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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한국의 문학, 이제 어디로

 

근대의 이중과제, 그리고 문학의 ‘도’와 ‘덕’

 

 

백낙청 白樂晴

문학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창작과비평』 편집인. 최근 저서로 『백낙청이 대전환의 길을 묻다』 『2013년체제 만들기』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 『백낙청 회화록』(전5권) 등이 있음. paiknc@snu.ac.kr

 

 

1. 사실주의와 근대성

 

이념 또는 문예사조로서의 사실주의(寫實主義)는 호소력을 잃은 지 오래다. 그러나 사실주의가 강조한 사실성(寫實性) 내지 핍진성(逼眞性, verisimilitude)은 최근의 문학에서도 여전히 만만찮은 비중을 차지한다. 훌륭한 작품이 되기 위해 사실주의적 기율을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의 타당한 이유 없이 무시하기도 힘든 것임을 보여주는 셈이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국문학에서 비사실주의적 장르들의 발달이 지체된 까닭만도 아니다. 뒤에 더 자세히 논하겠지만 사실주의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근대성’의 무시 못할 일부인 것이다.

이에 관해 나는 졸고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의 ‘다시 생각하는 사실주의’ 대목에서 간략히 살펴본 바 있는데,1) 거기에 부연하는 것으로 이 글을 시작할까 한다. 이는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작업의 연속이기도 하다.

‘사실주의적’이라 일컬어지는 작품이 곧바로 반사실주의 이론가들이 비판하는 통념적 사실주의, 곧 ‘투명한 언어를 통한 객관적 현실의 재현’에 머무는 것은 결코 아니다.2) 한국소설의 우수한 최근 성과들에서도 고지식한 사실주의와 무관하면서도 선택된 소재의 범위 안에서의 충실한 현실재현이 확인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김애란(金愛爛)은 소설집 『비행운』(2012)을 포함한 그의 단편 대부분이 사실주의적 표면을 충실히 유지하고 있으며 장편 『두근두근 내 인생』(2011) 또한 발상이 특이하고 서사기법이 다채로울 뿐 사실주의적 기율을 현저히 벗어난 대목은 만나보기 힘들다. 한강(韓江)의 장편 『소년이 온다』(2015)도 제2장의 망자의 1인칭 진술은 사실주의 소설에 충분히 포함될 만한 서술기법이라 할 수 있다.

박민규(朴玟奎)와 황정은(黃貞恩)은 전자의 소설집 『카스테라』(2005)와 『더블』(2010), 후자의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2008)와 『파씨의 입문』(2012)이 보여주듯이 사실주의와 반사실주의 기법을 그때그때 자유롭게 구사하는 작가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최근 업적으로 주목할 만한 장편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2009)나 『계속해보겠습니다』(2014)에 오면 사실주의적 요소가 지배적이 된다.

사실주의 전통을 가장 충실히 계승하면서 좋은 소설을 계속 써온 작가라면 전성태(全成太)를 꼽아야 할 듯하다. 자신도 사실주의적 기율에 충실한 작품을 여럿 써낸 동료작가 권여선(權汝宣)은 전성태의 최신 소설집 『두번의 자화상』(2015)을 두고, “읽고 나서 우리에게 전성태가 없었으면 어쩔 뻔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이어서, “정통 리얼리즘 작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작품도 좋았고, 거기에서 은근슬쩍 빠져나와 다른 세계를 기웃거리는 작품도 좋았습니다”3)라고 하는데, 이때의 ‘정통 리얼리즘’은 꽤나 좁게 해석한 사실주의를 뜻한 표현일 것이다. 예컨대 「이야기를 돌려드리다」는, “지금껏 나는 삶이니 세계니 하는 것들을 분석하는 입장에서 소설을 써왔”고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겪은 명백한 세계만을 그리려고 애써왔”4)다고 하는 화자가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소통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어릴 적 어머니가 들려주던 신기하고 더러 허황된 이야기를 해드리면서 어린 그가 겪었던 이상한 체험들을 되새기기도 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겪은 명백한 세계”를 아주 벗어나지 않고 ‘은근슬쩍 다른 세계를 기웃거리는’ 정도다. 어머니가 이야기를 끝내며 해주시던, “신기하지 않니? 그러나 하나도 신기한 얘기들이 아니란다. 내가 하는 얘기들은 모두 사실이니까”(322면)라는 말이 화자의 서술에 관한 한 문자 그대로 사실인 것이다.5)

그런데 사실주의적 작품이 「이야기를 돌려드리다」처럼 판타지의 세계에 속할 법한 이야기를 포용하면서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다양한 기법을 활용하는 경우가 아닐 때는 역시 낡았다거나 지루하다는 느낌을 줄 위험이 따른다. 『두번의 자화상』을 읽은 나의 개인적 소감으로는 지루할 것 같은데도 아주 지루해지는 법은 없는 게 전성태 소설의 묘미인데, 그 점에서 「소풍」은 좋은 생각거리다.

「소풍」은 평범한 한 가족이 주인공 세호의 장모를 모시고 나선 평범하다면 평범한 나들이 경험을 들려준다. 특별히 극적인 사건도 일어나지 않으려니와 낯익은 일상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화자의 개입도 없다. 하지만 공원 주차장에 빈자리가 없어 되돌아 나올 때부터 무언가 제대로 안 풀리고 있다. 아이들이 찾겠다는 네잎클로버는 끝내 발견되지 않고, 보물찾기가 재미있어서 한번 더 해보다가 돈 숨겨놓은 곳을 기억 못하는 장모의 치매기를 확인하는 결과가 되고 만다. 소설은 세호가 “괜찮아요, 장모님. 아무 문제 없어요”(36면)라고 위로하는 말로 끝나지만, 애당초 숙취상태로 의욕이 없이 따라와서 가족들이 안 보이자 미니위스키병을 단숨에 들이켜는 세호 자신이나, 부부 사이가 아주 나쁘진 않지만 내내 아슬아슬한 느낌을 주는 아내 지현과의 관계도 “아무 문제 없”다고는 하기 어렵다. 이렇듯 시종 담담하며 자칫 지루해질 수조차 있는 풍속화 같은 소설에 무언가 불안하고 스산한 분위기가 줄곧 서려 있는 것이 이 작품의 독특한 매력이다.

하지만 세태소설에 흔히 던져지는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라는 질문이 나올 가능성은 남아 있다. 체홉(A. Chekhov)을 연상시키는 수준으로 잘 쓴 단편이지만 「소풍」이 세태소설의 한계를 과연 얼마나 벗어났는가. 이 물음에 한마디로 답하기는 어렵다. 어찌 보면 체홉을 끌어들이는 것이 과찬일 수 있으나 평범한 일상을 담담하게 그려내면서도 시대의 진실과 인생의 섬세한 기미를 포착한 체홉의 성취와 전혀 무관하다고 단언하기도 힘든 것이다. 다만 체홉의 시대와 또다른 오늘에는 사실주의적 재현이 기법 자체로 참신성을 자랑하기 어렵게 되어 있으며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라는 물음에 항상 노출되게 마련이다. (물론 사실주의 아닌 그 어느 작품이라도 이 물음이 일단 제기되면 난감해진다. 아예 질문이 안 나오도록 독자를 사로잡고 압도하는 작품의 위력이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성묘」나 「망향의 집」처럼 분단현실을 직접 다루면서 그것이 얼마나 정면으로 다루기 힘들고 그래도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인지를 실감케 해주는 작품의 경우는 좀 다르다.6) 이런 주제를 무슨 ‘첨단기법’으로 다뤄달라는 요구가 도리어 독자나 평자의 오만일 수 있는 것이다. 일찍이 미국의 흑인 작가 리처드 라이트(Richard Wright)는 소년시절에 드라이저(T. Dreiser) 등 자연주의 소설가들을 읽고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고 자신의 인생경험 때문에 자기도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에 경도되기에 이르렀다고 자서전 『검둥이 소년』(Black Boy, 1945)에 기록한 바 있는데,7) 사실주의 문학의 경우 재현을 하더라도 억압된 현실, 독자에게 절실한 현실을 재현하느냐 여부가 성패의 한 관건임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사실주의라는 이미 다분히 익숙해진 기법으로 익숙한 현실을 재현해서는 독자의 공감을 얻기 어렵다. 물론 저자의 기교가 워낙 뛰어나서 독서층에 의해 널리 소비되는 작품이 있지만, 이는 결국 속임수에 불과하며 나아가 사실주의 자체가 원칙적인 속임수에 해당한다는 비판을 더욱 실감나게 만든다. 곧, 사실주의 예술은 온갖 관습화된 예술기법과 달리 현실을 마치 투명한 창문을 통해서 보듯이 ‘있는 그대로’ 제시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그 자체도 하나의 예술적 관습임을 은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한다면 공공연하게 ‘비현실적’(내지 초자연적)인 환상세계를 그리는 장르들이 오히려 진실에 가까울 수 있으며, 서사구조 자체를 파괴 또는 교란하는 실험소설이 기존의 서사물들이 은폐하는 진실을 드러내는 작업일 수 있다.

