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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박민규 朴玟奎
1968년 출생. 장편소설 『지구영웅전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핑퐁』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소설집 『카스테라』 『더블』 등이 있음. kazuyajun@hanmail.net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그날 아침엔 조깅을 했다.
신께서 내려오신 ‘그날’ 말이다. 여름휴가가 시작된 날이라 또렷이 기억한다. 마냥 늘어지게 늦잠을 잘 생각이었는데 웬걸, 평소보다 일찍 눈을 뜬 바람에 조깅을 나선 것이다. 보름 만의 조깅이었다. 연이은 출장에 심신이 녹았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기분도 좋고 머리도 맑았다. 늘 뛰던 코스를 나는 달렸고 우연히 마주친 1410호와 잠시 인사를 나누고는 2킬로를 더 달렸다. 그리고 벤치에서 휴식을 취했다. 평소에도 늘 반환점으로 여기던 벤치였다. 나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근처 어딘가에서 여름 냄새가 났는데 그런 건 하나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천변의 비릿한 풀냄새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내, 땀냄새였는지도 모른다. 살짝 입언저리가 가려웠던 건 헤르페스 때문인데 실은 몸이 피곤하다는 증거였다. 헤르페스는 좀처럼 낫지 않는다. 그만큼 삶도 피곤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멍하니 앉아 나는 달리는 노인들을 보았고 자전거를 타는 여자를 보았다. 그리고 또, 먼발치의 그물망 펜스 안에서 농구를 하는 십대들을 볼 수 있었다. 출근을 시작한 차들이 하나둘 도로를 지나고 있었고...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었다. 나는 하품을 했다. 두대의 푸드트럭이 주차된 후미진 곳에서 키 작은 아이들이 고양이를 죽이고 있었다.
깊이 생각한 건 아니지만
여전히 1410호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같은 오피스텔에 살고 몇년 전 잠깐 만남을 가졌던 여자다. 두어번 잠자리를 같이하고 나서였나? 아무튼 결혼할 남자가 생겼다며... 어디 외국으로 간다고 했다. 그래, 축하한다는 인사를 건넨 것도 같고 고맙다는 답을 들은 것도 같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입에 발린 말이라면 둘 다 일가견이 있었으니까.
언젠가부터 다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오며 가며 마주친 것인데 그사이 나는 그녀의 이름을 까먹은 것이다. 묻지도 않았는데 이혼을 했고, 혼자 돌아왔으며, 다시 1410호에 사는데, 오피스텔을 처분하지 않고 세를 놓고 가길 잘했으며, 아이는 없고, 다시 보니 반갑다는 말을 그때그때 늘어놓았다. 그래그래 들어주기는 했다. 말을 하니까, 그래서 1410이란 호수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날 아침
그녀는 짧은 레깅스에 윈드점퍼 차림으로 개를 산책시키고 있었다. 무슨무슨 말끝에 언제 식사나 같이하자고 했다. 그러자고, 역시나 일가견이 있는 그녀가 답했다. 결국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래, 중요한 얘기는 아닐 것이다. 어쨌거나 하품을 몇번 하고 나자 비로소 휴가,라는 사실이 실감났다. 폰을 열어 나는 페낭을 기점으로 꼭 가야 할 곳과 이동경로 등을 차근차근 점검하기 시작했다. 바로 다음날 항공기 예약이 되어 있었다. 말레이시아 페낭. 5박 6일의 일정. 자유여행. 와아, 소릴 지르며 아이들이 어디론가 뛰어갔다. 푸드트럭을 둘러친 천막에는 커다란 와플 사진이 붙어 있었고 나는 곧, 배가 고파졌다.
와플이 먹고 싶었다.
그리고 더
자고 싶었다.
빨리 내일이 오고
말레이시아로 가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걸어서 돌아왔다.
So much Fake News is being reported.
돌아오는 길엔 트윗을 받았는데
미국 대통령이 보낸 것이었다.
They don’t even try to get it right, or correct it when they are wrong.
연이어 트윗이 왔다.
그와 나는 트친이다.
와플, 같은 걸 사기 위해 곧바로 오피스텔 근처의 베이커리를 들렀는데 창가에 앉아 있는 1410호를 볼 수 있었다. 또 보네? 하는 식으로 그녀가 손을 살짝 들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토스트를 주문했고 몇 테이블 떨어진 자리에서 혼자 아침을 먹고 일어섰다. 본격적으로 무더위가 시작된 날이었다. 이른 아침인데도 햇살의 농도가 달라 보였다. 태양을 관장하는 누군가가, 고가의 에스프레소 머신이라도 구입해 시험 삼아 햇살의 원두를 갈고 있는 느낌이었다. 걷는 것만으로도
나는 나른함을 느꼈고
방으로 올라와 곧장 잠에 들었다.
긴 잠은 아니지만
휴가를 얻은 회사원만이 들 수 있는
깊은 잠이었다.
신은 그사이에 내려오셨다.
