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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동아시아 사이에 낀 싱가포르*

중국의 발전과 화인의 지위

 

 

커 쓰런 柯思仁

싱가포르 난양이공대학 중문과 교수. syren.quah@gmail.com

 

 

서론

 

‘중국 굴기(崛起)’는 이미 현실이 되었다. 이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든 부정적인 것이라 대항하든 우리가 반드시 인정해야 하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중국이 강대해짐에 따라 경제, 군사, 정치 등의 영향력 역시 국제사회 혹은 역내에서 점차 커져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 중국은 문화로써 직간접적으로 각 국가, 지역, 공동체 등에 영향을 주고 있으며 사람들의 문화적 이데올로기와 문화적 주체성을 바꾸고 있다. 중국문화의 침투는 경제적 파워를 기반으로 하고 글로벌 인터넷 매체를 전파 방식으로 하여 대중문화산업을 통해 각 국가와 지역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는 그 지역 대중의 취향에 잘 들어맞을 뿐 아니라 문화적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기도 하다. 동시에 중국문화는 중국의 정치경제적 영향력 및 중국정부의 문화 글로벌화 정책 등에 힘입어 ‘하향식’ 사회 진입에 성공하고 있다. 이는 민간사회와 중국 간의 관계를 바꾸고 있다. 21세기 들어 중국은 국제사회에서 주동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했고 이는 중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국내외적 환경에도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기존의 질서와 사고방식을 흔들어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어느정도 ‘혼란’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이 극대화된 환경 속에서 비로소 ‘변화’의 기회가 찾아오는 것이다. 본 글에서는 동아시아의 작은 ‘변두리 국가’인 싱가포르의 입장에서 싱가포르가 현재까지 중국의 영향력 변화에 어떻게 대응해왔는지 그 방안과 사례를 살펴보면서 객관적인 평가와 전망을 하고자 한다.

싱가포르에 있어 중국의 발전은 비교적 복잡한 의미를 가진다. 독립국가이자 인구 75% 이상이 화인(華人)**으로 이루어진 국가로서 싱가포르는 냉전시기 중국대륙과 대만에 이어 ‘제3의 중국’으로 간주되었다. 두 웨이밍(杜維明) 역시 ‘문화중국(文化中國)’이란 개념을 통해 싱가포르가 중국대륙, 대만, 홍콩, 마카오와 함께 하나의 문명에 속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싱가포르는 아주 미묘한 위치에 놓여 있다. 화인 위주의 독립국가로서 싱가포르는 어떻게 중국과 평등한 호혜상생의 관계를 구축할 것이며, 또한 어떻게 국제사회 및 동아시아, 동남아라는 지역적 범위에서 싱가포르의 ‘국가’적 주체성을 확립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싱가포르의 화인들이 ‘중국 굴기’라는 역사적 환경 속에서 어떻게 자신들의 민족적·문화적 정체성을 받아들일 것인가? 싱가포르는 1965년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한 위태로운 작은 나라였으나, 1980년대 말레이시아를 제치고 엄청난 경제성장 잠재력을 지닌 ‘아시아의 네마리 용’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21세기에 들어서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두번째로 경제선진국 대열에 합류해 국제적 시야와 영향력이 크게 확대되었으나 ‘작은 나라’라는 냉정한 현실로 인해 싱가포르는 동남아 및 동아시아에서 유대관계를 강화하면서도 어느정도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러나 중국이 아시아를 넘어 전세계적인 대국이 되면서 싱가포르는 또다시 복잡한 상황을 맞게 되었다. 즉 ‘중국 굴기’에 대해 주동적인 액션을 취할 수 있는 여지가 많지 않더라도 어느정도 적극적인 반응을 보여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소외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경제, 정치, 국제관계적 측면의 경우 반세기 넘게 집권해온 싱가포르의 인민행동당 정부는 국가적 차원에서 이에 대응할 수 있다. 그러나 민간 주도의 문화적 상호작용 및 영향력 측면의 경우 정부 차원의 사안과는 판이한 규칙이 적용되고 있다.

