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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신경림 申庚林
1935년 충북 충주 출생. 1956년 『문학예술』로 등단. 시집 『농무』 『새재』 『달 넘세』 『가난한 사랑노래』 『길』 『쓰러진 자의 꿈』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뿔』 『낙타』 등이 있음.
가난한 아내와 아내보다 더 가난한 나는
떠나온 지 마흔해가 넘었어도
나는 지금도 산비알 무허가촌에 산다
수돗물을 받으러 새벽 비탈길을 종종걸음치는
가난한 아내와 부엌도 따로 없는 사글셋방에 산다
문을 열면 봉당이자 바로 골목길이고
간밤에 취객들이 토해놓은 오물들로 신발이 더럽다
등교하는 학생들과 얼려 공중화장실 앞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다가 잠에서 깬다
지금도 꿈속에서는 벼랑에 달린 달개방에 산다
연탄불에 구운 노가리를 안주로 소주를 마시는
골목 끝 잔술집 여주인은 한쪽 눈이 멀었다
삼분의 일은 검열로 찢겨나간 외국잡지에서
체 게바라와 마오를 발견하고 들떠서
떠들다 보면 그것도 꿈이다
지금도 밤늦도록 술주정 소리가 끊이지 않는
어수선한 달동네에 산다
전기도 안 들어와 흐린 촛불 밑에서
동네 봉제공장에서 얻어온 옷가지에 단추를 다는
가난한 아내의 기침 소리 속에 산다
도시락을 싸며 가난한 아내보다 더 가난한 내가 불쌍해
오히려 눈에 그렁그렁 고인 눈물과 더불어 산다
세상은 바뀌고 바뀌고 또 바뀌었는데도
어쩌면 꿈만 아니고 생시에도
번지가 없어 마을사람들이 멋대로 붙인
서대문구 홍은동 산 일번지
나는 지금도 이 지번에 산다
봄비를 맞으며
그 여자가 하는 소리는 늘 같다.
내 아들을 살려내라 내 아들을 살려내라.
움막집이 헐리고 아파트가 들어서고
구멍가게들 대신 대형 마트가 들어섰는데도
그 여자는 옷매무새도 머리 모양도 같다.
공중전화 부스 앞에 줄을 서는 대신
모두들 제 휴대폰에 분주하고
힘들게 비탈길을 엉금엉금 기는 대신
전철로 땅속을 달리는데도,
장바닥을 누비는 걸음걸이도 목소리도 늘 같다.
용서하지 않을 테다 결코 용서하지 않을 테다.
세상이 달라졌어요 할머니 세상이,
이렇게 하려던 내 말은 그러나 늘 목에서 걸린다.
어쩌면 지금 저 소리는 바로
내가 하고 있는 소리가 아닐까, 두려워서,
두려워서 속으로만 하고 있는 소리가 아닐까.
시적시적 내리는 봄비를 맞으면서
아무도 듣지 않는,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는,
올해도 죽지 않고 또 온 그 여자의
각설이타령을 들으며 걷는
달라진 옛날의 그 길이 오늘따라 서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