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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페미니즘으로 문학을 읽는다는 것
너머의 퀴어
2010년대 한국소설과 규범적 성의 문제
차미령 車美怜
문학평론가, 광주과학기술원 기초교육학부 교수. 평론집 『버려진 가능성들의 세계』 등이 있음. mrcha@gist.ac.kr
1. 인정투쟁: 시민권과 퀴어
다큐멘터리 「위켄즈」(이동하 감독, 2016)는 2003년 시작된 게이 합창단 지보이스(G-Voice)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단원들의 삶과 사랑, 노래들을 무겁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풀어가던 영화는 중반에 이르러 작은 변곡점을 맞는다. 김조광수와 김승환의 결혼식, 무대에 있던 부부와 지보이스를 향해 오물이 뿌려진 것. “그나마 똥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먼저 했어요. 칼을 들고 올라왔을 수도 있고, 화학물질 같은 걸 들고 올라왔을 수도 있잖아요.” 영화 전편에 걸쳐 지보이스의 노래들은 진솔하게 다가오거니와, 특히 이 결혼식 장면에 이어진 「세상아 너의 죄를 사하노니」와 단원 스파게티나의 죽음을 애도하는 「북아현동 가는 길」의 울림은 강렬하다. 인분 투척 사건 이후로 “지보이스를 하는 이유가 생긴 것 같다”는 한 단원의 술회가 일러주듯이, 영화의 후반부에서 지보이스의 무대는 팽목항으로, 평택으로, 광장과 거리로 확장된다. 자신과 사랑을 지켜내고,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며, 다른 이들의 고통에 연대하는 것. 그들은 지금 싸우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호네트(A. Honneth)는 ‘인정투쟁’ 개념을 전개한 헤겔의 작업들을 검토한 후, 미드(G. H. Mead)의 사회심리학으로 이 개념의 경험적 전환을 시도한다.1 호네트의 저작에서 눈여겨볼 대목 중 하나는, 헤겔과 미드를 경유한 끝에 그가 세가지 인정 형태(사랑, 권리, 연대)에 대응하는 세가지 무시의 형태(신체적·인격적 굴욕, 권리의 부정, 가치의 부정)를 저항의 출발점으로 사유한다는 사실이다. 호네트의 논지에 따르면 그러한 무시의 경험은 행위의 동기로 작용하여 사회적 투쟁의 원천이 된다. “인정 요구에 대한 무시의 경험에 동반하는 모든 부정적 감정 반응은, 그 자체 속에 이미 그 관련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에게 가해진 불의(Unrecht)를 인지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정치적 저항의 동기를 갖게 하는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263면)
『인정투쟁』에서 호네트가 살피는 두 사상가에 따르면 개성의 역사적 해방은 기나긴 인정투쟁을 통해 이루어지며, 개인의 자기실현과 사회 공동체의 성장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인정 논리가 이같이 사회를 갱신하는 역동적인 가능성이 아니라, 또 하나의 폭력으로 사유된다는 사실 역시 지나칠 수 없다. 배제된 자들에게 인정투쟁이란 곧 생사를 건 투쟁임이 환기되는 한 대담에서는, 자유주의적 인정 담론이 인정을 요구하는 선재적인 행위자로 주체를 묘사하지만(아타나시오우), 실상 인정은 “누군가가 이해 가능한 존재로서 나타나기 위해서 그 자신이 결코 선택하지 않았던 조건들에 의존하는 상태”(버틀러)를 의미한다고 비판된다.2
물론 같은 대담에서 버틀러는 “법과 정치가 우리를 전체화하는 것에 저항해서 싸워야만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법과 정치의 영역에서도 투쟁해야만”(143면) 한다고 지적하며 억압의 재구성을 환기하고 있기도 하다. 그의 주장대로 인정의 구조는 평가되고 의문에 부쳐져야 하며, 범죄화·병리화하는 규범 너머 삶의 가능성들은 지속적으로 천착되어야 한다. 그런데 퀴어(queer) 논의에 있어서, 이 문제는 좀더 짚어볼 이유가 있다. 한국사회에서 LGBT 등 주로 비규범적인 성정체성을 가리키는 용어로 통용되는 ‘퀴어’는, 게이·레즈비언 운동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정체성 정치를 반박하며 제출된 기획이기도 하기 때문이다.3 차이의 수용에 주목하건(정체성 정치) 동등한 권리에 주목하건(시민권 요구), 그같은 전략들이 근본적으로 체제 내에 포섭되는 방식이라는 비판과, 그 방식에 저항하는 움직임으로써의 퀴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4
그러므로 관건은 정체성을 고정하고 배치하는 규범적 권력을 넘어서서, 퀴어를 변화를 생산하는 범주로 사유하는 것일 터이다. 이 글에서 간략하게나마 이 사실을 환기하는 까닭은 다른 곳에도 있다. 지금까지 한국소설의 어떤 성과들은 퀴어를 매개로 출현해왔으며, 그 잠재력은 최근 들어 더 선명해지고 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소재주의적이라는 불만과 이른바 당사자성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고 있는 듯하다. 퀴어 텍스트는 퀴어가 써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은, 곧 퀴어 텍스트의 수행성에 대한 물음일 것이다. 그러나 버틀러를 빌려 말하면, “퀴어는 레즈비언인 것이 아니다. 퀴어는 게이인 것이 아니다.”5 위치성의 차이와 그 복합성은 끊임없이 성찰되어야 하겠지만, 발화와 토론의 과정을 경유하여 퀴어는 구분의 폭력에 반대하는 모든 이들의 것으로 사유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이 글 역시 LGBT/퀴어 정체성에 대한 규정적 이해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 아닌, 성을 전체화하는 권력에 대한 동시대 소설의 다채로운 응답에 대한 탐구로 읽혔으면 한다.
