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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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박구경 朴丘璟

1956년 경남 산청 출생. 1996년 『문예사조』로 등단. 시집 『진료소가 있는 풍경』 『기차가 들어왔으면 좋겠다』가 있음. bugssa@hanmail.net

 

 

 

사이

 

 

들판 이쪽저쪽으로 미루나무들이 드문드문 서 있다

잦은 기침으로 이파리 한두개를 떨며 겨우 서 있다

곧 거칠고

곧 쓸쓸한 저녁 해가 곰골 뒤로 스러지고 말 것이다

지난겨울

눈이 어깨에 쌓인 밤

눈썹에 쌓인 밤

떡국을 사러 나선 길에 치매를 마쳤다는 길갓집 소식을 듣고

전봇대처럼 박혀버린

들판 저쪽에서 새까만 철골 몇개가 바람소리를 치며 떨고 있다

철골 위에 눈썹이 앉아 있다

날개를 펴다 만 새 한마리가 앉아 있다

느닷없는 슬픔으로 오히려 내가 불쌍해지는 들판이다

 

 

 

고모 운운해본다

 

 

고모는 아버지의 여형제들이면서 각기 다른 집으로 시집을 간 사람들이지만

 

가끔은 남자들이 할 수 없는 기운과 면모도 있는 여장부이기도 해서

크고작은 집안일들을 이끌면서도 조신한

그 여성스러움은 궁궐 속 서슬인지 정묘하거나 곱고도 시퍼럴 정도였다

 

외가와는 또다른 어떤 것이 조금은 두려웠지만 그리 무섭지는 않았다

 

검지로 찍어주던 된장맛을 오래 지나도록 잊지 않게 하는 그 힘은 무엇이던가!

 

가끔 잔치나 제사 때 집으로 모여들기라도 하면

여승들의 행렬인 듯 내밀한 기운을 비쳤지만

 

먹어라! 하는 투박한 말로

쓰디쓴 탕약을 웃으며 넘기게 했던 기억도 있다

 

무릎 위에 나를 앉히고

촘촘한 바느질로 지어내던 반나절 끝의 색동적삼 같았던 눈빛 사십년

 

숲의 초록을 지우며 언뜻 연보(蓮步)처럼 움직이는 하나둘 또는 서넛의 그림자

 

그 잠깐 결 초록의 조용한 움직임에 합장하느니

멀리 매미소리가 모시적삼 안으로 숨은 고적한 절터를 고모 앞 지나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