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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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진 張修珍

1981년 서울 출생. 2012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ninotchka@naver.com

 

 

 

루아르강의 이방인들

 

 

진자는 내게 영어로 말했다

하이, 안녕

나는 바보 불어로 대꾸했다

봉슈어, 안닝허시오

 

지나가던 프랑스인이 말했다

웬 아이 워즈 어 차일드…

강가의 젖은 나무에서 버찌, 냄새가 났다

더 브릿지 워즈 밤드…

 

어떻게 된 거죠?

 

안경을 잃어버렸어요

쌀과 시집 원고도요

진자, 나는 빈털터리가 되었어요

빠리의 집시 셋은 내 목덜미에 커피를 뿌렸죠

프랑스 경찰은 내 앞에서

와우 나는 잘생긴 남자지,라고 말했어요

아 쌀

나는 봉투를 손톱으로 찢어 터트렸어요

죄 없는 이의 무덤 위로

증오와 혐오가 함께 쏟아져 내렸죠

경찰, 개새끼지요?

 

진자의 뺨은 오후의 뻔한 유럽 다리 위에서 붉어졌다

 

더 브릿지 워즈 밤드…

 

여자도 사라졌어

춥군

 

진자, 내가 뛰어내리면 당신은 우는 거예요

하얼빈 출신 진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썰매를 끌고 온 소년처럼 언 강을 바라보았다

나는 웃음이 나왔다

진자, 당신의 이름에는 리얼,이란 뜻이 있어요

 

큰 파마머리 아야

상큼상큼 다가와

레몬 한알, 초밥 한 접시를 내게 건네며

휘파람으로 나를 쓰다듬듯 말했다

하아히?

아유흐 오케이히?

해브 섬 레스트흐?

 

어떻게 내가 쉴 수 있겠어요

아야

난 개와 소년이 굶어 죽는 부자 나라에서 왔어요

아이 원 투 다이 이대로

곧 시꼬꾸로 돌아갈 아야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석양 속의 아야는 상상 속의 목동 같았다

밤하늘의 국자 속으로 사라질 듯 흔들렸다

아야, 당신의 이름에는 아파요,라는 뜻이 있어요

 

진자와 아야의 딸, 메이와는 말할 기회가 없었다

아주 오래된 무어 성의 흙 한 주먹을 진자에게 주었다

메이에게 전해달라고

 

메이야, 너의 이름에는 5월이라는 뜻이 있단다

이 흙엔

16세기 공주와 왕자가 거닐던 봄날 정원의

부드러운 비밀이 담겨 있단다

 

 

 

힌트는 마녀

 

 

여어, 웅크리고 잠드는 자여

키보다 작은 침대의 주인이여

나를 기억하겠나?

4대 비극을 겨드랑이에 끼고 거드름을 피우며

시장에서 그 구닥다리 구두를 살 때였지

주인 몰래 날 슬쩍

 

제발 내 인중에서 이 수염 좀 떼주게

난 인민을 사랑해, 이런 히틀러식 수염은 나랑 어울리지 않는다고

물론, 그 댓가로 난 자네에게 깊은 우정을 표하겠네

기대하게, 난 셰익스피어보다 잘생긴 예언자라네

 

저런,

얼어 죽은 자의 가죽부츠를 신고

무덤가에 홀로 서 있어

슬퍼하는군

인간들의 감정이란 참 오묘하단 말이지

자넨 신발의 전 주인처럼 걸어가네

한쪽 무릎으로 애도의 작은 동그라미를 그리며

 

자넨 사랑에 빠져

운명운명 이를 빡빡 갈면서

형편없는 극작가의 대사를 죽도록 반복하고 있군

 

사랑은 천둥 속의 돼지로다

사랑은 우르르 꿀꿀

 

자네의 이름은

맹 깡 탕

 

그는 군인이었어

전쟁을 좋아했고 늘 승리했지, 한쪽 다리를 잃긴 했지만

여전히 손아귀 힘이 좋고 악명 높은 바람둥이였지, 어쨌든

 

41장, 거실 복판엔 늙은 태양이 엎드려 있네

자네는 침대를 머리에 얹고 졸고 있군

의자를 차곡차곡 쌓아 올린 채

아편에 절어

침대는 모자요, 의자는 새로다 중얼거리며

지옥의 무게를 견디는

1그램의 거인이 되는 꿈을 꾸네

아득해 보여, 어쨌든

 

너는 그의

아홉번째

털북숭이 여인에게 가장 매혹된다네

 

푸짐하고 미끄덩한

 

공포로 부푼 돼지의 궁둥이를

방망이처럼 휘두르며

한놈 한놈 지옥으로 보내는 그녀의 털

한올 한올에 집중하며

 

한발 한발 총을 쏘듯 말하지

 

어여쁜 나의 짐승, 들끓는 야만이여

나를 끓여 저어 삼키시게, 나 그대 내장에서

부드러운 죽 되리니……

 

연극이 끝났군

 

졸던 관객들은 다 사라지고

로비에서 술 한잔 걸치는 이 없네

 

곧 천둥이 내리칠 거야

그녀는 없고

자넨 극장을 나와 걷지

구겨진 4대 비극을 여전히 겨드랑이에 낀 채

세명의 마녀와 마주치지

 

우정?

 

자, 이제 내 수염을 떼주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