잠에서 깨고, 샤워를 하고 나와서도 나는 그 사실을 몰랐다. 부재중 전화가 여러통, 또 갖가지... 폭주한 메시지의 숫자를 보고서도 별다른 확인을 하지 않았다. 머리를 말리고 속옷을 꺼내 입다가... 아예 가져갈 옷가지를 챙겨 캐리어를 꾸리기도 했다. 그러고도 좀 시간을 보냈는데 결국 상황을 접하게 된 것이다. ‘어떤’ 일이 났다는 걸 처음으로 알려준 건 여행사의 전화였다. ‘아시겠지만’으로 시작된 얘기의 결론은 모든 항공기의 이륙이 금지되었고... 때문에 환불 의사가 있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왜요? 내가 묻자
왜라뇨? 그가 답했다.
통화가 끝나고 바로 사태를 파악했다. 너무 많은 메시지를 한번에 접했으므로 누구를 통해 아는 게 아닌, 그냥 알게 된 느낌이었다(물론 그 속에는 미대통령의 트윗도 있었다). 혼란 그 자체였다. 그리고 나는... 한동안 기억이 불분명한데... 정신을 차려보니 모니터를 켜고 방송에 의지하고 있었다. 뭐가 뭔지 그래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 순간 내가 T자형 끈팬티 차림에 양말만 신은 몰골이었다는 사실이다. 발목을 살짝 덮는
빨간 양말이었다. 무슨 일인지 모를 ‘어떤’ 일의 윤곽은 NASA의 공식 발표가 진행되면서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ISS(국제우주정거장)와 여러 인공위성들의 자료를 토대로 한 구체적인 성명이었다. 곧바로 이어진 브리핑에서 백악관 부대변인이 ‘신의 강림’이란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비로소 갈피를 못 잡던 뉴스들의 헤드라인이 결정되었다. 그렇다. 말 그대로 그날, 신께서, 이 땅에, 내려오신 것이었다. 어떤 징후도 없이 그분은 내려오셨고, 어떤 의상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셨다. 한쪽 무릎을 세워 굽힌 자세로... 그래서 끈팬티의 압박을 느끼며 나는 ISS와 위성들이 촬영한 사진과 영상... 또 이를 시뮬레이션한 영상들의 반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여전히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지만 다만 확실한 것은 신이 남자라는 사실이었다. 우주 공간엔 ‘나뭇잎’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CNN의 앵커는 위트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날의 혼란을 일일이 열거할 순 없지만,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주에서 촬영된 영상을 보지 않고선 도무지 상황 자체를 파악하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형상 그대로 신은 지구 위에 우뚝 서 계셨다. 그러나 우러러볼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과학자들이 추정한 신의 키는 대략 560만 피트(1700킬로미터)였고... 신체의 대부분은 대기권 밖의 우주 공간에 위치해 있었다. 다시 말해 지상에서는 뭐가 뭔지 파악조차 불가능했던 것이다. 인간적으로
그는 너무 거대했다.
출몰과정도 미스터리였다. 정말이지 암흑의 저 공간 어딘가에 기계장치가 있어 드르르르 신을 내려보낸 느낌이었다. 어떤 징후도 없이 어둠 속에서 나타난 한 남자가 도르래로 내려지듯 지구에 착지, 지금 우리를 내려보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한동안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고 그 상태로 불안과 공포... 급조된 세계적 협력과 대책 마련의 시간이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그가 내려선 곳은 남태평양 바다 한가운데였다.
통합 채널이 빠르게 구축되면서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강대국들이 공동대응하기로 약속했고 각국의 이해관계나 갈등, 지역 분쟁들이 일시에 종료되었다. 한나절 만에 거의 모든 국가가 임시 세계단일정부의 산하에 소속되었고 마지막으로 북한이 가입하면서 결국 인류는 하나가 되었다. 그러니까 이틀 정도였을 것이다. 태고의 석상처럼 미동도 없이 신께서 서 계셨던 시간 말이다. 그사이 벌어진 일들을 또 일일이 열거할 순 없겠지만... 나처럼 방송에 의지한 인간들이 누렸던 혜택은 보다 가까이에서, 또 자세히 신의 모습을 관찰한 영상을 라이브로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의외로 신은
아랫배가 나온 퉁퉁한 체형이었고
어깨가 꾸부정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친근감을 주기도 했지만
왠지 더 무섭게 느껴진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어딘가 모르게
느끼한 얼굴이었다.
