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시
남진우 南眞祐
1960년 전북 전주 출생.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시집 『깊은 곳에 그물을 드리우라』 『죽은 자를 위한 기도』 『타오르는 책』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 『사랑의 어두운 저편』 등이 있음. orpheus@mju.ac.kr
낡은 액자 속의 생
여우비
온다
살그머니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없이
여우비는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온다
머나먼 전생에서 불어온 바람이, 일순
턴테이블에 앉은 먼지 몇점 허공에 띄우고
나는 내 앞에 선 여우들
그 무수히 반짝이는 눈동자를 응시한다
내가 태어나던 날 아침
내 집 마당과 지붕 위를 오르내리던 여우들은
덤불 우거진 숲을 지나 눈부신 설원으로 떠났다
여우들, 나는 여전히 망명 중이고
여우들, 빗소리는 어둠 속에서 여우눈을 떴다 감는다
여우들, 내 인생이 이토록 지겹고 황량할 줄 나는 몰랐다
구름 속에서 내려온 저 작은 물방울들이
여우털을 휘날리며 거리를 지나는 동안
턴테이블 옆 오래된 의자에 몸을 파묻고
나는 잠시 침묵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여우들이 내는 자글거림을 견뎌야 한다
여우비, 온다
손을 내밀면 다가와 살그머니 손끝을 깨무는
무수한 여우들에 둘러싸여 한낮이 깊어진다
한 사내의 일생이 소리없이 저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