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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다음. 다음이라는 건 없다는 말

소설가 정미경 선배를 추모하며

 

 

정이현 鄭梨賢

소설가.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 『오늘의 거짓말』 『상냥한 폭력의 시대』, 장편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 『너는 모른다』 『사랑의 기초: 연인들』 『안녕, 내 모든 것』 등이 있음. deepoem@hanmail.net

 

 

이 글을 완성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내가 이 추모글에 적합한 필자가 아닌 이유는, 나는 아직 정미경(鄭美景, 1960~2017) 선배의 영면을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동료로서도 그렇고 독자로서도 그렇다. 아직은, 얼떨떨하기만 하다.

독자가 한 작가의 부재를 실감하는 순간은 언제일까. 아무리 기다려도 그의 새 소설이 발표되지 않을 때, 다시는 그의 신작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때일 것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그의 소설을 읽은 것은 지난여름이다. 아직 ‘오래’라고는 말할 수 없는 시간이다.

 

1

내가 아는 한 그는 지난 봄과 여름 두편의 단편을 발표했다. 『현대문학』 20165월호와 『창작과비평』 2016년 여름호에 각 한편씩이다. 『현대문학』에 실린 소설의 제목은 ‘못’이다. 바로 뒤에 내 소설도 실려 있다. 우리는 성이 같지만 ‘이’보다는 ‘미’가 앞이므로 그의 소설이 먼저였다. 책을 받고서 나는 「못」의 시작 페이지를 펼쳤다. 이런 경우 편집이나 인쇄상의 오류를 확인하기 위해 자신의 소설부터 빠르게 훑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는 것이다. 『프랑스식 세탁소』(창비 2013) 출간 이후 오랜만에 만나는 신작단편이라 더 반가웠다.

그의 단편에는 두 인물이 팽팽히 대립하는 서사가 많다. 「못」 역시 두 사람의 이야기다. 두개의 팽팽한 세계에 관한 이야기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실직 상태인 남자와, 대형마트의 가전코너에서 일하는 여자. 욕망을 향해 질주함으로써 불안감을 미루는 남자의 이름은 공()이고, 불안하기 싫어 미리 포기하는 일이 몸에 밴 여자의 이름은 금희다. 본명은 영기인데 연기라는 발음이 싫어 단단하고 변하지 않는 금()을 넣어 바꾸었다.

인정과 안정을 좇아 달리지만 뜻대로 되지 않고 허공의 안갯속에 갇혀버린 인물의 위선적 내면을 그만큼 냉정히 들여다보고 촘촘히 묘파하는 작가는 드물 것이다. 「파견 근무」의 판사 강, 「남쪽 절」의 출판사 대표 김, 「프랑스식 세탁소」의 재단 이사장 ‘나’ 등등(이상 『프랑스식 세탁소』). 그들은 예외없이 윤리적 선택의 기로에 서고, 결정의 순간 이미 실패를 직감한다. 그 상대편에는 그들의 허위의식을 거울처럼 말갛게 비추는 인물이 있다. 「남쪽 절」의 은애, 「프랑스식 세탁소」의 미란, 「내 아들의 연인」(『내 아들의 연인』, 문학동네 2008)의 도란처럼 주로 여성들이 그 역할을 했다.

그런데 「못」은 좀 다르다. 기르던 길고양이의 치료비가 예상보다 많이 나오자 금희가 고양이를 두고 그냥 돌아 나오는 장면이 강렬하게 인상에 남는다. 남겨진 고양이는 “알아서 처리해”달라고, “길에 돌아다니던 고양이예요”라고 덧붙이는 그 일상적인 목소리가 섬뜩하다. 녹슨 못으로 쭉 긁힌 손등에 혀끝을 가져다대면 이런 맛이 날까.

소설의 마지막 두 문단은 이렇다.

 

다음에 또 오자. 막 빠져나온 세차 기계를 되돌아보는 금희에게 무심코 말했을 때 그녀의 대답은 뜻밖에 단호했지.

다음. 다음이란 건 없어.