김경식. 경식이 아저씨에 대해 말해보자. 처음 신의 얼굴을 보았을 때 나는 절로 경식이 아저씨를 떠올렸다. 그만큼 닮았다...가 아니라 그냥 똑같았기 때문이다. 런닝을 걸치고 안 걸치고의 차이가 있을 뿐 체형까지도 비슷했다. 경식이 아저씨는 내가 어렸을 때 살던 동네의 유일한 독신남이었다. 특별한 문제가 있지 않고선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정을 꾸리고 살던 때였다. 물론 그에겐 특별한 문제가 있었다. 어린 내 눈에도 그러했다. 그는 직업이 없었고 아무 집에나 들어가 음식을 훔쳐 먹는 어른이었다. 여름에 특히 존재감이 더했다. 냄새 때문이었다. 때 묻은 런닝 차림으로 그가 나타나면 우리는 돌을 던지고 도망쳤다. 그는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웃었다. 느끼하게. 느끼한 얼굴로 같이 고고 탑블레이드 팽이를 돌리며 놀기도 했다. 그는 아무 데서나 오줌을 누었고 누가 일을 시키면 예예, 굽신거리며 하는 어른이었다. 힘이 장사였다. 나는 늘어진 런닝 사이로 드러난 그의 젖꼭지... 주변의 굵은 털 세가닥이 너무 웃겼고... 또 때로는 그 소유주가 불쌍했다. 실은 돌봐주는 누나가 있다는 얘기도 돌았는데 자세한 건 알 수 없다. 그는 꽃을 좋아했다. 꽃밭에서 사진 찍는 걸 좋아했고 꽃밭에 들어가 똥 누는 걸 좋아했다. 마흔이 다 된 어른인데 툭하면 코를 후볐다. 한여름에 그는 종종 고무줄로 머릴 묶고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야말로 ‘여름의 사나이’였다. 그리고 어느날, 그는 이사온 지 얼마 안 된 신혼부부의 집에 들어가 새댁을 강간하고 목 졸라 살해했다(커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한낮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그후로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었다. 신을 보면서
그래서 마음이 복잡했다. 아닌 게 아니라 친근한 외모 때문에 세계 각국에서 만들어진 그의 별명이 SNS를 도배하기도 했다. 저건 우리 형이다, 우리 아저씨랑 너무 닮았다, 여기 돌아가신 내 아버지의 사진을 공개하니 누구든 확인해보라, 3년 전 죽은 내 동생이 돌아왔다 — 인증샷도 홍수를 이루기 시작했다. 언론도 여기 동조해 결국 신에게는 ‘엉클’(Uncle)이란 애칭이 붙기도 했다. 엉클은 곱슬머리였다. 경식이 아저씨도 그랬다. 젖꼭지 주변은 차마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종교계야말로 격랑에 휩싸였다. 이틀 동안 일어난 기존 종교계의 논쟁은 차치하고라도... 구원과 희망... 심판과 정화... 의존과 인도... 절망과 체념... 인류가 키워온 여러 감정의 도화선에 불이 붙은 형국이었다. 인터넷을 통해 놀랍도록 빠르게 신흥 종교가 난립했고, 마치 새로운 선악 구도가 형성되듯 두개의 세력으로 나뉘어 성장했다. 입장의 차이는 분명했다. 그리고 단순했다. 엉클을 신으로 보느냐, 아니면 악마로 보느냐 그 차이였다. 군의 저지선을 뚫고 직접 신을 만나겠다며 남태평양의 경계해역에 들어간 단체가 해상에서 체포되고... 또 곳곳에서 종말이 왔다는 예언과 함께 자살자들이 속출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류... 정부의 통제를 따르고 방송에 의지하는 나 같은 인간들에겐 ‘개인적 용무’를 해결하기에도 급급한 시간이었다. 이를테면 전화 통화, 현금 인출, 식량 확보, 기타 등등... 솔직히 뭘 하면서 그 이틀을 보냈는지 설명할 자신이 없다. 대부분의 시간을 방송만 지켜보았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 전화 통화... 또 최이은 이사(직장상사)와의 장시간 통화(압권은 차라리 출근을 하는 게 좋지 않냐는 어드바이스였다)... 그리고 또... 여행사로부터 환불을 받았다. 말레이시아, 페낭, 5박 6일의 일정, 자유여행이 취소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틀 내내 그 끈팬티를 입고 있었다. 에어컨에도 이상이 없고 이따금 거리를 내려다봐도 별다른 변화가 느껴지지 않았다. 늘 차들로 북적이던 교차로에 여전히 차들이 늘어서 있고... 다만 인도가 눈에 띄게 한산했으나 어쩌면 그것은 찌는 듯한 더위 때문이라 여기기에 충분했다. 끼니마다 나가서 밥을 사먹었고 틈틈이 속보를 확인하고 그리고 또... 임시 세계단일정부의 수장이 된 트친의 연설을 경청할 수 있었다. 인류는 오랜 길을 걸어왔고... 지금 우리는 모든 경우의 수에 대비한... 늘 그랬듯 그는 라이브에 강한 사람이었다. 거침없이 즉석에서 기자들의 질문도 받았다.
우리가 체감할 수 있는 대비책이 있습니까?
놀라지 마십시오. 우리는 현재 엉클과 대화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의미있는 성과가 나왔나요?
