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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 제5회 사회인문학평론상 당선작
세월호 이후 정치적인 것의 ‘세속화’
정현
1979년생. 독립연구자로서 현재 정치철학 및 매체사를 중심으로 공부. refur1343@gmail.com.
세월호참사는 단순한 ‘참사’ 이상의 시대적 징후의 성격을 갖는다. 이 사건이 정부의 완전한 무책임에 의해 야기된 ‘참사’라는 것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 ‘재론의 여지없음’과는 달리 참사 이후의 진상규명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들은 이 시대 대중의 사고 패러다임을 근본적인 물음 속에 빠트리고 있다. 세월호참사가 생명체로서의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이라면, 세월호 이후의 사태는 그 ‘죽음’과 관련해 오늘날 우리에게 공적 ‘책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죽음은 사적으로는 소멸을 의미하겠지만, 공적으로는 하나의 화두로 발전할 수 있다. 뒤에서 보겠지만, 역사적으로 죽음은 일정한 시대적 계기와 만나며 대중의 저항과 정치적 운동으로의 전환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그러한 전환이 일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유가족을 비롯해 많은 이들을 좌절시키는 것은 역으로 ‘공적 책임’ 자체에 대한 사회 전반의 무감각과 망각이다. 어떤 무기력감이, 그리고 우울감이 세월호참사 이후의 정세를 지배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 무기력감은 어디에서 오는가? 혹은 ‘죽음의 공적 성격 상실’이라고 부를 수 있을 이 현상은 오늘날 정치적 동물로서의 인간존재 일반에게 나타나는 어떤 변화를 암시하고 있는가?
1. ‘세월호’ 이후의 멜랑꼴리
세월호 1주기를 경과하며 한 유가족은 참사 이후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말한 바 있다.1) 시간이 멈춰버렸다는 것, 어떠한 변화도 기대할 수 없는 시간이 지속되었다는 것이 야기한 가장 주목할 만한 현상은 사회 전반을 덮친 무기력과 우울감의 대중화다. 예컨대 르뽀작가 김순천은 참사 이후 자신의 정서상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뒤로 나의 시간은 뒤엉키기 시작했다. 어떤 때는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또 어떤 때는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버려 날짜를 셀 수가 없었다. 나는 바보가 되었다. 멍한 순간이 많아졌다. (…) 한편으로는 예민해졌고, 근본적인 질문을 많이 하게 되었다. 인간은 왜 사는가. 사회란 도대체 무엇인가. 사회가 이렇게 인간들에게 잔혹한 것이라면 그게 굳이 필요한가.2)
참사 이후 쏟아진 수많은 물음 중 주된 하나가 바로 인간 정치공동체의 존재이유와 관련된 것이었다. 참사가 정부의 무책임한 모습과 함께 전개되자 사람들은 국가의 주권기능과 그것이 기반을 두고 있는 사회적 관계들을 의문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의문은 변화 가능성의 부재라는 현실과 만나며 빠르게 혼란과 무기력감으로 전이되었다. 당대의 언론은 이러한 심리적 현상에 주목하며 참사 이후의 ‘전국민적 우울증’과 ‘힐링’의 필요성에 대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3) 언론은 대체로 정신의학자들의 말을 빌려 외상후스트레스장애와, 대중매체를 통한 ‘부정적’ 소식과의 지속적인 대면을 대중적 우울증의 원인으로 지목했으나, 앞의 인용문처럼 문제는 좀더 근원적이고 복합적인 듯 보인다.