2. 소명과 부활: 교회 너머의 퀴어
황정은(黃貞殷)의 「뼈 도둑」(『파씨의 입문』, 창비 2012)과 윤이형(尹異形)의 「루카」(『러브 레플리카』, 문학동네 2016)로 논의를 시작하려 한다. 이미 많은 주목을 받은 두 소설은 2010년대 한국소설의 핵심적 의미소인 애도의 문제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그런데 두 소설에서 초반부에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사망했음이 암시되는 ‘장’(「뼈 도둑」)과 ‘너’(「루카」)는, 서술자-주 인물의 동성 연인으로, 공히 “모태신앙”을 가진 기독교인으로 제시된다.
먼저 「뼈 도둑」과 「루카」에서 교회가 어떻게 재현되는지 환기해둘 필요가 있겠다. 「루카」에서 ‘너’의 신랄한 논평에 따르면, 한국의 대형교회는 돈이라는 주술적 매개를 중심으로 기복신앙화되었으며, 이념적 낙인을 통해 그 자신의 적대를 구성한다. 또한 「뼈 도둑」에서는, 성탄 밤 걸인을 내쫓은 후 자신들끼리 선물꾸러미를 나누던 교인들에 대한 ‘장’의 회상에 다음과 같은 진술이 이어진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고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그건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나쁘다.”(196면) 바꿔 말해, 교회의 사랑은 특정한 이웃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데, 그것을 사랑이라 유포한다는 그 점에서 (사랑 아닌 것이 아니라) 혐오에 가깝다. 특히 ‘장’이 교회를 떠나기까지의 과정은, 교회에서 작동하는 낙인과 배제의 메커니즘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지난 십년간을 복기해볼 때, 퀴어 서사에서 보수 개신교가 적대적 타자로 설정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6 하지만 두 소설 속 인물들에게 교회는 그들이 태어나면서부터 몸담았던 공동체이고, 이 사실은 소설에서 매우 주의 깊게 다뤄진다. 소설은 교회 안팎의 인정투쟁이나 성소수자의 자기선언에 페이지를 할애하는 동시에, 소설 속 교회가 대신할 수 없는 신앙에 대한 탐문을 시도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소설은, ‘사랑’ ‘희생’ ‘속죄’ ‘부활’ ‘믿음’과 같이 세속의 교회가 선점한 듯한 영역을 어떻게 퀴어의 편에서 사유할 것인가 하는 동시대 문학의 고뇌를 드러낸다. 그 탐색이 일각의 개신교를 비판하는 진술들로써 축약될 수 없는바, 소설에서 퀴어 편의 응답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솟아난다. 간단히 말해, 소설에서 기묘한(queer) 장면들은 무엇인가.
「뼈 도둑」의 ‘조’는 “그만 가주길 바라는 눈치”(202면) 속에서 ‘장’의 장례식에 참석했으며, 장이 사망한 지 1년 후에 장의 누이로부터 장과 함께 살던 집을 돌려달라는 요구를 받는다. 자신들의 집을 떠나 조가 도착한 곳은 도의 ‘경계’를 넘어선 마을로, 언젠가 장의 비꼼처럼 ‘세입놈(者)’과 ‘주인분’으로 위계화된 문명세계의 이면이다. 그리고 그 세계의 가장 낮은 곳에, 버려진 개들의 뼈가 있다. “개들의 사육자는 개장에서 개를 치고 먹이다가 개가 죽으면 그곳에 던져두는 듯했다.”(194면) 혹한 속에 고립되어 있던 어느 밤, 조는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린 끝에 대피소의 온기를 상상하다가 이웃의 개를 훔칠 마음을 먹는다.
황정은 소설에서 개를 비롯한 동물들의 수난은 세계의 폭력성을 가리키는 동시에, 죽음의 위협에 노출된 배제된 자들의 생명을 환기한다. 버려진 개들의 흔적에서, 세상으로부터 관계와 존재를 부정당하고 스스로 유폐된 조 자신을 읽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이 유령적 존재들과의 만남과 헤어짐 이후,7 그는 마침내 어떤 결심을 하고, 소설 속 이야기는 가장 낮은 분지에서 “눈사람과도 같은 거인”(205면)으로 이월한다. 최초의 인간의 뼈를 취해 사랑하는 이를 만들었다는 신화의 맞은편에서, 소설은 사랑하는 이의 뼈를 다시 찾으러 떠나는 최후의 인간을 제시한다.