아직까진 없습니다. 그러나 큰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어쩌면 조만간 대기권 밖에서 정상회담이 이뤄질지도 모르겠군요.
많은 이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걸 묻겠습니다. 엉클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조사 중입니다. 신은 늘 우리에게 인내심을 요구하셨지요.
그가 신이 아니라 침략자라면 대응책이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는 절대적으로 거대하지만 국가는 아닙니다. 게다가 맨손입니다. 이런 가정을 해봅시다. 현재 지구에는 엉클과 비슷한 면적을 가진 나라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중 한 나라가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면 그 결과가 어떨까요? 아마 누구라도 쉽게 짐작이 가실 겁니다.
엉클의 출현이 지구 환경에 미칠 변화에 대해선 대응책이 있습니까?
조사 중에 있습니다. 45억년 지구 역사에서 우리는 지금 전혀 뜻밖의 순간을 맞이했고 오늘이 그 이틀째란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현재까지 어떤 움직임도 없다고 들었습니다. 엉클은 살아 있습니까?
그건 아마도 신께서 답하실 문제겠군요.
Well he is pretty!
그날 밤 트친은 간만에 트윗을 날렸다.
엉클의 사진을 곁들인
짧은 한줄이었다.
충격파가 한번 훑고 지나가자 차츰 그날 밤엔 낙관론자들의 성찰이 공감을 얻기 시작했다. ‘샤이마’라는 필명을 쓰는 아랍계 여성의 시가 인터넷을 통해 확산되었고, 이는 곧 통합 채널을 통해 전 세계에 낭독되었다. 십대 소녀로 알려진 샤이마가 팔레스타인 출신이란 사실이 공개되고,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소프라노 아나트 드레이거가 나서서 노래를 곁들이자 그 감동은 배가 되었다.
보라, 하루 사이에 무엇이 달라졌는지
올리브나무가 서 있듯 단지 그가 서 있을 뿐인데
보라, 무엇이 달라졌는지
하루 사이에 우리가 어떤 세계를 만들었는지
더는 누구도 총구를 겨누지 않고
어떤 아이도 죽은 부모의 품에서 피를 흘리지 않네.
그가 저 자리에 서 있기 전에는
왜 이런 세상을 만들지 못했던가.
단지 하루면 만들 수 있는 세상인데
올리브나무 같은 한 남자가
서 있기만 하면 오는 세상이었는데
어제의 우리는 누구였으며
오늘의 우리는 또 누구인 걸까.
저 나무가 영영 서 있기를 나는 바라네.
오늘의 우리가 어제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도
하루 사이의 일일 것이니
올리브나무여 영원히 서 있으라.
우리가 이대로 스스로를 뉘우치도록
누구도 죽이지 않고
카인과 아벨이 하나 되도록.
십대 때 나는 말도 안 되는 게임을 한 적이 있다. 수학여행을 가서였나? 아무튼 즉석에서 벌칙을 정하고, 그걸 해내지 못하면 벌금을 내야 하는 룰이었다. 내가 걸린 벌칙은 마요네즈 원샷하기였다. 나는 자존심이 셌고 벌금을 내기 싫었다. 앉은자리에서 쭉쭉 마요네즈를 원샷하자 박수가 터져나왔다. 때문에 벌금은 면했지만 수학여행 내내 미식거림과 설사에 시달렸다. 집에 와서도 한동안 마요네즈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그후로 감동적인 시나 노래를 들으면 속이 미식거리는 인간이 되었다. 누구나 느끼는 감동과 아름다움이 도대체 마요네즈와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오랜 시간 겪어온 나만의 핸디캡이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날은 괜찮겠지, 했는데 예외 없이 속이 미식거렸다. 시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누구의 잘못도 아닐 것이다. 낭독 도중에 눈물이 돌기도 했는데... 그래서 더 격하게
I’ll be friends with him.
트윗이 또 도착했다.
나는 뛰어가 곧바로 구토를 했고... 약간의 설사를 했다. ‘룰’에 대해 한번도 의문을 품지 않고 살아왔는데... 이번엔 꼭 병원에 가봐야지, 역한 마요네즈 냄새를 느끼며 나는 물을 내렸다. 돌이켜보면 그 이틀을 방에서 죽치고 보낸 게 후회되지만... 달리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신을 관찰하는 그 ‘앵글’에는 묘한 중독성이 있었다. 공포가 곧 기대로 바뀌고... 대부분의 인류가 통제를 따른 이유도 어쩌면 우리의 시야가 신보다 높은 곳에서, 그를 굽어살필 수 있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ISS가 실시간으로 전송하는 신의 모습은 — 비율은 좀 차이가 나지만 — 소혹성 위에 서 있는 어린 왕자 같기도 했고, 현실이라기보다는 게임 속의 풍경... 내지는 캐릭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발 빠르게 ‘엉클’이란 게임이 어플로 나왔고, 중계 영상의 느낌 그대로 진행되는 게임에서 사람들은 신에게 옷을 입히고... 또 갈아입히고... 쿵쾅쿵쾅 지구를 뛰어다니는 일에 열을 올렸다. 어플을 받아 나도 몇번 그 게임을 했다. 내 계정의 신은
옷을 입을 수 없었다. 복장 구매에 현혹되어
돈을 결제할 타입의 유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팬티를 갈아입었다.
