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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통감하는 주체, 유무의 경계 너머의 말들
최근 시의 주체에 덧붙여
김나영 金娜詠
문학평론가. 2009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주요 평론으로 「신(新)-자궁에 흐르는 세 혈맥(血脈)」 등이 있음.
1. 시대와 시
2000년대 시에서 아이-화자가 주목을 끌었던 이유는 그들이 선조적인 시간관념에 따라 부모나 형제의 뒤에 놓이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아이-화자는 생물학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현실의 논리에 맞서 나름의 위치를 스스로 선정했다. 나아가 이 화자는 가족 구성원처럼 태생적으로 밀접한 거리를 갖는 이들에게서 자기 존재의 근원을 확인하거나 보장받을 수 없음을 인지하고 실감하는 존재였다. 따라서 이들로 구성되는 시적 정황에서 사회나 가족은 서사화가 불가능한 집단, 역사가 되지 못하는 역사의 잔여로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에듀케이션』(문학과지성사 2012)에 실린 김승일(金昇一)의 시에서 아이-화자에게 가족은 사회적으로 간주된 관계에 불과하다. 실질적으로 보호자의 역할을 해야 하는 어른은 이 아이-화자에게 생략되어 있으며, 오히려 자신을 스스로 보호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만이 막중하게 이 아이-화자의 삶을 구성한다. 사회나 공적인 집단의 방관과 방기를 강조하거나 구체적으로 문제시하지는 않지만, 그런 역할의 공백을 시의 표면에서 역시 공백으로 비워둠으로써 김승일 시의 아이-화자는 드러나는 발칙함에 더하여 그 자신의 개성을 이루는 ‘다른 사정’이 있음을 암시하는 복잡한 존재다. 김행숙(金杏淑)의 첫 시집(『사춘기』, 문학과지성사 2003)에 나타났던 화자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시집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화자는 자신의 비-성년으로서의 면모를 의도적으로 과시하면서 거꾸로 성숙함의 기준은 생물학적인 연령이나 사회적인 지위나 역할이라고 일방적으로 제시하는 세계의 논리에 저항한다.
문학의 역사는 ‘인간의 자유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분야의 역사와 다르게 이해되어야 한다는 밀란 쿤데라(M. Kundera)의 주장은 시의 주체를 본격적으로 논하기에 앞서 살펴볼 만하다.1 그는 기술과 문학의 역사를 비교하면서 “만약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하지 않았다면 다른 누군가가 발명했을 것이다. 그러나 로렌스 스턴이 ‘스토리’가 없는 소설을 쓰리라는 미친 생각을 품지 않았다면, 어느 누구도 스턴 대신 그것을 하지 않았을 것이며 소설의 역사는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과는 달랐”2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문학의 역사는 누구나 하지만 아무도 하지 않는 바로 ‘그 생각을 표현하기’를 감행한 개인들의 역사이기도 하다. 2000년대 시에서 주목할 만한 주체의 형상이 보여주듯이, 문학의 역사는 사회나 정치적 현실에서의 역사의 의미와 정확하게 맞물려 기록되지 않는다. 오히려 당대의 사건들을 긴급히 수집하고 해석하는 역사적 기록의 방식에 반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신문과 텔레비전 뉴스에서 보도되는 사건의 형식과 내용이 곧장 문학작품 속으로 옮겨오지 않을뿐더러, 문학은 그런 기록과 전달의 방식으로는 사건을 온전하게 재구성하기는커녕 왜곡하고 훼손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자의 예민하고 예리한 기억에 의존한다. 여기서의 기억은 국가나 사회집단이 주체가 되는, 집단기억과 구별되어야 한다. 개인의 기억은 많은 경우에 집단기억과 분리되지 않을 정도로 밀착해 있다. 때문에 분리된 개인의 기억은 그 자체로 자신이 속한 세계, 국가와 사회의 집단 내에 속하면서도 그곳의 집단적인 인습과 문법에 매몰되지 않으려는, 주체화에 대한 의지의 발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 나눠지지 않는 주체들
최근에 발표된 박상수(朴相守)의 글3이 우선 흥미롭고 의미있게 읽히는 지점 역시 시와 시대를 함께 사유하는 문제틀에 있다. 10년 단위로 시대를 구분하고 그 각각의 시대에 쓰인 작품들의 특징을 몇가지로 통합해보는 시도는 익숙한 편이다. 하지만 2000년대와 2010년대의 시와 비평을 구별하는 그의 관점이 새로운 해석을 도출할 수 있는 이유는 당대의 중대한 사건들을 기점으로 삼아 시기 구분에 포함시키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세월호참사와 같은 국가적 사건과 문단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으로 일어난 문단 내부의 사건들을 당대의 사건으로 언급한다. 그러나 그 사건들이 당대의 시나 비평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는 대신 그와 같은 여러 현실적인 문제의 정황을 최근 시의 특징을 파악하는 일에 겹쳐봄으로써 정치·사회 문제로 대변되는 시대적 특수성을 문학작품 속에 드러나는 주체의 변모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참조로 삼는다.
