다... 예수가 절규하자 어느 여신도가 내지른 날카로운 비명이 갑판에서 뛰어내린 사람처럼 골고다를 향해 추락해온다. 깜짝이야. 포텐을 꼭 저런 식으로 터트려야 하나? 안타깝기도 하지만 극이 제대로 흐르고 있다는 좋은 징조기도 하다. 이는 또... 모니터 기능을 하는 투명막이 선상을 에워싼 또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만약 저 막을 걷어낸다면 당장이라도 차디찬 바다에 몸을 던질 신도들이 한둘이 아니다. 오천명이 타고 있고... 쥐떼처럼 우르르... 그거 알아? 인간이 휩쓸리는 건 한순간이란 거... 차단과 통제가 그래서 반드시 이 세계에 필요하다는 거... 하여간에... 으이그, 모지리들... 거듭되는 못질에 예수가 경련을 일으킨다. 예수의 연기는 어느, 누구보다도 훌륭하다. 저들이 지금 무슨 일을 행하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아는 나조차도... 차마 가슴이 아파 시선을 거두고픈 심정이로다 아아, 나의 아들아... 메소드 연기의 전수자로서 나는 순간 숙연해진다. 내가 저 아이를 업어 키웠다. 지난했던 그 과정을 어찌 일일이 열거할 수 있겠는가.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다이아몬드 원석을 맨손으로 깎는 심정이었다. 설사 욥4)이라 해도 그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을까. 애초 예수의 발연기를 봤다면 욥조차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겠지. 내가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셨나니 그가 나를 단련시킨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마음속으로 「욥기」 23장 10절을 되뇌며 나는 광휘로운, 내 손으로 제련해낸 눈앞의 순금을 지긋이 감상한다. 보시기에 어찌 이보다 더 값지고 귀한 것이 이 땅에 있겠는가. 아멘.
미친
이때 사고가 터졌다.
이코 저 등신이
그만 망치로 못이 아닌, 예수의 발목을 때리고 만 것이다.
심지어 예수는
뚜오오오~ 하고 비명을 질렀다.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정신이 다 몽롱했다. 하지만 분명, 뚜오오오... 내지는 잘 봐줘도 꾸오오오... 둘 중 하나였다. 뚜오오오~라니.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 본다면 비극의 가치는 보편적인 인간행위의 모방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는데... 나는 잠시... 인간이 아닌 바다코끼리를 모방해도 가치있는 비극이 성립될 수 있는지 그 여부를 고민했고... 아니야, 이건 아냐... 비극과 희극은 서로 다른 우주와 같으나 그 사이엔 아주 드물게 서로를 잇는 웜홀이 존재한다는 킬리아처5)의 희비극론도 떠올렸으나... 그렇군, 그 웜홀의 정체가 뚜오오오~였군... 학문적 성취도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고... 아니, 냉정히 상황을 정리해보자. 그러니까 아버지, 나의 아버지시여... 저들은 지금 자신이 무슨 일을 행하는지 모르고 있나이다... 뚜오오오~인데... 나보고 어쩌라고. 무엇보다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기에 참 거시기한... 네버, 에버 예수의 입에서 나와선 안 될 소리가 아닌가... 주마등처럼 스치는 생각들을 정리하니 결론은 하나였다.
좆됐다.
밀랍인형처럼 굳어버린 카를과 눈이 마주쳤다. 베네치아 여사와 야리도 황망한 얼굴로 나를, 아니 나만 바라보았다. 안다, 이 난관에 대처할 유일한 인물이 나란 걸 안다. 하지만 답은 없다. 시간도 없다. 누군가 피식 쪼개기 전에... 이 장엄한 비극이 웜홀을 통해 방구 뽕~ 희극으로 전환되기 전에... 이봐, 빌 하고 나는 스스로에게 외친다. 신도들의 눈부터 돌려야지! 오키도키, 나는 일단 칼을 뽑아 들고 고삐를 한껏 잡아당긴다. 앞다리를 치켜든 말과 펄럭였을 망토... 그리고 막~ 절벽 끝으로 말을 몰기 시작한다. 아이디어는 없다. 그러나 일단 신도들의 눈길을 돌리는 데 성공한다. 나도 모르게 나는, 참으로 ‘예외적으로’ 신도들을 향해 칼을 겨누며 외친다.
이자에겐 죄가 없다.
그럼에도 정녕 십자가에 매달기를 원하느냐!
놀란 이목들이 나에게 집중된 걸 느끼며 나는 다시 한번 같은 대사를 반복한다. 참, 칼이 예수를 가리켜야지 싶어 칼의 방향만 십자가를 향해 틀었을 뿐이다. 저자에겐 죄가 없단 말이다, 그럼에도 응? 십자가에 매달기를 원하느냐고~오! 이제야 슬며시 느낌이 오기 시작했다. 나의 이 무의식적 행위가 브레히트와 모레노6)에 그 이론적 바탕을 두고 있음을... 대체 이 급박한 순간에... 오오, 빌. 정말이지 자네라는 남자는... 무슨 뭐, 거, 천재 아냐? 하여 더 화가 난 얼굴로, 나는 우위에 선 인간처럼—사실이 그렇지 뭐—신도들을 노려본다. 수석배우는 역시 수석배우였다. 바로 눈치를 깐 카를이 매다시오! 하고 외치자 이내 처형하라! 십자가에 매달아라! 엑스트라들의 함성이 언덕을 가득 메운다. 여전히 요나의 갑판을 응시하며
이 의로운 자의 피의 댓가를 누가 받겠느냐?
나는 묻는다.
신도들을 향해 묻는다.
누구도 답하지 않는 질문의 답을
노련하고 잔뼈 굵은 유대인 군중들이 대신 외쳐준다.
우리와 우리 자손이 받겠소!
옳거니! 물론 엉뚱한 대목7)의 대사지만 다행히 손발이 척척 맞았다. 포텐은 한 박자 늦게 터졌다. 울고불고... 짜고, 하여간에... 거 참 시끄럽네... 그래, 울어라 울어... 우는 거 말고 뭐... 니들이 할 줄 아는 게 있나... 따각따각 나는 다시 무대를 향해 말을 돌린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그사이 ‘알아서’ 십자가를 뒤집어준 병사들이 나는 장하다. 입술을 꽉 다물고 다시 망치를 잡은 이코가 십자가를 밟고 서서 망치질을 시작한다. 나무를 관통한 못을 내리쳐 그 끝을 구부리는 일인데... 못을 단단히 고정시킨다기보다는 추가신청 예산액을 팍팍 올리기 위함이다. 그렇다. 겁나 비싼 저 소품은 한번 쓰고 버려진다. 내 돈도 아닌데 뭐 어때... 세금은 신도들의 몫이다. 땅바닥에 코를 처박고 십자가에 깔려 있는 지금이 예수에겐 가장 힘든 시간이다. 살 좀 빼라 이코 이 새꺄... 속으로 푸념을 터트리며 나는 비로소 이마의 땀을 닦는다. 좀 전까지 열려 있던 웜홀의 입구가 사라진 걸 확인하고 뚜오오오~ 어디 갔지? 누구 본 사람? 너스레도 떨어본다. 얼른 숙소로 돌아가 늘어지게 누워 시가 한모금 빨고 싶다. 사실 나도... 긴장했었다. 오줌 한두 방울 지린 것도 같다. 멀찌감치 선 카를이 고개를 끄덕인다. 야리도 살짝 입술 끝을 올렸는데 수고하셨어요의 의미가 담긴 일종의 미소다. 아는구나, 알면 함... 대주든가.
이 몸의 활약상(活躍相)8) 덕분에
순조로이 극은 진행되었다. 언덕에 세개의 십자가를 나란히 세우고... 죄수들이 씨부렁대고... 예컨대 주님 원하옵건대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저를 기억하소서, 같은 대사를 쳐주고... 끊임없이 십자가를 타고 내리는 피... 반전을 위해 도중 쨍하게 광도(光度)를 높였던 하늘을... 이거 진짜 돈 많이 드는 건데... 꽈광, 소리와 함께 먹구름으로 뒤덮고... 풍속을 확~ 올리고... 니미 눈에 모래 들어갔네... 성서에 쓰인 그대로... 골고다에 합당한 골고다의 풍경... 폭풍이 휘몰아치는 비극의 우주... 그 중심에 선 예수가 아버지, 나의 아버지시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극의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대사를 쳐주고... 신도들... 진정한 포텐이 이때 터지고... 이제 다 이루었도다...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 예수 눈을 감고 저물듯 고개 떨구고 후둑 비 쏟아지고... 지진, 이어지는 지진이 언덕과 십자가를 흔들고... 막 혼비백산 놀라는 척, 아니 놀라서 퇴각 나팔을 불고... 서둘러 죄수들의 죽음을 확인코자 해머로 무릎을 까고... 아멘, 무사히 극을 끝맺었다. 완벽한 극이었다. 이견이 없을 거란 내 생각에 당신도 분명 동의하겠지... 행여 의심 많은 도마9) 같은 자가 있어 내 손가락으로 직접 확인해보겠노라 예수의 손과 옆구리를 찔러보겠다면 그 새끼에게 내가 해줄 말은 딱 하나다. 손가락 마 주빠삘라마.
고증을 벗어난 씬이 있긴 하다. 난 솔직한 사람이니까... 딱 한 대목, 예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는 장면이다. 배역상으론 롱기누스란 병사에게 내가 창을 건네주고... 백내장을 심하게 앓던 그가 더듬더듬 예수의 옆구리를 푹 쑤셨는데... 워매, 피가 터져나와 뒤집어썼더니 그만 눈이 번쩍 뜨이며 진리를 깨우쳤다는... 안다, 나도 다 아는 얘긴데 그 역할을 임의로 바꾼 것이다. 예수의 옆구리는 내가 찌른다. 고증의 중요성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극을 통틀어 가장 위험한 연기이기 때문이다. 수축 튜브의 입구가 얼마나 좁은지 당신은 모를 거다. 자칫 실수라도 하는 날엔... 오, 상상도 하기 싫다. 노코멘트... 나는 잠시 숨을 고른다. 나처럼 섬세한 내면의 소유자는 그런 상상만으로도 호흡기나 내분비선에 깊은 손상을 입기 마련인데... 각설하고 이런 고난이도의, 또 위중한 연기를 책임질 인물이 누가 있겠는가. ‘그건 나’라고 말 하지 않아도 이미 당신은 누군지 알고 있다.
때문에 지금 몰골이 더럽다. 피를 한 바가지 뒤집어쓰고 내려온 까닭이다. 일반적인 극과는 달리 관중을 향한 인사나 박수갈채가 있을 리 없다. 실제로 우리는 퇴각을 한 것이고 지금 언덕에는 세개의 십자가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그게 전부다. 정박을 푼 요나가 골고다에서 멀어질 때까지... 다만 티모가 이끄는 성가대가 노래로 그들을 배웅할 뿐이다. 고삐를 대충 묶어두고 나는 홀로 앉아 뒤집어쓴 피와 땀을 닦는다. 누구도 나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실은 오늘 공연이 완벽하지 못했음을... 다들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 나도 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오늘의 불완전함을 극복할 수 있는지도 나는 알고 있다. 누차 말하지만 이래서 이 짓이 힘들다. 하기야 평생 잠만 디비 자는 것들이 뭘 알겠냐마는. 장엄한 합창이 끝나고... 거대한 요나의 엔진음도 사라지고... 뒷정리를 위해 뛰어가는 스태프들... 내려오는 성가대원들... 그리고 끝으로 들것에 실린 예수가 언덕을 내려오는 게 보인다. 나는 달려가 예수의 발목부터 살핀다. 다행히 별다른 이상은 없다고 했다. 빗맞은 거라고도 했다. 굳이 들것에서 내려 물 위를 걸을 수도 있다며 왔다 갔다 시범도 보인다. 놀라 비명을 지른 거지 아파서 그런 건 아니라며 예수가 말한다.
진짜 아무 일 아니었어요.
제 생각엔 이코가 순간 긴장한 게 아닐까 싶어요.
아무리 뛰어난 배우라 해도
가끔 그럴 때가 있는 거잖아요.
부탁이에요 아버지.
이코를 벌하지 마세요.
나는 빤히 예수의 눈을 들여다본다. 웃으며 본다. 이코랑 친하니? 묻자 아니요, 시선을 외면한다. 글쎄, 이 아이가 이렇다... 정이 많고... 마음 씀씀이가 깊어... 하여간에... 그게 다... 내가 잘 키워서다. 윗물이 이토록 깊은데 아랫물이 어찌 얕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아직 이 아이에게 가르쳐야 할 것이 너무 많다고 나는 생각한다. 윗물이 이토록 맑은데 어째서 아랫물엔 자꾸만 불순물이 끼는지... 주께서 왜 십계명을 내리셨으며... 그리고 또... 예수야, 하고 나는 나지막이 말한다. 지난달에 쿠폰 세장 남은 거 내가 이코한테 준 거 알지? 그리고 또 뭐냐... 저놈 벤치프레스하다 역기에 깔렸을 때... 그때 영차, 해서 구해준 게 누구냐? 말이 나와서 말인데 에어로빅 시간에 저 새끼 바지 빵꾸 나가지고... 그때 서슴없이 냉큼 바지 벗어준 건 또 누구고... 안 그러냐?
그건 사실... 자랑하려고 벗으신 거잖아요.
깜짝이야. 지금 이 아이가 말대꾸를 했다. 이건 내가 요만~큼도 원하는 게 아니다. 도저한 나의 로드맵은 어땠는가. 우선 내가 스태프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러나 지도자에겐 지켜야 할 덕목이 있으며... 그 덕목의 본질은 우선 공과 사를 구분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더없이 확고하고도 중요한 철학적 결론을 향해 한발 한발 다가서는 것이었다... 어디서 무엇이 잘못된 건가, 엉켜 있는 컵라면 면발처럼 머릿속이 복잡해지며... 드디어 얘한테 사춘기가 온 건가? 아니면 내가 갱년기에 빠진 건가... 게다가 자랑이라니... 내가 뭘? 대놓고 사람을 중상모략하는 이 스킬은 대체 언제, 어디서, 누구한테 배운 거지? 장자... 확 꽂히는 씹새끼가 있긴 하지만 나는 어떤 내색도 하지 않는다. 다만 기분이 울적하다. 내가 짊어진 이 세계가 문득 오냐오냐의 시소에 올라타 똥오줌을 못 가리는 베이비가 된 기분이다. 나는 예수를 이렇게 키우지 않았다. 나는 시소가 아니다. 굳이 말하면... 그네다.
이... 나를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인간이라는 녹슨 사슬에서 손을 떼고
솟구쳐 창공에 머무르는
배우가 아닌
진정한 성인(聖人)이 되기만을
나는 바랐다. 이래서 또 손해를 본다. 하나를 행하기 위해 열을, 백을 생각하는 나 같은 거인의 삶은 언제나 이 지경이다. 천부장 백부장 새끼들에게 시달려 가나안을 향한 행보를 백날 천날 접어야 했던 모세처럼... 니미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데... 왜 이런 일들이 여전히... 언제나 벌어지는지 머릿속이 혼미하다. 예수야, 하고 나는 다시 묻는다. 혹시 내가 이코 목이라도 딸까봐 그러니? 예수는 답이 없다. 하지만 눈가에 물기가 맺혀 있다. 이건 또다른 문제다. 그래, 조금은... 복잡한 문제란 거지. 하지만 뭐... 그래, 그렇다면 스텝 2로 가야지... 나는 활짝 웃는다. 내가 누군가. 상황에 대처하는 로드맵을 언제나 탑재한 남자... 십계명을 받기에 합당한 인물... 십계명을 수호하고 가나안의 진짜 지도가 한 100장은 머리에 담긴... 그런 남자가 아닌가. 온화한 얼굴로 나는 「이사야서」 42장 10절 말씀을 나지막이 들려준다. 두려워 마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니라 놀라지 마라 나는 너의 하나님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묵묵히 듣고는 있지만 예수도 다 아는 얘기니 뭐, 사실 이건 떡밥이고... 나는 말한다.
어부바해줄까?
갑작스런 제안에 예수가 당황한다. 아빠가 어부~바해줄게. 키득이며 다시 말하자 아뇨, 고개를 가로젓는다. 당신이 만약 ‘통제’에 관심이 있다면 내가 훌륭한 팁 하나를 알려주겠다. 상황은 이렇듯 말 한마디에 바뀌는 것이다. 전문적인 용어로 ‘선점’이라 하는 것인데 공수의 역할이 바뀌고 새로운 판의 룰을 내가 주도할 수 있달까... 아무튼 내가 예수를 간질이며 낄낄거리자 겨우 용기를 내 다가온 카를이 예수는 좀 괜찮습니까? 귀에 대고 속삭인다. 간 보러 왔네 이 새끼, 생각은 하지만서도 나는 히죽이며 카를의 어깨를 두드려준다. 툭툭 두드려준다. 배우들 좀 집합시켜주세요, 정중하게 협조도 요청한다.
분위기가 왜 이래?
모여 선 배우들을 둘러보며 나는 생각한다.
이거야 원, 다들 잔뜩
얼었나? 누가 죽었나?
이코는 질질 덜덜덜덜 울고 섰네 저놈.
다 큰 놈이 왜 저래.
