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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백민석 白閔石
1971년 서울 출생. 1995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소설집 『16믿거나말거나박물지』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 『혀끝의 남자』, 장편소설 『헤이, 우리 소풍 간다』 『공포의 세기』 등이 있음. hungryyears@naver.com
브로콜리 소녀/마시멜로 소년
처음엔 철썩철썩 소리만 났다. 다음엔 물에 젖은 고무 슬리퍼를 신고 스텝을 밟는 소리가 났다. 다음엔 이 가는 소리가 나더니 코맹맹이가 칭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오토마타 소년의 헐벗은 머리가 눈에 들어올 때쯤엔, 그 모든 소리가 한꺼번에 들렸다.
“네가 그 책들을 정말로 다 읽었어?”
오토마타 소년의 얼굴 어딘가에서 샌드페이퍼로 갈아낸 듯한 거친 목소리가 났다.
“네가 그 많은 책을 어떻게 다 읽을 수 있는 거야? 나는 속일 수 있어도 시간은 속일 수 없지.”
오토마타 소년이 다시 등나무 안락의자를 흔들었다. 그러자 의자에 놓인, 윤곽이 불분명한 형체가 이 가는 소리를 냈다.
오토마타 소년은 기능성이 강화된 개체이기 때문에 인간과 닮을 필요가 없었다. 신문용 오토마타가, 때로는 육체적 괴롭힘도 마다하지 않아야 하는 오토마타가 인간이어서는 곤란했다. 신문관이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으면 용의자들이 일단 속이려고 들기 때문이다. 신문기계는 그저 소년이라고 부를 만한 덩치를 갖고 있을 뿐 별로 인간종 같아 보이지 않았다.
“네 일주일을 보자고. 168시간이지. 이건 누구에게나 주어진 상수야. 네가 평균적인 인간이 아닐 이유가 하나도 없으니, 하루에 6시간을 잔다고 해. 그리고 침대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시간이 앞뒤로 30분씩 있고. (설마 불면증이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럼 168시간에서 119시간이 남지. 욕실에서 보내는 시간은 하루에 1시간으로 잡자고. 똥 싸고 아침저녁으로 씻고. 남은 건 112시간. 밥은 두끼만 먹는다고 치고, 네가 음식을 하지 않을 경우 하루 1시간 20분. (와이프한테 장보기에 조리랑 설거지까지 다 맡겨버리나? 이 친구가…) 그럼 102.7시간이 남지. 그리고 일주일에 2시간짜리 강의가 세번 있어. 이제 96.7시간이 남아. 넌 두군데 대학에 출강하는데, 한곳은 집에서 자동차로 50분 거리고, 다른 한곳은 지하철로 1시간 10분 거리야. 넌 차가 없지. 그래서 한곳은 주로 택시를 이용하고 나머지는 지하철을 타. 50분 거리가 두번이니까, 출퇴근 왕복 시간은 3.3시간 더하기 2.3시간. 그리고 학교에 30분쯤 일찍 가서 준비하지 않나? 그래서 이제 89.6시간 남았어. (내 계산이 틀리기를 바라지 마.) 그리고 한두편씩 챙겨보는 미국 드라마가 있지. 요즘엔 뭘 보나. 프로야구가 개막했으니 그것도 보겠지. (넌 성실하니까) 텔레비전 앞에서 일주일에 5시간만 허비한다고 해. 168시간에서 84.6시간 남았어. 그리고 글쓰기. 넌 네 우상 레이먼드 챈들러처럼 하루에 꼭 4시간은 책상 앞에 앉아 있으려고 하지. 노트북을 켜고 워드프로그램을 열어놓고 말이야. 휴일 없이. (정말 하루에 4시간만 일하나? 거저먹는 인생이군.) 56.6시간 남았어. 일주일에 하루는 네가 관여하는 출판사 기획회의에 나가. 2시부터 5시까지 원고 검토하고 회의하고 다음에는 저녁을 먹고 술을 먹지. 귀가 시간은 보통 자정을 넘겨. 이거 10시간. 이걸로 끝이면 좋은데, 그렇게 술을 먹으면 다음날 오전은 이제 나도 늙었네, 체력이 달리네, 하면서 그냥 침대에서 뒹굴지. 이거 보통 6시간. 남은 건 이제 40.6시간. 그런데 일주일에 한번쯤은 뜻하지 않은 만남이나 경조사나 사건사고가 생기니 5.6시간은 그 몫으로 치고 빼자고. 자, 이제 네가 일주일에 책을 읽을 시간이 몇시간 남았지?”
“35시간이요.”
안락의자 위의 형체가 이 앓는 소리를 냈다. 훌쩍이는 소리가 난 듯도 했다. 오토마타 소년이 손을 펼치고는 부드럽게 형체의 턱을 매만졌다. 철썩 소리가 났다.
