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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근 金根
1973년 전북 고창 출생. 1998년 『문학동네』로 등단. 시집 『뱀소년의 외출』 『구름극장에서 만나요』가 있음. hartani@naver.com
너의 멸종
너는 멸종했다 너라는 껍질을 뒤집어쓰고
너 아닌 것들이 거리를 활보한다 나는
실패했다 우리는 더이상 우리가 아니고
어리석은 별들이 순식간에 졌다 우리의
어제는 우리와 함께 사라졌다 내일은
도착할 기약이 없고 오늘만 영원하다 땡볕
속에 응애응애 어느 병원에선가 또다시
너라는 병원체를 보유한 너의 새끼들이
태어난다 새끼들은 점점 너로 자라나
너의 흉내를 내며 너의 얼굴을 달고
지겹도록 살고 살아가고 그들의 입에서
흘려보낸 너의 메아리들이 도시 곳곳에서
불어 다닌다 수많은 벽들에 부딪쳐
본래 목소리조차 알 수 없게 된 메아리들로
거리는 온통 웅웅거리고 그렇게 혼곤하게 거리는
거리가 아닌 채로 있다 있기만 한다 나는
내가 아닌 채로 이제 그만 내 껍질을 찢어
버린다 한때 나였던 껍질이 내 문앞에 쌓여
간다 껍질과 함께 흘러내리는 울음들은 시나
브로 화석으로 굳어가고 우리의 시간은 발굴
되지 않을 것이다 그 어느때고, 끝없이 나는
실패하고, 사라지지는 결코 않는 오늘,
너라는 것들의 멸종은 멈출 줄을 모른다, 끝도 없이,
뒷모습
기다린 것은 언제나 뒷모습이었으니 이 뒤 저 뒤 가릴 것 없이 한결같이 뒷모습에는 한마리씩 귀신이 살아 머리 풀어 산발하고 왼몸에다가는 피칠을 하고* 웃음이나 찌크려 쌌기나 하곤 하였더랬는데 시방 뒤돌아가는 저 사람 제 뒤에 귀신이 붙어다니는 줄 아는지나 몰라 손짓에다 소리까지 보태어 불러를 보지만서도 목구멍에는 웬 흐엉흐엉 바람이나 불고 자빠졌는지 허참 그 자취 영영 보이지 않을 때까지 붙박여 서서 그 썩을 놈의 바람 소리나 흐엉흐엉 내고만 있다가는 문득 속창아리 없게도, 내 뒷모습에는 어떤 놈녀러 귀신이 살아 어떤 모양으로 삘건 혀를 한 자나 빼어물고 다 썩어문드러진 제 살이나 핥, 핥, 핥, 핥는가 궁금도 하여 이리저리 저리이리 아모리 고개를 돌려나 보아도 그 놈녀러 귀신의 귀자도 귀알테기조차도 보이지가 아예 않는데 언제나 내가 내 뒷모습에 철썩 달라붙어 끈덕지게 떨어지지도 않는 그 놈녀러 귀신을 만나 서로 마주앉아 한잔 더 먹게 그만 먹게** 할 날이나 있을까 하면서 육시랄놈의 기다리는 일이나 보채고 안달하고 멈추지도 못하고 앉아만 그저 있더란, 말하자면, 말이시, 인데, 숫제 제 뒷모습을 떼어버리고 코가 얼얼이나 하게 싱싱하기 짝이 없는 젊은 놈년들이 귀신도 없이 앞모습으로만 이 나를 지나쳐만 지나쳐만 가니 헛 이거 참 환장할 노릇이 아니고 또 무어란 말인가, 목구멍으론 여적지 바람 소리만 흐엉흐엉 들고 나고 새고 자빠를 졌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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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춘향가」의 변형.
**단가 「사철가」의 변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