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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려령 金呂玲
1971년 서울 출생. 소설집 『샹들리에』, 장편소설 『완득이』 『우아한 거짓말』 『가시고백』 『너를 봤어』 『트렁크』 등이 있음.
장편연재 1
일주일
1
“맛있네요. 고맙습니다.”
도연이 이 고장 특산차를 마시며 답례 인사를 했다. 탕약처럼 여기저기 몸에 좋다는 설명이 붙은 맑고 구수한 뽕잎차였다. 차를 내준 직원과 김해공항으로 마중 나온 지식정보과 윤계장이 만족하며 환하게 웃었다. 윤계장은 이날 도연의 의전을 맡았다. 그는 공항에서 만난 순간부터 이날 행사의 취지와 의미를 거푸 설명했다. 행사로 들뜬 긴장감이 역력했다. ○○시 올해의 책 선포식. 벌써 3회째 맞는 행사였다. 1부 선포식과 2부 북콘서트로 구성된 행사는 두어시간가량 소요될 예정이었다. 윤계장이 앞서 선정된 두 작가를 소개하고, 그들 덕에 올해 도서 선정 과정에서도 주민들의 호응이 매우 좋았다고 자찬했다. 더불어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도연의 책은 지역 도서관 곳곳에 우선 천부 배포될 예정이며, 차후 반응에 따라 더 구입할 수 있다고도 했다. 그의 말에 도연과 동행한 편집자 시정이 가만히 고개를 끄떡였다.
“우리 시장님이 이 행사는 특히 애정으로 챙기시는데요, 독서문화가 없는 도시는 잔바람에도 휘날린다 안 합니까. 오늘 많이 기대하고 계십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예에.”
흠…… 도연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앞의 두 작가는 도연도 익히 아는 선배와 후배였다. 선배는 다방면에서 다식한 것으로 유명했다. 심지어 아는 만큼 말도 잘했다. 후배는 잠언 같은 자신만의 어록을 남기며 차분차분 말하는 사람이었다. 왜 하필 저 두 사람이었을까. 입으로 말하는 기술과 글로 말하는 기술이 일치하지 않는 도연이었다. 말을 오래 하면 쉽게 지치는지라 체력적으로도 힘들었다. 도연에게 행사나 강연은 고역이었다. 도연이 워낙 이런 행사를 기피하니 한 선배가 혹시 너희 집에도 금괴 200톤이 있는 거 아니냐고까지 했었다. 도연이 못해서 못하는 겁니다, 했다가 굶어 죽는 법도 가지가지다,라는 핀잔만 들었다. 도연은 굶어 죽는 것도 싫고 이런 행사로 피가 마르는 것도 싫었다. 이미 글로 다 말했는데 입으로 또 무슨 말을 하나. 게다가 무대에만 오르면 쉬운 단어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행사의 질의에 대해 나중에 서면보고하면 안 될까. 도연은 현실성 없는 기대를 하며 가만히 차를 마셨다. 여하튼, 도연과 시정이 윤계장과 담소를 나누고 있을 때, 시립도서관장이 접견실을 찾았다. 오십대 후반 여성으로 화사한 꽃분홍색 정장 차림이었다. 이날 행사의 총 진행을 시립도서관 측에서 맡았다. 관장이 도연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이계숙. 도연이 명함을 한번 보고 지갑에 챙겨 넣었다.
“작가님 스케줄이 안 될까봐 걱정했습니다.”
“배려해주신 덕에 조정이 잘됐습니다. 고맙습니다.”
“시장님께서 행사 전에 잠깐 뵈었으면 하세요. 괜찮을까요?”
“네.”
도연과 시정이 도서관장을 따라 접견실을 나갔다. 시장실은 접견실과 같은 3층이었다. 도연이 도서관장의 안내를 받으며 자치행정과 사무실로 들어섰다. 시장은 기존 시장실 대신 행정과 사무실 안쪽 빈 공간에 새 방을 마련했다. 직원과 격 없이 친구처럼 일하는 시장. 권위를 내려놓고 직원들과 지근거리에서 바지런히 일하는 모습은 좋지만 행정과 직원들은 무슨 죄인가. 시장이 들락날락할 때마다 스트레스가 쌓일 것이었다. 도연은 자신이 시장과 격 없는 사이라면 그런 충고를 해주고 싶었다. 하늘 아래 친구 같은 상사는 없습니다. 기존 시장실이 사치스럽다면 칸막이로 공간을 줄이고 당장 돌아가십시오. 친구도 상사가 되면 피곤한 법일진대 상사가 친구인 양 자리하고 있으면 오죽하겠습니까. 선한 마음은 알겠으나 깊은 처사는 아닌 것 같습니다. 도연이 사무실을 둘러보니 다닥다닥 붙은 직원들 책상마다 너나 할 것 없이 서류가 쌓였다. 시장만 기존 시장실로 올라가면 지금의 공간을 터서 좀더 여유로운 작업 환경을 마련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과연 직원들 중 누가 그런 의견을 낼 수 있을까. 함부로 총대 멨다가 역으로 총질당할까 두려울 것이었다. 도연과 시정이 도서관장을 따라 벽과 책상들 사이로 난 좁은 길을 걸었다. 도연이 지나가는 동안 직원들이 잠시 일을 멈추고 인사를 했다. 눈이 마주치면 웃기도 하고, 스마트폰으로 도연의 사진을 찍기도 했다. 도서관장이 시장 사무실 문에 노크하고 바로 문을 열었다.
“작가님 오셨습니다!”
시장의 방은 듣던 대로 권위적이지 않고 아담했다. 시장은 명패가 놓인 책상이 아닌 중앙 원탁에서 다른 세 사람과 함께 있었다. 도연이 방에 들어서자 원탁에 앉았던 시장과 그 일행이 서둘러 일어났다. 시장은 원체 유명한 사람이어서 도연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한 남자. 당신이 왜…… 도연은 얼마나 놀랐는지 다리에 힘이 풀려 스륵 주저앉을 뻔했다. 심지어 그는 양복 깃에 국회의원 배지까지 달고 있었다. 도연이 잠시 주춤한 사이 시장이 다가와 시정에게 손을 내밀었다.
“작가님, 책 잘 읽었습니다!”
“작가님은 이분이십니다.”
시장도 당황하고 시정도 당황해 악수하는 손이 민망했다.
시장이 허허 웃고 다시 도연에게도 악수를 청했다.
“작가처럼 안 생기셔서 실례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알아보지 못한 것이 실례일까, 작가처럼 생기지 않았다고 한 것이 실례일까. 어떻게 생겨야 작가처럼 생긴 것일까. 중성적인 이름으로 남자로 착각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으나 작가처럼 생기지 않았다는 말은 처음이었다. 도연이 워낙 외부 행사를 하지 않아 실물이 잘 알려지지 않았고, 신문기사에 실린 사진과 실제 모습은 느낌이 조금 달랐다. 시장이 같이 서 있는 나머지 일행을 소개했다. 한 사람은 구청장, 제복을 입은 남자는 경찰서장, 그리고 그는 이 도시 지역구 국회의원이었다. 도연이 시장의 소개에 따라 차례차례 악수를 했다. 마지막으로 그와도 손을 잡았다.
“진유철입니다.”
“하도연입니다.”
도연과 시정이 시장 일행과 함께 원탁에 앉았다. 행사까지 시간이 빠듯한데 도연 앞에 다시 뽕잎차가 놓였다. 찻잔 옆으로 도연의 책 네권도 놓였다. 도서관장이 그 와중에 네 사람을 위해 사인을 부탁했다. 도연은 최대한 태연하게 시장의 것과 다른 두 사람의 책에 먼저 사인했다. 그리고 유철의 책에도 사인했다. 반갑습니다. 진유철 의원님께. 하도연 드림. 도연이 사인한 책을 유철에게 내밀었다.
“제가 오늘 행사에 참석하길 잘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유철의 인사에 도연은 마땅히 응대할 말이 없어 그저 살짝 웃었다. 사인을 마치자 시청 직원이 들어와 기념촬영을 했다. 시장과 도연이 가운데 섰다. 시장 옆으로는 경찰서장과 구청장이, 도연 옆으로는 유철과 도서관장이 섰다. 시청 직원이 촬영을 마치자 이번에는 유철을 보좌하는 김보좌관이 자신의 스마트폰을 들이밀었다. 그러더니 도연에게 유철과 한장만 더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네, 하고 도연이 유철과 나란히 섰다.
“의원님하고 작가님하고 잘 어울리십니다. 허허허.”
사진은 유철의 페이스북에 곧장 올려졌다. 이제 행사를 위해 모두 강당으로 내려가야 했다.
