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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마거릿 애트우드 『시녀 이야기』, 황금가지 2017
디스토피아에서 유토피아를 그리워하기
박종주 朴鍾宙
성과재생산포럼 기획위원 lesbeauxxx@gmail.com
‘검은 시위’를 기억하시는지. 지난해 10월 폴란드 여성들은 정부의 낙태전면금지법 발의에 저항하며 재생산권(reproductive rights)의 종말을 애도하는 의미로 검은 옷을 입고 집회를 벌였다. 올해에는 미국 각지에서도 비슷한 시위들이 벌어졌다. 트럼프 집권 이후 보수화되어가는 여성정책에 항의하는 집회들이었다. 이들은 검은 옷 대신 붉은 옷을 입었다. 최근의 정국과 맞물리며 화제가 된 드라마 「시녀 이야기」에서 모티프를 따온 복장이었다.
이 드라마에는 원작이 있다. 1985년 출간된 이후 영화, 오페라, 만화 등으로 개작되며 널리 읽혀온 동명의 소설 『시녀 이야기』(The Handmaid’s Tale, 한국어판 김선형 옮김)다. 소설 속에는 대리모로 차출되어 오로지 출산을 위해 모든 것을 통제당하는 여성들이 등장한다. ‘시녀’라 불리는 이 여성들은 온몸을 가리는 붉은 옷을 입고 생활한다. 『시녀 이야기』는 이 여성들의 일상을 그린, 그러니까 여성이 출산도구로 전락한 사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이를테면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디스토피아란 유토피아—존재하지 않는 장소라는 뜻 그대로—의 거울상 같은 것이어서, 적어도 인간에게 지성이라는 것이 있는 한, 도래하지 않을 어떤 것이라고. 그렇다면 디스토피아 소설이란 가벼운 경고 같은 것이다.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할 때에야 현실이 될 어떤 지옥을 보여준다는 것에 무슨 큰 의미가 있으랴.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적어도 어떤 이야기들의 경우, 디스토피아를 그리는 것에는 다른 의미가 있다.
저자 마거릿 애트우드(Margaret Atwood)는 몇번인가 자신은 이 소설을 쓰면서 그 무엇도 만들어내지 않았다고, 소설 속의 모든 것은 언젠가 어디선가 일어났던 일들이라고 말했다. 근미래, 혹은 아예 동시대를 배경으로 허구의 디스토피아를 그리면서 실재했던 사건들만을 레퍼런스로 삼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아마도 현재를 허구화-역사화함으로써 현재를 해석할 하나의 참조점을 제공하는 일이지 않을까.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에야 날개를 편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미래는 물론 현재조차도 어떤 의미에서는 미지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은 사람들이 있다. 현재를 역사화함으로써 그것을 해석해낸다는 것, 그것은 미네르바의 올빼미를 한낮에 불러내는 한 방법일 수 있다. 『시녀 이야기』가 그런 책이라고 한다면, 이 책의 독자가 할 일은 소설 속 국가 길리어드의 역사를 평가함으로써 현재를 평가하는 것, 현재를 디스토피아로서 폭로함으로써 유토피아를 향해 돛을 올리는 것일 터이다.
이 작품은 디스토피아의 시민들이 갖는 혁명에의 열망, 도래할 새 미래에의 희망 같은 것들을 그린 소설은 아니다. 화자마저도 “이 이야기가 달라졌다면 얼마나 좋을까. 좀더 품위 있는 이야기였더라면 얼마나 좋을까”(457면) 하고 뇌까릴 만큼, 억압적인 체제 속에서 나름대로의 적응을 하고 사그라들지 않는 욕망을 좇는 한 개인의 술회일 뿐이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과거를, “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풍속과 관습을 자꾸만 그리워”(392면)할 뿐 이렇다 할 행동을 하지 못하는 비루하고 연약한 한 개인의 이야기일 뿐이다.
한 사람의 일상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지만, 이 소설의 큰 줄기는 간단하다. 한때 미국이라 불렸던 곳에 새로 들어선 길리어드 정부. ‘출산율 저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지상과제로 삼은 이 기독교 근본주의 정부는 모든 종류의 낙태(와 산전 검사)를 금지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젊은 여성을 ‘시녀’라는 이름의 대리모로 차출한다. 이곳에서 ‘시녀’들은 “다리 둘 달린 자궁에 불과하다. 성스러운 그릇이자 걸어다니는 성배다.”(236면)
흥미로운 일이다. 바다 건너 대륙에서 서른해 전에 쓰인 소설에서 대한민국의 오늘을 읽는다는 것은 말이다. 바로 지난겨울의 일이다. 정부는 ‘대한민국 출산지도’라는 이름으로 지역별 가임기 여성수를 공개했다. 그 몇달 전에는 낙태 시술 의사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정책안을 내기도 했다. 여성들은 금세 알 수 있었다. 그 정책들 속에서 자신은 한 사람의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자원일 뿐이라는 사실을, 개인성은 언제든 말살되고 그 기능, 그러니까 인구재생산이라는 난소와 자궁의 기능만이 남겨질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이다.