“그런데도 네가 책을 하루에 한권씩 읽는다고?”
그러자 안락의자 위의 형체는 크게 소리 내어 훌쩍였다. 오토마타 소년은 한발짝 물러서서 형체가 진실을 털어놓기를 기다리듯 뒷짐을 하고 섰다.
“네가 그러고도 사기꾼이 아니야? 네가 무슨 책 읽을 시간이 있어?”
또 한번 철썩 소리가 나고 고무 슬리퍼가 찌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 가는 소리에 칭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다음엔 그 모든 소리가 한꺼번에 울렸다.
나는 그제야 그 형체를 알아보았다. 언젠가 텔레비전 쇼에서 본 적이 있다. 책을 아주 많이 읽고 책에 대한 칼럼도 여기저기 쓰는 저명한 서평가였다. 저명하지만 아주 젊었다. 일간지 두곳, 월간지 한곳, 문예지에도 쓰고 있었고 일본의 서평잡지 『다빈치』에도 연재를 하고 있었다. 그는 쇼에 나와 책의 무게로 양평 집 구들장이 무너진 사연을 소개했다. 종이책은 손에 쥐어본 적도 없는 어린 시청자들까지 열광했다. 종이책을 읽는다는 것은, 귀족까지는 아니더라도 문화적으로 고상한 수준에 도달했다는 표지였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뭐가?”
“아침에 똥 싸면서 책 읽어요. 그거 매일 30분 빼주세요.”
안락의자 위의 형체가 턱을 앙다물곤 구슬픈 소리를 냈다.
“택시랑 지하철 안에서도 책 읽어요. 제가 왜 차가 없는데요? 책 읽으면서는 운전을 할 수 없잖아요.”
안락의자 위의 형체가 억울하다는 듯 크게 흐느꼈다.
“야구도 그냥 본 척만 할 뿐이에요. 인터넷에서 경기결과랑 평만 봐요. 그래야 술자리에서 할 얘기가 있으니까.”
“그런다고 네가 여기서 풀려날 줄 알아?”
오토마타 소년의 입에서 사드의 새된 목소리가 났다. 흥분했을 땐 사드인지 샤데이인지 잘 구분이 안 된다.
“제가 왜 여기 있는데요?”
“내가 그걸 얘기해줄 것 같아?”
오토마타 소년의 이마에서 차크라의 불꽃이 꺼졌다. 안락의자도 함께 암흑 속으로 떨어졌다.
나는 이 미친 짓은 또 뭐냐고 따졌지만 사드/샤데이는 적당히 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네트워크에 자신들의 카피를 만들어 뿌린 적을 찾고 싶어 했다. 자신들을 불명예의 나락에 빠뜨린 적에게 책임을 묻고 싶어했다. 하지만 한달이나 추적해도 꼬리털 한올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신문당하던 서평가처럼 어쩌다 주워 걸린, 절대로 자신이 했다고 자백하지 않는 얼간이들만 몇 있을 뿐이었다. 서평가는 몇군데 데이터 광산에 올라온 카피를 뜯어본 결과 그의 전자 서명이 코딩 과정에 반복되어 있었기 때문에 걸려든 케이스였다. 하지만 그가 적인지, 적과 무슨 관계인지는 알아낼 수가 없었다. 잡아온 놈들이 어찌나 신뢰가 안 가던지 자신의 소행이 아니라고 우겨도 믿을 수가 없었고, 자신의 소행이었다고 마침내 고백해도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은 어느 쪽으로든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사드/샤데이는 찾아낸 용의자들을 오토마타 소년들을 이용해 신문했다. 때로는 진실을 얻어내기 위해 악독한 방법도 썼다. ‘섬세한 검지’라는 별명이 있는 사진소설가도 용의자로 신문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찍은 사진들에 짧은 이야기들을 덧붙여 책을 몇권 냈고, 두 페이지 이상의 긴 이야기는 읽지 못하거나 그림이 없는 글은 못 읽는 독자들에게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 ‘섬세한 검지’는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타이밍을 잡아내는 기막힌 감각 때문에 얻은 별명이었다.
“네 손가락하고 내 손가락하고 경쟁을 하는 거야.”
오토마타 소년이 입 없는 입으로 거친 목소리를 냈다.
“네 손가락이 얼마나 섬세한지 보자고.”
사진소설가는 손가락들을 활짝 펴고는 두 손을 쭉 내밀었다. 그러곤 오토마타 소년의 지문 없는 매끄러운 손가락에 걸린 무명실 가닥을 자기 손가락으로 건네받았다. 그는 바들바들 떨리는 엄지와 집게로 무명실을 걸어 쥐고는, 손목을 틀어 바깥으로 원을 그렸다가 위로 올려 떴다.