1층 강당으로 가는 동안 시장과 도연이 가벼운 대화를 나눴다. 시민들이 직접 투표로 선정했더니 반응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네. 우리 시에는 따로 오신 적이 있으십니까? 처음입니다. 이제 자주 오십시오. 예. 그러나 도연은 뒤에서 걷고 있는 유철이 신경 쓰여 대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 남자가 국회의원이었다니. 안 그래도 심란한 행사에서 유철의 등장은 혼란 그 자체였다. 지금 이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오랜만입니다, 유철씨. 반면 유철은 도연의 말을 가만히 들으며 뒤따르고 있었다. 유철은 도연이 나타난 것에도 놀랐지만, 시정이 작가님은 이분이세요, 하고 그녀를 가리킬 때는 더욱 놀랐다. 흠. 당신 작가였군요. 어쨌거나 잘 오셨습니다. 유철은 이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서 급히 비행기로 날아왔다. 마침 이날 옆도시에서 경전철사업 간담회 일정이 잡혀 있었다. 조금 서두르면 두곳 모두 참석할 수 있었다. 오는 비행기에서 김보좌관에게 선포식에 관한 간단한 브리핑을 받았다. 이번이 3회째로 선정 작가를 초대해 북콘서트를 한다, 유철은 사전 소개 시에 간단한 인사말만 하면 된다, 정도였다. 오늘 주요 일정은 간담회였으므로 그뒤에는 간담회 자료를 살폈다. 시장실에서도 서로 안부를 묻고 사담을 나누느라 정작 도연의 책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새가 없었다. 전국에 이와 비슷비슷한 행사가 많아 의례적인 참석 인사만 하면 되는 거였다. 기실 목적은 지역구 주민들에게 저도 왔습니다, 얼굴 내미는 것이었다. 그렇게 참석한 행사의 주인공이 도연이었다. 도연이 사인해준 책을 받으면서도 실감 나지 않았다. 도연을 어떻게 대해야 하나. 심장은 왜 그렇게 뛰는지, 말하면 속마음을 들킬까봐 최대한 말을 아꼈다. 그저 과거에 그러했던 것처럼 이날도 도연 옆에 가만히 서 있거나 뒤에서 천천히 걸었다. 400여석쯤 되는 시청 강당에는 빈자리가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많은 사람이 와 있었다. 도연의 북콘서트만 있었다면 태반 비었을 테지만, 올해의 책 선포식을 겸하다보니 관계자가 많이 참석했다. 자리는 앞줄 지정석만 비어 있었다. 시장이 먼저 강당에 들어서자 박수가 쏟아졌다. 시장이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다. 함께 입장한 일행도 등받이에 붙은 자신의 이름을 확인하며 의자에 앉았다. 누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시장실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던 순으로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 바람에 도연과 유철이 또 나란히 앉게 되었다. 유철이 앉으면서 도연을 보고 살짝 웃었다. 도연도 희미하게 웃었다. 도연과 유철 바로 뒷줄에는 중학생들이 죽 앉아 있었다. 이 친구들이 자꾸 도연 얘기를 하는 바람에 결국 도연이 풋 웃어버렸다. 작가님이다. 누구는 작가님, 하고 작게 부르기도 했다. 도연이 아예 고개를 푹 숙이고 웃어버렸는데, 학생들은 또 그걸 가지고 떠들었다. 니 때메 작가님 웃잖아. 작가님 얘 때메 웃는 거 맞지요? 못살겠네, 하하하. 결국 도연이 웃음을 터뜨리며 돌아보았다.
“왜요? 왜 자꾸 불러요?”
“사인 좀 해주세요!”
“이따가 해줄게요. 행사 마치고. 괜찮죠?”
“사진은 찍어도 되지예?”
“예에. 하하하.”
소란한 장내를 행사 진행을 맡은 아나운서가 정리했다. 그는 정식 행사 전에 참석한 내빈들부터 차례로 소개했다. 아나운서의 호명에 따라 내빈들의 축하인사가 이어졌고, 결국 유철의 순서까지 왔다.
“다음 소개해드릴 분은 오늘 선포식을 위해 열일 제치고 오신 진유철 의원님입니다.”
아나운서의 소개와 동시에 객석에서 환호가 터졌다. 도연이 어지간한 국회의원들은 각종 매체로 접했지만 그중 유철은 없었다. 전국구 스타 의원이 아니면 대개 몰랐으니 어쩌면 당연했다. 그러니까 유철이 그 정도 급의 의원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역에서 그의 인기는 상당했다. 유철이 인사하고 마이크를 잡았다.
“반갑습니다. 진유철입니다. 우리 시는 대체로 지역문화 발전에 공을 많이 들이는 도시입니다. 지난번 강변음악제도 그렇고요, 오늘 북콘서트도 그렇습니다. 앞으로도 시민 여러분과 문화예술인이 직접 만나는 자리를 꾸준히 만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목소리, 이 억양, 무척 오랜만이었다. 경남 사람이 쓰는 서울말. 유철의 말투가 꼭 그랬다. 혹시 한국분이신가요? 이 한 문장만으로 단박에 도연을 사로잡은 유철이었다.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가 사투리 운율과 잘 어울렸고, 그럼에도 표준어를 사용했기에 도연이 알아듣기에도 좋았다. 서울 출생으로 서울에서만 자란 도연은 사투리 쓰는 사람에게 유독 호감을 가졌다. 옆 동네 처녀 총각으로 만나 결혼한 부모님 탓에 도연의 친가 외가가 모두 서울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도연은 사투리를 쓰는 사람을 만나면 독특한 어감에 무작정 끌렸다. 그런데 한국도 아닌 이스탄불에서 그런 남자가 다가왔다. 처음부터 좋았고 같이 있어보니 더 좋았다. 헤어질 때에도 나쁘지 않았다. 먼저 가서 미안해요. 네. 도연은 유철을 그렇게 배웅했다. 배웅했으므로 끝난 남자라고 생각했다. 이런 장소에서 이런 모습으로 만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인사말을 마친 유철이 위로 올라간 접이식 의자를 내리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왜 이렇게 다시 만났나. 도연은 낯선 도시에서 유철이 자신 옆에 있어 좋았고, 또 그렇게 있어서 씁쓸했다. 아나운서가 내빈 소개를 마치고 정식 식순을 이어갔다. 식순에 따른 국기에 대한 경례와 시장의 모두연설이 이어졌다. 그런 중에도 김보좌관은 강당 출입문 앞에서 연신 사진을 찍었다. 유철을 찍는 것일 테지만 도연도 함께 찍힐 거였다. 도연은 김보좌관의 카메라가 내내 신경 쓰였다. 이스탄불에서도 사진 한장 남기지 않았는데, 고국에서 만난 지 고작 몇분 동안 엄청난 사진들을 남겨버렸다.
“전업주부예요.”
“대학에서 시간강의 하고 있습니다.”
그때, 도연과 유철은 그렇게 자신들을 소개했었다. 서로 의심 없이 받아들였는데 소개한 모습이 마침 어울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재 유철은 비례대표를 거쳐 지역구에서 당선된 재선의원이고, 도연은 꼬박 십년간 글을 쓴 작가였다. 그러니까 처음 만난 그때도 유철은 국회의원이었고, 도연은 작가였다. 도연과 유철은 상대의 거짓말에 대한 황당함과 어쨌든 서로 몰라봤다는 민망함에 적이 당혹스러웠다. 비례의원으로 의정활동을 시작한 유철은 올해 마흔셋, 스물일곱에 등단한 도연은 이제 서른일곱이었다. 지금보다 조금 젊었을 이년 전에 만났고, 서로 처음부터 호감을 가졌었다. 그러나 귀국할 때에는 연락처 하나 묻지 않고 깔끔하게 헤어졌다. 두 사람 다 쉬러 왔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유철은 사람이 너무 없는 것도 싫었고 너무 많은 것도 싫었다. 적당한 인파 속에서 무명의 행인이 되어 쉴 수 있는 곳. 유철은 그곳을 이스탄불로 정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도연을 만났다. 도연은 유철보다 이주일 먼저 와 있었다. 쉬러 왔어요. 둘 다 상대가 무엇으로부터 쉬려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무엇에든 지쳤을 테고 그것을 피해 같은 곳으로 왔다는 것이 중요했다. 두 사람은 같이한 일주일에 충분히 만족했다. 사정상 일정이 급한 유철이 먼저 귀국했다. 도연은 일주일을 더 머물며 꼬박 한달을 채우고 귀국했다. 누가 먼저 왔든 돌아와서는 각자의 일에 충실했다. 귀국과 동시에 두 사람 다 정신없는 일정을 소화해야 했기에 그곳에서의 일주일은 가슴에만 간직했다. 유철은 지난해 총선에서 경남 ○○시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출마해 오로지 선거에만 집중했다. 도연은 한 계간지에 장편소설을 연재하며 꼬박 일년을 매달렸다. 그 와중에 도무지 거절할 수 없는 몇개의 단편까지 소화했다. 결과는 모두 좋았다. 유철은 재선에 성공했고 도연은 일년간의 연재를 무사히 마쳤다. 도연의 원고는 책으로도 출간돼 이번에 ○○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이 다시 만났다. 반갑습니다. 네. 도연이 한국에서 유철이 알게 되면 어쩌나, 전혀 염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일부를 대중에게 드러낼 수밖에 없는 직업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더라도 유철이라면 그랬구나, 하고 가만히 웃어줄 것 같았다. 이스탄불에서의 그라면 분명 그럴 거라고 기대했다. 조근조근 부드러웠다.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말하는 남자였고 으음, 예에, 하며 가만히 듣는 남자였다. 크게 웃기도 했지만 대개는 환한 미소를 지어서 가만히 따뜻했다. 그런 남자였기에 혹여 자신을 알아본다 해도 꼭 그런 미소를 지을 것만 같았다. 언젠가 우연히 스치면 나도 그렇게 웃어줘야지. 다시 스친 찰나마저 좋은 추억이 될 사이이길 바랐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유철을 보자마자 얼마나 놀랐는지 웃음이 쑥 들어가버렸다. 당신이 왜 여기에 있어요? 유철은 그때와 비슷한 미소를 지어줬지만 도연은 도무지 웃어지지가 않았다. 세상에 정치인이라니. 도연이 정치인을 딱히 저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때의 유철에게서는 정치인이 읽히지 않은 탓이었다. 그런 새로움이 나쁘지는 않았다. 괜찮았다. 그것은 이스탄불에서와는 또다른 매력이었다.