작가는 소설의 처음과 끝에 “그대는 이 기록을 눈 속에서 발견할 것이다”라는 조의 진술을 남겨두었다. 소설의 두번째 문장에서 이어 전하기를 “나는 눈에 갇혔다.”(183면) 눈 속에 갇힌 조는, 폐가에 머물 때 그의 꿈속에서 모래에 묻혀가던 장을 연상시키기에 더욱 고통스럽다. 하지만 소설은 그럼에도 거인을 꿈꾸며 “갈 수 있었고, 살 수 있었”던(205면) 그의 행위에 주목한다. 눈 속에서 발견될 기록은, 그것이 기록되고 또 발견되리라는 믿음 아래 자신을 던질 수 있었던 한 인간을 지시한다. 오직 몇 문장만으로 지면 가득 들어차는 장엄한 설원 속에는, 도래할 시간 아래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던 자의 소명이 눈과 함께 응결되어 있다.
한편 「루카」에서 윤이형은 중반 이후 ‘너’의 입을 통해 소설을 관통하는 질문 하나를 제기한다. “죽어버린 것이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137면) 부활에 관한 이 질문은 서사의 과정에서 다양한 각도로 반추된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질문으로, 습속에 대한 질문으로, 믿음에 대한 질문으로, 무엇보다도 루카/예성이라는 한 존재에 대한 질문으로.
이 질문들과 연관하여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순간은, 산 자를 죽은 자로 만드는 역설과 함께 온다. 부활을 위해, 존재는 먼저 망각되어야 한다. 이 우발적인 망각이 마침내 폭로하는 것은 ‘예성’이 아닌 ‘루카’라는 존재의 사건성이다. 아르헨띠나의 고속도로를 걷는 ‘너’의 아버지의 체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명확하다. 태양은 중천에 떴고, 그는 말이 통하지 않은 채 홀로다. “아무도 없는 길을 예성이가 이렇게 걷고 있었겠구나.”(140면) 「루카」의 사막은 아버지가 아들을 애도하며 걷는 길이다. 속죄하며 걷던 그는 대성당에 다다라 이내 그것을 구원으로 받아들이지만, 귀환하는 길에 불현듯 아들은 “죽은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미 몇차례 지적되었듯이, 게이 아들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믿어버린 아버지의 착란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자기기만과 타자에 대한 관성적 이해를 드러낸다. 하지만 인간을 지배하는 그 믿음의 인력에 대해 사유하는 것은 이 소설의 과제이기도 하다. 그 점은 ‘너’의 연인이었던 ‘나’의 편에서 보아도 마찬가지다. 개신교 목사와 퀴어활동가를 가족과 연인으로서 맞서 세운 소설의 구도가 말해주듯이, 목사인 ‘너’의 아버지가 고행과 속죄의 형식으로 ‘너’를 애도하고자 했다면, ‘나’는 퀴어활동가답게 시민권의 틀로 ‘너’와의 관계를 돌아본다. 그리고 ‘나’는, 신, 가족, 교회 등 “되살아난 것들”로 인해 ‘너’가 다른 한쪽을 택할까 두려워했던 자신을 발견한다. “너는 내 세계에서 소수자였고 나는 문을 열어 밖을 내다보고 싶어하는 너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144면) ‘나’의 신념 또한 “믿음”이며 그것이 ‘너’에게는 강요이자 억압일 수 있다는 사실은, ‘너’의 아버지의 사막 체험과 나란히 제시된다.
그러므로 관습적으로 기대되는 결말은 ‘나’와 아버지가 ‘너’의 연인과 가족으로서, 또한 퀴어활동가와 개신교 목사로서 극적인 화해에 도달하는 것일 테다. 하지만 윤이형은 그 길을 가지 않는다. 대신 소설은 각자가 자리한 위치의 한계를 응시하며, 그 위치의 차이를 성급하게 봉합하려 하지 않고 질문의 시간을 연장시킨다. ‘너’를 어느 하나의 이름으로 규정하려는 시도를 성찰하며, ‘너’가 탐색하는 퀴어의 지평 역시 또다른 미래의 가능성으로 보존하는 것이다.8
3. 억압과 사랑: 침묵 너머의 퀴어
「루카」에서 어느 정도 드러나듯이, 동성애/이성애 규정(homo/hetero-sexual definition)은 ‘소수자인 동성애자에게 중요한 문제’(소수화 관점)인 동시에, ‘섹슈얼리티들의 스펙트럼을 가로질러 모든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보편화 관점)이기도 하다.9 후자의 측면을 좀더 톺아보기 위하여, 성석제(成碩濟)의 「믜리도 괴리도 업시」(『믜리도 괴리도 업시』, 문학동네 2016)를 읽어보면 어떨까.