 

 

두개의 문화기관: 두개의 ‘중화문화’, 두개의 ‘거점’

 

중국정부는 문화력과 경제력을 기반으로 하여 정치적 영향력의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2004년부터 시작된 ‘공자 아카데미(孔子學院)’ 사업이 바로 그 예다. 제1호 공자 아카데미는 한국 서울에 설립되었으며 현재 500곳까지 늘어났다. 싱가포르에서는 2005년 난양이공대학(南洋理工大學)에 처음 설립되었다. 공자 아카데미는 현재까지 세계 각국, 특히 유럽, 미국 등에서 여러 논란을 일으켜왔으나 싱가포르 정부와 국민들의 경우 공자 아카데미를 기쁘게 환영했을 뿐 아니라 줄곧 협조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10년 후인 2015년, 중국정부는 싱가포르에 중국문화원을 설립했다. 설립 초반 사람들은 공자 아카데미와 별반 차이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으나 갈수록 미묘한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중국문화원은 1980년대 후반 아프리카 국가에 처음 설립된 이후 21세기에 들어, 특히 최근 5년 사이 빠르게 늘어나 지금까지 총 25개 국가에 설립되었다. 아시아 지역에서 최초로 들어선 것은 한국 서울에 위치한 주한 중국문화원으로, 2004년의 일이다. 중국문화원이 공자 아카데미와 다른 점은 현지 학술기관과 협력한다는 것이다. 또한 중국정부가 현지에서 직접 운영하기 때문에 더욱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싱가포르에 중국문화원이 설립된다는 소식이 전해진 2009년, 리 센룽(李顯龍) 싱가포르 총리와 후 진타오(胡錦濤) 당시 중국 국가주석이 함께 양해각서(MOU)를 체결하여 싱가포르 정부의 동의가 있었음을 시사했기에 국민들의 지지와 환영이 뒤따랐다. 그러나 6년이 지난 201511월, 시 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싱가포르 전 총리이자 현 선임장관인 고 촉통(吳作棟)과 함께 주싱가포르 중국문화원 개원식에 참석했다. MOU 체결 및 중국문화원 개원식 모두 정부 간 최고 수준의 교류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개원식 당시 싱가포르 정부를 대표하여 참석한 인물이 실질적 직책을 맡은 인사가 아닌 명예직 인사였던 것이다.