세월호참사로부터 많은 이들이 정치공동체의 몰락을 목격했다고 할 때, 이 몰락이 단순한 국가 행정기능의 오류가 아니라 국가와 시민사회의 존재조건 일반의 더욱 근본적인 문제와 연관되었다는 데는 대체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듯하다. 크게 두가지 측면이 주목되었다. 하나는 신자유주의의 효율성 논리와 관련된 것으로, 돈과 긴축의 생존논리만을 추구하는 사회가 안전의 윤리적 책임이 설 자리를 근본적으로 배제했다는 것이다. 이명박정권기의 선박연령 제한선 조정과 선원 전반의 비정규직화는 이러한 신자유주의화의 직접적 결과였으며, 사건 당시 각자의 생존에만 매달린 선원들의 모습은 이로부터 파생된 윤리 일반의 상실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하나는 사건 이후의 과정으로, 주로 언론과 정치인들의 행동을 통해 나타난 공론장의 기능장애와 관련된다. 주지하다시피 참사 이후 언론은 상호충돌하는 수많은 ‘증언’을 아무런 공적 검증도 거치지 않은 채 경쟁적으로 보도했고, 정치인들은 어떠한 대책도 없이 팽목항에 나타났다가 ‘인증샷’만 찍고 사라지는 무책임한 모습을 반복했다.4)
비슷하지만, 다소 다른 데 초점을 둔 것으로 주목할 만한 것이 진태원(陳泰元)의 해석이다. 그가 주목한 것은 국가가 이 사건을 통해 책임의 ‘주체성’을 결여한 자신의 모습을 노골적으로 가시화했다는 사실이다. 그에 따르면, 세월호참사에서 국가는 어떠한 공적 책임의 주체성도 결여한 ‘검은 구멍’으로 나타났다. 국가는 사태 자체와 관련해서 아무것도 주체적으로 하려 하지 않았고, 따라서 애초에 인명을 구조할 의지가 없었을 뿐 아니라 사건의 진상을 흐리며 유가족의 움직임이 사회적 운동으로 전화하는 것만을 막고자 했다는 것이다. 주체성을 결여한 국가는 그 주권의 구성원인 ‘우리’에게 아무것도 보증할 수 없는 빈 공간, 어떤 능동적 결정도 행위도 할 수 없는 무의미의 사물 그 자체와 같다(그러므로 국가는 ‘우리 편’이 아니다). 진태원은 세월호참사로 인한 대중적 충격의 내용과 원인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국가가 검은 구멍이라면, 이는 국가가 우리 편이, 나의 편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세월호사건에서 대중이 충격을 받은 것은, 이처럼 국가가 피해자들을 제대로 구조하지 못하고 사고 수습 및 사후 처리에서도 무능력을 보이는 것이 단순한 무능력이 아니라 무의지의 표현이라는 점. 곧 국가는 단지 구조할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구조할 생각이나 의지가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 사건에 대하여 책임을 지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치안 기계로서의 국가가 가장 큰 관심과 공력을 기울이는 것은 더이상 소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5)
국가가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보증한다고 할 때 사람들이 머릿속에 그리는 국가의 상은 사회의 최종적 위기에 대해 책임져줄 주체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국가와 관련한 근대철학의 오랜 논쟁을 통해서도 이러한 가정은 대체적으로 확인될 수 있다. 17세기의 홉스(T. Hobbes)로부터 18~19세기 혁명기 프랑스의 중농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근대의 국가론을 정초한 강력한 가설 중 하나는 국가가 사회에 외재하는 권력으로서, 필요와 이해관계에 얽힌 각 개인의 갈등이 최종적 위기로 폭발하지 않도록 하고 내외부의 압력이나 위협으로부터 개인의 안전과 생존을 지켜줄 초월적 기관이라는 것이다.6) 반면 세월호참사에서 우리가 마주한 것은 이 초월적 역할을 상실한 국가의 탈주체화, 혹은 그 주권적 함의로부터 벌거벗겨진 국가의 민낯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의 이 ‘텅 비어 있음’, 이것이야말로 세월호참사로부터 시민사회가 받은 충격과 무기력감의 중요 원천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 편’이 아닌 이 국가에 대항해 대중운동이 어떠한 강력한 변화의 구심점이 될 수 없었다는 점은 또다른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특히 국가에 대한 분노, 혹은 국가가 우리의 편이 아니라는 ‘각성’7)이 구체적인 경계설정과 그 대상을 갖는 것과 달리 무기력감은 대상 자체의 상실과 관련된 매우 