하지만 이 글의 후반부에 이르면 초반부에서 2000년대 시의 주체가 사회와의 길항관계 속에서 어떤 특징을 가졌는지를 설명하는 관점이 다소 흐려진다. 이 글의 주된 주장은 “한국시의 흐름이 2000년대의 ‘윤리적 모험’에서 2010년대의 ‘윤리적 책임감’으로 변화했”다는(287면) 것으로 요약될 수 있을 텐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그는 2000년대 시의 경우 김행숙 김승일을, 2010년대 시의 경우 송승언 황인찬 백은선을 예로 든다. 그리고 그들의 시 작품을 시대와의 상관성이라는 일관된 관점에서, 그들 주체의 형상을 발견하는 방식으로 분석하고 그 변화의 근거를 제시한다. 하지만 동일하게 “2017년의 한국적 현실”(284면)을 언급하며 송승언 황인찬 백은선의 시를 분석할 때와는 달리 안희연(安姬燕)의 시를 언급하는 글의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거꾸로 비평적 담론들을 통해서 시의 주체가 갖는 특징을 역설한다. 특히 세월호참사를 계기로 ‘나’와 ‘세계’를 매개하던 것의 상실을 실감했을 것이라는 “2010년대 중반 이후 시인들”에 대한 추측에 더해, “기본적인 삶을 다시 살기 위한 조건들을 밑바닥에서부터 차례로 만들어나가야 하는 지극히 평범하지만 중요한 의무와 책임”이 그 시인들에게 주어졌다는 비평적 판단을 기준으로 삼아서 “‘시적 주체의 윤리적 모험’이 ‘일상 재건의 윤리적 책임감’으로 기울어진 최근 한국시단의 변화”(289면)라는 이 글의 핵심적인 주장에 이르는 데에는 논리적인 모순이 있다. 2010년대 초반(송승언 황인찬 백은선)의 시와 2010년대 중후반(안희연)의 시를 비교하고 대조하는 과정에서 우선 2010년대를 가르는 기준이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거니와, 전자의 경우에는 개별 작품 분석에서 드러나는 시적 주체의 특징을, 후자의 경우에는 자신의 분석에 더해 그 작품에 가해지는 비평적 담론의 양상을 판단의 근거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안희연 시에 대한 비평적 관점에 문제를 제기하는 부분에도 이론의 여지가 있다. 그 스스로 최근 시와 비평이 공유하는 문제점으로 “‘진정성’의 언어를 지나치게 추구한다”고 지적하며 그 과대평가의 근거로 양경언(梁景彦)의 글에서 “이미 가진 기대로 작품을 너무 빨리 구원해내려는 조급함이 느껴진다”(292면)는 점을 들었는데, 안희연 시에 대한 그의 비교적 간단한 분석 역시 “2010년 중반 이후”라는 지평을 당겨옴으로써 어떤 기대와 조급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다시 2010년대 시의 주체는 자신과 세계의 매개가 사라짐을 경험한 세대의 반응을 통해 2000년대 시의 주체와 단절된다는 박상수의 주장으로 돌아가보자. 최근의 시들에서 마주치게 되는 주체는 손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세계 속에 무력하게 빠져 있는 몸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들 주체는 생각이나 마음의 차원을 드러내는 과정으로, 이미 있는 세계와 그것을 살아냄으로써 새로 태어나는 나의 역학 관계를 흥미롭게 그려 보인다. 2000년대의 발칙한 주체와 다르긴 하지만, 세계에 결속된 가운데 자기의 고유한 언어를 통해 그 관계를 드러내 보이는 이 주체의 태도에도 모험적인 데가 있다. 박상수는 최근 시의 주체를 모험을 포기한 개인, 윤리적 책임감을 떠맡은 개인으로 정의하면서 세월호참사와 같은 고통스러운 현실의 경험이 각자에게 미치는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영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겠으나, 작품의 차원에서까지 개인을 너무 포기하지는 말아달라는 당부로 글을 맺는다. 이 당부는 파괴된 세계를 재건해야 한다는 건전한 공동체적 목적의식이 부각되는 주체를 품는 시에는, 시가 절망 속에서 모두를 구원할 수 있다고 보는 수상한 믿음이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과 염려의 표현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시의 주체는 어떤 경우에도 고정적으로 판단할 수 없으며, 시대적인 맥락에 따라 변화하는 스탠스로서만 이해할 수 있으므로 ‘윤리적 모험’을 하는 주체와 ‘윤리적 책임감’을 갖는 주체를 일시적으로 구분해서 부를 수는 있을지언정, 모험과 책임감이 그 주체들에게 각각 고정된 속성이 아님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여기에 더해서 주체라는 지칭이 애초에 모든 것과 무관하게 홀로 있는 ‘나’를 가리킨다기보다는 원하든 원치 않든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과의 다층적인 관계에서 발생하는 존재 방식을 의미한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역시 박상수의 글에서 사회나 국가와 같은 중간항 없이 세계를 직접 대면하는 주체를 최근 시의 한 특징으로 보는 관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가령 황인찬(黃仁燦) 시의 경우 주체는 지금 여기를 구성하는 것이 가시적인 풍경만이 아니라 주체의 감각에 떠오르는 다른 시간과 공간의 기미이기도 하다는 특징적인 세계관을 보여준다. “그것을 생각하자 그것이 사라졌다”(「그것」, 『구관조 씻기기』, 민음사 2012)는 구절에서 보듯, 그 주체는 세계를 매개 없이 경험하면서도 그 곤란을 드러내지 않는다기보다는 자신의 ‘생각’ 속에 스스로 기거함으로써 존재의 근거를 세계가 아니라 자신으로 돌려놓는, 존재론적 전환을 보여준다. 황인찬의 시는 일련의 조건에 미달하는 존재를 쉽게 잉여로 치부하는 현실에 놓여, 세계와 나의 관계를 좌우하는 기준을 바깥에서 개인의 내면으로 가져옴으로써 극도로 고독한 주체를 형상화하고 그를 통해 현실에서 주체화에 관여하는 사회적 긴장을 유발하는 효과를 낸다. 그런 점에서 황인찬의 시와 안희연의 시는 서로 공유하는 지점이 있다. 안희연 시의 주체가 국가나 사회를 호출해서 개인과 세계 사이에 가로놓인 파국적 상황이나 절망하는 개인의 심정의 공간화를 시도한다는 데 동의하더라도, 과연 이 주체가 보여주는 고통스러운 정감을 윤리적인 책임감이나 죄책감으로만 이해할 수 있을지를 되묻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주체의 고통은 과연 균열을 봉합하려는 자의 것일까.