간략하게 오늘 공연의 총평을 얘기한 후 나는 그야말로 배우 개개인의 연기에 대한 소감, 내지는 조언을 자상하게 들려준다. 동선에 대한 시범도 보여주고... 특히 돌발 상황에서 순발력을 발휘해준 배우들에 대해 따로 감사와 칭찬을 아낌없이 선사한다. 그리고 이코, 하고 나는 사시나무처럼 떨고 선 이코를 호명한다. 망치 가지고 나와주세용~ 말도 덧붙인다. 웃자고 넣은 추임새인데 아무도 웃지 않는다. 배우란 인간들이... 이렇다, 자기 배역에만 빠져 평생을 사는... 유머라고는 쥐뿔도 모르는 이기적인 씨방새들... 이코가 건네준 망치를 손에 쥐고 나는 붕붕 허공을 갈겨본다. 묵직~하다. 이거야 원... 사람 잡겠네... 이거 뭐... 맞으면 바로 디지겠는데? 아이구 무시라... 붕붕... 붕붕... 망치질을 뚝 멈추자 카를이 꼴깍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다 들린다. 아마 열심히 성현보안법(聖賢保安法)의 귀걸이 코걸이 조항이라도 뒤지고 있겠지... 아이구 이 양반아, 생각하며 나는 감독님... 하고 카를을 향해 제안한다. 이거 안 되겠네, 아무리 고증이 중요하다지만... 재질을 고무로 바꿉시다. 배우들의 안전이 최우선이지 안 그래요? 극의 총책임자이자 수석배우인 카를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건 압수! 하고 망치를 안장에 묶은 후 나는 이코를 중앙에 서게 한다. 그리고 외친다. 연설한다.
우리가 다 아는 성경말씀을 상기해보자. 「요한복음」... 8장 7절10)을 말이다. 오늘 중대한 실수가 있었으나 이코는 누구보다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배우고 우리의 동료다. 나는 밤늦게 혼자 남아 연습에 열중인 그를 본 적이 있고... 병사의 몸을 만들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벤치프레스를 하던 그를 기억한다. 유연성을 기르기 위해 누구보다 에어로빅에도 열심이었다. 바지가 터져 궁디가 다 보이도록... 말이다. 주께선 이미 그를 용서하셨다. 자, 어떠한가? 돌을 던지고 싶은 사람은 왼손을 들라. 하지만 오래오래 이코의 궁디가 보고 싶은 사람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오른손을 들라... 뭐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모두가 오른손을 들었고 이는 곧 우레와 같은 박수로 이어졌다. 감격에 겨워 흐느끼는 이코에게 나는 모두가 즐거워할 깜짝 제안을 선사한다. 뭐 하니, 이코? 동료들의 믿음에 대한 답례로 나 같으면 궁디 까고 노래라도 한곡 부르겠다. 머뭇머뭇 제안을 받아들인 이코가 노래를 시작하자 이내 모두의 합창이 되어버린다. 그 은혜 얼마나 컸던지 티모의 성가대까지 가세한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할렐루야~ 떠들썩하게 버스를 기다리는 단원들을 남겨두고 나는 말에 오른다. 예수도 함께다. 같이 가도 되겠습니까? 오늘은 저도 말을 타고 가고 싶군요. 웬일로 카를이 따라붙어 뜻밖의 길동무가 생긴 셈이다. 물론 아는 거라곤 18세기 오페라뿐인, 재미 좆도 없는 길동무긴 해도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다. 끄덕여,주는 것이다. 숙소까지는 대략 한시간 거린데 나는 늘 말을 타고 이 길을 오간다. 보리가 자라고 들판이 펼쳐진... 때로 우거진 숲과 작은 물줄기를 만나는 이 길을 나는 ‘각성의 길’이라고 부른다. 특히 오늘처럼 보름간의 일정을 마치고 나면... 몸이 녹초가 된 만큼이나 정신은 명료해진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렇다. 내 허리를 꼭 끌어안은 채 예수는 바로 깊은 잠에 빠져든다. 결국 내 말대로 어부바했잖아, 봐.
오늘은 정말 관대하고 올바르며 훌륭한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모든 단원들이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카를이 감사의 뜻을 전해온다. 난 또 뭐라고. 별로 그럴 맘은 없지만... 나는 극단의 문제점과 앞날에 대해 카를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카를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이런저런 얘기들은 결국 연기라는 근본적 화두로 이어지고... 우리는 킬리아처의 스페이스 오페라가 가지는 한계, 그 대안은 무엇인가... 또 로직한 비극론이 내포한 불확장성과... 혹시나 희비극론의 관점에서 이를 타파할 어떤 열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설 제기며... 동일한 시간대를 배경으로 했을 때 셰익스피어와 모레노가 가지는 동일성과 그 의미... 이를 뒷받침할 철학적, 사회학적 이론을 토대로 한 심도 높은 논쟁을 이어간다. 당장 다음 프로그램이 걱정은 걱정입니다. 게다가 그 주에 부활절이 있지 않습니까? 카를이 한숨을 쉰다. 물론 열흘 정도의 휴식기가 있긴 하지만... 나도 걱정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사실 나는, 그사이 어떻게든 모레노와 장이루의 연기론을 바탕으로 한... 전혀 새로운 이론적 접목을 통한 고차원의 연기를 배우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욕심이 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완벽이란, 그냥 그저 그렇게 흐른다고 다다르는 세계가 아니니까... 뭐? 감독은 저 양반인데 당신이 왜 극을 관장하냐고? 예리한 질문이지만 답은 간단하다. 카를은 감독이지만 나는 총독이니까. 물론 배역상으로 그렇다는 말이지만 총독은 총독이란 얘기지. 나는 잠시 말을 세운다.
그리고 하늘을 본다,
이곳의 경치가 이토록 아름다운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말을 멈춘 카를도 경탄을 금치 못한다.
어느새 깔린 어둠과
초저녁 별
나 똥 좀 싸야겠어, 하고
나는 말에서 내린다.
잠든 예수를 안장에 잘 뉘이고
나는 보리밭, 어머니 자연의 품에 안긴다.
방구 뿡, 그리고 카를에게
자네도 같이 쌀 텐가? 묻는다.
괜찮다고, 카를이 답했다.
⌛⍾⎊⍦
내 이름은 빌
예수의 매니저다.
이곳 홀리랜드에서의 공식적인 내 직함이지. 아그그그그그. 천근만근인 두 다리를 책상 위에 올리고 기지개를 켜듯 발을 쭉 뻗는다. 그리고 나는, 등받이에 몸을 묻는다. 니미... 방금 분명 삑 하는 소리가 났다. 당신도 들었을 거다. 뭐? 아무 소리도 안 났다고? 그럴 리가... 있나... 천근만근 다리를 다시 내리고 나는 일어나 등받이를 확인한다. 이바바 이봐봐, 삑삑 하잖아! 의자를 바닥에 엎은 후 스프링이며 여기저기에 기름을 친다. 그리고 다시 등받이를 젖혀본다. 한결 부드러워지긴 했지만... 삑삑 소리가 익익 소리로 바뀐 게 전부다. 나는... 기름을 마구마구 친다. 어디 한번... 이익... 나는 공구함을 꺼내온다.
이런 건 일도 아니다. 우선 좌판에 붙은 여덟개의 볼트를 풀고 분리된 회전식 의자다리와 조인트 부위를 다시 분해한다. 이때의 팁! 서둘러 작업을 끝내려 분탕질을 쳐선 곤란하다. 쥐도 새도 모르게 좆만한, 또 좆도 아닌 부속 하나가 사라지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내 경우엔 규격이 같은 너트와 볼트를 차례차례 일렬로... 짝을 맞춰 정렬해준다. 스프링의 방향이나 와셔가 붙는 위치를 미리 체크해두는 것도 쏠쏠한 팁이다. 음... 이제 니들은 죽었다고 봐야지 뭐... 우선 볼트가 박혀 있던 좌판의 구멍을 가느다란 철솔로 청소해주고 녹을 제거한 구멍 속에 그리스를 뿌려준다. 일도 아니지 뭐. 어디 보자, 이제 하나둘서이너이다여... 도합 열아홉개의 볼트와 열한개의 너트를 철솔로 닦아줄 차례다. 물량이 많다고 해서 기가 죽어선 곤란하다. 그저 똑같은 단순작업의 반복일 뿐이니까. 하나하나... 나사산이 상하지 않게 결을 따라 솔질을 하고 미리 기름을 따라둔 접시에 퐁당, 담가주면 금세 녹이 빠지는 걸 눈으로도 확인이 가능하다. 와셔와 스프링도 마찬가지... 건져낸 부속들을 헝겊으로 닦아주고 나는 다시 사이즈별로 놈들을 정렬한다. 범인을 찾았다. 이 과정에서 나는 문제의 원인이랄 수 있는 조인트 부위의 너트와 볼트 한짝을 발견한다. 이놈들은 아무래도 특별대우를 해줘야겠지. 바이스를 꺼낸 후 마치 죄인을 단두대에 세우듯... 결합된 상태 그대로 볼트의 머리를 단단히 고정시킨다. 그리고 잔뜩 기름을 끼얹은 후 라이터로 가열을 시작한다. 그을음이 일고... 기름 끓는 냄새가 심하게 나면서... 한참 시간이 지나자 불그스름한... 찌든 녹들이 기름에 섞여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다시 기름을 붓고 가열... 움직임이 원활해질 때까지 너트를 좌우로 번갈아 돌려주면 개기던 녹들도 잘못했슴다 다시는 안 그러겠슴다 예수 믿겠슴다 녹아내리기 마련이다. 이제 뭐... 조립만 남았네 뭐. 정렬한 부품들을 순서대로 맞춰가며 끼우고 조이고 그리스를 치고... 어떠냐 이 새꺄, 이래도 또 앙탈을 부릴래? 조립을 끝낸 의자에 나는 우선 앉아본다. 그리고 조심, 등을 기대고 등받이를 젖혀본다. 완벽하다... 글쎄 이런 건 일도 아니라니까. 공구들을 정리하고 어질러진 바닥을 치우고 나서
나는 시계를 본다.
또 물끄러미 의자를 본다.
그리고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생각하기로 한다.
자, 그럼 다시 시작해볼까... 내 이름은 빌, 예수의 매니저다. 여기 홀리랜드에서의 공식적인 내 직함이지. 일어선 김에 갑갑한 복장과 벨트를 풀고... 텅, 압수해온 망치를 책상 귀퉁이에 올려놓는다. 거추장스런 것들을 몸에서 떼고 나니 비로소 마음이 홀가분하다. 팬티 차림으로 나는 의자에 몸을 묻는다, 파묻는다. 멍하니 꼬긁꼬긁을 좀 하다가... 다리를 책상에 올리고 발을 꼰다. 온종일 기다려온 시간이다. 손을 뻗어 서랍을 열고 나는 뜯지 않은 ‘새’ 시가를 하나 꺼낸다. 큭큭 새 시가라니... 이 한계를 모르는 남자 같으니라구... 정확히는 꾸바산 한정판 ‘까사도레스’ 로메오 이 훌리에따... 무려... 2032년에 제조된 명품이다. 포장지에 쓰인 이 글귀는 언제 읽어도 감동이다. 시가가 남거나, 내가 남거나11)... 시가를 입에 물고 나는 불을 댕긴다. 그리고 오래오래... 연기를 음미한다. 공연의 피로가 싹 가시는 기분이고... 활과 하프를 든 한 무리의 천사들이 내 몸속에 들어와... 아힛, 그러면 간지럽자나... 끄덕끄덕 나는 머리를 젖혀본다. 단단히 제압당한 인간처럼... 고분고분해진 의자가 마음에 든다. 시가가 남거나, 내가 남거나... 시가가 남거나, 내가 남거나...
아무튼 내 이름은 빌인데... 여기선 다들 빌라도라고 부른다. 뭐, 당신도 편하게 그 이름으로 불러주면 좋겠다. 그런데 당신 누구지? 어디 사는... 누구냔 말이다. 나처럼 어엿한 직함을 가졌는지... 아니면 잘 빠진 뙇(혀 튕기는 소리)~ 여자라면 좋겠지만... 뭐, 좋아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구... 그래, 당신이 누군지 몰라도 좋아... 여자, 그런 건 농담이야... 이름이 체코어라도 상관없다구 암, 그런 게 뭐가 중해... 나는 당신이 귀신이라도 좋아... 오래전에 죽은 사람... 이 연기처럼 흐릿하고... 곧 사라지는... 그래서 아무 말이나 해도 좋은... 아니, 그래도 한가지 정도는 바라도 되겠지? 많이도 아니고 딱 하나... 별거 아냐... 아니, 별건가? 아무튼 그래, 나는 그러니까... 나는 다만... 당신이 20세기의 사람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해. 어... 그래, 그거 하나야. 내가 친구가 없어서 그래. 별다른 이유는 없어... 아니, 별다른 이유가 있긴 하지. 그건 내가... 20세기학(學)을 전공했기 때문이야.
그래, 20세기...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20세기 정보기관학과 반공기독교학이지. 알아, 아무나 다운로드12) 하는 학문은 아니란 거. 말해봤자 아무도 몰라... 대개는 무슨 고고학인 줄 알지. 맞아, 지금이 2715년... 그러니 어떤 의미로든 고고학은 고고학이지 좆도... 칠백년 된 시가를 빨며 내가 더없이 위안을 받는 이유도 그 때문인지 몰라. 어떤 의미에선 나도... 칠백년 전의 인간인 셈이니까... 이 시가를 보라구... 지금은 ‘없는’ 물건이지... 하지만 시가도 나도 이렇게 남아 있다는 거야... 골 때리는 조우지... 그리고 나는, 달고 쓰고 시고 짠... 이 연기를 빨고 있어. 시가가 남거나, 내가 남거나... 그래, 그거지 뭐.
벨이 울린다.
누군지 짐작이 갔고, 짐작대로 베네치아 여사가 문 앞에 서 있다. 그녀가 왜 왔냐구? 내가 불렀으니까. 아이구 여사님, 하고 내가 너스레를 떨자 그녀가 기품있게 로마식 인사... 그런 비슷한 걸 건네온다. 미쳤나 저년이 싶지만 삘을 유지하기 위해 내색은 하지 않는다. 자, 하고 나는 여사를 침실로 데려간다. 우쭈쭈쭈 하며 등을 떠미는 것도 다~ 삘을 살리기 위해서지. 그녀가 계산부터 하자고 한다. 아무리 총독님이라도 말이죠,라고도 한다. 남자든 여자든 홀리랜드의 배우들은 전부 매춘을 한다. 상대가 누구라도 상관없다. 딱 한 년 예외가 있긴 하지만 또 모르지 아무도 몰래 호박씨를 까고 있을지. 하지만 나는 매매춘을 하지 않는다. 단언컨대, 단 한번도 돈을 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이 뭔 말이냐... 총독한테 돈 달라는 년을 나는 지금 처음으로 만난 것이다.
몸과 마음이
더럽혀진 기분이다.
그래, 어쩌면 다른 년들이 얼마 받았다, 얼마를 주더라 뻥카를 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고놈의 고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겠지. 혹은 이 늙은 여자가 판단력이 흐려졌거나. 그게 아니라면 사회의 기강이 무너진 건가? 요즘 돌아가는 나라 꼬라지와 맞물려 내면이 깊은 나로서는 ‘계엄령’ 같은 단어까지 떠올리며 생각이 복잡해진다. 깔깔깔. 갑자기 여사가 폭소를 터트린다. 농담 한번 했더니 왜 어린아이처럼 굴어요?라고도 한다. 어린아이... 그렇지, 지금 이 순간 내가 바라는 바로 그... 단어가 아닌가. 이런 늙었는데도 깜찍한 년을 봤나... 나는 번쩍 여사를 안아올린 후 침대에 테이크다운을 시전한다. 부악 옷을 풀어헤치자 우힛~ 우쭈쭈쭈 엄마 맘마 찌찌 주세요 오후부터 하고 싶었던 찌찌 주세요에 나는 돌입한다. 감 잡았다는 듯 여사의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우리 애기 착한 애기... 무슨 로마시대 자장가... 같은 것도 불러준다. 엄마를 사칭하는 여자의 찌찌를 빨며 노래를 듣는 일이 이토록 근사하리라곤 생각 못했다. 살짝살짝 찌찌를 깨물면 생기는 노래의 바이브레이션... 히힛 세게 깨물면 나쁜 아이로구나 하며 해주는 손찌검이... 찌찌와 때찌의 이 앙상블이... 오 맘마미아... 급기야 동굴을 빠져나온 나의 코뿔소가 두웩~ 널찍한 초원 위에 토사물을 게우고 나자 이런이런 우리 애기 오줌도 잘 가리네... 칭찬받았지~롱.
성숙한 남자들일수록 모성애에 눈을 뜨죠.
당신처럼 강한 남자일수록 더...
원한다면 언제든 와줄게요.
마리아는 가장 성스러운 어머니니까.
그런데 빌라도...
수석배우까지 겸하기에는
카를의 나이가 너무 많지 않나요?
저는 단지
여러 단원들의 공통된 의견을
전하는 것뿐이에요.
가슴팍을 간지럽히며 여사가 말한다.
즉각적인 답변을 피하고 나는 극단의 앞날과
브레히트의 희곡론에 대해 한시간쯤 대화를 나누고
그리고 또, 오줌도 잘 가리는 나라는 아기는
그런데 베네치아... 야리 한번 어떻게 안될까?
매춘부 역을 맡은 년이 매춘을 안 하니
연기력 향상에도 지장이 있을까봐 말이지.
수석배우는 단원들을 컨트롤하는 자리니까
능력에 대한 검증도 겸해서 말이야, 멘트를 친다.
흥, 하고 여사는 등을 돌린다.
그년은 또라이라니까
라고도 한다.
그 말은 맞다. 언젠가 한번 나는 야리를 덮친 적이 있다. 오래전 일인데... 이건 진짜 비밀이다. 아무도 없는 체육관 부속실에서 덮쳤는데 먹기는커녕... 발렸다. 갑자기 급소를 맞거나 그런 것도 아니다. 깔린 상태에서 희한하게 관절을 꺾고 나오더니 제법 맵게 여기저길 때리는데... 처음엔 반항하나 여기다가 나중엔 이런저런 생각도 다 달아나버렸다. 정정당당하게 내가 진짜로 한판 뜨자고 했다. 그리고... 정말 얼마나 맞았나 모른다. 도망가다 그년의 뾰족한 발이 뒤에서 정통으로 똥창에 꽂힌 게 결정적이었다. 진짜 입에서 거품이 다 나오더라. 아무도 없었기 망정이지 꿇어앉아 울면서 살려달라 빌었다. 그뒤로 나도 모르는 척 그년도 모르는 척 지내오지만... 지금도 그년이 다가오면 움찔, 하는 나 자신을 느끼곤 한다. 뭐? 내가 약한 인간이냐고? 원터치로 쪼개도 이곳의 총독에 오를 인물이시다 씹새야. 그거... 직접 안 보면 아무도 안 믿을 거다. 몸무게가 70kg 차이 나면 뭐해, 팽이처럼 돌고 날아다니는 년을 무슨 수로 잡냐고... 미친 또라이년... 내가 진짜... 그년 한번 먹어보면 소원이 없겠다.
