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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촛불과 광장의 한국현대사

 

 

한홍구 韓洪九

성공회대 교수, 한국현대사.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책임편집인. 저서로 『대한민국사』(전4권) 『유신』 『역사와 책임』 『사법부』 등이 있음. hongkoo@skhu.ac.kr

 

 

촛불과 광장, 같고도 다른

 

대통령 박근혜에 대한 탄핵소추가 실현되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한국현대사에 새로운 장이 열렸고, 시민들은 자기 손으로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다는 데 감격하고 있다. 맞다, 감격이 먼저다. 마냥 감격에만 젖어 있어서는 안 되지만, 얼마 만의 승리인가. 특히 ‘헬조선’에서 ‘흙수저’ 처지로 살기를 거부하고 이런 엄청난 변화를 실현한 젊은 세대에게는 고맙다는 인사와 축하를 보내고 싶다. 노년층은 4·196·3으로, 장년층은 ‘서울의 봄’과 6월항쟁으로 자신의 청춘에서 한때나마 빛나는 순간을 경험했지만, 워낙 어려운 시대를 보내다보니 제 손으로 역사를 바꿔보고도 역사가 바뀐다는 사실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렸다. 사십대 초반이나 삼십대 후반들도 2002년 선거에서 노무현의 승리에 열광했지만, 별로 세상을 바꾸지 못한 채 휙 5년이 지난 뒤 민주주의의 후퇴와 죽음 속에서 역사를 바꾼 기억을 묻어버렸다. 세상이 나빠지는 것만 겪어온 젊은 층이 제 손으로 역사를 바꾸고 느끼는 뿌듯함과 기쁨은 말해 무엇하랴.

흔히들 민주주의 하면 대의민주주의를 떠올리고, 대의민주주의의 기본장치로는 의회와 정당을 꼽는다. 어느 나라보다 빨리 절차적·제도적 민주주의를 발전시켰다는 평을 듣는 한국 현대정치사를 들여다보면 대의민주주의가 한국에서만 유별나게 오작동하는 것인지, 또는 대의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의 기본장치가 맞긴 한지 의심이 든다. 지난 삼사십년간 한국정치의 중심무대는 광장이었기 때문이다.

서너달 전만 하더라도 이백만이 넘는 인파가 광장을 메우고 박근혜의 퇴진을 요구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역사는 늘 그렇게 변하는 법이다. 유신이 무너지던 1979년의 1학기에는 전국 주요 대학에서 한건의 데모도 없었고, 19876월항쟁이 있기 딱 5개월 전에는 실내에서 100명이 모이는 집회조차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민족민주운동진영이 위축되어 있었다. 태풍이야 그래도 닥치기 며칠 전에 알 수 있지만 우리 발밑을 흔드는 지진은 늘 이렇게 갑자기 오고야 만다.

왜 한국현대사에서는 광장에서 촛불이 켜지고 꺼지기를 반복해온 것일까? 촛불이 켜져 있을 때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고 그 역사를 만드는 주체는 바로 당신과 나라고 떠들고 다녔지만, 촛불이 몇십년 만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처럼 보이는 지금은 무수히 많던 촛불이 왜 세상을 별로 바꾸지 못하고 꺼져버렸는지 이야기해야 할 때다. 우리가 촛불을 켜고 광장을 메웠던 순간은 분명 역사의 전환기였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다들 느끼는 것이지만 세상은 우리가 바라는 만큼 바뀌지 않았다.

이번에 이백만 시민을 광장으로 불러 모은 주인공은 누가 뭐라 해도 헬조선의 흙수저들이었다. 박근혜-최순실게이트가 폭로되는 실마리가 정유라의 이화여대 부정입학 사건이었는데, 이것은 흙수저라 불리는 젊은 세대에게 극히 민감한 문제였다. 흙수저들의 거센 분노가 이보다 앞서 표출된 사례로 20164월 치러진 20대 총선을 들 수 있다. 야당은 분열되었고 보수진영은 단일 대오로 선거에 임했으니 진보언론조차 선거는 해보나마나 새누리당의 압승이라고 예측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새누리당은 122석에 그쳐, 2004년 탄핵 직후 한나라당이 얻은 121석 수준의 놀라운 참패를 당했다. 다들 예상 밖의 결과라고 충격을 받았다지만, 이 총선이 박근혜를 끌어내리는 시발점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이렇게 놀라운 일이 또 있었을까? 역사라는 창고를 뒤져보면 꼭 같지는 않지만 없는 게 없이 다 있다. 약 40년 전인 19781210대 총선에서도 야당인 신민당이 여당인 공화당에 득표율에서 1.1퍼센트 앞서는 대이변이 일어났다. 다들 선거결과에 놀라 자빠졌지만, 열달 뒤 정말 놀라 자빠질 일, 박정희가 머리에 총을 맞는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역사는 늘 그렇게 변해왔다.

헬조선 흙수저는 결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을 포함하여 노무현의 당선에 기뻐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그가 선거운동 과정에서 했던 연설 내용을 기억할 것이다. 국민경선을 통해 이인제(仁濟) 대세론을 뒤엎고 후보에 선출된 노무현은 후보 수락 연설에서 조선 건국 이래 6백년 동안 우리는 권력을 한번도 바꿔보지 못했다며, “그저 밥이나 먹고 살고 싶으면 세상에서 어떤 부정이 저질러져도 어떤 불의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짓밟고 있어도 모른 척하고 고개 숙이고 외면했어야 했다”면서 “이제 비로소 우리의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얘기할 수 있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는 또 선거유세 기간 중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이 부자 아버지를 만나지 않더라도 나라에서 보장하는 대로 열심히 공부하면 노무현이처럼 변호사도 될 수 있고, 국회의원도 될 수 있고, 사장도 될 수 있고, 대통령도 될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는 나라”를 만들자고 강조했다. 부모의 권력과 재산, 사회적 계층, 학벌 같은 것이 대물림되는 사회는 결코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노무현은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가 “당당하게 권력을 한번 쟁취”해야 한다고 역설했고, 우리는 진짜로 권력을 쟁취했다. 그러나 노무현은, 아니 노무현을 뽑았던 사람들은 개혁에 실패했다. 부모의 권력과 재산, 사회적 계층, 학벌 같은 것이 대물림되는 사회, 노무현이, 노무현을 뽑은 우리들이 막아보려고 했던 사회가 이 땅에 굳건히 자리잡은 것이다.

의병에서 지금의 촛불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현대사에서 역사를 바꾸어온 주역은 늘 십대 후반과 이십대였다. 4월혁명의 주역이 지금 어버이연합 세대가 됐고, 6월항쟁의 주역 386이 기득권 세대가 됐지만, 21세기 광장의 주인들은 흙수저 세대로 남아 있다. 촛불을 들고 광장에서 진화와 좌절을 함께 경험한 세대, 그들이 다시 판을 벌였다.

그런데 광장이라는 넓디넓은 공간은 늘 거기 있었고, 시민들은 전문가들도 기억이 헷갈릴 만큼 자주 광장에 나와 촛불을 들었다. 바뀐 것도 아니고 안 바뀐 것도 아니면서 세월은, 역사는 정신없이 흘러왔다. 촛불과 광장의 역사를 되짚어보자.

 

 

유신시대: 광장만 있고 민주주의는 없는

 

젊은 세대에게는 생소하겠지만 여의도에 5·16광장이라는 것이 있었다. 무려 12만평, 넓이로 치면 세계 최대의 광장이었다. 1971년 준공된 그곳에서는 우리가 지금 ‘광장’이라는 말을 쓸 때 가득 담겨 있는 민주주의와 소통이라는 의미는 찾아볼 수 없었다. 군중을 동원하여 “때려잡자 김일성, 쳐부수자 공산당, 무찌르자 북괴군, 이룩하자 유신과업” 따위의 구호를 외쳐대고, 군사퍼레이드나 하는 곳이었다. 유신시대에 국가의 광장은 있었지만 시민의 광장은 없었다.