박상수가 최근 시와 비평에서 무너진 공동체의 기반을 재건하려는 욕망을 지닌 주체를 발견하면서 김홍중(金洪中)의 진정성 개념을 언급하는데, 최근 시에 더 적합한 개념은 ‘파상력(破像力)’이다. 진정성이 마음의 상태를 설명해줄 수 있는 개념이라면 파상력은 ‘부서진 마음’의 형태만을 겨우 상상하게 하는 힘이다. 그는 세월호참사 이후의 한국사회를 진단하면서 그중에서도 ‘언어의 파편들’에 주목한다. 그것은 역사적 기록에 소용되는 언어와는 달리 합리적이지 않으며, 따라서 분석의 대상으로 삼을 수도 없다는 특징을 갖는다는 점에서 사회학자로서의 자신이 처한 곤경을 지시하는 것이기도 하다.4 그는 이 마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경로로, 합리성이 아닌 합정성과 합의성을 토대로 삼는 “통감의 해석학”을 고안한다. 그에 의하면 통감은 주체가 대상의 내부로 들어가는 공감과 달리, 대상이 형성하는 마음의 집합적 흐름에 인식 주체가 휩쓸려 들어가는 마음의 역학을 동반하는 것이다. 따라서 통감하는 주체는 자신의 무력과 불능을 고백하는 자이기도 하다.
김홍중이 고백하듯, 어떤 사회적인 현상에서도 주관적인 판단을 자제하고 학문적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회학적인 글쓰기에서는 관습적으로 ‘나’가 삭제된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그런 글쓰기에서 ‘나’가 다시 소환되었다는 현실의 변화를 새겨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고백은 비단 사회학자의 것만은 아닐 것이다. 최근의 시에서 황인찬의 주체가 ‘나’의 실감, 가장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자신의 것이라 부를 수 있는 사정의 가장 좁고 깊숙한 곳까지 닿아 있는 그 ‘주관의 느낌’을 통해서 반대로 세계라 부름직한 것, 가장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대상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면,5 안희연의 시가 문을 잠그거나 여닫으며 하나의 방을 반복해서 들여다보고 그 속에 있는 것들에 대해 묘사하는 일로 ‘자기 내면’을 드러내면서, 그 내면이 곧 자신이 고통스럽게 경험한 세계의 실상이기도 하다는 확인을 통해서 피할 수 없이 한 세계와 결속되어 있음을 실감하는 주체를 그려낸다면 이들의 시적 진술 속에도, 이 주체들의 마음에도 이 파국적 세계에 대한 이루 말할 수 없음의 체감과 고백이 전제되어 있는 게 아닐까. 문과 방,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화자는 안희연의 시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백색 공간」(『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창비 2015)에서 방 안에서 고요하게 자라고 있는 나무를 보는 화자는 겁에 질려 있다. 고요한 나무를 보며 “침묵”하는 존재의 존재방식(“물도 햇빛도 없이/침묵이 고이면 얼마나 깊은 두 눈을 갖게 되는지”)을 바라보는 화자는 어떤 사건을 목격하고도 그에 합당한 말을 찾지 못해 증언하지 못하는, 방조자로서의 죄책감에 시달리는 자를 떠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시의 핵심적인 의미는 첫 구절이기도 한, “나무가 자라고 있다”는 선언에 있다. 나무가 두려움에 떨며 침묵하는 주체의 형상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자신의 존재방식으로서의 침묵을 강화하며 새로 갖게 되는 눈을 통해서 계속 보게 될 것이 있으며, 그런 감시와 확인의 추적이 뒤늦은 고발을 가능하게 할지도 모른다. 계속 자라는 나무는 지금 그 방에 갇혀 있지만 언젠가는 그 방을 부수고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안희연 시의 주체가 개인보다 사회를 우선시하여 당위적인 대답을 가하고 질문에 대한 다양한 대답의 가능성을 차단한다는 해석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라파엘」(『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에서 주체는 공터와 다락 중 하나가 아니라 그 장소들이 공존하는 세계를 보고 있다. 길이 끝난 공터의 풍경과 그 위에 닫힌 다락의 풍경이 겹쳐진다. 이 겹쳐짐을 분리하지 못하(않)고 그대로 둠으로써 “다양한 대답의 가능성”(290면)을 품고 있다는 말을 하자는 게 아니다. 시인이 다락이라는 좁고 어둡고 그 속을 알 수 없는 장소를 시의 표면에 드러냈을 때, 공터와 다락이 갖는 비유적 의미만을 읽어내는 것이야말로 어떤 당위를 전제한 읽기가 아닐까. 당장에 사용하지 않는, 혹은 부서지고 망가진 물건들을 보관하는 용도로 쓰는, 창고와 같은 기능을 하는 공간으로서의 다락과 그 속에 갇힌 존재는 표면 그대로의 어린아이(세월호의 아이들)이기도 하지만, 이 세계(파편화된 언어)의 한 귀퉁이에 갇혀서 엄연히 존재하면서도 명백히 볼 수 없는 자신의 파상이다. 이것이 “사회와 길항하는 개인”(291면)이 아니고 무엇인가.