주목할 만한 일은 중국문화원 설립에 관한 MOU가 체결된 지 2년 후인 20121월, 리 센룽 총리가 싱가포르에 화사문화센터를 설립하겠다며 목소리를 높였다는 것이다. 화사(華社)라는 단어는 식민통치시기 민족정치사상에서 유래된 것으로 화인의 언어를 기반으로 한 상인과 문화 공동체를 지칭한다. 따라서 화사라는 개념에 영어를 구사하는 화인 싱가포르인은 포함되지 않는다. 논의되던 이 기관의 명칭은 몇개월 후 ‘화족문화센터’로 바뀌었다. 이는 식민통치시기 화인사회에 내부적 균열을 초래했던 요소에서 벗어나 싱가포르의 모든 화인을 하나의 공동체로 간주해 화인사회의 통합을 이루려는 목표가 관철된 것으로 보인다. 화족문화센터는 싱가포르 화인기관 중 최고로 꼽히는 종샹(宗鄕)회관이 총괄 기획하여 이미 활동을 시작했다. 정부는 화족문화센터의 10층 호화건물을 짓기 위해 90%의 자금을 지원했고 건물은 올해 완공될 예정이다. 싱가포르 정부는 매년 200만 싱가포르달러(약 150만 달러)에 달하는 지원금을 활동경비로 제공할 것이며 향후 이 지원금은 1000만 싱가포르달러(약 750만 달러)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식민통치를 받던 시기든 독립 후 건국을 한 이후든 사실 싱가포르에는 늘 화인을 기반으로 하거나 화인을 중심으로 한 단체활동이 존재해왔다. 독립국가가 되기 이전의 ‘이민시기’를 보아도 알 수 있다. 1980년대 들어 중국의 개혁개방과 함께 ‘화인 단체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19세기 초반 중국인 이민자가 급증하던 시기 남쪽에 자리잡은 화인들은 앞다투어 종친회 혹은 향우회 같은 자신들만의 ‘자치회관’을 만들었고 20세기 초반 설립된 ‘중화총상회(中華總商會)’는 한때 수년간 싱가포르 최고의 민간 화인지도기관으로서 활약한 바 있다. 1980년대 이후 ‘자치회관’은 민간에서 화인들이 자발적으로 설립하던 방식에서 정부 주도하에 설립되는 방식으로 바뀌면서 그 수와 규모가 더욱 거대해졌으며 풍부한 물자 또한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1986년 싱가포르 정부의 주도하에 각 향우회가 연합하여 ‘싱가포르 향우회관 총연합회’가 설립되었다. 이 총연합회에는 200여개 향우회 회원이 모두 소속되어 있다. 2005년 설립된 화인문학학습위원회, 2007년 설립된 통상중국연구센터, 2009년 설립된 화인문학교육연구센터 등도 싱가포르 정부의 주도로 세워진 대표적인 기관들이다. 화족문화센터는 가장 최근에 설립된 곳으로서 규모가 가장 크고 정부의 지원을 가장 많이 받은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두 문화기관의 설립시기가 비슷한 것에서 미루어볼 때 싱가포르 정부 주도하에 설립된 화족문화센터는 중국정부가 설립한 주싱가포르 중국문화원에 대한 ‘대응조치’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싱가포르의 화족문화센터는 그 설립취지로서 “화인 공동체의 교류, 활동의 장이자 새로운 이민자들의 융화를 돕는 플랫폼이 되고자 한다”, “화인의 문화예술, 전통적 풍습, 싱가포르의 다원적 문화를 널리 알리는 것을 특색으로 하며”, “싱가포르의 다원적 문화특색을 펼치고, 새로운 이민의 풍부한 문화를 융합시켜 싱가포르의 중화문화 색채를 강화하며”, “화인공동체의 응집력을 강화하고, 영어사용 화인을 포용하고, 새로운 이민의 융합을 촉진하는 것 이외에, 반드시 다민족 문화의 융합, 다민족의 호혜상생을 같이 고려한다”는 점을 특히 강조한다. 이러한 설립취지는 화인문화가 화인공동체에서 널리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한편 싱가포르 문화의 다원성을 현실적으로 짚어줌으로써 중국정부의 중국 문화이데올로기와 분명한 선을 긋기 위함이다. 싱가포르가 놓인 미묘한 상황으로 인해 중국문화와 싱가포르 현지의 화인문화는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모호한 상태가 지속되어왔으며 특히 ‘중국 굴기’라는 배경 속에서 싱가포르 화인문화의 주체성이 중국문화에 잠식당할 수도 있는 위기에 직면하면서 싱가포르의 국가적 주체성마저 흔들리게 된 것이다. 또한 중국정부의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는 중국문화가 중국정부의 강력한 추진하에 ‘획일화’된 개념으로 재탄생되려고 하면서 비교적 소외되어왔던 싱가포르의 화인문화는 고유의 차별성과 다원성을 잃게 될 처지에 놓였다. 따라서 싱가포르 화족문화센터는 문화적 주체성을 명확히 구분하기 위한 ‘투쟁’이다. 싱가포르는 비록 ‘작은 나라’로서 수동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지만 국가의 힘으로 싱가포르라는 국가의 주체성을 확고히할 필요가 있다.

 

 

싱가포르 역사 속의 다원 중국과 다원 동아시아

 

