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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시평

 

불안은 무한 리필된다

 

 

김진경 金津經

시인,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jinkyungec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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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hRo

울리히 벡(Ulrich Beck)은 『위험사회』에서 먹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계급사회에서는 계급지위가 중요하지만, 먹는 문제가 기본적으로 해결된 위험사회에서는 위험지위가 중요해진다고 했다. 계급사회에서 사람을 움직이는 주된 동력은 계층상승 욕구에서 나오고, 위험사회에서 그 동력은 불안에서 나온다. 위험사회론은 서구 복지국가를 모델로 하고 있어서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우리 사회와 안 맞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크게는 한국사회도 1990년대를 경과하면서 계급사회에서 위험사회로 이행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계급사회에 전형적인 노동자·농민 투쟁이 퇴조하는 속에서 나타난 촛불집회는 그 징후였다. 촛불집회는 광우병 소라는 먹거리의 불안에 의해 촉발되었고 그 인적 구성이나 행동 양태도 이전의 집회와 달랐다.

교육문제의 패러다임 역시 90년대를 지나면서 달라졌다. 과열 입시경쟁 문제도 얼핏 보면 표면적 모습에서 달라진 게 없어 보이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문제의 본질이 달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1960~70년대에 학교에 다닌 우리 세대는 중학교 입학부터 치열한 입시경쟁에 시달렸다. 과열 입시경쟁으로 말하자면 지금보다 덜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것 때문에 정신과적 증상을 보이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우리 세대가 학교에 다니던 시기에는 학교교육에서의 성공이 계층상승의 유력한 수단으로 여겨졌고, 실제로 계층상승이 가능했다. 그렇기에 입시경쟁이 과열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계층상승의 욕구가 동인이 되는 입시경쟁은 희망이 있는 경쟁이기 때문에 과열되더라도 정신과적 문제를 발생시키는 경우가 드물다.

90년대에 들어오면서 우리 사회는 계급·계층이 고착화되기 시작했다. 계급·계층이 고착된다는 것은 학교교육이 더이상 계층상승의 수단이 되기 어려움을 뜻한다. 90년대말 서울대 사대 국어교육과 후배들에게 강연을 하러 갔다가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우리는 대학 다닐 때 서울사대 국어교육과를 ‘거지들 집합소’라고 불렀다. 가정형편상 등록금이 싼 국립사대에 들어와 과외 아르바이트로 등록금과 자신의 생활비를 해결하는 친구들이 대다수였고, 집에 생활비를 보내주거나 가족을 부양하는 친구들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그런데 90년대말 국어교육과에 다니는 후배들은 강남 같은 부유한 지역의 중산층 가정 출신이 압도적 비중을 차지했다. 현재의 사회·교육 시스템에서는 가정환경이 좋은 학생들이 학업성취도도 대체로 높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중산층 가정의 학생들이 이른바 스카이(SKY)대에서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학교교육이 더이상 계층상승의 수단일 수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면 이상하지 않은가? 학교교육이 더이상 계층상승의 수단일 수도 없고, 대학입학의 문도 훨씬 넓어졌는데 왜 과열 입시경쟁 문제는 더 심각해지고 있는가? 그것은 추락의 위험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계층적으로 추락하는 위험을 피하기 위한 경쟁은 로마시대 검투사들의 격투처럼, 희망이 있는 경쟁이 아니기 때문에 처절할 수밖에 없다.

계층상승이 동인이 되는 입시경쟁은 경쟁의 기준이 밖에 있기에 그 기준이 충족될 수도 있고, 따라서 끝도 있다. 반면에 추락의 위험을 회피하기 위한 경쟁은 경쟁의 기준이 내면에 자리잡은 불안에 있다. 불안은 강박적으로 ‘무한 리필’되기 때문에 해소될 수도 없고, 따라서 끝도 없다. 학교 일등으로 불안해서 전국 일등을 해야 하고, 스카이대에 들어간 것으로 불안해서 전과목 A+를 받아야 하고, 전과목 A+를 받아도 불안해서 특별한 스펙을 쌓아야 하고, 그래도 불안은 해소되지 않기 때문에 끊임없이 남보다 더 나은 것을 쌓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불안이 동인이 되는 입시경쟁은 그것 자체로 이미 정신과적이다. 고등학교 단계가 아니라도 대학 단계, 성인 단계에서 다 타버린 연탄재처럼 번 아웃(burn out)될 소지가 충분히 있고, 정신과 치료가 무슨 문화적 유행처럼 번질 소지도 충분히 있다. 그리고 이것은 주로 중산층 자녀의 문제이다.

하층의 경우는 여전히 혹시나 자녀가 학교교육에서의 성공을 통해 계층상승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다. 하지만 대부분 초등·중학교 단계에서 사회·교육 시스템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일찍 포기하는 경향이 늘고 있다. 하층과 중산층 사이 중간층의 경우는 계층상승에 대한 기대와 추락에 대한 불안을 동시에 가지고 자녀에게 기대를 걸지만 대부분 고등학교 단계에서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포기하는 경향이 늘고 있다. 중산층의 경우는 추락에 대한 불안감만이 있다. 학교교육을 통해 상층으로 진출하는 것이 불가능한데다 중산층이 급속히 해체되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계층적 추락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자녀뿐 아니라 온 가족이 입시경쟁에 올인(all in)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강남 같은 중산층 지역에서 정신과 병원이 성업하는 이유이다.

누군가 계층 추락의 위험을 피하기 위한 입시경쟁, 학력경쟁의 과열 문제를 완화할 교육정책이나 제도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것은 과도한 임금격차, 고용불안, 중산층 해체 같은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락의 위험을 피하기 위한 입시경쟁의 과열이 정신과적 문제로 이어지는 것을 완화할 교육정책이나 제도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우선 교육문제의 패러다임이 바뀌어 문제의 중심이 과열 학력경쟁에서 인성의 붕괴 문제로 이동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중·하층 자녀의 경우는 학력 이전에 자기정체성이 제대로 형성이 안되어 자기 삶에 아무 의욕 없이 교실에 앉아 있는 학생이 대다수가 되고 있다. 중산층 자녀의 경우는 입시경쟁이 인성붕괴로 심화되어 정신과 치료를 받거나 번 아웃되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다.

교육부는 매년 때가 되면 우리나라 학생들이 수학, 언어 능력 등의 국제 학력평가에서 1,2위를 했다고 자랑스럽게 발표한다. 하지만 OECD 등의 국제 학력평가에서 인성 부문이 학력에 포함되는 게 보편적 추세이고 인성 부문 학력평가에서 우리나라 학생들이 꼴찌에 가깝다는 사실은 숨기고 발표하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세계적 추세에 맞게 학력기준에 인성 부문을 중요하게 포함하고 그에 맞춰 교육과정과 학교교육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그러면 과열 입시경쟁이 인성의 붕괴 문제로 악화되어 학생들이 정신과 치료의 대상이 되는 것은 완화할 수 있을 것이고, 장기적으로 과열 입시경쟁의 완화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첫걸음은 아마도 고교 서열화 체계의 완화일 것이다. 다양한 상황에 있는 학생들이 만나 부딪치며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인성교육의 출발이 아닐까? 고교 서열화 체계는 그것 자체가 경쟁의 효율성을 위해 인성교육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