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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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박상순 朴賞淳

1962년 서울 출생. 1991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으로 『6은 나무 7은 돌고래』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 『Love Adagio』 등이 있음.

 

 

 

왕십리 올뎃

 

 

왕십리는 왕십리.

하늘 아래 왕십리. 가을 왕십리.

부서지는 낙엽 언덕

내려올 때에도 왕십리는 왕십리.

가을, 왕십리의 왕십리. 둘도 없는 왕십리.

 

겨울, 왕십리는 보았음.

가을날의 그녀가 목도리를 두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음.

언덕 아래 누워 있던

목 없는 겨울 아줌마의 어떤, 누구라고 들었음.

그녀에게 들었음.

그해 겨울, 그래도 왕십리는 왕십리.

목 없는 사람들이 몰려와

눈보라 골짜기에

가을밤을 새하얗게 밀어넣을 때에도

왕십리는 왕십리. 가을 왕십리.

 

여름, 웨딩홀 앞에서도 왕십리.

목 없는 나무가 있고, 겨울이 있고

목 없는 사람이 있고, 누군가의 봄이 있고

그녀도 거기 있었음.

그래도 왕십리는 왕십리.

가을 왕십리.

왕십리를 걸었음.

지난봄, 지하철역 앞에서

그녀를 보았음. 봄날의 그녀는

왕십리를 초대했음. 결혼식에 초대했음.

 

미국사람도, 일본사람도 초대했음.

그러나 왕십리는 왕십리.

가을 잎 떨어지는 왕십리에 있었음.

그날은 슬금슬금, 가을비를 안고서

비 내리는 왕십리를 종일 걸었음.

 

삐딱하게 주차를 한, 타조알 같은

차에서 내리는 여자와 맞닥뜨렸음.

여자가 소리쳤음.

왕십리?

옆자리에 앉아 있던 달걀 같은 여자가 따라 내렸음.

왕십리?

두 여자는 그녀들끼리 마주 보고 소리쳤음.

왕십리?

 

그래도 왕십리는 왕십리. 뿌리치고 걸었음.

비 내리는 왕십리를 마냥 걸었음.

가을 왕십리.

봄이 와도 왕십리, 밤이 와도 왕십리.

낼모레도 왕십리.

가을 왕십리.

 

울긋불긋 단풍들 것 같지만 그건 아닌 왕십리.

그래서 쓸쓸할 것 같지만 그건 아닌 왕십리.

그래서 무너질 것 같지만 그건 아닌 왕십리.

물결치는 왕십리, 그래봤자 왕십리. 리얼 왕십리.

왕십리의 왕십리, 아직 왕십리.

 

타조알도 올뎃. 낼모레도 올뎃. 하늘만큼 올뎃.

가을 가득 올 댓.

둘도 없는 왕십리. 끝도 없는 왕십리.

가을날의 왕십리. 올뎃 왕십리.

 

 

 

시크 소티의 예언자

 

 

시크 소티.

붕어는 어젯밤 시크 소티의 주인이 되었다.

붕어는 내 친구

일본으로 유학을 갔었고, 프랑스에서도 살았다.

 

내가 아는 한 그는 수학실력이 뛰어났다는

기억뿐이지만

칼을 손에 넣게 되었다.

번쩍이는 칼.

 

나는 잠시 고민하는 척했지만

거절하지 않았다,

시크 소티. 나는 붕어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붕어는 입을 다물고 있지만

그가 쥔 칼은

말한다.

번쩍인다.

그러나 비밀이다.

 

이제 시청을 지나

다음 역으로 출발하는 지하철

 

옆자리에 앉은 노란 염색머리의

젊은 언니가 동남아시아의 어느 언어로

전화를 받는다.

가방을 든 사람, 가방을 멘 사람

불룩한 비닐봉지를 든 사람이

앞에 서 있다.

 

누군가의 손과 발과 머리가 잘려

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어떤 비밀의 도구가 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가방, 비닐봉지, 사람들.

침묵을 가득 채운 지하철이

다음 역으로 떠난다.

 

가방이 내린다. 비밀봉지가 내린다.

동남아시아의 어떤 언어가 기차에서 내린다.

누군가의 손과 발과 머리가 잘려

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비밀.

 

나도 다음 역에서

붕어와 함께

누군가의 손과 발과 머리를 잘라내는

비밀의 행동을 개시한다.

아니면, 그게 아니면

내 손가락, 붕어의 발가락이라도 잘라

불룩한 주머니, 또는 비닐봉지를 구해

그 안에 쑤셔넣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