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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마리 루티 『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 동녘사이언스 2017
좋은 과학이란 어떤 모습일까
하대청 河大淸
국가생명윤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원 daecheong.ha@gmail.com
정확히 기억할 순 없지만 언젠가부터 주변에 진화심리학 이론을 언급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문학 의학 경제학 등 학문적 배경은 제각각이었지만 이들은 인간사와 남녀의 차이를 짝짓기 행동과 같은 동물의 전략으로 곧잘 설명했다. 진화심리학이 대중화에 성공했다는 방증이겠지만, 어떤 이는 여성비하로 여겨질 수 있는 당혹스런 주장도 서슴없이 내놓곤 했다. 말실수 후의 머쓱함은커녕 불편해도 진리는 진리라는 식이었다. 연구로 밝혀진 ‘과학적 사실’이며 호모사피엔스의 ‘자연적 본성’이라는 말도 덧붙이곤 했다. 나로서는 아무리 과학이 상식을 배반한다고 해도 그런 주장들이 어떻게 과학일까 의구심이 들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말하는 ‘과학’과 ‘자연’이 도대체 어떤 종류일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마리 루티(Mari Ruti)의 『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 진화심리학이 퍼뜨리는 젠더 불평등』(원제는 ‘과학적 성차별주의의 시대’, The Age of Scientific Sexism, 김명주 옮김)은 의구심과 궁금함을 넘어 진화심리학의 이런 태도를 진지하게 비판하는 책이다. 『하버드 사랑학 수업』(웅진지식하우스 2012)이라는 책으로 국내에도 알려진 저자는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관한 이론을 20년 이상 가르쳐온 영문학과 교수다. 인문학 전공자가 이렇게 과학을 비판하겠다고 나선 것은 우연히 접한 진화심리학 대중서들 때문이다. 이 책들에는 페미니즘운동이 반세기 이상 싸워온 고루한 성관념(저자는 젠더 프로파일링이라고 부른다)이 소위 과학의 이름으로 버젓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성은 구애하고 여성은 선택한다, 남성은 공격적이고 여성은 보살핀다, 남성은 생산하고 여성은 생식한다, 남성은 바람둥이이고 여성은 성욕이 거의 없다 등등. 모든 과학자들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진화심리학은 사회적으로 지배적인 성편견을 강화하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문제의식이다.
진화심리학자들이 들으면 불편해할 정도로 저자의 비판은 직설적이다. 그녀가 보기에 진화심리학의 추론은 단순하고 유치하다. 자식을 가능한 한 많이 남기려는 진화의 명령으로 남녀의 모든 행동을 설명하려고 들기 때문이다. 남녀 사이의 복잡한 관계들을 모두 젠더 프로파일링이 만든 전형적 남성과 전형적 여성이 벌이는 상호 전략으로 환원시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성은 최대한 많은 자식과 연인을 원하고 여성은 자식의 질을 우선시하기 때문에 이들은 늘 상대를 감시하고 기만한다. 여성과 남성이 공통의 가치나 관심사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은 상상할 수 없다. 섹슈얼리티를 모두 번식의 문제로 만들어버리는 진화심리학은 이렇듯 문화적 규범과 이상이 우리의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모른 척하거나 자신들에게 유리할 때만 인용한다. 그래서 여성이 남성에 비해 처음 만난 이성과 섹스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는 조사결과는 진화심리학자들에게는 여성들이 성욕이 별로 없다는 증거로 쓰인다(110면). 여성들이 낯선 남자에게서 신변의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는 사회적 현실에는 아예 눈을 감아버리는 것이다.
게다가 진화심리학의 설명은 과학이라고 보기에는 추론 과정이 편향되어 있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조신하고 수동적인 암컷이라는 자신의 성관념에 부합하는 영장류들만 진화적 조상으로 간주한다. 암컷들이 성적으로 자유분방하고 쾌락을 위해 섹스하는 보노보는 진화적으로도 현생인류에 더 가깝지만 이는 단지 예외로 치부될 뿐이다. 또한 3장에서 보여주듯이 남성과 여성이 상대에게서 선호하는 자질들이 대부분 일치함에도 대중서의 저자들은 젠더 프로파일링을 부각하기 위해 작은 차이를 과장하기 일쑤다. 우리의 경험과 현대적 삶은 진화심리학이 전파하는 젠더 프로파일링에 일치하지 않음에도(저자가 반복하듯이 누가 아이를 낳기 위해 섹스를 하는가?) 이 ‘과학’은 이런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젠더 프로파일링이 과학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면 우리의 연애문화를 궁핍하게 만들 것이라고 우려한다. “어떤 한 사람이 남성 또는 여성 외의 다른 무엇이 될 수 있는 천가지 이상의 방식을 놓치게”(284면) 되기 때문이다. 자기계발서들이 흔히 그러듯이 남녀의 성차이를 자연화하고 남녀관계를 잘 통제할 수 있는 전략게임처럼 생각한다면, 타인의 불가해성을 인정하고 인내하는 데서 출발하는 윤리적 관계를 맺을 수 없게 된다.
이 책은 한국 출판계에 불어닥친 페미니즘 열풍 속에서 번역되기는 했지만 인문학자가 과학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다른 책들과는 그 결이 좀 다르다. 인문학자가 과학을 비판하면 흔히 인문학자 주제에 감히 과학을 비판한다는 조롱이나 면박을 듣는데, 저자는 영리하게도 또다른 진화심리학자의 주장으로 맞선다. 4장에서 언급하는 진화심리학자들은 조신한 여성이라는 고정된 성관념을 반박하는 논증과 예들을 제공한다. 달리 말하면 진화심리학 대중서가 흔히 묘사하는 것과 달리, 이 분야는 아직 확립된 과학이 아니라 여전히 만들어지고 있는 과학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립된 과학처럼 말하는 것은 이것이 그 발화자에게 권력을 주기 때문이다. “‘과학’이라는 꼬리표를 붙일 때 편리한 점은 자기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비과학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26면)
더불어 이 책은 실험과학(laboratory science)이 아닌 현장과학(field science)의 한 특징을 잘 보여준다. 진화심리학이 근거로 사용하는 동물행동학은 대개 현장에서 영장류를 관찰하고 이 관찰을 내러티브로 구성하는 종류의 과학이다. 소립자나 DNA를 다루는 실험지식과 달리 연구자가 관찰대상과 교호하면서 연구자 자신이 속한 사회의 가치를 투사하기 쉬운 영역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지식과 사회에 대한 중요한 통찰도 제공해준다. 우리 자신의 본성을 다루는 종류의 과학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인 동시에 그 과학에 의해 우리의 본성이 만들어진다. 우리가 질문하는 방식에 따라 다른 답이 나올 수 있고 그 답에 의해 우리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종류의 과학에서 편향적이지 않고 가치에서 자유로운 과학이 과연 가능할지 생각해볼 만하다. 저자는 다수의 진화심리학이 편향적이라고 비판하면서 가치중립적인 과학을 상상했지만 사실 그보다는 어떤 과학이 우리가 함께하고 싶은 과학인지 묻는 것이 더 올바른 질문일 수 있다. 내 생각엔 페미니즘에 ‘편향’된 진화심리학이 더 과학적일 것 같다. 그런 과학이 만들어내는 특이한 인간들의 더 풍부하고 다채로운 연애문화 속에서 살아가고 싶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