60년대와는 달리 유신시대에는 학생들이 거리에서 데모도 하지 못했다. 그 대신에 교내시위라는 말이 등장했다. 60년대의 데모는 교내에서 성토대회나 시국토론회 같은 집회를 열고, 교내를 두어바퀴 돌며 몸을 푼 뒤 학교 밖으로 나가 거리에서 시위를 하는 방식이었다. 데모는 으레 가두시위였지만, 유신 이후 경찰은 아예 교문을 봉쇄했고, 서울대는 학교를 시내 중심가에서 관악산 산속으로 옮겨버렸다. 서울대의 경우, 강의실 밀집한 곳에서 교문까지 십분, 교문을 돌파한다 해도 민가를 만나려면 또 십분쯤 가야 하니 자연 교내시위가 되었다.

하도 탄압이 심하다보니 1978년에는 각 대학의 학생운동가들이 힘을 합쳐 광화문에서 연합시위를 거행했다. 이마저 정보가 새어나가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이때 광화문 차도를 밟았다가 잡혀간 사람들은 대개 징역 1년 이상을 선고받았다. 그 광화문에 이제는 백만이 넘게 모여 대통령 물러가라 한 것을 보면 역사가 기가 막히게 변한 것이고, 그 대통령이 박정희의 딸인 것을 보면 역사는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이다.

19781210대 총선 결과에서 민심이 유신체제를 떠났다는 것은 분명해졌지만, 19791학기 전국 주요대학에서는 교내시위조차 한건 없었다. ‘짭새’가 도처에 앉아 있고, 닭장차가 곳곳에 서 있었다. 그때는 데모할 때 주동자가 뛰쳐나와 ‘학우여!’를 외쳤는데 ‘학’ 하다가 붙잡혀가는 웃지 못할 일도 왕왕 있었다. YH 여성노동자들이 신민당사로 들어간 것이 89일, 10대 총선 이후 첫 정치적 농성이었지만, 석달도 안 돼 유신체제가 무너지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5월에서 6월로

 

김재규(載圭)는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에 총을 쏘았다”는 이유만이 아니라, 목을 걸고 최태민(崔太敏)을 고발한 것으로도 재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수천수만 젊은이들이 피 흘리는 일을 피하기 위해 친형제와도 같은 박정희를 쏘았지만, 결국은 유혈사태를 막지 못했다. 시간과 장소를 달리하여 광주에서 엄청난 참극이 일어난 것이다. 온순하고 반공적이었던 평범한 시민들이 무기고를 깨고 총을 들어 계엄군을 몰아내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비극으로 끝났지만, 다만 며칠간이었지만, 광주는 그야말로 너와 내가 따로 없는 ‘절대공동체’였다. 그 공동체의 중심은 도청 앞 분수대 광장이었다. 민주주의의 학교요, 성숙한 시민들의 만남의 장이었던 도청 앞 광장에 매일 3만명의 시민이 모여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렇지만 계엄군의 진압이 확실해진 526일 밤, 광장은 비어가기 시작했다. 1퍼센트, 300여명이 남았다고 한다. 3만명이 그대로 남아 있었으면 전두환이 아무리 흉악하다 할지라도 탱크 몰고 들어오지는 못했을 텐데……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결국은 거의 다 집으로 돌아갔다. 전두환에게 텅 빈 도청을 내줄 수 없다고 생각한 ‘바보 같은’ 사람들만 거기 남았다.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처절하고 참담한, 그러나 장엄한 패배로 광주의 저항은 끝이 났다.

그날 밤 집으로 간 사람들의 가슴속에 생겨나 다른 사람들에게 급속히 전염된 80년대의 몹쓸 병이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었다. 겁먹고 흩어졌지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떨쳐버릴 수 없는 사람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처절한 패배에서 꼭 7년, 백만 인파가 다시 거리를 메우고 학살자들에게 저항한 것이 6월항쟁이었다. 5월에서 6월은 한 호흡으로 그렇게 달려왔다.

6월항쟁 이전 우리에게는 광장이라는 것이 없었다. 시청 앞 광장이나 인천역 앞 광장이나 광장이라는 공간은 있어도 지금 같은 의미의 광장 집회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6월항쟁 이전 80년대의 가두투쟁에 일반 시민이 참가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가두시위의 시간과 집결장소는 학생운동조직이나 재야단체의 열성 성원들에게만 “653분 종로3가 세운상가 앞” 하는 식으로 은밀히 전달되었다. 근처에서 배회하다가 주동자가 구호를 외치면 갑자기 차도로 달려들어가 구호 몇번 따라 외쳤다. 멀리서 백골단이 달려오면 선두가 화염병 몇개 날리는 사이 참가자들은 흩어졌다가 “728분 국도극장 앞” 하면 또 모이고 흩어지는 방식이었다.

1987114일 박종철(朴鍾哲)의 죽음은 이런 시위방식을 바꾸어놓았다. 사람들은 너무도 폭력적인 전두환정권에 맞서 화염병을 던지고 짱돌을 날리진 못한다 해도, 박종철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애도를 어떻게든 표하고 싶어했다. 당시의 운동진영은 시민들의 이런 마음을 잘 포착했다. 박종철의 추도식이 열린 29일 운동진영은 화염병과 짱돌 대신 검은 리본을 달고 추모묵념을 드리자고 제안했다. 정해진 시간, 놀랍게도 길 가던 사람들이 멈춰 서서 묵념을 올렸고 길거리의 차들도 길게 경적을 울리며 박종철의 죽음을 애도했다. 박종철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이 나만이 아니었구나, 이렇게 많았구나를 새삼스럽게 느끼며 사람들의 분노는 마음속에서 더욱 단단해져갔다.

610일 시위는 전국 동시다발로 진행되었다. 경찰력은 분산되었고 곳곳에서 경찰이 시위대에게 진압당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당시 국민운동본부라는 야당과 재야가 힘을 합친 시위지도부가 있었는데, 그날 밤에는 전국에서 벌어진 시위에 대단히 흡족해하며 대학이 방학에 들어가기 전 한번쯤 더 대규모 시위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정도의 분위기였다고 한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명동 일대에서 시위를 하던 군중 사오백명이 아무런 준비도 계획도 없이 그냥 헤어질 수 없다며 명동성당으로 들어가버린 것이다. 지도부와는 아무런 상관 없는 농성이 그렇게 시작되었고,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수천명의 군중이 명동성당 앞에 모여 자연스럽게 시위가 계속되었다. 지도부의 잘 짜인 계획이 아닌, 대중의 즉흥적이고 자발적인 선택이 6월항쟁이라는 거대한 역사를 만들어낸 것이다.

시민들은 다른 여러 구호를 놔두고 오로지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로 민주쟁취!”만을 외쳤다. 직선제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전두환정권이 노태우를 내세워 직선제를 받아들이겠다는 6·29선언을 해버렸다. 요즘 6월항쟁 하면 백만 인파를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모인 것은 최루탄에 맞고 사경을 헤매다 숨진 이한열(李韓烈)의 장례가 치러진 79일 딱 하루였다. 아직 광장은 대중을 품지 못했고 대중은 광장에 발을 들여놓기를 주저했다. 그날의 광장은 장례식이라는 특별한 행사를 위해 열렸을 뿐, 아직 온전한 대중의 광장이 되지는 못했다.