선포식을 마치고 곧 북콘서트가 이어졌다. 도연이 무대에 마련된 테이블 앞에 앉아 아나운서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 모습을 유철이 무대 아래 객석에서 지켜보았다. 도연이 윗니를 드러내며 킥킥 웃을 때는 이스탄불의 그녀가 분명했지만, 전체적으로는 그때의 모습이 아니었다. 아닙니다. 네. 똑똑 떨어지는 말투가 낯설었다. 도대체 당신 정체가 뭡니까. 혹시 내 생각 했습니까? 나는 그랬습니다. 그러나 유철 역시 도연이 이런 모습으로 나타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유철이 생각하는 작가는 대쪽 같은 강단이 먼저였다. 다른 작가들에게서 조도 낮은 조명이 떠오른다면, 도연은 필라멘트 빛나는 유리전구를 떠오르게 했다. 빛나면서도 어쩐지 깨질 것 같은 아슬아슬함이 있었다. 함께 있는 동안만이라도 지켜줘야지, 하고 유철은 도연 곁에 있었다. 헤어지고도 잊지 않았다. 문득 간절하게 보고 싶기도 했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을 알기에 더욱 그러했다. 아니요, 지름길은 없습니다. 미련해 보여도 많이 읽고 많이 쓰는 수밖에 없습니다. 서두르면 놓치는 게 있기 마련이고, 조급하면 건너뛰게 마련입니다. 그런 도연이 홀연 나타나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청중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저는 아이 둘 키우는 엄마입니다. 이런 자리에는 처음 와보는데요, 와보니까 시장님도 계시고 의원님도 계시네요. 작가님은 아실지 모르겠지만, 여기는 애들 급식 때문에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뽑아놓은 사람이 중단한다니까 그냥 믿고 따라야 하는지, 아니면 그건 아니라고 지적해야 하는지, 정치인과 시민 간의 거리를 어느 선까지 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작가님 생각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경남 급식 문제는 저도 들었습니다. 돈 있는 집 애들은 돈 내고 먹어라, 이건데요. 학교는 교우의 장소입니다. 친구를 부자와 가난으로 나눌 수 있습니까? 아무리 가난해도 집에 온 부잣집 친구한테 밥값 받는 부모는 없습니다. 학교가 부모의 눈으로 아이들을 봐야지 행정의 눈으로 보면 되겠습니까? 이 문제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정치인과 시민은 견제의 대상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견제를 위한 견제는 안 되겠지요. 그 견제의 거리를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람 간 애정의 거리를 백으로 놓고 본다면, 정치인과 시민 간 애정의 거리는 육십, 견제의 거리는 사십, 이렇게 백을 채우면 애정을 바탕으로 한 건강한 견제가 가능하지 않을까요? 사랑하지만 그건 아니잖아, 하려면 저 비율 정도의 거리가 좋을 것 같습니다. 이것이 제 생각입니다. 하하하.”
유철은 도연의 말을 가만히 듣다가 그녀가 웃으면 저도 따라 웃으면서 그때를 그리워했다. 그러나 도연은 유철이 너무 뚫어지게 보고 있으니 자꾸 말이 꼬였다. 도중에 질문을 잊기도 했다. 죄송한데, 아까 질문이 뭐였죠? 도무지 집중이 안 됐다. 겨우 한시간을 버텼다. 북콘서트를 마치고 곧 사인회가 이어졌다. 시장이 도연에게 다가와 다음 일정으로 먼저 자리를 뜨는 것에 양해를 구했다. 괜찮습니다. 유철도 도연에게 손을 내밀었다. 도연이 유철의 손을 잡고 악수했다.
“작가님, 또 뵙겠습니다.”
“예, 의원님.”
*
이스탄불에서 유철의 숙소는 블루모스크 뒤편에 있었다. 인천공항에서 이미 탑승한 비행기가 영문 모를 사정으로 네시간이나 연착됐었다. 관제탑의 승인을 기다리는 중이라는 기장의 안내방송이 있었지만, 승인이 나지 않는 이유까지는 알 수 없었다.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공항 도착시간도 그만큼 밀렸다. 일정대로라면 오후 다섯시쯤 숙소에 도착해야 했다. 유철은 이스탄불이 처음이었다. 그 때문에 첫날은 숙소 근처에서 이른 저녁을 먹으며 낯선 풍경을 한가로이 만끽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출발이 뒤틀려 아타튀르크 공항에서 호텔 픽업 기사를 만났을 때는 이미 아홉시를 넘겼다. 공항에서 호텔까지 또 사십여분이 소요됐다. 공항에서 출발한 호텔 밴이 이스탄불 시내의 큰길과 인가의 좁은 골목길을 넘나들며 쉼 없이 달렸다. 거리는 매우 어두웠고 인적도 드물었다. 한국의 네온사인 화려한 밤과는 대조적이었다. 이 시간의 이스탄불은 이미 한밤이었다. 블루모스크 뒷길에는 관광호텔들이 촘촘히 늘어서 있었다. 그중 하나가 유철의 숙소였다. 이유야 어쨌든 예정보다 늦은 도착이 마음에 걸려 유철은 기사에게 팁을 조금 더 얹어주었다. 그가 유철의 트렁크를 들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들겠습니다.”
유철이 프런트에서 입실 수속을 마치고 방으로 올라왔다. 트렁크를 구석에 밀어놓고 일단 침대에 누웠다. 어쨌든 숙소에 도착한 것에 안도했다. 피로가 몰렸다. 낯선 곳에서 어두운 첫 밤을 거닐 용기도 나지 않았다. 유철은 그 밤의 외출을 포기하고 뜨거운 물로 샤워했다. 그동안 하루에도 몇개씩 되는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겨우 그것에서 벗어났는데 자신이 정한 일정에 스스로 압박받고 싶지 않았다. 느긋한 저녁. 이토록 홀가분한데 관성처럼 일정만 떠올리면 몸이 달았다. 겨우 일주일이었다. 일주일이 지나면 다시 빡빡한 일정 속으로 돌아가야 했다. 귀국과 동시에 국정감사 체제로 돌입해야 했다. 임기 내 마지막 국정감사였다. 일정 따위는 없다. 유철은 여행 중 하고자 했던 일을 모두 지워버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것이 유철이 새로 정한 일정이었다. 샤워를 마친 유철이 호텔에 비치된 캔맥주를 들고 소파에 앉았다. 탁자에 둔 스마트폰이 눈에 들어왔지만 집어 들지는 않았다. 단숨에 맥주를 반이나 들이켰다.
벌써 8월이었다. 7월에는 휴가를 놓쳤다. 국회의원의 휴가기간이 따로 정해진 것은 아니다. 그 때문에 휴가를 자유롭게 활용할 듯 보이지만, 실상은 그런 이유로 쉽게 정하지 못했다. 언제 가도 된다는 것이 오히려 언제 가기에도 애매한 상황이 되고는 했다. 이거 마치고 갑시다. 그거 하고 가겠습니다. 놀고먹는 국회라는 말이 공공연해 휴가도 말없이 다녀왔다. 유철은 주로 고향에서 며칠을 지냈는데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나라 밖에서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고 싶었다. 안에서는 결국 같은 생각만 할 것 같았다. 비례대표 국회의원 사년 차. 첫 휴가는 반납했고, 나머지는 고향에서 2박 3일 묵었다. 그제야 마음먹고 일주일 일정으로 이스탄불로 날아왔다. 정치에 대해 심사숙고해야 할 시기였다. 유철이 정치인이 되기 전에는 한 지방대학에서 인문학 강의를 했었다. 정치에 관해서는 제 트위터에 가볍게 몇 문장 남기는 것이 고작이었다. 가능하다면 국회의 돔을 주기적으로 열어서 환기시키십시오. 의원들의 막힌 사고에 도움이 될 듯합니다. 인턴으로 국회에 보낸 것이 아닙니다. 당신들의 능력을 보여주십시오. 밥은 굶은 다음에 먹는 것이 아니라 굶기 전에 먹는 겁니다. 한 학생이 모 의원의 어이없는 현장 방문을 비토하자, 그런 것을 찾아가는 염장서비스라고 하죠, 하며 함께 실소하기도 했다. 그 정도였지 자신이 현실 정치인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가능성도 없었다. 그런 그에게 비례대표 제의가 온 것은 뜻밖이었다. 당시 제1야당의 한 중진 의원이 유철을 찾았다. 그는 유철의 대학 선배였다.
“후배님 소식은 종종 들었습니다.”
그는 찾아온 목적이 분명했기에 불필요한 서론 없이 곧장 본론을 꺼냈다. 함께합시다. 그는 유철이 대학 때 학생회 임원으로 활동한 전력을 알고 있었다. 유철은 뭐 하나 맡으면 어쨌거나 열심인지라 임기 동안 책임감 있게 행동했다. 선배 의원은 그중 유철이 학생 인권 문제로 학교 측과 격렬하게 대립했던 사건을 떠올렸다. 당시 교내에 한 학생이 지도교수에게 성추행을 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피해자는 고심 끝에 교내에 대자보를 붙였다. 그러나 그것을 학교 측이 처참히 뜯어냈다. 그것도 부족해 그녀에게 징계까지 내렸다. 그 때문에 학생회가 즉각 반발 성명을 냈다. 성추행 교수를 최고 수위로 처벌하고, 징계를 즉각 철회하라. 더불어 학생인권위 설립도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학교 측은 그를 부교수에서 정교수로 승진시킴으로써 학생회와 대립각을 세웠다. 총장과의 면담은 번번이 무산됐다. 결국 학생회 임원 몇이 총장실을 점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학교 측 요청으로 투입된 경찰들에게 무자비하게 끌려나갔다. 그럼에도 항의 시위는 계속 이어졌다. 결국 외부에 이 소식이 알려졌다. 학교 측은 그제야 징계를 철회했고 학생인권위 설립을 검토하겠다는 뜻을 밝히며 한발 물러났다. 그러나 피해자가 견딜 수 없는 모욕감으로 스스로 학교를 떠났다. 유철로서는 절반의 성공도 거두지 못한 사건이었다. 사건은 오래지 않아 잊혔고 학생인권위는 유철이 졸업할 때까지도 설립되지 않았다. 그런 시절이었다. 무기력이 상실로 이어져 끝내 결실 없이 떠나게 되는.
“저는 투사가 못 됩니다.”
“시대가 바뀌면 투사의 모습도 바뀌는 겁니다.”