여기서 그러한 시도들을 개관하고 평가하는 일은 나의 능력 밖이다. 다만 비사실주의 소설가로서는 사실성에 드물게 충실하면서 사실주의의 문제점에 깊은 경각심을 견지하는 이장욱(李章旭)의 소설세계를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소설집 『고백의 제왕』(2010)과 『기린이 아닌 모든 것』(2015)의 독자라면 그가 사실주의자가 아님을 쉽게 알아차린다. 다른 한편 그는 서사 자체를 파괴하기는커녕 오히려 타고난 이야기꾼이랄 만한 솜씨로 서사를 꾸려나가곤 한다. 사실주의적 표면을 유지함에서도 『고백의 제왕』 중 표제작 같은 것은 전혀 무리가 없다. 다만 얼핏 사실주의 소설로도 간주될 법한 그 이야기를 따라가며 흥미진진한 고백 내용에 빠져들다가도 문득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 곧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핍진한 서술(내지 고백)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나아가 적어도 유럽에서 18세기 이래 문학의 본질처럼 이해되어오기도 한 ‘영혼의 진솔한 고백’이 반드시 바람직하고 값진 행위인지를 묻는 ‘수수께끼’8)를 대면하게 된다. 더구나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오면 「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을 빼고는 사실주의적 기율에서 현저하게 이탈하는 예가 거의 사라진다. 그런데도 그의 작업은 사실주의가 아닐뿐더러 명백히 반사실주의적인 성격이라 말할 소지가 충분하다. 문학작품이 ‘투명한 재현’과는 거리가 먼 인공적 가공품임을 분명히 해주는 일이 소설마다 큰 비중을 차지하며, ‘사실(事實)’과 ‘사실성(寫實性)’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중요한 주제를 이루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 모두의 정귀보」를 보자. 그 시작은 얼핏 흔한 사실주의 소설의 도입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무명이었다가 사후에 유명해진 화가 정귀보(鄭貴寶, 1972~2013)의 인생은 놀랄 만큼 단조로운 것이었다. 나는 미술을 전문으로 하는 모 출판사의 다급한 청탁을 받고 화집을 겸한 평전 집필에 착수했지만, 특기할 만한 것이 없는 이력 탓에 고민에 빠졌다.(147면)

 

이런 식으로 독자의 구미를 돋우며 시작해서 화자 겸 작중 필자가 이 고민을 해결해가는 노력과 그 과정에 서서히 드러나는 정귀보의 인간상을 전달하는 것이 사실주의 소설에서 흔한 기법이다. 제목에 나오는 ‘우리 모두의’ 정귀보라는 표현이 리얼리즘론에서 곧잘 들먹이는 ‘전형성’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저자의 의도는 전혀 그게 아니다. 실제로 작품은 정귀보의 삶이나 미술에 대해 ‘특기할 만한 것’을 빽빽이 담고 있지만, 화자는 첫머리(위의 인용문에 바로 이어지는 문장)에서 “정귀보가 태어난 곳은 담양이었지만 그건 정귀보를 설명하는 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147면)는 주장을 필두로 그가 소개하는 온갖 에피소드와 정보가 ‘설명’에 미달한다는 점을 시종 강조한다. 그래서 평전을 쓰는 작업을 일단 포기했다가 자살로 추정되는 정귀보의 시신이 발견되고서야 다시 집필을 결심한다. 그러면서도, “대체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에 얼비친 햇빛이라든가, 야 씨발아 난 여자만 좋아해라든가, 쌍둥이를 동시에 사랑한다는 것은” (이는 모두 사실주의적 서사나 통상적인 평전에서 ‘특기할 만한’ 디테일이 될 수 있는 것들이다) “과연 무엇인 것일까? 그런 것에 의미를 부여해서 이렇게 저렇게 정리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런 것을 쓰려는 나라는 인간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180면)라는 고민을 계속한다. 요컨대 이런 ‘수수께끼’들이 작가적 관심의 초점이며 수수께끼를 쉽게 풀어버리는 모든 ‘설명’과 ‘정리’에 대한 거부가 이 작품의 특이한 서사를 추동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은 그러한 설명이나 정리와 다른 차원의 글쓰기를 예감하고 ‘우리 모두의 정귀보’의 발견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끝맺는다.

 

나는 무언가가 내 안에서 조금씩 피어오르고 있다는 것은 깨닫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정귀보의 인생에 대한 기나긴 글의 첫 문장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마지막 문장이 없는…… 짧고 건조한…… 첫 문장 말이다. 첫 문장에서 두번째 문장이 나오고, 두번째 문장에서 세번째 문장이 이어지고, 세번째 문장에서 또다른 문장이 태어날 것이다. 그런 어느날, 나는 거기서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 나오는 정귀보를 보게 될는지도 모른다. 해변에서 놀고 있는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우리 모두의 정귀보를 말이다.(180~81면)

 

이것이 저자 자신의 예술적 신조를 표현한 것이라고 단정할 일은 아니다. 다만 화자의 이런 신조도 사실주의 이념 못지않은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라는 혐의가 걸릴 소지가 충분하다. 화자가 예감하는 식의 글쓰기로 그려지는 정귀보가우리 누구의 삶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을 빼고는‘우리 모두의’ 정귀보가 되리라는 것도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하다. 오히려 이장욱의 진정한 예술적 성취는 화자의 그러한 이데올로기에도 불구하고 화자가 예감한 것과는 전혀 다른 글인 「우리 모두의 정귀보」를 써냈다는 사실일 것이다.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 역시 생생한 사실적 디테일과 흥미진진한 이야기 줄거리를 자랑하면서도 ‘사실’과 ‘진실’, ‘상상’과 ‘실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려는 의도가 강한 작품이다. 첫 절의 다음과 같은 진술을 보더라도 그렇다.

 

물론 나는 〔당신의 머릿속을 지나가는〕 그 기린에 대해 아무런 권리가 없습니다. 그건 순수하게 당신의 머릿속에서 태어난 당신의 기린이니까요. 이상한 말이지만, 나는 그것이 내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운명이라고 나는 말했습니다. 우스운가요? 하지만 믿어주십시오. 나는 진실만을 말하고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느낍니다. 만에 하나 거짓말이라고 해도, 이건 진심을 다한 거짓말입니다. 전력을 다한 거짓말입니다.(112면)

 

사실 이 단편은 이야기의 짜임새나 박진감에서 「정귀보」를 능가한다고 생각된다. 끝에 가서 서사 전체가 경찰관 앞에서의 진술임이 드러나는 1인칭 서술을 독자가 정확히 얼마나 믿어야 할지 특정하기 힘들게 만드는 면에서도, 예컨대 「정귀보」에서 주인공의 죽음이 자살이냐 여부를 두고 화자가 다소 장황하게 ‘안개를 피우는’ 방식보다 훨씬 무리없는 처리를 보여준다.