6월항쟁은 한국사회가 이승만-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진 독재체제를 벗어나 민주화라는 거역할 수 없는 길로 방향을 돌리게 한 엄청난 사건이었지만, 절반의 승리였다. 민주진영의 어느 누구도 직선제로 치러지는 대통령선거에서 군사독재세력에 패배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대중과 김영삼의 분열로 정말 지면 안 되는 싸움에서 져버렸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후 친일파를 청산하자던 민족적 양심을 가진 세력이 친일파에게 거꾸로 청산당한 이래 수구세력으로서는 두번째의 성공적인 엑소더스였다. 수구진영은 정권을 간신히 유지했고 의회에서도 제1당의 자리를 지켰지만, 여소야대라는 새로운 상황에 직면해야 했다. 군사독재세력은 김영삼, 김종필(金鍾泌) 세력과 야합하여 3당합당이라는 보수대연합을 실시했다. 6월항쟁 직후 영남과 호남으로 분리되었던 민주화운동진영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대립관계에 빠져들었다.

영남지역에 기반을 둔 민주화운동세력 대부분이 김영삼을 따라 군사독재세력과 손을 잡을 만큼 급격히 보수화된 것이다. 이런 갑작스러운 변화에는 7·8·9월 노동자대투쟁에서 노동자들의 힘이 폭발적으로 터져나온 것이 크게 작용했다. 노동자들로서야 20년 동안 미뤄진 분배가 겨우 시행된 것이지만, 자본가나 중산층 중에는 노동자들의 진출에 겁을 먹은 자들이 많았던 것이다. 1980년대에는 흔히 ‘위장취업자’로 불리던 학생운동 출신의 노동운동가가 1만명 이상에 달할 정도로 흔했다. 이들의 꿈은 현장에 번듯한 노동조합 하나 조직하는 것이었지만 성과는 미미했다. 그런데 6월항쟁에 뒤이어 갑자기 7·8·9월 노동자대투쟁이 벌어지면서 노동조합이 일년 사이에 천수백개가 결성되어버렸다. 앞으로 촛불이 켜진 광장에서 수없이 접하게 될 상황이지만, 대중은 직업적 운동가들의 주관적 헌신성에 설 땅을 주지 않고 폭발적으로 달려나가곤 한다.

 

 

분신정국과 광장

 

19915월은 참으로 잔인하고 뜨거운 달이었다. 시위에 나선 대학생 강경대(姜慶大)가 경찰의 진압봉에 맞아 숨지는 비극적인 상황이 발생하자 1987년 대선 패배와 1989년 사회주의진영의 대붕괴라는 안팎의 충격에 빠져 있던 민족민주운동진영은 노태우정권의 타도를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이 한 몸 다 바쳐 숨 막히는 현실을 타개할 수 있으면 하는 절박감에 젊은이들은 문자 그대로 자신의 몸을 불살랐다. 하루 걸러 젊은이들의 분신이 이어지던 시절이었다. 젊은이들은 대중에게 죽음으로 호소해야 할 만큼 당시 상황을 절박하게 인식했지만, 그 절절함 때문에 평범한 대중과 함께하지 못했다. 광장은 없었다. 거리시위 중 백골단에 쫓긴 대학생들은 막다른 골목으로 몰려 앞이 안 보이는 최루탄 세례와 몽둥이찜질을 당해야 했다. 김귀정(貴井)은 그렇게 깔려 죽었다. 그 얼마 전 경찰은 감옥에서 중상을 입고 병원에 옮겨진 뒤 의문의 죽음을 당한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朴昌洙)의 시신을 영안실 벽을 부수고 탈취해 갔다. 경찰은 또다시 김귀정의 시신을 탈취하려 했고, 청년학생들은 세차례에 걸친 경찰의 시신탈취 시도를 피눈물로 막아냈다. 25년 뒤 시민들은 막다른 골목에서 광장으로 나와 촛불을 들고 평화시위를 하고 있지만, 정권은 여전히 백남기(白南基) 농민의 시신을 ‘압수’해 가려 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참혹한 시절, 지금 너무 낯익은 또 한 사람 김기춘(金淇春)을 만나게 된다. 노태우정권은 분신정국 당시 유서대필이라는 참으로 기막힌 주장을 들고 나왔다. 운동권 안에 죽음을 부추기는 어둠의 세력이 있어 순진한 사람들을 꼬드겨 분신하게 만들고 그 유서를 대신 써주었다는 것이다. 분신을 한 사람은 자기 유서조차 쓰지 못하는 멍청한 사람이고, 배후에는 운동권의 이익을 위해 동료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음습한 세력이 있다는 이야기다. 이런 황당한 주장을 만들어낸 주역들은 민주화 이후 한발 뒤로 물러선 안기부가 아니라 그 공백을 메우고 앞으로 나선 검찰이었다. 김귀정이 죽은 다음날 법무부장관에 임명된 김기춘은 유서대필을 무기로 수구세력의 위기 돌파에서 야전사령관 역할을 수행했다.

1991년 유서대필사건을 기획하고 조작한 세력들은 20년 뒤 2012년 대통령선거에서 박근혜캠프의 법률지원단으로 뭉치게 된다. 1991년의 그 뜨거웠던 여름은 국무총리로 지명된 정원식(鄭元植, 문교부장관으로 1989년 전교조 대량해직 사태를 주도)이 한국외대 교육대학원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밀가루와 계란을 뒤집어쓰는 ‘몸빵’으로 허망하게 끝이 나버렸다. 참으로 절절하게 분노했지만 청년학생과 민족민주운동진영은 참담하게 패배했다. 패배한 대중, 슬퍼하는 대중은 거리에서 사라져 어디로 스며들었을까?

 

 

민주적 정권교체와 월드컵: 화염병에서 촛불로

 