나 그만 갈게, 우리 애기 잘 자~
베네치아 여사가 손을 흔든다.
엄마 안녕~
나도 손을 흔든다.
홀리랜드의 인간들에겐 엄마가 없다. 우리가 모두 복제된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그래, 현자(賢者)타임을 빌려 이 별에 대한 얘길 좀 해보자. 이 거대한 사기극의 시작과 끝에 대해... 그러나 이 일의 시작과 끝이 어떻게 이 세계를 구원하고 지켜왔는지를 말이다. 물론 나의 지식엔 한계가 있다. 인정한다. 전공도 아니자나 씨발아. 그러나 나는, 나만큼 이 별을 아는 사람도 없을 거라 자부한다. 그건 내가... 총독이기 때문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예수의 매니저고, 또 총독이니까... 거실을 가로질러 나는 다시 집무실의 문을 연다. 달고 쓰고 시고 짠 시가 연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째 좀 허전해도... 덜렁덜렁 팬티도 없이 나는 의자에 몸을 묻는다. 지금 생각이 났으니 말인데 이코에게 냉큼 바지를 벗어준 건 결코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야리 그년이 에어로빅을 지도하거든... 그러니까 그년에게 타당한 명분으로 코앞에서 야지를 준 거지 뭐. 한시간 내내 덜렁덜렁... 큭큭. 사실 좀 쫄렸었다. 아무도 없을 때, 나중에 또 맞을까봐. 벗고 누웠으니 배가 살짝 싸늘하다. 그래, 타월이라도 좀 덮자.
모든 건 토리노의 성의(聖衣)에서 시작되었다고 들었다. 거 왜, 예수의 시신을 덮었다는 천 말이다. 물론 나중에 전쟁으로 재가 되긴 했지만... 고대엔 고~이~ 그 천이 보관되던 시기가 분명 있었다. 정확한 년도는 모르겠지만(22세기 아니면 23세긴데) 한 연구팀이 강려크한 발표를 했다. 자신들만의 시크릿한... 독보적인 기술로 토리노의 성의에서 찾은 예수의 유전자를 온전히 복원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럴싸하게 입증도 했다. 물론 어마어마한 논쟁이 뒤따랐다. 과학적 사기라는 주장도 많았지. 하지만 중요한 게 뭐겠어? 이 연구의 사업 확장성... 그렇다, 돈이었다. 인류의 원죄... 찢기고 능멸당하고 십자가에서 소멸한 예수의 육신을... 과학적으로 되살릴 타당한 가설이 자본가들의 예민한 촉을 마구마구 딸딸이쳐준 것이다. 공식은 간단했다. 예수 복제=돈. 인간 복제가 엄격히 금지되던 시기라 국제연합 차원에서 이를 가로막고 나섰다. 하지만 이미 연구팀은 날개를 달았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날개를... 자신들조차 주체할 수 없는 무거운 돈의 날개였다.
이것들이 뭔 생각을 했는지는
지금도 미스터리다.
그런데 당신도 그래?
난 꼭 싸고 나면 머리가 띵하더라.
다음엔 붓다였다. 동양의 여러 절에는 붓다를 화장하고 남은 무슨 뼛가루가 모셔져 있는데... 니미 그 속에서 또 붓다의 유전자를 복원했다는 발표였다. 어디 그뿐인가. 공자 노자 장자의 이름도 함께 거론되었지. 뭐? 공자가 천년 전에 싸지른 똥가루라도 찾았냐고? 아니, 역류유전자복원술인지 뭔지 그런 걸 들고 나온 거야. 그들은 이미 ‘적확한’ 직계 후손들을 비밀리에 확보했고... 이들의 유전자를 기점으로 모계와 부계를 분류, 역으로 추적을 반복... 이미 성현들의 유전자를 완벽히 복원했다고 발표한 거다. 과학계에선 존나 욕만 처먹었지만 대중들이 뭘 아나, 막대한 자본을 투자해 반신반의 하게끔만 끌고 가면 성공인 사업이었다. 말 같잖은 소리 말라구?
맞아, 거짓말은 말이 아니라... 밥이야.
억지로 듣는 게 아니라 달려들어 먹는 것이기 때문이지.
그리고 반드시
똥이든 방구든 그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때문이야.
믿고 안 믿고는 그래서 중요하지 않아.
세상의 지도자들은
그 사실을 아는 인간들이고.
중요한 건 성현을 복제할 수 있다는 과학적 근거가 이때 마련됐다는 사실이다. 연구를 이끈 수장의 이름이 그래서 역사에 남아 있다. 모제스 골드먼. 성현들의 아버지라 불리는 인물이다. 잘나가던 사업은 한순간에 추락했는데 여러가지 사건이 한꺼번에 맞물렸다고 들었다. 탄탄한 자본도 박살낼 수 있는 또다른 힘이 있었다고 봐야지 뭐...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나도 모른다. 성현들은 끝내 복제되지 못했고, 다만 복원되었다고 ‘알려진’ 유전자 샘플만이 세상에 남게 되었다. 하지만 이 역시 흐지부지 사라졌다. 탄압을 피해 도피 중이던 모제스가 안데스인지 어디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샘플이 보관된 캐링박스의 행방은 끝내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느닷없이, 복제된 예수가 암거래된 사건이 있긴 했다. 모제스가 죽고 나서 수십년이나 지난 후였다. 성인물 시장을 주도하다 은퇴한 한 인물이 상류층 인사들과 인맥을 쌓으며 일으킨 사건이다. 그가 은밀히 가동시킨 예수 공장은 79명의 예수를 복제해냈고... 이는 천문학적인 가격으로 재벌들에게, 또 정계의 고위직들에게 암암리에 거래되었다. 이유는 그러니까... 빠구리였다. 말해도 안 믿겠지. 예수님 한번 따먹으려 환장한 돈 많은 미친년, 또 미친놈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그리고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기 전 이것들이 살아 숨쉬고 움직이는 자신 소유의 예수를 어떻게 은폐했는지... 그래, 그 얘기는 차마 내 입으로 못하겠다. 세계 각국에서
두명의 여성지도자와
열세명의 장관... 일곱명의 오너들이
느닷없이 자살을 했지.
그나마 밝혀질 뻔,했고
그래도 명예를 아는 인간들이랄까
왜, 토 나와?
다만 이 사건은 모제스의 샘플과는 무관한, 애덤 블랭크란 양아치의 사기극으로 밝혀졌다. 우연히 해변에서 예수와 꼭 닮은 한 청년을 보는 순간 오래전 모제스의 예수 논란이 떠올랐고... 이를 신이 내게 주신 영감으로 받아 들였노라 그는 실토했다. 자신은 결코 성행위의 대상으로 복제한 예수를 팔지 않았고, 다만 예수님을 곁에 모시고 지도층이 망각하기 쉬운 도덕성을 상기하고... 또 틈틈이 성경공부라도 하길 바랐다고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지. 이 새끼는 그러니까... 법정에서 여름성경학교 노래를 다 불렀다. 흰 구름이 어쩌고... 하지만 성인물 시장을 주도했던 그의 이력이 발목을 잡았고, 무엇보다 인간 복제라는 불법을 저지른 만큼 중형을 피할 다른 도리가 없었다. 구출된 예수는 두명에 불과했다. 이들은 정부가 마련한 격리시설에서 여생을 보냈고 그리 길지 않은 각자의 삶을 그 속에서 마감했다. 그들은 부활하지 않았다.
모제스의 샘플이 그 모습을 드러낸 건 그로부터 수세기가 지나서다. 내가 알기론 3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문명의 대전환이 이루어지던 시점이다. 이슬람 대 반(反)이슬람, 즉 크리스천 연합의 전쟁이었다. 말세가 가까울 때 사탄이 재림한다는 성경 말씀을 다들 알고 있겠지. 말씀 그대로였다. 다만 한가지 다행한 일이 있다면 핵전쟁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이전 세기에... 짧지만 빛나는 인류의 도약기가 있었다고 들었다. 모든 체제가 보유한 핵무기를 폐기하고 이를 우주 탐사와 개발의 연료로 대체해나간 거다. 나는 그것이 주께서 주신 마지막 은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제안이 대체 어떻게 이루어졌더냔 말이다. 파멸을 막기 위한 우리 기독교인들의 지혜였던 것이다.
안 되겠다.
찬송 한곡 부르자.
자네도 같이
301장, 지금까지 지내온 것.
그런데 너... 3절 가사 몰랐지? 지금 입만 벙긋했지? 누차 말하지만 이 몸께서는 다~ 보고 계신다. 이... 나는 말이다... 아니다, 받아 적어라. 주님 다시 뵈올 날이 날로 날로 다가와 무거운 짐 주께 맡겨 벗을 날도 멀잖네 나를 위해 예비하신 고향집에 돌아가 아버지의 품 안에서 영원토록 살리라, 아멘. 인류의 파멸은 막았으나 그 피해는 서로가 치명적이었다. 결국 휴전과 더불어 인류는 분단되었다. 지구를 이슬람에게 내어주고 크리스천 연합이 화성으로 이주한 것이다. 물러선 것이냐고? 천만의 말씀. 화성은 오래전부터 우리가 예비해온 새로운 고향집이었다. 한 별에서는 도저히 같이 살 수 없는 이교도들을 떼어내고... 전쟁으로 파괴된, 또 이미 환경오염으로 망가질 대로 망가진 지구를 버리고 찾은 준비된 가나안이었다.
화성의 튜닝13)은 이미 23세기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25세기에 발발한 참극은 어찌 보면 그 이주권을 놓고 벌인 기나긴 생존전이었다고 볼 수 있겠지. 사탄의 계략은 끝이 없다. 돌이켜보면 얼마나 배가 아팠을까 짐작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밖에 될 수 없었냐고 당신은 생각할지 모른다. 물론 인류는 많은 길을 모색해왔지. 내 말하지 않았나. 모세가 이끌던 군중 속의 만부장 천부장 씹새끼들... 그 밑의 백부장 오십부장 똘마니들... 21세기를 기점으로 서서히 토막나던 강대국들과... 주님의 국가를 허물고 자꾸만 생겨나던 민족국가와 인종국가들... 그 조합연맹들... 이를 새로운 수익모델의 틀로 삼아, 뭐 무슨 앵글로색슨 모델, 스칸디나비아 모델, 독립된 아일랜드 모델... 어쩌고저쩌고 지랄발광... 이를 뒤에서 획책해온 사탄과... 그 손에 넘어간 서유럽과 남중국... 태평양과 대서양을 꼴리는 대로 건너가던 금송아지들... 그 등에 올라타 우후죽순 생겨나던 아프리카의 부족국가들... 이권만 좇아 뭉치고 분열하던 개씹쓰레기들... 말씀대로만,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만 따르면 될 텐데 빠득빠득... 뻔히 경제보복과 국지전... 인종 간 전쟁이 예고됨을 알면서도 사탄의 서류에 도장을 찍던 위정자들... 그리고 결국, 종교만이 이를 묶을 수 있다는 제자리 결론... 배신과 재편... 그러니까... 반공기독교학을 전공한 내 입장에서 해줄 말은 딱 하나다. 지금 내가 피우고 있는 이 시가가 나무였을 때... 주께서 내리시는 햇살에 반짝반짝 몸을 뒤척이던 믿음의 이파리였을 때... 그러니까 20세기 바로 그때! 빨갱이들을 잡았어야 했다. 돋기 시작한 염소의 뿔... 사탄의 수염을 그때 싸그리 뽑았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것이 주님의 더 큰 뜻임을.
우리 기도하자.
그리고 찬송, 301장.
너 지금 3절 가사 또 틀렸다... 이것 참 난감하네. 공구함을 다시 꺼내야 하나? 하긴 뭐... 당신은 배우가 아니니까... 그래, 틀린 부분만 내 다시 적어준다. 예비하신 고향집에 돌아가 아버지의 품 안에서 영원토록 살리라, 아멘. 이런저런 어려움이 따랐지만 정착은 성공적이었다. 당연히, 주님의 보살핌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화성의 명칭을 신(新)지구로 바꾸고 지도자들은 머리를 맞대어 새로운 체제를 구축해갔다. 인공지능에만 의존해온 구(舊)지구에서의 통제방식을 버리고... 사사건건 이를 비판하거나 거부해온 집단지능을 통제할... 그러니까 그 이상의, 새로운 무엇이 필요해진 것이었다. 위험은 여전히 도사리고 있었다. 크리스천 연합이란 단어에서 알 수 있듯... 물론 전쟁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긴 했지만... 실은 여러 이유(역사, 경제, 종교, 지리 등)로 이슬람과 등을 진 다양한 민족, 문화, 종교의 복합체였기 때문이다. 물론 주류는 크리스천이지만 힘들게 예비해온 고향집에서 다시 분열을 조장하는 것도 현명한 일이 아니었다. 주여, 저희에게 전쟁을 승리하고 성전을 쌓은 솔로몬의 지혜를 주소서. 두로왕 히람의 마음일지라도 아비 다윗왕과의 우정을 놓치지 않고... 솔로몬 성전의 기쁨의 일부가 되게 할 수 있는... 그런 울타리 뛰어넘는 지혜를 우리에게 주소서. 나도 모르게14) 솔로몬에게 또 짐꾼이 칠만이요 산에서 돌을 뜨는 자가 팔만이며 이외에 그 사역을 감독하는 관리가 삼천삼백명이라 그들이 일하는 백성을 거느렸더라 이에 왕이 명령을 내려 크고 귀한 돌을 떠다가 다듬어서 성전의 기초석으로 놓게 하매 솔로몬의 건축자와 히람의 건축자와 그발 사람이 그 돌을 다듬고 성전을 건축하기 위하여 재목과 돌들을 갖추니라... 아멘.
모제스의 샘플이 이때 나왔다. 과거 17개국의 정보기관이 하나로 통합된 ‘세타(Θ)’의 품에서였다. 세타는 제8기관을 뜻한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기관이다. 신지구는 일곱개의 기관에 의해 통치되는 순환통치제로 돌아간다. 현재의 지도부는 엡실론(ε), 임기가 끝나면 또 제타와 에타로 이어지겠지만 그 어떤 임기에도 세타는 함께한다. 영구히 중심에 있는 기관은 알파(α)다. 알파는 구지구 시절부터 구축된 인공지능 시스템으로 세타와 함께 체제의 핵을 이루고 있다. 그러니까 홀리랜드는... 알파와 세타의 합작품이었다. 일원화되지 않은, 그러나 강력한 종교지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성현들의 별’이 탄생한 것이다.
내가 말했지.
거짓말은 귀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입으로 들어가는 거라고.
그리고 반드시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낸다고.
이건 진짜 나만 아는 사실인데, 총독만이 열람할 수 있는 정보기 때문이다. 수세기 전의 과학적 진위를 이미 세타는 가려놓은 상태였다. 모제스가 확립한 샘플 중 진짜 성현의 유전자는... 예수가 유일했다. 나머지는 그러니까 전부 사기란 얘긴데... 진위 여부는 사실 중요한 게 아니었다. 훗, 더 재미난 사실을 말해줄까? 세타는 비밀리에 성현들의 복제를 시작했는데... 가장 놀라운 건 예수의 결과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예수가... 복제된 실제 예수의 모습이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는 사실이다. ‘끔찍한 결과’라고까지 보고서엔 적혀 있다. 차라리 나머지 샘플들... 그러니까 그럴듯한 동양인 노땅들에게선 매우 만족스런 결과를 얻었다고 되어 있다. 결국 세타가 선택한 건 사기꾼 애덤 블랭크의 ‘예수’였다. 오래전 플로리다의 해변을 걷다 우연히 농간꾼을 마주친... 그가 제시한 짭짤한 돈에 샘플 채취를 허락한... 결국 영문도 모른 채 CIA의 범죄증거물 기록보관소 냉장금고에 보관되어야 했던... 한 청년의 유전자였다.
오늘 그는 지각을 했지.
컵라면 먹는다고.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진짜 예수는 어떻게 되었냐고? 나야 모르지. 이것도 꽤나 오래전 일이니까. 아무튼 홀리랜드는 그렇게 탄생되었다. 비밀에 부쳐진 위치는 화성과 목성 사이의 소행성지대 외곽인데 은폐가 쉽고 이동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이동... 그렇다, 행성에 대한 지식이 있는 이라면 ‘이동’이란 단어에 의구심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홀리랜드는 지극히 보편적인 튜닝 행성으로 보이지만 실은 우주선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행성을 목표로 건조된 운항체라고 봐야겠지. 따라서 공식적으로는 분명 행성인, 이 아름답고 신비로운 별의—눈에 보이는—모습을 우선 말해보기로 하자.
달의 1/5 크기에 불과한 이 작은 별은 대부분 바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중앙엔 정확히 원형인 육지가 있는데... 하늘에서만 식별이 가능한 커다란 ‘8’이 랜드마크로 찍혀 있다. 공식적으론 영원을 상징하는 뫼비우스의 띠로 알려져 있지만... 그렇다, 실은 세타를 상징하는 숫자, 8을 의미한다. 모든 신도들은 그곳에 도착한다. 쉽게 말해 공항과 선착장을 겸한 곳이라 볼 수 있지. 착륙과 더불어 정해진 수속을 마치고 나면 종교에 따라 구분된 선착장으로 안내가 될 것이다. 쉽게 기독교를 예로 들겠다. ‘노아’와 ‘요나’ 두척의 여객선이 번갈아 운항하는데 이름만 다를 뿐 똑같은 배다. 그러니까 ‘일생에 한번’ 누군가는 노아를 타고 누군가는 요나를 타는 거겠지. 자, 이제 배가 출발하면 진정한 여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고요한 바다를 건너 경건한 신들의 땅에 발을 내리고... 그곳에서 살아 숨쉬는 진짜 신을 만나는 ‘거룩한’ 여정의 시작 말이다.