선배 의원이 비례대표 영입 방침을 상세히 밝히지 않았으므로, 유철은 자신의 무엇이 그에 충족됐는지 알 수 없었다. 젊고 새로운 인재로 당을 혁신한다,라는 모토를 걸었지만, 인재라는 말에서 덜컥 걸렸다. 대체 자신이 어느 방면으로의 인재인지 가늠되지 않았다. 한번을 거절했고, 두번을 거절했다. 세번째 그가 찾아왔을 때 유철이 물었다.
“제가 쓸모가 있긴 있는 겁니까?”
선배 의원이 지그시 웃으며 그의 질문을 승낙의 표현으로 받았다.
당시 당은 매우 혼란한 상태였다. 총선을 앞두고 당과 뜻을 달리하는 의원들이 무더기 탈당해서 새 정당을 만들었다. 국민들이 쟤들 뭐냐, 하는 사이에 막차 타듯 서둘러 나간 의원도 있었고, 타이밍을 놓친 것인지 전략적 잔류인지 모르겠으나 건드리면 나도 나간다, 하는 협박성 포지션으로 비장하게 남은 의원도 있었다. 당대표를 대표로 보긴 하는 건지 의심될 정도로 중진들의 목소리가 크게 새어나오기도 했다. 무더기 탈당 이후로는 그래도 뜻이 하나로 모아졌거니 했건만, 적통임을 내세우는 또다른 쪽에서 정통성 문제로 당대표를 흔들었다. 국민들이 저것들은 언제 정신 차리려나 할 무렵 이미 총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공천과 비례대표 영입이 서둘러 진행됐다. 말이 좋아 혁신위원회 단독 작품이지, 계파 간 요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들의 요구를 어느 선까지 맞출 것인가. 그것이 인재 영입보다 더 골치 아팠다. 그 때문에 누구는 입당과 동시에 누구 쪽 사람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그러나 유철은 순수하게 당내 정략으로 입당시킨 비례대표 후보였다. 당의 여러 구호 중 생활인의 생활 연구형 정치, 이 항목에 맞아떨어졌다. 화려한 경력은 없어도 이만하면 아무나 데려왔다는 말은 듣지 않을 거였다. 아니, 화려한 경력이 없는 보통 사람이어서 만족한 케이스였다. 계파 싸움은 비례대표 순번을 놓고도 치열했다. 순번제를 분야별로 바꾸자는 논의도 있었으나 역시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순번제든 분야별이든 이익 없는 양보가 있을 리 없었다. 이 싸움은 지지자들로부터 지지철회 소리를 들을 만큼 흉했다. 심지어 정당 투표에서는 타당을 선택하겠다고 선언하는 당원도 늘었다. 그 바람에 서둘러 협상을 마무리했고, 유철은 당선 마지노선의 순번을 배정받았다. 당선 여부를 하늘에 맡겨야 했다. 그리고 하늘이 그를 당선시켰다. 당시 유철의 당선을 유심히 지켜본 사람이 당대표였다. 유철의 선거 유세 모습에 마음이 끌렸다. 진중하고 겸손했다. 기존 웅변식 연설이 아님에도 청중이 그에게 집중했다. 누굽니까! 외치지 않고, 맞지요? 하고 가만히 물어도 청중들은 고개를 끄떡였다. 당대표가 더 아래였던 유철의 순번을 마지노선까지 끌어올린 이유였다. 비록 비례대표일지라도 유철이 가진 천심의 운명을 지켜보고 싶었다. 유철은 당선 이후 국방위원회 간사로 활동했다. 개원과 동시에 유철과 그의 보좌진은 밤낮을 구별하지 않고 뛰어다녔다. 그만큼 업무량이 많았고, 유철이 스스로 공부해야 할 것도 많았다. 그러나 정작 유철을 힘들게 한 것은 과도한 업무가 아니었다. 온갖 정치적 이해관계가 그를 지치게 했다. 개판이구나. 보수든 진보든 더하고 덜한 곳이 없었다. 소수의견이 가장 잔인하게 묵살되는 곳이 정당이었고, 권력자의 성역이 어디보다 강고한 곳 또한 정당이었다. 학교로 돌아가자. 그러던 차에 당직에서 물러나 일찌감치 대선 행보를 걷던 전 당대표가 그를 찾았다.
“진의원님, 경남 한번 갑시다.”
거두절미한 권유였다. 그 때문에 유철은 생각해둔 말을 목 위로 올리지 못했다.
“생각 좀 하고 오겠습니다.”
그렇게 떠난 이스탄불행이었다. 의정활동을 끝낼지 연장할지에 대한 명료한 답을 찾아 소신을 밝혀야 했다. 그것은 유철 자신에게도 꼭 필요한 답이었다. 비례의원 하나 정치판 떠난다고 아쉬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의도에는 공천에 목매는 사람이 넘쳤다. 그동안 발의안만 만들어놓고 말도 못 꺼낸 안건이 수두룩했다. 이해할 수 없는 압력과 회피로 포기해야 하는 일도 많았다. 그럼에도 국회는 돌아갔고 다들 멀쩡해 보이는 국회에서 유철은 외로웠다. 일이 즐겁지가 않아. 왜일까. 유철은 그에 대한 답을 국회와 먼 곳에서 찾고 싶었다.
다음날, 일정 없는 일정을 정한 유철은 본격 여행의 첫날을 느긋하게 보냈다. 늦게 일어나 여유있게 호텔 조식을 즐겼다. 다시 방으로 돌아와 맥주캔을 창틀에 놓고 담배를 물었다. 그때, 가까운 블루모스크에서 기도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모스크 앞으로 광장이 있다고 들었다. 유철이 지갑과 담배와 휴대전화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슬슬 산책이나 할 생각이었다. 호텔 밖은 전날 차분한 밤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닫혔던 상점들이 문을 열었고, 그 사이를 오가는 행인이 많았다. 유철은 그들에 섞여 호텔 골목을 빠져나왔다. 광장은 골목 바로 앞부터 시작되었다. 술탄아흐메트광장. 그곳에서 종소리가 울린 블루모스크를 볼 수 있었다. 유철은 광장이 마음에 들었다. 현지인과 외지인의 비율이 거의 같았다. 어느 쪽이 더 하거나 덜하지 않아 서로를 의식한 질서와 자유가 공존했다. 여행지의 균형감이 좋았다. 블루모스크와 아야소피아박물관도 근접거리에서 마주 보고 있었다. 유철은 광장을 가볍게 둘러보다가 물이 나오지 않는 분수대 근처 벤치에 앉았다. 그 자리에서 담배를 물었다. 공기와 연기를 함께 느끼며 태우는 담배가 얼마 만인가. 갓 빻은 커피콩 냄새가 나는 듯했다. 맛있다. 유철은 그대로 이스탄불을 만끽했다. 유철이 막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방문했던 한산한 앙카라와는 달랐다. 한국전쟁 참전 터키군을 기념하는 자리에 국방위원 자격으로 방문했었다. 기념식을 마치고 한국공원을 둘러본 것이 관광의 전부였다. 터키에 언제 다시 한번 와야지, 하고 찾은 이스탄불이었다. 유철이 성당에서 사원으로, 사원에서 다시 박물관으로 개조된 아야소피아박물관을 보았다. 지붕이 돔으로 된 것이 국회와 꼭 닮았다. 저 지붕을 여기서도 보는군. 그러고 눈을 돌리면 블루모스크의 돔이 또 눈에 들어왔다. 국회를 떠나 멀리 왔건만 저놈의 돔은 피할 수 없었다. 신이 자신을 그 광장으로 인도한 것만 같았다. 유철이 헛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관광 안내책자를 든 한국인들을 보았다. 저게 성당이고, 저게 모스크지? 어디부터 갈까? 유철은 한국인들을 피해 얼굴을 돌리지 않았다. 놀러 온 누구도 유철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슈 없는 비례대표 의원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좋아. 정치에 무관심했든 정치인에 무관심했든 뭐라도 좋았다. 지금 누리는 자유가 그것에서 비롯된 때문이었다. 유철이 걸어 걸어 광장 위로 난 도로까지 나왔다. 마침 트램이 지나갔다. 트램이라. 유철이 곧장 트램 정류장으로 향했다. 정류장 한쪽에 놓인 토큰판매기에서 플라스틱 토큰도 뺐다. 그러고는 다음에 도착한 트램에 무작정 올라탔다.