3. 박소란의 경우: 부사의 활용이 드러내는 결속의 세부
박소란(朴笑蘭)의 시는 자주 생활의 무게를 보여준다. 그 무게는 특별하다. 첫 시집 자서에 썼듯이, 현실에 없는 어머니의 육체는 시인이 입는 어머니의 스웨터를 통해서 그의 어깨를 짚어주는 무게로 있다. 낡아 해진 스웨터의 무게감 같은 역설적인 감각이 박소란의 시에서는 낯설지 않다. 거의 없는 이 무게는, 그러나 물리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 어머니라는 존재의 역사를 뒤늦게 이해하는 딸의 입장에서 경험하는 시간의 두께에 가까운 것, 이를테면 심리적인 압력과도 같아서 가벼울수록 무겁다. 이런 사정으로 어떤 무게는 존재를 억압하기는커녕 살아가게 하는 힘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렇게 ‘없을수록 있는 것’들이 박소란 시의 주체에게는 벗어날 수 없이 자신이 속해 있는 세계의 실상을 이룬다.
그 특별한 쓰기에서 부사의 활용을 빼놓을 수 없다. 박소란의 시에서 부사는 그 자체의 의미보다 다른 것들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의미에 치중한다. 또한 부사는 동사나 형용사처럼 어떤 존재의 존재하는 양태를 수식함으로써 그 존재 양태를 강화하는 역할도 한다. 부사는 문장을 구성하는 필수 요소가 아니기에 언제든 생략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박소란의 시에서 그것은 없어도 되는 자리에 굳이 있음으로서 수상한 맥락을 만들어낸다. 그로써 ‘없어도 되는 자리’와 그런 자리에 ‘있는 것’에 대해서 동시다발적인 주목과 환기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누구든 사랑할 수 있다는 것
집 앞 과일 트럭이 떨이 사과를 한 소쿠리 퍼주었다
어둑해진 골목을 더듬거리며 빠져나가는 트럭의 꽁무니를 오래 바라보았다
낡은 코트를 양팔로 안아드는 세탁소를
부은 발등을 들여다보며 아파요? 근심하는 엑스레이를
나는 사랑했다 절뚝이며 걷다 무심코 발길에 차이는 돌멩이
너는 참 처연한 눈매를 가졌구나 생각했다 어제는
—「돌멩이를 사랑한다는 것」(『심장에 가까운 말』, 창비 2015) 부분
부사가 쓰이는 대상은 주로 가시적인 것들이다. 늦은 저녁의 골목길을 빠져나가는 과일트럭, 걸어가는 사람과 그 사람의 발길에 차이는 돌멩이 같은 것들. 하지만 부사로 읽어내야 하는 대상의 속성은 비가시적이다. 트럭의 더듬거림, 그 더듬거림에 머무는 시선, 기울어진 걸음, 계산되지 않은 각도로 날아가고 떨어지는 힘. 그러므로 쓰임의 자리를 지시하는 부사의 있음/없음은 세상에 결속된 자의 눈에 ‘너무’와 같은 렌즈를 씌우거나 벗기는 사정과 흡사하게 이해할 수도 있다. 구체적인 생활(보이는 세계)은 그저 누군가의 매일을 이루는 생활에 대한 표면적인 진술과 묘사가 간과하는 내용 이면의 기미(결속감)를 눈치채게도 한다. 이 기미는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으로서 부사가 문장 속에서 갖는 의미상의 존재감과 흡사한 역할을 한다. 이때 시의 주체는 자기를 구체적으로 말할수록 그렇게 말하지 않을 도리를 되묻게 된다. 자기 자신을 향하는 그 말은 있을수록 자기와 멀어지는 것, 내가 이 세계와 벗어날 수 없는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도리 없이 받아들이는 일에 가깝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지막 구절(“우연히 날아온 무엇에라도 맞아 철철 피 흘리지 않을 도리가”)에서 생략된 술어로 추정되는 ‘없다’는 이 시의 전반을 관통하는 화자의 자기에 대한 진술처럼 보인다. 어떻게, 왜, 어디에서, 무엇으로부터 나는 없나. 시의 서두에서 화자가 적는 목록,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다. 화자에게 사랑의 대상은 구체적인 생활의 부분들로 나타나고, 그 생활의 부분을 통과하는 화자의 개인적인 감정의 회로는 생략된 채 있다. 이 있음과 없음, 모르는 채로 알고 있는 것이 사랑의 핵심이 아닐까. 그러니 사랑에 대해서라면 화자가 더 말하지 않을수록 독자는 더 알게 된다. 늦게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마주친 과일장수와 세탁소 주인에게서 화자는 다정과 피곤을 본다. 화자는 그것을 볼 뿐 말이 없지만, 그런 다정과 피곤에 대한 말없음에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길고 깊은 이야기가 있다.
