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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김상숙 『10월 항쟁』, 돌베개 2016
사건과 애도를 넘어선, 미래로서의 10월항쟁
노태맹 盧泰孟
시인 arche38@hanmail.net
‘10월항쟁’은 한때 현존하지 않는 과거였다. 그리고 지금도 완전히 현존하지 않는다. 10월항쟁이 생산한 현재는 아직도 ‘사건’들 그 이전에 갇혀 있다. 집안의 비사(秘史)로만 남아 있어 평자는 대구에 살면서 술자리에서나 그런 비극적인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10월항쟁과 그 이후의 잔혹한 학살이 공식화되고 ‘사건’이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그 과거가 사건으로서의 과거로 돌아가지 못하고 아직도 이데올로기와 한없이 미뤄지는 미래에 포박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던 차에 2007년부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사건을 조사하고 희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일해온 김상숙의 『10월 항쟁: 1946년 10월 대구, 봉인된 시간 속으로』 출간은 반가운 일이다. 모처럼 만에 나온 대구 10월항쟁에 대한 책이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폭발해 경북으로 퍼져나간 10월항쟁은 “해방 직후 미군정이 친일 관리를 고용하고 토지개혁을 지연하며 식량 공출을 강압적으로 시행하자, 이에 불만을 가진 민간인과 좌익세력이 경찰과 행정당국에 맞서면서 발생한 사건”(13면)이다. 10월항쟁은 “한국사회가 시민혁명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수십년 동안 누적된 갈등과 건국운동의 좌절에 대한 반발이 국가형성 과도기에 폭발한 것”(271면)이다. 항쟁이 장기화되면서 1948년의 제주 4·3항쟁과 여순항쟁으로 이어졌고, 이들 항쟁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 학살의 출발점이 되었다. 점증한 비극은 희생자 수에서도 확인된다.
1960년 제4대 국회에 신고된 대구·경북 지역 시기별 피살자 수를 보면 해방 후부터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까지 157명,** 정부수립 이후부터 한국전쟁까지 1507명, 한국전쟁 직후 3274명(미상 144명)으로 총 5082명이다.(260면) 대부분이 ‘좌익 전향자 조직’인 국민보도연맹에 연루되어 한국전쟁 직후 경산 코발트 광산, 대구 가창골, 달성 중석 광산 등지에서 학살되었다.
1946년 8월에 보도된 미군정의 여론조사 결과는 해방 당시 조선의 인민대중의 체제 지향을 보여주는데, 자본주의 11%, 사회주의 70%, 공산주의 7%로 대중의 열망이 어디에 가 있었는지 알 수 있다.(59면) 이 책은 10월항쟁에서 조선공산당과 노동운동의 역할에 대해 비교적 적은 부분을 할애하여 아쉬움을 주기는 하지만 양민학살에 초점을 맞춘 책 구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저자는 10월항쟁의 의미를 “노동자, 시민이 연대한 대중운동이자 사회운동”으로서의 “미완의 시민혁명”으로 규정하면서 동시에 “전통적 농민항쟁의 전승이자 현대 민중항쟁의 원형”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시민혁명과 농민항쟁의 전승이라는 두개의 모순적 평가는 좀더 섬세하게 다듬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대구에 살면서 그 ‘현존하지 않는 과거’에 대해 우리는 마음의 빚을 질 수밖에 없었다. 근래 대구의 이하석(李河石) 시인은 10월항쟁과 가창 양민학살 등의 이야기를 담은 『천둥의 뿌리』(한티재 2016)라는 시집을 냈다. ‘시인의 말’에는 “이 도시에 사는 이의 빚진 마음”이라고 썼다. 아직 실행에 옮기지 못했지만, 올해 초 대구의 다른 시인이 평자에게 10월항쟁에 대한 서사시를 같이 써보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이것도 마음의 빚 때문일 것이다. 2년 전쯤 비정규교수노조의 임순광 교수 등이 몇권의 두툼한 자료집 『10월 항쟁과 노동관련 주요 자료 모음』을 제본하여 같이 공부하는 자리를 마련한 적이 있었다. 10월항쟁과 이어지는 비극은 대구에 사는 이들에게 넘어야 할 과거였던 것이었다.
데리다( J. Derrida)는 과거란 현존한 적이 없고, 결코 현존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현재를 빠져나간 시간은 뒤틀리면서 새롭게 배치되고, 관찰하는 시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그리하여 과거의 시간은 수많은 현재를 생산한다. 그리고 내 앞의 이 현재도 미래의 관점에선 현존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거를 바라보면서 무엇이 재현되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과거를 재구성하려는 노력은 필요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기획이 아닐까.
그렇다면 10월항쟁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일까? 억울한 죽음을 발굴하고 추모하고 기억하는 일만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떻게 10월항쟁을 현재적으로 재현할 수 있을까? 어쩌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근대적 인민의 탄생과 민주주의의 정치철학적 기초를 10월항쟁과 그 전개로부터 연역해낼 수 있지는 않을까? 사건과 애도를 넘어선, 미래로서의 10월항쟁을. 그러나 아직 10월항쟁은 ‘사건’ 이전이고 그래서 우리는 저자의 또다른 책을, 그리고 우리의 또다른 노력들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10월항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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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문을 제외하고 10월항쟁을 주제로 한 단행본은 평자가 알기로 지금까지 세권이다. 심지연 『대구10월항쟁연구』, 청계연구소출판국 1991; 정해구 『10월인민항쟁연구』, 열음사 1988; 정영진 『폭풍의 10월: 대구10·1사건을 일으킨 사람들과 그 이데올로기』, 한길사 1990. 체계적인 연구자료는 2005년부터 시작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모았고 그 이전 자료로는 1960년 제4대 국회의 『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있다. 발간연대를 보면 60년대~80년대 초반까지의 연구자료가 전무한데, 이러한 상황은 10월항쟁이 이데올로기적으로 대구·경북 대중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상상하게 한다.
** 다른 자료의 10월항쟁 피해 통계를 보면 사망자 136명(관리63, 일반인73), 부상자 262명(관리133, 일반인 129)이다. 김일수 「10월 항쟁: 연구 현황과 전망」, 『통일문제연구』 제30호,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