한국 지하철보다는 좁은 실내였다. 유철이 출입문 옆에 자리 잡고 차창 밖을 보았다. 도로 양쪽으로 기념품점과 음식점이 빼곡했다. 가게들 사이에 놓인 소파에서 한가로이 물담배를 피우는 노인들도 보였다. 유철이 물담배를 유심히 보다 저걸 한번 해봐야 하는데, 하는 사이 트램이 시장통 큰길로 나왔다. 탁 트인 바다가 보였다. 가까운 곳에 바다가 있었구나. 유철이 예상 못한 바다 풍경에 살짝 놀랐다. 바다를 가로지른 다리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들도 제법 많았다. 바닷가 주변의 생생한 현장감이 좋았다. 멀리서도 보이는 그릴 연기와 좌판에 수북이 쌓인 길거리 음식도 좋았다. 뜻밖의 좋은 장소를 발견한 유철이 몸을 돌려가며 바다 주변을 살폈다. 트램이 바다 위 다리를 달렸다. 양쪽으로 정박한 유람선이 늘어서 있었고, 운항 중인 유람선 하나가 막 다리 밑을 통과하고 있었다. 이쪽으로는 모래사장이 없어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이 없었다. 오히려 바다를 타고 늘어선 상점들로 한국의 횟집이 늘어선 항구가 떠올랐다. 터키도 회를 먹나? 유철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트램이 긴 다리를 건넜다. 유철이 바다를 더 볼지 말지 결정도 못했는데 벌써 시내로 들어선 것이다. 바다는 이미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한번 내릴 생각을 했더니 거기가 어디든 왠지 내려야 할 것만 같았다. 유철은 트램이 정차한 다음 정류장에서 내렸다. 대로변은 상점들이 이어져 있고 그뒤로는 주택가인 평범한 동네였다. 여기는 또 어디인가. 유철이 스마트폰으로 구글 맵을 켰다. 자신이 이스탄불의 어느 곳에 붉은 점으로 찍혀 있었다. 지도가 어디인지 알려줘도 어차피 모르는 곳이었다. 유철이 지도를 이리저리 움직여보니 저쪽 어디에 또 광장이 있는 것 같았다. 광장이 많군. 이번에는 그쪽으로 행선지를 정했다. 유철이 지도를 살피며 대충 가는 길을 감 잡았다. 먼저 길을 건너고 건넌 길과 연결된 비탈길로 들어섰다. 이쯤에서 오른쪽으로 가야 할 것 같은데, 하고 옆을 보니 그리 높지 않은 돌계단이 있었다. 중턱에 자란 큰 나무를 살짝 피해 자연스럽게 굴곡진 계단이었다. 그리고 그 계단 끝자락을 한 여자가 오르고 있었다. 흰 티셔츠에 무릎까지 오는 베이지색 플레어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그 차림에 베이지색 하이탑 스니커즈를 신었다. 그녀는 뒷짐 지고 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손에는 지갑 하나 휴대전화 하나 정도 들어갈 작은 가방을 들고 있었다. 손잡이 옆으로 작은 생수병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유철이 계단 중간쯤 올랐을 때 그녀가 사라졌다.
*
유철은 계단을 다 올라와서야 도연의 옆얼굴을 볼 수 있었다. 도연이 계단과 조금 떨어진 한 가게 안을 살피고 있었다. 뒷모습만으로는 왠지 일본인 같았지만 옆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한국인 같았다. 동양인은 생김새가 비슷해서 왜냐고 묻는다면 딱히 도드라진 한국인만의 특성을 말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자국민을 대했을 때 오는 찰나의 느낌이었다. 그 때문에 혹시 한국인이면 모르는 척 지나갈 생각이었다. 좁은 골목에 홀로 서 있는 도연은, 군중에 섞인 여느 한국인들과는 느낌이 달랐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어색한 인사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불편함이 있었다. 모르는 사람과 엘리베이터에 단둘이 탄 것 같은. 그러나 도연이 가게 안을 얼마나 유심히 보는지 괜히 저도 궁금해 결국 같이 들여다보고 말았다. 주택가에 있는 작은 페인팅 페도라 전문점이었다. 주인이 직접 그림을 그린 터라 모자마다 같은 그림이 없었다. 그림 자체가 장식인 모자들이 근사했다. 아들 하나 사줄까. 그러나 당장은 눈에 띄는 아동용이 없었다. 밖에 손님이 둘이나 기웃거려도 주인은 나와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 물어보고 싶어도 유철은 터키어를 할 줄 몰랐다. 유철은 간소한 차림의 도연이 아무래도 교민 같아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기, 혹시 한국분이신가요?”
“네? 아, 네.”
“아들 모자 하나 사주고 싶은데, 여기 말을 할 줄 몰라서요.”
“저도 못해요.”
“아…… 교민이신 줄 알았습니다.”
“아니에요. 쉬러 왔어요.”
“네에. 근데 뭘 그렇게 보시는 거예요?”
“저기 어린 왕자 그려진 거 예쁘죠?”
“예. 사시려고요?”
“어제도 봤는데, 칠만원이나 해요.”
“어제 오셨어요?”
“이주일 됐어요.”
예에, 이 집 모자가 비싼가보네요. 수제품이라 가격이 좀 나가는 것 같아요, 하다가 어느새 둘이 나란히 걷고 있었다. 좁은 주택가 골목을 천천히 걷다가 거의 끝에 다다랐을 때쯤 유철이 물었다.
“탁심광장이라고 아세요? 여 근처 같은데요.”
“거긴 신시가지예요. 여긴 구시가지고요.”
“여기서 가까운 게 아니었습니까?”
“걸어갈 만큼은 아니에요. 저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버스 정류장 나와요.”
도연이 고갯짓으로 살짝 인사하고 앞서갔다. 그러고는 먼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도연은 주택가를 걷는 것을 좋아했다. 창가에 널린 빨래도 좋았고, 가게 앞에 내놓은 현지 채소나 과일을 보는 것도 좋았다. 과장되지 않은 수수함이 주택가의 매력이었다. 도연이 한집 한집 눈에 새기며 걷다가, 어느 초록색 대문 앞에 옹기종기 모인 꼬마들을 발견했다. 살며시 가보니 예닐곱살 된 꼬마 넷이 소꿉놀이 중이었다. 도연이 좀더 다가가 허공에 노크했다. 똑똑. 꼬마들이 일시에 돌아보았다. 도연이 안녕, 차 한잔 줄래요? 하며 찻잔을 가리키자, 꼬마들이 대번에 알아들었다. 한 아이가 얼른 허공에 차를 타서 내밀었다. 아이는 그것을 애플티라고 했다. 고맙습니다. 도연이 차를 마시는 시늉을 했다. 꼬마들이 의젓하고 기분 좋게 웃었다.
“내 이름은 하도연, 너희는 이름이 뭐야?”
투쎄, 아흐멧, 하티제, 아이샤! 모두 한꺼번에 제 이름을 외쳤다. 꼬마들은 하도연을 하도옌으로 발음했다. 그러면서 도연이 자신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크게 웃었다. 이름의 서툰 발음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대문 앞 햇살 좋은 집에 손님이 찾아왔고 기쁘게 차를 대접했다. 잠시 꼬마들과 놀던 도연이 깜짝 놀랐다. 저 앞에 유철이 우뚝 서 있었던 것이다. 저 사람이 왜 이쪽으로 왔을까. 도연이 꼬마들에게 인사했다.
“차 잘 마셨습니다. 호쉬차 칼!”
“귈레귈레!”
꼬마들도 떠나는 도연을 기쁘게 배웅했다.
도연이 유철에게 다가갔다.
“왜 이리로 오셨어요?”
“오른쪽으로 가라면서요.”
“아…… 죄송해요, 왼쪽이라고 한다는 게.”
유철은 신께서 방향감각을 제거하고 도연을 만든 사실을 몰랐다. 도연은 왼쪽 지시등을 켜고 오른쪽으로 달리거나, 유턴 지점에서 직진하는 차와 같은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의식은 분명 왼쪽이었으니 오른쪽이라고 말한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유철이 풋 웃음을 터뜨렸다. 탁심광장인지 어딘지 딱히 갈 이유도 없었다. 그저 가다보면 나오겠거니 나선 참이었다. 조금 전 골목에서 도연이 오른쪽으로 가면,이라고 해놓고 자신이 먼저 그쪽으로 틀기에 방향이 같은가보다 했다. 도연이 돌계단을 홀로 오를 때처럼 앞에서 천천히 걷기에 조금 떨어져서 걸었다. 도연의 걸음이 얼마나 느린지 걷다 쉬다 반복하며 거리를 유지했다. 꼬마들과 노는 모습도 재미있었다. 뭐 하는 사람일까. 저렇게 잘 노는 사람이 무엇을 피해 쉬러 왔을까, 하며 도연을 지켜봤던 것이다.
“정류장까지 바래다드릴까요?”
도연이 말했고,
“네.”
유철이 대답했다.
도대체 버스 정류장이 어디에 있기에 계속 같은 곳을 뱅뱅 도는 것일까. 유철은 뒷짐 지고 도연이 가는 대로 가만히 따라다녔다. 동네를 몇번 도니 이제는 도연이 어느 쪽으로 방향만 틀어도 음, 거기가 또 나오겠군, 하고 따라갔다. 그러면서 도연이 두번째 터키 방문인 것을 알았고, 사실은 방향감각이 매우 안 좋다는 고백을 들었다. 그런 것 같습디다, 생각하며 유철이 터져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여행 온 사람들은 늘 바쁘고 힘들잖아요. 가는 중에 길이 잘못되면 짜증나죠. 미안해요. 도연의 말에 유철이 지그시 미소 지었다. 자신은 목적지가 없었고 바쁘게 움직일 여행자가 아니었다. 그저 걷거나 앉아 있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아니라고 괜찮다고 도연의 사과를 돌려주지 않았다. 자신이 받은 사과였으므로 자신의 것이었다. 다정하고 순한 사과가 마음에 들었다.
“물 마실래요?”
도연이 뜬금없이 생수를 내미는 바람에 유철이 더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그리 미안했는지 반밖에 남지 않은 제 생수를 유철에게 내밀었다. 주세요, 하고 유철이 생수를 받아 다 마셔버렸다. 그리고 또다시 도연이 가는 대로 갔던 길을 또 가며 말없이 따라다녔다. 솔직히 말해보세요. 이 동네에 버스 정류장 없지요? 도연은 분명 한번 왔던 길도 생전 처음 온 길처럼 걸었다. 한자리에 잠시 서서 두갈래 길을 신중하게 살피기도 했다. 그러더니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잠깐 쉬었다 가면 안 될까요?”
얼마나 돌고 돌았는지 유철도 익히 알고 있는 페도라 전문점 골목까지 나왔다. 원점이었다. 유철이 돌계단에서 잠시 쉬자고 했다. 두 사람은 계단 중턱 나무 화단 옆에 앉았다. 도연이 말했다.
“여기서는 차라리 트램 정류장 쪽으로 가는 게 나아요. 그쪽에 버스 정류장도 있거든요.”
“네에. 그런데 아까 모두에 쉬러 오셨다고 하셨지요?”
“모두에? 그런 단어를 일상에서도 쓰시네요? 하하하.”
“그게…… 강의하던 버릇이 남았나봅니다.”
“아아, 하시는 일 물어봐도 돼요?”
