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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커먼즈와 공공성: 공동의 삶을 위하여

 

커먼즈의 미래

사유재산권을 다시 생각한다

 

 

데이비드 하비 David Harvey

뉴욕시립대학 대학원 교수. 지리학 박사이자 맑스주의 연구의 세계적 대가로, 저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공간들』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포스트 모더니티의 조건』 『자본의 한계』 『신제국주의』 『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자본』 강의 1·2』 『데이비드 하비의 세계를 보는 눈』 등이 있음.

 

* 이 글의 원제는 “The Future of the Commons”이며, 미국 듀크대학에서 발행하는 『래디컬히스토리리뷰』(Radical History Review) 2011년 겨울호에 발표되었다. ⓒ David Harvey 2011 / 한국어판 ⓒ 창비 2017

 

 

고전이 된 개럿 하딘(Garrett Hardin)의 논문 「공유지의 비극」1은 토지와 자원의 이용에 관해 반박의 여지 없이 사유재산권의 높은 효율성을 논증하는 글로, 그 덕에 반박의 여지 없이 사유화를 옹호하는 글로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숱하게 인용된 바 있다. 부분적으로 이러한 오독은 하딘이 든 소의 비유에서 연유하는데, 이 소들은 각자의 효용극대화를 꾀하는 여러 개인이 사유하지만 공유지에서 목초를 뜯는다. 공유된 소였더라면 물론 이 비유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 경우, 소가 사유재산인 점과 개인이 효용극대화를 추구하는 행동을 취한 점이 문제의 핵심임이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하딘의 근본적 관심사는 아니다. 그를 사로잡았던 문제는 인구증가다. 그는 아이를 낳겠다는 개인적 결정이 결국 세계 공유지의 파괴로 이어질 것(이는 토머스 맬서스Thomas Malthus 역시 주장한 바다)이라 염려한다. 이 결정이 사적인 방식으로 가족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유일한 해결책은 권위주의적 규제에 따른 인구억제다.

여기서 하딘의 논리를 인용하는 것은 커먼즈(commons) 자체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이 대개 16세기 이래 영국에서 줄곧 일어난 토지 인클로저(enclosure) 사례에서 비롯한 지나치게 편협한 추정들로 한정되어왔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 결과, 생각들이 보통 사유재산을 통한 해결 아니면 권위주의적 정부 개입으로 양극화되었다. 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이 모든 문제는 인클로저에 대한 직감적 찬반 반응으로 논점이 흐려져왔으며, 이 직감적 반응에는 주로 옛날옛적의 이른바 공동행동의 도덕경제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농후하게 가미되어 있다.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은 그녀의 저서 『공유의 비극을 넘어』2에서 인류학적사회학적역사학적 증거들을 체계화하면서 이런 추정들 일부를 와해시키려는 시도를 한다. 오스트롬은 개인이 개인과 집단 모두에게 득이 되도록 공유자원(common property resources, CPR)을 관리하는 독창적이고 대단히 합리적인 방법들을 고안해낼 수 있으며 실제로 자주 고안하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사례연구들은 “공유자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외부 당국이 나서서 완전한 사유재산권을 부여하든지 아니면 중앙집권적 규제를 가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많은 정책분석가들의 확신을 뒤흔들어놓”으며, 오스트롬이 주장하듯 “공적 방편과 민간 방편의 다채로운 배합”을 실증해준다.3