다만 그럴수록 사실주의적 기율에 위배되는 디테일 하나를 굳이 짚고 싶다. 이는 어찌 보면 사소한 어긋남을 확대해석하는 것일 수 있지만, 이장욱의 소설이 글쓰기의 성격과 진실의 불확정성에 대한 명상을 넘어 시대의 현실을 풍부하게 담아내는 능력을 지녔고 그런 능력의 지속적인 향상이 기대되기 때문이다. 「기린」에서 소년시절의 화자는 거짓말을 했다고 종아리를 때린 아버지를 경찰에 수상하다고 신고하는데, 그뒤 아버지는 “대규모 지식인 간첩단의 일원으로 체포되었다는 뉴스가 나왔”다가 “보름 뒤 피폐해진 몸으로 돌아왔”고, “간첩으로 의심되지만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는 신문기사”(121면)가 언급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작품의 소재로 선정된 한국의 현실에서 실감하기 힘든 진행이다. 대한민국은 그제나 지금이나 간첩단의 일원으로 언론에 발표까지 했던 사람을 보름 만에 ‘증거불충분’으로 풀어주고 신문기사까지 내주는 나라가 결코 아닌 것이다.

저자의 주된 관심사에 비추어 사실성으로부터 이 정도의 이탈은 사소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분단한국에 살고 있는 독자에게도 정말 사소한 것이며 사소한 걸로 봐도 좋은가. D. H. 로런스는 장편소설의 미덕으로 “잘못 밟으면 미끄러지는 바나나 껍질도 있다”는 점을 꼽으면서 저자가 “무언가 마당을 좀 너무 말쑥히 쓸어버리”는 경향을 경계한 바 있는데,9) 「기린」은 비록 단편이지만 자신의 주제의식에 몰두한 나머지 현실의 중대한 일면에 대해 “전력을 다한 거짓말”이 아니라 본의 아닌 왜곡을 범하면서 독자가 저자의 현실감각을 재고하게 만드는 예가 아닐까 한다.

 

 

2. 이중과제론과 문학의 거처

 

사실주의 문제가 계속 무시 못할 관심사로 남는 것은 그것이 근대인이라면 누구나 마주치는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에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10) 다시 말해 사실주의는 근대과학의 정신과 불가분의 관계인바, 중세 신학 또는 철학의 자의적인 우주론을 청산하고 현실에 대해 한층 정확하고 공유 가능한 앎을 추구하는 자세라는 점에서는 마땅히 성취해야 할 근대성의 일부이다. 반면에 과학의 정신이 현실 앞에서의 그러한 하심(下心) 내기가 아니라 인간이 과학을 통해 현실을 다 알 수 있고 나아가 과학기술을 통해 멋대로 바꿀 수 있다는 근대주의 이데올로기로 전환할 때, 적어도 진정한 문학과 예술이라면 비판하며 극복을 시도하지 않을 수 없다. 근대의 위대한 문학은 과학의 정신과 동반 생성했기에 사실성에 대한 존중이 남다를 수밖에 없으면서도 과학주의, 기술주의 및 근대주의를 발본적으로 넘어서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안게 되는 것이다.

한때 한국평단을 뜨겁게 달구었던 ‘사실주의와 구별되는 리얼리즘’ 논의도 이런 각도에서 재론한다면 한결 생산적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곧, 양자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를 열거하는 방식보다 ‘리얼리즘’으로 호명된 것이 사실주의와 모더니즘(및 포스트모더니즘) 등에 비해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를 얼마나 더 원만하게 수행하는가를 가늠해보는 것이다.11) 사실주의에 국한되지 않는 ‘진정한 리얼리즘’을 옹호하는 입장에서도 리얼리즘을 궁극적인 해체의 대상으로 설정하기에 이른 것은,12) 단지 ‘리얼리즘’과 ‘사실주의’를 동일시하는 주류학계의 관행 때문에 그 낱말이 사용하기 번잡하고 난감해져서가 아니라, 이중과제 수행의 현 국면이 모든 형이상학적 개념과의 결정적인 결별을 요구하는 지점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의 ‘형이상학’은 철학의 한 분야를 일컫는 좁은 개념이 아니라, 서양의 전통적인 철학적 사고뿐 아니라 형이상학의 파생물이면서 그 적극적 비판자이기도 한 과학 및 과학적 인식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이다. 따라서 비록 부르주아시대에 대한 맑스의 변증법적 접근이 이중과제론을 함축하고는 있지만 “우리의 탐구가 19세기 유럽인 맑스에게는 거의 닫혀 있던 영역으로까지 확대되어야만 하는 세계사적 국면에 도달했다”13)는 주장이 나온 것도, 맑스의 유물론적 변증법조차 형이상학의 온전한 극복은 아니라는 생각을 담은 것이다.

그런데 형이상학 극복의 노력은 창작자의 주관적 신념이나 의도와 무관하게 모든 진정한 예술작품에 원래 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 사실을 두고 예술의 어떤 ‘반형이상학적 본질’을 설정하는 것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형이상학적 사고이며, 해체주의 내지 탈구조주의가 즐겨 수행하는 본질주의(essentialism) 비판에 직면하게 마련이다. 그런 비판을 피해가면서도 작품이 한갓 개인 또는 집단의 정치적·사회적 선택에 머물지 않고 어떤 진리의 권위를 획득할 수 있는지를 규명하는 것이 당면의 문학적 과제이자 세계사적 요청이기도 한 것이다. 물론 예술의 창작과 향수는 당연히 하나의 정치적·사회적 실천으로서 과학적 분석의 대상이지만, 동시에 과학과 형이상학이 모두 미치지 못하는, 다시 말해 과학이 인식하는 실증적 현실의 일부랄 수 없으면서도 어떤 형이상학적 ‘본질’에 근거하지도 않는 예술 본연의 거처를 탐색할 것을 요구한다.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경지라는 것은 불가와 노장(老)의 전통에서는 친숙한 것이지만, 서양의 형이상학에서는 그러한 사유가 오랫동안 망각되어왔다는 것이 예컨대 하이데거(M. Heidegger) 같은 사상가의 지적이다.14)

그 점에서 시인이자 철학자인 진은영(陳恩英)이 문학의 ‘아토포스’(atopos, 非場所)를 말한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15) 다만 정작 ‘문학의 아토포스: 문학, 정치, 장소’라는 제목이 달린 『문학의 아토포스』 제6장의 논의는 저자의 주된 목표가 ‘아토포스’ 자체의 탐구인지, 아니면 기존의 ‘문학적 토포스’로 알려진 장소와는 다른 새로운 토포스를 개척하는 일인지가 분명치 않다. 실제로 대부분의 논의는 문자 그대로의 ‘비장소(성)’보다는 “새로운 공간의 창출”(166면) 노력에 집중된다. 예컨대 철거 예정이던 홍대앞 식당 두리반에서 열린 ‘불킨 낭독회’들이라든가 콜트콜텍 노동자들을 위한 문화제 등 “우리 사회의 예술적 공간과 정치적 공간의 이음새에서 발생했던 최근 활동들”(171면)을 상세히 소개하는데, 모두가 기왕에 문학적이라고 인정되던 토포스를 떠나 “하나의 장소성을 개시”(177면)하는 사례로 제시된다.

따라서 “정체가 모호한 공간, 문학적이라고 한번도 규정되지 않은 공간에 흘러들어 그곳을 문학적 공간으로 바꿔버리는 일, 그럼으로써 문학적 공간을 바꾸고 또 문학에 의해 점유된 한 공간의 사회적-감각적 공간성을 또다른 사회적-감각적 삶의 공간성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문학의 아토포스이다”(180면)라는 진은영의 결론은 ‘새로운 토포스’ 내지 ‘변화된 토포스’를 곧 ‘아토포스=비장소’로 규정하는 논리의 비약이다. 다만 이어지는, “이렇게 떠도는 공간성, 그리하여 결코 확정할 수 없는 방식으로 순간의 토포스를 생성하고 파괴하며 휘발시키는 일에 예술가들이 매혹될 때 우리는 그들을 공간의 연인이라 부른다. 이 연인-작가들에 의해 작동하는 문학의 아토포스는 우리가 미학의 정치라고 불렀던 것의 또다른 이름이다”(같은 면)라는 제6장의 마지막 문장들을 읽으면 ‘문학의 아토포스’를 공간 자체보다 ‘공간의 연인’과 공간 사이의 어떤 특이한 관계로 사유할 실마리가 보인다.