「믜리도 괴리도 업시」에서 초등학교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나’와 ‘너’의 역사는, 남성 동성집단의 형성사와 나란히 간다. 그 역사 속에서 ‘너’는 ‘우리’와 대칭적으로 제시된다. 가령 ‘우리’는 “모두 똑같다”고 여기기 때문에 “절대 서로에 대해” 평가하지 않는 반면, ‘너’는 줄곧 평가와 호오의 대상이 된다. 그렇다면 ‘너’는 무엇이 다른가. ‘나’의 성장기, 소설 속 동성집단은 ‘너’를 여성적인 남성으로 규정함으로써 배제(하는 동시에 포섭)한다.10 ‘손맛’ ‘손재주’ 등의 소설 속 묘사에서 두드러지듯이, ‘너’의 예외적인 자질은 여성적인 특징으로 쉽게 치환된다. 이미 소설의 첫 페이지에서부터 ‘너’는 ‘천사 아니면 악마’라는 이분법적 잣대로 가늠되고 있으며, 집안이 몰락한 이후 살림을 도맡은 ‘너’는 “모든 남자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부엌데기”(146면)로 일컬어진다.
일찍이 김승옥(金承鈺)이 「건(乾)」(1962) 등을 통해 남성집단에 동참하기 위해, 여성적인 것을 파괴함으로써 얻어진 초라한 남성성을 간파했다면, 「믜리도 괴리도 업시」에서 성석제는 동성애를 같은 자리에 놓고 사유한다. 다시 말해, 이 소설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주체가 갖고 있는 어떤 불안이 가시화될 때이다. 소설은 ‘우리/나’가 ‘너’를 “욕을 하며 백안시”하거나 “무시”했다고 진술하는 동시에, 그 강도만큼이나 ‘너’에 대해 꾸준히 주목하고 있었음을 누설한다. ‘나’의 시선과 상상이 ‘너’를 향하고 있음을 기술하는 대목들은 물론이고, “망할 놈의 도시락”에서와 같이 발화하는 동시에 부정되는 욕망에 대한 진술들도 그러하다.
특히 소설에서 인물이 동성애를 은폐하려는 행위는 ‘침묵’으로 드러난다. 군입대나 결혼 등 이성애적 규범의 인력이 강해질 경우, ‘나’는 ‘너’와의 관계를 철저하게 비밀로 하려 한다. 그리고 그와는 대조적으로, ‘볼트’와 ‘너트’ 같은 비유가 동원되는 이성 간 성행위 등, 규범적인 성의 경계를 사수하려는 인물의 언술은 좀더 노골적이 된다.11 말하자면 ‘나’는 스스로를 게이로 인식하지 않음에도, 동성애/이성애 규정은 그의 삶을 강하게 구속하며, 그러한 구속 가운데 잠재적인 성향은 신속하게 부정된다. 소설에서 이러한 억압의 배경으로 암시되는 것은 호모포비아와 그것을 중심으로 한 남성 결속이다. 예컨대 ‘나’와 ‘너’가 우연히 재회하기 직전, ‘나’와 회사 동료들이 연출하는 한 장면을 보라. 게이 스탠드바 앞에서 “호모 새끼들” 운운하는 회사 동료들의 킬킬거림을 ‘나’는 그대로 따라하는데, ‘나’는 그 웃음을 “자신은 동성애자가 아니라는 게 다행스럽고, 그래서 소수자도 약자도 아니니 핍박받거나 무시당하지 않을 거라는 안도감에서 나오는 웃음”(160면)으로 자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장면에서 ‘나’가 떠올리는 소수자의 고통은, 또다른 소설에서는 어떤 형태로 드러나는가. 지금까지의 내용에서도 짐작되듯이 「믜리도 괴리도 업시」는 진지한 회상의 어법 대신 음담과 농담을 장착하고 있으며, 성기를 중심으로 한 섹슈얼리티에 할애된 분량도 적지 않다. 이 점은 박상영의 「중국산 모조 비아그라와 제제, 어디에도 고이지 못하는 소변에 대한 짧은 농담」(『현대문학』 2016년 12월호, 이하 「중국산 모조」)도 유사한데, 이성애중심적인 공간 구획 안에서 퀴어의 장소를 묻고 있어 특징적이다. 「중국산 모조」는 종로를 중심으로 게이 하위문화의 특정 코드들을 섭렵하는 가운데 호텔과 모텔, 빌딩 화장실, 마사지숍 등 좀더 비밀스런 영역을 탐사한다.
「중국산 모조」의 ‘제제’가 「믜리도 괴리도 없이」의 ‘너’와 공유하는 자질 중 하나는 조건 없는 증여에 의한 관계 맺음이다. 「믜리도 괴리도 없이」의 ‘너’가 “대가 없이 퍼주기”로 대학 시절 많은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면, 「중국산 모조」의 제제는 “마르지 않는 지갑”으로 불린다. 물론 제제의 또다른 별명은 ‘패리스박’으로, 그 자신도 쉴 틈 없이 소비한다. ‘제냐 슈트’에서 ‘피아제 시계’에 이르는 제제의 소비취향 자체는 그다지 특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른바 글로벌 명품으로 표상되는 그 모든 기호적 향락이 결국 ‘중국산 모조 비아그라’로 귀착된다는 사실은 주목해봄직하다. 소설이 게이의 삶을, 나아가 주변부 게이의 삶이 중심부와 맺게 되는 거리를, ‘중국산 모조 비아그라’라는 말로써 압축해놓기 때문이다.
