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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에메 세제르·프랑수아즈 베르제 『나는 흑인이다 나는 흑인으로 남을 것이다』,  그린비 2016

어느 프랑스 식민지인의 시간, 공간, 조건

 

 

노서경 盧瑞卿

강릉원주대학교 연구원 ecouter@hanmail.net

 

 

“나는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하지만 더 깊이 들어가야 했다.”

에메 쎄제르

 

 

때는 1956년 가을이었다. 1945년 영국 맨체스터에서 제5차 범아프리카대회가 열린 지 10년, 19554월 식민주의 없는 새 세상의 건설을 기약한 아시아-아프리카 반둥회의로부터는 1년반, 1954111일 무력 아니면 식민지배를 물리칠 수 없다는 민족해방전선(FLN)의 알제리전쟁 선언으로부터는 2년이 가까웠다. 또 한달 후 195610월이면 이집트 나세르(G. A. Nasser)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막으려는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의 수에즈 침공이 일어나는 시점이었다.

그해 1956918일부터 21일까지 빠리 쏘르본대학교에서 열린 제1차 흑인작가예술가국제대회에서 에메 쎄제르(Aimé Césaire, 1913~2008)는 흑인 역시 백인처럼 고유한 정신과 정서를 지닌 존귀한 존재임을 다시금 말했다. 태어난 곳을 찾아 마음으로 귀향하려는 쎄제르의 긴 서사시 『귀향수첩』(1939), 식민지와 피식민지의 심연을 파헤친 『식민주의에 대한 담론』(1955, 이상 한국어판 이석호 옮김, 그린비 2011)이 이미 이 명제를 시로 밝히고 논리로 검증하였기에 이 자리는 하나의 재확인이었다.* 대회의 연사들은 세네갈, 수단 같은 아프리카, 아이티, 자메이카, 그리고 이미 20세기 초 두보이스(W. E. B. Du Bois) 이래 흑인의 지적 운동이 치열했던 미국에서 모였다. 쎄제르와 함께 『흑인학생』을 발간하고 독자적 흑인성을 제창한 네그리뛰드(Négritude) 운동의 레오뽈 고르(Léopold Senghor), 알리운 디옵(Alioune Diop),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의 정신과 의사 프란츠 파농(Frantz Fanon), 소설 『미국의 아들』의 작가 리처드 라이트(Richard Wright)가 동석했다.

그러나 쎄제르의 시간대는 1950년대에 끝나지 않았다. 식민주의 연구를 나날이 확장하고 개척한 포스트식민주의는 1950년대를 다시 찾았고 그에 따라 쎄제르의 문학 역시 1980년대, 2000년대로 물결쳐 들어왔다. 이 때문에 프랑스 해외도() 레위니옹 출신의 프랑수아즈 베르제스(Françoise Vergès)는 2004년에 마르띠니끄의 쎄제르를 찾아 긴 인터뷰를 갖는다.

쎄제르는 이 인터뷰에서도 앙띠유 군도의 태양과 대양 그리고 사탕수수 농장의 노예의 역사를 잊지 않는다. 사실 카리브해 일대는 외부인은 감촉하기 어렵도록 자연과 지배가 오묘하게 얽힌 땅이었다. 그러나 쎄제르의 문학은 외진 프랑스 식민지 군도를 넘는다. 대서양을 건너 서구문명의 본바닥에서 일구어진다. 하지만 쎄제르의 흑인성은 메트로폴리탄 빠리에서 실종되지 않았다. 프랑스어, 프랑스 문학을 제어하였다. 그 힘은 질겼다. 『나는 흑인이다 나는 흑인으로 남을 것이다: 에메 세제르와의 대담』(변광배·김용석 옮김)의 제목처럼 쎄제르는 끝까지 흑인으로 남아 흑인성에 대한 자부심을 지켰다. 그의 사상이 고립 속의 독백이 아니라 ‘문명’과 부딪쳐 달구어졌기 때문이었을까.