말라르메(S. Mallarmé)를 인용한 알랭 바디우(Alain Badiou)의 논의를 다룬 제5장 ‘미학적 아방가르드의 모럴’은 ‘문학의 아토포스’를 다른 각도에서 성찰할 계제를 마련해준다. 바디우는 말라르메의 산문 「발레」에서 따온 두개의 표현, 곧 ‘춤추지 않는 무용수’16)와 ‘모든 필기구로부터 벗어난 시’를 중심으로 시와 예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개진하는데, 이를 두고 진은영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디우의 분석에 따르면 춤은 춤의 테크닉과 춤을 추는 무용수의 경험으로 환원되지 않는 순수한 출현이다. 말라르메가 사용하고 있는 춤의 유비를 따라 우리는 시를 시적 테크닉과 시를 쓰는 시인의 경험으로 전적으로 환원되지 않는 순수한 출현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 인과관계의 사슬로부터 벗어난 순수한 발현의 순간으로서의 시라는 관념은 매우 매혹적이고 납득할 만한 것이며 더욱이 시가 쓰여진 대로 읽히는 것이 아니라 시를 읽는 이와의 감응 속에서 하나의 사건으로 발현된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시는 항상 모든 필기구를 벗어난다는 관념은 의미심장한 것으로 보인다.(153-54면)

 

이렇게 “인과관계의 사슬로부터 벗어난 순수한 발현의 순간으로서의 시”는 현실의 어떤 ‘토포스’에서 일어나는 사건일지라도 그것을 훌쩍 벗어난 ‘아토포스’를 함축한다고 말할 수 있다. 동시에 그것이 현실공간의 온갖 인과관계와 필기구의 잡다한 특성을 간직한 채 ‘아토포스’를 창출하는 것인지, 아니면 ‘순수한 출현’이라는 또 하나의 관념으로 시를 단순화하는 것인지는 한층 엄밀한 검토를 요한다.17)

물론 진은영도 바디우의 시론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필기구를 벗어난 시’는 바디우의 분석처럼 미래로 열린 벗어남뿐만 아니라 과거로 열린 벗어남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시는 필기구에 의해 기록되는 그 순간에야 필기구를 벗어나고 시로서 최초의 시작始作을 갖는 것이 아니다. 시는 쓰여지기 이전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필기구를 벗어나 있다.”(154면) 이는 “시인과 비시인의 구별은 정당화되지 않는다”(155면)는 명제와 더불어 ‘시인의 모럴’ ‘침입자의 모럴’에 대한 논의와 직결되는데, 모럴과 미학의 문제는 뒤에 따로 논하려 한다.

그전에 ‘문학의 아토포스’에 대해 한두마디 덧붙일 필요를 느낀다. 근대의 이중과제 수행이 형이상학을 제대로 넘어서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는 관점에서는 이 문제의 본격적인 탐구가 중요한 숙제이기 때문이다. 작품이 발현할 때 드러나며 이룩되는 아토포스는 그냥 ‘없음()’도 아니려니와 ‘있음()’의 영역플라톤의 ‘이데아’나 그 어떤 초월적 존재를 포함해서도 아니라는 사유방식이 문학의 거처를 해명하는 일뿐 아니라 다른 여러 이론적·실천적 과제를 위해서도 절실해진 현실인 것이다.18)

형이상학 극복 노력은 모든 진정한 예술작품에 내재한다고 말했는데, 본격적인 철학수업을 거친 바 없이 ‘아마추어적’으로 접근한 문학평론가 리비스(F. R. Leavis)가 ‘유도 무도 아닌’ 특이한 문학의 거처에 대해 제출한 구상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는 것도 그 때문일 게다. 그는 스노(C. P. Snow)의 ‘두개의 문화’론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시는 단지 사적(私的)이거나 개인적이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실증 가능하다는 의미로 공적이지도 않은 ‘제3의 영역’(the third realm)에 존재한다고 말한다.19) 여기서 몇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우선 리비스는 (바디우와 달리) ‘시 일반’(poetry)이 아닌 개별적인 시 작품(poem)을 말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자기 언어의 문학”이라는 토를 닮으로써 그때그때 주어진 작품에 대한 읽기의 충실도에 따라 시의 거처에 얼마나 제대로 진입하는가에 차이가 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제3의 영역의 ‘우선성’에 대한 언급도 중요한데, 상식적으로 말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제3의 것’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부른 것이지, 본디 그것이야말로 ‘제1의 영역’에 해당하고 이른바 주·객관의 세계가 도리어 거기서 파생한다는 인식이다.20) 물론 리비스는 형이상학적 유무분별을 넘어서는 동아시아적 ‘도()’의 영역을 명시적으로 사유하고 있지 않지만 그에 방불한 영역에 문학의 거처를 상정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3. 도(道)와 덕(德)과 율(律)

 

여기서 굳이 ‘도’를 말하는 이유를 되새기는 것이 독자의 이해를 도울지 모르겠다. “서양의 개념을 근거로 윤리와 도덕을 구분하다보면 원래 동아시아 전통에서 말하던 도덕, 즉 도()와 ‘도의 힘’으로서의 ‘덕()’에 대한 사유가 실종되고 만다는 점”21)을 나는 지적한 바 있는데, 한때 우리 문단에서 위세를 떨치던 ‘문학의 윤리’ 논의는 물론이고 진은영처럼 ‘문학의 비윤리’를 강조하고 랑씨에르와 더불어 “선과 악에 대한 관습적 해석들에 대항하여 새로운 감각의 분배를 만들어내는 정치적 활동”(『문학의 아토포스』 134면)으로서의 ‘모럴’을 논의하더라도 그 점은 마찬가지라 본다.22)

물론 도덕의 원뜻은 동아시아에서도 변질되기 일쑤여서 문학에서의 도덕주의·윤리주의가 우리 근대문학 출범기에 와서는 넘어야 할 걸림돌로 설정되기도 했다. 아니, 지금도 그런 폐단이 사라졌다고 말하기 힘들다. 새로운 감각의 분배를 만들어내기는커녕 모든 새로운 감각을 억압하는 ‘치안경찰’로서의 도덕주의는 형태를 달리하면서도 여전히 만만찮은 힘을 떨치고 있는 것이다. 또, 굳이 그런 정도가 아니더라도 ‘도’를 들먹이는 것 자체가 부당하게 엄숙주의적인 문학관을 조장할 우려가 없지 않다. 그러나 동아시아인이 사유한 도는 인간이 마음대로 건설하거나 폐쇄할 수 있는 현실의 ‘도로’는 아니지만 서양철학의 초월자나 초월적 세계와 달리 여러 분야의 인간이 누구나 자기 식으로 접근하여 구현하는 ‘길’이며, 문학에서도 엄숙 여부를 떠나 작품 하나하나를 창조하고 향수할 때마다 새롭게 묻고 닦아간다는 신축성과 다양성을 지닌다. 따라서 ‘작품’도 서구식 문예주의에 얽매이지 않고 그때그때 ‘도의 힘’을 발휘하는 모든 글쓰기와 예술행위로 확대할 수 있다. 곧, ‘도’라는 ‘아토포스’에 자리잡은 문학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며 그런 거처에서 파생하는 온갖 힘, 사람을 웃게 하고 울게 하며 그리하여 어떤 식으로든 기존 감각의 배분질서에 ‘침입’하여 바꿔내는 권능이 ‘도의 힘으로서의 덕’인 것이다.