1997년 말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느닷없이 외환위기가 한국사회를 덮쳤다. 멀쩡한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길바닥에 나앉는 일이 부지기수였고, 소주 한병 차고 뒷산에 올라가 쓸쓸히 생을 마감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199712월 대선에서는 민주당의 김대중 후보가 한나라당의 이회창(李會昌) 후보에게 근소한 차이로 승리했다. 나라를 망쳐먹은 집단에게 또다시 정권을 맡길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적 정권교체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을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7년 전 3당 합당으로 민주화운동세력은 반토막이 나버렸다. 나라가 망했다고 자연히 정권이 교체될 상황이 아니었다. 김대중이 대통령병 환자라는 욕을 무릅쓰고 DJP연합을 통해 5·16군사반란의 주모자 김종필과 손잡지 않았다면 선거 승리는 불가능했다. 더 나아가 이인제가 대부분 보수진영으로 갔을 5백만표를 가져가지 않았다면 외환위기와 DJP연합에도 불구하고 민주진영은 큰 표차로 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김영삼의 아들 김현철(金賢哲)의 비리와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비리 등이 겹쳐져서 겨우 39만여표 차이로 승리한 것이다. 그만큼 민주진영의 힘이 약했고, 어찌 보면 민주세력의 힘이 반토막 난 지 7년 만에 이뤄낸 정권교체를 기적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김대중정권은 6·15정상회담의 실현과 민주정권의 재창출이라는 큰 업적을 남기기도 했지만 너무나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 정권교체 자체가 목표가 아니었다면, 권력을 잡았으면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냈어야 할 것 아닌가. 당시의 시대적 과제는 재벌해체였다. 국민들이 달러를 펑펑 써서 외환위기가 온 것이 아니었다. 재벌들의 무분별한 외자 도입과 방만한 경영, 그 재벌들을 비호한 관료들에 대한 근본적인 대수술이 필요했다. 재벌조차도 지은 죄가 워낙 커서인지 찍소리도 못 내는 형국이었다. 박근혜-최순실게이트 이전에 재벌해체를 주장했다면 ‘종북좌빨’로 낙인찍혔겠지만, 1998년 초반 한국경제가 살길은 재벌해체라고 강력하게 부르짖은 것은 국제 금융자본의 대리인 IMF(국제통화기금)였다. IMF 하면 쉽게 떠올리는 정리해고나 노동유연성은 재벌해체보다 한참 뒤에 나오는 얘기였다. 그런데 빨리 외환위기를 벗어나야 한다는 지나친 강박관념이 작용했다.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국민들이 금을 모으는 것은 아름다운 일일 수 있으나, 왜 그 금을 공적자금이라는 이름으로 재벌들에게 주어버려야 했던가. 타이밍을 놓치니 재벌해체라는 말이 쏙 들어가고 재벌구조조정이나 재벌개혁이라는 말이 왔다 갔다 하더니 그마저 재벌이라는 표현은 사라지고 경제개혁으로, 경제민주화로 변해갔다. 박근혜가 선거과정에서 잘 써먹은 경제민주화는 당선 얼마 후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개혁 대상이던 재벌과 관료들은 신자유주의 ‘개혁’의 전도사가 되었고, 급기야 2015년에는 재벌들이 노동개혁을 부르짖는 상황이 도래했다. 이것은 오래된 얘기가 아니다. 한국사회가 재벌해체의, 아니 해체까지는 아니더라도 재벌개혁의 절호의 기회를 날리고 18년 지난 뒤 대한민국은 재벌이 우리들을 개혁하겠다는 재벌공화국이 되어버렸다. 축구에서도 노마크 찬스를 놓치면 꼭 역습을 당하듯이 역사에서도 갑자기 찾아오는 찬스를 살리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외환위기 때 한국경제의 고질병을 치료할 좋은 기회를 놓쳐버렸지만, 겉으로 보기에 회복은 생각보다 빨랐다. 그리고 2002년 한국은 월드컵을 맞이하게 되었다. 외환위기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지는 좌절감과 절망감에 사로잡혔던 국민들은 우리 축구팀이 거둔 성적을 대한민국의 자부심으로 받아들였다. 월드컵 4강의 신화는 한국인들의 국가에 대한 자존심을 한껏 끌어올렸고, 그 부산물로 우리는 광장을 얻었다. 광화문과 시청 앞 광장이라는, 늘 옆으로 지나가기만 하고 어쩌다 데모나 하려 멈춰 섰던 공간이 엉덩이 붙이고 퍼질러 앉을 수 있는 우리 것이구나 하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미선이 효순이 두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치여 세상을 뜬 불행한 사건이 일어난 것은 온 국민이 월드컵 열기에 흠뻑 취해 있던 바로 그때였다. 사람들은 이 불행한 사건이 그래도 제대로 처리될 것이라 기대했건만, 당시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생소했던 SOFA(한미주둔군지위협정)에 따라 미군 측이 형사재판 관할권을 행사했다. 그리고 모두 미군 현역군인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은 사고를 낸 장갑차 운전병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뒤늦게 이 소식을 알게 된 국민들은 분노했다. 한국 법원이 이들을 재판할 권리도 없단 말인가. 사고를 낸 미군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다면 죽은 아이들 잘못이라는 말인가. 분노한 시민들은 누군가의 제안에 따라 미선이 효순이 추모의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이기 시작했다. 지난 수십년간 한국사회에서 한줌밖에 안 되는 사람들만 관심을 갖던 SOFA 문제, 미군을 제대로 조사하지도 재판하지도 못하는 현실이 새삼 주목받기 시작했다. 더구나 월드컵 4강 신화로 민족적 자부심이 한껏 치솟았던 상태였기에 시민들은 한미관계의 이런 불평등과 불합리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10만 인파가 촛불을 들고 시청 앞 광장에 모여들었다. 미선이 효순이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한마음이었지만,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오만한 미국을, 오만한 미국에 아무런 대응도 못하는 한국정부를 바라보는 시각이 꼭 한결같은 것은 아니었다. 광장에서는 1980년 광주항쟁 이후 20년 넘게 ‘반미’를 외쳐온 운동권들과 이제 막 한미관계에 대한 문제를 느끼기 시작한 일반 시민들 사이에 미묘한 갈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것이 운동권에 대한 수구언론의 수십년에 걸친 모략 때문이든, 운동권의 경직성이나 대중보다 우월한 지위에서 가르치려는 태도에 대한 반감 때문이든 일반 시민들은 똑같은 구호를 외치면서도 자신들은 ‘반미’가 아니라 ‘미국 반대’나 ‘안티 USA’라고 굳이 주장했다. 여기서 ‘반미’가 ‘미국 반대’나 ‘안티 USA’와 어떻게 다르냐고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일반 시민들은 광장에서 같이하면서도 섞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 미묘한 갈등은 2008년 촛불에서는 좀더 심각한 상태로 드러나게 된다. 아무튼 반미든 미국 반대든 미선이 효순이를 추모하는 촛불이 이후 박빙의 승부였던 16대 대선 결과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음은 분명하다.

 

 

탄핵의 광장과 촛불: 경건함에서 축제로

 

대중이 또다시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뛰쳐나온 것은 2004312일 국회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을 통과시키면서다. 수구세력 입장에서 볼 때 김대중은 그렇다 치더라도 노무현에게 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정부수립 후 50년 가까이 권력을 독점해온 수구세력은 나라도 망친 마당에 김종필과 손잡은 김대중에게 5년쯤 권력을 넘겨주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2002년 대통령선거에서는 잠시 넘겨주었던 권력을 되찾아온다고 생각했는데, 게다가 선거 전날 노무현과 정몽준(鄭夢準)의 단일화가 깨져 미리 축배까지 마셨는데, 그만 져버렸다. 참으로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노무현이 취임도 하기 전부터 탄핵 이야기가 나오더니, 16대 국회가 문 닫기 직전 진짜 탄핵을 해버렸다.

탄핵안을 통과시킨 한나라당 의원들은 갑신정변(2004년이 갑신년이었다)에 성공했다고 희희낙락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사흘 천하라도 누렸지만 탄핵은 하루 만에 판이 뒤집혀버렸다. 흥분한 대중은 밤늦도록 국회를 에워쌌다가 다음날 광화문에서 만나자 하고 슬픔과 분노로 몸을 떨며 귀가했다. 나도 밤늦게까지 격문 비슷한 글을 쓰고, 또다른 매체에 다음날 격문 하나를 더 쓰고 조금 늦게 광화문으로 나갔다. 버스에서 내리기 직전까지는 의병전쟁 나가는 비장한 심정이었지만, 정류장에 발을 내딛는 순간 확 느낌이 왔다. 광장에 울려 퍼지는 음악은 비장한 운동가요가 아니라 경쾌한 “브라보 브라보 아빠의 청춘” 같은 유행가였고, 눈에 띈 몸자보는 “나 이회창 찍었었다고!”였다. 대중은 이미 여유를 되찾은 것이다. 17대 총선이 한달밖에 남지 않았으니 차라리 수구세력을 싹 정리할 좋은 기회를 맞게 됐다고 생각한 것이다.

선거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정동영(鄭東泳) 의장이 말실수를 해서 많이 까먹었다고 하지만, 시민들은 선출되는 권력을 민주개혁진영에 다 몰아주며 한국 현대정치사 백년에 다시 보기 힘들 만큼 좋은 구도를 만들어주었다. 열린우리당은 민주화 이후 최초로 여소야대를 깨고 단독 과반수를 확보했고, 민주노동당은 10석을 얻어 일약 원내 제3당으로 뛰어올랐다. 대통령도 탄핵에서 구해내고 새로운 국회까지 잘 만들어주었으니 광장에 나와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이 정치권에 무엇을 더 해줄 수 있었을까? 그러나 민변 출신 대통령에, 국정원장에, 법무장관에, 원내대표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감옥 갔다 온 국회의원도 수십명이 되는 상황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은 국가보안법 하나를 폐지하지 못했다. 결과는 복잡하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이 ‘칼집에 넣어 박물관으로 보내겠다’던 바로 그 국가보안법으로 딱 10년 뒤인 2014년 수구세력은 원내 제3당인 통합진보당을 해산시켜버렸다. 역사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잃어버린 찬스는 잔인한 역습을 불러오는 법이다.