하지만 오스트롬이 드는 사례 대부분은 관련 사용자가 백여명에 불과하다. 이보다 더 크면 (가장 큰 사례에 포함된 사용자가 천오백명이었는데) 개인 간의 직접교섭 대신에 ‘내포위계’(nested hierarchical)4 구조의 의사결정이 필요해진다. 여기에는 분명 분석되지 않은 ‘규모(scale)의 문제’가 작용하고 있다. 좁은 유역에서 백명의 농부가 수리권을 공유하는 것 같은, 공유자원의 합리적 관리에 대한 작은 규모의 가능성들은 지구온난화나 심지어 발전소에서 인근 지역으로 방출되는 산성퇴적물 같은 문제들에는 적용되지 않고 적용될 수도 없다. (지리학자들이 흔히 말하듯) 우리가 ‘축척비율(scale)을 옮겨 탈’ 때, 공유자원 문제의 성격 자체와 해결책을 찾을 전망이 극단적으로 변한다. 어느 한 규모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최선책으로 보이는 것이 다른 규모에서는 유효하지 않다. 심지어 어느 한 규모(이를테면 지역적 범위)에서의 좋은 해결책들이 반드시 합해져 올라가거나 쏟아져내려 다른 규모(이를테면 세계적 범위)에서 좋은 해결책이 되는 것도 아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하딘의 비유가 그토록 오해를 낳는 것이다. 즉, 그는 세계적 문제를 설명하는 데 소규모 예를 든다. 그런데 또한 그렇기 때문에 공유재산(common property)의 논리에 따라 소규모 연대경제의 집단조직으로부터 얻은 교훈은 내포위계 형식의 의사결정에 기대지 않고는 세계적 해결책으로 전환될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위계는 요즘 저항하는 좌파 다수 부문에서는 금기와도 같다.

한층 더 대국적으로 보면, 그리고 특히 세계적 차원에서 보면, 대체로 귀한 커먼즈를 보존하는 최선의 방법은 일종의 인클로저다. 가령 전지구적인 자연적문화적 커먼즈로서 아마존 지역의 생물 다양성과 토착민 문화를 모두 보호하기 위해서는 매우 엄격한 인클로저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대두 농사와 소 목축으로 토지를 황폐하게 만드는 단기적 금전 이해관계의 속물 민주주의에 대항해 그런 조치를 취하려면 거의 틀림없이 국가권력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또다른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즉, 생물 다양성을 보존하기 위해 토착민을 그들의 삼림지에서 추방해야 한다는 판단이 내려질지 모른다. 다시 말해, 하나의 커먼즈를 보호하기 위해 다른 커먼즈의 훼손이 필요할지 모른다.

커먼즈 관련 문제들은 모순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항상 이론(異論)이 있다. 이런 논쟁 뒤에는 충돌하는 사회적 이해관계가 있다. 자끄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가 말했듯이 실로 “정치는 논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어떤 공동의 것의 활동영역”이다.5 끝에 가서는 분석가에게 단순한 결정만이 남는다어느 편에 설 것인가? 그리고 누구의 어떤 이해를 보호해줄 것인가? 오늘날의 부자들은 출입이 제한된 공동체를 만들어 그 속에 스스로를 가두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공동체 내부에서 그들만이 전용(專用)하는 어떤 커먼즈를 정한다. 급진적 단체 역시 공간을 확보하기도 하는데, 때로 그것은 (활동가들이 어떤 진보적 목적을 위해 지역사회활동센터를 매입하는 것과 같이) 사유재산권 행사를 통해 이루어지며 거기서부터 단체들은 공동이익의 정치를 진전시키기를 꾀할 수 있다. 아니면 임의의 보호구역 안에서 꼬뮌이나 소비에뜨를 설립할 수도 있다.