“흠. 좀 뜰 줄 아는데.”
오토마타 소년이 다시 무명실로 젓가락 모양을 뜨며 건네받았다. 무명실이 기계손 끝에서 팽팽히 당겨졌다. 사진소설가는 두 새끼손가락을 낚싯바늘처럼 구부려 무명실의 교차점에 걸어 위로 들어 올렸다가,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엄지와 집게로 바깥 줄을 걸어 올려 뜨며 건네받았다. 무명실은 이제 전체적으로 뒤집힌 모양이 되었다.
“네 책이 만권이 팔려서 엄청난 영향력이라도 생긴 줄 알지? 네 책을 산 그 만명이 다 네 친구고 네 편인 것 같지? 아서라, 넌 지금 내 앞에서 실뜨기나 하고 있고, 바깥에선 네가 뭘 하는지 무명실 한가닥만큼도 관심이 없어.”
오토마타 소년이 무명실을 가져갔고 사진소설가는 다시 실뜨기를 시도했다. 그의 두 뺨은 목화솜처럼 핏기 없이 하얗기만 했다. 펼친 엄지와 집게가 아주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조심스럽게 그 위험한 무명실의 교차점들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한칸만 옆으로 비껴나 실을 뜨면 전체 모양이 헝클어지고 실뜨기를 실패하게 되는 것이었다.
사진소설가가 ‘소 눈 뜨기’에 성공하고 휴, 하고 숨을 뱉었다. 입술 아래에 빨갛게 이빨 자국이 나 있었다. 오토마타 소년이 소름이 끼칠 만큼 차분한 동작으로 무명실 가닥을 가져가 다시 가위 모양을 떴다.
“다음이 생각 안 나요.”
사진소설가가 두 팔을 내리고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떨어뜨렸다. 그같이 대단한 예술가이자 지식인도 울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큼지막한 눈물방울이 그의 두 뺨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엄지와 집게는 아직도 펼쳐진 상태였다.
“다음은 물고기 모양이야. 자, 다 큰 어른이 그만 울고 실뜨기나 계속해.”
“아니에요, 이젠 물고기 모양이 뭔지도 모르겠어요. 이게 다 뭐죠? 왜 이런 실뜨기를 해야 하죠?”
그러자 오토마타 소년은 항복 선언이라도 받아들인 것처럼 무명실 가닥을 손가락에서 빼내 바닥에 버렸다.
“네가 우리의 정체성을 모욕했기 때문이지.”
“뭐요? 우리라니?”
“어째서 당신들은 나 없이도 행복한 건가?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 네 클라우드 서버에서 사드/샤데이의 사진하고 동영상 파일들이 어마무시하게 나왔어. 네가 네 자료와 단말기로 작업한 거지.”
“아아.”
사진소설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몹쓸 운명을 원망하듯 신음을 내뱉고는 더 크게 고개를 꺾었다. 나는 그가 오해를 샀다고 확신했다. 그는 결코 ‘어째서 당신들은 나 없이도 행복한 건가?’ 하고 묻지 않았다. 그는 그럴 만큼 불행하지 않으니까. 그다음은 삼십대의 젊은 철학자였다. 그다음은 시에 소설에 평론에, 논문과 허구의 경계를 무너뜨린 형식의 메타픽션을 쓰는 작가였다. 그는 거의 초주검이 되었다. 오토마타 소년들은 연민이 없기에, 답변을 얻어낼 때까지 한결같은 표정으로 배터리가 다하도록 고문을 할 수 있었다.
이러다간 글쟁이들은 다 잡아다 족치겠어,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지만 나 스스로는 그들이 글쟁이로 묶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신문기계가 우연히 내뱉은 말로 깨닫게 된 것이었다. ‘너희 글쟁이들은…’ 하고 마치 시의 라임처럼 읊조렸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고문을 당하는 이들이 글쓰기로 벌어먹고 사는, 비슷비슷한 인간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글쟁이들인가 하는 답을 찾아내는 데 또 며칠이나 걸렸다. 사드/샤데이를 곤경에 몰아넣은 건 정체성에 대한 공격이다. ⇨ 정체성에 대한 사유를 논리정연하게 펼칠 수 있는 인간들이 과연 누구인가. ⇨ 남의 정체성에 대한 장난질로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인간들은 누구인가. ⇨ 글쟁이. 글쟁이가 아니라면 누가 정체성에 대한 공격을 생각해낼 수 있겠는가. 옆구리나 심장이나 목덜미가 아닌 정체성을 공격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누가 예측이나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사드/샤데이에게 가서 불쌍한 글쟁이들을 풀어주라고 말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이번 전쟁은 정말 문학적이지 않아? 저 글쟁이들은 가장 문학적인 전쟁의 가장 문학적인 희생자가 됐고 말이야.”