이 비가시적인 드러남, 비자발적인 감응을 통감으로 바꿔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생활의 세부를 구체적으로 기록하는 형식의 이면에, 그 세부가 나에게 주었던 감정의 동요와 같은, 기록하지 못하는 기억의 발생이 그와 같다. 개별과 보편, 구체와 추상을 가로지르며 결국에는 어떤 고통과 접합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사랑이 아닌가. 사랑은 이 시에서 “지친 얼굴”과 말없음과 열에 들뜬 몸의 오늘과 가벼워진 몸의 내일을 연결한다. 이 연결은 통증의 상태가 오늘에 내일을 잇대고 겹치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내일의 양가적인 속성을 인지하고 그것을 인정하게 한다. 내일이 오면 내 몸의 아픔은 가시겠지만 반찬은 상할 것이라는 대비, 그 위로 사랑에 대한 친구의 말과 나의 실감의 대비가 겹쳐진다. 이런 통감의 주체는 오늘 자기의 아픔과 친구의 상실감을 함께 겪을 뿐, 내일은 나아질 것이라고 전망하지 않는다. 사랑의 주체는 자신의 아픔을 비교적 견딜 만한 것이라고, 아니 이 세계 속에서라면 자신은 아프지 않다고 말하는 자다(“어째서 나는 이토록 아프지 않은 건지”). 이것은 기대도 체념도 아니다. 그의 아픔이 “이토록”으로 자각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나의 아픔을 있음과 없음으로 나누어 말하지 못할 때, 그 아픔은 ‘이토록’을 통해서 빗금과 같은 세계를 환기하기도 한다.
폐품 리어카 위 바랜 통기타 한채 실려간다
한시절 누군가의 노래
심장 가장 가까운 곳을 맴돌던 말
아랑곳없이 바퀴는 구른다
길이 덜컹일 때마다 악보에 없는 엇박의 탄식이 새어나온다
노래는 구원이 아니어라
영원이 아니어라
노래는 노래가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어라
다만 흉터였으니
—「노래는 아무것도」(『심장에 가까운 말』) 부분
박소란의 시는 있음/없음이 가시적/비가시적인 것을 구분할 때처럼 대상에 대한 판단일 뿐만 아니라, 개인의 기억이나 내상으로 인한 통증처럼 나와 세계가 분리될 수 없이 결속됨으로써 겪을 수 있는 차원의 것을 말할 때 쓰이는 존재론적인 판단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거기에는 시적 주체의 언어에 대한 남다른 포착이 드러난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 “나를 실어보낸 당신이 오래오래 아프면 좋겠다”에서 우선 느껴지는 것은 헤어진 당신에 대한 ‘나’의 깊은 원망이지만, 이 한마디가 시의 마지막에 놓임으로써 속하게 된 전반(全般)의 맥락 속에서라면 당신의 안부에 대한 ‘나’의 기대로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미워하는 마음과 그리워하는 마음은 그러나 서로 다른 마음이 아니다. 그 두개의 마음이 미묘하게 얽힌 저 바람의 문장은 박소란 시의 주체가 세계를 통감하는 방식으로서의 사랑을 요약해서 보여준다.
폐품 리어카 위에 실려가는 오래된 기타 하나를 발견하고, 이 우연한 마주침이 떨어져 있는 나와 당신을 연결한다. 리어카에 실려가는, 낡아 버려진 기타를 마주하고 그 쓸모없음의 실상 가운데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주체에게 이 비가시적 관계의 발생은 리어카가 지나가는 “길”의 속성에 따라 구체적으로 감지된다(“길이 덜컹일 때마다 악보에 없는 엇박의 탄식이 새어나온다”). 세계의 한 부분으로서 길의 요철이 심할수록 그의 통증도 커진다. 길 위의 리어카, 리어카 위의 기타, 기타로서의 주체는 그 양상만 달리할 뿐 한 세계와 주체의 관계를 은유한다는 점에서 서로 겹쳐지고, 그 겹쳐짐에서 주체의 통감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최근에 일어난 사건을 떠올리고, 그런 세계의 파국을 목도하고 그로 인해 부서진 마음과 말들이 주는 이차적인 고통에 속수무책으로 사로잡혀 있는, 통감하는 주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면 과잉된 해석일까.