“대학에서 시간강의 하고 있습니다.”
“개강 안 했어요?”
“이번 학기에는 강의를 못 잡았어요. 핑계 김에 쉬는 거죠, 뭐.”
도연은 더 깊게 묻지 않았다. 쉬러 온 이유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가 타인의 호기심을 충족시킬 이유도 없을뿐더러 도연도 그런 일에 오지랖 떠는 성정이 아니었다. 그 사람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었다.
“저도 물어도 됩니까?”
“전업주부예요.”
“네에. 아이는요?”
“딸 있어요.”
유철 역시 가만히 고개를 끄떡였다. 멋진 남편을 두었군. 아내를 긴 시간 혼자 여행 보내는 남편이 많지 않을 거였다. 유철이 도연에게 혹시 이곳에 연고가 있느냐 물었더니 그렇지도 않다고 했다. 그저 이곳이 좋아서 오래 머물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저 때문에 일정에 차질이 생긴 건 아니에요?”
“아뇨. 일정 없이 숙소만 잡고 왔어요. 여기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들어온 겁니다.”
“네에. 얼마나 있다 가세요?”
“일주일. 근데, 우리 이름 정도는 알아도 되지 않을까요?”
“하도연입니다.”
“진유철입니다. 도연씨는 얼마나 있다 갑니까?”
“돌아갈 일정 아직 안 잡았습니다.”
도연은 그동안 연재만큼은 기피했었다. 마감 날짜가 연이어 정해져 있다는 것과 한번 실리면 되돌릴 방법이 없다는 것, 그것이 자꾸 발목을 잡았다. 직업상 언젠가 한번쯤은 결국 하겠지만, 그때를 최대한 미루고 싶었고 가능하면 하지 않는 쪽으로 하고 싶었다. 그랬던 도연이라 연재 청탁을 받아들이고 집으로 온 날에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왜 그랬을까.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그러다가 정말 반미치광이처럼 폭식하다가 단식하다가 청탁한 편집자를 저주하다가 끝내는 팔자를 원망하기까지 했다. 도망가고 싶었다. 도연은 딸을 외할머니에게 맡기고 소설 구상차 떠난다고 했다. 그러나 도연에게 여행은 무엇을 구상해서 채워 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쌓인 불필요한 것들을 버리고 오는 여행이었다. 다 버리고 쓰고 싶어질 때까지 머물 예정이었으므로 돌아갈 날을 미리 잡지 않았다.
“도연씨, 나하고 다른 광장 갈래요? 내 숙소 있는 데에 좋은 광장 있어요.”
“숙소 어딘데요?”
“술탄아흐메트광장이라고, 그 근첩니다.”
“제 숙소도 그 앞에 있어요.”
“갑시다, 그럼. 여서 뱅뱅 돌지 말고.”
도연과 유철은 트램을 타고 돌아와 아야소피아박물관 앞에서 내렸다. 바로 아래가 술탄아흐메트광장이었다. 광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점심을 한참 넘긴 뒤였다. 유철은 시원한 맥주가 마시고 싶었다. 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목이 말랐다. 마침 길 건너에 테라스가 좋은 식당이 눈에 띄었다.
“저기서 맥주 한잔할래요?”
“저기 케밥 맛있어요. 가요.”
유철과 도연이 곧장 길을 건너 식당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키 크고 잎이 많아 그늘이 좋은 나무 앞 탁자에 앉았다. 유철이 맥주부터 주문하고 식사를 골랐다.
“여기 와봤어요?”
“네. 저기 보이는 호텔이 제 숙소예요.”
도연의 숙소는 트램이 지나가는 길가에 있었다. 여행사를 겸한 작은 호텔이었다.
“이 식당 자주 왔어요?”
“두번 왔어요. 오늘 세번째.”
“뭐 맛있어요?”
“양고기 케밥이요. 같이 나오는 샐러드도 좋아요.”
“그럼 나는 그걸로 할게요.”
유철과 도연은 음식보다 먼저 나온 터키 맥주 에페스부터 쭉 마셨다. 유철이 이거 좋네요, 하고 두병을 더 주문했다. 뒤에 주문한 에페스는 케밥과 함께 나왔다. 케밥과 잘 어울리는 맥주였다. 고양이 천국 터키답게 고양이 몇마리가 식당을 어슬렁거렸다. 그것에 누구도 험한 눈길을 보내지 않았다. 때로는 손님 탁자 앞 의자에 앉아 쉬는 고양이도 있었다. 유철과 도연은 식사를 하며 고양이에 대해 한참 얘기했고, 빵이 무한 리필인 터키 식당과 반찬이 무한 리필인 한국 식당의 인심을 이야기했다. 고양이가 터키 식당에 들렀다가 한국 식당으로 가면 한끼는 무한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거네요. 하하하. 터키하고 한국 식당이 나란히 있으면 뭔 줄 아세요? 몰라요. 형제식당. 그럼 신데렐라가 잠을 못 자면 뭔 줄 아세요? 모릅니다. 모짜렐라. 하하하. 더운 날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나누는 실없는 이야기가 음식 맛을 더욱 좋게 했다. 두 사람이 식사를 마칠 때쯤, 손님 네명이 그들과 가까운 탁자에 자리했다. 한국 사람들이었다. 여기가 가이드북에 나온 식당이야. 그런 이야기가 들렸다. 유철이 알았어요? 물었고, 도연이 몰랐어요,라고 답했다. 두 사람이 식사를 마치고 광장으로 나왔을 때는 벌써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했다. 도연과 유철이 여전히 물이 나오지 않는 광장 분수대 쪽으로 갔다.
“나 저기 잠깐 앉을게요.”
도연이 한 벤치를 가리켰다. 그러라고, 유철도 함께 가서 앉았다. 벤치에 앉은 도연이 작은 손가방에서 담배 지갑을 꺼냈다. 담배 좀 피울게요. 유철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 제 담배를 꺼냈다. 유철이 여성의 흡연에 편견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단지 도연에게서는 그런 느낌이 없었다. 오히려 담배를 멀리할 것 같았다. 그 때문에 자신은 아까부터 피우고 싶었지만 꾹 참고 있었다. 맥주에 케밥까지 먹었으니 당장 한대 피우지 않으면 금단현상이 올 것도 같았다. 그런데 도연이 떡 피우는 것이 아닌가. 지금까지 이토록 고마운 적이 없었다. 유철이 개운하게 연기를 내뱉었다. 아, 좋다. 유철이 자신이 그동안 담배를 피우지 못한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 바람에 도연이 깔깔 웃었다. 도연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유철의 재킷에서 담배 냄새를 맡았더랬다. 그런데 무슨 연유에서인지 담배를 꺼내지 않기에 저도 덩달아 피우지 못했다. 그러다가 끝내는 참지 못하고 먼저 피운 것이다. 유철이 큭큭 웃었다.
“냄새 많이 났습니까?”
“금연이 추세잖아요. 그래서 오히려 흡연자를 만나면 마음이 편해져요. 같이 담배 피울 장소를 물색하러 다닐 수 있잖아요. 한국은 이제 우리가 살기 어려운 나라예요.”
“좁은 골목이나 외진 곳으로 가면 우리 같은 인류를 종종 만나죠.”
두 사람은 흡연자들만의 공감대로 급격히 가까워져 한결 편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광장 옆으로 난 시장도 구경하고, 또 가만히 앉아 사람 구경도 했다. 얼마간을 그렇게 다니다보니 사위가 완전히 어두워졌다. 이제 유철과 도연도 헤어져야 했다. 유철이 케밥을 먹은 식당까지 함께 와주었다. 도연이 인사했다.
“잘 쉬다 가세요.”
유철이 뒷짐 지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가만히 말했다.
“오늘 같이 잘래요?”
그 말에 도연이 윗니를 가지런히 보이며 웃었다. 웃음에 어떤 혐오나 욕설이 섞였다면 유철이 바로 사과했을 거였다. 그러나 도연은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들은 양 킥킥 웃으며 물었다.
“잘해요?”
“그거는……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지나치게 바른 그의 대답에 도연이 웃음을 터뜨렸다. 유철이 손을 내밀었다. 도연이 유철의 손을 잡았다. 만나 처음 잡은 손이었다. 두 사람은 그대로 다시 광장 옆을 지나 유철의 숙소로 걸어갔다.
*
도연이 선포식 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유철을 검색했다. 진유철. 그동안 가슴에만 둔 사람이었다. 그곳의 남자를 이곳에서 꺼내 현실성을 부여하고 싶지 않았다. 그곳에서 더없이 좋았고 충분히 사랑했다. 그러면 됐다. 그랬던 그가 불쑥 나타났다. 반갑습니다, 하고 유철이 내민 손은 이스탄불에서 잡았던 그 손이 아니었다. 조금은 경직된 정치적 수사가 든 손이었다. 캐주얼로 기억된 그가 말쑥한 정장차림으로 도연을 맞았다. 도연은 그동안 자신이 사람을 꽤나 잘 본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그때의 유철에게서는 정치인을 읽을 수 없었다. ○○시 시장이 도연에게 작가 같지 않다고 했는데, 그 말은 유철에게 고스란히 적용될 말이었다. 도연이 검색된 유철의 정보를 보며 비례대표 출신이구나, 국방위원회에 있네, 하다가 어느 잘 나온 사진을 보고는 잘생겼네, 하며 그간 유철의 활약도 찬찬히 읽었다. 군인 인권과 복지를 위해 나름 애쓴 정황이 곳곳에서 보였다. 뭐야 이 남자, 국회의원이 왜 혼자 그러고 다녔어. 도연은 유철의 음성이 좋았다. 저기, 혹시 한국분이신가요? 그것은 경남 억양이 섞인 표준어였다. 그때부터 도연은 가만히 그의 말에 귀 기울였다. 경남 사투리는 무뚝뚝하고 드세다 생각했는데, 유철의 차분한 중저음의 사투리는 매력적이었다. 강의한다고 했지. 표준어를 써야 했겠구나. 그럼에도 숨길 수 없는 경남 고유 억양을 도연이 당해낼 수가 없었다. 매력 없는 서울말과는 느낌이 달랐다. 같이 잘래요? 의문문의 악센트가 뒤가 아닌 앞에 있었다. 세상에, 그렇게 예쁘게 자자고 하면 어떡해요. 껄렁함이라고는 1%도 없는 남자가 자자고 했다. 그 단정한 섹시. 툭 건드려보고 싶었다. 도연이 유철이 내민 손을 잡은 이유였다.