역사적으로 싱가포르의 화인들은 대부분 중국의 남쪽지방인 푸젠성(福建省), 광둥성(廣東省)을 떠나온 이민자들로서 이들은 19세기 초반부터 2차대전 종전까지 약 150년간 중국에 대해 지리적, 문화적, 토속적 동질감을 느껴왔다. 그러나 이 기간 중국은 민족국가로 통일되지 못하고 문화적, 정치적, 사상적으로 분열과 투쟁의 시기를 겪으면서 다원화의 초보적 개념이 나타나게 되었다. 1950년대는 역사적인 전환점으로서 싱가포르인들의 정치적 동질감은 ‘중화민국’에서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특히 1950년대부터 60년대까지 반식민주의 투쟁 및 본토 이데올로기가 부흥하는 과정에서 싱가포르 민간의 화인사회는 중국공산당의 좌익사상과 좌익세력에 크게 감화되었다. 그러나 싱가포르 정부는 이러한 현상이야말로 냉전체제 속에서 위협을 자초하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독립 전후 정치세력 간 대항과 암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그후 1960년대말부터 70년대초까지 싱가포르 정부는 정계의 좌익세력을 뿌리뽑고 민간의 좌익 문화와 사상, 사회운동세력 등을 엄단하였다. 이렇게 좌익사상의 만연 현상 및 공산중국 ‘찬양’ 현상을 제압함으로써 싱가포르의 ‘좌익 붐’도 일단락되었다. 이 기간 싱가포르에서는 정치세력 간의 각축전뿐 아니라 민간의 푸젠·광둥에 대한 동질감부터 문화·사상계의 좌경화라는 이데올로기적 동질감, 싱가포르 정부와 대만 정권의 밀월관계까지 다양한 측면에서 ‘중국’이라는 개념이 결코 고정적이고 획일화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현상들이 나타났다. 즉 ‘중국’이라는 개념에 대해 싱가포르의 각 계층과 집단 들은 각기 다른 인식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중국’이라는 개념에 복잡성·다양성·모순성 등의 요소가 모두 포함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삼사십년간의 냉전시기 공산중국은 아시아와 세계 무대에서 이렇다 할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따라서 ‘중국 굴기’ 이전의 시기는 싱가포르와 여타 동아시아 국가들에는 유대를 강화할 기회의 시기이기도 했다. 1960년대말에서 70년대초 생존을 갈망하는 신생 독립국가였던 싱가포르는 산업화 발전의 시대를 구가하게 된다. 이는 일본자본 유입 등 주요 아시아 국가가 싱가포르의 경제발전을 위해 기반을 닦아준 덕분이었다. 1980년대 들어 싱가포르는 한국, 대만, 홍콩과 함께 ‘아시아의 네마리 용’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 ‘네마리의 용’은 작은 몸체에 비해 엄청난 고속성장과 잠재력을 자랑했으며, 이를 통해 하나의 공동체로 나아가고자 했다. ‘네마리 용’이 이러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요인으로 꼽히던 것이 바로 유교사상의 전통문화를 기반으로 한 권위적 통치 시스템이었다. 중국이 잠시 물러나 있던 그 시대에 싱가포르는 경제적으로 동아시아 역내에서 홍콩, 대만, 일본, 한국 등과 긴밀한 연결고리를 구축했고 문화적으로는 특히 대중문화의 상호교류가 활발하여 싱가포르의 화인집단, 나아가 다민족·다언어 사회집단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에 따라 싱가포르인들의 문화 속에서 공산중국의 이데올로기는 영향력을 점차 잃어갔고 당시 홍콩, 대만, 일본, 한국으로부터 온 ‘다원적 동아시아’가 그것을 대체하게 되었다.

‘다원 중국’이든 ‘다원 동아시아’든, 각기 다른 시대적 배경 속에서 싱가포르의 문화적 주체성은 결코 약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다원적 문화 상호작용이 점차 빈번하게 일어나면서 싱가포르는 자신만의 위치와 방식을 찾아가고 있다. 예컨대 싱가포르 화인이 스스로 문화적 신분을 구축할 때 일본과 한국의 문화요소에 이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자연히 이들은 외부 문화에 대해 스스로 경계를 유지하게 된다. 같은 중국문화권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홍콩과 대만의 문화요소 역시 중국 본토의 문화와 다른 독특함과 차이점이 분명히 있다. 따라서 이 역시 어느정도 문화적 이질감이 발생한다. 싱가포르의 화인들은 이처럼 다양한 국가와 상호교류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찾고 그들의 문화주체성을 구축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다원적 상호작용의 방식은 중국 굴기 시대에 접어들면서 싱가포르 화인사회에 새로운 도전을 가져다주었고 싱가포르는 20세기 전반기에 나타났던 문화주체성 균열이라는 위기 상황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는 처지가 되었다.