하지만 이 시가 애초에 노리는 것 가운데에도 그런 ‘과잉’이 있다. 앞서 보았듯 이 시를 읽고 하나의 풍경을 그려내고 나면 그다음에는 소리만이 남는다. 거친 길의 표면이나 폐품이 겹겹이 쌓여 위태로워 보이는 리어카와 무거운 리어카를 겨우 지탱하는 낡은 바퀴 등은 그저 풍경으로 지워지고, 빛바랜 통기타 하나만이 그 자리에 있게 된다. 기타는 거의 소음에 가까울 소리를 내지만 나는 그것을 “노래”로 듣는다. 이 들림은 불규칙하고 거친 음마저도 규칙적이고 고운 음으로 바꿔 듣는 마음의 역할을 강조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 세계에 통용되는 노래라는 말에 깃든 아름다움의 의미를 재고하고 새로 쓰는 일에 가깝다. 여기서 노래는 모든 부서진 것들 가운데에서도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소리와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 소리는 듣는 이의 상태를 조금 변화시킨다. 이 조금의 변화는 구원이나 영원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그저 “한 시절 누군가”의 것을 ‘모든 순간 나와 당신’의 것으로 돌려놓는 의미에서 흉터처럼 있다. 이 표시는 아프게 구르는 나와 당신의 세계에 대한 목격이 우연한 마주침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그 사건이야말로 모든 소리를 노래로 변환하게 하며, 누구에게나 들리는 소리가 누군가에게는 노래로 들린다는 점에서 나의 것으로 번역된 언어이기도 하다. 그 “심장 가장 가까운 곳을 맴돌던 말”과 바퀴의 구름은 주체와 세계를 대신하는데, 박소란 시의 미덕은 바로 이 사이에 부사 “아랑곳없이”를 배치함으로써 생겨난다. 이 말은 나와 세계의 의미에 동시에 영향을 미치면서 참견이나 관심 없음의 자체적인 의미를 있음으로 돌려놓는 효과를 발생시킨다. 나의 노래와 폐품 리어카의 운동은 이러한 방식으로 결속되면서 탄식하는 기타와 같은 주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탄식하는 기타는 그 자체로 버려진 것들의 세계를 지시하지만, 그 세계로부터 나는 자신을 증명하는 말을 길어올린다. 이 말이 박소란의 시가 된다.
4. 한인준의 경우: 정합하게 말하려고 부정합의 세계를 구축하는
한인준(韓仁埈)의 시는 말하기의 곤란함을 보여준다. 말이 말하는 자에게 곤란을 안겨주는 이유는 간단하지 않다. 우선 말은 말하는 자의 처지에서 발생해 그 말이 닿는 자의 처지에 도달할 때 애초의 정확성을 상실한다. 고유의 문법을 갖는 말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회의 문화를 덧입고 있으며, 개인에게는 저마다 그 말을 이해하는 방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시의 곤란은 일부분 번역의 그것과 닮아 있다. 해석의 차원까지를 미리 고려하는 자의 말하기에는 전전긍긍하는 주저함이 드러난다. 한인준의 시에서라면 목적어가 지워지고 주어와 서술어의 자리가 뒤바뀜으로써 원칙적으로 문장의 파괴가 일어나고 그로 인해 의미 전달이 불가능해지는 지경에 이른다. 다음으로 이 주체는 자신이 도달하고자 하는 자리와 역할에 미달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데, 그의 말은 접속사의 자리와 역할을 실험적으로 배치하고 변경함으로써 오히려 경험을 초과하는 사태를 그려 보인다. 한인준의 첫 시집의 제목인 ‘아름다운 그런데’는 단순히 ‘그런데’라는 역접의 역할을 하는 접속사를 아름답다고 이르는 말로 볼 수도 있겠으나, 이 말은 ‘아름다운’과 그다음에 오는 대상 사이에 순조롭고 원활한 의미 작용이 불가능한 상태, 즉 불편하고 불온한 이해관계가 놓여 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아름답다는 판단과 그 판단의 대상이 여전히, 혹은 아직도 만나지 못한 상황이며 이 상황에 대한 은유로서 이 말은 문장의 차원에서도 미완의 상태를 보여준다. 아름답다는 가치 판단과 아름다운 대상의 확인이 관계 없는 상태로 관계를 맺는 사정을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한인준의 주체는 불온한 문법의 차원에서 더 나아가 문법 자체를 거론하는 것이 불가능한 사정을 구상하고 그것을 시의 형식으로 실험한다.
그것을 생각하다가 그것은
이것이 되었습니다
나는 이것을 옷장 속에 구겨두고 어항 속에 풀어두고 꽃병 속에 꽂아두고
이것에는 단어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어두운 곳에서 헤엄치다가 가만히 시들어버립니다. 아득한 나라 알 수 없는 숲 속에서 이름 모르는 새가 울고
내 곁에 있어도 그것인 것들
(…)
그것은 막막하고 이것이 먹먹합니다. 내가 지나가고 나를 지나가는
내 곁에 없어도 이것인 것들
—「설명」(『아름다운 그런데』, 창비 2017) 부분
말하기의 곤란은 ‘이것’과 ‘그것’을 가르는 호칭과 문법에서 비롯된다. 분리되어 존재하는 서로 다른 대상을 이를 때 생각 없이 쓰게 되는 이것과 저것이라는 지시대명사는 오히려 이 화자에게 인식의 혼란과 말하기의 곤란을 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옷장에 넣은 옷, 꽃병에 꽂힌 꽃, 어항에 풀어둔 물고기는 분명히 다른 것이지만 똑같이 이것, 혹은 그것으로 지칭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옷과 꽃과 물고기가 모두 이것이나 그것으로 말해지는 것은 의미의 차원에서 부당해 보이지만 화자와 그들이 맺는 관계의 차원에서는 공평한 일이다. 여기에 더해서 옷장, 꽃병, 어항처럼 그들이 속한 세계에 의해 짐작할 수 있을 뿐인 지시 대상에 관해서라면, 옷과 꽃과 물고기라는 구체적인 명칭보다는 이 시의 경우처럼 이것이나 그것으로 지시하는 것이 의미를 전달하는 차원에서는 더 정확한 말인지도 모른다.