바다 얘길 했더니 오줌이 마렵네.
잠깐만...
홀리랜드에 도착한 신도들은 보름간 예수와 함께한다. 예수의 설교를 듣고 예수를 따라 이동하고 예수가 물 위를 걷는 기적을 목격하고 다섯개의 떡과 두마리 물고기로 오천명이 식사를 하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된다. 뭐? 물 위는 어떻게 걷냐고? 짜증나 못살겠네... 다 돈이라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의 최후를 봐야 한다. 당신도 오늘 그 공연을 봤겠지만 누구의 연기가 그렇게 빛이 났다고? 아, 물론 이 정도의 뻔한 질문엔 답하지 않는 게 도리어 예의다. 어쨌거나 여정은 그렇게 끝이 난다. 다시 바다를 건너 8구역에 도착한 신도들에겐 하루의 휴식시간이 주어지고, 그들은 다시 지구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돌아가 원죄 의식으로 가득한 여생을 살아야 한다. 협조적인 국민,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연합의 시민으로... 우리가 이 개고생을 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애국자 양성!
신과
국가와
당신의 삼위일체.
씨발, 눈물이 날라 한다. 그래... 애국이란 단어 앞에서 우는 것은 수치가 아니겠지... 나는 잠시... 그러다 하염없이... 울기 시작한다. 세타의 초대 총장 에드거—십자검—후버께서는 이런 명언을 남기셨다. 애국자는 실로 많은 눈물을 흘려야 한다고... 자신이 평생 경험한 눈물은 딱 두 종류인데... 불처럼 뜨거운 눈물과 얼음처럼 차디찬 눈물이었다고... 훗날 자신은 깨달았는데... 애국심이란 이름의 검을 끝없이 담금질해준 것이 바로 그 눈물이었노라고... 말이다. 세타의 총장들에겐 그래서 작위처럼 ‘십자검’과 같은 미들네임이 수여된다. 충분히 마땅하고, 그래도 부족한 최소한의 보상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이미 생각해둔 미들네임이 있다. 그건 비밀이다.
다시 말하지만
거짓말은 귀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쌓이면
그것은 어느새 모두의 밥으로 변해 있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었다고는 해도 역시나 크리스천 연합의 주류는 기독교인들이다. 당연히 홀리랜드의 주류도 기독교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예수가 이곳을 먹여 살린다는 말이 지나친 과장은 아닐 것이다. 신지구의 질서를 유지하는 가장 강력한 매개체가 이 성지(聖地)임을 감안하면 예수의 위치, 또 예수의 모든 것을 책임지고 크리스천 프로그램을 관장하는 나의 어깨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상상할 수 있을 게다. 홀리랜드가 무너지면 지구가 무너진다. 예수가 무너지면 홀리랜드가 무너지고... 내가 무너지면 예수가 무너진다. 그래서 내가 이곳의 총독인 것이다. 공식적인 직책과는 상관없이 나는 세타의, 요원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 외에도 여러명의 요원들이 상주해 있지만 나와는 급이 다른 좆도 아닌 새끼들이지. 자랑 같아 이런 말은 안 하려 했는데 애국심의 사이즈가 다르다 이 얘기다. 나는 이 별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러니까 우주선으로서의 홀리랜드를, 말이지.
이 말은 곧
홀리랜드의 지하에 내려갈 수 있는
코드 입실론(υ)을 부여받은 요원이란 얘기기도 하다.
이 시가가 어디서 나온 거라고 생각해?
꾸바산 한정판 ‘까사도레스’
서기 2032년 11월 제작.
홀리랜드의 지하에 관여할 수 있는 건 1.3AU 떨어진 세타의 본부와 내가 유일하다. 코드 입실론으로만 엮인 은밀한 라인이지. 여기 있는 다른 요원들도 아무도 몰라. 뭘 알어, 그 새끼들이. 지하는 한마디로 거대한 박물관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래, 그보다는 넓은 범주의 수납공간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공간 부족... 그렇다, 화성의 튜닝이 성공적으로 이뤄지긴 했지만 인간의 실제 거주 가능 지역은 예상보다 부족했다. 신지구의 지배계급이 인공위성 ‘올림퍼스’로 독립된 이유도 그 때문이고 그외 여러 시설도 구지구 시절과는 확연히 다른 해결점을 찾아야 했다. 가장 큰 골칫거리는 과거의 유산이었다. 초고대로부터 전해진 A레벨의 문화재는 그렇다 쳐도 어중간한, 그렇다고 문화적 의미나 가치가 전혀 없지는 않은... 예컨대 20세기 동아시아 지역 생활물품박물관의 소장품들... 내지는 22세기에 단종된 전기자동차박물관 전시 모델이라거나... 하물며 19세기에서 24세기까지의 모든 생리대를 모아둔 생리대박물관 등등 이루 다 열거하기도 벅찬 ‘물질’ 형태의 유산이었다. 홀리랜드는 이 골칫덩어리 똥들을 때려 넣기에 최적의 공간이었다. 지표 아래 마련된 이 거대한 창고는 사실 누구나 출입이 가능하다. 그렇다고 굳이 이곳을 들락거릴 사람은 없지만... 어쨌거나 이곳이 모두가 알고 있는 홀리랜드의 ‘지하’인 셈이다.
진짜 지하는 훨씬 더 깊은 곳에 있다. 아무도 모르고, 아무도 몰라야 하는 곳이다. 그곳에 우주선 홀리랜드를 움직일 수 있는 조종실이 있다. 연료는 무엇일까? 전량 폐기된 걸로 알려진 크리스천 연합의 핵무기들... 농축 우라늄이다. 그리고 중심에는 거대한 입자가속기가 있는데 극히 짧은 순간 생성되었다 사라지는 반물질을 확률 계산을 통해 예측 반응—폭발을 가능케 하는 장치다. 다시 말해 이 성현들의 별은... 어떤 의미로는 연합이 소유한 모든 전함을 합친 것보다 더 강력한 화력을 탑재한 함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 이건 정말 극비다.
홀리랜드의 심장처럼
지금도 가속기는 회전하고 있다.
시간과 데이터가 쌓이고 쌓일수록
예측 반응의 성공 확률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즉 홀리랜드는
크리스천 연합의 마지막 보루인 셈이다.
시가가 남거나, 내가 남거나
그거지 뭐.
8(에이트)볼.15)
코드 입실론으로 묶인 세타의 윗분들은
홀리랜드를 그렇게 부른다.
당구는 또 예수가 잘 치는데
당연히 내가 지도했기 때문이지.
큭큭. 그렇다고 이 별을 너무 두려워하지 않았음 좋겠다. 이곳은 그야말로 낙원이니까... 실존하는 성현들과 그들의 가르침... 아름다운 숲과 들판... 축복과 평화만이 가득한 별이니까. 별 자체가 무기일 뿐 이곳엔 그 흔한 총 한자루도 없다. 그래, 지금 책상에 놓인 저 망치... 정도를 최고의 무기라 칭해야 할 정도랄까? 일생에 단 한번 추첨을 통해 오는 신도들과는 달리... 아무 때고 머리가 복잡하다 싶으면 한번 놀러오기 바란다. 내 잘해줄게. 이 별의 총독인 내가... 잘해준다니까~
모니터에 불이 들어온다. 잠깐, 잠깐~ 이제 녹화를 해야 할 때다. 여태 이것 때문에 잠을 참으며 기다려왔다. 뭐냐구? 있어바바 있어봐봐... 스위치는 눌러야 할 거 아냐. 오케이, 나는 미리 파일명에 고객의 정보를 입력해둔다. 높으신 분의 정보라 손이 다 떨리네그려. 뭐 물론 물건이 될지 안 될지는 미지수지만... 좋아, 좋아. 우선 ‘저녁 만찬’부터 얘기를 시작해보기로 하자. 그렇다, 보름간의 대장정을 마치고 나면 다들 숙소로 돌아와 떠들썩한 만찬을 즐긴다. 배우와 스태프들은 따로 모이는 회관이 있고 중앙 본관의 별실에선 카를을 비롯한 중견들, 또 신도들을 인솔해온 고위직의 연회가 주선된다. 일반적인 연회다. 만찬을 즐기고, 약간의 술을 곁들이고... 성경에 대한 깊이있는 토론... 예수의 삶에 대한 재해석... 우주시대에도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개인으로서의 신앙 간증 같은 걸 논하고 듣는 시간이다. 만찬은 대개 밤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실은, 이 시간을 잘 보내야 한다.
혹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연회 도중엔 언제나 이런 귓속말을 듣게 된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할 순간이다. 다들 어느정도는 부와 권력을 거머쥔 자들이고, 또 대개는 예민한 여성들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낚는 어부의 심정을 당신이 알까 모르겠다. 우선 머릿속에 이들의 서열 순위가 명확히 입력되어 있어야 하고... 흐름과 안색을 잘 살펴야 한다. 개인의 성격에 따라서는 끝까지 내숭 부항 쑥뜸을 들이다가... 그래서 생각이 없으신가 했는데... 꼭 지구에 돌아가 뒤끝 작렬하는 씨발년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운이 좋았다. 그냥 서열 1위께서, 만찬 시작 20분 만에... 예수님과 개인적으로 만날 기회가 있다면 꼭 드리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쿨하게 신호를 보내오셨기 때문이다. 박수 짝짝짝... 나는 안다. 이제 여기서 다섯시간을 죽친다 해도 더는 이런 귓속말을 들을 일이 없다는 걸... 신속하게, 그리고 은밀하게 포레타 그룹의 일원이신 이분을 밖에서 따로 뵈었다. 물론 규정엔 어긋나는 일이지만 이토록 꼭 드리고 싶은 얘기가 있다는 사모님의 꿈을 짓밟는다면 그건 그야말로 지옥으로 떨어질 죄를 짓는 거겠지. 이목을 피해 예수의 숙소까지 사모님을 잘 모셔다드리고 나는 일찌감치 관사로 돌아온 것이다.
어떤 흥미를 위해
지금 예수의 침실을 녹화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이건
나만의 보험인 셈이지.
이 짓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당신은 아직 모를 것이다.
무사히 일과가 끝났다.
이제 취침기도를 올려야지!
찬송은 301장, 지금까지 지내온 것
그러니까
당신이 완벽해야
내가 잠을 자지, 이 사람아.
⌛⍾⎊⍦
푹 잤다. 다섯시간은 더 디비 자도 문제 될 게 없는 날이지만 나는 어김없이 6시에 눈을 뜬다. 남들보다 이른 기상시간, 또 이를 엄격히 준수하는 일이야말로 애국자의 기본 덕목이다. 나는 기도를 올리고 국가에 대한 충성서약을 낭독한다. 이제 체조를 시작할 시간이다. 갑자기 하품이 나온다. 실은 턱없이 잠이 부족한 상태지만 나는 다시 푹 잤다고, 생각한다. 사소한 일 같아 보이지만 내가 흔들리면 국가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어랏, 누군가 뛰는 소리가 들린다. 프로그램을 마친 다음날 새벽에 개 말고는 달릴 동물이 없는데... 사람이다. 창을 통해 나는 멀리서 달려오는 사람의 정체를 확인한다. 야리다. 후다닥 체육복을 입고 나는 관사를 뛰쳐나간다. 체조는 어떡하지 잠시 갈등도 했으나 체조도 달리기도 다 같은 운동... 어느새 저만치 뛰고 있는 야리를 나는 열심히 따라잡는다. 사실 쬐매 쫄리긴 하지만 새벽부터 패기야 하겠어?
안녕, 야리~ 하고 나는 인사를 한다.
야리가 힐끗 쳐다본다.
벌레를 보는 눈빛이다.
패지는 않았다.
적당한 블럭에서 멈춰 선 야리가 몸풀기를 시작한다. 나도 따라 몸을 푼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다. 어젯밤은 너나없이 배우들이 한탕 뛰는 날인데... 야리는 지금 운동을 하고 있다. 휘휘 같은 동작으로 팔을 돌려주며 나는 극단의 앞날과 문제점에 대해 논하기 시작한다. 이봐, 야리. 겸직을 할 정도로 무거운 짐을 지기엔 카를이 너무 늙었다고 생각되는데 니 생각은 어때? 대답이 없다. 나는 젊은 사람이 수석배우를 맡아도 좋을 거 같은데... 뭔가 혁신적인 차원에서 말이야.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니가 한번 맡아보지 않을래?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 어쩌면 이 아이의 몸속엔 방귀 같은 건 없을지도 모른다. 예전부터 가졌던 생각이다.
내 말 안 들리니? 나는 묻는다. 문득 내가 어제 자다 죽어 귀신이 되었는데 그 사실을 나만 모르나 생각도 든다. 아무 말 없이 운동을 끝내고 야리는 발길을 돌린다. 나도 따라 걷는다. 나는 현재의 시국상황에 대해 가장 논리적이며 합리적인 시각으로 논평을 시작한다. 통하지 않는다. 실은 얼마든지 제재나 불이익을 줄 수 있었다. 마음만 먹었다면 영구 제명시킬 수도 있었다. 죽이고자 했다면 그래, 이미 열번도 넘게 손을 썼겠지. 이상한 것은 그렇게 처맞았는데도 밉지가 않았다. 나는 그때 회개를 했고, 실은 매일 회개하는 사람이고... 단지 한마디만 해줘도 좋을 텐데 싶지만 그 뜻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스스로의 내면에 집중한다. 깊은 심연의 무의식을 끌어올려 단지 한마디만 해주면 어디가 덧나냐 그 감정을 최대한 정확히 언어로 형상화한다. 그리고 외친다.
야, 진짜로 한판 떠볼래?
정정당당하게!
야리가 힐끔 쳐다본다. 그리고 가던 길을 계속 간다. 순간 섬찟, 했지만 그래도 내 마음은 잘 전달되었을 것이다. 또라이 같은 년, 나는 욕을 한다. 도대체 저년은 무슨 재미로 살지... 연장자로서 걱정도 든다. 뭐, 내가 쫄았다구?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러니까 이건... 순전히 저년의 눈 때문이다. 예전부터 그랬다. 좀 전에 저년이 쳐다볼 때도 갑자기 어젯밤 미시즈 리를 모시고 예수의 숙소를 안내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보십시오, 이것이 오늘 못 박힌 자국입니다. 이 손과 발등을 보십시오... 약을 팔던 내 모습도 생각났다. 그럼 영적인 대화 나누시기 바랍니다... 문까지 따라나선 예수의 귀에 애국하라고 속삭여준 혀의 움직임도 느껴졌다. 뭐? 그럼 뭐라고 하는데... 그 상황에서 그렇다고 사모님 잘 빨아드려라 할 순 없잖아... 아무튼 그래서다. 베네치아 여사를 부르러 갔을 때... 그래, 이미 그 시간엔 유곽으로 변해버린 회관과... 떡치다 나와서 좀 있다 갈게, 다 끝나가요 하던 여사의 표정... 성경에 쓰인 그대로인 매음굴의 풍경이 떠올라 온몸이 섬찟, 해지는 것이다. 나는 진짜 저년에게 묻고 싶다.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냐고!
주머니를 뒤져, 나는 피우다 남은 시가 토막을 꺼내 문다. 그리고 불을 댕긴다. 후우~ 나는 저년의 문제가 애국심의 결여에서 비롯된 걸 거라고 생각한다. 뭐, 신앙이 깊지 못한 어린양들이 흔히 겪는 갈등이지. 정말 언제 시간이 된다면, 또 패지만 않는다면... 꼭 붙들어놓고 세타가 마련해놓은 ‘종교와 국가의 불일치성에 대한 갈등 극복 제안서’ 전문을 조목조목 읽어주고 싶다. 때리면 맞지 뭐... 눈탱이가 붓고 코피를 질질 흘리면서 끝끝내 전문을 읽어준다면... 어느새 저년의 눈에도 물기가 맺히겠지. 그리고 갑자기 오오 빌라도... 이 모든 일은 전부...
지하경제 활성화를 위함이었군요.
그렇단다, 야리. 게다가 이것은 우리의 사업이잖니.
오, 빌라도... 제가 아무것도 모르고.
처음엔 나도 그랬단다, 애국심과 신앙은 함께 깊어지는 것이지.
피를 닦아드릴게요. 많이 아팠나요?
이 모두가 주님의 이름으로 이슬람에 맞서기 위함이란다.
저는 이슬람이 싫어요!
야리의 손을 꼭 쥐고 감사기도를 드리고 싶다. 찬송도 1절만 부를 생각이다. 우리 같은 복제인간들에겐 결혼이 허락되지 않지만... 죽어 천국에 오른다면 누드로 꽃동산 봄동산을 누비며 인형놀이를 하고 싶다. 그리고 다시는... 저런 눈으로 나를 쳐다보지 못하게 만들고 싶다. 구름이 살짝 일그러지며 하늘 저편에서 빛이 반짝인다. 지난 프로그램의 신도들을 싣고 우주선이 이륙하는 광경이다. 구름이 일그러지고 조도가 급격히 낮아진 이유는 웨더시스템의 혼란 때문이다. 태양과의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홀리랜드의 기상은 전적으로 웨더시스템에 의지해야 한다. 이 화창한 날씨도 공기도... 실은 전부 돈이란 얘기지. 기본적인 예산은 이 값비싼 별의 운행과 유지보수에만 책정되어 있다. 물론 공연에 추가되는 특별예산이 있긴 하지만... 그외의 비용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더욱 중요한 건 이윤이다. 이것이 실은... 세타의 사업이기 때문이지.