그런데 ‘덕’을 구현하는 과정에는 일정한 규칙이 어쩔 수 없이 수반된다. 이를 ‘율(律)’이라고 한다면, 문학이나 예술에서 창작자에게그리고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향수자에게도요구되는 기법상의 훈련, 나아가 ‘시인과 비시인의 구별’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생활 속에서의 온갖 단련이 ‘율’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불가의 계율이나 유가의 예의범절, 이슬람의 성법(聖法, 샤리아) 등도 그런 것이며, 그리스도교 구약의 율법은 물론이고 신약시대 교회와 그 교리, 제도, 관습 들이 모두 도덕 실현을 위한 ‘율’에 해당한다. 실정법을 포함한 세속사회의 온갖 규범도 당연히 그러한 ‘율’로 제시된다.

하지만 ‘정치’를 ‘치안’과 구별하면서 기존의 감각체제를 끊임없이 교란하고 변화시키는 것만이 참된 의미의 정치요 미학이며 “시인의 모럴, 즉 침입의 모럴”(『문학의 아토포스』 152면)이라는 랑씨에르 등의 주장은 율이 오히려 도덕의 장애물일 수 있음을 말해준다. 예수가 기존의 모든 율법을 오로지 이웃사랑의 계명 하나로 대체(내지 통폐합)함으로써 감각의 분배체제에 일대 쇄신을 가져온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율’을 ‘덕’의 한 방편으로 이해하여 그 효험을 가늠한다는 발상은 오로지 ‘치안’과 전혀 별개의 ‘정치’만을 인정하는 태도라든가, 인류문명의 역사가 곧 야만의 역사며 재앙의 연속이라고 단죄하는 역사관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율’이 경직되어 도덕의 실현을 방해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지만 그것이 ‘율’의 전부라고 보는 데는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좋은 정치공동체에 책임있는 시민으로 참여하는 삶이 최고의 정치이자 최선의 삶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관·윤리관에 차라리 가깝고, 국가를 최고 단계의 ‘윤리성’(Sittlichkeit)을 가능케 하는 조건으로 설정한 헤겔(G. W. F. Hegel)의 법철학과도 상통하는 입장이며, 무엇보다 성현들이 마련한 옛 문물제도를 복원하고 보존하는 일을 군자의 사명으로 본 유교의 전통에 친숙한 사상이다. (물론 이중과제론의 관점에서는 그 어느 하나도 전적으로 답습할 수는 없다.) 불교의 경우는 현실사회 전체를 ‘홍진(紅塵)’ 세상으로 매도하고 승가의 계율조차 궁극적으로 잊고 버려야 할 대상으로 규정하는 것이 기본 교리지만, 부처와 중생, 정토(淨土)와 예토(穢土)의 구별마저 넘어선다는 대승불교에 이르면 유교의 입장과 상통하는 면이 엿보인다.23)

‘정치’와 ‘치안’을 너무 뚜렷하게 갈라놓는 일이 현실에 대한 인식과 대응의 단순화를 가져올 위험을 나 자신 지적한 바 있지만,24) 여기서는 다시 문학과 예술의 문제로 돌아와 율에 대한 고찰을 진전시켜볼까 한다. 어떤 예술가든 어엿한 예술의 경지에 달하기 위해 온갖 기술을 몸에 익히는 고된 수련이 필요함은 분명하다. ‘춤추지 않는 무용수’, ‘춤 그 자체로 출현하는 무용수’가 되기 위해서도 물론 그렇다. 하지만 이 경우의 예술적 규율은 ‘강을 건넌 뒤엔 뗏목을 버리라’는 불가의 가르침처럼 예술의 성취에 이르는 길에서의 일시적 방편으로서 크게 문제될 게 없다. 그러나 문학에서의 ‘사실주의적 기율’처럼 일면 무시 못할 방편이면서 동시에 예술창조에 질곡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 율의 경우는 어떤가. 앞서 사실주의 문제를 근대의 이중과제라는 기준에 비추어 판단할 것을 제안했는데, 그렇게 본다면 사실성이라는 ‘율’은 근대라는 특정 시기에 이르러 문학의 ‘도’를 성취함에 있어 전에 없던 무게를 지니게 된 동시에 근대가 진행될수록 ‘도’를 망각하고 ‘덕’을 오히려 훼손하는 낡은 계명으로 굳어지는 경향도 커졌다 할 것이다.

비단 사실주의적 기율만이 문제되는 것도 아니다. 특히 시에서는 익숙한 언어 일체를 철저히 배격하고 상식적인 독자의 기대를 배반하는 실험들이 21세기에 들어 거의 한국시단의 주류를 이루다시피 되었는데, 나는 이런 실험적 시인들을 산사의 선방에서 용맹정진하는 선승(禪僧)에 견주었고, 불가에서 그런 선승들이 일종의 특공대에 해당하듯이 예의 시인들에게서 특공대의 용맹을 발견하기도 했다.25) 그런데 특공대의 용맹만으로 전쟁을 이길 수 있느냐는 문제를 떠나서, ‘특공대는 아무나 하나?’라는 물음을 던져봄직하다. 비상한 단련을 거치고 뛰어난 용맹과 헌신성을 갖춘 소수정예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특공대의 임무다. 그런데도 여기저기서 특공대원을 답습하는 시인들이 속출하고 있다면 진정한 특공작전이 아닌 ‘특공대놀이’가‘놀이’ 자체도 특공작전의 일부일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안전한 표현으로 ‘특공대시늉’이유행하게 되었다는 혐의가 짙다. 이런 상황일수록 (불가의 언어로 되돌아가) 진짜 선승과 시늉이나 하는 ‘땡초’를 식별하는 비평이 필요하며, 제대로 공부하는 스님을 알아보고 북돋우는 일이 긴요하다.

나 자신은 그 방면의 훈련이 부족해서 정확한 감별을 자신하지 못한다. 그러나 일찍부터 『사춘기』(2003)와 『이별의 능력』(2007)의 시인 김행숙(金幸淑)을 특공대원의 한 보기로 지목한 바 있는데26) 최근 시집 『에코의 초상』(2014)에서 그 점을 한층 실감했다. 게다가 여전히 난해하지만 최근 작업에서는 일상회화의 자연스러운 리듬을 탄 거침없는 말투로 독자를 사로잡는 능력도 한결 커진 것 같다.

어쨌든 시집의 맨 앞에 배치된 「인간의 시간」부터가 일체의 상식적인 해석을 거부한다.

 

우리를 밟으면 사랑에 빠지리 

물결처럼

 

우리는 깊고

부서지기 쉬운

 

시간은 언제나 한가운데처럼

「인간의 시간」 전문

 

‘우리’는 도대체 누구인가. 시인이나 독자를 포함한 인간들이라면 우리를 밟는 것은 누구(무엇)인가. 2행 ‘물결처럼’은 ‘밟다’에 걸릴 수도 있고 ‘빠지다’에 걸릴 수도 있지만 어느 경우든 자연스러운 어법은 아니다. 그보다는 2연으로 이어져 “물결처럼//우리는 깊고”로 읽히는 게 더 자연스러운데, 그렇더라도 보통은 물이 깊다고 하지 물결이 깊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제목과 3연에 언급되는 ‘시간’과 연결됨으로써만 더 큰 울림을 지니게 되는 낱말이지 싶다. 2연과 3연의 경우도, ‘우리는’으로 시작되는 2연과 ‘시간은’으로 시작되는 3연의 두 불완전 문장이 병치된 것일 수도 있고, “깊고/부서지기 쉬운//시간은”으로 연속해서 읽을 수도 있다. 이쯤 되면 ‘우리’가 제목의 ‘인간의 시간’과 동일시될 가능성도 열리는데 확실한 답은 어디에도 없다. 게다가 3연의 끝에 도돌이표가 달렸다 치고 1연으로 되돌아가 연속해서 읽으면, “시간은 언제나 한가운데처럼//우리를 밟으면 사랑에 빠지리/물결처럼”이라는 (제법 그럴듯한) 문장이 된다. 어쨌든 인간의 시간과 우리의 삶에 내재하는 위태로움과 신비스러움, 그 속에서의 결코 단순하지 않은 사랑의 가능성 등을 화두처럼 굴리게 하는 효과를 낳는다.27)

시집의 모든 작품이 이처럼 아리송한 것은 아니다. 「반 개(半個)」 같은 시는 결코 고지식한 언어가 아니면서도 비교적 수월하게 읽힌다. ‘인간의 시간’의 다른 일면사랑보다 죽음에 초점을 맞춘 일면을 보여주는 「물방울 시계」도 「인간의 시간」에 비하면 한결 친절하다.