지난가을 도연이 연재의 마지막 회를 붙잡고 전전긍긍할 때, 온 나라에 촛불이 타올랐다. 온갖 추문이 들끓는 국정농단 사태로 전국이 촛불로 휩싸였다. 집회는 지난 10월부터 올 5월까지 이어졌다. 촛불이 청와대의 봉황기를 당장 내리라고 명령했다. 국민의 존엄을 국정농단 주역들에게 통렬히 상기시킨 함성이었다. 결국 대통령에게 탄핵이 인용됨으로써 조기대선도 확정됐다. 짧은 대선기간인 만큼 선거전도 치열했다. TV 대선토론도 매회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그만큼 이번 대선의 국민적 관심도가 높았다. 국정농단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당시 집권당이 분당돼 각각 후보를 냈다. 벌써 갈라서서 이미 다른 살림을 차린 두 야당도 각각의 후보를 냈다. 원내교섭단체가 되지 못한 군소정당에서도 후보를 냈다. 이 다섯 후보가 5회에 걸쳐 토론했다. 이혼한 정당들의 어색한 조우도 우스웠다. 서로 잘 아니 무턱대고 아니라고 잡아뗄 수도 없었다. 섣불리 아닙니다, 했다가는 아닌 게 아닌 것으로 돌아와 아니한 만 못한 처지가 되고는 했다. 토론의 격조는 사라지고 지지율 1위 후보에게만 우르르 달려드는 형국이었다. 넷이 한 사람만 두들겨 패니 패는 사람들끼리 혼선을 빚기도 했다. 내가 아니라 저쪽이라니까! 아차, 근데 당신은 좀 맞아야 해. 당신은 호위무삽니까? 사퇴하세요! 나도 질문 좀 합시다! 제발 나의 정체성을 알려주세요. 제가 누굽니까? 그걸 왜 제게…… 절박하고 엄중한 시기에 박장대소를 선물한 후보들에게 감사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5월 9일,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이 탄생했다. 지지율 1위 준비된 대통령. 이변은 없었다. 청와대에 다시 봉황기가 올라갔다. 유철이 이제 집권당 의원이 된 것이다. 그 요란한 대선 과정에서 유철은 어디에 있었는가. 당시 야당은 전과는 전혀 다른 선거유세를 보여주었다. 선거를 축제로 만들었고 전 의원이 대선 후보 하나만 바라보며 달렸다. 거의 모든 의원들이 후보를 위해 매체마다 얼굴을 내밀었다. 자당 인터넷 채널로 유세 현장을 생중계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유철은 눈에 띄지 않았었다. 남들이 몸으로 유세할 때 어디 들어가서 기도 유세라도 했나. 그러나 유철이 눈에 띄지 않은 가장 큰 원인은 도연 자신에게 있었다. TV도 잘 안 보고 인터넷도 잘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경남 곳곳을 돌며 몸이 부서져라 뛰어도 눈에 띌 리 없었다. 도연은 이제야 뒤늦은 검색으로 유세차에서 지지연설을 하는 유철을 볼 수 있었다. 목소리를 높여도 워낙 차분한 음성이라 심심해 보였다. 후우. 도연이 긴 숨을 내쉬었다. 자신이나 유철이나 신분이 들통 난 바람에 멋쩍은 재회였지만, 검색하면 다 나오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니 서로 훔쳐보는 재미는 쏠쏠할 터였다. 도연이 검색창을 닫고 대충 머리를 묶었다. 피곤했다.
유철 역시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부터 살폈다. 하도연, 하도연…… 리스트 어디에도 도연은 없었다. 안도와 실망이 묘하게 같이 나타났다. 없다. 없군. 유철이 인터넷으로 도연을 검색했다. 인물정보가 매우 간소했다. 인터뷰도 책 관련한 내용 말고는 거의 없었다. 도연을 사적으로 파악할 정보가 전무하다시피 했다. 자신이 익히 들어본 제목의 책이 있어서 살짝 놀라기도 했다. 이 책 쓴 사람이었구나. 유철은 소설을 많이 읽지 않았다. 박사과정 중에 대학 강의를 맡았다. 그때는 강의 준비와 관련 서적을 읽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게다가 유철이 최고로 꼽는 소설은 『삼국지』였다. 의정활동 중에 시간이 나면 차라리 『삼국지』를 다시 읽었다. 유철은 낮에 김보좌관이 페이스북에 올린 도연의 사진을 보았다. 행사 관련 인사와 함께 찍은 사진은 홍보용으로 요긴했다. 심심한 SNS에 깨알 같은 재미도 줄 수 있었다. 김보좌관은 이런 기회를 놓칠 사람이 아니었다. 사진 속에는 나풀거리는 치마에 하이탑 스니커즈를 신은 도연 대신, 단정한 원피스에 굽 높은 구두를 신은 도연이 있었다. 새로운 낯섦이었다. 사실 유철은 북콘서트 중간에 먼저 자리를 떴어야 했다. 김보좌관이 다음 일정으로 유철을 재촉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끝내 자리를 지켰다.
“북콘서트는 마치고 갑시다.”
유철은 콘서트 내내 도연을 닳도록 바라보았다. 나는 당신이 궁금했습니다. 그때도, 그때가 아닌 내내도. 아직도 길가에 서서 울먹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습니다. 도연은 특정 장소를 지목해서 만나는 것을 어려워했다. 늘 지나던 길에 있는 곳도 지목하는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서 지워지는 듯했다. 거기 시장 있죠? 도연씨 이블아이 목걸이 산 데. 거기서 오른쪽으로 칠백 미터쯤 가면 조그만 슈퍼가 있어요. 거기서 한국 식품 판대요. 이따가 거기서 만나요. 도는 길도 아니었고 골목이 많은 길도 아니었다. 곧장 걸어가면 나오는 상점이었다. 도연은 그 앞을 수차례 지나면서도 정작 상점을 보지 못했다. 유철은 장난 삼아 몰래 뒤를 쫓다가 우뚝 서 있는 도연이 뭔가 이상하다 싶어 서둘러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왜 그래요? 괜찮아요. 괜찮지 않아 보여요. 제발 나한테 어디로 오라고 하지 마세요. 나한테는 거기가 안 보입니다. 왜 그런지는 몰라요. 그냥 안 보여요, 하고 도연이 기어이 눈물을 흘렸다. 미안해요. 유철이 그런 도연을 한동안 안고 있었다. 도연은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만남의 장소를 찾기 어려워했다. 여느 사람들에게는 보통의 일이 도연에게는 공포였다. 일종의 심리적 장애 같은 거예요. 주소를 알려주고 지도를 보내줘도 내 눈에는 안 보여요. 거기에 잘 있다가도 내가 가려고만 하면 불현듯 사라져요. 그러나 살다보면 누구를 만나거나 참석해야 할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 그러면 도연은 정한 시간보다 일찍 나가 헤매다 헤매다 겨우 그 장소를 찾아냈다.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코앞에 두고도 보지 못해 쓰러지듯 집으로 돌아온 때도 많았다. 도연의 이런 상태를 대개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지가 늦어놓고. 여기서 한 지가 몇년짼데 여길 못 찾아. 병신이냐? 그 때문에 도연은 차라리 약속을 잡지 않는 쪽을 택했다. 내가 계속 옆에 있을게요. 유철은 그렇게 남은 일주일을 도연과 함께 보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두고 먼저 와버렸다. 늘 택시가 있는 곳으로만 다니세요. 네, 걱정 마세요. 그 웃음이 마지막이었다. 그 웃음을 더는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가 나타났다. 보고 싶었습니다. 유철이 북콘서트 자리를 끝까지 지킨 것은 도연에게 하는 고백이었다.
*
학교에서 막 돌아온 인영이 도연 옆에 털썩 앉았다. 그 바람에 침대가 출렁했음에도 도연은 여전히 숙면 중이었다. 인영이 도연의 어깨를 살짝 흔들었다. 엄마. 도연이 그제야 눈을 번쩍 떴다.
“너 왜 벌써 왔어?”
“수업 다 끝나고 왔는데 뭐가 벌써야?”
“몇신데?”
“다섯시.”
도연이 마지못해 일어나 앉았으나 눈을 뜨지 못했다. 밤을 꼬박 새우고 낮 한시경에 잠들었으니 고작 서너시간밖에 못 잔 상태였다. 사정이 그렇다 해도 인영은 도연이 불만이었다. 제발 눈뜬 엄마 좀 보여줘. 근래 들어 도연의 자는 모습만 봤다. 아침에는 서서 자는 듯한 얼굴로 식사를 챙겨줬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암막 커튼 친 안방에서 자고 있었다. 그러면서 한밤에는 한낮처럼 생생했다. 야밤에 들리는 도닥도닥 키보드 소리가 묘하게 으스스했다. 게다가 안방에서 저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인영은 노크조차 할 수 없었다. 키보드 소리가 도연을 대신하는 말처럼 들렸다. 들어오지 마. 그것은 아마도 인영이 지난해에 겪은 충격 때문일 것이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도연이 무슨 일을 하든 제 알 바가 아니었다. 일하고 싶으면 일하고 자고 싶으면 자는 세상 태평한 엄마일 뿐이었다. 마침 그즈음 친구들 사이에서 이혼이라는 말도 자주 오갔다. 그때마다 인영은 마음이 불편했다. 인영이 아직 결혼이라는 말도 모를 아기 때 도연은 이미 이혼까지 한 것이다. 왜 이혼했어? 내 생각은 안 했어? 아빠를 죽인 엄마보다는 이혼한 엄마가 나으니까. 엄마 손에 죽은 아빠보다는 이혼한 아빠가 나으니까. 그만큼 싫었어. 그럴 거면 결혼을 하지 말든가. 인영은 원망을 무시로 나타냈다. 인영아, 엄마 지금 급한 원고 때문에 저녁 못해. 어쩌라고? 시켜 먹어. 내일 애들하고 쇼핑하러 갈 거야. 알았어. 얼마 줄 건데? 달라는 만큼. 나 살 거 많아. 도연이 키보드에서 손을 내리고 눈을 꾹 감았다. 심상찮은 분위기가 감지됐으므로 이쯤에서 물러나야 했는데 인영의 원망이 결국 흉한 말을 쏟아냈다.