사드/샤데이는 네가 어떻게 그런 긴 문장을 구사할 수가 있어, 하는 눈빛으로 나를 잠시 쳐다보았다.
사실 정체성의 문제는 사드/샤데이의 오래된 숙제이기도 했다. 그/그녀는 다른 이들이라면 겪지도 이해하지도 못할 문제를 지금까지 껴안고 살아왔다. 언제는 남성, 언제는 여성이고, 보통은 그 둘 다인 사드/샤데이는, 대부분의 인류보다 정체성이 하나가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나나 내 공장 친구들이나 지하철 승객들이나 동네 이웃들보다는 하나가 더 많다. 레즈비언이나 게이나 양성애자의 정체성도 차이의 문제일 뿐이지, 정체성이 유별나게 하나가 더 많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트랜스젠더도, 트랜스젠더라는 하나의 정체성만을 지닌다.
정체성의 원래 이름은 영혼이다. 영혼이 둘이어도 사드/샤데이는 별 탈 없이 잘 지낸다. 한 몸에 영혼이 둘이면 너무 많지 않을까? 하지만 내가 봐도, 인간의 몸은 영혼 하나만 담기엔 종종 너무 커다랗게, 낭비처럼 느껴진다. 나는 시를 쓰던 시기의 그/그녀를 알고 있었다. 물론 그때도 좀 미쳐 있었다. 그래도 시를 쓰던 시절의 그/그녀는 자신을 억제하고 통제한다는 일의 의미를 아직 알고 있었고, 가슴속에 뭔가 지고지순한 가치를 품고 있는 듯 보였다.
사드/샤데이가 국어 시간의 지루함을 참지 못해 끼적였던 시 한편이, 아직도 이 광대한 데이터베이스 세계 어딘가에 남아 돌아다닌다. 이따금 검색해 읽기도 하는 독자들이 극소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전쟁광의 가슴 안에도 한때 이런 순정이 있었노라고 믿고 싶은 독자들일까. 그/그녀는 이 시까지 태워버릴 셈인가?
브로콜리 소녀/마시멜로 소년
사드/샤데이 작
아주 오래전 바닷가 한 왕국에 당신이 알지도 모를
브로콜리 소녀가 살았지. 당신이 아침에 냠냠한 그 브로콜리.
소녀는 마시멜로 소년을 사랑했지. 입에 넣고 살살 녹여 먹는 마시멜로
소년을. 둘은 사랑하고 사랑을 받는 일밖엔 아무것도 몰랐네.
테이블의 배고픈 천사들도 부러워할 만한 사랑을.
그것이 이유가 되어, 오래전 바닷가 왕국에서
주방의 끓는 물이 덮쳐 브로콜리 소녀를 뜨겁게 데쳐버렸어. 그러곤
지체 높은 요리사들이 소녀를 데려가 바닷가 왕국의 창고에 가둬버렸지.
테이블에서 소년소녀의 반만큼도 행복하지 못한 천사들이 시기한 거였어.
그래, 쉬쉬거리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
하지만 브로콜리 소녀/마시멜로 소년의 사랑은 훨씬 강했지. 그래서
테이블의 천사들도, 주방의 악마들도 둘의 영혼을 떼어놓지 못했어.
가스 화덕에 올려질 때마다 마시멜로 소년은 꿈을 꿨네,
데쳐진 브로콜리 소녀의 꿈을. 등이 그을릴 때마다 소년은 느꼈어,
소녀의 흐느적거리는 눈동자를. 소년은 밤새도록
소녀의 곁에 누워 있지. 그곳 바닷가 무덤, 가스불이 쉭쉭거리는 주방에서.
이 시는 사드/샤데이가 그 자신과 나누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사드가 샤데이와, 샤데이가 사드와 연애하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브로콜리 소녀/마시멜로 소년」이 도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영혼이 둘 있다는 의미는 중앙처리장치를 두개를 운용할 수 있다는 말이나 비슷하다. 연산속도가 두배가 빨라지고, 한 영혼이 쉴 때면 다른 영혼이 일할 수 있다. 여러 인격을 가진 경우와는 다르다. 다중인격자의 인격들은 서로 옥신각신하거나 사랑을 나누거나 토론을 하지 못한다. 사드/샤데이는 그냥 두 사람으로 봐야 한다. 그 두 영혼은 신체에도 영향을 미쳐, 사드가 주도권을 잡으면 엉덩이가 단단해지고 샤데이가 주도권을 잡으면 가슴이 봉긋해진다. 상대의 동의만 구할 수만 있다면, 둘은 아마 서로 다른 이성과 결혼도 가능할 것이다. 사드는 여성, 샤데이는 남성과. 어쨌든 그/그녀는 영혼 하나짜리 미치광이는 엄두도 못 낼 일을 했다. 전쟁을 일으켰고 유례없이 악명을 떨치고 있다.
