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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오쓰카 에이지·선정우 『오쓰카 에이지:순문학의 죽음·오타쿠·스토리텔링을 말하다』, 북바이북 2015

독자도 변하고 창작도 변하는 시대

 

 

김태권 金兌權

만화가 kimtaenim@gmail.com

 

 

170-촌평-김태권_fmt작가가 되고 싶어 한창 이 책 저 책 읽어치우던 시절, 롤랑 바르뜨(Roland Barthes)의 ‘작가의 죽음’이라는 말을 접하고 힘이 빠졌다. “이런 억울할 노릇이 있나. 힘들여 작가가 되자마자 죽는다니!” 물론 작가의 죽음이라는 말이, 전세계 작가가 한날한시에 픽 고꾸라져 죽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인간이란 동물이 이야기를 즐기는 이상 창작활동 자체가 사라질 일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하지만 우리 모두 느끼지 않는가? 작가도 작품도 순문학도 다시는 옛날처럼 대접받지 못할 것이다. 우리 시대는 거대한 변화의 시대다.

변화에 대한 책은 많지만 이 책 『오쓰카 에이지: 순문학의 죽음·오타쿠·스토리텔링을 말하다』만한 책은 흔치 않다. 흔히 하는 두가지 실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쪽 극단에는 변화를 마뜩잖아하는 이들이 있다. 대중의 취향에나 맞는다며 새로운 문화를 거부한다. 다른 쪽 극단에는 변화의 힘이 얼마나 거대한지 찬양만 늘어놓는 이들도 있다. 급변하는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변화해야 한다는, 변함없이 진부한 메시지를 변함없이 부담스러운 열정으로 전도한다. 변화를 무시하거나 변화의 힘에 겁을 먹거나, 양쪽 모두 건강해 보이지는 않는다.

이 책은 균형이 잘 잡혀 있다. 창작하는 사람도 변하고 창작물의 내용도 변하고 작품을 수용하는 사람도 변한다는 이 거대한 변화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동시에 변화의 와중에 보이는 걱정되는 지점을 예리하게 짚어낸다. 두 대담자의 내공 덕분이리라. 오오쯔까 에이지(大塚英志)는 ‘순문학의 죽음’을 주장해 화제의 중심에 선 일본의 평론가다. 스스로 만화 스토리 작가면서 남들한테 스토리 작법도 가르칠 정도로 그 분야에 달통하다. 선정우(宣政佑) 역시 대중문화와 현대사회에 대한 폭넓은 지식과 깊은 이해로 일본과 한국 두 나라에서 인정받는 평론가이니, 대중문화의 동향에 관해서라면 두 사람의 말은 믿을 수 있다(아니, 믿어야 한다).

이 책에서 다루는 문제에 나는 평소부터 관심이 많았다. 강연이나 기고에서 자주 고민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변화의 양상, 그 와중에 우려되는 점, 그 극복방법이라는 세가지 논점으로 이 책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지금 일어나는 거대한 변화의 양상. 개개인의 취향이 변한다는 점에 대담자는 주목한다. 세분화니 개인화니 파편화니 ‘게토’화니 여러 말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좋다 나쁘다는 어감을 주지 않는 적절한 말은 ‘잘게 나뉘다’가 아닐까.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다는 말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금언(金)이지만, 지금이 특히 심한 것 같다. 그러면서 동시에, 타인에 대한 호기심이 사라지고 있다. 공공의 영역에 대한 관심도, 현실세계에 대한 인식도 예전 같지 않다.

취향이 잘게 나뉘는 현상, 그리고 세상에 대한 무관심. 어느 쪽이 어느 쪽의 원인인지, 아니면 제3의 원인이 있는지 모르겠다. (나 홀로 생각이지만, ‘고전’이라 불리는 공통의 텍스트가 사라진 것과도 관계가 있지 않을까? 물론 이 역시 원인인지 결과인지 분명치 않지만 말이다.) 어찌 됐든 저 둘이 썩 어울리는 짝패라는 점은 확실하다.