모든 형태의 커먼즈가 개방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숨 쉬는 공기처럼 어떤 것은 개방돼 있는 반면, 도시의 거리처럼 원칙적으로는 개방돼 있으나 규제와 단속을 받고 심지어는 사업개발구역의 형태로 사적으로 관리되는 것도 있다. 그리고 농부 오십명이 통제하는 공동 수자원처럼 또 어떤 커먼즈는 처음부터 특정한 사회집단이 전용한다. 오스트롬이 드는 대부분의 예는 마지막 부류다. 게다가 그녀는 토지, 삼림, 물, 어장 같은 이른바 천연자원에 연구를 한정짓는다. (여기서 “이른바 천연”이라고 말한 이유는 모든 자원은 기술적경제적문화적 평가치(評價値)고 그래서 사회적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오스트롬은 다른 형태의 공유재산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데, 거기에는 오늘날 상품화와 인클로저를 통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는 유전자 물질, 지식, 문화재가 포함된다. 일례로 문화적 커먼즈가 어떻게 문화유산산업에 의해 상품화되는지 (그리고 흔히 불온한 부분이 삭제되는지) 주목하라. 더 일반적으로 유전자 물질과 과학지식에 대한 지식재산권과 특허권은 우리 시대의 가장 뜨거운 화제가 되었다. 출판사들이 자사가 출간한 과학·기술 분야 학술지의 논문을 이용하는 독자에게 요금을 청구할 때, 만인에게 공유되고 개방되어야 하는 지식의 이용 문제가 분명해진다.

흔히 문화적지적 커먼즈는 대부분의 천연자원에 적용되는 것과 같은 희소성과 전용(專用)의 원리에 제한받지 않는데, 이 점이 바로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와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가 『공통체』(Commonwealth)에서 강조하는 요점이다. 우리 모두 동시에 같은 라디오 방송을 듣거나 같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시청할 수 있다. 하트와 네그리의 말에 따르면, 문화적 커먼즈는 “역동적인 것으로 노동의 산물과 미래의 생산수단을 모두 포함한다. 이러한 형태의 커먼즈에는 우리가 공유하는 지구뿐 아니라 우리가 창조하는 언어, 우리가 수립하는 사회적 관행, 우리의 관계를 규정하는 사회성의 양태 등도 해당된다.”6 그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구축되고, 원칙적으로 만인에게 개방되어 있다. 이런 맥락에서는 “메트로폴리스를 커먼즈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보는 것조차 가능하다.7 도시의 인간적 면모는 도시의 다양한 공간들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실천으로부터 나온다. 그 공간들이 사회적 제재, 전용(轉用), 그리고 거주자들 측에서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가 “도시에 대한 권리”라 일컬었던 것을 행사하려고 취하는 대항행동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사유화와 공적 국유화를 통해 인클로저를 겪는다 하더라도 말이다.8 일상적 활동과 분투를 통해 개인과 사회단체는 도시의 사회세계를 만들고, 그럼으로써 우리 모두가 그 안에 거주할 수 있는 틀로서 공동의 무엇을 창조한다. 문화적으로 창조적인 이런 커먼즈는 사용한다고 파괴되지는 않지만 과도한 남용을 통해 퇴화되고 진부해질 수는 있다.

필자가 보기에 여기서 진짜 문제는 커먼즈 그 자체가 아니다. 개별화된 사유재산권이 원래 그러기로 되어 있음에도 우리의 공동이익을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예컨대 왜 우리는 하딘의 비유에서 공유지로서의 목초지 대신 소의 개인소유에 집중하지 않는가? 자유주의 이론에서 사유재산권을 정당화하는 것은 결국 모름지기 권리란 공정하고 자유로운 시장교환 제도를 통해 사회적으로 통합될 때 공동이익을 최대화하는 데 이바지한다는 생각인데 말이다. 홉스(T. Hobbes)가 주장했듯 국가(commonwealth)는 강한 국가권력의 틀 안에서 경쟁적 이권들이 사유화될 때 만들어진다. 존 로크(John Locke)와 애덤 스미스(Adam Smith) 같은 자유주의 이론가들이 잘 설명한 이 견해는 보통 강한 국가권력의 필요성은 과소평가된 채 계속해서 설파되고 있다. 세계은행이 에르난도 데 쏘또(Hernando de Soto)의 이론9에 심하게 기대면서 거듭 장담하는바, 세계빈곤 문제의 해결책은 모든 슬럼 거주자에게 사유재산권을 보장해주는 것과 소액금융(특히 신통하게도 세계 금융업자들에게 두둑한 수익률을 가져다주는 소액금융)을 이용하게 해주는 것이다. 빈곤층의 타고난 기업가적 본능이 이런 식으로 한번 해방되고 나면 만사가 태평해질 것이고 만성빈곤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것이다.