사모님 한번 빨아드리고 예수가 버는 돈이 얼만지 아나? 음으로 양으로 기부며 운영보조금으로 들어오는 고위층의 배려가 없다면... 말이 나왔다 해도 말을 말자... 어젯밤 배우들이 번 돈은 또 얼마고... 물론 그건 회사와 분빠이 하는 거지만... 당신은 이곳의 경쟁을 모르고... 부조리를 모른다. 이 짓이 힘든 이유를 한가지 더 말해주지. 홀리랜드를 방문하는 대다수는 기독교인들이지만 매출은 그다지 높지 않다는 거. 말하자면 하층민들 오천명 상대하느니 노 젓고 건너온 상류층 스무명 상대하는 게 더 낫다는 거... 기독교인의 비율은 압도적으로 높아졌지만 신지구의 상류층들은 점점 종교적 이탈을 해왔다는 이 모순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5구역 새끼들은 팔자가 늘어졌지, 암~ 그렇고말고. 상류층에서 인기가 많은 건 지극히 개인적인 선을 추구하는 동양철학이다. 특히 장자, 노자 이런 놈들이 인기가 많지. 나는 정말 묻고 싶다. 옹기종기 앉혀놓고 말 따먹기... 그것도 혼자서 탱자탱자 하는 사업이랑 우리가 동등한 조건인지를... 수많은 인원이 피땀 흘려 연출하는 이 장엄한 서사시가 고작... 나는 시가를 끈다. 까사도레스의 연기조차도 지금은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나마 이탈을 할래야 할 수 없는 초고위층이 우리의 젖줄이다. 그래서 예수가 우리의 젖줄이고... 신지구의 정권에 일말의 흔들림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내 꿈은 하나다. 언제라도 딱 한번 여왕폐하16)께서 이곳을 찾아주신다면... 살짝 신호만 주신다면... 그랬는데 매우 성스럽고도 흡족하셔서... 예수와 함께 이 지옥을 탈출하는 것이다.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예수를 어부바하고 여왕의 우주선에 오를 것이다. 업어 키운 자식의 발을 어찌 바닥에 닿게 하겠으며, 업혀 자란 자식이 어찌 아버지를 내치겠는가. 세타의 심장에서 나의 애국심은 더욱 빛날 것이고... 복제인간으로서는 최초로 미들네임을 수여받는... 세타의 총장이 되고 싶다. 비록 사비(私費)로 예수에게 해바라기를 만들어준 건 사실이지만... 나를 사욕에 사로잡힌 인간으로 생각한다면 지금 당신 실수하는 거다. 나에겐 사욕이 없다. 나에겐 다만
이 나라를 구하고픈
열정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답답하다. 지금의 이 현실이... 신지구에 몰아닥친 새롭고 불온한 이 위기가 말이다... 이유는 선거 때문이다. 불안한 정황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베타 → 감마 → 델타 → 엡실론 → 제타 → 에타로 순환되는 통치시스템에 서서히 불만을 가진 세력들이 등장한 것이다. 이들은 시스템의 핵심인 알파의 전지전능을 의심했고 인공지능이 아닌 집단지능으로 이를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게 말도 안 되는 이유가... 그럼 다시 20세기로 돌아가자는 얘기냐, 이 얘기다 내 얘기가. 인공지능 알파가 이룩한 우주시대의 감사함을 모르고... 고작 달에서 월석이나 주워오던 찌질이를 우주선에 태웠더니 토성... 정도 와가지고 하는 말이 집에 가서 밥 먹어야겠다, 이 얘기잖아. 나는 이런 놈들을 싸그리 잡아 구지구로 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타가 내게 20세기 반공기독교학을 전공‘시킨’ 이유가 어쩌면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맡겨만 주신다면, 그러니까 내가...
나는 홀리랜드에서 눈을 떴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신지구의 삶이 어떤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한가지 확신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께 선택되었고 주님의 축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부정하고 불신한다면 그것은 이단의 삶이다. 만약 신지구의 지도부를 심판해야 한다면 이는 오로지 주의 권한이시고 의지시로다, 왕은 주님께서 기름 부은 자이시고 주의 종이시니... 아멘. 그러니 다~ 믿음이 부족해서다 이 얘기다. 하지만 사탄의 농간도 우주를 뛰어넘는 것인지... 집단지능이란 놈의 세력이 점점 선거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나중엔 이놈이 알파의 상당부분을 잠식해 들어왔다는 정보도 접했다. 혼란을 야기하는 것... 이보다 명확한 빨갱이의 증거가 어딨겠느냐 이 말이다. 시간이 갈수록 인공지능과 집단지능의 경계가 흐려졌기 때문에, 세타는 전혀 새로운 선거전략을 세워야 했다. 세타는 극을 연출했다. 모두가 선거결과라 믿고 있지만 사실은 극인... 홀리랜드의 프로그램과 같은 연출이었다.
뽀록났다.
그래서 내가 답답함을 토로하는 것이다. 세타는 분명 내게 이 일을 맡겨야 했다. 진정한 극이 무엇인지 아는! 메소드 연기의 본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 같은 거인의 도움을 청했어야 옳았다는 말이다. ‘완벽’이란 게 어떤 건지 단 한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얼치기들... 상부의 눈에 거인의 면모가 비칠까봐 이를 가로막는 내시들... 얼마 안 남은 시가 토막을 다시 물고 나는 한숨 섞인 연기를 길게 내쉰다. 최초로, 또 공공연히... 세타의 이름이 오르내리게 되었다고 들었다. 지금이라도 세타는 진정한 애국자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이 세계의 완성도를 높일
누구보다도 완벽을 이해하는
당신은 이미
그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다.
예수의 숙소를 찾아 나는 지난밤의 흔적들을 정리한다. 출입구의 통과 기록도 삭제한다. 성현의 숙소를 드나들 수 있는 건 매니저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나쳐도 그만이지만... 나란 사람 완벽해야 밥도 넘어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눈조차 못 뜨는 예수를 옷 입히고, 또 들쳐업고 나는 식당을 향한다. 그렇다. 내가 이렇듯 이 아이를 업어 키웠다. 정확한 식사, 일정한 운동, 건강한 신체관리와 올바른 인성 전수... 무엇 하나 빠짐없이 완벽하게 길러낸 아이인 것이다. 힘드냐고? 전~혀 힘들지 않다. 나는 이 아이를 위해 죽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내가 키운 예수 그리스도이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애국자는 없기 때문이다. 겨우겨우 눈을 뜬 예수가 여기 어디냐고 묻는다. 식당 가는 길이라고 답해주자 그냥 자면 안 되느냐는 말이 돌아온다. 자식을 굶기는 부모가 어디 있으랴. 나에겐 아버지가 없지만 너에겐 아버지가 있다고 나는 말한다. 속으로 하는 말이다.
그렇다, 근래 들어
어딘가 계속 찜찜하고 불안했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식당에서 맞닥뜨릴 줄은 미처 몰랐다.
언제나 앉는 지정석에서 예수와 마주 앉아 베이컨을 씹고 있었다. 설마하니 저 앞에서 식판을 들고 빤히 나를 바라보는 아이는... 야리가 아닌가, 했는데 야리였다. 이런, 니미 설렜다... 설마 했는데 지금도 나를 보고 있다. 그래, 어쩌면 내 깊은 심연의 무의식을 끌어올려 정확히 언어로 형상화한 그 멘트를... 곱씹으면 씹을수록 그 의미가 전달되어 사과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긴 걸지도 모른다. 확신은 없지만 심증은 가는데... 이윽고 결심이 섰는지 야리가 걸어온다. 그리고 정말... 내 앞에 앉는다. 똑바로 쳐다보며 식판을 내려놓는다. 아, 안녕, 야리. 새벽에 건넨 인사를 나는 다시 반복한다. 여전히, 정말 쳐다보기가 힘든 눈이다.
오늘부터 예수는 나랑 같이 밥 먹을 거예요.
운동도 나랑 같이하고
늘 내가 곁에 있을 거야.
당신은 빠져, 변태새끼!
여태 무슨 짓 해왔는지 다 알아.
앞으로 예수한테 접근하면
내가 죽여버릴 거야.
듬성듬성 식당에 앉아 있는 모두의 시선이 느껴졌기에 이 또라이년을 상대해봤자 나만 손해란 걸 알 수 있었다. 이거 뭐지? 우선 생각부터 가다듬어야 했다. 이년이 지껄인 내용 자체가 일단 성현보안법 위반이다. 보고서만 올리면 영영 빛 한번 못 보는 감옥행이지. 내가 보건대 구지구와 분명 연관이 있다. 간첩이 분명하다. 뒤를 캐면 즉결도 가능할 것이다. 내가 취조하고 내가 고문하고 싶다. 무엇보다 맘에 안 드는 저 눈부터 뽑아버리고 싶다. 나는 일단 코웃음을 친다. 상황 자체가, 코웃음을 쳐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년의 말은 무시하고 나는 예수에게 묻는다. 온화한 얼굴로 묻는다. 야리랑 친하니? 그러자 예, 예수가 답한다. 고개를 숙이며 답한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수석배우이자 18세기 오페라학을 전공한 내 오랜 친구... 카를이 벌떡 일어나 나를 돕는다. 야리, 너 지금 어른께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네년은 애비에미도 없냐? 아무도 애비에미가 없기 때문에 커다란 웃음만 선사해줬다. 미친 영감탱이, 나까지 웃기면 어떡하냐고... 어쩔 수 없이 웃은 김에 나는 야리를 향해 야지를 놓는다. 얘 거시기 해바라긴데 괜찮아? 웃지도 않고 표정 하나 안 바꾼 채 미친년이 말한다. 알아, 그래서 어쩌라구! 내 이럴 줄 알았다. 내가 말했잖아... 이런 년들이 꼭 뒤로 호박씨 깐다고. 했네, 했어!라고 외치며 나는 자리를 일어선다. 그리고 자~ 여러분, 젊은 두 사람의 사랑싸움 같으니 일단 축하나 해줍시다. 짝짝 박수를 유도하며 나는 상황을 정리한다. 그렇다, 일단은 좀 시간이 필요하다.
사슴이 아프다. 아니, 가슴이 아프다. 완벽에 가까웠던 나의 세계가 갑자기 한순간 무너진 느낌이다. 그래, 어쩌면 지난 공연 때부터 무너져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사실 털끝만큼도 신경쓸 일이 아니지만... 그래, 이건 깊고 어두운 내면의 문제다. 또라이년을 끝장내는 건 일도 아니다. 문제는 예수다. 예,라고 말할 때의 그 떨림 속에서 나는 예수의 변화를 직감했다. 나는 일단 최대한 먼 길을 둘러 그 원인을 찾기로 결심한다. 구멍난 그물을 한땀 한땀 수선한 후에 소리소문 없이 저년을 엮어야겠지.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듯... 내가 하는 일을 예수가 모르게끔... 그런 일처리가 필요하다. 총독인 내가... 난데없이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하지만 예수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너무나 상황이 힘들어진다. 홀리랜드는 예수고 예수가 곧 홀리랜드기 때문이다.
체육관에서 예수와 야리를 만났지만 나는 웃는 낯으로 그들을 대했다. 쏘아보는 그년에게 다가가 일부러 매달리기 운동의 지도요령을 설명하기도 했다. 매달리기야말로 예수에게 가장 중요한 운동이므로 끊임없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러나 벌크업은 절대 피해야 한다... 또 철봉과 십자가의 차이점...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이동하는 인체의 무게중심에 대한 역학적 이해... 따라서 어떤 복근운동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말해줬다. 일단은 암살쾡이의 경계를 푸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예수에게는... 그래도 아버지가 좋은 분이셨지라는 감정을 심어줘야 한다. 야리는 좋은 애란다, 진실한 친구지. 하물며 윙크를 하며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건네기도 했다.
하나, 둘, 하나, 둘 열심히 운동합시다~ 단원들 사이를 누비며 일부러 흥을 돋우기도 했다. 외부를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하니까... 음악을 크게 틀고 나는 갑자기 코믹 에어로빅을 선사한다. 6.2피트 270파운드의 베어형 거구가 내뿜는 압박개그에 다들 자지러지고 모두가 화합한다. 이코에게 관용을 베푼 게 정말 옳은 판단이었다. 평상시처럼 망치로 손을 아작냈다면(성현보안법에 따른 적법한 처벌이다) 지금의 이, 강아지처럼 나를 따르는 이코는 죽어 천국에 가서나 만났겠지. 로마 병사 역을 맡은 남자 단원들을 이끌고 나는 레슬링을 지도해준다. 그레코로만, 바로 우리 자랑스런 로마인들을 위한 레슬링이지. 우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나는 손목풀기와 발목풀기, 허리, 목을 푼 후 로마시대부터 이어져온 피와 땀, 우정과 의리의 세계로 단원들을 견인한다. 이코 궁디 팡팡, 더 단단해졌구나. 총독님의 압박이야말로 숨을 못 쉴 지경이었습니다. 하이, 파이브!
번갈아가며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면서 나는 몇가지 의혹을 풀 수 있었다. 우선 가졌던 의문점은 도대체 예수가... 언제, 어디서 야리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느냐의 문제였다. 성현들의 숙소는 일반 단원이 드나들 수 없고... 대부분의 시간은 내가 함께였다. 그 실마리가 풀렸다. 조르기를 하며 슬며시 물어본 말에 핫산이란 녀석이 줄줄 늘어놓았다. 반년 전부터 예수가 부쩍 장자랑 친했다는 얘기다. 성현들끼리 교류를 하는 중앙돔에서 다들 아는 사실이라고 했다. 넌 누구한테 들은 말인데? 거기 일하는 년한테요. 만찬하는 날이면 맨날 찾아오는 년이 있어요. 말인즉슨 장자의 대기실에 예수와 야리가 드나드는 걸 봤다고도 했다. 장자는? 또 대기실은 매니저가 관리할 텐데? 거기 놈들 일년 내내 농땡인 거 아시잖아요. 밤에도 술 마시고 들판에서 대자로 누워 자고 그런대요. 그런데 신도들이 그 모습에 깨달음을 얻었다며 도리어 기뻐한대요. 걔들은 체력단련도 안 해요. 끅켁.
장자...
그러니까 장자가 빈방을 빌려준다는 얘기다. 오키도키. 오리엔탈 쪽과는 평소 교류가 없다. 매니저끼리 안면이야 있지만... 교류해봐야 열불만 나기 때문이다. 그 새끼도 많이 컸겠구만, 샤워를 하며 나는 생각한다. 딱 한번 장자놈을 본 적이 있다. 예수도 장자도 예비 성현이던 코흘리개 시절의 일이다. 중앙돔에서 하는 단체교육을 마치고 어느날 예수가 울면서 들어왔다. 예수야, 왜 우니? 왜 그래! 이유인즉슨, 예수의 옆구리에 이식한 수축튜브를 보고 장자놈이 ‘옆구리 보지’라며 놀렸다는 얘기였다. 그때 달려가 딱 한번, 내가 꿀밤을 먹인 적이 있다. 따지고 드는 매니저놈은 죽통을 날려버렸지. 그 새끼가 그런 놈이다. 싹수가 노란 놈이었지. 장차 성현이 될 인간의 입에서 보지가 뭐냐고 보지가... 완벽이란 단어의 옆구리에서... 나는 지금 막, 숨어 있던 1인치의 구멍을 찾은 것이다.
입맛이 없어 저녁도 거르고 내내 누워 있었다. 기특하게도 이코가 연어스테이크를 숙소까지 가져다주었다. 부러 지하까지 내려가 내가 좋아하는 와인도 한병 곁들여서다. 나는 이미 오리엔탈 구역의 일정표를 뽑아 장자의 동선을 파악해둔 상태였다. 와인을 쭉 비우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마친 후 나는 관사를 나선다. 체육복 차림이다. 5구역까지 가려면 대략 40분은 걸어야 할 것이다. 최대한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움직여야 할 것이다.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나는 걷는다... 걷고... 또 걷는다. 게이트엔 패스가 찍히니까 나는 둘러서 숲길을 이용한다. 안개가 스멀스멀 끼는 걸 보니 오리엔탈 구역이 확실하다. 들은 얘기론 이 새끼들은 낮에도 안개를 팍팍 친단다. 눈앞도 분간키 어렵게 안개 잔뜩 쳐놓고... 잔인하리만큼 쨍쨍한 태양 아래서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려야 하는 예수가 정말이지 가련하다... 사실주의의 미학을 알기나 할까 이놈들은... 이 나태하고... 구역질나는 신비주의자 놈들!
미친 듯이 들판을 헤매다 나는 사냥법을 바꾼다. 차라리 거점이라 할 곳을 정해서 길목을 지키자, 빌... 패스를 통해 좌표를 확인하고 나는 안개 속에 똬리를 튼다. 그리고 기다린다. 역겨운 소나무 향을 참아가며... 기다린다. 준비해온 시가를 절반쯤 태웠을 때였나보다. 기다린 보람이 결실로 다가왔다. 안개 자욱한 저편에서 푸르스름한 무언가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흥얼흥얼~ 냄새로 치자면 발고린내 같은 멜로디의 술 취한 노랫소리도 들리기 시작한다. 싹수가 노랬던 그 애새끼... 바로 장자였다.
어이, 하고 내가 외치자 이 새끼 깜짝 놀랐으면서 별일 아닌 듯 뉘~신가? 하고 묻는다. 이제사 얼굴이 보이네. 나는 흐흐 웃는다. 놈은 꼭 지처럼 생긴 소새끼를 타고 있는데 세포에 형광유전자를 심었는지 어쨌는지 푸르스름 빛이 난다. 이 푸르스름한 신비주의자 새끼들! 요놈을 어쩌나 하다가... 나는 장자의 수염을 잡고 요리조리 흔든다. 그래, 딱 보니 컵라면 좋아하게 생겼네... 흐흐, 웃는다. 이제야 놈은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는 듯하다.
그대는~ 무엇을 구하길래~ 이리 소나무 가지를~ 잡고 흔드시는가?