빠리 루이르그랑 학교를 거쳐 빠리고등사범학교에서 수학한 쎄제르에게는 초현실주의자 앙드레 브르똥(André Breton), 미셸 레리스(Michel Leiris), 또다른 프랑스인들의 부단한, 아마 식민지인들에게는 버겁기도 했을 관심과 배려가 동반했다. 물론 빠리 라땡 구에서 흑백은 합쳐지면서도 서로 소외되었다. 그러나 흑인 잡지 『프레장스 아프리껜』(Présence Africaine)의 발간을 추진하는 레리스, “식민주의는 체제”임을 논증하려는 싸르트르( J. P. Sartre), 제3세계 책들을 부지런히 간행하는 마스뻬로 출판사, 어느 누구도 식민지인과 피식민지인을 가르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비백인 식민지인들이 분기하는 1950~60년대에 그들 모두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쎄제르는 이 서양과 식민지의 혼성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끈질긴 모순을 작품으로 녹여냈다. 희곡 『어떤 태풍』(1969, 한국어판 그린비 2011)은 셰익스피어의 서양을 낯선 식민지에 옮겨놓는다. 또다른 희곡 『콩고에서의 한 계절』(1966, 한국어판 김성연 외 옮김, 서울여대출판부 1989)은 결국 살해되는 콩고의 온건 민족주의자 빠트리스 루뭄바(Patrice Lumumba)를 구식민세력 벨기에, 여전한 서양, 이들에 협력하는 콩고인, 이 식민지인의 분열을 거부하는 콩고 사이에 배치한다.

그런데 에메 쎄제르의 평생의 직업은 프랑스 하원의원이자 프랑스 해외도 마르띠니끄의 포르드프랑스 시장이었다. 모함메드 디브(Mohammed Dib), 카테브 야신(Kateb Yacine) 같은 북아프리카의 거장들과 달리 그가 문인으로만 살지 않고 정치에 나서게 된 것은 “우연”이었지만 문학과 정치의 합성으로 무엇을 했는가 하는 질문은 그를 떠나지 않았다. 현실은 너무 막막하였던지 쎄제르는 베르제스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한 것이 없다고도 했다. 195610월 헝가리인들의 자유화 요구에 대한 소련의 탄압 후 그가 모리스 또레즈(Maurice Thorez) 프랑스 공산당수에게 긴 편지를 남기고 당을 떠났듯이 식민지인들을 지원했던 공산주의 이념도 그를 돕지 못했다. 모순은 깊어 걷어내기 힘들었던 것 같다.

바로 그 때문에 쎄제르의 작품으로는 그의 정치평론과 의회연설을 모은 『정치 저술』(Écrits politiques)도 의미있을 것이다. 히틀러의 수법을 식민주의의 수법에 빗대었던 문명 비판자, 작은 섬이건만 생산력을 늘리기 어려운 현실의 정치가, 그렇던 그의 상념을 정녕 우리가 다 안다 할 수 없지만 정치와 시어(詩語)가 어떻게 분리되고 어떻게 하나였는가를 그의 정치저술이 들려줄지 모른다.

어떻든 쎄제르는 백인들은 이 식민지 역사를 새겨야 한다는 식민지배 책임론을 마지막 인터뷰에서도 금언처럼 되뇌었다. 그에게 식민지배를 배상한다는 관념은 당치 않았다. 두 세기의 서양 부르주아 식민주의를 감당한 식민지인들의 피해는 환산할 수 없는, “배상 불가능”의 것이었다. 2013년 쎄제르 탄생 100주년 무렵의 연구들은 그러한 책임론이 쎄제르의 마법 같은 언어에 힘입어 여전히 생생하다고 보았다.

물적, 지적으로 황폐해진 식민지에서 식민지인의 기품을 길어올린 그의 언어, 막강한 듯 군림하던 식민지 비존재론을 타격하던 그 언어의 종소리는 오래 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