모호한 감정이라는 점에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였을까. 20여년 전 삼풍백화점 붕괴 때와는 달리 이 무기력감을 타고 세월호 유가족의 분노를 특정 정치세력과 연관된 배후세력론으로 몰고 가는 정부 주도의 여론이 참사 발생 며칠 만에 부상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8) 주류 미디어에서는 곧바로 세월호의 소유기업인 청해진해운의 총수 유병언에 초점을 맞추는 여론몰이용 마녀사냥을 시작했고, 정부의 단원고 대입 특혜안과 수억원의 보상금 지급 방침에 대한 논란이 이어졌으며, 세월호가족대책위의 대리기사 폭행논란이 SNS를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주지하다시피 이러한 감정적 동요의 과정에서 대중 일부는 피로감을 호소했고, 여당은 참사 3개월 만에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승리했으며, 단식투쟁 중이던 유가족 김영오를 조롱하는 온라인 ‘일간베스트저장소’(이하 ‘일베’) 이용자들의 ‘폭식투쟁’ 퍼포먼스가 아무런 실질적인 분쟁 없이 진행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근본적인 혼란에 빠진 것은 대중정치 그 자체였다. 근대정치의 핵심적 준거가 된 인간 정치공동체의 가장 강력한 구성요소는 생명이었다. 지난 시대에 단식투쟁과 분신 등 생명을 담보로 한 투쟁들은 대중의 정치적 운동으로의 전화를 강력하게 촉발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상품시장을 매개하며 태동한 시민사회는 개인 생명의 재생산을 사회체(social body) 전체의 재생산 여부에 종속시킴으로써 생명의 물리적 재생산 자체를 정치공동체의 핵심 화두로 부상시킨다. 넓게는 생존권을, 좁게는 소외와 노동권의 문제를 수반하며 공론화된 ‘생명’은 19세기 이후 대중의 정치적 점화를 위한 강렬한 기폭제가 되었다. 분명한 것은 ‘생명’(그리고 ‘죽음’)이 정치의 충만하고도 초월적인 가능태의 장으로 기능했다는 점이다. 푸꼬(M. Foucault)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난 세기〔19세기—인용자〕 이래, 권력의 일반적 체계에 도전한 대투쟁들은 이전 권리로의 회귀에 대한 믿음 혹은 시간의 순환이나 황금시대에 대한 낡은 꿈에 의해 인도되지 않았다. 요구된 것 그리고 목표로 기능한 것은 기본적 필요로, 인간의 구체적 본질로, 그의 잠재성의 실현으로, 그리고 충만한 가능성으로 이해된 생명이었다. (…) 생명에 대한 ‘권리’, 그의 신체, 건강, 행복, 필요의 충족, 그리고 모든 억압 혹은 ‘소외’를 넘어 그 자신을, 그 자신의 모든 것을 회복할 ‘권리’가 이 모든 새로운 권력절차들에 대한 정치적 반응이었다.9)
푸꼬의 말처럼, 생명이 정치의 준거범주로 부상한 19세기를 전후로 해서 사회사상은 이 ‘생명’의 개념 속에서 정치공동체의 구성요소와 그 아포리아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19세기의 혁명들이 ‘인민주권’의 원리를 요구했다고 할 때, 이 인민주권이 전제한 것은 생명에 대한 자연권적 요구에 다름 아니었다. 생명은 모든 인간존재를 균질화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정치공동체를 구성하는 근본 범주로 기능한다. 예컨대 1789년 프랑스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2조는 이렇게 선언한다. “모든 정치적 결사의 목적은 인간의 자연적이고 소멸할 수 없는 권리들을 보존하는 데 있다.” 전태일(全泰壹)의 분신과 광주항쟁 이후 지식인들의 사회운동 투신을 이끈 ‘죽음’의 정치적 숭고함이 준거한 것이 바로 이 당위로서의 ‘소멸할 수 없는’ 것의 초월성이었다. 19세기 이후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등장한 혁명정치가 행한 바 역시 유사했다. 인민의 생명에 가해진 빈곤과 죽음의 현상을 통해 사회주의는 근대 정치공동체의 근본적인 아포리아(계급적대)를 폭로한다.
반면 세월호참사의 경우는 정치적인 것의 초월적 숭고함보다는 미디어를 통해 생산된 이미지의 그물망에 사로잡힌 듯 보인다. 세월호참사가 미디어의 감정정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할 때,10) 그 영향의 한복판에 들어선 것은 일베의 폭식투쟁을 통해 재현된 속물들의 카니발적 퍼포먼스였다. 오늘날 죽음은 더이상 대중의 도덕적·정치적 방향감각을 일깨울 수 없게 된 것일까? 세월호참사가 국가의 ‘검은 구멍’을 드러냈다면, 참사 후 전개된 사태들은 죽음의 공적 성격에 드리운 어떤 무기력감을 암시하는 듯하다.