로크에게 사유재산은 개인이 자기 노동과 토지를 혼합하여 가치를 창출할 때 생기는 자연권이다. 개인 노동의 산물은 그의 재산이자 그만의 재산이다. 이것이 로크식 노동가치론의 본질이다. 각 개인이 그가 창출한 가치를 다른 개인이 창출한 등가의 가치와 교환함으로써 되찾을 때 시장교환이 그 자연권을 사회화하게 된다. 요컨대 개인은 가치창출과 이른바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교환을 통해 자신의 사유재산권을 유지하고 확대하고 사회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국부를 가장 쉽게 창출하고 공동선에 가장 잘 이바지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추정되고 있는 바는 시장이 실로 공정하고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인데, 고전 정치경제학에서는 국가가 개입하여 시장을 그렇게 만들 것이라고 되어 있다적어도 스미스는 국가 지도자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로크의 이론에는 추악한 결과가 필연적으로 따른다. 즉, 가치를 생산하지 못하는 개인은 재산권이 없다는 것이다. 일례로 북미 원주민들이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는 명목 아래 ‘생산적인’ 식민지배자가 원주민을 몰아내는 것이 정당화되었다.

그렇다면 칼 맑스(Karl Marx)는 이 모든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가? 맑스는 『자본』의 도입부에서 로크식 허구를 받아들인다. 물론 맑스의 논의에는 풍부한 아이러니가 담겨 있는데, 가령 그는 정치경제학적인 사유에서 로빈슨 크루소 신화가 맡은 기이한 기능, 다시 말해 자연상태에 내던져진 자가 순수한 영국인처럼 행동한다는 점을 포착한다. 하지만 맑스가 어떻게 노동력이 공정하고 자유로운 시장에서 매매되는 개별화된 상품이 되는지 논할 때에는 로크식 허구의 실체가 그대로 드러난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가치교환의 평등에 기반을 둔 시스템이 실상은 생산과정에서 산 노동(living labor)을 착취함으로써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자본가를 위해 잉여가치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로크식 공식은 맑스가 집단노동 문제를 논할 때 더욱 극적으로 와해된다. 자신의 생산수단을 통제하는 개인 직인(職人) 생산자가 비교적 자유로운 시장에서 자유교환을 할 수 있는 세상에서는 로크식 허구가 어느 정도 유효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맑스의 주장에 따르면, 18세기 말부터 계속된 공장제의 확대는 로크의 이론적 공식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공장에서는 노동이 집단적으로 조직된다. 이러한 형태의 노동으로부터 나오는 재산권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개인적이기보다는 집단적이거나 조합적인 재산권일 것이다. 로크의 사유재산 이론의 근거가 되는 가치생산적 노동의 정의는 더이상 개인에게 해당되지 않고 노동자집단으로 옮겨간다. 그렇다면 공산주의는 “공동소유의 생산수단을 가지고 일하며 다양한 형태의 노동력을 하나의 단일한 노동력으로 완전히 자각하며 발휘하는 자유인들의 연합체”라는 기반 위에 발생해야 한다.10 맑스는 국가소유권을 옹호하지 않고 공동선을 위해 생산에 임하는 노동자집단에 부여된 소유권을 옹호한다.

어떻게 그런 형태의 소유권이 성립할 수 있는지는 가치생산에 대한 로크의 주장을 반대로 돌리면 규명된다. 맑스는 한 자본가가 1000달러의 자본으로 생산을 시작해 첫해에 스스로의 노동과 토지를 혼합한 노동자들로부터 200달러의 잉여가치를 얻은 다음, 그 잉여를 개인소비에 사용했다고 가정해보자고 한다. 그렇게 되면 5년 후에 그 1000달러는 노동자집단의 소유가 되어야 한다. 그들이 자신의 노동과 토지를 혼합한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자본가는 처음 투입한 자본을 모두 소비해버린 상태다. 북미 원주민들처럼 자본가들도 스스로 가치를 생산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권리를 상실해야 마땅하다.

