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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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영 李時英

1949년 전남 구례 출생. 196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만월』 『바람 속으로』 『은빛 호각』 『바다 호수』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 등이 있음. roadwalker1@hanmail.net

 

 

 

마음의 길

 

 

마포대교 아래 ‘삼개나루터’ 표지석이 있는 곳에서부터 서강대교까지, 바람 불면 황사 자욱히 날리는 그 강변길을 우린 좋아했지. 어떤 날이면 셋이서, 또 어떤 날이면 둘이서 걷던 자갈돌 튀어오르고 다듬어지지 않은 맨바닥길. 간혹 밤섬에서 헤엄쳐온 흰뺨청둥오리들이 우리를 향해 끼룩거리며 말을 걸어오곤 하였으니 그리 쓸쓸했다고만 할 수 없던 점심 후 산책길. 오랜만에 그곳엘 가보니 한강공원이 들어서고 우리 걷던 길은 자전거들이 노란 중앙선을 따라 질주하는 전용도로가 되어 있었어. 물론 그 옆으로 걷는 사람들을 위한 보행로가 놓여 있기는 하였으나.

밤섬엔 ‘생태·경관보전지역’이란 펼침막이 쳐지고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있더군. 그제나 이제나 오리들은 여전히 줄을 그으며 날아오르고 혹은 지는 해를 향해 환호작약하다가 날개를 털며 침울하게 잠수하더군. 자네 중 한사람은 장자(莊子)처럼 짙은 수염을 기르고 양평으로, 또 한사람은 아동문학 교수가 되어 순천으로 갔지만 우리 답답하고 어려운 시절, 가슴에 무수한 사연들을 묻으며 타박타박 걷던 이 강변길을 잊지 않길 바래. 사는 것이 많이 적막하고 또 고독하지만 우리 가슴속에 쉼없이 흐르는 저 강이 있어 고요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그 고요를 가르며 나는 고니의 발이 공중에서 오므라지는 선홍빛 가을, 가슴 가득한 환희의 순간도 맛보았지. 이제 곧 4월이 오네. 우리들 마음의 길이 된 그곳에도 가녀린 풀꽃들이 피어 자신을 바위처럼 단련하겠지. 그때 우리가 바람 속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어느 저녁의 몽상

 

 

사는 것이 사는 것 같지 않고 으스스 몸이 시릴 때, 아니 내 삶이 내 삶으로 도저히 용납되지 않을 때, 그것이 또한 오로지 남의 탓이 아닐 때 등을 돌리고 서면 거기 안서호의 황혼녘에 오리들이 몇 유쾌한 직선들을 그으며 나아가고 있었나니, 나 425호 남의 연구실 유리창에 이마를 갖다대고 그것들의 한없이 자유로운 유영을 지켜보곤 하였으나 내가 저 오리가 되기엔 너무 늙었거나 조금 일렀으며, 생은 어디에 기댈 데도 없이 저처럼 뭉툭한 머리를 내밀고 또 물밑에선 갈퀴질을 죽어라고 해대며 쌩까라*고 저 홀로 갈 때까지 가보는 것이라고 다짐하곤 했는데, 그때쯤이면 해가 풍덩 가라앉은 저녁 안서호의 따스한 물결이 내 가슴 통증께로 조금씩 밀려오곤 해 나는 서둘러 텅 빈 가방을 챙겨 의대에서 오는 6시 막차 퇴근버스를 타러 언덕길을 향해 총총히 내려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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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쌩까다’라는 경상도 사투리는 이성복의 시 어딘가에서 빌려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