 

 

광우병: 축제, 빼앗긴 축제

 

개혁 한번 제대로 해보라고 대통령도 뽑아주고 새 국회도 만들어주었건만 국가보안법 하나를 폐지하지 못하니 결국 수구세력이 얕잡아보게 되고 정권마저 내주게 되었다. 진보-보수 간에 정권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차라리 정상적인 상황이라며 애써 위안도 해보았지만, 이명박정권은 초기부터 민주주의와는 역방향으로 쾌속질주를 시작했다. 취임 직후 미국을 방문한 이명박이 광우병의 위험에서 안전하다고 할 수 없는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덜컥 약속해버린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처음 촛불을 들기 시작한 것은 여중생들이었다. 이들은 내 입으로 들어갈 소고기를 미국산이 싸고 맛있다며 제멋대로 정해버린 이명박을 독재정권이라 규탄했다. 정권이나 기성 운동권이나 하루이틀 저러다 말겠지 했던 촛불은 연일 꺼지지 않았고, 촛불의 현장이 너무너무 재미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어른들도 아이들 장난이라 여겼던 촛불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현장에 나가보니 무대가 따로 없었고 중심이 따로 없었다. 오십명 백명이 모여 자기들끼리 얘기하고, 깔깔대고, 자기들끼리 집회를 벌여나갔다. 재미없으면 마이크를 놓아야 하는 분위기였다. 누구의 말이 가장 재미없었을까? 공부 열심히 한 운동권의 말이 솔직히 제일 재미없었다. 뻔했다. 다섯마디 이내에 자본주의 모순이 나오고 세마디쯤 뒤에는 신자유주의의 폐해가 나오는 판에 박힌 이야기를 그것도 가르치려는 태도로 거품을 무니 재미있어서 광장에 나온 대중이 참고 들을 리 없었다. 똑같은 이야기를 해도 대중은 다른 방식으로 풀었다.

이명박 등 수구세력은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 것들이 뭘 안다고 시위냐’며 학생들에게 눈을 부라렸다. 중국출장을 갔다 온 이명박이 공항에서 청와대로 가는 길에 동승한 경찰청장이 촛불 상황에 대해 보고하자 “그런 건 나도 알고 있어”라며 “누가 배후야? 누가 사주했어? 촛불 값 댄 게 누구야?”라고 다그쳤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그것이 그들의 세계관이었다. 어린 학생이, 못 배우고 무식한 노동자들이 스스로 나서서 자기주장을 편다는 것은 그들이 보기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누가 사주했느냐는 말에 학생들이 들고 나온 구호가 “사주가 아니라 자발성이다!” “내 배후는 내 등 뒤에 앉은 사람이다”였다. 이명박정권은 어린 학생들이 촛불을 든 것에 대해 새빨간 전교조 선생들이 새빨간 역사교과서로 애들을 버려놔서 그렇다고 단순화했다. 진단이 저렇게 나오면 대책은 뻔하다. 새빨간 교사들을 단속하기 위해 전교조 탄압방안을 수립했고, 새빨간 교과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역사교과서를 못살게 굴다 굴다 급기야 박근혜정부에 와서는 국정교과서라는 쓰레기를 만들어냈다.

광장은 즐겁고 유쾌한 공간이었다. 백가쟁명 백화제방의 새로운 시위문화가 곳곳에서 선보였다. 처음에는 다 차려놓은 밥상에 뒤늦게 숟가락 들고 나타난 운동권에 대한 거부감에서 깃발 내리라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대중은 곧 깃발의 효용성을 떠올리며 스스로 만든 깃발을 들고 나오기 시작했다. 운동권 모임보다 82쿡 같은 생활 커뮤니티가 가장 민감한 논쟁이 벌어지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광장은 젊은 부모들이 아이들을 유모차에 태워 나올 정도로 평화롭고 즐거운 곳이었다. 안타깝게도 이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정권이 광화문에 높이 쌓은 ‘명박산성’은 불통의 상징이었지만, 촛불과 광장을 향한 저들의 대응은 불통과 차단에서 멈추지 않았다. 여대생을 군홧발로 짓밟거나, 경찰의 폭력에 맞서 비폭력 평화행동으로 시민들을 보호하겠다는 ‘눕자행동단’을 경찰이 짓밟는 등, 광장은 더이상 평화롭고 안전한 곳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저들은 서울시청 앞 시민광장에 버스로 빙 둘러 차벽을 쌓았다. 시민들은 넉달 가까이 촛불을 들었지만, 출구를 찾을 수 없었다. 대의제 민주주의 국가에서 선거를 치러버린 직후 직접민주주의의 한계가 속수무책으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다들 쓸쓸히 흩어져버렸다. 우리는 답을 찾지 못했다.

민주주의의 후퇴는 걷잡을 수 없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 상황을 민주주의의 위기, 남북관계의 위기, 서민경제의 위기라고 명쾌하게 규정했다. 20091월의 용산참사는 현실이 우리가 머릿속으로 생각한 것보다 더 참혹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생때같은 목숨 여섯이 불에 타 숨졌는데 광우병 때 70만이 모였던 광장에는 3천명 남짓 모였을 뿐이다. 용산참사가 경찰청장을 경질한 직후에 일어났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전임 총장 어청수(魚淸秀)는 명박산성을 쌓고 물대포를 쏘아 촛불시민들 사이에 원성이 자자했던 인물이다. 시민들 입장에서는 촛불을 꺼트린 ‘일등공신’이었던 어청수가 임기를 1년이나 남겨놓은 상태에서 갑자기 경질된 것이다. 이명박은 촛불진화의 공보다는 초기대응 실패의 책임을 중하게 물었다. 최고권력자의 이런 마음이 후임 청장 김석기(金碩基)에게 주는 메시지는 분명했고, 이것이 용산참사를 낳은 것이다. 용산참사가 벌어진 지 채 한달이 안 된 216일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이 별세했고, 또 백일이 안 되어 523일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라는 비보가 전해졌다. 촛불이 광화문을 덮기 시작한 지 딱 일년이 지난 무렵이었다. 대한문 귀퉁이에 초라한 빈소를 차렸을 뿐, 우리는 광장을 완벽하게 빼앗겼다. 촛불 일년, 도대체 무엇이 달라졌던가? 그 악랄한 일제는 3·1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했지만 무단통치를 문화정치로 바꾸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창간을 허용하는 등, 3·1운동으로 분출한 대중의 민심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런데 이명박정권은 비유하자면 문화정치에서 무단통치로 후퇴했을 뿐,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고종황제가 돌아가셨을 때 일제도 조선 백성들이 슬피 우는 것을 막지 않았던 광장에는 이제 우리 마음을 짓밟는 차벽이 쳐져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국장을 생중계하는 노란 TV화면 위로 “대법원, 삼성 경영권 승계 무죄”라는 뉴스 속보만 지나갔다. 딱 하루 국장이 있던 날, 잠시 열렸던 광장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다시 닫혀버렸다. 또 백일이 안 되어 김대중 대통령마저 세상을 떴다.