이 논리가 터무니없이 들릴지 몰라도 1960년대 말 스웨덴에서 제안된 마이드너 플랜(Meidner plan)의 바탕을 이루는 것이었다. 노조의 임금인상 자제에 대한 댓가로 법인이윤세를 노동자가 관리하는 펀드에 예치하고 그 펀드로 기업에 투자해 결국 기업을 사들이면, 해당 기업체는 연합한 노동자들의 공동소유가 되는 계획이었다. 자본은 이 아이디어를 전력을 다해 거부했고, 그것은 결코 시행되지 못했다. 하지만 재고해봐야 하는 아이디어다. 핵심적 결론은 현재 가치를 생산하는 집단적 노동이 개인적 재산권이 아닌 집단적 재산권의 근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치, 즉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은 자본주의적 공동재고, 부 일반을 측정하는 보편적 등가물인 화폐로 상징된다. 따라서 공동의 것이란 옛날옛적에나 존재하고 그후 상실된 어떤 것이 아니라 도시적 커먼즈처럼 계속해서 생산되는 것이다. 문제는 그에 못지않게 계속해서 자본에 의해 울타리 쳐지며 상품화되고 화폐로 전환된 형태로 전용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 마을공동체가 동네의 민족적 다양성을 지키고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을 막기 위해 분투하다가, 부동산 중개인들이 개발자들을 꼬이기 위해 그 동네의 ‘개성’을 다문화적이고 다양성이 돋보인다고 홍보하는 바람에 갑자기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는 사태를 맞게 될 수도 있다. 맑스의 말에 따르면, 결과는 (하딘의 이야기에서 소 주인이 그런 것처럼) 자본이 수익성을 극대화하라는 강압적 경쟁법칙에 몰려 다음과 같이 된다는 것이다.

 

노동자뿐 아니라 토지를 약탈하는 기술이 진보한다. 일정한 기간에 토지의 비옥도를 높이는 모든 진보는 그 비옥도의 항구적 원천을 파괴하는 진보다. 미국의 경우처럼 한 나라가 대규모 산업을 토대로 발전하면 할수록 이 파괴과정은 그만큼 더 급속해진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은 모든 부의 원천인 토지와 노동자를 약화시키지 않고서는 생산의 사회적 과정을 결합하는 기술과 그 결합의 정도를 발전시키지 못한다.11

 

이 ‘비극’은 하딘이 묘사하는 것과 유사하지만 그것을 유발한 논리는 완전히 다르다. 여기서 커먼즈의 문제는 몇가지 가능한 해결책과 함께 재정의된다. 규제 없이 그대로 두면 개별화된 자본축적에는 모든 유형의 생산을 뒷받침해주는 두가지 기본 공유자원인 노동자와 토지를 파괴할 위험이 영구히 있다. 그리고 자본축적이 복률로 (주로 최저만족도 3%에서) 성장하고 있어 토지와 노동자에 대한 이러한 이중위협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고 강해진다.