 

이런 단호함이 전에도 있었던가. 나는 책장을 뒤져 그의 근작소설집 『프랑스식 세탁소』를 꺼내들었다. 마지막 문장에서 인물들은 “엄살이라도 떨듯 어깨를 움츠리며 부르르 떨”거나(「파견 근무」), 계약서가 든 가방을 꼭 쥔 채 버스에서 차도로 내려서며(「남쪽 절」), 맛없는 초콜릿을 “뱉어버리고 싶”으면서도 “천천히 녹여 먹”고(「소년처럼」), 바닥에 떨어진 꽃잎을 치우고 싶어한다(「프랑스식 세탁소」). 결정들은 여운을 남긴다. 다음이라는 건 없다고 칼날같이 선언한 적은 없었다. 작가의 소설은 분명히 이전과는 다른 길에 들어선 것 같았다.

얼마 후 받아든 『창작과비평』에서 또 그의 이름을 보았다. 신작에는 ‘새벽까지 희미하게’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단숨에 다 읽었다. 무척 재미있는 소설이었다. 선글라스를 낀 채 모과나무를 힘껏 끌어안고서 자기 힘든 얘기를 막 털어놓는 인물, 송이가 특히 좋았다. 송이가 썼다는 소설 속 그림책 『미루나무 꼭대기에 걸린 팬티』의 줄거리를 소개하는 부분에서 한참 킥킥 웃었다. 다음에 언제 작가를 만나면, 똥 묻은 팬티를 남몰래 수거하기 위해 눈물겨운 여정을 떠나는 토끼 이야기를 진짜 그림책으로 펴내시라고 졸라야지, 생각했다. 그런데 이 선배님은 어쩌면 소설을 이렇게 잘 쓰실까, 혼자 가만히 생각했다.

 

2

정미경 선배를 만난 것은 그로부터 몇개월 뒤, 그러니까 지난가을의 어느날이다. 한 문예지의 장편소설 공모 심사 자리였다. 당일 저녁부터 기온이 급강하한다는 예보가 있었고, 담당편집자는 시간과 장소를 확인하는 문자메시지에 일교차가 크니 외투를 꼭 입고 오라고 덧붙였다. 시키는 대로 조금 도톰한 가을코트를 꺼내 입고 머플러를 두르고 길을 나섰다.

오랜만이라는 인사를 나누고 나서 나도 모르게, 어쩌면 똑같으세요,라고 해버렸다. 늘 단아하고 고운 외양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그에게는 특유의 태도와 분위기가 있다.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까. 꼿꼿하고 반듯한, 안과 밖의 균형이 잡힌, 온화하고 강인한. 그를 보면 온화하고 강인한 것이 하나의 존재 안에 나란히 깃들 수 있는 가치임을 인정하게 된다.

긴 회의가 끝나고, 초밥을 파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밤공기가 찼다. 선배는 히레사께를 주문했다. 흔히 ‘도꾸리’라고 부르는 흰 도기 술병이 나왔다. 다들 각자의 몫이 있었음에도, 선배는 작은 잔에 술을 한잔씩 따라 좌중에 나누어주었다. 나눠 마셔야 맛있죠. 환한 얼굴로 말했다. 병색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옆자리에 앉았던 나도 한모금 마셔보았다. 술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소설 쓰는 이들끼리 있으면 으레 그렇듯 우리는 소설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고 사는 이야기를 했다. 더 많이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선배는 나에게 딸들이 많이 컸겠다고 했고, 곧 학교에 간다고 알리자 어머,라고 낮은 감탄사를 뱉었다. 너무 예쁠 때네,라고 말했다. 힘들 때이기도 하다고 나는 대답했다.

그런데, 금방 지나가요.

금방 지나간다……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닌데 믿지는 않고 있었나보다. 선배의 음성으로 들으니 갑자기 그 사실에 깊은 신뢰가 생겼다. 위로하기 위해 아닌 소리를 하실 분이 아니니까. 그래, 선배가 알려준 대로 시간은 정말로 지나가겠지,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그에게 노트북 속 원고파일들을 통째로 날린 적 있다는 얘기를 들었었다. 오래전 일이에요,라고 그는 말했었다. 그런 시간을 지나온 선배의 말을 어떻게 믿지 않을 수 있나.