 

 

싱가포르: 두개의 화인세계, 세개의 중국 이미지

 

싱가포르 인구의 75% 이상은 화인이지만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이들을 단일집단으로 볼 수는 없다. 영국의 식민통치를 받던 시대에는 통치자의 영향을 받아 영어 기반의 교육 시스템이 도입되어 영어를 사용하는 화인 관료와 전문 엘리트 계층을 키워냈다. 그러나 민간의 화인들은 사설 중등교육기관을 통해 중국어를 기반으로 하는 교육시스템을 만들어나갔고 이 시스템 하에서 중국어를 사용하는 문화계 엘리트들이 탄생했다. 영어 교육 시스템보다 중국어 교육 시스템이 그 수와 규모 면에서 훨씬 많았다. 이 두 화인집단은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고 사회문화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싱가포르 내부에서 ‘약간의 공통점이 있는’ 두개의 화인세계를 각각 만들어냈다. 역사적으로 영어를 사용하는 화인들은 영국의 통치자와 정치체제 그리고 말레이시아에 대한 동질감을 느껴왔으며 중국어를 사용하는 화인들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정치, 문화, 전통적 정체성이 중국에 기울어져 있었다.

싱가포르가 독립한 이후 빠르게 교육개혁이 단행되면서 영어 위주의 교육과 사회적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은 독립된 싱가포르에서 사회개혁 프로젝트가 끝나는 1980년대쯤엔 사용언어가 영어로 통일되면서 중국어 교육이 사라질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1970년대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곧이어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 중국은 국제사회에서 다시금 적극적인 행위자로 부활하기 시작했다. 이는 국제사회 및 역내 정치경제적 관계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을 뿐 아니라 싱가포르에서 중국어와 중국문화의 위치를 바꿔놓았으며 화인의 문화적 주체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중국 굴기’라는 배경에서 싱가포르인들은 중국에 대해 세가지 각기 다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즉 경제적 중국, 문화적 중국, 싱가포르의 주체성을 위협하는 위협적 중국이다. 독립 초반, 싱가포르 정부는 경제를 가장 심각한 위기이자 가장 먼저 발전시켜야 할 분야로 간주했다. 경제가 크게 성장한 이후 싱가포르는 1992년 중국시장의 개방과 발전에 발맞추기 위해 정부가 주도한 첫번째 경제협력 프로젝트인 쑤저우(蘇州) 공업단지를 건설했다. 뒤이어 1993년에는 당시 총리였던 고 촉통의 추진하에 산둥성(山東省) 칭다오(靑島)시와 긴밀한 무역관계를 구축했으며 2007년에는 두번째 경협프로젝트로서 톈진(天津) 에코씨티(生態城)를 건설했다. 그리고 2016년 올해 싱가포르 정부는 충칭(重慶)시를 세번째 정부 투자 프로젝트의 대상도시로 결정했다. 2013년부터 싱가포르는 중국의 최대 외국인 투자국이 된바(홍콩 제외), 2015년 싱가포르의 대중 총 투자액은 70억달러에 달했다.

실리주의를 원칙으로 하는 경제발전 전략을 고수하는 싱가포르 정부는 일찍이 중국시장의 잠재력을 인지하고 중국 경제성장기 초반부터 경제적으로 긴밀한 협력관계를 구축했다. 싱가포르 정부는 싱가포르의 화인들이 언어, 문화적으로 중국과 효율적으로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는 결코 문화적 소통과 상호작용을 의미한 것이 아니다. 성장 중인 중국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음으로써 자국의 생존환경을 더욱 강화하겠다는 배경 속에서 화인의 우위를 강조해온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싱가포르가 실리주의의 시각으로 본 ‘경제적 중국’의 이미지다.