1970년대에 시작해 칠레에서부터 영국까지 노동조합의 권리와 세력에 가해진 격렬한 신자유주의적 공격은 현재 엄격한 전세계적 긴축계획 때문에 더욱 거세지고 있다. 이 긴축계획은 캘리포니아에서부터 그리스까지 여태껏 주변부에 있었던 인구를 자본주의 역학 안에 약탈적으로 흡수하는 동시에 많은 인구에 자산가치와 권리와 재정지원 혜택상의 손실을 끼쳤다. 하루 생계비가 2달러도 되지 않는, 약 20억이 넘는 이 인구는 현재 ‘써브프라임 중에서도 가장 써브프라임한 대출’이라는 소액금융에 속아 넘어가고 있으며미국 주택시장에서 기어이 주택압류로 이어진 포식성 써브프라임 대출로 인해 그랬듯그들로부터 짜낸 부는 부유층의 대저택을 도금하는 데 쓰인다. 환경적 커먼즈 역시 위협받고 있는데, 탄소거래와 신환경기술 같은 대안들은 애당초 이 난관을 가져온 자본축적과 투기성 시장교환이라는 바로 그 도구를 이용해 난관을 빠져나갈 것을 제안하는 데 그친다. 유감스럽게도 이것은 케케묵은 이야기다. 1945년 이래 세계빈곤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주요 계획들은 하나같이 상대적 빈곤과 때로 절대적 빈곤까지도 만들어낸 바로 그 수단, 곧 자본축적과 시장교환만을 배타적으로 활용할 것을 주장해왔다. 빈곤층이 여전히 우리 곁에 있고 그 수가 시간이 지나면서 줄어들기보다 늘어나는 것이 놀랄 일도 아니다.

미흡하나마 포식성 축적 습성을 제어하려 했던 규제 체제와 통제 장치들이 해체되면서 억제되지 않은 축적과 금융투기의 ‘뒷일은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논리가 만연했고, 이제는 이러한 현상이 걷잡을 수 없는 홍수가 되었다. 그에 따른 피해를 방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잉여생산과 분배를 사회화하고 누구에게나 열린 부의 새로운 공동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도적 장치들을 특정하게 배합하는 일가령 여기는 인클로저, 저기는 다양한 집단적 공유재산 장치들의 확대이 아니라 자본의 손에 급속히 망가지고 있는 공동노동과 (건조환경建造環境이라는 ‘제2의 자연’에 내장된 자원까지 포함된) 공유지 자원에 하나의 통일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에서는 오스트롬이 알아보기 시작한 “다채로운 방편들의 배합”공적 수단과 사적 수단뿐 아니라 집단적 수단과 연합적 수단, 내포위계적 수단과 수평적 수단, 독점적 수단과 개방적 수단의 배합이 인간적 욕구를 만족시키도록 생산, 분배, 교환, 소비를 조직할 방법을 찾는 데 모두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공동의 부를 생산하는 계급을 착취하는 계급 측이 어떻게 축적을 위한 축적의 요건을 충족시키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요점은 오히려 그 모든 것을 바꾸고 공동선을 위해 집단적 노동의 힘을 활용할 수 있는 창조적 방법을 찾는 일이다.

번역: 한서린(韓瑞麟)/서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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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arrett Hardin, “The Tragedy of the Commons,” Science 162 (1968), 1243~48면.
  2. Elinor Ostrom, Governing the Commons: The Evolution of Institutions for Collective Action,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0.
  3. 같은 책 182면.
  4. 피라미드 구조가 아니라 동심원 구조의 위계로서 위계의 상위에 있는 것이 하위의 것을 내부에 포함하고 있어서 일방적인 통제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옮긴이.
  5. Michael Hardt and Antonio Negri, Commonwealth,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2009, 350면 재인용.
  6. 같은 책 139면—옮긴이.
  7. 같은 책 250면.
  8. Henri Lefebvre, The Urban Revolution, Minneapolis: Minnesota University Press 2005, 150면.
  9. 뻬루의 경제학자 에르난도 데 쏘또는 개발도상국이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자본주의 금융체계가 흔히 불법적이고 비공식적인 형태를 띤 빈민층의 자산을 인정하지 않는 데서 찾는다. 따라서 데 쏘또는 ‘죽은 자본’(dead capital)이 되고 마는 빈민층의 자산을 합법화해 투자 수단으로 활용되도록 유도하는 것이 개발도상국의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옮긴이.
  10. Karl Marx, Capital, Volume One, New York: Vintage 1977, 169~71면.
  11. 같은 책 63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