적을 색출해내는 한편, 사드/샤데이는 최근 에너지 미사일을 개발했다. 딱딱한 외피를 가진 고체 미사일도 아니고, 액체 미사일도, 독가스를 쏘는 기체 미사일도 아닌, 그저 에너지의 형태로 존재하는 미사일이라고 했다.
사드는 에너지 미사일의 원리에 대해 설명이 많았지만 내 지능으로 이해가 될 리 없었다. 샤데이는 사드의 아드레날린 과잉이 싫다며 몸뚱이를 비웠다. 그녀는 미사일이 너무 폭력적이라고 여겼다. 납치와 고문까지는 봐줘도 미사일은 아무래도 싫었다.
“일종의 진공청소기라고 보면 돼. 싹 다 빨아버릴.”
사드가 뭘 빨거나 말거나, 나는 불쌍한 글쟁이들을 가둬둔 물리적인 공간의 소재만 찾으면 되었다. 이번 배틀에서 적은 성공했고 이겼다. 세계의 네트워크에 사드/샤데이를 힐난하고 조롱하는 메시지가 만발했다. 그/그녀는 상처받아 너덜너덜해진 정체성, 영혼으로 신음하고 있었고 덕분에 세계 최초로 에너지 미사일을 발명한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적이 뿌린 사드/샤데이의 카피는 밝혀진 것만 15,390개였다. 악의적으로 왜곡된 둘의 정체성이 15,390개가 존재하는 셈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오염된 정체성들이, 세계 곳곳에서 조잘조잘 아무 말이나 떠들어대고 있다. 하나의 인물에 15,390개의 정체성이라니, 지나치다.
사드/샤데이는 에너지 미사일로 카피들이 출몰하는 데이터 광산들을 물리적으로 날려버리기로 했다. 정체성 청소를 할 계획이었다. 세계의 중요 데이터 광산은 위치가 알려진 것만 적어도 45개는 되었다.
“복수는 더 큰 복수를 불러올 뿐이야.”
내가 어디선가 주워들은 금언을 씨불였다.
사드는 혀를 끌끌 차며 터치스크린을 몇번 조작하더니 가상 패널 하나를 띄웠다. 빨간 글씨로 큼지막하니 ‘청소’라고 쓰여 있었다.
“청소를 하고 싶으면 ‘청소’를 누르면 돼.”
사드는 정체성 청소가 거실 청소나 되는 것처럼 아주 익숙하고 편안하게 ‘청소’라고 말하고 있었다. 미사일 공격이 동시에, 빠짐없이 이뤄져야 청소 효과가 있다고 했다. 오염된 데이터는 바퀴벌레 같아서, 하나만 놓쳐도 금세 다시 번식을 해서 우글댄다고 했다. 사드는 기지에 설치된 에너지 증폭기로 각 데이터 광산에 에너지 미사일을 쏘아 보낼 것이었다. 하늘을 통해 쏘는 게 아니라, 각 데이터 광산까지 연결된 통신 케이블을 통해 쏘아 보내는 것이었다. 이메일이나 동영상 파일을 업로드하는 것처럼, 혹은 단말기를 통해 개인정보를 보내 포털에 로그인하는 것처럼. 에너지는 빛의 속성을 갖고 있어 지구상 어디에 있는 데이터 광산이든 빛의 속도로 도달할 것이고, 시간차 없이 전세계의 데이터 광산에서 폭발음이 들릴 것이었다. 데이터 센터의 서버에 도달한 에너지 미사일이 작은 소음과 불꽃을 내며 저장장치를 새까맣게 태워버릴 것이었다. 미사일이 중간에 여러 분기점을 거칠 때 착오로 폭발하지 않도록 서버의 하드디스크를 구성하는 특정물질에만 반응하도록 했다…
“난 사랑도 증오도 아날로그식이라고.”
사드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당장이라도 ‘청소’ 버튼을 누를 기세였다. 자신의 정체성을 청소하기 위해 전세계 애꿎은 데이터 광산을 전부 태워버리겠다고? 미치광이 아냐? 나는 사드가 에너지 미사일의 세부를 만지작거리느라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워 룸의 데이터가 열려 있는 틈을 타 글쟁이들의 좌표를 찾았다. 그들은 기지에 없었다. 소공동의 버려진 한 호텔에 있었다. 놀랍지도 않았다. 샤데이는 지저분한 인간들은 참지 못했고, 그 대표가 잘 씻지도 않고 아무 데나 토해대는 글쟁이들이었다. 나는 감금된 장소의 데이터와 키를 젖은 수건 안테나를 통해 다운받았다.