그리고 다음날
신께서 거동을 시작하셨다.
그는
입에 발린 대화 같은 건
하지도 않았다.
숨죽이고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갑자기 끙, 숨을 내쉬었고... 기지개를 켜듯 팔을 젓고 나더니 두리번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환호성을 지르는 인파도 있었고 — 방송에 잡히지 않았지만 — 비명을 지른 인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런 건 하나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 순간, 세계의 주인공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눈을 뜨고 신은 비로소 이 땅을 굽어, 살피기 시작했다. 그가 발길을 옮기자 한걸음에 군의 경계선이 와해되었다. 둘레둘레 신은 뭔가를 찾는 눈치였고 이윽고 성큼성큼 뉴질랜드를 향해 걸어갔다. 전 세계가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잠깐이었다. 토끼라도 쓰다듬듯 몸을 굽힌 그가 억센 두 손으로 뉴질랜드를 움켜쥐더니... 뜯어먹기 시작했다. 지구에서 뉴질랜드를 뜯어내어... 우적우적 먹고 있었다. 그리고... 다 먹었다... 길게... 트림까지 했다. 차라리 그 광경을 보지 못했다면 알 수 없는 자연재해라 우기거나 여겼겠으나... 가장 큰 비극은 전 인류가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그 광경을 그만, 보고야 말았다는 사실이다. 창밖에서 사이렌이 울리고 쏟아지는 긴급재난문자로 폰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추모의 시간도 기회도 없이 내 트친은 지구 방위, 즉 전쟁을 선포했다. He will be met fire & fury, like the world has never seen! 말을 마치고서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그는 주먹을 움켜쥐며 never! ever! seen!을 한번 더 강조했다. 트친이라서 거드는 게 아니라 전적으로 옳은 말이었다.
이후 우리가 본 것은
결코, 절대로, 본 적이 없는
공격이었다. 임시 세계단일정부의 지휘 아래 1차 대규모 타격이 이뤄졌는데 바로 핵무기에 의한 공격이었다. 상대가 상대인 만큼 경고사격처럼 입에 발린 총질은 있지도 않았다. 미국과 러시아, 중국과 인도에서 발사된 미사일들이 예정된 시간에 정확히 신의 정강이를 타격했다. 배가 너무 고팠는데 이제 좀 살 것 같다는 표정으로 신은 그때까지 뉴질랜드 해역 근처에 퍼질러 앉아 있었다. 무시무시한 섬광과 함께 구름이 피어올랐고... 잠시 EMP 충격으로 영상이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놀랍게도 신은 아무렇지 않았고... 별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머리를 북북 긁으며 그는 또 트림을 했고 대기권 밖에 위치한 그의 얼굴은 아예 폭발이니 뭐니 감지도 못한 눈치였다. 트친은 즉시 이번 공격은 우리가 보유한 전력의 수백분의 일에 불과하다며! 성명을 발표했지만 이미 상당수의 인류는 감을 잡은 상태였다. 샤이마의 시처럼
단 하루 사이에, 세상은 전혀 다른 곳으로 변해버렸다. 소화가 좀 되었는지 주섬주섬 일어서더니 그는 북북 자신의 사타구니를 긁기 시작했다. 악의는 없어 보였다. 그저 나른하고 따분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성기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CNN 앵커의 말처럼 우주엔 나뭇잎이 없었고... 신은 누구보다 건강한 남자였다. 오, 신이시여! 인류의 공격과는 무관하게... 그는 ‘다른 의미로’ 잔뜩 성을 내기 시작했다. 둘레둘레 그가 또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꼿꼿해진 그의 페니스에 일단 다섯기의 인공위성이 아작이 났다. 그가 한동안 동북아 쪽을 응시하자 일본인들이 맨 먼저 트윗으로 유언을 쓰기 시작했다. 나도 잠시 유언을 고민했는데... 신의 시선은 그새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식사는 이미 하셨고
이제 그분이 원하는 것은
크고 탐스럽고
풍만한 엉덩이임을.
발기한 페니스를 한 손으로 움켜쥔 채
그는 미국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상황이 급했는지 — 어떤 발표도 없이 — 트친은 달려오는 적을 향해 미사일을 발사했다. 태평양을 증발시킬 듯 엄청난 위력이었지만... 무의미한 저항이었다. 그랬다. 그는 인간이 파악해온 물리체계의 범주를 완전히 벗어난 존재였고... 그러면서도 너무... 인간적이었다. 이를 불평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초월... 절대자... 어쩌면 인류가 생각해온 신의 모습에 부합하는 존재였고... 또 어쩌면 여태 인류가 애써 행해온 일들을 몸소 대행하는 존재였으니... 말이다. 그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 그는 그 흔한 ‘입 발린 소리’는 하지도 않으셨다. 그저 묵묵히 태평양을 건너왔고 몸소 미국에 이르러 차분히 무릎을 꿇으시더니 억센 손으로 캘리포니아를 움켜쥐시고는... 푹... 풍만하면서도 나약한 그녀를 취하기 시작하셨다.