얼씨구, 이 새끼 지금 약 파는 거 보소. 나는 입이 떡 벌어진다. 일단 그 옛날 그 자리에 꿀밤을 한대 딱, 때리고 나 몰라? 아저씨 기억 안 나? 나는 묻는다. 장자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우~울한~ 사람은 과거에 살고, 불안한 사람은~ 미~래에 살고, 평안한 사람은~ 지금 이 자리서 현~재를 산다네~란다. 그래, 이 자리에 우선 말뚝부터 박자 싶어 나는 소새끼의 고삐에 매달린 줄을 나무에 묶는다. 음매~ 하고 신비주의 소새끼가 운다. 약간은 난감하다는 얼굴이 되어 장자는 빤히 나를 쳐다본다. 내려, 인마! 하고 나는 말한다. 아저씨는 평소에 말 타는 분이얌마,라고도 한다. 장자는 내리지 않는다. 그리고 대신 누군가당신에게해악을끼치거든앙갚음하려들지말고강가에고요히앉아강물을바라보아라그럼머지않아그의시체가떠내려올것이오,라고 중얼거린다. 다 듣고 있자니 속이 터져 내가 대신 불러주는 거다.
내려, 하고 나는 다시 꿀밤을 먹였다.
장자는 내리지 않았다.
대신 쿵, 하고
소 위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더는
숨쉬지 않았다.
단지 몇가지 물어볼 게 있었을 뿐이다. 다 같은 성현이라도... 이래서 누가 교육시켰나가 중요한 것이다. 당신도 알지? 협조만 좀 해줬으면 내가 궁디 팡팡도 해줬을 깊은 내면의 어르신이다. 쪼그리고 앉아 푸륵,거리는 소새끼를 마주 보며 나는 상황을 냉정히 판단하고 가늠해본다. 일단... 수족이 필요했다. 이에 상응할 만큼 내게 약점이 잡힌 자... 나는 패스로 이코를 호출한다. 좌표를 찍어주고... 지하박물관의 구역번호와 비품번호를 알려준다. KCIALMN104826. 2장. 그리고 당장 이곳으로 튀어오라고 지시했다. 아무도 몰래, 숲길로 돌아서.
헐레벌떡 이코가 나타난 것은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다. 일단 나는 제대로 비품을 가져왔는지부터 확인한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이코의 물음에 산책을 하다 오랜만에 장자를 만났는데... 반가워서 꿀밤을 한대 때렸더니 이렇게 된 거라고 말한다. 20년 만에 만났으니 내가 얼마나 반가웠겠니?라고도 한다. 이코는 벌써 덜덜 떨고 있다. 성현보안법을 따지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는 사안인 것이다. 너무나 태연한 내 행동에 더 공포를 느꼈는지 장자의 입에 인공호흡을 해대고 지랄이다. 심폐소생술까지 하려는 듯 장자를 올라타다가 이코 이 등신이 소리친다. 총독님, 하고 소리친다. 내가 쉿! 하자 목소릴 낮추긴 했다.
그런데 이 사람
노자(老子)잖아요!
안개 때문이다. 아니, 안개고 뭐고 간에 나는 서둘러 작업을 개시한다. 이코가 가져온 비품을 꺼내 불을 붙이자 지랄발광 같은 불꽃이 튀면서 매캐한 연기가 마구마구 치솟는다. 연기를 한모금만 마시고도 이코는 자지러진다. 이게 뭐죠? 사람 잡겠는데요? 나머지 한장도 마저 작업을 한 후 불꽃이 죽기만을 나는 기다린다. 연기에 놀란 소새끼도 지랄발광을 했지만 곧 상황이 진정될 거라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워이 워~ 나긋이 소를 달래고 나는 이코와 함께 노자의 시신을 들어 소등에 태운다. 팔다리를 축 늘어뜨리고 엎어진 자세로 태운다. 그리고 은은히 타고 있는 과거의 유산을 소 뒷다리 근처 적당한 장소에 정성껏 포개둔다. 나는 이코에게 말한다. 노자는 자살한 거라고... 또 너와 나는 이제 한배를 탔다고... 검댕이 묻은 얼굴로 검댕이 묻은 이코를 안심시킨다. 유독 안개 짙고 깊은 밤이었다.
다음날, 당연히 홀리랜드가 발칵 뒤집혔지만 나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이쪽은 이쪽대로의 라인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의 코드와도 같은 것이다. 그 코드를 알 만한 사람이 또 이곳의 병원장이고... 오후쯤 되어 내가 전화를 넣자 기다렸다는 듯 닥터 벡(Beck)이 전화를 받았다. 거, 나도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결과는 나왔습니까? 내가 묻자 그럼요, 하고 원장이 답했다. 자살입니다. KCIALMN104826이 현장에 있었으니까요. 깜짝 놀란 듯 나는 묻는다. 예? KCIALMN104826이 있었다구요?
쯧쯧쯧쯧. 그럼 사인은요?
사인은 병사(病死)입니다.
아, 그럼 자살이고... 사인은 병사.
예, 그렇습니다.
보고서 이렇게 가면 됩니까?
이렇게 가야 합니다. 매뉴얼이니까요.
예,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요.
⌛⍾⎊⍦
나는 가끔 이 세계를 만든 것이 누구일까, 생각에 잠길 때가 있다. 물론 주께서 빛과 어둠, 해와 달, 별... 궁창과 바다와 육지... 그곳의 생물들, 그리고 식물들... 들짐승과 사람을 만드셨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는 확고한 신념이다... 믿음이고, 나의 신앙이다. 주께선 엿새에 걸쳐 이 세계를 만드시고 칠일째 되는 날 안식을 취하셨다. 그리고 더는 다른 것을 만들지 않으신다. 그건 아마도, 주께서 만드신 이 세계가 완벽한 것이기 때문이었으리라. 여기에 새로운 걸 더한 것은 인간이다. 종이와 금속, 자동차와 플라스틱, 선박... 무기와 의료품과 전자기기... 비행기와 우주선, 그리고 인간... 위성과 행성, 신... 그렇다면 이 세계를 이제 과연 누구의 창조물로 봐야 하나, 의문이 드는 것이다. 나는 궁금하다. 인간은 언제 안식을 취할 것인가? 인간은 과연 안식할 수 있는가... 신께서 창조한 이 세계를 자신과의 합작품으로 만들어가는 이 과정이 대체 언제, 어디까지 이어질 것인가... 애초에 완벽했던 이 세계는 언제쯤 다시 완벽에 이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삑. 이놈의 의자가 다시 소리를 낸다. 나는 공구함을 꺼내고 의자를 분해한다. 작업용 천을 바닥에 깔고... 이런 건 정말 일도 아니지. 닦고 확인하고 점검하고 보완하고 다시 의자를 조립한다, 앉는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삑 소리는 사라졌지만 나는 이제 이것을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든다. 인간에게 안식은 오지 않는다. 인간의 달력은 더이상 넘어가지 않을 것이며... 우리는 영원히 엿새째에 머물러야 할 것이다. 시가를 빨며 나는 생각한다.
신이 남거나
인간이 남거나
그것이 바로
이곳의 운명이다.
불안해 죽겠다. 당신한테만 하는 말이다. 베네치아 여사를 다시 불러 한참 젖을 빨았지만...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실은 늙은 여자랑 엄마놀이나 할 때가 아니다. 그런데도 여사를 부른 까닭은... 달리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누구도 이 공포를 모를 것이다. 자다 죽어 귀신이 되는 게 가장 현명한 선택이지만 잠을 못 자 귀신이 못 된 상태로 나는 지금 앉아 있다. 이틀째 잠을 설쳤다. 발각이 됐냐고? 홀리랜드엔 아~무 일도 없다. 물론 이틀 전에 자살사건이 있었지만, 또 병사임이 밝혀졌고... 덕분에 게이트 하나가 폐쇄되었지만... 나무에서 꽃이 진 것과 같은 일이지. 내가 말했잖아.
그런 건 일도 아니라고.
홀리랜드에서 일어난 일이 발표가 될 거 같애?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지. 예수 매니저 장자 폭행, 장자의 매니저까지 구타... 이런 기사란 게 있을 리 없잖아. 천상에서 속보! 대천사 가브리엘 금전 문제로 미카엘 폭행하다, 전치 6주 진단 나와... 이런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지. 아니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지? 이렇게 앉아 농담이나 때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나는 일어나 기도를 드리고 국가에 대한 충성 서약을 낭독한다. 그리고 주섬주섬 레슬링복을 챙긴다. 세탁이 잘된 걸로... 적어도 최대한 불쾌감을 드리지 않기 위해... 그리고 또... 깜박하고 패스 따위를 주머니에 넣은 건 아니겠지? 재차 확인한다. 액면 그대로인 육신과 옷이 전부다. 나는 관사를 나선다. 자정을 넘긴 새벽이고 모두가 잠든 시간이다.
해머 경께서는 단둘이서만 보자고 하셨다. 아무도 몰래 혼자 나오란 얘기다. 장소는 체육관, 오랜만에 레슬링 실력이나 겨뤄보자 말씀하셨다.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해 나는 레슬링 도장의 문을 연다. 빛도 그 무엇도 새나가지 않게끔 철저한 확인을 하고... 바닥을 청소한다. 이제 여기서 일어날 일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어야 하고, 여기서 나눈 얘기는 애초에 없었던 얘기여야 하기 때문이다. 해머 경에 관한 소개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단순히 코드 입실론으로 묶인 직속상관이라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저 멀리 올림퍼스에 있는... 세타의 심장에서 뻗어나온 동맥 하나가... 칠흑 같은 우주를 뱀처럼 가로질러... 불쑥 앞에 나타나 내 피를 받거라, 하는 그런 기분이다.
만약 언젠가 홀리랜드를 에이트볼로 전환하라는 지령이 하달된다면 그것은 필시 해머 경의 목소리일 거다. 나는 가끔 그날을 상상하곤 한다. 매뉴얼대로 직원들을 탈출시키고 홀로 지하로 내려가 조종간을 잡아야겠지. 그리고 전속력을 다한 여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신지구가 구지구를 향해 던지는 마지막 사구(死球), 죽음의 천사가 되어... 내가 지금 두려움에 떠는 까닭은 이것이 예정에 없는 방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와 레슬링을 겨뤄본 적이 없다. 지시만 하달받았지 그를 만난 적도 없으며... 때문에 ‘오랜만에 레슬링 실력이나 겨뤄보자’에 담긴 진짜 의미를 파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주여, 저를 지켜주소서.
어디로 들어오셨는지는 모르겠다. 최대한 조도를 낮춘 조명 때문일 것이다. 해머 경은 뒤꿈치를 사뿐, 사뿐, 들어올리며 걸어오셨다. 키는 나보다 작지만 바위처럼 단단한 체구다. 여기 오면 나도 모르게 이런 식으로 걷는 느낌이 들어, 기분 탓인가? 그가 묻는다. 뜻밖의 얘기라 잠시 침을 삼켰지만, 지구보다 중력을 살짝 낮게 잡아놔서 그런 겁니다. 신도들은 몸이 가벼워진 느낌을 받고... 이는 그들에게 매우 특별하고 긍정적인 심리적 효과를 제공해줍니다,라고 답한다. 그렇군, 구름 위에 선 것처럼 말이지... 그런데 과장이 없고 미묘하게 사실적이야, 대단하군. 미소를 지으며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고르고 새하얀 이의 소유자다. 직육면체를 연상케 하는 짧은 머리다.
빌! 그가 팔을 벌린다.
최후의 십자군이여...라며 안아준다.
나는 놀란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오래전부터 생각해둔
나의 미들네임이기 때문이다.
영광입니다,라고 답하지만
벌써 수색을 당한 기분이다.
뚜벅뚜벅 걸음을 옮긴 그가 국기를 바라보며 발을 모은다. 나도 그의 곁에 서서 발을 모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한다. 가슴에 손을 얹고 오직 국기만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가 얼마나 오래 경례를 했는지 당신은 모를 것이다. 입술이 다 마르고 다리가 떨렸지만 그는 손을 내리지 않았다. 혹시 주무시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의 시간이었다. 상황파악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살짝 곁눈질을 하면 왠지 눈을 돌리는 순간 빤히 이쪽을 곁눈질하고 있는 그의 눈과 마주칠 것 같았다. 결국 용기를 짜냈다. 그리고 보았다. 일그러진 얼굴로 굳게 입을 봉인한 채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그를 보았다. 아차, 싶었다. 그래서 지금 나는 울고 있다. 그가 언제 가슴의 손을 내릴지는 현재로선 미지수다. 나는 분발한다.
누가 투서를 넣었나봐?
레슬링복을 갈아입으며 해머 경이 말한다. 행정 쪽으로 넣었는데 입수는 우리가 했지. 홀리랜드에서 어떻게 투서를 올릴 수 있었는지 지금 경로를 조사 중이야.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지. 실은 투서 건 때문에 출발했는데 오는 도중에 성현 한 사람의 사망소식도 들리더라구? 뭐, 자살을 어떻게 막겠냐마는 사업에 지장을 줘선 곤란하지, 안 그래? 노자가 얼마나 많이 버는지는 자네가 더 잘 알겠지. 이런저런 일 때문에 자네 자리가 중책이란 걸 다시 한번 상기했다네. 그런데... 왜 그랬어?
야리다. 말고는 다른 인물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일단 간첩이 하나 있습니다,라고 나는 답한다.
암살쾡이 같은 년이죠.
간첩이라니 이해가 되는군, 내가 뭐 도와줄 건 없나?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아 참 또 한가지!
어깨끈을 탕탕 튕기며 해머 경이 웃는다.
그런데 촬영을 왜 그렇게 많이 했어?
폭탄 쥐고 흔들 생각이야?
내 마누라도 있더구만.
나는 답하지 못한다. 그가 자연스레 손을 뻗어왔으므로 나도 손을 뻗는다. 선택권도 결정권도 모두 이 사람의 손에 쥐여 있음을 느끼며 나는 엉키기 시작한다. 엎치락뒤치락 앵클락을 피해 그의 어깻죽지를 노렸으나 도리어 빠져나간 그에게 등을 내주고 만다. 나는 그에게 깔린다. 한동안은 이 포지션이 유지될 것이다. 불과 몇분 지나지 않았는데 왜 이리 지치고 식은땀이 나는지를 알 수 없다. 압박을 이어가며 그가 얘기를 시작한다. 땀을 흘리듯 흘리는 말이고... 땀냄새를 맡듯 들어야 하는 말이다. 킁킁. 말의 냄새를 잘 맡아야 내가 살 수 있다.
지난 선거 얘기였다. 세타가 처음 처한 위기감에 대한 얘기였다. 양떼에 대한 얘기도 했다. 우리도 신도들을 양떼라고 부르므로... 같은 맥락으로 그의 말을 이해했다. 무수한 사례처럼 길 잃은 양을 인도하는 얘기는 아니었다. 늑대를 찾자는 얘기도 아니었다. 목장의 평화를 위해 양떼를 잠시 다른 곳으로 몰아야 한다는 얘기였다. 양들의 시선을 돌리고 크게 산을 한바퀴 돌아와... 목장의 일을 까맣게 잊어먹게끔 만드는 기술에 관한 얘기였다. 우리가 다 살 수 있는 길을 찾는 얘기였다. 그리고 그 속에 내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의 조르기를 버티다 버티다 결국 나는 탭을 친다. 나는 뒹굴고... 드러누워 일어서지 못한다.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그가 흘린 말 속의 코드를 나는 몇번이고 곱씹는다. 살고 싶냐고 그가 묻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해했냐는 말엔 대답을 못했지만 살길을 찾고 싶다고 나는 말한다.
그의 팔이 허리를 파고든다. 나는 뒤집히고 다시 발버둥친다. 목을 잡힌다. 대신 그의 그립이 느슨하게 느껴진다. 이번엔 내가 아는 것을, 나의 생각을 말해보라 요구한다. 나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어깨와 목을 삼각으로 조이며 그는 내가 아는 것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낸다. 유능한 선생님처럼 힌트를 주고 공식에 대입할 숫자가 무엇인지를, 내가 스스로 찾게끔 안내한다. 모든 기초와 정답은 20세기의 문제집에 다 나와 있다고 그는 나를 독려한다. 그는 마치 수많은 양떼를 돌보는 자상한 목자 같다. 나의 전공이 왜 필요했는지를 그가 이끄는 길 속에서 나는 알게 된다. 하나둘 생각이란 게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동유럽에서 행해진 감청을 얘기한다. 니까라과에서 행해진 학살과 동아시아에서 이뤄진 고문과 재판결과를 열거한다. 꼴롬비아와 과떼말라... 요인암살과 언론조작을 얘기하고 꾸바인의 소행으로 위장된 도심 테러와 여객기에 대학생들을 가득 태울 뻔한 사례17)를 얘기한다. 나는 그냥, 내가 아는 것들을 말할 뿐이고 그는 내가 말한 것들을 들어주는 사람이다. 그의 배와 맞닿은 나의 등엔 땀이 흥건하다. 지금의 이 세계가 신과 인간의 합작품이듯... 이것이 누구의 땀인지는 이제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가 나를 풀어준다.
나는 바닥에 엎드린 채
꼼짝도 못하고 헐떡인다.
아주 잠깐
안식이 찾아온다.
죽겠네, 죽겠어.
그도 숨을 헐떡인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라며
그가 말했다.
배를 하나 자빠뜨릴 생각이야.