놀라운 일만은 아니었다. 산아제한을 위해 피임시술을 권장하고 숫제 낙태를 조장하기까지 했던 바로 앞 시대의 정책이 ‘저출산시대’에 맞추어 방향을 튼 것뿐이었으니까. 금세 알 수 있었던 것은 그래서다. 한동안 잠잠했지만, 언제나 그래왔으므로. 이 사회에서 여성은 내내 (‘질 좋은’) 인구유지를 위해 언제든 통제될 수 있는—때로는 출산을 금지당함으로써, 때로는 출산을 강요당함으로써—존재였던 것이다.
그래, 우리는 대한민국을 살아감으로써 길리어드를, 그러니까 하나의 디스토피아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흡연을 금지당하는 것, 성적지향을 이유로 사회에서 배제되는 것, 등록번호를 갖고서 국가에 의해 파악되는 것, 이런 것들은 길리어드인들의 삶이자 현대 한국인들의 삶이다. 출산이라는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언제든 ‘비국민’으로 전락하는 것, 그것이 두 국가 이등시민들의 공통적인 삶이다.
착각하지는 말자. 둘 중 어느 쪽도 모든 새로운 생명을 사랑하기에, 그 사랑이 과하기에 이렇게 된 것이 아니다. 한센인들이, 그리고 수많은 장애인들이 출산을 금지당했듯, 분명 환영받지 못하는 생명들이 있다. 길리어드에 ‘비아(非兒)’라 불리는 존재들이 있듯이 말이다. 누군가가 믿는 신의 사랑이건, 누군가가 믿는 권력의 사랑이건, 그 사랑은 공평하지 않다. 더 사랑받는 존재들, 혹은 사랑을 독차지하는 존재들—누군가의 디스토피아야말로 자신들의 유토피아인 그런 존재들이 있다. 2017년 대한민국에서 읽는 『시녀 이야기』는 이런 말들을 독자들에게 건넨다.
반군이나 레지스땅스의 모습을 자세히 비추는 대신 저자는 무력한 한 개인의 일기를 그리는 쪽을 택한다(길리어드는 긴 시간 유지되지 못하고 스스로 붕괴하고 만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이야기에서 하나의 투쟁을, 하나의 저항을 읽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기억이라는 행위에 있을 것이다. 화자는 한때 자유로웠던 시대를 결코 잊지 않으려는 듯 계속해서 회상한다. 화자가 기억하는 것은 그러나 아마도 있었던 그대로의 과거는 아니다. 미화된 과거, 그가 추억하는 것은 실은 경험해보지 못한 하나의 유토피아다. 아직 살아보지 못한 유토피아를, 그는 기억하고 추억한다.
기억하는 것, 조금 더 낭만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워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최초의 저항이자 모든 저항의 방향타일 것이다. 유토피아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현재에 만족하지 않는 일, 현재를 디스토피아로 그리는 일이다. 단순한 염세가 아니라면, 이것은 미네르바의 올빼미를 기다리지 않고서 그보다 앞서 삶을 바꾸는 일일 것이다. 모든 사건이 끝나기를 기다려 점잔 빼며 그것을 평가하는 이가 되는 대신, 만신창이가 되더라도 사건들의 한가운데에서 싸우는 일일 것이다.
『시녀 이야기』는 적어도 섹슈얼리티나 재생산을 키워드로 삼을 때의 이 세계를 디스토피아로 그리는 법을 알려준다. 이와 함께 이 소설은 자본, 기술, 군대, 종교 등이 만들어낼 수 있는 디스토피아를 그린다. 힘에 부친다면 그 모든 것을 한번에 다 생각해내지는 않아도 좋다. 다만 우선은, 함께 그리워해보자. 자궁 가진 이들이 단순한 그릇으로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출산하지 않는/못하는 이들이 비난받지 않는 세계를, 그래서 그들이 스스로를 부정하고 혐오하지 않아도 좋은 세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