 

 

국정원 부정선거와 세월호

 

2012년 대통령선거는 박근혜의 당선으로 끝이 났다. 선거과정에서 국정원의 댓글시비가 거세게 일었고, 선거 직후에도 부정개표 의혹이 강력히 제기되었다. 2002년 대선 직후 한나라당이 전자개표 부정의혹설과 관련하여 당선무효 소송을 제기한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재인(文在寅) 후보와 민주당은 “대선불복이냐” 한마디에 움찔하여 입을 다물어버렸다. 당사자가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벗어나지 못하고 가만있는데 부정선거 진상규명운동이 힘을 받을 리가 없었다. 박근혜는 부정선거로 당선되었고 문재인은 부정선거 때문에 패배했다는 주장을 펴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대한민국이 계속 똑같은 방식으로 대통령선거를 치른다는 점이다. 전자개표를 둘러싼 부정개표 의혹은 또다시 제기될 가능성이 높은 사안이다. 투표현장 수개표 등 좋은 정책 대안도 많이 나와 있지만, 문재인 후보와 민주당은 대권 재도전 의지가 있는 후보와 공당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이 문제를 등한시했다.

부정선거 시비만이 아니었다. 선거과정에서도 야당과 진보언론은 박근혜 후보에 대한 검증에 완전히 실패했다. 수구세력은 2007년 한나라당 내부 경선 과정에서 박근혜와 최태민 일가의 관계에 대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확보했음에도, 박근혜가 자기 세력의 후보로 확정되자 입을 다물어버렸다. 진보진영은 박근혜가 정치에 입문하기 전에 공적인 역할을 맡은 것이 영남대, 육영재단, 정수장학회의 이사장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자리에 앉아 있을 때 박근혜가 최태민 일가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파헤치려 하지 않았다. 과거사 문제는 5·16이나 인혁당사건 등에 대한 박근혜 후보의 인식을 묻는 질문 정도에 그쳤을 뿐이다. 과거사 문제를 거론하는 것 자체를 네거티브 공세로 생각하도록 만든 수구세력의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한 채, 진보언론도 최태민과 관련된 문제는 가십 정도로 여겨 잘 다루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박근혜는 박정희의 딸이다. 박정희는 민주주의를 파괴한 악랄한 독재자이기는 했으나 그 자신은 무능의 화신으로 취급될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보수건 진보건 박근혜에 대해서는 박정희의 딸이니까 기본이야 어련히 되어 있겠지 하는 분위기가 널리 퍼져 있었고, 이 때문에 검증이 철저하게 진행되지 못했다고도 할 수 있다.

박근혜정권에서 진행된 민주주의의 후퇴와 파괴는 이명박정권 때보다 훨씬 더 심했다. 야당은 이에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고, 국민들은 막무가내 집권세력을 견제하는 데 너무도 무기력한 야당의 모습에 좌절했다. 도대체 야당은 왜 저 지경으로 무기력해진 것일까? 우리가 너무나 자주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와야 했던 이유도 야당이 제 역할을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야당 야당 하지만 지금 야당의 구성원 상당수는 민주당이나 열린우리당이 여당이던 시절 정치에 입문한 사람들이다. 지역주의는 중앙에서는 야당이지만 동네에서는 체질적으로 여당인 사람들만 판치게 만들었다. 그러다보니 야당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이가 태반이었다. 돌이켜보면 유신 말기의 신민당은 달랐다. 당시 야당에는 유신정권에 대항할 생각조차 않는 ‘사쿠라’ 지도부를 향해 ‘야당성 회복’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나중에 집권여당이 된 뒤 새로 영입된 전문가들이 이들을 ‘난닝구’라고 조롱하기는 했어도, 이들에게는 평생 야당생활을 한 사람들로서의 ‘곤조’가 충만했다. 촛불시위가 이어지면서 중앙무대에서 한번도 활약한 적 없는 이재명(李在明) 성남시장이 갑자기 열광적인 지지를 받게 된 것도 무기력한 야당에 실망한 사람들에게 싸움꾼다운 그의 기질이 ‘사이다’로 비쳤기 때문일 것이다.

민주정권 10년을 거치면서 무기력해진 것은 야당만이 아니었다. 시민운동의 상당부분은 정부에서 나오는 용역이나 지원금을 받아 이를 집행하는 데 길들여지면서 자생력을 상실해갔다. 이제 정부지원금이 끊기면 어떤 활동을 하기도 어려운 처지에 놓인 단체가 한둘이 아니다. 6·15정상회담 이후 남북교류에 주력한 통일운동진영은 정권이 바뀌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통일운동이 얼마나 지리멸렬해졌으면 통일이라는 구호마저 박근혜에게 빼앗겨 박근혜와 수구세력의 입에서 “통일은 대박”(2014년 신년기자회견)이라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을까.

세월호사건이 터진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세월호사건은 처음에는 모든 국민을 지울 수 없는 슬픔에 빠트린 비극이었다. 그 슬픔을 함께하는 데에는 진보 보수가 따로 없었고, 조중동 같은 보수언론도 다같이 울었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이 도대체 이 엄청난 국가재난 상황에서 무엇을 했는가가 쟁점이 되기 시작하면서 언론의 태도가 바뀌었다. 아직도 세월호냐, 지겹지도 않냐, 놀러 가다 죽은 것에 왜 나라가 책임져야 하느냐, 부모들이 보상금 더 받아내려는 거 아니냐 등등 언제 우리가 슬픔을 함께 나누었느냐는 듯 입에 담기 힘든 말들이 난무했다. 특히 201477일 국회운영위에서 뜻밖에도 김기춘 비서실장의 입을 통해 박근혜의 7시간 문제가 부각되자 수구세력은 사활적 이해를 가지고 방어막을 치기 시작했다.

세월호사건에 대해 정말 책임져야 할 사람은 박근혜였지만, 박근혜는 국무총리를 바꾸는 것으로 민심을 달래려 했다. 그러나 그가 후보로 내세운 안대희(安大熙), 문창극(文昌克) 등은 오히려 성난 민심에 기름을 부었다. 세월호사건과 연이은 인사 참사가 벌어진 상황에서 73015개 지역에서 재보선이 거행되었다. 114로 이겨도 시원찮을 상황에서 야당은 411로 참패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박근혜정권 심판을 내세웠지만, 표를 쥔 시민들은 말로만 심판을 내세운 야당을 먼저 심판해버린 것이다. 혹독한 심판을 받고도 야당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재보선 참패로 야당의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은 박영선(朴映宣)이 청와대가 세월호특별법과 관련해 완강한 입장을 고수하자, 덜컥 수사권도 기소권도 없는 특별법을 받아들인 것이다. 전례가 없었다고? 수사권과 기소권을 가진 특별검찰부만이 아니라 재판권까지 가진 특별재판부가 설치된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1948~49년)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구였단 말인가? 수만명의 대중이 뜨거운 햇볕 아래 광화문과 시민광장에 모였지만 분노를 안으로 삭여야 했을 뿐, 눈에 보이는 변화를 끌어내지 못했다. 그나마 서울시장이 바뀌었기에 광장에 천막이라도 칠 수 있다고 씁쓸한 위안을 했을 뿐이다.