⌛⍾⎊⍦
해머 경과의 오해는 쉽게 풀렸다. 그가 오래전 레슬링을 겨뤘던 상대는 내가 아니라 전대의 빌이었다. 얼굴까지 똑같으니 분간이 가겠어? 30년 전의 일이라고 했다. 빌라도는 빌라도로 대체되고 예수는 예수로 대체되는 것이 홀리랜드의 생태계다. 해머 경의 나이는 300살이라고 했다. 현재의 여왕님은 500세를 넘기셨는데 그것이 올림퍼스의 생태계다. 신이 만드신 인간의 생태계는 이제 신지구에만 남아 있다. 제가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아십니까? 껄껄껄. 흠뻑 서로의 땀냄새를 맡아버린 남자들 사이에서 계급과 신분의 벽이 잠시나마 무너진다. 오늘 제대로 힘 쓴 거 아니지? 그가 묻는다. 아이구, 웬걸요.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우리는 낄낄댄다. 해머 경의 설명은 간단했다. 지금의 상황이 간단치 않다는 것, 국가의 안녕을 위해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것, 기존의 안일한 애국방식으로는 자칫 우리 모두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 알파가 점점 집단지능에 오염되고... 여섯개의 기관으로 돌려막기 해온 시스템이 붕괴될지 모른다는 것... 늘 해오던 그냥 애국으로는 안 된다 이 말일세... 무슨 말인지 알겠나?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창조애국’이라고 그는 역설한다.
크리에이티브라면 내가 언제나 겪고, 부딪히고, 고민해온 일상과도 같은 과제가 아닌가!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진짜 거인이 누군지를... 제대로 사람을 알아봐준 그의 혜안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이것은 복합적이고 융합적인 애국이기 때문에 유능한 연출자가 반드시 필요하다고도 하셨다. 시나리오와 연극을 이해하는... 더불어 이를 완벽하게 관장하고 연출할 능력을 갖춘... 단 한점의 오점도 남기지 않을 뼛속까지 애국자인 애국자... 당신은 이미 그가 누군지를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건 나’라고 목놓아 외치고 싶다. 해머 경의 시나리오는 간단했다.
부활절이 낀 다음 프로그램 개시일에 작전을 실시한다.
전날까지 모든 법적·행정적 대비를 완료한다.
기존 프로그램과는 다르게 당일날 아침엔 예수가 직접 그들을 마중하러 언덕에 나와 있다(대기).
출항한 배가 성지에 다다르기 전 사고가 일어난다.
예외적으로, 또 최초로, 홀리랜드 상공에서의 생중계를 허락한다.
기울어진 배의 급박한 상황을 우선 송출한다.
사고를 지켜보며 당황해하는 예수를 포착하기 시작한다.
예수의 얼굴을 의도적으로 클로즈업한다.
신지구의 국민들은 발을 구르며 예수를 향해 구원을 외칠 것이다(예상).
매우 급박한 순간처럼 느껴지나 데이터 분석 결과 배는 오랜 시간 자세를 유지한 채 수면에 그대로 떠 있을 거라 추측된다.
중계의 포커스를 예수에게 맞춘다.
예수의 무능함을 한껏 부각시킨다.
그리고 정부의 구조가 시작된다.
전원 구조.
내게 부여된 임무는 현장에서의 상황통제다. 극을 관장하고 진행을 가로막는 돌발상황을 미연에 방지하는 중책이다. 예컨대 위치상 가장 근접한 R287 위성의 구조단을 비롯해... U911, EPO42 탐사구조반... 등등 예상되는 구조세력의 현장진입을 일정 시간 차단하는 것이다. 해머 경께서 요구하시는 모든 사안을 나는 이미 창조적으로, 또 융합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우리 모두가 살길이네, 나라를 위한 일이지. 해머 경께서 고개를 끄덕이신다. 작전 인가는 났습니까? 내가 묻자 아니, 고개를 가로젓는다. 이건 폐하도 모르게 진행하는 거야. 그래서 코드 입실론 라인이 맡은 거지. 모든 상황은 투트랙으로 진행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해. 라인의 지시 보고와 일반 행정체계의 지시 보고가 동시에 진행되는 거니까 말이야.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그리고 왼손은 전혀 드러나지 않게... 핵심은 파악했지? 그리고 또... 내가 지원할 건 없고?
격리해야 할 년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해도 충분한데
예수와 관련된 일이라 그렇습니다.
격리만 해주시면
나머지는 제가.
우리는 다시
국기에 대한 경례를 올린다.
가슴의 손을 언제 내릴지 현재로선 미지수다.
나는 초장부터 분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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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남거나
인간이 남거나
당신의 마음은 어느 쪽인가? 나는 사실 가늠이 서지 않는다. 어쩌면 내게 입력된 전공이 20세기 정보기관학과 반공기독교학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당신이 20세기의 인간이고... 저런 주제를 논할 수 있는 전공자였으면 좋겠다. 나는 ‘인간이 신을 죽였다’는 말을 안다. 그리고 언젠가 ‘신께서 인간을 심판하러 오실 거’란 사실을 믿는다. 그렇다면 이 합작의 세계는 과연 누구의 전리품이란 말인가. 분명한 것은 한가지다. 신도 인간도 스스로를 파괴하는 자들이란 사실이다. 스스로를 파괴한 그 순간, 어쩌면 그것이 안식일지도 모른다.
다음날 야리는 격리감호소에 수용되었다. 총독인 나와는 전혀 무관한 조처였다. 야리는 들어본 적도, 가본 적도 없는 T317 위성의 화원공급단지에서 희귀 선인장 모종을 훔친 용의자로 체포되었다. 홀리랜드가 탄생한 이래 최초의 형사사건 용의자 수용이었다. 격리감호소는 가벼운 규율을 어긴 홀리인들이 하루 정도 들어가 금식과 기도를 마치고 나오는 장소다. 더 웃기는 얘기를 하자면 정식 영장을 들고 와 그녀를 체포한 T317 위성 경찰이 야리를 이곳에 넣고 돌아갔다는 사실이다. 공식적인 이유는 경찰선에 앉을 자리가 없다—였다. 그들이 진짜 T317에서 왔다면 다시 야리를 잡아가는 데 4년이란 물리적 시간이 필요하겠지. 나는 해머 경이 지략과 유머를 동시에 겸한 애국자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T317 위성 경찰의 정체는 배 작업을 위해 파견된 해머 경의 수하들이었다. 그들은 현재 8구역에 머무르고 있는데 조만간 선원으로 등록될 예정이다.
매일 예수를 데리고 나는 야리를 면회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심심한 위로와 희망을 전달한다. 홀리인의 신원은 기본적으로 기밀에 속해 있다, 어느 행성이나 위성의 행정기관도 이를 어길 만한 권한이 없다, 이건 분명 오류다, 뭔가 잘못된 거란 판단이 섰으니 그들도 어정쩡하게 너를 여기다 놓고 간 거다, 여러 곳에 협조공문을 전송해둔 상태다, 올림퍼스의 높은 분들께도 부탁을 드렸으니 너무 걱정 말기 바란다, 곧 나올 거다, 결백이 입증되는 날 나는 너를 어부바하고 홀리랜드를 한바퀴 돌 생각이다, 그날은 다같이 파티를 열어야지.
큭큭, 파티란다. 나란 남자 못된 남자
가장 기뻐할 일은 예수가 다시 내 품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다. 특히 의존도에 있어 그렇다는 얘기다. 이 아이가 사실... 그렇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고... 그냥 착하다... 어릴 때도 늘 맞고 다녔다... 붓다도 공자도 나한테 참 많이 혼났지. 내가 달려가 어린놈들 인간 되라고... 그래, 그러고 보니 이놈들 다~ 내가 인간 만들어줬지... 모든 일이 순조롭지만 하나 걱정이 있긴 하다. 작전이 끝나고 홀리랜드가 받게 될 타격이다. 가장 이미지가 실추되는 건 물론 예수다. 분명 누군가가 예수를 죽여 정권을 구하고 예수를 죽여 세타를 살릴 판단을 한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이 옳은 판단인가를 자꾸 반문케 된다. 무엇보다 우린... 한몸이지 않은가.
실은 추후에 그 문제를 논한 적이 있다. 무능한 모습을 보이는 것보다는 예수가 간절히 기도를 올리는 게 낫지 않은가... 그럼 예수와 정권이 함께 사는 거다... 경제적 이익을 고려할 때 그쪽이 바람직하지 않겠냐는 의견을 해머 경께 올린 것이다.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안 돼. 판단의 이유는 양떼들이었다. 만약 그랬을 경우 양떼들은 예수의 기도가 사람들을 구했다고 믿는다는 거였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유를 덧붙였다. 무능의 반대가 뭐지? 유능이요. 바로 그래서지, 무능한 예수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는 실은 폐하 때문이라네. 그런 이유로 나의 의견은 묵살되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말이지?
예수와 홀리랜드에 관해서는 추후 다른 해법을 찾기로 했다. 해머 경께서 약속하셨다. 부활절을 낀 특별한 주간이니 우리도 뭔가 다른 해법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카를을 불러 얘기했다. 카를은 여러가지 바람직한 의견을 제시했는데 전부 묵살되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미 결론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었다. 일단은... 성서에도 없는 내용이고... 지금까지 견지해온 극사실주의 연출의 전통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그러니까 미학적으로도 말입니다, 카를이 반문했다. 그래서 좆같다는 얘기야? 그, 그건 아닙니다. 그래서 배가 도착하는 날 아침, 우리는 모두 골고다 절벽에 나란히 서서 배가 보이면 힘차게 손을 흔들기로 결정이 났다. 연습도 했다.
빡세게!
지금 우리는 골고다 절벽에 서 있다. 예수를 선두에 세우고 다섯발짝 뒤로 나와 로마 병사들, 카를과 베네치아를 비롯한 중견배우들... 그뒤로 열발짝 뒤에 유대인 군중들을 일렬로 배치했다. 그림이 꽤, 좋을 것이다. 여기서 바라보는 경치도 너무나 눈부시다. 화창한 하늘과 탁 트인 바다... 인간이 만든 별이라고는 하나 신께서 만든 것과 다를 바 없는 완벽한 풍경이다. 평소와 다른 투구를 나는 쓰고 있다. 부활절을 위해 해머 경께서 제작해 보내주신 특별한 소품이다. 왼쪽 귀를 덮는 투구 안쪽엔 해머 경과의 통신 라인이... 오른쪽엔 8구역 자치경비대를 관장할 또다른 라인이 설치되어 있다. 그렇다, 투트랙이다. 마이크의 사용법이 그야말로 독특한데 뇌의 움직임을 감지해 왼쪽을 의식하면 해머 경에게 목소리가 전달되고, 오른쪽을 의식하면 자치경비대에 전달되는 구조이다. 그러니까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는... 성경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시간이지. 생각보다는 며칠 훈련이 필요했다. 아무도 몰래, 빡세게!
드디어 수평선에 배가 보이기 시작했다. 요나다. 원래 정해진 순번이라면 노아가 운항되어야 하는데 해머 경의 압력으로 배를 급히 바꿔야 했다. 똑같은 배이긴 해도 뭔가 분명 이유가 있을 거다. 요나는 희게 빛나는 작은 점이었다가 조금씩 조금씩 우리가 아는 배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요나가 조금씩 커질 때마다 고삐를 쥔 두 손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렇다. 만전을 기해야 하는 것이다. 설사 오른손에 눈이 없다 하더라도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눈이 없고 입이 없어도 몸은 스스로의 움직임을 느끼고 저장한다. 이보게 빌, 하고 나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자네를 믿네! 나는 나에게 아무 답도 하지 않는다.
다들 술렁이기 시작한 것은 배의 움직임이 이상해졌기 때문이다. 요나는 괴로워하며 헤엄을 치는 물고기처럼... 그렇게 다가오고 있었다. 운명으로부터 도망치고자 하는 물고기... 자신을 사로잡는 악의와 불길함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거대한 물고기였다. 왜 저러지? 나는 카를을 보고 먼저 말문을 연다. 카를은 휘둥그레진 눈을 몇번 깜박이더니 대답도 못하고 기도를 올리기 시작한다. 이런... 심장 약한 노인네 같으니라구. 왜 저러는 걸까? 이코에게도 질문을 던지고는 나는 단원들을 향해 진정하라고 소리친다. 진정을 시켜도 진정되지 않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급기야 요나는... 저렇게 큰 배가 어떻게 저렇게 꺾일 수 있을까 보고도 믿기 힘든 커브를 그린 후 기우뚱 기운 채로 물살에 떠밀리기 시작한다.
놀라운
해머 경의 작품이다.
저런 커브가 가능하기나 한지
나도 사실 의문이다.
나는 말에서 내려 예수를 향해 뛰어간다. 예수는 20세기 옥수수밭의 허수아비 같은 표정으로 온몸이 굳어 있다. 이 아이가... 이렇다, 그냥 약해빠져가지고... 뜬금없이 야리란 년을 조지지 말고... 그냥 둘이 지내게 해줄까 관용의 마음도 인다. 그럼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는 않겠지... 잘하면 시아버지 대접이라도 받을지 누가 알아, 하지만 시아버지란 것의 느낌을 도통 알 수 없어... 솔직하게 나한테도 함 달라고나 해볼까... 하여간에 얘야, 정신 차려라! 예수의 등을 두들겨준다. 별일 없을 거다. 아무도 죽지 않아! 곧 구조하러 오기로 약속이 되어 있어! 우선 예수를 진정시킨다. 예수의 손을 주물러주고 어루만져준다.
이 아버지를 믿어라.
아무도 죽지 않아!
나는 다시 한번 강조한다. 이제 교신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굿모닝~ 하는 해머 경의 목소리를 나는 듣는다. 예수가 나를 의지하듯 내가 전적으로 의지해야 할 목소리다. 그 목소리는 짧고 냉정하고 분명하다. 스탠바이~ 빌! 왼쪽 귀에 이어 오른쪽 귀도 웅성대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사고 접수, 출동 운운하는 다급한 목소리고 내가 전적으로 장악해야 할 목소리들이다. 총독이다! 어떻게 된 거야? 짧고 냉정하고 분명하게 나는 묻는다. 일단 파악 중입니다. 그런데 사고 신고 발신 위치와 모니터상의 항적 위치가 다릅니다. 이상합니다. 배가 멈춰 기울었다는데 항적상으로는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습니다.
당연하지, 투트랙인데...라고는 못하고 빨리 파악하란 말로 나는 답변을 대신한다. 이후의 어수선함은 이루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다. 기본적으로 홀리인들은 재난이란 걸 겪어본 적이 없다. 접근이 금지된 결계 속에서... 신이 살고 있는 이 평화로운 별에서... 지금 오천명이 타고 있는 거대한 배가 서서히 침몰 중이다. 이곳이 생긴 이후 최초로 생방송을 위한 허그18)가 날아와 돌아다니고... 예정대로 눈물 콧물을 흘리며 벌벌 떠는 예수를 찍느라 혈안이고... 과장이 없고 미묘하게 사실적인 구조행위는, 그럼에도 이뤄져야 하는 것이고... 시간을 끌기 위해... 언제 옵니까? 곧 도착할 거야... 돌발 변수를 막기 위해 나는 R287 위성구조단과 U911, EPO42 탐사구조반의 진입을 통제하고...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우라크시아 우주 항모의 돕겠다는 제안을 거부하고... 단원들은 이제 통곡을 멈추지 않고... 지금 오십시오, 클라이맥스! 요청을 계속하는데...
아무도
어떤 누구도
뭐가
바다의 입술이
죽은 물고기를 빨아들이듯
무엇이
누가 저기
물속으로 사라지는 배를 나는 보아야 했다. 안식일을 맞이한 듯한 잔잔한 바다였는데 그 바다엔 신도, 인간도...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았다. 주여, 하고 나는 사라진 신의 이름을 불렀다. 이제 남은 일은 사라진 인간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평생에 걸쳐 부르는 일이리라... 뭐야? 왼쪽 귀에서 신의 이름도 인간의 이름도 아닌, 알 수 없는 이름이 거론되었다. 뭐야가 뭐야? 나도 모르게 나는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너무 빨리 배가 넘어갔다고 해머가 말했다. 또 무어라 뭐라 했는데 단원들의 울부짖는 소리에 묻혀 들리지가 않았다. 나는 무리에서 벗어나 이 인간의 얘기를 좀 들어야 한다. 그리고 듣는다. 이렇게 된 이상 덮는 쪽으로 간다고 그가 말한다. 현장 통제부터 들어가! 아무도 접근 못하게. 그리고 정신 차려! 우리 다 죽는다. 짧고 냉정하고 분명한 그의 말에 나는 자꾸 발목이 잡힌다. 모르겠어? 이거 이제 니 책임이 된 거라구! 그가 앵클락을 건 발목에 심한 통증이 느껴진다. 어쩌면 애초부터 나는 앵클락이 걸린 채 여기 서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요나를 빨아들인 바다처럼 짧고 냉정하고 분명한 그의 말이 자꾸만 나를 빨아들인다. 그러나 나는 여기 남아 있다. 신도 인간도 남아 있지 않은데 나만 남아 있다.
덮을 수 있습니까? 나는 묻는다.
걱정 마, 덮을 수 있어.
어떻게요, 무슨 수로 덮습니까?
우리가 통제하고 우리가 구조하고 우리가 수사하고 우리가 발표하고 우리가 재판하고 우리가 인양하고 우리가 조사하고 우리가 판정하고 우리가 추모하고 우리가 추적하고 우리가 잡으면 돼.
저는요.
나도 너도 없어. 다 같이 죽든가, 다 같이 살든가 둘 중 하나야. 정신 똑바로 차려. 덮지 못하면 우리 다 죽어.
벌써 다 죽었잖아?
산 사람이 살아야지, 안 그래?
.................................
그리고 잘 봐, 오른손은 아직 왼손을 몰라. 그리고 왼손도 실은 자기가 뭘 했는지 몰라. 손가락 하나하나가 다 다른 명령을 받았다고 생각해봐. 그럼 왼손은 자기가 뭘 했다고는 말할 수 없게 되는 거라구. 그냥 지시대로 한 거잖아. 그런데 또 자기 책임이니까 다들 자기 앞마당은 자기가 쓸고 덮을 거란 얘기지. 오케이?
나도 모르게
나는 짧고 냉정하고 분명해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그러하다.