나아가 소설의 이러한 기호적 소비를 성적 관계의 영역으로 옮겨놓고 보면, 제제가 궁극적으로 소비하는 것은 애인이다. “몸과 마음, 씀씀이 모두가 헤펐던 당시의 제제는 외모와 경제적 지위, 심지어 섹스 포지션까지도 개의치 않고 그들 대부분과 짧고 뜨거운 연애를”(87면) 했다. 다른 한편 ‘나’는 데이트 어플리케이션 등을 통하여 ‘회사원031’ ‘공대생4’ ‘의사103’ 등 직업과 숫자로써만 식별 의미가 있는 이들과 몸만 나누고 서둘러 헤어지는 공허한 섹스를 지속한다. 이 때문에 보기에 따라서는 소설이 게이를 과잉성애화함으로써 성소수자에 대한 특정 관념을 재생산한다고 생각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성애자 법률혼 부부가 장기적으로 갖는 독점적 성관계를 문란하다고 표현하는 사람이 있는가? 혹은 그러한 경우에 성행위의 패턴을 특정 정체성에 의한 것으로 규정하게 되는가?
그러므로 눈여겨볼 지점은, 제제와 달리 ‘나’의 섹스 관계 속에는 어떤 가능성에 대한 욕망이 폐제되어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나’의 경우 연애의 가능성은 단 하나의 가능성인 죽음의 가능성에 자리를 내준다. 「믜리도 괴리도 업시」에서 호모포비아의 중핵이었던 에이즈 공포 또한 ‘나’에게는 작동하지 않는다. “너 그러다 죽어”(97면)라며 두 인물이 무심하게 나누는 대화를 뒤로하고, 소설은 그 기원으로써 ‘나’가 연인 Q와 함께 죽음을 도모하던 시절을 지목한다.
소설 속 ‘나’에게 죽음은 언제나 가까이에 있다. 콘돔을 사용하지 않은 불안한 섹스 후에 ‘나’가 꾸는 꿈속으로는 군복을 입은 Q가 등장한다. 함께 자살을 시도한 끝에 Q는 “성공하고 나는 실패한다”(85면). ‘나’의 짐짓 가벼운 몸짓에는 대학시절 사망한 Q에 대한 상실과 애도의 감각이 용해되어 있다. 눈물이 아니라 ‘어디에도 고이지 못하는 소변’에, “모두가 널 떠날 것이다”를 ‘올리브유’로 바꿔놓는 실없는 농담에, 리모와 캐리어 속에 몸을 뉘인 ‘나’의 우스꽝스런 팔다리에, 스며 있는 것은 사랑이 정주할 장소를 박탈당한 퀴어의 삶이다.
4. 레즈비언 서사의 분화 : ‘우리’ 너머의 퀴어
지금까지 게이 커플들의 이야기를 먼저 읽어왔지만, 가장 최근 두드러진 퀴어 서사의 한 경향으로써 레즈비언으로 스스로를 정체화한 인물들이 늘어났다는 사실을 거론할 수 있을 듯하다. 이 글에서는 대표적으로 최은영(崔恩榮)의 「그 여름」(『21세기문학』 2016년 겨울호)과 박민정의 「아내들의 학교」(『문예중앙』 2014년 겨울호)를 읽으려 한다. 머리카락이 갈색이어서 고교시절 내내 검게 염색해야 했던 ‘이경’(「그 여름」)과 붉은 머리카락을 폭력적으로 잘리고 새까맣게 염색당해야 했던 ‘선’(「아내들의 학교」)의 일화는 레즈비언 정체성에 대한 강제적인 억압을 은유한다. 그러한 교칙이 지배하는 학교에서 인물들의 사랑은 보이지 않는 것이며, 그 관계가 드러나게 된다는 상상은 또다른 공포로 이어진다.12
그러므로 두 소설에서 우선 꼽을 수 있는 장면은, “사랑이 주는 생의 실감”(「그 여름」)과 함께 자기가 발견되고 정체성이 선언되는 대목들이다. 두 소설에서 인물들이 서로의 존재를 처음 느끼고 나누는 장면들은 강렬하게 묘사되고, 여성이 다른 여성의 육체에 갖는 끌림은 여성의 언어로 진술된다. 고교 이후 인물들이 자발적으로 합류한 공간이 레즈비언/여성 공동체로 확장되는 등, 레즈비언/여성은 내내 서사의 중심축에 위치한다. 그런데 이렇듯 레즈비언/여성이 주도하는 두 소설은, 레즈비언 커플에서부터 여성조합에 이르기까지 그 안의 갈등과 균열의 지점들을 응시하고 있기도 하다.
최은영의 중편 「그 여름」은 이경과 수이의 연애담이다. 레즈비언 커플이 만나고 헤어지기까지의 전 과정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압델라티프 케시시 감독, 2013)나 「연애담」(이현주 감독, 2016)과 견주어볼 만한 이 소설은, 작가 자신의 근작 「먼 곳에서 온 노래」(『쇼코의 미소』, 문학동네 2016)에서 감지되던 퀴어 코드가 전면화된 작품이다.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이 가로놓여 있다는 점에서, 「그 여름」의 이경과 수이의 관계는 「먼 곳에서 온 노래」의 ‘소은’과 ‘미진’의 관계에 오버랩된다. 그러나 후자가 대학 노래패 여성 선후배를 중심으로, 남성성으로 젠더화되어왔던 공적 투쟁과 우정의 영역을 전위시키는 데 좀더 주력한다면, 「그 여름」은 고교 동창으로 만난 두 여성의 사랑을 파열시키는 차이를 탐구하는 데 주력한다.