 

흉기가 되도록 뾰족해졌다. 그러나 어떤 시간도 공기와 같아서 삼켜야 하는 것. 꺽꺽, 네가 시간을 뱉었을 때, 아무도 몰랐다. 그것은 전혀 다른 시간이었다. 무거워진 물방울이 떨어질 때, 함께 깨지고, 합쳐지고, 한 줄기처럼 흘러가자, 물방울의 형태로 매달릴 수 없는 무게와 물방울의 형태로 매달리지 않는 무게가 언제나 같은 것은 아니다. 너는 조금 일찍 떨어져도 돼, 어떤 새가 제 무게를 견디며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겠니?

 

(…) 새는 구멍으로 이루어진 짐승, 시간이 그런 가벼운 짐승 같아도, 물방울은 어둠 속으로 정확히 파고들어 시간을 끊으며 물방울 소리를 낸다. 그것은 참으로 끈질긴 노크 소리 같구나.

 

문을 열어줄 때까지, 죽을 때까지, 무엇을 계속하겠다는 건가, 시간의 방문 너머, 누가 앉아서 다 듣고 있는가, 중간에, 누가 아파서 누워 있는가, 바야흐로, 누가 인간의 시간을 떠나려 하는가. 몸이 죽기 전에 몸이 아플 것이며, 가벼워지기 전에 무거울 것이며, 온 세상이 침묵에 빠지기 전에 물방울 소리를 들을 것이니, 맑은 물, 뾰족한 물, 정확히 우주의 급소를 찌르는 물. 그 이후, 너는 시든 입술에 단 한 방울의 물도 축이길 원하지 않을 것이다.

「물방울 시계」 2연의 앞부분을 뺀 전문

 

사실은 ‘에코의 초상’이라는 제목 자체가 상식적인 반응을 배제한다. 그리스 신화의 에코는 원래 미모의 요정이었지만 결국 형체를 잃고 목소리만 남았으며 그것도 남의 말을 되풀이하는 메아리로만 존재한다. 그러니 모습 대신 소리만의 초상을 그리는 파격적인 작업마저 누구의 무슨 소리를 그려낼지 미리 정할 수 없는 겹겹의 난관에 부딪친다. 그야말로 기존 감각분배체제에의 ‘침입’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앞서도 말했듯이 특공작전으로서의 진정성과 위력을 인정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세상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는 문제가 남는다. 참선공부가 성불제중(成佛濟衆)을 위해 필수적인 수련이라 쳐도 그것만으로 중생제도가 완수되는 게 아닌 것처럼 말이다. 원만한 보살행을 위해서는 자신의 공부가 ‘독선기신(獨善其身)’에 머물지 말아야 한다는 결연한 자세가 필요하며, 이는 중생의 삶, 대중의 삶에 대한 깊은 공감과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발원(發願)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에 따른 공부는 시대의 흐름을 읽고 이에 원만히 대응하는 지혜로까지 나가야 한다.

문학으로 눈을 돌리면 한국어로 생산된 근년의 어떤 작품이 여기에 해당할까. 이 물음에 자신있게 대답하기에도 나는 과문하고 적공 부족이다. 다만 최근에 읽은 시집 가운데 백무산의 『폐허를 인양하다』28)를 그러한 대승적 발원의 한 성취로 꼽을 수 있을 듯하다.

백무산은 알려져 있다시피 첫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1988, 실천문학사 2014)와 뒤이은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1990)를 통해 1980년대의 걸출한 노동자시인의 하나로 명성을 얻었다. 이후 노동운동이 상당부분 합법화되고 일부 변질되는 과정에서 그는 개인 노동자로 돌아감과 동시에 삶의 한층 근원적인 문제를 탐구하며 『인간의 시간』(1996), 『길은 광야의 것이다』(1999), 『초심』(2003), 『길 밖의 길』(2004), 『거대한 일상』(2008), 『그 모든 가장자리』(2012) 등의 시집을 잇달아 내놓았다. 이들 시집에서 보여준 지난날의 운동에 대한 성찰과 종교적인 자기탐구가 특히 값진 것은, 백무산은 그 과정에서 세상을 아예 버리고 노동현실을 외면한 채 ‘개인의 실존’ 문제로 빠져든 일이 없다는 점이다. 불교와의 친연성이 『인간의 시간』 이래 두드러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세상의 흐름을 바로 읽고 바로 대응하려는 노력과 병존하고 있다.29) 병존하는 두 경향이 각기 따로 노는 경우도 물론 없지 않았는데, 그 점에서 『폐허를 인양하다』는 새로운 경지에 다다른 것으로 보인다.

「환생」은 제목부터 불교적 색채가 짙다. 그러나 시의 초점은 불교의 윤회설을 설파하기보다 중생의 피맺힌 삶과 염원을 대변하는 데 있다.

 

무슨 억하심정이 있는 거냐고

무슨 도통한 것이 있느냐고

 

이치에 닿는 믿음이냐고

몸을 갈아입을 수 있는 거냐고

 

그럼 그걸 어쩌란 말이냐

과잉과 결핍과 상실을 어쩌란 말이냐

 

천년을 뜬눈으로 기다려온 사랑이 있는데

죽음보다 아픈 사랑이 얼마나 많은데

 

질식하도록 넘치는 눈물이 있는데

죄 없이 희생된 무고한 피눈물이 얼마나 많은데

 

생을 초과하는 사랑이 얼마나 많은데

죽음을 초과하는 눈물이 얼마나 많은데

「환생」 전문

 

「무엇에 저항해야 하는지는 알겠으나」 「난해한 민주주의」 같은 작품은 중생의 삶에 대한 일반적 통찰을 넘어 시대의 절실한 과제를 대면한다. 그가 읽는 근대는 한마디로 철저한 극복을 기다리는 시대인데, 다만 ‘자유’니 ‘민주주의’니 하는 낯익은 이념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인간에게 자유에 대한 새로운 감각이 생겨난” 현실을 통찰한 채 이 현실마저 감당하고 넘어서야 한다.

 

자유를 팔면 자유보다 귀한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자유를 반납하면 더 풍족한 삶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제 들판의 자유는 패배자의 위안일 뿐이라고 믿는다

새로 구입한 것이 자유인지 아닌지 그런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철창을 걷어낸 후에도 들판으로 갈 수 없다

「무엇에 저항해야 하는지는 알겠으나」 부분

 

그러기에 “별들이 패닉처럼/하얗게 쏟아지는” 순간에 깨닫는 것은 “내가 폐허라는 사실”이고, 시인은 오히려 “패닉에 열광”하면서 “나는 그 폐허를 원형대로 건져내야만 한다”고 다짐하며 끝맺는다(「패닉」 부분들).