2. 죽음의 존재론과 초월적인 것의 세속화
앞서 언급했듯, 죽음이 ‘초월적’ 범주를 갖는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근대 시민사회의 구성을 가능케 하는 자연법(natural law, 자연법칙)의 물리적 원리와 맺는 관계 때문이다. 무엇보다 생명은 어떠한 인간적 매개도 없이 물리적으로 그냥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아무런 가치지향성의 매개가 없는 사회의 물리적 존재를 정치적 주권주체의 가치지향적 존재로 변모시키는 일이 프랑스혁명 후 정치공동체의 근본 과제로 부상한다.11) 18세기 이후 경제학은 개인들의 동물적 필요(need, 욕구)와 이익추구 경향이 시민사회의 합리적 재생산을 가능케 하리라고 가정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사회의 균질적 공간 한복판에 나타난 ‘비참’(빈곤과 죽음)한 현실은 모든 자유방임의 자연법적 가설을 중단시키며 새로운 가치지향의 정치적 구심점을 요청하게 된다.
이때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 비참한 자)이 ‘사회(적인 것)’의 균열을 표상하며 화두로 떠오른 19세기 중반에 사회주의가 그 존재를 가시화하며 대중운동의 한복판으로 들어섰다는 점은 중요하다. 프랑스혁명을 경과하며 혁명적 지식인들은 사회라는 이름의 물리적 재생산 공간이 가치지향적 주체의 모델에 의해 재구성되어야 함을 자각하게 된다. ‘인민’이라고 불린 이 모델은 그 이미지가 매우 불분명했는데, 그것이 분열된 사회현실의 구체성에 준거했다기보다 미래의 이념적 당위로 요구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근대성이 단언한 것은 무엇보다 원칙으로서의 인민이다. 원칙이자 동시에 약속으로서의 인민, 그 단어의 단순한 현현을 통해 하나의 권역으로서의 사회의 구성을 상징하고 국민적 실체를 보편화하는 것으로서의 인민. 그것은 사회적 유대의 진리다. 그것은 사회학적 팩트이기 이전에 정치적 명제에 준거한다. 이로부터 야기된 것은 그것이 구현한 가치와 그것이 환기한 현실 간의 불가피한 긴장, 즉 정치적 밀도와 사회학적 흐름(flux) 간의 불가피한 긴장이다.12)
요컨대 인민은 불균등하고 분열된 사회적 현실(“사회학적 흐름”) 위에 던져진 정치적 약속이자 당위적 요구로 사고되었다. 19세기에 신분질서의 해체와 시민사회의 부흥이 유럽을 중심으로 일반화되면서 기존의 특권적이고 특수하던 가치관들을 보편적 사고관으로 번역할 집단주체의 새로운 경계설정이 필요해졌다. 시민사회에서 ‘인간’이라는 개념은 모호했고, ‘시민’은 의무와 권리를 수반한다는 사실 외에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으며, ‘인구’는 경제학에 의해 생산과 소비의 단위를 구성한다는 것 외에 어떠한 함의도 부여받을 수 없었다. 이때 당위적이지만 여전히 모호했던 ‘인민’ 개념에 가치지향적 이념성을 부여하며 부상한 것이 바로 내셔널리즘과 맑스주의였다. 이 둘은 기본적으로 19세기 시민사회의 자연법 원리에 가해진 균열을 바탕으로 등장했다. 자연법 이론이 가정한 것은 무엇보다 크게 두가지였다. 하나는 ‘사회’가 생물학적 충동의 집합체라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 매개하는 것은 어떤 가치가 아니라 각 개인의 필요와 이익(interest, 이해관계) 추구의 자연학적 충동이었다. 다른 하나는 이 자연학적 충동의 공간에서 자유의 권리가 완전한 형식적 배타성에 입각해 재해석된다는 점이다. 근대과학에서 자연이 가치중립적 공간이듯, 권리의 소유자인 인격(person, 개인)은 타인의 어떠한 가치구속적 개입으로부터도 해방될 자유, 즉 ‘면제’의 자유를 획득하게 된다.13) 반대로, 19세기 시민사회의 재생산 위기와 마주해서 내셔널리즘과 맑스주의가 시도한 것은 상호배타적이게 된 이 형식적 권리의 주체들을 가치지향적 집단주체로 대체함으로써 정치의 새로운 구심점(국민적 일체감과 계급적 당파성)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 두 사상은 ‘유토피아적 미래’를 현재의 위기에 대한 당위적 요청으로 추구함으로써 ‘인민’ 개념의 정치적 약속을 계승하고자 한다.
