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시
도종환 都鍾煥
1954년 충북 청주 출생. 1984년 동인지 『분단시대』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접시꽃 당신』 『당신은 누구십니까』 『부드러운 직선』 『해인으로 가는 길』 등이 있음. djhpoem@hanmail.net
저녁 길
날이 저물고 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산을 넘어야 한다
낮달이 먼저 나와 나의 출발을 내려다보고 있다
다행이다
이번 길에도 동행해준다면 큰 힘이 될 것이다
냉랭함과 낯섦 줄지어선 숲을 지나
고개를 넘어야 한다
두려움이 고요로 바뀔 때까지 이 길을 가야 한다
꽃으로 향하는 모든 꽃나무가 그러하듯
어둠속에서도 멈추지 말아야 한다
몇몇 집에서는 벌써부터 저녁연기를
굴뚝 끝에 올리고 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신호라는 걸 나는 안다
온종일 적멸에 들었던 등불들도
하나씩 둘씩 눈을 뜨고 나의 행로를 보고 있다
어서 오라고
아직 잠들지 않았다고 길들도 손짓을 한다
길의 굽은 어깨 위에 잠깐씩 흰빛이 반짝인다
자작나무들이 달빛을 받아
길 위에 뿌려주던 흰빛이다
바람은 짐승처럼 씩씩거리며 뒷굽으로 땅을 찬다
그때마다 흙먼지를 날리곤 하지만
나는 멈추지 말아야 한다
암벽과도 같은 어둠의 벼랑을 지나
묵연히 또 한고개를 넘어야 한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가야 할 길
나는 멈추지 말아야 한다
도금
그대가 금잔에 빛 고운 술을 건네도
나는 한모금도 입술에 대지 않으리
그대 몸을 감은 영락(瓔珞)의 방울들 찬란해도
그대 눈부심에 결코 눈 주지 않으리
도금의 시대여
궁정악이 뿜어내는 현란한 음악 소리 높아도
악기의 녹슨 몸통을 가릴 수 없는 시대여
일찍 찾아온 무서리에 쓰러진
저 푸른빛의 슬픔을 나는 노래하리
유효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황홀한 식탁을 위해
나는 단 한곡의 음악도 연주하지 않으리
풍찬노숙(風餐露宿)을 견디는 저 꽃들
적빈(赤貧)을 택한 향기를 노래하리
오오 도금의 시대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