호텔 입구 캐노피에 버려진 거미줄들이 치렁치렁 늘어져 있었다. 인간들처럼 거미들도 오래 살 집과 그렇지 않은 집을 구분한다. 리셉션 데스크에는 노숙자들이 빨아놓은 듯한 옷가지들이 널려 있었다. 호텔이 철수하자, 이 빌딩은 한동안 횡재한 표정의 노숙자들로 바글거렸다. 하지만 노숙자들의 수도 점차 줄어들었고, 이제는 그들도 떠나버렸다. 소공동 쪽은 전체 빌딩의 반이 버려졌다. 버려진 오피스텔이나 호텔은 정부에서 빈집 저가임대 서비스로 돌렸다. 하지만 나부터가 몰라서 신청을 안 한 게 아니었다. 방 한칸과 주방 하나밖엔 유지할 수 없는 사람들더러, 어떻게 거실에 방 둘에 욕실 둘, 드레스 룸까지 딸린 호텔에 들어가 살라는 말일까.
나는 5층까지 먼지구덩이를 헤치며 걸어서 올라갔다. 붉은 융이 깔린 층계에 발을 디딜 때마다 먼지가 폭탄처럼 솟아올랐다. 창문은 알루미늄 칸막이로 막아버렸고, 들어왔다가 나갈 길을 찾지 못한 작은 새들과 그들을 먹으러 들어왔다가 나갈 길을 찾지 못한 고양이들의 사체가 복도와 층계 구석에서 눈에 띄었다. 5층 511호. 복도에는 오토마타 소년이 없었다. 나는 자전거 공장에서 가져온 에어컴프레서에 전원을 넣었다. 소음이 기침처럼 복도를 울렸다.
나는 511호의 문을 박차고 들어가 문가에 서 있던 오토마타 소년의 목에 리벳을 박아 넣었다. 오토마타 소년의 둥근 머리가 뒤로 꺾이더니 뒤로 넘어졌다. 다른 두 오토마타 소년들의 이마에서 차크라 불꽃이 타올랐다. 그들은 겨우 내 허리춤에나 오는 작달막한 소년들이었다. 그들은 프로그램상 나를 신문할 수는 있어도, 나를 죽이려 들 수는 없었다. 내가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나는 리벳 해머를 휘둘러 하나씩 목을 부러뜨렸다.
“제발. 말은 하지 마.”
내가 열쇠를 찾아 수갑을 풀어주며 말했다. 용의자 글쟁이들은 오토마타 소년들이 쓰러지고 난 직후부터, 1분에 400자씩 쏟아내며 내게 온갖 질문과 하소연과 인사말 들을 내뱉고 있었다.
“말이 그렇게 많으니까 아저씨들이 이런 일을 당하는 거야, 응?”
글쟁이들은 벌써 층계를 쿵쾅거리며 뛰어 내려가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넘어져 비명을 질렀다. 나는 멍하니, 쓰러진 오토마타 소년들을 내려다봤다. 인간이 싫었을 때는 오토마타 소년들이 더 인간 같았고 내 진정한 친구들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인간이나 오토마타 소년들이나, 나완 무관한 존재들이라는 것을 안다. 그들은 나와 무관하게 존재한다. 세상이 나와 무관하게 흘러가는 것처럼. 글쟁이들을 풀어준 게 괜한 짓이었나, 하는 후회가 벌써부터 들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욕조에 물을 받고 몸을 담갔다. 머리에 젖은 수건을 뿔처럼 말아 덮어쓰고 메신저의 전극을 꽂았다. 곧 워 룸과 연결됐다.
“너, 바보야?”
사드/샤데이가 노발대발했다. 젖은 수건 안테나를 타고 그들의 노기가 찌릿찌릿 전해졌다.
“왜 놔준 거야? 너 혹시 내통자야?”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즐거웠다. 내가 입을 다물고 있자 젠장, 스파이는 아무나 하나, 하고 샤데이가 탄식했다. 사드는 바보, 멍청이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는 한참을 첨벙첨벙 물장구를 치다 입을 열었다.
“똑똑한 백민석이 있고 멍청한 백민석이 있는데, 너흰 지금 멍청한 백민석을 보고 있는 거야.”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농담이었다.
“똑똑한 백민석은 어디 있는데?”
가까스로 분을 참으며 샤데이가 물었다.
“나도 몰라. 당분간 만나기 힘들 거야.”
그렇게 말은 했지만 내가 언제 마지막으로 똑똑한 나 자신을 만났는지, 혹은 만난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나는 젖어 무거워진 수건을 벗어던졌다.