“내 곁에 있어도 그것인 것들”과 “내 곁에 없어도 이것인 것들”이라는 진술은 화자에게 있어서 어떤 대상이 있음/없음으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전적인 정의에 따르면 이것과 그것이라는 지시의 구분은 내 곁에 있음/없음으로 가능한데 화자에게 있어서 “내 곁에” 있음/없음은 가시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화자는 그와는 다른 차원의 존재 방식을 생각하고 설명하려는 곤란에 처해 있다. “그것은 막막하고 이것이 먹먹합니다”라는 진술은 화자의 곤란이 말의 의미와 활용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를(“탁자 위에 가지런히 놓인 손목”은 “하얗고” “가늘고” “멍들”었다) 확인한 후, 그런 문법으로는 설명되지 못하는 차원의 존재를 상대하는 일에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사실 애초에 이 진술에서 그것과 이것은 나에게 단순한 비교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것과 이것에 붙은 조사 ‘은’과 ‘이’가 의미하듯이 그것과 이것이라는 대상, 혹은 그 대상들의 속성으로서 막막함과 먹먹함은 서로 다른 층위에 속하는 것으로 구분된다. 조사의 활용으로 그것과 이것이라는 대상과 그들의 속성이 단순한 비교의 차원에 놓여서 해석되는 일을 방지하는 이유는 그들의 ‘다름’이 같은 기준으로 판단되는 결과에 따르는 게 아니라 애초에 측정하거나 측량할 수 없는 상대라는 점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다. 합리적인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다름’은 심리적인 동인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명확하게 말해지지 않는 이 심정에서 한인준 시의 주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런 거 있잖아
그런 게 뭔데
서로 마주 보고 앉은 탁자에서 ‘그런’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는다
왜 자꾸 나는 당신에게 ‘그런’ 걸 말하고 싶은 걸까
그런 거 있잖아
그런 거라니
나는 탁자 위에 놓인 빈 꽃병을 본다
—「그런 날」(『아름다운 그런데』) 부분
‘이것’도 ‘그것’도 아닌 ‘그런 거’는 또 무엇일까. 인용한 이 시의 도입부는 일상의 대화를 떠올리게 한다. 화자는 자주 ‘그런 거’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이것과 그것이 가리키는 어떤 대상보다 (화자의 입장에서) 더욱 구체적인 것을 가리키며 (청자의 입장에서) 더욱 모호한 것을 의미한다. ‘그런’은 거의 나의 것에 가까운 말이다. 이 수사는 나의 입장과 생각만을 함의할 뿐이어서 당신의 세계에 대한 이해에는 닿지 못한다. 인용한 다음 부분에서 이 시의 화자는 우두커니 홀로 남아서 ‘꽃병’을 생각하는데, 그 생각 속에서 꽃병에 물이 담기고, 부서지고, 그 속의 물이 화자를 젖게 하기도 한다. 꽃병이 부서지자 꽃병을 사러 나서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지 못하는 화자의 모습은 자신의 생각을 지속할 뿐 그 생각이 발생한 근원으로 돌아옴으로써 생각의 과정이나 방법 자체를 스스로 반성하지 못하는 자의 모습을 떠올리게도 한다.
생각에도 여러가지 길이 있어서 하던 생각만을 지속하는 생각은 자신이 생각하는 대상을 설명하지 못하거나 설명했다는 착각에 이를 수 있을 뿐인데, “마르지 않은 채로 돌아다니는 사람들” “모두가 젖어 있다”는 화자의 진술은 자신의 생각과 무관하게, 자신의 생각과 거리를 둔 채로 세계의 속성을 목격한 자의 증언처럼 보인다. 이 불능과 착각이 세계의 속성이 될 때,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속성을 나누어 갖는다. 화자가 당신과 화해할 수 없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말하려는 대상과 그것의 상태는 나에게만 있고 당신에게는 없다. 하물며 나의 세계는 말의 무능과 착각을 일상적 태도로 삼고 있지 않은가. 그런 이유로 나는 거듭 당신과 멀어진다. 말하려는 대상과 그것의 상태는 나에게만 있고 당신에게는 없다. 이 엄연한 경계가 화자에게 “생각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게 한다. 경계와 그 너머를 보는 자는 자신의 세계를 위반하는 주체다. 한인준 시에서 생각은 말 없음을 침묵의 있음으로 변환하며 나와 당신의 경계에 집중한다.
