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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김학재 외 『한국현대 생활문화사』(전4권), 창비 2016

정치로서의 일상, 일상으로서의 정치

 

 

장세진 張世眞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 sesame@hallym.ac.kr

 

 

10년 단위로 시간을 분절해서 역사를 되돌아보는 방식이 어떤 확고한 이론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한국 현대사의 경우, 편의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기술 방식이 상당한 역사적 실감을 불러일으키며 거부하기 어려운 위력을 발휘해온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지 않은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한국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은 대략 10년 주기의 첫머리에 놓이면서 향후 이어지는 시간들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는, 일종의 원형적 밑그림이 되어왔다. 예를 들어 1950년의 한국전쟁이 그랬고, 1960년의 4·19시민혁명, 1972년 박정희정권의 유신헌법 선포, 1980년의 5·18민주화운동 등이 모두 그러했다. 물론 이 사건들이 예측 가능한 단선적인 방향으로만 흘러간 것은 아니었다. 사건들은 전혀 다른 지향성을 가진 여러 힘들의 견제를 받으면서,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예기치 않은 역사의 반전 대목들과 다기한 굴곡의 지점들을 만들어냈다. 『창작과비평』 창간 50주년을 기념해 창비가 내놓은 『한국현대 생활문화사』(1950~80년대) 시리즈는 10년 단위의 이 익숙하지만 여전히 효과적인 기술 방식을 선택한, 한국 현대사에 관한 책이다.

그러나 제목에 들어가 있는 ‘생활문화사’라는 단어가 힌트를 주듯이, 이 책은 역사학자들만의 ‘정통적인’ 역사 기술 작업은 아니다. 역사학을 주축으로 하면서도 문학과 영화, 사회학과 종교학, 북한학 등 총 32명의 저자가 대거 참여한 그야말로 방대한 규모의 공동 저작 시리즈다. 이 다양한 저자 그룹을 묶고 있는 단어가 바로 ‘생활’과 ‘문화’일 텐데, 그러나 이 책은 ‘생활’이나 ‘문화’를 중심으로 역사를 기술할 때 가질 법한 오류를 경계한다는 취지를 서문에서 미리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이 가장 주의해서 피하고자 하는 인식이란 문화가 어떤 독자적인 실체를 가진 영역으로 이미 거기에 존재한다는 식의 발상이다. 신문의 지면이 정치·경제·사회·문화 면 등으로 독립적으로 구성되어 있듯이, 문화라는 제명하에 다루어지는 이 영역이 정치나 경제와는 마땅히 분리된, 어떤 고정적인 내용을 가진 분야라는 그런 인식 말이다. 현대 서구의 비판적인 문화연구(cultural studies)가 문화에 대한 바로 그런 식의 전제와 통념에 도전하면서, 이 책이 말하는 대로 “정치적 성격을 강하게 띤 영역으로” 문화를 새롭게 주목하며 탄생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문화연구의 선구자인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권력이 작동하고 경제와 결합하여”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공간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방식 그 자체가 바로 ‘문화’인 셈이다.

그러나 오해하지는 말자. 권력이 어떻게 자신의 통치성을 우리의 일상을 통해 촘촘하게 관철해왔는가 하는 측면만을 바라본다면, 실제 그 시간을 살아갔던 다양한 사람들이 보여준 바 있는, 그 예기치 못한 전복과 저항의 살아 있는 가능성들을 놓치고 마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 이 책이 ‘문화’라는 말 앞에 ‘생명’, ‘삶’( life)이라는 의미로부터 파생된 ‘생활’을 특별히 덧붙여 강조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그런 가능성을 가진 다양한 사람(주체)들을, 역사의 매 순간순간마다 놓치지 않고 발견하려는 시도이자 다짐으로 읽힌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발상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바로 각 10년을 요약하는 두개의 대조적인 이미지를 가진 키워드로 묶인 부제들인데, 예컨대 이런 식이다. ‘삐라 줍고 댄스홀 가고’(1950년대), ‘근대화와 군대화’(1960년대), ‘새마을운동과 미니스커트’(1970년대), ‘스포츠공화국과 양념통닭’(1980년대). 이 부제들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분명해 보인다. 한 시대를 정신없이 풍미하며 나부낀 국가의 정치적 슬로건이 한편에 있다면, 그 맞은편에는 한없이 고압적인 이것들을 미궁에 빠뜨리거나 뒤에서 훼방 놓고 교란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대한 갈증, 욕망, 그리고 그들 나름의 연대와 의지가 늘상 존재해왔다는 것, 무엇보다도, 우리가 역사의 이름으로 기꺼이 그 삶의 가능성들을 오래오래 기억하고 또 간직하고 싶다는 것. 그래서 이 생활문화사의 부제들은 강고했던 권력의 무게만큼이나 무겁고 둔중하지만, 그러면서 동시에 어딘지 모르게 밝고 또 심지어 유쾌하기까지 하다. 연관 없어 보이는 사물들을 병치, 조합하는 데서 발생하는 우연의 에너지, 충돌의 에너지를 자신의 예술적 동력으로 삼았던 초현실주의의 저 기지에 찬 전략이 바로 그러했던 것처럼.