시는 본디 소설만큼 사실성의 비중이 큰 장르가 아니다. 하지만 백무산의 시적 탐구에서는 ‘감각적 분배’를 바꾸는 작업이 치열하고 풍부한 사실주의적 재현을 곧잘 수반하기도 한다. 「맹인 안내견」도 그렇다. 길에서 본 맹인 안내견 한마리가 시인의 눈길을 끄는데 2연에서는 “야성은 제거되었다기보다/저강도 핵분열로 야성을 서서히 달구어/후끈한 온기로 바꿔놓을 줄 아는 듯”하다는 예사롭지 않은 상념을 토로한다. 이어지는 3연의 야유적인 표현(“그래봤자 개폼이지만 위엄을 잡고/주인 행차에 으스대는 종놈처럼 개폼을 잡고”)과 5연의 “길을 잃고 병들고 겹친 눈보라 속 굶주리던 늑대/인간의 쓰레기에 코를 박고 늑대를 벗어버린 개”(135면)는 ‘야성의 제거’를 꼬집는 흔한 개탄으로 돌아간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머지의 진행은 어떠한 편안한 요약도 허락지 않는 다양한 감정과 상념의 연속이다.

 

수만년 인간의 언어를 받아먹었지만

아무리 토해내도 목구멍을 넘지 못해 컹컹 외마디

토해내고 밭아내도, 터지지 않는, 풀리지 않는, 말들,

컹컹, 역류하여, 꼬리로, 발바닥으로, 혓바닥으로, 붉은 좆으로,

시뻘건 샅으로, 뒷다리로, 튀어나올 듯,

소름처럼, 털구멍마다 번지는, 말의 가시들 삼키고

점잖게 우아한 개폼으로 위장을 하고

그 녀석을 보고 있자니 장난삼아 뻥뻥 차대던 어릴 적 일과

보신탕을 먹던 일과 야성을 팔아 개죽을 사 먹는

놈이라고 욕한 걸 후회한다.

 

어릴 적 복날 아버지가 헛간 도리에 목을 매달고

몽둥이로 두들겨패서 잡다 그만 줄이 끊어져

달아났던 그 멍멍이, 피멍과 피딱지로 털이 온통 거꾸로 선 몸으로

늦은 밤 돌아와, 도둑 지킨다고, 낯선 인기척에, 컹컹 짖어대던

그 똥개, 나는 자다 벌떡 일어나 맨발로 달려가 그 녀석

목을 껴안고 꺽꺽 울었지 그 녀석은 컹컹 웃었지

 

쓰레기통에 머리를 박고서도

그들만 볼 수 있는 것을 볼 수 있어

그들만 느낄 수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어

야성은 문드러진 것이 아니라

가죽 부대 안으로 역류해 뜨겁게 끓어올라

헐떡이고, 내달리고, 물어뜯고, 시뻘건 것을 드러내고 올라타고

개가 되고, 개새끼가 되고, 개 같은 놈이 되었지만

 

저 섬세함은 야성을 잃지 않았다는 증거

그들 눈에 인간도 도시도 폐허일까

눈먼 자들을 끌고 폐허를 지나고 있는 것일까

「맹인 안내견」 6연 이하 전문

 

참신하고 발랄하면서도 대중에 쉽게 다가가는 백무산 시의 한 예로 다소 길게 인용했다. 여기에는 ‘대중’은 아니지만 분명히 ‘중생’인 개의 삶에 대한 성찰적인 공감, “인간도 도시도 폐허”일지 모를 오늘의 역사에 대한 인식, 그러나 스스로 폐허임을 깨닫고서도 “나는 그 폐허를 원형대로 건져내야만 한다”(「패닉」)고 다짐했듯이 인간의 삶도 아예 포기하지는 않는 고집스러운 자비심 등이 사실주의적 재현과 어우러져 한 편의 시를 성취하고 있다.

사실성에 대한 존중이 도와 덕의 방편으로서의 율로 기능할 잠재력이나 오히려 참된 도덕에 역행하는 율이 될 가능성은 물론 시보다 소설, 특히 장편소설에서 두드러진다. 앞서 사실주의가 글쓰기의 인공성을 은폐하는 속임수가 될 위험성이 있음을 지적했는데, 실은 우리시대 장편소설의 뛰어난 성과들도 대부분 이 문제를 정직하게 대면한다. 신경숙(申京淑)의 『외딴방』(1995)은 ‘내게 글쓰기란 무엇인가’라는 일견 ‘포스트모던’한 질문으로 시작해서 1970년대 말엽 여성노동자로서의 자기 삶을 재현하면서도 끝내 그 물음을 놓아버리지 않으며,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는 생생하고 감동적인 많은 대목들이 작중인물 요한이 지어낸 소설이었음이 나중에 밝혀진다.30) 한강 장편 『소년이 온다』 역시31) 자의식적인 글쓰기의 산물이자 재현의 어려움과 줄곧 씨름하면서 마침내 재현과 감각적 분배체제의 재편에 놀랍도록 성공한 작품으로 기억되기에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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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졸저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창비 2011, 40~44면.

2) 실제로 ‘고전적 사실주의 텍스트’로 분류되는 작품조차 그러한 반사실주의자의 규정과 얼마나 동떨어지는지를 설파한 예로 David Lodge, “Middlemarch and the Idea of the Classical Realist Text”(Arnold Kettle, ed., The Nineteenth Century Novel: Critical Essays and Documents, 제2판, Heinemann Educational Books 1981, 218~38면)는 주목에 값한다. 조지 엘리엇의 『미들마치』는 사실주의적 기율에 투철하면서도 사실주의의 국한을 넘어서는 위대한 리얼리즘의 성취로 많은 평자들이 인정해왔는데, 한 유명한 조이스 연구서(Colin MacCabe, James Joyce and the Revolution of the Word, 1975)에서 『미들마치』의 전지적 화자의 서술을 두고 “텍스트 내의 다른 담론들이 재해석의 여지가 있는 자료로 간주되는 데 반해 서사담론은 단지 현실을 향한 창문으로 작용한다. 담론들 간의 이러한 관계는 고전적 사실주의 텍스트의 결정적 특징으로 볼 수 있다”(Lodge, 위의 글 229면에서 재인용)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그 자신 소설가이기도 한 롯지는 작중 화자의 진술들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조지 엘리엇의 언어가 ‘투명한 창문’과 얼마나 거리가 먼지를 예증하면서 실제로 이는 모든 진정한 문학텍스트의 특징이기도 하다고 결론짓는다.

3) 권여선·신용목·정홍수 「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창작과비평』 2015년 여름호 336면.

4) 전성태 『두번의 자화상』(창비 2015) 306면.

5) 전성태의 앞선 소설집 『늑대』(2009)의 한 대목에서 늑대의 1인칭 진술을 채택하는 표제작도 ‘말하는 늑대’가 등장하는 판타지 소설이 아니라 풍부한 사실주의적 재현을 위한 하나의 소도구를 추가한 결과라고 봐야 할 것이다.

6) 지면관계상 이들 빼어난 단편에 대한 분석은 생략한다(대신에 주3의 ‘문학초점’ 대화자들의 논의 참조). 사실 이들 작품을 포함한 전성태의 성취를 ‘사실주의’라는 프레임으로 평가하는 것은 부당할 수 있다. ‘분단체제 인식과 예술적 성취’라거나 ‘작가 언어의 생동감’ 같은 프레임이 더 적절할 듯도 싶다.

7) 졸고 「제삼세계와 민중문학」, (『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 시인사 1979), 합본평론집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1/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 창비 2011, 600~601면, 각주32 참조.

8) ‘수수께끼’는 『기린이 아닌 모든 것』(문학과지성사 2015)의 ‘작가의 말’에서 저자가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펠레스를 인용한 뒤, “수수께끼는 푸는 것이 아니라, 겪고 사랑하고 싸워가야 하는 것”(290면)이라고 말한 대목을 염두에 두고 채용한 표현이다. 『파우스트』의 저자 괴테(J. W. v. Goethe)는 그의 자서전 『시와 진실』(Dichtung und Wahrheit)에서 자신의 평생에 걸친 저작이 “하나의 거대한 고백의 파편들(Bruchstücke einer großen Konfession)일 따름”(제7장)이라고 술회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장욱이 괴테의 그런 문학관을 염두에 두었는지는 모를 일이나, ‘고백’에 관한 그의 문제제기에 엄청난 함의가 담긴 것은 분명하다.