중국어를 사용하는 싱가포르의 화인들은 중국에 좌절과 기대라는 모순적인 문화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식민통치시대에 그들은 통치범위 외의 공간에서 자신들의 중화문화를 지속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독립 후 196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중국어를 기반으로 한 교육시스템이 정부에 의해 몰락했다. 특히 민간에서 설립한 난양대학마저 1980년에 정부에 의해 폐쇄된 바 있다. 중국이 자의반 타의반 국제사회와 격리되어 있던 시기에 싱가포르의 화인들은 문화적 동질감을 상실했고 민족문화의 계승에 대해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중국이 부활하면서 그들은 중국에 대해 기대를 품기 시작했다. 중국이 강대해지면 문화적으로 자신들에게 희망을 가져다줄 것이라 생각했고 민족적 정체성에 자부심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적 동질감에는 사실 큰 차이점이 존재하고 있었다. 싱가포르의 화인들이 기대했던 것은 전통적인 의미로서의 문화적 부흥과 계승이었지만 사회주의혁명 및 자본주의 현대화를 겪으면서 부활한 중국의 문화의식과 사상은 그들이 상상했던 것과 큰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독립국가이자 인구 75% 이상이 화인으로 이루어진 국가로서 싱가포르는 1980년대부터, 특히 최근 10년간 중국이 싱가포르의 주체성에 위협을 준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고 있다. 이러한 느낌을 받는 것은 ‘중국 굴기’라는 외부적 요소뿐 아니라 싱가포르의 사회개혁 프로젝트로 인한 내부적 요소도 함께 작용했기 때문이다. 중국어 기반의 교육시스템이 몰락한 상황에서 1970년대말 서방사회로부터 자유주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또다른 도전에 직면하게 된 싱가포르 정부는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기반으로 한 사회교육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표준 중국어로 방언을 대체해 화인공동체의 응집력을 강화시키는 언어개혁운동, 전통 중화문화를 기본 가치관으로 한 새로운 중문학교 설립, 사회와 정권의 안정을 수호할 수 있는 기제로 유교사상을 꼽고 이를 바탕으로 한 아시아적 가치관의 제시 등이 대표적이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싱가포르가 중국의 언어문화 및 가치관을 ‘추종’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싱가포르 사회는 이로 인해 다음과 같은 부정적인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첫째, 영어를 사용하는 화인들의 사회적 기득권이 위협받기 시작했다. 둘째, 인구의 소수를 차지하던 비()화족 싱가포르인들이 사회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더욱 소외되어갔다. 90년대부터 싱가포르 정부는 중국과의 비즈니스 기회와 그 경제적 가치를 줄곧 강조해왔으며 21세기에 들어서는 인구감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으로부터 많은 이민자들을 새로 받아들였고 노동력 확보를 위해 중국의 단순 노동자들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이처럼 싱가포르 정부의 중국 관련 정책은 현실적으로 싱가포르인들을 압박하고 있다. 언어와 민족을 막론하고 모든 싱가포르인들은 외부 사회로부터의 압박은 물론 싱가포르 내부에서도 ‘싱가포르인’으로서의 주체성에 혼란과 위협을 느끼게 된 것이다.

 

 

결론

 