사랑이 찬란하게 시작되던 열여덟 여름부터, 불같았던 사랑의 열병이 ‘고열’과 함께 소진되기까지 「그 여름」은 근래 소설에서 보기 드물게 멜로드라마적 매혹을 뿜어낸다. 무엇보다 「그 여름」은, 이경의 기만과 위선, 그로 인한 부끄러움과 죄의식을 토로하는 회고적 서술들을 통해, 떠나온 수이를 향한 강력한 연민의 정서를 발산한다. 그렇다면 성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연민 속에 은닉된 것은 무엇인가.
우선 「그 여름」이 노동계급 레즈비언의 경험을 형상화하고자 한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수이와는 달리 대학에 진학한 이경의 인간관계는 레즈비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재조직된다. “수이씬 몇 학번이에요?”라는 질문을 받고 수이가 레즈비언바를 벗어나는 일화 등을 통해 소설이 전달하려 하는 바는 비교적 명료해 보인다. 학력과 취향이 개입된 구별짓기의 관문을 두 사람이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 다시 말해 서로의 차이는 곧 계급적이라는 것. 그러나 헤어진 이유를 하나로 정리할 수 없듯이, 그 차이는 중요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학창시절 축구선수였으며 후에는 자동차 정비사로 전신하게 되는 수이는, 전통적으로 남성에게 할당된 영역에 놓여 있다. “짓궂은 장난”이라며 상대 선수의 추행이 묵살되는 등 수이가 겪는 과정은 남성을 중심으로 구조화된 시스템(의 폭력)에 대한 고발의 성격을 어느 정도 띠게 된다. 하지만 수이(의 신체)를 사랑의 대상으로서 간직하고 싶은 이경 역시 수이의 꿈을 이해하지는 못한다. 이경에게 축구와 자동차 정비는 수이의 신체를 소진시키기에 그만두어야 할 것에 가깝다. 이 점은 사랑의 경쟁자 ‘은지’와의 대조 속에서 수이가 어떻게 묘사되는지를 살펴보면 더 뚜렷해진다. 이경의 첫사랑이 수이가 찬 축구공으로 인한 외상으로 시작하고, 이경의 새로운 사랑은 그의 다친 손을 간호사 은지가 소독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그 여름」이 레즈비언이 아니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사랑 이야기로 읽힌다는 소감들은, 성에 대한 고정적 관념(예를 들어 두 인물의 성을 은연중 남성과 여성으로 치환하여 재구성하는 것)을 얼마간 시사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본다면 이 소설에서 분배(계급)의 문제 아래 가려졌으나 그것과 연루되어 있는 사안은 생물학적 성과 수행적 성이 맺는 우연성이며, 그에 대한 관념이 관계에 끼치는 영향력이다. 수이를 잃은 이경의 우울, 나아가 소설의 우울은 곧 젠더의 우울이 아닐까. 줄곧 이경의 시선에 의해 서술되었음에도, 수이가 여전히 미지의 타자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소설은 마지막 순간 다시 돌아보게 한다.
한편 박민정의 「아내들의 학교」는 퀴어의 문제 제기를 근미래에 외삽하는 발상을 보여준다. 가령 「그 여름」에서 이경을 비롯한 레즈비언들은, 50년을 함께해온 레즈비언 커플이 2052년이 되어 결혼식을 올리는 연극을 관람한다. “다들 코를 훌쩍이면서 배우들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156면) 그러나 “외계인이 공습하는 것보다 더 지나친 공상과학동화이자 불가능한 유토피아”(「아내들의 학교」 70면)는 「아내들의 학교」에서는 현실이 되었다. 소설 속 레즈비언 커플인 ‘선’과 ‘설혜’는 결혼했으며, 아이를 입양했다.
소설에서 박민정이 환기하는 문제들 중 하나는 동성혼의 권리를 얻는 것이 과연 규범적 가족관계의 억압을 해체하는가라는 의문이다. “선이 남편이었고 설혜가 아내였다”(67면)라는 진술이 단도직입적으로 제시하듯이, 이성애 부부의 권력관계는 선과 설혜 부부에게서 그대로 재생산된다. 가사노동 및 육아는 전적으로 설혜의 몫으로 배당되며, 부부-자녀 중심의 친족관계 역시 반복된다.