반면 오늘날 근대정치의 초월적 구심점이었던 사회적인 것의 균열에 난입한 것은 일베의 폭식투쟁 퍼포먼스다. 이 카니발적 퍼포먼스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닌 것은 이미 퍼포먼스 이전에 SNS를 통해 단식투쟁의 진정성을 의문에 부치는 담론들이 거대하게 형성되었고, 세월호 유가족을 중심으로 권리회복을 주장하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혐오문화가 널리 퍼져 있었다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다. 세월호 유가족 김영오의 단식투쟁을 조롱하기 위해 ‘906 광화문대첩’(2014.9.6)이라는 이름하에 기획된 이 퍼포먼스가 새로운 것은, 그것이 ‘생명’을 담보로 한 투쟁을 패러디하며, 죽음이 촉발했던 근대의 정치적 숭고함을 조롱거리로 소환했다는 점이다. 천관율의 조사에 따르면, 일베의 사고 패러다임을 특징짓는 핵심 키워드 중 하나는 유머코드다.14) 마찬가지로, 이들은 광주항쟁 희생자를 ‘홍어’에 빗대고 자기네가 ‘좌빨’이라고 단정하는 고(故) 노무현 대통령을 ‘코알라’에 빗댐으로써 죽음의 이질감이 불러오는 거리감을 제거하고자 하는 강한 충동을 보여준다. 이러한 충동은 특히 이들이 사용하는 인터넷 용어에 잘 반영되어 나타난다. 김학준은 ‘드립’과 ‘어그로’라는 용어15)에 주목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드립과 어그로의 중요성은 극단적인 표현을 한다는 데 있다기보다는 그런 표현들이 성스러운 것을 부정하고 해체한다는 데 있다. 유머와 풍자의 본질이 그러하듯 드립은 절대적인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며, 일베 이용자들은 성스러운 것을 파괴하는 쾌감을 통해 그들의 감정적 에너지를 고양시킨다.”16) 요컨대 이들의 에너지는 성스러운 것이 세속화되는 지점에서 “고양”된다. 그러나 동시에 인터넷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형성되는 이러한 고양이 일반적인 대중정치의 집단심리와 구별되는 점은 그것이 어떠한 조직화나 미래지향적 열망에 의해 고무되지 않는다는 점이다.17) 이들의 충동을 지배하는 것은 회복되어야 할 어떤 외적 준거가치(도덕적 혹은 이념적 가치)가 아니라 ‘베스트 추천글’로 상승하고자 하는 커뮤니티 내부의 무매개적 경쟁압력이기 때문이다.18)
성스러운 것이 주는 이질감이 대체로 ‘귀엽고’ ‘우스꽝스러운’ 이미지들에 의해 세속화되고 친밀화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일베가 자신의 이미지를 상징하기 위해 사용하는 캐릭터 ‘베츙이 인형’을 포털사이트에서 검색하면, 이 인형이 무엇보다 ‘귀여움’의 이미지를 통해 대중적 호소력을 획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죽음은 생명의 부정이며, 사회적인 것에 생긴 균열이다. 마찬가지로 도덕적 숭고함은 일상을 지배하는 친숙함의 세계에 대립한다. 김홍중(金弘中)은 귀여움의 친숙함에 대비되는 것으로 ‘진정성’(authenticity)과 겹치는 ‘죽음’의 이미지를 든다. 특히 1987년을 경과하며 청년들의 요절 형태로 나타난 그것은 정치적인 것의 불멸성을 상징하는 것처럼 기능한다.
주지하듯이, 87년체제의 전당에는 수많은 노동자, 학생, 재야인사 그리고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청년들이 ‘열사’의 이름으로 축성되어 있다. (…) 민주주의의 가치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유령처럼 산 자들의 세계에 회귀하는 이 존재들은 진정성의 시대가 상징처럼 보유하고 있는, 죽음을 통해 진압되지 않는 정치적 생명, 즉 비오스(bios)의 불멸성의 화신들이다. 비록 육신은 소멸했지만, 그 죽음은 결코 망각되지 않고 공동체에 의해서 의례적으로 기억된다.19)
앞서 언급했듯, 죽음은 정치공동체에 내재된 어떤 아포리아를 드러낸다. 이것이 정치적인 것의 불멸성과 만나는 것은 그것이 사회의 물질적 지배의 원리를 중단시키며 새로운 방향감각의 정신을 불러내기 때문이다. 김홍중에 따르면, 1997년 이전 20여년을 지배한 정신은 도덕적 소명의식(80년대)과 윤리적 자기성찰(90년대)의 정신이었다. 반면 1997년 경제위기 이후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물질적 가치를 노골적으로 추종하는 ‘생존자’의 동물적 속물주의다.20) 이 생존자의 세계에는 방향감각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냥 ‘생활’을 살아가며,21) ‘생활’의 동물성 위에 덧붙여지는 모든 메타적 가치를 거부하려는 강박을 보인다. 여기서 이 동물적 생존자들이 과장된 이미지에 집착하는 이유를 추측할 수 있다. ‘홍어’와 책임의 윤리적 문답관계를 형성할 수 없듯이, ‘베츙이 인형’의 과장된 얼굴 이미지는 주체로서의 인간의 모든 개별성(singularity)과 책임성을 희석하는 가면의 장막을 형성한다.