나는 일단 현장을 통제한다. 해머가 말한 ‘우리’가 올 때까지. 우리 외엔 그 누구도 우리를 대신해선 안 되니까. 짧고 냉정하고 분명하게 이런저런 조처를 취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나는 아차, 예수를 확인한다. 예수는 여전히 절벽 끝에서 바다를 보고 있다. 시간이 너무 지나 실은 누구도 살아 있을 가능성이 없는 바다를... 신도, 인간도 사라진 먼 바다를 멍하니 보고 있다. 초점 없는 눈으로... 십자가에 매달린 듯 두 팔을 옆으로 벌린 채... 나는 이코에게 예수를 부탁한다. 그리고 카를과 중견들을 불러 모아 철수를 명령한다. 너트를 풀고 기름을 칠하듯 사이즈가 각기 다른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해야 한다. 그때였다.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소리가
우주와 우주가 마찰하는 듯한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돌아보기가 두려울 정도로 거대한 소리였다.
신이 깨어나는 소리 같기도 하고
세상의 안식이 종결되는
소리 같기도 했다.
가까스로 뒤를 돌아본 순간
나는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어떤 광경을 절벽 너머로 볼 수 있었다.
그 소리는
바다가 갈라지는 소리였다.
홀리랜드가 정말 홀리랜드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건 또 뭐냐는 해머의 외침이 들려왔다. 골고다를 내려서던 단원들은 두려움에 몸을 숙였고... 완전히 바다가 갈라지고 나서야 앞다투어 다시 언덕으로 올라왔다. 예수의 눈과 입에선 환한 빛이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예수는 하나의 십자가처럼 절벽에 서 있었다. 해머가 계속 외쳐댔다. 이게 뭐냐고! 얼른 중지하라고 해머는 외쳐댄다. 오오, 하고 카를이 탄성을 내지른다. 자신도 모르게 단원들이 하나둘 성가를 부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는
바닥에 길게 누워 있는 요나를 보게 된다. 온몸으로 콸콸, 자신을 가뒀던 물을 쏟아내는... 물고기의 시체를 보게 된다. 작살을 맞은 듯 요나의 옆구리에 나 있는 구멍과... 돌아다니는 허그를 보게 된다. 어떻게 된 거냐고 해머는 울부짖는다. 거참 시끄럽네... 나는 해머에게 그러게 왜, 생방송을 하고 지랄을 떨어! 역정을 낸다. 나는 이제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내가 복제된 인간임을, 예수가 복제된 인간임을 나는 떠올린다. 존재의 경계를 넘지 않는 것—그것이 좋은 연기의 기본이란 걸 누누이 예수에게 강조하던 나 자신을 떠올린다. 덮어야 한다고 나는 예수를 향해 소리치지만 예수의 귀엔 이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하다. 다들 미치기로 작정을 했나본데 나는 살기로 작정을 하고 본다. 나는 비틀비틀 창을 들고 걸어간다. 한발짝, 한발짝... 그리고 예수에게 부탁한다. 내가 정말 미안한데, 제발 나를 살려달라고... 미친 새끼야, 너 왜 그러냐고... 그리고 제발 그만하라고... 나는 애원한다. 신께선 어디서 안식을 취하실까. 그리고 신은...
나는 창을 들어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다.
후드득
그래, 예수의 진짜 피가
나를 흠뻑 적신다.
신이 남거나
내가 남거나
⌛⍾⎊⍦
푹 잤다. 뭐 자다 죽어도 문제 될 게 없겠지만 나는 어김없이 눈을 뜬다. 안 봐도 6시다. 잠시 꼬긁꼬긁을 하다가... 부스스 일어나 식량, 그래 음식이 아니라 식량이라는 걸 나는 먹는다. 우루루루 퉤~ 입을 헹군다. 식량이란 걸 먹어도 찌꺼기가 나온다는 사실이 지금도 가끔 신기할 때가 있지만... 방구 뿡~ 쫌 있음 똥도 나온다. 와인을 곁들인 연어 스테이크가 먹고 싶다. 어제는 해치를 열고 밖으로 나가... 인간이 견딜 수 없는 폭풍우 속을 몇번이나 나뒹굴며... 10미터 20미터씩 나가떨어지면서도 기어 기어... 또 겨우 일어나 엉거주춤 바람을 뚫고... 세번이나 벼락을 맞아 잠시 선 채로 정신을 잃었다 깼다 하면서... 중앙돔 끄트머리의 식당까지 끝내 기어가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 꿈을 꾸었다. 식량이 아닌, 그러니까 음식이란 걸 먹는... 꿈 말이다.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여기가 어디냐고? 나도 모른다. 그냥 이 몸께서 일어났으니 6시겠지 하는 거다. 우주라는 곳을 지나다보면 우리가 3시니 10시니 하는 시간이... 거리란 걸 알게 된다. 그러니까 그냥... 그렇더라는 얘기다. 나는 성경을 편다. 걱정 마라, 찬송 부르자고 안 할 테니. 그리고 읽는다. 시력이 많이 나빠져 요샌 돋보기란 걸 쓴다. 21세기에 만들어진 이딸리아산 나니니다. 이런 고물 잡동사니들을 왜 버리지 못했는지... 지금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아밋대의 아들 요나는 이스라엘 사람인데, 바다와 육지를 창조하신 하늘에 계신 주 여호와를 경배하는 사람이었다. 어느날 주의 말씀이 그에게 내렸는데 니느웨 백성들이 행하는 못된 짓들이 주를 괴롭게 하니 니느웨 거리로 가 복음을 외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요나는 이를 어기고 달아났다. 욥바에 다다른 요나는 니느웨와 정반대편에 있는 다시스로 향하는 배에 몸을 숨겼다. 그런데 태풍이 왔다. 배는 당장이라도 가라앉을 듯했다. 선원들은 겁에 질려 자기네들이 믿고 따르는 신의 이름을 부르고 실은 짐들을 바닷물 속으로 집어던졌다. 이러한 소란 중에도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 몸을 뻗고 단잠에 빠져 있었다. 이 판국에 무슨 잠이오? 선장이 내려와 잠을 깨웠다. 선원들은 제비를 뽑아 재난의 원인이 누구에게 있나 알아보자고 했다. 모두들 제비를 뽑았고 그것이 요나에게 떨어졌다. 어째서 이런 재난이 일어났는지 내력을 말해보라는 선원들에게 요나는 자신의 죄를 털어놓았다. 어쩌자고 그런 일을 저질렀소? 선원들은 요나를 볶아댔다. 나를 바다에 던져주시오. 요나는 또렷한 말투로 답했다. 태풍은 나 때문에 일어난 것이니 반드시 바다는 잠잠해질 것이오,라고도 했다. 차마 생사람을 죽일 수 없어 선원들은 필사적으로 배를 저어보았다. 그러나 도저히 육지에 닿을 수 없었다. 기진맥진한 사람들은 마침내 하나님을 향해 큰 소리로 울먹이며 빌었다. 주님, 제발 살려주십시오. 이 사람의 죗값으로 우리를 죽이지 말아주십시오. 선원들은 하는 수 없이 요나를 소용돌이치는 바닷속으로 던졌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바다는 잔잔해졌다. 모두가 주의 능력을 깨닫고 두려워한 나머지 제물을 바치고 다시는 나쁜 짓을 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다.
주께서 큰 물고기를 보내 바다에 빠진 요나를 삼키게 했다. 캄캄한 물고기의 배 속에서 요나는 사흘 낮과 사흘 밤 주님께 바치는 기도를 올렸다. 마침내 주께서 요나를 육지로 토해내라고 물고기에게 명령하셨다. 그때 주의 음성이 또다시 요나에게 들려왔다. 저 큰 도시 니느웨로 가서 내가 일러주는 말을 전하여라. 주의 분부대로 요나는 즉시 니느웨로 가 하루 종일 거리를 돌아다니며 이제 40일 후에 니느웨는 멸망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또 전했다. 니느웨 사람들은 신분이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모두 주를 믿게 되었고, 금식과 더불어 성근 베를 몸에 걸치고 잘못을 뉘우쳤다. 이 소문을 들은 니느웨 왕도 왕좌에서 내려와 웃옷을 벗고 재 속에 앉아 뉘우쳤다. 니느웨 사람들이 행하는 일을 보시고 주께서는 재난을 거두셨다.
거리를 채우기 위해... 그러니까, 시간을 보내려 나는 책을 읽는다. 적어도 욥바로, 또 다시스로 도망친 요나가 물고기에 삼켜져 니느웨에 이른 거리보다는 먼 거리를 지났을 것이다. 돋보기를 벗고 나는 다시 잠을 청한다. 뭐? 이 판국에 무슨 잠이냐고? 상관하지 마라, 그러니까 그래... 애비에미 모르고 자라 그렇다고 생각해라. 모로 누워 나는 몸을 뒤척인다. 나한테 원하는 게 뭔데... 뭘 원하는데? 다시 폭풍우를 헤치고 식당에 가 제대로 익힌 연어 스테이크를 먹는 꿈을 꾸고 싶다. 바람에 날아가고 벼락을 한 열번은 맞고... 말이다. 그나마 심심하지 않게... 꿈에서... 그런데 당신 자는 거야? 내 말... 듣고는 있는 거냐구...
예수의 시신을 안고 나는 격리감호소까지 걸어갔다. 흠뻑 뒤집어쓴 피를 닦지도 않았다. 나는 야리에게 예수의 시신을 건넸고... 오열하는 야리에게 지금은 아무것도 묻지 말고 누구의 말도 믿지 말고 내 말을 들어달라 부탁했다. 타오르는 눈으로 야리가 나를 쏘아보았다. 커다랗고 두려운 그 눈을... 나는 피하지 않았다. 지금 빨리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나는 말했다. 단원들과 함께 8구역으로 건너가 셔틀을 타라고 했다. 모두에게 내린 명령이고 곧 배가 올 거라고도 했다.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는 예수의 입을 통해서만 들으라고 일렀다. 미간을 일그러뜨리는 그녀에게... 이 아이는 사흘 뒤에 살아날 거라 했다. 내 말을 믿어라. 이 아이는 진짜 예수다.
셔틀에 올라서는 누구와도 말을 섞지 말거라. 그리고 어디로 간다, 이주할 거라는 달콤한 말도 믿지 말거라. 최대한 빨리 기회를 봐서 이 아이의 시신을 안고 탈출구명선에 숨어라. 도망쳐라. 어디로든 도망쳐라. 그것이 내가 해줄 유일한 말이다. 내가 모아둔 금화를 가져가라. 총독이 가진 전재산이지. 그리고 예수가 부활하거든 나는 너를 버리지 않았다고... 단지 그 말을 꼭 전해주기 바란다. 그리고 선착장까지 야리와 예수를 배웅해주었다.
단원들과도 작별을 하고 나는 홀리랜드의 진짜 지하로 내려갔다. 누구의 명령도 아니었다. 살기 위해서였다. 예수의 피를 뒤집어쓴 그 순간 이상하게 모든 걸 알 수 있었다. 이제 나를 십자가에 세울 것임을... 또 그럴 수밖에 없는 해머의 입장도 알 수 있었다. 지하에 숨어 셔틀이 이곳을 떠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변환을 시작했다. 기후시스템이 다운되자 지상은 인간이 발 디딜 수 없는 검은 지옥으로 변해갔다. 만약 누군가 나를 잡으러 다니고 있었다면 벼락을 열번은 맞고 바람에 날아갔을 테지. 홀리랜드는 에이트볼이 되었다. 단절된 해머에게 다시 연락을 취한 건 도리어 나였다.
거, 몸집은 곰인 사람이 왜 이리 빨라? 해머가 말했다. 그의 초조함이 짧지도 냉정하지도 분명하지도 않은 목소리에서 느껴졌다. 나는 신지구의 상황을 물었다. 뻔히 알면서 왜 묻냐는 투로 그가 말했다. 우리 전부 죽게 생겼다고... 그들은 죽지 않는다는 걸 잘 알면서 나는 모르는 척 해머에게 협상을 제안했다. 짧고 냉정하고 분명하게 말했다. 큰 건은 더 큰 건으로 덮으면 되지 않냐고. 내가 바라는 건 단 하나 나를 애국자로 기록해달라는 거라고. 해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일단 보고를 드리겠다며 라인을 나갔다. 이틀 후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연락이 왔을 때 나는 이미 운항을 시작한 상태였다.
여행길에서 나는 몰랐던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구지구가 이슬람이 아니란 사실을
크리스천 연합이
크리스천이 아니란 사실을
그리고 나는 누구였을까?
여태 가져보지 못한 의문을 풀기 위해
이곳의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다.
MO10012 샘플.
나는 모제스가 복원한, 그러나
예수의 역할로 발탁되지 못한
예수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발탁되지 않은 이유를 말해줘? 나는 또... 자는 줄 알았잖아. 모두가 알고 있는 예수의 얼굴보다 글쎄 복제를 하고 봤더니 너무 훨씬 더더더 잘생겨 예수 같지가 않았다는 거야. 유언으로 하는 말이니 잘 받아 적어주기 바래. 그러니까... 운항을 시작한 지 일년이 지났다. 나는 지금 신지구의 궤도권에 거의 다다른 상태다. 예정대로라면 이를 가로질러 구지구를 향해 직진하는 것이지만 어제 해머의 연락을 받았다. 개꿈을 꾼 이유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해머가 말했다.
상황이 좋아졌다고.
그사이 대부분은 그 일을 잊었다고
벌써 지긋지긋하다는 여론이
압도적이라고.
폐쇄된 홀리랜드가 다시 열리기를
훨씬 더 소망한다고.
그래서, 작전을 취소하자는 얘기였다. 양떼란 역시 몰고 다니면 되는 거군요, 큭큭. 애국자 모드로 나는 말했다. 개들을 좀 풀었지. 냉정을 되찾은 해머가 말했다. 우리는 한참이나 홀리랜드의 업그레이드 버전에 대한 아이디어를 나누었고, 언젠가 거기서 제대로 레슬링을 겨뤄보기로 약속했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못해 그동안 답답했습니다. 여기 통제실엔 국기가 없다니까요. 나의 너스레에 말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며 해머가 받아쳤다.
해머는 모른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나는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야리와 예수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어디로 갈 생각이니? 내가 묻자
지구,라고 야리는 답했다.
야리가 말한 것이 신지구인지
혹은 구지구인지
나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못된 놈 있으면 받아버려.
나는 야리를 생각하며 중얼거린다.
너 잘 치잖아.
수동모드로 전환한 조종간을
나는 잡는다.
이거야 원, 좆 잡고
반성하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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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문학에서 쓰이는 거리 단위. 1AU는 태양과 지구 사이의 평균 거리를 의미한다.
2) 24세기를 대표하는 연극연출자. 『네안데르탈인의 연기론』을 비롯한 수많은 명저를 연극사에 남겼다.
3) 20세기 연극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러시아의 연출가이자 배우. 사실주의 연기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
4)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인물. 극한에 다다르는 고난과 시험을 모두 이겨내고 여호와의 축복을 받는다.
5) 26세기를 상징하는 스페이스 오페라의 창시자. 구(舊)지구와 신(新)지구 진영 모두에서 환영받는 연출가였으며 양쪽을 잇는 다수의 교두보적 작품을 완성한 인물이다.
6) 제이콥 모레노. 싸이코드라마, 자발적 참여극 등 심리극의 아버지로 알려진 20세기의 연출가.
7) 급작스레 빌이 연출한 이 대목은 사실 예수가 처형되기 전 총독 빌라도가 주관하는 재판정에서 일어난 일화를 다룬 장면이다. 원래 이 재판장 씬은 따로 극화되어 홀리랜드의 정식 프로그램에 속해 있었으나 대중에게 경각심과 자각을 일깨울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2년 전에 폐지되었다.
8) 정확하게는 ‘눈부신 활약상’을 뜻하는 令人瞩目的大活动(lìngrén zhǔmù de dà huódòng)이 쓰여야 하겠으나 화자의 요청에 의해 좀더 겸손한 의미의 ‘活躍相’으로 표기했음을 밝힌다.
9) 예수의 열두 사도 중 한 사람.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해 자신의 손가락으로 직접 예수의 손에 난 구멍과 상처를 찔러봐야겠다고 나섰기 때문에 ‘의심 많은 도마’로 불리게 되었다.
10)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11) 1991년 지노 다비도프에 이어 꾸바산 시가계의 큰손이 된 바헤 제라르(Vahé Gérard)가 남긴 ‘까사도레스’에 대한 강렬한 감상평. 까사도레스는 사냥꾼이라는 뜻이다.
12) 교육기관과 학습을 통해 전공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은 오래전에 사라졌다. 뇌의 신경망에 필요한 전문지식을 메모리 형태로 주입, 이식하는 것이 보편적인 학습과정이다.
13) 정확한 명칭은 테라포밍(Terraforming)이다. 어떤 행성을 과학의 힘으로 지구와 같은 온도, 환경으로 세팅하는 작업을 뜻하는데 통상적으로 쉽게 ‘튜닝’이란 말이 쓰이고 있다.
14) 솔로몬의 일화를 떠올리다 자신도 모르게 「열왕기상」 5장의 말씀을 기도로 읊는 순간이다. 화자의 확고한 애국심과 해박한 성경지식을 알 수 있는 대목,까지를 적어달라는 화자의 요청이 있었다.
15) 포켓당구의 룰에서 맨 마지막에 넣어야 하는 검은 공. 폭탄구.
16) 베타에서 에타에 이르는 여섯개의 기관엔 각 기관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통치자가 존재한다. 실질적인 정무를 수행하는 것은 인공지능인 알파와 내각이며 현재는 엡실론을 대표하는 여왕이 상징적인 지도자를 맡고 있다.
17) 1962년 미국 군부가 기획한 노스우즈 작전보고서의 안건 중 일부. 도심 테러나 비행기 격추 등 꾸바를 침공하기 위한 배경 사건을 자작극으로 일으키려 했으나 당시 대통령이었던 케네디가 이를 수락하지 않았다.
18) 미래 방송장비의 일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