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문학초점

 

뒤섞이는 우리 속에서 드러나는 비밀

김성대 시집 『귀 없는 토끼에 관한 소수의견』

 

 

장은정 張銀庭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기하학적 아우라의 착란: 김행숙·이근화·하재연의 시들」이 있음. riyunion@naver.com

 

 

3541김성대(金成大) 시에서 시적 공간은 대부분 동일한 시간을 반복하고 있다. 그것은 특정한 행동의 반복에서 비롯된다. 가령 「둘째주에 온 사람」에서 “우리”는 둘째주마다 찾아오는 “그”를 둘러싸고 토끼들과 함께 주위를 도는데, 어느 순간 그가 사라져도 빙글빙글 도는 것을 멈추지 못한다. 이 끝없는 원환운동 속에서 시의 모든 시간은 둘째주가 된다. 또한 「1950년의 창고」의 시간적 배경인 1950년에는 그로부터 몇십년 후의 창문이나 테니스 공, 줄넘기 등이 공존한다. 몇십년 사이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김성대의 시에서는 특정한 시간대의 “모든 것이 리플레이되고 있”거나(「우주선의 추억」) “여러 날 같은 컷이 반복되고 있다”(「만화에 빠진 윤사월」). 도대체 이 시공간의 반복은 김성대 시에서 어떤 의미일까. 이것이 『귀 없는 토끼에 관한 소수의견』(민음사 2010)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 시간적 반복에도 처음과 끝이 섬세하게 구분되고, 그 안에서 시적 주어의 이동이 발생함을 알 수 있다. 가령 앞서 언급했던 「둘째주에 온 사람」의 첫 행은 “그는 슬로모션으로 왔다”이고, 마지막 행은 “둘째주가 되면 우리는 상세해졌다”이다. 즉 시는 ‘그’가 왔다는 사실의 제시로부터 출발하여 그것의 영향을 받은 ‘우리’에게 도착한다. 대상을 진술하는 시선(視線)으로서만 존재하던 화자가 불쑥 얼굴을 내밀면서 대상을 시야의 중심에서 밀어내게 되는 것인데, 바로 그때 시간의 반복이 발생한다. 시적 주어의 이동은 단순히 대상에서 주체로의 이동이 아니다. 그때 밀려난 대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화자가 바라보는 대상’으로서 남아 있으며, 새롭게 등장한 시적 주체는 ‘대상을 바라보는 자’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김성대의 이 독특한 시공간은 타자와 주체 사이의 팽팽한 시선의 구조로 구축되어 있다. “목맨 사람의 집”에서 우리가 고요한 점심을 차릴 때, 거기에는 우리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셈이다(「목맨 사람의 집」).

그러니 김성대의 이 독특한 시공간에서 단독으로 존재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시선의 공간이기에 온갖 이질적인 요소들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제2부 ‘마임의 방’에 속한 시 대부분이 바로 이 수많은 타자와 그들의 눈에 의해 무한히 분해된 ‘나’들로 들끓는 공간을 묘사하고 있다. “노인이 아이와 일치하는 시간”이거나(「만화에 빠진 윤사월」) “불 켜진 돼지” 안을 열고 들어간 “남자”들이 북적이는 “봄”이거나(「돼지 (안)에서」) “큰형의 재를 곱게 빻아 콜라에 타” 먹은 막내의 이야기인 것이다(「삼형제」). 사실 우리는 이처럼 무한히 분화된 주체를 이미 경험한 적이 있다. 2000년대 시들의 시적 주체 대부분이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김성대의 시는 분화된 주체 자체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의 시는 타자와 주체 사이에서 발생하는 ‘시선의 구조’를 전면에 내세우며, 그것을 프리즘으로 삼아 타자와 주체가 뒤섞이는 현상을 보여준다. 이것은 분명 낯선 시적 관점이다.

김성대의 시적 공간은 시선의 구조 자체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에 분화된 주체를 상실의 표지로도 해방의 표지로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다만 시선의 공간만이 보여줄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극대화시키고자 한다. 「진찰」은 그 가능성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시편이다. 이 시에서는 ‘나’라거나 ‘우리’처럼 명명할 수 있는 화자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목소리로만 존재하는 시적 주체는 “꼭 피를 나눠야 한다면”이라는 전제하에 자신의 눈에 다른 “동물들의 눈”을 넣어보거나 “몸 안의 동물들이 숨는 그늘”을 널어본다. 이 행동은 필시 타자와 주체가 뒤섞이는 공간에 자발적으로 들어서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어째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뜻밖에도 그는 여기서 그동안 감춰져 있던 우리의 비밀이 밝혀지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우물 앞에서는 비밀이 없다고 했으니까/오늘 우리가 밝혀질지 몰라”).

그 비밀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심장이 몸에 꼭 맞”는 잔인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성대의 시는 ‘나’의 비밀을 알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우리’가 섞여 있는 공간으로 걸어들어가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것은 한편 ‘너’의 비밀 역시 ‘나’를 통해 알려질지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있으리라. 2000년대 시에서 수많은 주체들이 자기 고유의 목소리를 내는 다채로운 공간을 경험할 수 있었다면, 김성대의 시는 그 주체들 사이에 거미줄 같은 시선의 그물망을 촘촘한 시적 공간으로 구축함으로써 서로가 함께 있을 때만 생겨나는 ‘우리’의 진실을 드러내고자 한다. 김성대의 시가 보여주는 “오늘을 꼭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