9) 로런스 발언의 인용과 그에 대한 짤막한 논평은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43~44면 참조.

10) ‘이중과제’에 대해서는 나 자신 1990년대말부터 여러 기회에 언급해왔고 국내의 관련논의들이 이남주 엮음 『이중과제론』(창비 2009)에 일차 정리되었다. 나의 새로운 정리 시도로는 네이버문화재단 주최 ‘열린 연단: 문화의 안과 밖’ 씨리즈 제43강(2014.11.22) 「근대, 적응과 극복의 이중과제」가 있고(http://openlectures.naver.com/contents?contentsId=48484&rid=251), 영문자료로 Paik Nak-chung, “The Double Project of Modernity,” New Left Review 95, 2015년 9-10월호도 참조.

11) 리얼리즘론과 이중과제론의 연결에 관해서는 졸고 「현대시와 근대성, 그리고 대중의 삶」,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78~79면 참조.

12) 내 경우 그 명시적 발단은 졸고 「민족문학론과 리얼리즘론」(1990)의 마무리 대목(『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창비 2006, 411~12면)이었던 셈이며,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에서도 ‘참된 리얼리즘’이란 것조차 “또 한번 해체와 극복을 요하는 형이상학적 명제”(『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42면)가 될 수 있음을 상기했다.

13) 위의 “The Double Project of Modernity” 78면.

14) 그런데 하이데거가 골똘히 사유하는 das Sein이 흔히 ‘존재’로 번역됨으로써 무()는 아니지만 온갖 형이상적 실체를 포함한 여하한 존재자(Seiendes)도 아닌 어떤 경지에 대한 탐구가 곧잘 흐려진다.

15) 진은영 『문학의 아토포스』, 그린비 2014.

16) 바디우 인용문의 국역본은 “여자 무용수는 춤추지 않는다”(『문학의 아토포스』 153면에서 재인용)라고 했지만 이는 어색하고 오해의 소지가 있는 번역이다. 말라르메가 관람한 발레의 무용수가 여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남자 무용수’가 아닌 ‘여자 무용수’라는 점이 중요한 게 아니다. 춤의 본질적 성격이 문제이며, ‘춤꾼은 춤추지 않는다’는 말을 하면서 프랑스어의 관행대로 ‘그녀(elle)’ 및 그 선행사인 ‘여무용수(la danseuse)’로 성별을 가려준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원문을 대조하고 도움말을 준 김동수 박사에게 감사드린다.)

17) 실제로 진은영도 원용하는 랑씨에르의 『미학 안의 불편함』에서 바디우에 대한 비판은 매우 단호하고 신랄하다(영역본 Jacques Rancière, Aesthetics and Its Discontents, tr. S. Corcoran, Polity Press 2009, 63~87면; 국역본 주형일 옮김, 인간사랑 2008, 107~42면 참조).

18) 이와 관련해서 『이중과제론』에 수록된 졸고 「한반도에서의 식민성 문제와 근대 한국의 이중과제」 47~50면 및 주10에 소개한 강연원고 「근대, 적응과 극복의 이중과제」의 제4절 후반부 참조.

19)It is in the study of literature, the literature of ones own language in the first place, that one comes to recognize the nature and priority of the third realm (as, unphilosophically, no doubt, I call it, talking with my pupils), the realm of that which is neither private and personal nor public in the sense that it can be brought into the laboratory and pointed to. You cannot point to the poem; it is there only in the re-creative response of individual minds to the black marks on the page. Buta necessary faithit is something in which minds can meet.” (F. R. Leavis, Nor Shall My Sword, Chatto & Windus 1972, ‘II. Two Cultures? The Significance of Lord Snow’, 62면)

20) 따라서 이를 굳이 ‘버추앨러티’라거나 ‘비객관적 실재’로 표현할 필요가 없다는 나의 주장은 『백낙청회화록』(창비 2007) 제4권에 수록된 백낙청·여건종·윤혜준·손혜숙 「지구시대의 한국 영문학」 517면 참조. ‘제3의 영역’의 우선성에 관해서는 졸고 「근대세계, 인문정신, 그리고 한국의 대학」,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 창비 2009, 380~81면에서도 거론했다.

21) 「우리시대 한국문학의 활력과 빈곤」,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126면. 서양에서도 연구자들은 ‘덕’을 ‘도의 힘’으로 해석하는 게 당연한데 영국의 유명한 번역가 아서 웨일리의 『도덕경』 연구서(Arthur Waley, The Way and Its Power, 1934) 제목이 그 단적인 예다. 『도덕경』의 새 번역본에도 ‘A Book About the Way and the Power of the Way’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Ursula K. Le Guin, tr., Lao Tzu: Tao Te Ching, 1997).

22) 알려져 있다시피 근년의 한국문단에서 ‘문학과 정치’ 논의를 촉발한 것이 『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에 발표한 진은영의 평론 「감각적인 것의 분배: 2000년대 시에 대하여」였다. 『문학의 아토포스』 제1장의 바탕이 된 글인데, 책에 수록하면서 대폭 보완되었으므로 온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저서본을(제1부 ‘문학의 비윤리’를 구성하는 2~3장과 더불어) 읽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23) 이 점을 더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 한반도의 자생적 종교인 원불교의 ‘법률은(法律恩)’ 개념이다. 곧, 천지·부모·동포의 은혜와 더불어 법률의 은혜를 사은(四恩)의 하나로 규정하는데, 이때의 ‘법률’은 ‘실정법’의 동의어가 아니라 “대범, 법률이라 하는 것은 인도 정의의 공정한 법칙을 이름이니”라고 정의하고 있으며, 거기서 입은 은혜의 한 조목으로, “때를 따라 성자들이 출현하여 종교와 도덕으로써 우리에게 정로(正路)를 밟게 하여 주심”(「정전」, 『원불교전서』 22판, 원불교출판사 1995, 37면)을 꼽는다.

24) 「현대시와 근대성, 그리고 대중의 삶」,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85면. 및 「D. H. 로런스의 민주주의론」, 『창작과비평』 2011년 겨울호, 405~406면.

25) 「현대시와 근대성, 그리고 대중의 삶」 69~70면, 85~86면.

26) 같은 글 69면.

27) 여담이지만 이런 시가 대중가요의 가사가 되기는 힘들더라도 어느 뛰어난 작곡가의 이바지로 대중에게 약간은 더 친숙해질 가능성을 생각해본다.

28) 백무산 시집 『폐허를 인양하다』, 창비 2015.

29) 시인은 한 대담에서 87년 6월항쟁(및 7~8월 노동자대투쟁)의 부분적 성공 이후 운동의 변질을 지켜보면서 불교적 성찰에 끌리게 된 점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그때 생각에 국가와 권력과 개인적 실존이 동일한 양상을 가진 허상으로 보였어요. 자신의 전 존재를 내려놓지 않으면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생각이 깊어졌습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의 해답을 얻기 위해서 본질을 파악하려고 애쓰죠. 그러나 불교는 우리가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회의하고 성찰하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땅에서 쓰러진 자가 땅을 딛고 일어나야 한다는 거죠. 이것은 언어를 수단으로 하는 문학이 안고 있는 문제이기도 했기에 고민은 이동했어요.”(백무산·맹문재 권두좌담 「백무산 시인 시작 활동 30년 특별 대담」, 『푸른사상』 2014년 가을호, 17면)

30) 그렇다고 단순히 지어낸 이야기로 치부할 수도 없게 만드는 이 빼어난 소설에 대한 나의 해석은 「우리시대 한국문학의 활력과 빈곤」,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140~48면; 『외딴방』에 관해서는 졸고 「『외딴방』이 묻는 것과 이룬 것」,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참조.

31) 『소년이 온다』에 대해서는 본격적인 평론을 쓰지 못했다. 다만 제29회 만해문학상 심사평 형식의 단평을 『창작과비평』 2014년 가을호(478~79면)에 발표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