네버
에버
본 적 없는 풍경에 모두가 말을 잃었다. 오디오가 없는 위성 영상인데도 불구하고 쌘안드레아스 단층의 비명 소리가 들리는 기분이었다. 고개를 뒤로 젖히며 신은 우오오오 소리라도 지르는 표정이었고 또 갑자기 찰싹찰싹... 오리건과 캘리포니아 두 볼기짝을 번갈아 후려치기 시작했다. 국제적으로... 찰진 소리가 났다. 통합 채널은 즉시 영상을 중지했지만, 인터넷엔 발에 채일 정도로 많은 독립 스트리밍 채널들이 있어 누구라도 이를 목격할 수 있었다. 샤이마는 또 한편의 시를 썼다.
오, 아메리카여.
그대 가련한 여인이여.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있다네.
나는 더이상 할 말이 없네.
뚱뚱한 남자를 조심하라고 핫산 아저씨는 말씀하셨지.
고개를 넘어간 당나귀는 돌아올 줄 모르고
아무도 그런 여자를 본 적 없다 말하네.
알라께서 모두에게 경고하나니
씨는 뿌린 대로 거두고
여인의 눈물은 달면 삼켜지나니.
무슨 소린지 알 수 없어 속이 미식거리진 않았다. 하지만 졸음이 밀려들었다. 더는 보기가 힘들었고... 게다가 신은 지독한 지루였다. 아무리 그래도 가만히 있자니 뭣해서 Can I help you? 나는 처음으로 트친에게 트윗을 날려보았다. 물론 답은 오지 않았다. 그리고 기억이 끊어졌다. 어두운 밤이었다. 나는
꿈을 꾸었다.
어린 시절 살던 동네가 나왔고
아무리 걸어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헤매다 쪼그리고 앉은 한 남자를 보았다.
경식이 아저씨였다.
아저씨 뭐 해? 내가 묻자
느끼하게 웃으며 발사기를 흔들었다.
고, 고, 탑블레이드~
팽이가 돌고 있었다.
긴 잠이었다. 의식이 돌아올 무렵 나는 어느 쪽이 꿈인지 잠시 이성적인 판단을 해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잠을 자야만 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라면... 아마도 대부분의 인류가 나와 같은 과정을 밟으며 현실의 문을 지나야 했을 것이다. 이미 그사이 미국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여러 복잡한 과정이 있었으나 아무튼, 미국을 구하려는 시도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러시아의 한 과학자가 신을 ‘다만 사이즈가 큰’ 인간으로 규정할 때 어쩌면 지금이 최상의 공격 기회라는 발표를 했고... 그러니까 물리적 충격을 감안해 가장 치명적인 급소를 노렸던 것이었다. 미국 위에 엎드려 있는 신을 향해... 정확히는 신의 고환을 향해... 그래서 러시아와 중국의 핵미사일이 발사되었다. 러시아가 자랑하던 ‘차르봄바’가 신의 고환에서 폭발하는 장면은 과연 압권이었다. 그렇게 연속으로... 보는 내가 움찔, 치가 떨릴 정도의 장엄한 폭발이었다. 이번엔 효과가 있는 듯했다.
신은 움찔했고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방향과 궤도가 아주 제대로였다고! 저건 그냥 가는 거라고... 또 중국이 오른쪽, 러시아가 왼쪽 고환을 담당, 집중 타격한 전략이 유효했다는 평이 나왔으나... 아니었다, 어떤 타격 때문에 몸을 떤 것이 아니라... 신은 그 순간 사정을 한 것이었다. 신은 12시간 26분 동안 피스톤 운동을 했고, 그렇게 부르르... 몸을 떤 후에야 미국을 놓아주었다. 역류한 대량의 정액이 해양을 오염시켰고... 의식을 잃은 듯 트친은 더이상 트윗을 올리지 않았다.
절로. 이제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라도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순서만 다를 뿐 차례차례 뜯어먹히고... 또 범해지는 것 말고는 다른 미래가 없어 보였다. 여기까지라고 나는 생각했다. 아니야이건아니야정말아니야 맨발로 울며 뛰쳐나가 새로운 삶을 시작할 다른 별도 존재하지 않았다.
무더웠다.
끈팬티 차림에 올리브그린 양말을 신고
나는 우두커니
전신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았다.
차라리 이대로 뛰쳐나가
미친놈이 되는 게 최후의 이익이 아닌가
생각도 들었다.
복도에서 울려퍼지는 비명소리를
그때 처음으로 들었다.