제목이 일러주는 대로 이 소설에서 여성 내부의 권력관계는 결국 ‘학교’라는 표상으로 수렴된다. 설혜가 한때 일원이었던 대학의 여학생회도, 또 현재 회원인 단미협동조합도 다양성에 대해 이른바 시민적 교양을 학습한 조직이다. “‘남편’이 남자든 여자든 중요하지 않았다. 교양 있는 여자들은 그런 걸 묻지 않았고 알게 되어도 놀라지 않았다.”(67면) 그러나 지배적 규율과 강제적 억압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소설 속 대학의 여성운동조직은 “독사마녀”가 있던 여고와 다르지 않다. 예컨대 빈곤이라는 또다른 약자성이 “부잣집 딸”인 자신을 비난하는 근거가 되면서, 설혜는 스스로를 입증해야 할 처지에 몰린다. “너의 진정성”을 묻는 것이라는 미명 아래 설혜가 아웃팅을 당하는 정황 등을 비롯하여, 소설은 여성운동 내에서 소수의 위치였던 레즈비언 운동을 컨텍스트로 끌어들인다.
만약 성을 역전시키고 읽는다면, 「그 여름」과 마찬가지로 「아내들의 학교」 역시 어떤 기시감으로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설혜를 둘러싼 작중인물들의 악의가 노골적인 것 또한 도식성의 징후로 읽힐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아내들의 학교」는, 소수자의 재현(representation)이라는 오래 묵은 과제를 강렬하게 제기한다. 설혜가, 졸업생 선배가 기획한 다큐멘터리 카메라 앞에 서던 모습과, 아이와 함께 「톱모델 서바이벌 코리아」에 출현하는 장면은 결국 포개진다. 즉 소설 속 퀴어는 새롭게 생산된 하나의 이미지로 쉽게 전시되고 소비될 뿐, 퀴어의 혼돈과 고통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고립된다. 작가는 “잊지 마. 이것이 내가 원한 유토피아였다는 걸”(83면)이라는 설혜의 마지막 진술과 함께, ‘페미니스트 유토피아’ ‘레즈비언 유토피아’ 등 이른바 유토피아적 전망에 비판적 질문을 던진다. “입이 트이기도 전에 글자를 들입다 읽히니 자폐에 걸려버린 거야”(57면)라는 협동조합 아내들의 독한 진술이, 페미니스트 지식/이론과 삶 사이의 낙차를 가리키는 것처럼 읽히는 것은 그 질문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5. 시위와 연대 : 그 평등의 꿈
그렇다면 퀴어 존재는 어떻게 가시화되는가. 글을 마무리하는 지점에서 한강(韓江)의 「에우로파」(『노랑무늬영원』, 문학과지성사 2012)를 짤막하게 읽으려 한다. 세계의 폭력과 함께하는 인간의 저항은, 「에우로파」에서는 몸을 바꾸고 다시 태어나는 퀴어의 옷을 입는다. 그런데 「에우로파」에서 “어떤 사람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의 몸을 바꾼다”(89면)라는 진술은, “내 뜻과는 관계없이 내 몸이 남자”(78면)인 ‘나’에 대해 ‘인아’가 한 말이 아니라, ‘나’가 인아에 대해 한 말이다.
소설 속 인아가 감지하는 폭력은, 살이 다 발라지고 뼈만 남아 꿈틀거리는 물고기의 형상 속에 암시된다. 어떤 “끔찍한 일” 이후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죽어가던 인아는 그러나, “완전히 죽은 줄 알았던 화분에서 기이하게 선명한 꽃이 피듯”(82면) 되살아난다. “밖으로 나가는 것 말고는 길이 없었어. 그걸 깨달은 순간 장례식이 끝났다는 걸 알았어. 더 이상 장례식을 치르듯 살 수 없다는 걸 알았어.”(91면) 소설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이라는 이 진술의 핵심은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데 있다. 「에우로파」는 누군가를 위해 싸우는 것보다, 누군가와 함께임에 주목한다.
문자 그대로 시위(示威)란,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를 드러내는 그 행위는 타인과 함께임을 천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아이라인을 그리고 원피스를 입음으로써 자기를 드러낸다. 그런 ‘나’가 거리를 걸으며, 레즈비언 커플이 둔기에 맞아 죽어 있던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는 것은 의아하지 않다. 소설에서 그가 맞닥뜨리는 트랜스포비아는 호모포비아와 연동된다. 10센티 힐을 신고 밤의 번화가를 걷는 ‘나’는 “편견과 혐오, 경멸과 공포의 시선들”(80면)을 견뎌야 한다. 섀도와 마스카라로, 팬티스타킹과 스카프로, 성별을 다시 ‘입는’ 이 크로스드레서의 밤산책은 존재를 건 시위이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인아와 그는 함께 걷는다.
다시 정확히 적거니와, 인아가 되살아난 것은 지하철역에 만장처럼 걸려 있는 색색의 플래카드 속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들을 읽은 후다.
그들은 나에게/죽음을 요구한다./하지만 나는 죽지 않겠다. (86면, ‘인아의 노래’ 부분)
찬반의 형식을 가장한 혐오발언이 티브이 토론에서 점화되던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성소수자 인권이라는 의제가 밖으로 드러난 순간이기도 했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규범으로 치부된 것이 또다른 누군가에게는 “죽음을 요구”하는 것임을 그들은 알고 있었을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내가 나로서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전혀 알지 못하는 낯선 누군가로부터 (생명까지 앗아가는) 위협이 가해지는 곳이다. 사회적 혐오는 힘이 없는 약자에게, 지배적 위치가 아닌 소수에게 자행된다. 이 때문에 그러한 혐오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일상적으로 마주하고 의식하게 되는 사람들도 있다. 스스로를 부정당해본 적이 있는 사람, 모욕당해본 적이 있는 사람은 그 순간을, 그 심정을 결코 잊을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입증해야 하는 시험에 드는 것이다.