따라서 오늘날의 시대정신이 생존자의 ‘동물성’에 준거한다고 할 때, 그것은 가치지향의 방향감각과 더불어 근본적으로 ‘주체’의 상실이라는 화두와 연관되어야 한다. 주체는 기본적으로 행위자이면서, 자연충동의 평면성을 초월할 행위의 개별성을 열망하는 존재다. 바디우는 인간이 동물성을 넘어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이미 주어진 것”의 질서 속에서는 실현되지 않은 다른 무언가를 소환해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22) 마찬가지로 그는 정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조직화된 집단행동으로서 특정 원리를 따르고 지배상태에 의해 억압된 새로운 가능성의 결과를 현실에서 전개하려는 목적을 갖는 것.”23) 정치는 기본적으로 아직 존재하지 않는, 그러나 존재해야 할 것에 대한 방향감각으로부터 나온다. 마찬가지로 주체는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실현되어야 할 무언가를 추구하는 인간존재의 다른 이름이다.24)
그러나 오늘날의 동물화된 인간은 자신의 생물학적 신진대사(이른바 ‘먹고사니즘’)를 우선시하고 정글의 왕(이른바 ‘갑’)이 되고자 하는 이익추구의 이기적 충동을 넘어서는 어떠한 메타적 의미생산의 가능성도 상실하고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 ‘혐오주의’라는 이름으로 일반화되고 있는 담화 패러다임이 정향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자연적 정체성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탈이데올로기의 시대라 불리는 오늘날의 폭력을 특징짓는 것 중 하나는 모든 정체성을 자연적 정체성으로 전환하려는 재자연화(re-naturalization)의 담화논리다.25) 특히 디지털미디어를 매개하면서 폭력은 더이상 이념이나 가치가 아니라 성(性)과 인종 등 인간의 물리적 정체성 자체를 직접 겨냥하고 있다.26) 19세기에 등장한 이념들이 미래의 가능태로 정향되고 새로운 가치와 새로운 세계질서의 창조를 꿈꾸었다면, 오늘날의 혐오주의는 역으로 모든 가치를 세계의 자연적 질서 속으로 환류시키려는 듯하다. 이것이 함의하는 바는 이렇다. ‘오늘날 인간에게는 더이상 어떤 새로운 것도, 어떤 이질적인 변화의 가능성도 없다. 여성은 여성이고, 유색인은 유색인이며, 당신은 곧 당신에게 이미 주어진 것일 뿐이다.’ 주지하다시피 이러한 시각을 지배하는 하나의 단어는 ‘냉소’다. 인터넷사이트 ‘헬조선’은 게시물마다 다음과 같은 반어적 문구를 넣는다. “헬조선은 오늘도 평화롭습니다.” 일베의 혐오주의를 규정하는 것 역시 바로 이 ‘냉소주의’다.
일베에서 타자들을 향한 비난이 언제나 ‘무지함’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일베에서의 혐오는 기실 냉소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한 채 평범 내러티브를 내면화해 현실적인 순응을 강조하는 것이 일베적 멘털리티의 핵심이 된다. 때문에 일베 이용자들은 자신의 고통을 드러내면서 인정투쟁을 요구하는 모든 주체화에의 시도를 무산시키며 평범함의 진리, 순응의 의무를 강요하는 체제수호의 화신이 될 수밖에 없다.27)
평범함의 추구가 “체제수호”로 연결되는 것은 그것이 정치공동체의 아포리아를 드러낼 (‘죽음’으로 대표되는) 이질성을 적극적으로 배격하기 때문이다. 인간 외에도 개미와 꿀벌 등 군집을 이루고 의사소통을 하며 ‘공동체’적 삶을 살아가는 동물들은 존재한다. 그러나 의사전달이 단선적이고 단발적인 다른 동물들28)과는 달리, 인간은 메시지의 전달 자체가 새로운 의미군과 관계망을 파생시킨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갖는다. 인간의 정치적 동물로서의 주체성은 바로 이러한 의미생산의 메타적 가능성에 근거한다.
