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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기택 金基澤
1957년 경기 안양 출생.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태아의 잠』 『바늘구멍 속의 폭풍』 『사무원』 『소』 『껌』 등이 있음.
samoowon@hanmail.net
절룩절룩
다리를 절룩거리며 그가 지나간다
머리를 절룩거리며 지나간다
팔과 어깨를 절룩거리며 지나간다
점퍼를 절룩거리며 지나간다
발자국도 절룩거리며 그를 따라간다
아무리 똑바로 걸어도 절룩거린다
다리는 조심조심 걷는데 온몸이 절룩거린다
절룩거리지 않으려고 애쓰다가 더 절룩거린다
그 걸음을 보다가 내 눈이 절룩거린다
그 박자를 따라 내 심장이 절룩거린다
그 공기를 숨쉰 내 허파가 절룩거린다
절룩거리는 걸음이 지나가는 동안
좁은 골목길은 더 삐뚤삐뚤해진다
기운 전봇대가 좀더 기울고
헐거운 창문과 대문도 더 삐걱거린다
걸음은 벌써 지나갔는데
허름한 간판 하나가 아직도 바람에 절룩거린다
과일행상 리어카가 울퉁불퉁 지나간다
사과 하나가 툭 떨어져 절룩절룩 굴러간다
막 뛰어가던 아이 하나가 기우뚱하더니
땅바닥에 뺨 갈기듯 넘어진다
가방이 팽개쳐지고 필통과 연필이 절룩절룩 흩어진다
키 큰 여자
내가 쳐다보고 있는 순간에도
그녀는 계속 자라고 있다.
내 시선에서 수분과 양분을 쫙 빨아들이며
수직으로 올라가고 있다.
어느새 나는 까치발을 들고 목을 길게 늘여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다.
이미 충분히 높은데도
발과 다리는 분수처럼 키를 뿜어올리고 있다.
땅바닥 닿은 자리마다
킬힐은 즉시 깊은 구멍을 뚫어 지하수를 퍼올리고
물은 연어 꼬리처럼 사납게 물방울을 차며
공중으로 솟아오른다.
곧은 직선이 무서운 기색도 없이* 솟구치다가
팔과 젖가슴에서 몇방울 튀다가
머리 위에서 환한 부챗살 햇빛을 받으며
사방으로 둥글게 휘어진다.
그녀의 키가 내 눈에 찰랑찰랑 고인다.
몇방울은 뺨 위로 주르르 흘러내린다.
고개를 내렸다가 다시 올려다보면
그녀는 온몸으로 내 시선을 남김없이 갈취하여
곧은 다리 곧은 허리로 키를 만들고 있다.
직선을 빼앗긴 내 키가 구부정하게
졸아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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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金洙暎)의 시 「폭포」에서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를 변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