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문학초점

 

이토록 충만한 결핍

조해진 장편소설 『로기완을 만났다』

 

 

박인성 朴仁成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불필요한 문장들과 다시 서사하기: 김중혁 윤성희 박형서의 최근 소설들에 대하여」가 있음. clausewize@naver.com

 

 

3541이것은 ‘목소리’가 아니라 ‘귀’로 말하는 이야기다. 이 “세상 사람들의 발설되지 않는 이야기만 들으러 다니는 이상하고 가엾은 귀”(168면)가 부유하듯 이르게 된 곳은 유령이나 흔적에 지나지 않는 남자가 기록한 풍경이다. 어머니의 사체를 판 돈 650유로를 품에 안고 벨기에에 밀입국한 탈북자 로기완이 남긴 풍경들. 불우이웃돕기 방송 프로그램의 작가인 김이 그 풍경을 쫓게 된 것이 우연은 아니다. 그녀가 부모를 여의고 힘겹게 살아가는 소녀 윤주에 대한 연민과 죄책감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하고 도망치듯 벨기에로 향한 것처럼,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일은 어떤 연민으로도 채우기 어려운 결핍과 마주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조해진(趙海珍)의 『로기완을 만났다』(창비 2011)를 읽는 것은 바로 그처럼 결핍된 것들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다.

“처음에 그는, 그저 이니셜 L에 지나지 않았다”(7면)는 문장으로 소설을 시작할 때부터 조해진은 한 인간의, 더욱이 하나의 이니셜이나 흔적에 불과한 타인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 기록을 계속해나간다. 더욱이 “논리적인 이해와 합리적인 공감”(91면)이 아니라, ‘연민’의 감정에서 출발하는 것을 분명히하면서 말이다. 이 소설이 특별해지는 지점은 소설의 화자인 김 자신이 바로 그 연민을 의심하고 부정하는 방식으로, 연민을 통해 타인을 대상화하는 스스로를 다시금 대상화한다는 점이다. 그러한 의식상의 거리두기가 발생하는 순간, 우리에게는 언제나 채워지지 않는 결핍의 공간이 발견된다. 자신을 부정하고 스스로에게 의문을 제기하는 순간, 타인의 기록과 기억, 고독과 불안이 스며들지 모르는 내 안의 균열의 지점, 빈 공간 말이다.

그렇기에 로기완을 만났다는 한편으로 김이 단지 연민할 수밖에 없었던 불우한 소녀 윤주나 그로 인해 마주하기 괴로웠던 현실로부터 도주하는 이야기면서, 동시에 그러한 자기를 부정하고 흠집냄으로써 발생하는 빈 공간, 내부의 결핍으로 끊임없이 회귀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도주와 회귀의 길항작용 속에서, 로기완의 일기 기록을 토대로 그 흔적들을 사소한 부분까지 따라가는 김의 시도는 자신을 비워냄으로써, 온전한 형체보다는 흐릿한 흔적으로 남아 있는 로기완에 점차 닮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어디에도 없는 사람이었다.”(124면) 이것이야말로 늘 채워지지 않고 비어 있을 수밖에 없는 “행간의 의미, 단어와 단어 사이의 여백까지 꿰뚫는 독서”(57면)의 시도이자, 타인을 닮아가는 미메씨스(mimesis)라 할 것이다.

이제 그녀에게는 한번도 경험되지 않은 과거, 낯선 과거가 스며들게 된다. 그것은 결코 우리 자신이 온전히 파악할 수도 우리 자신에게 환원시킬 수도 없는 외재(外在)의 차원이 내적 경험으로 체험되는 놀라운 순간이기도 하다. 의사이면서도 아내의 죽음을 도울 수밖에 없었던 박이 ‘죽어가는 자의 이웃’으로서 죽음이라는 자기 바깥의 것을 기꺼이 자기 내부로 받아들여야 했던 것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이야기다. 죽음은 언제나 이해될 수 없는 것이면서도 우리를 우리 바깥에 존속하게 해주며, 더 나아가 우리가 타인의 죽음에 동의하는 순간이란 그 불가해함에도 불구하고 침묵 속에서 죽어가는 자의 고통을 떠맡게 되는 내적 체험의 순간이지 않던가.

“우리가 사랑의 고백에 인색했던 것은 더없는 행복, 완벽한 충만, 한순간의 천국 대신 다만 끊임없이 우리 사이의 감정적 불충분과 관계의 결여를 원해서였던 것뿐이라는, 그리고 바로 그것이 우리 사랑의 정체성이라는 그런 말을 간절하게 듣고 싶다”(169면)와 같은 소설 속 김의 언술처럼 결핍의 인정을 통해서만 출현하는 관계가 있다. 타인을 향한 열림은 한순간의 소통으로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소통의 실패에 의해 발생하는 파열이야말로 내게로 환원되지 않는 내 안의 빈자리를 만들어낸다. 윤주가 수술로 제거할 수밖에 없었던 한쪽 귀 대신에 생겨날 빈자리를 상상하는 것처럼, 우리는 영원히 잃어버림으로써만 타인을 더 잘 상상하고 더 잘 읽게 될 것이다.

“모든 인간 존재의 근본에 어떤 결핍의 원리가 있다”는 바따유(G. Bataille)의 말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어떤 완전성의 환상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심지어 그것을 거부하기까지 한다. 끝내 실패로 얼룩진 삶까지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안에서만 “언어의 한계, 염세적인 세계관, 폐쇄적인 자의식 따위로는 검열할 수도 없고 검열되지도 않는 결속력”(159면)이 태동한다. 그렇기에 “나는 이미 내 마음의 한 부분을 포기한 상태였다”(162면)라는 문장은 정말이지 각별하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내 마음의 한 부분을 포기했을 때, 우리는 들을 수 없는 것들에 비로소 귀를 기울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토록 충만한 결핍. 로기완을 만난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일이다.

박인성

저자의 다른 계간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