반면 오늘날 ‘생활’을 살아가는 동물화된 인간존재의 속물주의는 이러한 의미의 메타성을 견딜 수 없다. 특징적인 것은 그 메타성에 대한 강한 부정이 근대의 정치 패러다임에서는 극히 낯선 것이라는 점이다. 앞서 봤던 근대정치의 주요 패러다임 중 내셔널리즘 역시 ‘출생’(natio)의 물리적 출처를 기반으로 그 정치공동체의 주체를 설정한다는 점에서 오늘날 ‘재자연화’의 담화논리와 유사한 기반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국경을 준거로 외부에 적(敵)을 두고, 그 적과의 경계를 통해 주권적 정치의 장과 투쟁목표를 구성할 수 있었던 내셔널리즘과 달리, 오늘날의 동물화된 속물주의는 모든 숭고한 것을 세속화함으로써 정치를 가능케 하는 경계 일반을 소멸시킨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가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앞서 봤듯, 근대의 정치가 내포한 죽음의 정치적 숭고함은 기본적으로 근대의 ‘사회’를 구성한 자연법적 원리로부터 파생된 것이었다. 자연과학의 영향을 받은 근대의 사회철학은 몸속에서 혈액이 돌듯 사회 속에서 화폐와 교통수단을 매개로 인간생명체들이 그 영원한 신진대사를 수행할 것이라고 가정했다. ‘죽음’은 이 생물학적 자연법 가설에 난입한 주체의 비명이었다. 그 비명은 신진대사의 관계망 자체를 의문에 부치며(개인들은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사회를 구성한다고 간주되었다), 정치공동체에 어떤 새로운 방향감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더이상 사회가 이러한 신진대사의 유기적(인과적) 원리에 따라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을 전체의 부분, 관계의 한 매듭으로 사고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의 모토인 ‘기업형 자아’의 모델은 노동하는 개인주체를 그 자체로 독립적인 세계를 구축하는 자아 모델로 변형시켰다. 90년대 이후의 ‘재테크’ 문화의 연속선상에서 신자유주의의 금융경제는 각 개인을 투자자화함으로써 이러한 ‘자아=세계’의 패러다임을 완성하고자 했다. 디지털미디어는 또한 모든 물리적 구속요건으로부터 분리된 세계를 구축함으로써 자아의 고립적 모델을 더욱 심화시켜왔다. 자아가 곧 세계가 되는 순간 ‘죽음’은 정치공동체의 어떠한 매듭에도 연결되지 못한 채 오롯이 그 자아의 독자적인 책임으로 전가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세월호사태를 비롯한 그 모든 죽음 속에서 목도하고 있는 사실이다.
물론 이 모든 현상이 새로운 자아 모델을 구축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축적 시스템이 지속되는 한에서만 유지될 수 있음은 분명하다. 최근 그리스 구제금융 사태 등을 비롯하여 가시화되고 있는 전지구적 금융위기는 시대의 시계추를 다시 20세기초로 돌린 듯, 시스템 자체의 어떤 거대한 혼란기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29) 이 시대의 무기력감이 정치적 방향감각의 상실로부터 비롯되었다면, 이 거대한 균열의 국면으로부터 오늘날 우리가 찾아야 하는 것은 동물적 속물성을 중단시킬 새로운 이념의 방향감각이다. 바디우의 말처럼, 이 시대는 19세기 후반과 같이 다시 새로운 이념의 출발을 필요로 하는 국면에 와 있다.30) 그러나 또한 명확한 것은 그 이념이 준거해야 할 배경도 변했다는 점이다. 적어도 오늘날 대중의 ‘죽음’에 대한 태도가 그것을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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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월호 이후 1년의 기록…재난은 아직도 진행 중」, MBC 이브닝이슈 2015.4.16.
2) 김순천 「시간이 멈춰버린 안산에서」, 희망제작소 홈페이지(http://www.makehope.org) 2015.4.6.
3) 세월호참사 이후로 전국민적 우울증을 우려하는 수많은 기사가 쏟아졌다. 안산 지역에 한해서는 「세월호 이후 안산 주민 10명 중 1명 꼴로 우울증세」, 경향신문 2015.4.10, 참사 당시의 보도로는 「〔세월호 침몰〕 전국민 집단우울증 우려… 정부 차원 대책 필요」, 뉴스1 2014.4.20.