밤 아홉시 반이 넘었을까. 파할 시간이었다. 선배는, 아마도 부군을 만나 함께 귀가하기로 약속한 것 같았다. 눈치를 채곤 다들 약간 놀렸다. 손을 내저으며 조금 수줍어하던 그의 미소가 선연하다. 찬바람 부는 거리로 나서서야, 나는 다음날이 토요일임을 뒤늦게 떠올렸다. 아침 일찍부터 아이들 유치원의 체육대회였다. 가정통신문에는 점심도시락 대신 요기를 할 만한 간식을 싸오라고 적혀 있었다. 그 밤, 술집과 커피집이 늘어선 홍대 거리에서 무슨 수로 그런 간식을 구해 간단 말인가. 어쩌죠, 편의점에 뭐가 있을까요. 차분히 듣고 있던 선배가 말했다. 빵! 빵이 좋겠어. 그는 아이들이 한입에 집어 먹을 수 있는 빵들의 이름을 댔다. 미니단팥빵, 찹쌀도넛…… 그 발음이 다정했다. 와 역시! 나는 고맙다는 뜻으로 오른손 엄지를 치켜들었다.

길 건너 빵집의 불이 아직 환했다. 다행이었다. 우리는 함께 빠른 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넜다. 거기서 인사를 나눴다. 선배가 빈 택시 쪽으로 걸어가시는 것을 보고서, 나는 빵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3

SNS를 통해 믿기지 않는 소식을 접한 것은 118일 아침이다. 당연히 무슨 오해일 줄 알았다. 알 만한 몇군데에 연락을 해보았는데 다들 첫마디에 네?라고 했다. 정확한 소식을 아무도 몰랐다. 삼개월 전만 해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으셨는데. 아닐 거야. 그럴 수도 있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아닐 거야. 술을 그렇게 맛있게 드셨는데. 아닐 거야. 나는 속으로 끝없이 중얼거렸다.

바보같이 들리겠지만, 오해가 아님을 확인한 순간부터 나는 소설이 미웠다. 다 소설 탓인 것 같았다. 그의 몸이 많이 아프게 된 것도, 병원에 미리 가보지 않은 것도 다 소설 탓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고 생각했다. 소설 쓰기에 몰입해 있는 동안 일상이 얼마나 피폐해지는지, 건강이 얼마나 상하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무엇 때문에, 우리는 소설을 쓰는가. 생을 사는가. 이렇게 얼얼하게 뒤통수를 맞으면서. 아무에게도 물을 수 없고 아무도 답해주지 못할 의문이 가슴을 답답하게 짓눌렀다.

빈소에 다녀온 뒤에도 며칠을 멍하니 보냈다. 눈이 많이 내린 어느 밤에 레너드 코페트(Leonard Koppett)의 『야구란 무엇인가』(The New Thinking Fans Guide to Baseball, 황금가지 2009)의 머리말에 나오는 문장에서 ‘야구’라는 단어를 모두 ‘소설’로 바꾸어 읽어보았다.

소설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든 것이 종잡을 수 없을 만큼 격변하는 이 세상에서 오로지 소설만이 만고불변으로 남아 있다는 데에 영광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고, 한명의 소설가가 세상에서 사라졌다. 기다려도 다시는 그의 신작을 읽을 수 없다. 그의 변화하는 문학세계를 지켜볼 수 없다.

남겨진 작품들을 다시 천천히 읽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작업실 책상 위 달력 여백엔 내가 펜으로 적어놓은 문장이 하나 있다. ‘나를 풍요롭게 하는 것이 나를 파괴한다.’

『프랑스식 세탁소』, ‘작가의 말’ 부분

 

설령, 쓰기에 몰두하는 삶이 작가의 건강을 파괴했을지라도 소설을 쓸 수 있어 그의 생애는 풍요로웠을 거라고 믿고 싶다. 글의 끝에 다다랐으나 나는 아직도 그의 부재를 실감하지 못하겠다. 이른 부음이 비통하고 안타깝지만, 이제 작가 정미경이 남긴 소설들이 어떤 수식에도 갇히지 않기를, 보다 멀리 날아가 다층적으로 읽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