이 변화에 대해 좋다 나쁘다 말하지 않는 점은 이 책의 미덕이다. 변화가 사실인 이상 착한 변화, 나쁜 변화 나누는 짓도 부질없고, 우리는 이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순문학의 죽음’이라는 개념도 이렇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오해하지 말자. 단지 진지한 문학서가 만화책보다 덜 팔린다며 나온 말이 아니다. 새로운 시대의 대중이 남의 사연에 호기심을 가지기보다 자기 취향에 더욱 몰두하는 상황에서 순문학이라는 장르가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오오쯔까는 회의적이다. 다만 이 문제에 대해 가치판단을 미룰 뿐이다. 작가가 자기 진심을 남에게 전달할 수 있고 문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던 (나 같은) 기존의 독자로서는 좋아 보이지 않는 세태겠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당연한 변화일 수도 있다. 현실세계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는 현상을 마냥 나쁘게만 말하는 것은, 판타지 장르가 이룩한 바를 얕잡아 보는 일이 될 터이기도 하다. 남의 일에 감 놔라 대추 놔라 하지 않는 것은 사회가 성숙한 증거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빈자리를 엉뚱한 세계관이 차지한다면 위험하다. 변화의 와중에 걱정되는 세태를 짚어내는 것, 이 책의 둘째 논점이다. 일본사회에서 오따꾸(御宅, 특정 분야에 깊이 몰두하는 사람)의 정치적 무관심을 파고든 것은 극우의 세계관이었다. 오오쯔까는 ‘피해자 서사’를 예로 든다. 일본은 역사의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이며 일본 시민은 일본에 와서 사는 외국 사람이 누리는 ‘특권’ 때문에 피해를 보고 있다는 것이 피해자 서사의 설정이다. 역사와 정치에 대해 의식이 눈곱만큼만 있더라도 앞뒤가 맞지 않는 점을 바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에서 현실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사라지기 때문에, 얼토당토않은 피해자 서사가 누리는 힘은 더욱 커질 따름이다. 만나는 사람도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처지가 다른 사람의 생각은 어떤지 역지사지해볼 기회도 없다. 타인의 고통 따위는 ‘아오안’이다(‘아웃 오브 안중’, 관심 밖이라는 뜻이다). 더 나아가 청년 대중이 느끼는 박탈감은 불붙은 등걸에 끼얹는 기름이나 마찬가지다. (대담 중에, 또 책 서문에서 선정우는 이 메커니즘이 요즘 한국사회에서도 핑핑 돌아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공감 가는 분석이다. 나는 그 대목을 읽는 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다면 이 우려되는 지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아쉽지만 정답은 없다. 하기야 억지 정답을 내놓았다면 오히려 책의 신뢰가 떨어졌으리라. 다만 책 곳곳에 실마리가 보인다. 내 나름대로 추려보았다. 첫째, ‘섣부른 프로파간다는 하지 마라’고 오오쯔까는 당부한다. 프로파간다는 작품의 질을 떨어뜨릴 뿐이다. 둘째, 그렇다고 현실에 대해 침묵하자는 것도 아니다. 오오쯔까는 자기 작품 안에 현실과 연결된 설정, 사회에서 터부로 삼는 설정을 교묘히 집어넣어두었다고 고백한다. 취향의 벽으로 잘게 나뉜 채 다른 세계에 관심을 잃은 수용자의 세계관에 파열을 줄 수 있도록 말이다.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이니, 이런 문제에 관심이 많은 독자님이라면 그의 창작론을 꼭 읽어보도록 하자.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을 다룬 챕터는 이와 쌍을 이루는 비평론이다(그야말로 창작과 비평이다). 두 대담자의 깊이있는 통찰이 돋보인다. 셋째, 창작의 모럴과 별도로 수용의 모럴을 언급한 점이 눈길을 끈다. 일본의 대중문화에 대해 ‘정부에서 프로파간다를 강제하지 않더라도 대중이 원한다면 프로파간다 작품이 나온다’는 분석은 어떤가. 한국의 대중문화는 이 문제로부터 자유로운가.

끝으로, ‘치유로서의 창작’에 관한 제언이다. 박탈감에 사로잡힌 채 자기만의 벽에 갇힌 사람들이 창작술을 익히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위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백색테러 대신 건강한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적어도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흥미로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예술과 사회의 관계나 예술의 기능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꼭 나오는, 오랜 전통을 가진 문제와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이 주제에 대해 나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썩 많지만, 지면이 모자라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