창밖을 살피자 시내 곳곳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이미 뛰쳐나가 발 빠르게 이익을 챙기는 인간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니거나... 충돌하고 있었다. 여태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냉장고에 남은 계란이 몇개며... 따위를 파악하다 나는 그냥 침대에 드러누웠다. 언젠가 전기가 끊어지고 단수가 되고... 아니면 건물이 무너지고... 공중으로 붕 치솟아 신의 입속으로 꿀꺽 넘어가거나... 결국 마찬가지란 생각이 들었다. 사이렌 소리가 또 들렸고 언젠가 사이렌도 울리지 않는 시간이 닥치겠지... 대비 훈련이라도 하듯 스르르 눈이 감겼다.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깼다.
1410호였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무서워 죽겠다는 말을 했다.
혹시 괜찮으면 1410호로 와줄 수 있냐고도 했다.
정확히는 와줄래? 였다.
싫다고 했다.
잠시 잠을 깰 때마다 화장실, 뉴스 확인, 다시 침대를 반복했다. 그사이 신은 또 여러 나라와 섬들을 뜯어먹었고... 캐나다를 가로질러 유럽을 범하고 있었다. 역류되어 해수로 유입된 대량의 정액... 신의 정자에 부딪혀 죽은 고래들의 시체 사진이 떠올라 나는 피식, 이불 속에서 웃고 말았다. 어디선가 마요네즈 냄새가 났는데 이런 건 하나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교체하지 못한 에어컨의 필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이불에 밴, 내 살냄새인지도 모른다. 입언저리가 몹시 가려웠지만, 나는 다시 잠을 청했다. 그러나 다시 눈을 떴을 땐... 다시는 잠들 수 없을 만큼 입이 가려웠다. 아무리 찾아도 연고가 보이지 않았다. 초조한 마음에 창밖을 내려다봤지만 영업을 하는 약국 따위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리고... 인도에 쓰러져 있는 두구의 시체를 보았다. 17층에서 보는 건데도 핏자국이 선명했다. 결국 헤르페스가 문제였나... 격한 우울이 밀려들었다. 뉴질랜드가 통째로 사라졌을 때도 이렇게 우울하지 않았다. 인류란 건 결국, 오랜 교차 감염의 결과물이란 생각도 들었다.
혹시 연고 있어?
1410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있다고 했다.
올 때 진짜 조심하라는 말도 했다.
입에 발린 말은 아니었다.
스테인리스제 식칼을 들고, 끈팬티 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나는 복도로 나섰다. 잠시 고민도 했는데 이편이 더 안전할 것 같아서였다. 효과가 있었다. 복도 끝 로비에서 누군가가 서성였는데 나를 보더니 부리나케 도망을 쳤다.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나는 비상계단을 이용해 14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문을 두드렸다.
연고를 바르자 금세 우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빵 먹을래? 그녀가 묻길래 고마워,라고 나는 답했다. 그녀의 개가 보이지 않았다. 개에 대해, 나는 묻지도 않았다. 이토록 허기진 채 시간을 보낸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나는 배가 고팠다. 1410호가 우유와 빵을 꺼내주었다. 호밀을 빚어 불규칙하게 부풀린... 뉴질랜드처럼 생긴 빵이었다. 가련한 뉴질랜드... 그녀는 눈 주위가 부풀어 있었고... 살이 보일 정도로 한움큼 머리칼이 뽑혀 있었다. 목에도 군데군데 긁힌 상처가 보였지만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부모님과 여동생이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그녀가 말했다. 어디 사는데? 묻자 밴쿠버에 사는 여동생 집에 가셨는데 아무도 연락이 안 된다고 재차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술은 왜 그래? 그녀가 물었다. 헤르페스야, 내가 답하자 나도 헤르페스 있는데... 그녀가 말했다. 고마워, 그만 갈게. 내가 말하자 그녀는 가라고도 가지 말라고도 하지 않았다. 건물 내부 어딘가에서 또다시 끔찍한 비명이 들려왔다.
아무 일 없었다면
여름휴가가 끝났을 시점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무 일 없었던 사람처럼
1410호에서 며칠을 더 묵었다. 가구를 옮겨 방문을 가로막고 창과 비슷한 최소한의 무기를 나름대로 제작했다. 그리고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우리는 먹고, 마시며 쥐 죽은 듯 숨어 있었다. 전기와 물이 여전히 공급된다는 게 놀랍고... 또 다행이었지만 이것이 마지막 평화임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딱히 대화를 나누는 것도 아니었다. 연고 덕분에 못 견디게 가렵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헤르페스는 좀처럼 낫지 않았다. 유일한 낙이 있다면 예능이라도 시청하듯 나란히 앉아, 또 하루 신의 활약상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존재였다. 아무런 악의 없이 그저 먹고, 씨를 뿌리고, 자는 게 전부인 인간을 미워한다는 것은 갓난아기를 미워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는 이제 아프리카를 열심히 범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깔깔깔. 까진 부분만 100킬로미터래.