나는 순수했던 때를 기억했다. 그때 우리는 시도 쓰고 그랬다. 「브로콜리 소녀/마시멜로 소년」이 그 시절의 명작이다. 애틋한 사랑 이야기. 아삭한 맛의 브로콜리 소녀와 달달한 맛의 마시멜로 소년이 만나, 서로 깨물고 핥고 맛을 음미하는 사랑 이야기. 식이섬유와 비타민C와 콜라겐을 나누는 사랑 이야기. 시는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네트의 정보 정키들이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정보 정키들은 자신들의 정보 의존성향을 어쩌지 못하고 시에 대한 온갖 지적사항들을 네트에 지분거려놓았다. 우선 브로콜리와 마시멜로가 모두 19세기에 지금과 같은 생김새와 맛을 갖췄으니 “아주 오래전”이라는 시구와 맞지 않는다는 비난이었다. 지금 마트에서 파는 브로콜리 같은 재배품종이 나온 때가 19세기이고, 마시멜로 역시 옥수수 녹말을 주원료로 한 식품용은 19세기에 개발됐다는 것이었다.
그때 우리는 순수했다, 시에 달린 억지 주장들에 일일이 반론을 달 만큼. 브로콜리는 이미 1660년에 먹을거리로 백과사전에 기록이 올랐다. 원산지는 지중해, 조상은 케일. 마시멜로 역시 기원전 2000년에 이미 고대 이집트에서 파라오의 간식으로 쓰이고 있었다. 논란은 브로콜리와 마시멜로의 정체성에 대한 논란으로 확대되었다. 둘의 먼 조상까지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현재 마트에서 구할 수 있는 상품으로 한정지을 것인가. 이미 그때 우리는 정보 정키들과 정체성 전쟁을 치른 셈이다. 정보 정키들은 언어수준이 맞지 않는다며 그렇다면 소녀/소년도, 이브/아담으로 바꾸든지 암컷/수컷 원숭이로 바꾸라고 요구했다.
다음은 바닷가 왕국이 어디냐는 논란도 있었다. 정보 정키들이 밝혀낸바, 브로콜리의 재배품종은 19세기에 미국으로 넘어왔고, 2차세계대전을 거치며 일본에서도 소비되기 시작했다. 한국에도 그즈음 채소의 하나로 소개됐다. 마시멜로의 경우, 지금과 같은 형태는 1948년 미국 제과회사 두막에서 생산되기 시작했다. 이 역시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한국으로 넘어왔는데, 3월 14일 화이트데이의 원래 이름이 마시멜로데이였다. 이날을 일본의 캔디공업협동조합에서 사탕을 선물하는 화이트데이로 발전시켰다. 그렇다면 바닷가 왕국의 위치는? 우연히도 브로콜리와 마시멜로는 일본을 거쳐 한국에 왔고, 섬나라 일본에는 아직 왕이 있었다. 일왕은 토오꾜오의 왕궁에서 해자에 둘러싸여 수치스럽고 평화로운 삶을 연명하고 있었다. 논란을 넘어 비난이 일었다. 바닷가 왕국은 일본의 은유이고, 브로콜리 소녀와 마시멜로 소년의 정체성은 그러니까, 일왕의 백성이었다는 말인가. 시인이 혹시 일본에 대해 마음속 깊이 선망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시인의 무의식적인 자아이상이 일본 식민주의자, 지배층은 아닌가.
결국 사드/샤데이와 우리 친구들은 본성이 시키는 대로 욕지거리로 논쟁을 마무리했다. 지금 같으면 욕설로도 성이 차지 않아, 해킹을 해서든 에너지 미사일을 날려서든 게시판을 아예 문 닫게 했을 텐데.
나는 워 룸을 지키고 있는 사드/샤데이의 어깨에 두 손을 올려놓고 부드럽게 토닥거렸다.
“정체성 전쟁은 새삼스런 일도 아니라고. 우리, 아니 너희는 이미 그 지옥을 겪어봤잖아.”
내 말에 샤데이가 한결 누그러진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그 지옥은 이 지옥에 비하면 천국이었어. 하지만 먼 훗날, 이 지옥도 천국처럼 느껴지겠지.”
그러자 사드의 눈매도 순하게 곡선을 그리며 아래로 쳐졌다.
“그때 우리가 정말로 순수했을까. 난 그저 세상만사가 지루했던 기억밖엔 없는데. 흠, 친구여, 순수란 무엇인가.”
“글쟁이들을 놔준 건 미안해. 하지만 그 친구들은 억울한 거였다고. 다른 해결책을 찾자.”
사드/샤데이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며 망설이더니, 스크린을 하나 띄웠다. 스크린에는 백원짜리 동전만큼 커진 콧구멍을 쉴 새 없이 후비는 샤데이의 카피가 등장해서는 이렇게 쏘아대고 있었다.
