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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문숙 李文淑
1958년 경기 금촌 출생.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천둥을 쪼개고 씨앗을 심다』 『한 발짝을 옮기는 동안』이 있음. silmoon@dreamwiz.com
치매학교
자다가 죽으면 좋겠어
아프지 않고
아기처럼 작아져서 씨앗으로
어디선가
자신이 평생 연주하던 악기에 기대 세상을 떠난
연주자들의
행복한 이야기를 듣는다
들고 다니던 악기가방의
거죽 냄새를 맡으며 숨을 거둔
아흔 넘어 이가 다시 나기 시작했다는
그녀가 새로 돋은 이빨을 살강살강 부딪으며
과자를 먹는다
나는 저 처자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도 않았어
자신의 처가 누군지도 기억 못하는 그가
수줍은 얼굴로 말을 건넨다
자신의 처를 다른 처자로 보는 저 마음도
색다른 연애감정이다
이빨이 새로 돋을 만큼 시간을 살아내고
자신의 처가 누군지 모를 만큼 한 세기가 지나간다
자궁을 들어내고 유방을 잘라내고
몽정을 시작한 소년처럼 기억이 거기 멈춘다
모래무지가 모래톱을 베고 황홀한 꿈을 꾼다
방울뱀이 자신의 울음주머니에 기억을 담아 부풀린다
세계에서 가장 키가 작은
난쟁이가 키다리가 되는 게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지
학교에 다시 입학하는 데 우리는 커다란 고통을 치렀다
두번 낙방을 하고
오늘은 오색구슬 꿰기에 몰두한다
이름 받아쓰기를 한다
이 이름의 주인은 어떤 타자일까
수업시간에
쭈욱 육신을 늘여보니까
벌써 난쟁이는 자신의 커다란 소망을 이루었다
잇몸에선 새싹 같은 이빨이 나오기 시작하고
우리는 소년이 되었다
응시라는 어두운 동물을 사랑해
빛 한점 들지 않는 먹방이다
숨소리가 벽에 부딪쳐 분산된다
조금씩 울려퍼지며 증폭된다
벽이 조여오고 천장이 내려오고
바닥이 올라온다
그 시절 불령선인(不逞鮮人)들을
가두었다는
그들은 어떤 유형의 인간들이었을까
공포감 속에서
어떻게 그 시간을 견뎌냈을까
혼자 탐방로를 오르다 만난
낯선 곳에서 짐승을 만났을 때
지켜야 할 행동강령!
놀라서 후닥닥 피하지 않는다
정면으로 눈을 응시한다
제자리에 가만히 멈춰서서 그러나
평온을 가장하지는 말 것
쉴 새 없이 내가 앉아 있는 이 책상으로
늑대가 여우가 온다
멧돼지의 송곳니가 들고양이의 발톱이
나는 응시라는 어두운 동물을 사랑해
가도 가도 끝없이 펼쳐진 백지장의 눈밭
승냥이가 키를 펄쩍 뛰어넘는
혼비백산 그 형광의 빛에 홀려 죽을 뻔했던
남자들의 기담(奇談)들,
가끔 그 시절 불령선인을 생각한다
누구를 저격하거나 자객이 되지 못한
고문을 하기에도 너무 연약한
그들은 과연 누구였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