1410호가 폭소를 터트렸다.
채팅창에선 상황을 즐기기로 한 인간들이 또 별의별 농담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예컨대 신의 페니스 사이즈라든지, 체위별 하이라이트라든지... 신의 먹방 베스트 10 같은 걸 끊임없이 만들었다. 아시아는 좋겠군요. 좋기는요, 이미 씻고 대기 타고 있습니다. 허무한 농담과 덕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아직 신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나라들은 내전과 학살, 약탈과 폭동으로 미쳐가고 있었다.
쎄븐업 마시고 싶다.
내 어깨에 기대어 1410호가 중얼거렸다. 그녀가 잠든 사이에 어느 정도 신의 떡방 먹방도 지루해진 커뮤니티에 다시 흥분이 몰아닥쳤다. 역시나 느닷없이, 한분의 신이 추가로 더 내려오신 것이었다. 이번엔 여자였다. 보다 육중한 체구였지만 우주 공간에 사과나무나 유혹하는 뱀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한눈에 여자임을 알 수 있었다. 인도양 북부... 아시아였다. 여신께서는 뭐, 바로 활동을 시작하셨다. 인도의 일부를 뚝 떼어 잡수시고는 잠시 휴식, 또 사타구니를 주물주물 하시며 주변을 살피더니 쿵 쿵 덥썩, 이거 참 쓸만하다는 얼굴로 에베레스트를 쓰다듬으셨다. 그리고
나도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땐 더이상 전파도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세상이 되어 있었다. 식량은 충분히 남아 있었으나 그보다 삶이... 더는 남지 않았다는 걸 나는 직감했다. 이상하게 이곳을 나가고 싶었다. 1410호의 생각도 같았으나 입구도 주차장도 이미 미친것들이 진을 쳤을 거란 얘길 했다. 그럼 옥상은 어떨까? 내가 말했다. 거긴 모르겠다고 말했지만 1410호의 얼굴엔 두려움이 가득했다. 우리는 처음으로 서로를 꼭 껴안았다. 1410호는 울었고 나는 울지도 않았다.
커플룩으로 할까? 그녀에게도 끈팬티가 있었다. 팬티만 입은 채로 우리는 서로의 얼굴과 몸에 내키는 대로 그림을 그렸다. 염색약이며 루주며 그녀의 화장품들이 좋은 도구가 되어주었다. 누가 봐도 건드리고 싶지 않은 미친 연놈이 되어 우리는 거울을 보며 낄낄거렸다. 그리고 한자루씩 창을 들었다. 그녀의 옷장 스테인리스 봉에 식칼을 꽂아 만든 무기였다. 마지막이란 기분으로 만찬을 들고 우리는 결국 문을 나섰다. 이상하리만치 복도는 조용했다. 비상계단을 오르다 쪼그린 채 흐느끼는 남자를 본 게 전부였고 한번 폭풍이 쓸고 지나간 듯 옥상을 향한 철문은 자물쇠가 부서져 있었다. 너무 쉽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하얀 콘크리트의 평원이
초원처럼 느껴지는 평원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크게 심호흡을 하며 우리는 공기를, 또 바람을 원 없이 들이켰다. 아아아아아악~ 쥐어짜듯 고성을 지르며 그녀가 달리기 시작했고 나도 그녀를 따라 옥상을 뛰고 또 뛰었다. 헉헉, 숨이 차도록 옥상을 돌고 난 후 그녀는 창을 높이 치켜들며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한여름인데도
또 정오인데도 마치 늦가을이나 된 듯 풀이 죽은 햇살이었다. 하늘도 어둑했다. 에베레스트를 따먹은 신께서 아마도 가까이 오셨다는 증거일 것이다. 세발치쯤 떨어진 거리에서 그녀를 마주 본 채 나는 불현듯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녀는 또 깔깔대더니 자신도 일가견이 있다는 듯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마주 선 채 우리는 계속 춤을 추었다. 웃음이 터져나왔다. 도중에 그녀가 팬티를 벗어 던지길래 나도 팬티를 벗어 던졌다. 끈팬티를 벗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계속 춤을 추었다. 갑자기 1410호의 이름이 궁금했지만... 이제 와 묻는 것도 미안한 일이고 해서 나는 춤에만 집중했다. 지축을 흔드는 이 울림. 신께서 오고 계셨다.
그러고 보면 모든 게
해결되었다는 기분도 들었다.
마요네즈 원샷도 없을 것이고
마요네즈 잼잼
마요네즈 잼잼
지겨운 게임도 이젠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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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혹 누군가를 위한 선물로 단편을 쓰곤 한다. 이 글은 좋아하는 영국의 아티스트 데이비드 번(David Byrne)을 위한 선물로 쓴 것이다. 화병으로 일찍 죽을 줄 알았던 그가... 오래 살아줘서 고맙다. 하여간에 나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