4)Byung-Chul Han, “Das Schiff sind wir alle,” Frankfurter Allgemeine 2014.4.26(http://www.faz.net/aktuell/feuilleton/unglueck-vor-suedkorea-das-schiff-sind-wir-alle-12911567.html).
5) 진태원 「세월호라는 이름이 뜻하는 것: 폭력, 국가, 주체화」, 인문학협동조합 기획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 현실문화 2015, 145~46면, 강조는 원문.
6) 사회를 필요(need)에 의해 매개된 이해관계의 장으로 보고, 국가권력을 그에 외재하는 실체로 본 관점은 17~18세기 사회철학의 태동과 함께 일반화된 가설이다. 관련해서는 Jürgen Habermas, “The Classical Doctrine of Politics in Relation to Social Philosophy,” Theory and Practice, tr. John Viertel, Beacon Press 1974 참조.
7) 진태원은 앞의 인용문에 이어 대중이 이 참사를 통해 “가난한 우리를 위한 국가는 없”으며, “국가는 그들의 편”이라는 자각을 하게 되었다고 진단한다. 진태원, 앞의 글 147면.
8) 장경순 「삼풍백화점 붕괴 때와 너무나 달라진 여론사회」, 국민TV 2014.4.21(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4311).
9)Michel Foucault, The History of Sexuality vol.1, tr. Robert Hurley, Pantheon Books 1978, 145면. 한국어판으로는 미셸 푸코 『성의 역사』 1, 이규현 옮김, 나남출판 2010.
10) 김동춘 「국가 부재와 감정정치: 세월호 참사 이후의 한국사회」, 인문학협동조합 기획, 앞의 책 177~88면 참조.
11) 근대혁명의 핵심화두 중 하나는 새로운 주권주체로서의 ‘새로운 인간’의 창조였다. 20세기 혁명 패러다임에서의 ‘새로운 인간’ 창조와 관련해서는 Alain Badiou, The Century, tr. Alberto Toscano, Polity 2007의 1~3장 참조(한국어판 알랭 바디우 『세기』, 박정태 옮김, 이학사 2014). 더불어 혁명기 프랑스에서의 ‘새로운 인간’ 창조와 관련한 논쟁에 대해서는 Pierre Rosanvallon, “Revolutionary Democracy,” Democracy Past and Future, ed. Samuel Moyn, Columbia UP 2006, 96면 참조.
12)Pierre Rosanvallon, 같은 글 82면.
13)Jürgen Habermas, “Natural Law and Revolution,” 앞의 책 84면.
14) 천관율 「이제 국가 앞에 당당히 선 ‘일베의 청년들’」, 시사IN 제367호(2014.9.29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1341).
15) ‘드립’은 ‘애드리브’에서 파생된 용어로, 어떤 기획 없이 유머를 위해 무의미하게 사용되는 말을 가리키며, ‘어그로’는 온라인게임에서 유래한 말로, 타인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부정적 감정을 끌어들이는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성 발화라 할 수 있다. 자세한 것은 김학준 「인터넷 커뮤니티 ‘일베저장소’에서 나타나는 혐오와 열광의 감정동학」, 서울대 사회학과 석사논문 2014, 43~44면 참조.
16) 같은 글 44면.
17) 같은 글 42~43면.
18) 천관율, 앞의 글.
19) 김홍중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 39면. ‘귀여움’에 대한 자세한 분석으로는 같은 책 2장 참조.
20) 같은 책 41면.
21) 같은 책 52면.
22) 알랭 바디우 『윤리학』, 이종영 옮김, 동문선 2001, 54면.
23)Alain Badiou, The Meaning of Sarkozy, tr. David Fernbach, Verso 2008, 11면, 강조는 인용자.
24) 한편 바디우는 ‘진리’를 “앞으로 존재하게 될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정의한다. 『윤리학』 37면.
25)Slavoj Žižek, “Against Human Rights,” New Left Review 34, 2005, 117면.
26) 다니엘르 키츠 시트론 「정보시대의 인권」, 마사 누스바움 외 엮음, 김상현 옮김 『불편한 인터넷』, 에이콘출판 2012, 61면.
27) 김학준, 앞의 글 ii면.
28)Émile Benveniste, “Animal Communication and Human Language,” Problems in the General Linguistics, tr. Mary Elizabeth Meek, University of Miami Press 1971, 53면.
29) 장석준 「그리스 비극의 끝인가, 인류 비극의 시작인가」, 미디어스 2015.7.15(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9340).
30)Alain Badiou, The Meaning of Sarkozy, 11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