2016년 가을, 유례없이 뒤숭숭한 시절 때문일까. ‘생활문화사’의 시각으로 발굴된 새로운 역사의 장면 중 특히 인상에 남는 대목으로 19604·19를 주도했던 도시 빈민들에 관한 이야기를 단연 꼽고 싶다. 대대적인 3·15 부정선거를 단순한 선거법 위반 사안으로 고발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대통령 이승만(承晩)의 하야(下野)라는 정치적 승리를 마침내 이끌어낸 4·19의 젊은 주역들에 관한 그 이야기 말이다. 그동안 학생이나 지식인 들의 역할에 가려져 잘 드러나지 않았던 도시의 여러 인간 군상이란 품팔이, 부두 노동자, 구두닦이, 넝마주이, 어린 고학생, 그리고 홍등가의 여성까지도 모두 포함한다. 이들이 시민혁명의 숨은 주역이었다는 점은 56년이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데,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그들의 도저한 경제적 궁핍과 불안은 4·19라는 장을 통해 비로소 정치적 분노로 표출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폭발한 이 아래로부터의 시위대는 걷잡을 수 없이 격렬하고 또한 급진적이었다. 실제로, 그들은 밤을 이용해 주로 권력기관 및 권력과 밀착한 어용기관들을 타격했는데, ‘불을 끄시오’라는, 이 밤의 시위대의 외침은 경찰이 그들의 얼굴을 볼 수 없게 하는 익명성의 전략이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이 도시 빈민들의 활약상은 시민과 학생들의 공로에 가려 금세 잊히는 수순을 밟게 되지만,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당대에도 그들의 존재와 공로를 인정하자는 소수의 목소리들을 만날 수 있기도 하다. “금반(今般)의 데모가 학생들만으로선 그처럼 거창한 세력으로 되지 못했을 것 아닌가 (…) 커다란 흐름이기는 했어도 완고한 절벽을 일조에 무너뜨릴 수 있게까지 결정적 위력을 가진 힘으론 되지 못했을 것 아닌가.”(1960년대, 47~48면)

그러니까 이 책은 어떤 의미에서 지나간 시간에 대한 기록이라기보다는 여전히 진행되는 우리의 현재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 우리의 현재가 바로 이런 ‘엉망진창’의 방식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그 원망스러운 기원의 순간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4·19시민혁명의 와중에 부정축재 의혹으로 들끓었던 재벌 처벌의 문제가 어느 순간 자본 조달에 다급한 정부의 손에서 유야무야된 스토리는 우리에게 이제 익숙한 경지를 넘어 식상할 정도가 되었다. 시민들의 빗발치는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 19618월 급조된 재벌들의 모임인 ‘한국경제인협회’(오늘날의 전경련)가 어느새 대정부 경제정책 제안의 상설기구쯤으로 둔갑해버리면서 정부발 이권과 특혜를 독식하는 과정.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다시 확인하는 데서 오는 이 반복된 데자뷔의 피로감.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헌법의 기본정신은 물론이고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염치를 모르는 일관된 한국의 권력과 이들을 상대로 한 보통 사람들의 절망적인 안간힘 사이를 반복 왕복해야 하는 이 책의 독서 경험은 그래서 대단히 흥미진진하면서도 그런 만큼 어떤 적잖은 감정적인 에너지조차(!) 요구한다.

그러나 부디, 이 유동하는 감정적 에너지의 흐름, 이 집단적 정동(情動)이 한국사회에 어떤 의미있는 변화를 가져오기를. 한때의 분노로 그저 타오르다 멈춰버리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