알다시피 그날의 토론 이후, 포털사이트 댓글란은 온통 반퀴어적 발언들에 잠식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이미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그날의 발언은 곧이어 심상정의 1분을 낳았고, 당시 유력후보였던 문재인 현 대통령 앞의 무지개깃발로 이어졌다. 존재하기에, 이미 함께라는 사실은 가려질 수 없다. 행동은 있어왔고, 또 함께 계속될 것이다. 퀴어를 사유하는 동시대 한국소설이 가닿은 순간들이 그 평등의 꿈을 더 깊게 앓아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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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네트는, 헤겔이 사회적 투쟁이 인간의 도덕적 충동에서 비롯된다고 봄으로써 마끼아벨리와 홉스의 사고 모델에 결정적 전환점을 부여한 것으로 평가한다. 악셀 호네트 『인정투쟁』, 문성훈·이현재 옮김, 사월의책 2011.↩
- 주디스 버틀러·아테나 아타나시오우 『박탈』, 김응산 옮김, 자음과모음 2016, 129~50면 참조.↩
- 정민우 「퀴어이론, 슬픈 모국어」, 『문화와사회』 제13권(2012) 참조.↩
- 잠재성, 유동성, 복합성, 불안정성 등을 의미하는 퀴어는, 특정한 정체성에 국한되지 않을 뿐 아니라 (게이 혹은 레즈비언 등을 포함하여) 모든 특정한 규범성에 반대한다. 해나 디 『무지개 속 적색』, 이나라 옮김, 책갈피 2014, 182면.↩
- 같은 면 및 버틀러 인터뷰(http://lolapress.org/elec2/artenglish/butl_e.htm) 참조.↩
- 뒤집어 말하면, 한국 보수 개신교는 특정 시점부터 퀴어를 적대적 타자로 정립함으로써 다시 한번 정치세력화했다. 자세한 내용은 한채윤 「왜 한국 개신교는 ‘동성애 혐오’를 필요로 하는가?」,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정희진 엮음, 교양인 2017 참조.↩
- 조의 이 첫번째 도둑은 실패로 끝난다. 개장을 열려고 한 순간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에 의해 제지되고, 조는 가까스로 도망을 친다. 개를 훔치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의 기이한 난투가 있고 난 다음날, 이웃집 모녀와 개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 “너는 루카다”로 시작되는 소설이 “루카였고 예성이었던 너는”으로 끝나는 것처럼, 퀴어 내부의 다른 역사성들은 ‘나’에 의해 수용된다. 아울러 성소수자를 포용하는 교회를 찾은 ‘너’를 조명하는 등 ‘너’의 위치가 개시하는 미래의 다른 가능성 역시 닫아두지 않는다.↩
- 쎄즈윅은 『벽장의 인식론』을 시작하며 동성애/이성애를 규정하는 모순된 관점들에 대해 거론한다. 그 모순된 관점들 중 하나가 소수화 관점(minoritizing view)과 보편화 관점(universalizing view)이다. Eve K. Sedgwick, Epistemology of the Closet,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0, 1면. 보편화 관점에서 보자면, 동성애적 성향은 모든 인간에게 잠재적이며, 동성애/이성애 규정은 성적 지향을 막론하고 삶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쎄즈윅의 보편화 관점은, 이른바 ‘보편성’이 이성애자 시스젠더로 가정된 인간 보편으로 전제되는 경향을 비판적으로 사고하게 해준다.↩
- 루빈은 레비스트로스의 친족관계 분석 등을 통해, 강제적 이성애(동성애 억압)가 여성 억압과 동일한 섹스/젠더 체계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게일 루빈 「여성 거래」, 『일탈』, 신혜수 외 옮김, 현실문화 2015 참조.↩
- 같은 성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결속을 가리키는 동성사회성(homosocial)이라는 조어는 명백하게 동성애(homosexual)에서 유추된 것이지만, 또한 명백하게 그것과 구분된다. 그 안에 호모포비아로 특징지어지는 남성 결속(male bonding)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Eve K. Sedgwick, Between Men,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5, 1면). 쎄즈윅을 경유하여 우에노 치즈꼬는 “호모소셜한 남자가 자신의 성적 주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이용하는 장치가 바로 ‘여성을 성적 객체화’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우에노 지즈코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나일등 옮김, 은행나무 2012, 36면).↩
- 관습적인 독서의 인력 때문에, 퀴어 서사에서 인물의 성별이나 인물 간의 관계가 밝혀지는 지점은 좀더 특별하게 인지된다. 퀴어 코드가 극적 반전을 위해 기능하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얼마간은 그렇다. 영화 「캐롤」(2015)과 「아가씨」(2016)가 동일한 장면의 다시 쓰기를 통해 보여주었듯이, 특히 레즈비언 관계는 일상을 지배하는 섹슈얼리티 규범에 의해서 잘 포착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