5. 말의 있음과 세계의 어쩔 수 없음6
시의 윤리가 ‘나’와 세계의 관계에서 발생한다고 할 때, 박소란과 한인준 시의 주체는 세계와 결속된 관계 양상을 통해서 ‘윤리적 모험’과 ‘윤리적 책임감’이라 할 만한 미덕을 구분 없이 획득한다. 이들 시에서 파편적인 언어로만 형상화할 수 있는 세계에 결속된 주체, 달리 말해 통감하는 주체는 자기만의 말(하기)을 구상한다. 그 말하기는 탈구된 현실의 문법을 목도하면서 그것을 재조립하는데, 그렇게 현실에 결속됨으로써 현실을 넘어서는 말이 이들 시의 주목할 만한 특징을 이룬다. 공통적으로 이 주체는 있음/없음이라는 이분법이 지배적인 현실의 세계를 목도하고 있다. 이 폭력적인 논리 위에서 시의 주체는 존재론적인 질문을 거듭하고 있다. 그들이 계속하는 것은 무엇이 있다/없다는 확인이 무엇에 의해, 어떻게 가능한가, 나아가 있음/없음의 구분이 왜 필요한가를 묻는 일이다. 예컨대 통감의 주체에게 파국적 세계에 대한 실감으로서 나와 세계의 파손된 관계에 대한 실제적인 감각, 혹은 마음이라고 칭해지는 그것은 매일의 생활 속에서 있는 듯이 없고, 없지만 있는 일이 비일비재하므로 있음/없음의 방법으로는 정직하게 말할 수 없는, 말의 맹점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파편화된 언어에 결속되지 않은 주체는 과잉과 부족을 설명하지 못하고, 모든 있음/없음이 타당하다고 여기는 현실의 폭력에 무감함으로써 거기에 가담한다. 반면에 박소란과 한인준 시의 주체는 있음/없음의 논리로는 말할 수 없는 세계의 파상을 목도하고 그곳에 결속되어 있음으로써 말하기의 어려움을 고백하는 자다.
이처럼 최근의 시들이 보여주는 것은 차라리 주체의 침묵이다. 이 침묵은 소리 내어 말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말의 있음/없음으로 사태를 해명하는 일의 불가능을 지시하는 것에 가깝다.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참사 이후의 말하기에 대한 고백들, 문단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이후에 드러난 서사화 불가능한 이야기들이 확인하게 해주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도 명백히 있는 ‘그것’을 말할 수 없다는 진실이다. 참혹하지만 이것이 진실이므로, 최근 시의 주체들은 그럼에도, 계속해서, 제대로, 정직하게 말해보려는 나름의 방법과 언어를 고민하고 그 부서진 말과 마음에 맞서 고투하고 있다. 이 고민과 고투는 나와 너의 관계에 의지함으로써 너무나 온건하게 우리라는 공동체의 자리를 지향하지만, 자신을 거의 지울 정도로 생각을 거듭하고 침묵의 언어를 기획함으로써 흔치 않은 개인의 형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나’와 세계를 구분하는 눈을 가진 자, 세계의 수상함을 목격하는 자, 그것을 논리정연하고 정합한 언어로 설명하지 못하는 자신을 고백하는 자로서 최근 시의 주체는 통감하는 주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통감하는 주체에 의한 시에는 말의 방도나 당위가 지워진 채로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어요?”(안희연 「라파엘」)라는 물음이 ‘보이지 않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판단이나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을 수 있는 방법’의 제시로서 일련의 답변을 제출할 수 있다면 그곳은 사건이 기록되는 합리적 언어의 세계다. 저 물음이 ‘무엇이 무엇을 보이지 않게 하나’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이 어째서 필요한가’와 같은 물음으로 되돌려질 때 그곳은 여전히 정리되지 않는 기억이 문고리를 잡고 떨고 있는 시의 세계다. 어째서 당신은 그곳에 속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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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란 쿤데라 「‘역사’라는 단어의 다양한 의미들」, 『커튼』, 박성창 옮김, 민음사 2012, 29면 참조.↩
- 같은 책 30면.↩
- 박상수 「발칙한 아이들의 모험에서 일상 재건의 윤리적 책임감으로: 2010년대 시와 시비평에 관하여」, 『창작과비평』 2017년 봄호.↩
- 김홍중은 세월호참사 이후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말들이 사태 그 자체의 압도적 터무니없음 앞에서 자신의 결손, 결여, 격차를 드러냈”고, 따라서 이러한 담론 행위에 동반되는 말하기 자체에 대한 회의감, 죄책감, 무력감 등은 특정 개인이나 집단구성원의 것이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감각이 되었다고 본다. 그는 말하기에 동반되는 감정도 그렇지만, 사회학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이해의 방식 자체가 이 사태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더불어 지적한다. “사회학적 이해는 타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합리적 논리를 포착하는 것”인데, 세월호참사에 관한 무수한 언어의 파편들이 확인해주듯 이 사태는 “인간의 마음을 부수어놓”음으로써 일상적으로나 합리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사회학적 이해 방식에 있어서 일종의 예외상태라는 것이다. 김홍중 「마음의 부서짐: 세월호참사와 주권적 우울」, 『사회학적 파상력』, 문학동네 2016, 72~82면 참조.↩
- 황인찬 시의 특징이 무엇보다도 자신의 세계를 한정하고 실감하는 일이 곧 그 세계의 확장을 도모하는 것임을 아는 주체에 있다는 것은 그의 두번째 시집을 짧게나마 분석한 이전 글에서 가져왔다. 졸고 「새로운 관조」, 『창작과비평』 2013년 봄호.↩
- 이 장의 제목은 한인준 시(「종언: 있」)의 구절을 변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