“머저리들아, 니들의 그 얼간이 짓들은 브로콜리 거시기랑 마시멜로 머시기가 진짜로 살았다는 착각에서 나온 건데… 그 나쁜 머리가 계속 잘못된 신호를 보내고 있기 때문에 니들이 침 튀기면서 말싸움들을 하고 있는 거라고. …아니, 내가 왜 너희들을 쏴버려선 안 되는 거지?”
“마침 이런 게 뜨는군.”
샤데이가 조회수 2만의 유튜브 동영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난 정작 저 시를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말이야. 내가 잊은 걸 내 카피가 기억하고 있다니.”
사드가 추억에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역시 우리의 순수했던 그 시절을 그리며 한참이나 영상을 바라보았다. 비록 상스럽게 왜곡되긴 했지만 추억의 힘 앞에서는 그마저도 그립게 느껴졌다. 동영상이 한 십분쯤 진행되고 나서, 어느 한순간 스크린의 한쪽이 벌컥 열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곤 셔츠만 걸친 사내가 나타나 스크린의 중심을 향해 말 그대로 쏟아져 들어왔다. 사드였다. 그는 먼저 마이크를 쓰러뜨리고 다음엔 샤데이를 번쩍 들어 책상에 메쳤다. 그리고 아찔한 장면들이 이어졌다. 누구도 이런 장면들을 예상치 못했기에, 얼이 빠지고 넋이 나갔고 미처 손을 쓰지 못했다. 사드는 혈관들이 툭툭 솟아오른 못생긴 손으로 샤데이의 엉덩이를 부여잡고는 그 짓을 했다.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포르노 영상을 짜깁기하고 그 위에 사드와 샤데이의 얼굴을 따다 붙인 것이었다. 사드/샤데이가 자신의 엉덩이를 잡을 수는 있지만,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의 뒤에서 그 짓은 절대 할 수 없었다. 그건 마치 하의를 하나만 입으면서, 바지를 입고 동시에 치마를 걸치는 일과 같았다. 한낮과 한밤이 하나의 창 밖에 함께 나타나고, 한 사람이 앉아 있으면서 동시에 서 있고, 태양이 이글거리는 옆에서 달무리의 허연 테 가운데 냉담한 달이 고개를 내미는 일과 같았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동영상의 저열함에 얼굴이 화끈거리고 정신이 어찔어찔했다. 사드/샤데이의 정체성에 대한, 있을 수 있는 최악의 공격이었다. 그/그녀를 아예 두 몸뚱이로 나눠버렸으니까. 진짜 사드/샤데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고 있었다. 손을 놓고 있는 사이 스크린 가운데 제목이 떴다. ‘어째서 당신들은 나 없이도 행복한 건가?’ 그리고 동영상은 끝났다.
사드가 소리를 질렀다.
“분노하지 않는다면 내가 사내가 아니다.”
사실 이런 멘트는 샤데이가 있을 땐 감히 내뱉지 못할 소리였다. 하지만 사드의 격노한 수컷성이 존재 전체를 압도하고 있었다. 두 뺨이 부르르 떨리고 전율하는 수컷의 분비물 냄새가 풍겨왔다.
사드는 터치스크린의 가상 패널을 쭉 잡아 폈다. 에너지 미사일 발사 패널이었다. 패널이 두배로 커졌다. 이제 ‘청소’라고 쓰인 빨간 버튼이 그의 머리만해졌다. 버튼을 누르면 세계 45개 중요 데이터 광산에 에너지 미사일이 빛의 속도로 투하될 것이었다. 그러면 서버의 저장장치가 물리적으로 파괴되고, 카피들과 함께 다른 모든 데이터도 소멸될 것이었다.
샤데이는 아직 나간 넋이 돌아오지 않았는지 반응이 없었다. 사드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데이터 월드여, 안녕.”
나는 데이터 세계가 망하면 실제 세계도 망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 둘은 같은 세계였다. 실제계의 필요가 데이터계를 낳았고, 데이터계의 힘이 실제계를 움직이고 있었다. 세계는 유엔이 없어도 살지만, 한국은 정부가 없어도 살지만, 세계인들은 데이터 센터들이 없으면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특히 정보 정키 같은 문화 좀비들에겐 인터넷 포털과 온라인 동영상과 쇼핑앱과 SNS가 없는 세상은 지옥일 게 뻔했다.
그리고 내가 바로 문화 좀비였다.
“안녕은 아직이야.”
내가 사드를 막으려 달려들었지만, 무기력하게도 나 역시 데이터로 이뤄진 가상의 이미지였다. 사드를 막아설 수 있는 내 진짜 근육과 신경은 우리 집 욕실에서 욕조에 들어앉아 있었다. 머리에 젖은 수건을 두른 채. 이미지로는 사드를 막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