2016년 초겨울 시민들이 광장으로 뛰쳐나오며 절박하게 외친 구호는 “이게 나라냐!”였다. 사실 이 구호는 단지 최순실이 사용했다는 태블릿PC를 보고 갑자기 튀어나온 것은 아니다. 시민들은 2년 반 전 세월호사건 때부터 엄청난 충격과 고통 속에 “국가란 무엇이냐?”라는 진지한 질문을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던져왔다. 1980년 광주 이후 민주화운동을 이끌어온 동력이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었다면, 세월호사건은 1980년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공유한 슬픔의 공동체를 만들어주었다. 1980년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공유한 자들은 운동권이었고 광주의 자식들이었다. 세월호사건은 생때같은 아이들이 전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어간 비극이었다. 우리가 세금을 꼬박꼬박 내는, 60만 대군을 보유하고 있다는, 세계에서 배를 제일 잘 만든다는 대한민국은 왜 세월호의 유리창 한장을 깨지 못했고, 단 한명의 아이도 구해낼 수 없었을까. 이 단순한 질문은 2년 반 동안 답을 얻지 못한 채 시민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시민들은 박근혜-최순실게이트를 통해 그 답을 구한 것이다. 수구공안세력이 수십년간 한국사회를 지배할 수 있었던 비결의 하나는 우리 국민이 ‘망각’이라는 고질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현대사는 너무도 고통스러운 역사였다. 정의는 실현되지 않고, 가해자는 권세를 누리고, 피해자는 또다른 피해를 입을까 전전긍긍해야 하는 현실에서 ‘망각’이라도 하지 않고 어찌 살 수 있었을까. 그러나 죽어가는 아이들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했던 세월호사건은 ‘망각’이 통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잊을 수도 포기할 수도 없는 슬픔과 분노의 공동체에서 스스로 빠져나가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2016년, 다시 온 기회

 

역사의 전환기라는 말이 실감나는 시절이다. 시민들이 온몸으로 역사를 썼다. 지난 몇번의 주말, 광장에 나와 촛불을 들고 파도타기를 하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을 했다는 사실이 역사를 바꿔놓았다. 이런 승리는 6월항쟁 때도 맛보지 못한 것으로, 19604월혁명 이후 처음이 아닌가. 우리가 참 대단한 일을 한 것이다. 지난가을만 해도 한국은 샤머니즘 국가라느니, 비아그라의 연관검색어에 Korean President가 자동생성 되었다느니, 낯 뜨거운 소식에 다들 몸 둘 바를 몰라 했지만, 지금 세계는 우리가 이룬 성취를 감탄과 경의와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지금은 우리가 거둔 성과에 도취해 있지만 몇주 전만 해도 “이렇게 촛불을 들면 세상이 조금이라도 바뀔까” “이렇게 몇주 동안 촛불을 들었는데도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어”라고 탄식하는 소리를 주위에서 쉽게 들을 수 있었다. 사실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고 추운 법이다. 우리가 세상이 안 바뀐다고 지겨워하고 힘들어하던 그 순간은 이 땅의 수구세력들 입장에서 볼 때 세상이 너무 빨리 걷잡을 수 없이 바뀌어 두려움에 떨어야 했던 시간이었다. 거기서 누가 조금만 더 버티느냐가 역사의 전환기에 승패를 가름하곤 했다.

우리 손으로 만든 성과를 폄하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도 한번 냉정하고 솔직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최순실과 고영태·이성한 등의 갈등이 없었다면 우리가 탄핵소추를 실현시킬 수 있었을까? 역사가 크게 요동친 시기를 들여다보면 역사를 바꾸는 힘은 꼭 주체적 역량의 강화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상대편의 자살골이나 결정적인 패스미스가 경기의 흐름을 확 바꾸는 것처럼, 역사에서도 기득권 세력의 이해할 수 없는 자살골이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곤 한다. 1960411일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떠오른 김주열()의 참혹한 시신이 4월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것만큼은 아닐지라도, 19875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축소은폐 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것만큼은 아닐지라도, 새누리당 의원 김진태(金鎭台)가 “촛불은 촛불일 뿐 바람이 불면 꺼지게 돼 있다”라고 한 ‘명언’에 분개해 나온 시민이 수십만은 족히 되지 않았을까.

현명한 대중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며, 마냥 들떠 있지만은 않다. 지난 수십년의 현대사에서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가 그 성과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날려버린 여러번의 안타까운 사례에서 교훈을 얻은 탓이리라. 역사의 반동은 우리가 거둔 성과가 내부의 수구세력이나 외세에 의해 허무하게 사라질 때 대규모로 발생하곤 했다. 나라를 빼앗길 무렵 친일파의 상징이었던 일진회의 회원들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다수는 과거 동학농민전쟁에서 한몫했거나, 독립협회에서 중견간부 또는 열성적인 회원으로 활동했던 사람들이었다. 지금 이 기회를 놓쳐버리면 한국에서도 트럼프, 아니 히틀러 같은 자가 선거를 통해 집권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너무 들떠 있어도 안 되지만 너무 조급해서도 안 된다. 이 위대한 기쁨과 감격이 우리의 가슴속에서 얼마나 갈까? 무엇이 조금만 잘못돼도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저놈들은 어쩔 수 없어” 등등의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역사는 결코 만만하지 않다. 역사의 대부분 시기는 잘해야 정체이고, 웬만하면 퇴보의 시간이었다. 역사는 낮은 포복으로 꾸준히 발전한 것도 아니고 뚜벅뚜벅 꾸준히 나아간 것도 아니다. 드물게 찾아온 진보의 시기에 열발짝 스무발짝을 내디뎌야 역사는 아홉발짝, 열아홉발짝의 퇴보를 이겨내며 조금씩 나아가는 것이다.

1945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식민지지배를 벗어난 여러 국가 중에서 한국만큼 빠르게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이룩한 나라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렇게 놀라운 역사발전을 이뤘는데 우리 젊은이들은 왜 지금 헬조선에서 흙수저 신세로 살고 있을까.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가 좋은 기회를 지난 30년 동안에 세번이나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19876월항쟁, 1997년 외환위기와 정권교체, 2004년 탄핵에 이어 30년 안에 네번째 기회를 맞이했다. 역사에서 30년이라면 그리 길지 않은 기간이다. 30년 안에 결정적 기회가 네번이나 있었다면, 역사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더디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요동쳐왔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역사에서 놓친 기회가 이것뿐만은 아니다. 해방 직후 친일세력의 청산에 실패할 것이라고 어느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바람은 어디로 불 것인가?

 

우리는 봉건시대에서 근대로 넘어갈 때 왕의 목을 쳐보지 못했다. 해방 이후 수없이 찾아온 이행기에 제대로 과거를 청산해본 적도 없다. 그러다보니, 박근혜도 즐겨 쓴 표현이지만, 수십년간 쌓인 ‘적폐’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을 한방에 날려버릴 화끈한 해결책은 없을까? 역사는 그런 헛된 기대를 버리라고 가르친다. 여러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없다면, 그 우선순위를 정하는 일이 정말로 긴요하다 할 것이다. 쉽게 얘기해서 재벌개혁, 국정원개혁, 언론개혁, 검찰개혁, 사법개혁, 교육개혁, 경제개혁, 국방개혁 등등 수많은 과제 중 차기 정권에서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현명하게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있는 대로 욕을 먹다가 이번 ‘촛불혁명’을 가져오는 데서 나름 두드러진 역할을 한 분야로 검찰과 언론을 꼽을 수 있다. 검찰은 가히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에 내보내도 될 만큼 다른 모습을 보였다. 오죽하면 법무부장관과 청와대 민정수석이 사표를 제출했을까. 특검은 삼성전자 이재용(李在鎔)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고, 법원이 이를 기각하자 시민들은 ‘특검 힘내라’라는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검찰은 매번 정권 말기가 되면 하이에나처럼 늙은 사자를 물어뜯긴 했지만 이번엔 차원이 다르다. 검찰 출신 김기춘과 우병우(禹柄宇)가 국정농단의 주역으로 떠오르는 등 이번 상황은 검찰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고 할 수 있다. 검찰총장과 법무부장관을 모두 지낸 김기춘은 분명 검찰의 최고 원로였으며, 우병우는 검찰의 최고 실력자였다. 검찰은, 아니 검찰이 중심적 역할을 하는 한국의 수구공안세력은 박근혜, 김기춘, 우병우 등을 제물로 바치는 대신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칠 것이다. 특검을 포함한 검찰집단이 이렇게 달라졌으니 검찰개혁은 미루어도 될 과제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지금의 검찰의 모습에 속아서는 안 된다. 검찰개혁이야말로 다방면에 걸친 모든 개혁의 얽히고설킨 난제를 해결하는 핵심고리이다. 검찰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다.