싱가포르는 2015년 독립 50주년을 맞았다. 싱가포르는 이를 자축하면서 싱가포르인들 간의 통합의식과 동질감을 유지해나가는 한편 역사 속에서 형성되고 지속되어온 다민족·다문화 구조 역시 꾸준히 지켜나갈 것이다. 각 민족 출신국(주로 중국과 인도)의 국제사회 및 역내 영향력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은 상황이라면 싱가포르 국내에서 국민들의 통합과 다민족·다문화주의 간의 균형을 유지해나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반세기가 넘도록 집권해온 인민행동당 정권하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중국의 경제력이 막강해짐에 따라 세계무대에서 정치적 영향력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중국은 특히 문화라는 수단을 통해 각국 사회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한다. 이에 따라 싱가포르 정부가 기존에 추구하던 경제발전 위주의 실리주의 모델에도 조정이 불가피해졌다. 과거 수동적으로 혹은 내부적 움직임에 의해 결정되던 문화정책과는 대조적으로 싱가포르 정부는 중국정부 주도하의 중국문화 세계화 움직임에 적극적인 대응조치를 취하는 일환으로 화족문화센터를 설립했다. 싱가포르는 과거 식민주의와 냉전이라는 배경 속에서 중국과 어느정도의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고 그 시기 싱가포르 국내의 화인 및 화인문화에 대한 관리와 조정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이 전방위적인 발전을 거듭하면서 과거 유지해왔던 ‘안전거리’가 이미 사라졌기에 싱가포르는 정부와 민간을 막론하고 국민의 통합의식을 구축하고 주체성을 유지하는 일과, 서방사회의 세계관 및 그들과의 국제관계뿐 아니라 ‘중국 굴기’가 가져올 새로운 위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깊은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국내적 시야를 역내, 국제사회로 넓혀보았을 때 중국 굴기가 가져올 변화의 가능성 및 변화로 인한 불안정성 등에 대해 사실 싱가포르는 엄청난 우려와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따라서 민간이 아닌 정부가 나서서 강력하고 적극적인 방식으로 이에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패권적 지위를 누리는 경제대국으로서 중국의 막강한 경제력과 시장잠재력은 상당한 매력과 기회를 가진다. 싱가포르 정부와 민간은 이미 지난 30여년간 중국과의 연결고리와 협력방식을 구축해왔다. 중국과 미국이라는 두 대국이 역내에서 경쟁적 역학관계를 이어가는 상황에서 싱가포르는 독립국가로서 균형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을 모색해나가고 있다. 그러나 동남아 지역의 지정학적 시각에서 봤을 때, 혼란스럽고 위기의식이 가득한 열악한 대외환경 속에서 싱가포르는 줄곧 신중하고 보수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예컨대 1970년대부터 중국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왔음에도 아세안(ASEAN, 동남아시아국가연합) 회원국 중에서 가장 마지막인 1990년에 이르러서야 중국과 수교했으며, 필리핀·베트남·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대국들이 모두 휘말린 난샤군도(南沙群島) 영유권 분쟁 사안에 있어서도 줄곧 거리를 유지하며 중립적 태도를 지켜왔다. 중국과의 관계에서 실리주의가 잘 관철됨으로써 싱가포르는 동남아 이웃국가들로부터 의심을 피하고 경제적 발전도 도모할 수 있었다. 이는 불안정한 환경에서 변화를 꾀함으로써 국익을 확보하는 방식이었다.

싱가포르 정부와 싱가포르인들의 실리주의적 성격은 싱가포르가 작은 나라라는 현실과 표리의 관계이자 자기실현적 예언과 같은 숙명이고 동시에 국제사회의 환경변화 속에서의 체념적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다. 수년간 경제성장과 안정을 나라 발전, 그리고 지역과 국제사회 안정의 전제이자 전략으로 삼아왔던 싱가포르는 현재 중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즉 중국의 경제, 정치, 군사적 영향력 외에 문화적 수단이 싱가포르인, 특히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화인들의 주체성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이다. 중국의 문화수출은 다른 국가들에는 경제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할 유익한 수단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싱가포르에 있어 누군가가 문화주체성 혹은 국가주체성을 침범한다는 것은 방관할 수 없는 특수한 부분의 문제이다. 현재 싱가포르는 경제적 측면에서는 국제사회로부터 인정받을 만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문화주체성 측면에서는 방황과 탐색의 과정에 머물러 있어 두 요소가 큰 격차를 보인다. 독립 후 50년간 쌓아온 경제발전의 노하우는 싱가포르를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도록 했다. 경제적 사고방식을 문화의 기초로 여겨왔던 싱가포르가 대전환의 시기에 혼란을 겪지 않으려면 반드시 모든 방법을 강구하여 문화주체성을 확립하고 이를 통해 위기와 기회가 공존하는 이 시기를 극복해야 할 것이다.

번역: 박민혜(朴珉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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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16년 6월 서울에서 개최된 ‘동아시아 비판적 잡지 회의’(주제: 동아시아에서 ‘대전환’을 묻다)의 발표문을 옮긴 것으로, 원제는 「东亚夹缝中的新加坡: 中国崛起中的华族定位」이다.

** ‘화인’은 정주국(예컨대 싱가포르)의 국적을 가졌으나 중국인으로서 문화적 정체성을 가진 중국계 사람들의 범칭이다. 따라서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이나 중화민국) 국적을 지니고 장기 해외체류 중인 ‘화교(華僑)’와는 구별된다. 뒤에 나오는‘화족(華族)’은 국민을 구성하는 하나의 에스닉 그룹(ethnic group)으로서의 화인 집단을 강조하는 용어다옮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