요즘처럼 시민들이 신문기사며 TV 뉴스를 빼놓지 않고 찾아본 적이 또 있을까. 오늘의 촛불시위를 가져온 일등공신으로 언론, 특히 태블릿PC 공개 등 연달아 특종을 터뜨린 JTBC와, 일반인들이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던 미르재단이나 K-스포츠재단 문제를 초기에 끈질기게 파헤쳤던 한겨레, 취재력 하나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TV조선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언론이 잘했기 때문에 언론개혁의 과제를 미뤄도 될까? 몇몇 언론이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지만 KBS, MBC 등 지상파는 존재감을 완전히 상실했다. 세월호사건 당시 ‘기레기’라는 충격적인 말들이 나오더니, 이번 박근혜-최순실게이트에서는 ‘최순실 언론부역자’라는 참담한 신조어가 또다시 나돌고 있다. 언론개혁은 대통령이나 새 정권보다는 언론의 자정작용과 시민사회의 노력에 의해 수행되어야겠지만, 어떻든 언론이 제 역할을 하는 것은 한국사회에 민주주의가 정착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이번 박근혜-최순실게이트만 하더라도 한국의 주류언론은 1988년 영남대 분규와 정수장학회-부산일보 분규, 1990년 육영재단 분규, 그리고 2007년 여름 한나라당 당내 경선 과정에서 나온, 지금 JTBC 등이 특종이라고 내놓은 내용의 대부분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 언론이 진영논리에 빠져 2012년 대선 당시 검증을 포기한 것이 오늘의 박근혜-최순실게이트를 가져온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우리가 수없이 촛불을 들고 길바닥에 나와야 했던 주된 원인은 민주주의의 운영에서 가장 현실적인 방식이라는 대의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촛불이 꺼진 것도 역설적으로 대의제도나 선거에 대한 기대 때문인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예로 2004년 탄핵 당시 시민들은 민의를 배반한 국회의 오만을 응징하러 거리로 뛰쳐나왔지만, 탄핵 한달 후 17대 총선에서 새로운 국회를 만들어준 뒤 광장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버렸다. 1987년의 6월항쟁은 직선제에 대한 기대감으로, 2002년의 촛불은 바로 뒤의 대통령선거에서 “반미감정 좀 가지면 어때”라고 말하는 후보의 당선으로 꺼져버렸다. 2004년의 촛불은 국가보안법 폐지 하나 끌어내지 못했다. 대중이 가장 오래 버텼던 2008년의 광우병 촛불은 대통령선거와 총선거를 모두 치른 직후에 켜졌기 때문에 별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대의제가 작동되지 않아 촛불을 켰지만, 대의제를 믿고 촛불을 껐다가 배신을 당했던 것이다.

2016년의 촛불은 달랐다. 불가능해 보였던 탄핵소추를 실현해 대의제의 오작동을 바로잡은 것이다. 처음 박근혜-최순실게이트가 터졌을 때 이는 당연히 탄핵 사유였지만, 새누리당이 여전히 원내 제1당인 구도하에서 국회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하는 탄핵소추를 기대하기란 어려웠다. 이것을 뒤집은 것이 촛불이었다. 대의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은 한국뿐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한 모든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다. 다만 분단과 지역주의의 영향으로 계급정치가 사라져버린 한국에서는 인구분포나 민심과 국회의원의 성향 사이에 너무나 심각한 괴리가 발생해왔다. 단 한번뿐이지만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정말 보기 드물게 민심이 국회를 바로잡았다. 앞으로도 국회가 계속 그럴 것인가? 아마도 아닐 것이라 믿는 사람이 훨씬 많다고 본다. 피곤하지만 우리가 촛불을 끌 수 없는 이유다.

민중이라 부르든 시민이라 부르든 광화문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파란만장한 격동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어왔다. 십대 이십대뿐 아니라 초등학생과 유치원생들까지 다수 촛불집회에 나오는 것을 보면 한국의 민주개혁진영이 한 30년 장기집권을 하며 차근차근 개혁과제를 밟아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성급한 기대도 해보게 된다. 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박근혜, 최순실, 김기춘, 우병우 등 친일과 반공을 내세운(최태민도 일제 순사 출신으로 반공을 내세우며 권세를 떨쳤다) 수구공안세력을 대신해 민주주의 원칙과 룰을 지키는 합리적인 보수세력이 등장하는 계기는 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역사의 전환기에 단 한번도 낡은 세력을 청산하지 못했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성장하려면 이번 기회에 낡은 세력을 정리하고 이행기의 정의를 세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사업과 같이 수구공안세력의 계보도, 분포도를 정확히 그려내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올해 대통령선거에서 민주개혁진영은 승리할 수 있을까? 대선에서 승리한다 해도 과연 우리가 산적한 과제를 잘 해결할 수 있을까? 1980년대 청년학생들은 민주화만 되면 전부는 아니더라도 많은 문제가 해결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당시 민주진영에는 김대중, 노무현 같은 걸출한 정치인들이 있었고, 또 이들이 연이어 10년을 집권했다. 그러나 냉정히 따져보자. 과연 우리가 무엇을 이룩하였으며, 민주화의 성과는 얼마나 공고했던가? 지금 우리에게는 김대중도 없고 노무현도 없다. 그리고 김대중 노무현이 집권했어도 개혁과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우리는 누구를 믿어야 할까? 세월호는 너무나 끔찍한 비극이었지만, 평범한 대한민국 국민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계기였다. 대한민국이 대통령이 다리 끊고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치는 나라, 선장이 아이들에겐 가만있어라 해놓고 저만 도망치는 나라였다면, 그리고 그 배의 항해사나 기관사가 김기춘, 우병우 같은 자들이었다면 대한민국호는 진작 전복됐어야 옳았다. 대한민국호가 비틀대면서도 침몰하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복원력을 우리는 세월호 안에서 볼 수 있었다. 아이들은 구명조끼가 모자라자 “내 거 입어” 하고 벗어주기도 했다. 물이 들어오는 화급한 순간에도 다섯살짜리 꼬마가 있는 것을 보고 “애부터 애부터” 해서 먼저 내보낸 것이 우리 아이들이었다. 선장이 도망친 마당에 “선원은 맨 마지막이야, 너희들 구하고 난 맨 나중에 나갈게”라는 의연한 태도를 보인 스물두살 박지영은 매점에서 물건 파는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오백명 가까운 승객 중 선생님이 15명이었으니 비율로 따지면 3퍼센트쯤 된다. 그런데 아직 우리 곁으로 돌아오지 못한 아홉분 중 두분이 선생님이다. 왜 선생님들이 탑승자로는 3퍼센트이지만 미수습자에서는 22퍼센트나 될까. 아이들을 찾아 제일 깊이 들어갔다 나오지 못한 것이다. 이 좋은 아이들과 선생님들이 우리 곁을 떠나간 것이 세월호사건이었다. 우리가 믿을 것은 우리 자신에 내재한 복원력밖에 없다. 촛불이 바로 대한민국호의 복원력이다. 촛불을 든 우리가 대한민국의 주권자이고, 대한민국의 역사를 온몸으로, 두 발로 쓰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오늘 보낸 하루가 내일의 역사일 뿐이다. 누구에게 맡길 수 없는 일, 아직 촛불을 꺼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