“딸한테 작가인 거 티내는 거야? 어이없네, 진짜.”
“티……”
도연이 책상 서랍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러고는 지갑에 꽂힌 모든 카드를 뽑아 인영의 발밑으로 던졌다. 그것도 모자라 들고 있던 지갑까지 통째로 던졌다.
“사고 싶은 거 다 사. 가능하면 티 내지 않는 엄마도 사.”
그러면서 바라보는 도연의 싸늘한 눈빛이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이 쓰레기는 뭐야. 그것은 엄마가 딸을 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축구경기 중에 관중이 난입하면 누가 미친 거니? 경기장에서 나가달라고 하면 선수인 거 티 내는 거니? 내가 뭘 했는데? 내 일을 방해하고 있잖아, 지금. 엄마는 딸보다 그깟 소설이 더 중요해? 적어도 네 쇼핑목록 따위보다는 중요해. 학교에서 돌아온 딸 밥은? 딸, 딸, 딸, 밥, 밥, 밥…… 하아, 씨발 밥…… 엄마는 일하다가도 밥을 해야지, 그치? 모성 이데올로기 좆같네. 도연이 얼굴을 감싸고 머리를 키보드에 턱 박았다. 인영의 가슴이 콱 막혔다. 씨발이라니. 좆같다니. 소설에서는 간혹 사용해도 실제로는 전혀 쓰지 않는 말이었다. 숨을 몰아 또박또박 내뱉은 말이어서 더욱 선명했다. 도연에게 놀란 인영이 뒷걸음치듯 제 방으로 돌아왔다. 며칠간 안방에서의 키보드 소리도 중지됐다. 인영 자신의 난동으로 중지된 경기가 재개될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인영은 친구들과 문자로 신세 한탄을 했고, 일기장에 도연을 향한 험한 욕설을 풀었으며, 자신의 탄생을 저주하다가 울며 잠들기도 하고, 학교에서 돌아와 아침과 변함없는 주방을 보며 도연이 종일 음식에 입을 대지 않은 것을 걱정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경기가 속히 재개되길 빌고 말았다. 괜히 건드려가지고…… 인영이 후회했으나 사과할 타이밍을 한참 놓친 뒤였다. 대차게 대들고 얕볼 수 있을 만큼 얕봤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해진 것은 인영 자신이었다. 드디어 안방에서 도닥도닥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을 때는 아이 씨, 하고 주저앉아 울어버렸다. 안도와 더불어 그동안의 맘고생이 서러웠다. 그때부터였다. 그뒤로는 도연의 키보드 소리가 기찻길 정지신호 같았다. 일단멈춤. 인영은 안방에서 키보드 소리가 들리면 TV를 음소거 수준으로 내렸고, 그것도 신경 쓰이면 아예 방으로 들어가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었다. 아침에는 도연이 차려주는 밥을 군소리 없이 먹었고, 저녁때는 꼭 필요한 말만 하고 제 방으로 갔다. 그런 인영을 도연이 먼저 찾았다. 도연이 인영의 침대에 걸터앉아 사과도 먼저 했다.
“연재 때문에 엄마가 좀 미쳤다. 이제 다 끝나가. 그때까지만 참아줘라. 미안해. 다시는 안 할 거야. 이거 예상보다 지독하다.”
도연이 당장 처리해야 할 일에 대해 인영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렇다고 인영이 민망하게 아니라고, 내가 잘못했다고, 마음 편하게 일하라며 예쁜 말을 건넬 수는 없었다. 그 때문에 어쨌든 사과는 받아줄게 하는 표정으로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겨울방학 때 어디 놀러 갔다 오자.”
“알았어. 근데 쇼핑몰에 가보니까 엄마는 안 팔더라.”
“나 같은 엄마를 안 파는 거지. 다른 엄마들은 세일해서 팔아.”
“세일할 때 잔뜩 사둬야겠네, 그럼.”
“싼 게 비지떡이야, 기집애야.”
올해, 인영은 중학생이 되었다. 초등학생 때와는 많은 차이를 보였다. 가끔은 엄마 구두 신은 아이처럼 어울리지 않는 조숙한 말투가 우습기는 해도 그 시기를 잘 보내는 중이었다. 그것은 단계의 진화였다. 단계의 초입이었으므로 전단계의 특성이 아직 남은 것은 당연했다. 틱틱 내뱉는 말버릇도 여전했다. 그러나 그것에 생각이 담기기 시작했다. 인영은 그동안 도연이 어떻게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았는지 불가사의했었다. 자신은 사는 게 힘들어 죽겠는데 도연은 모든 것이 태평해 보였다. 거기에 도연이 외가에서 받는 사랑은 질투 이상의 질투를 불렀다. 왜 다들 엄마한테는 ‘노’를 하지 않는 거야. 반쪽 부모와 사는 자신은 보지 않고 모두가 도연만 보는 것 같았다. 도연을 통해 고스란히 내려온 내리사랑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러다가 불현듯 도연이 자신을 낳았다는 당연한 사실에 코끝이 저렸다. 새삼 깨달은 우리 엄마였다. 그 끔찍한 날부터는 단순한 엄마에서 일하는 여성으로 시선도 전환됐다. 첫 기억부터 도연은 늘 읽고 쓰고 있었기에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자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것은 도연의 성격 탓이기도 했다. 도연은 자신의 일로 인영을 괴롭게 하고 싶지 않았다.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요란하게 티 내가면서 글을 쓰나. 가만히 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니까 그동안은 가만가만 당최 뭐 하는 사람인지 모를 만큼 혼자 잘해내고 있었다. 그놈의 미친 연재만 아니었다면 평생 그러했을지도 몰랐다. 끝날 때까지 끝나는 것이 아닌 연재가 결국 도연을 미치게 만들었다. 도연은 미쳐버린 엄마 때문에 딸이 쓸데없이 조숙해버린 것 같아 미안하기도 했다.
“부모의 혜택을 누리는 건 좋은데, 건방지게 누리지는 마.”
전 같으면 해택이나 주면서 말하세요, 하고 인영이 되받아쳤을 것이었다. 물론 여전히 콧방귀는 뀌었지만 엄마의 충고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인영이 그만큼 자랐다. 그러나 이제 겨우 열네살이었다. 한없이 어린 딸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잠든 엄마에게 밥 달라고 하는 것이 찜찜한 딸은 많지 않을 거였다. 인영이 한참 어렸을 때는 엄만 맨날 야근하는 거야,라고 도연이 말했었다. 인영은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몰라 막연히 밤에 어떤 일을 하는구나,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래서 누가 엄마는 집에서 뭐 하시니? 물으면 맨날 야근해요,라고 했었다. 야근에 대해 정확히 알았을 때는 도연에게 따지기도 했다. 엄마가 직장인이야? 프리랜서는 야근 없냐? 주간에 아무것도 안 하면서 무슨 야근이야? 낮에는 살림하잖아. 살림을 야간에 하고 일을 주간에 하면 아파트에서 쫓겨나. 왜? 밤에 어떻게 세탁기하고 청소기를 돌리니? 한밤에 시장은 어떻게 봐? 너 밤에 점심 먹을래? 합리적으로 살아야지. 그러나 인영은 왜 자신의 집에만 그런 합리성이 적용되는지 늘 불만이었다. 그런 불만은 단계의 진화와 상관없이 지속됐다. 낮은 낮처럼 밤은 밤처럼 지내는 엄마를 원했다. 인영은 앉아서도 눈을 뜨지 못하는 도연의 무릎을 흔들었다.
“엄마, 정신 좀 차려봐.”
“차렸어. 배고파? 뭐 시켜줄까?”
“됐어.”
“그럼 카레 해줄까?”
“카레가 있어야 하지.”
“없니?”
“냉장고 텅텅 비었어!”
“흠…… 그럼 너 있을 때 시장 가자.”
도연이 손으로 대충 머리를 빗었다.
“세수라도 하고 가. 쪽팔려서 진짜……”
“알았어, 알았어. 십분 뒤에 가자. 너도 옷 갈아입어.”
도연이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었다. 아직 밖이 밝았다. 한시간만 더 잤으면…… 도연이 비틀비틀 화장실로 들어갔다. 치약의 민트향도 도연의 잠을 쫓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다. 졸려 죽겠네. 양치질 중에도 하품이 나와 개수대로 치약 거품이 뚝 떨어졌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으면 뭐하나? 의지대로 살 수가 없는데. 의지대로 살았다가 꼬이는 인생 수도 없이 보았다. 그러한데, 이토록 사소한 잠에 의지를 보였다가는 딸과의 관계가 심히 꼬일 것이었다. 도연은 인영이 배고픔만으로 자신을 깨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이유였다면 직접 밥을 볶아 도연을 깨웠을 터였다. 엄마, 밥 먹고 자. 그런 아이였다. 요즘 인영은 외롭다. 가슴에 눈물이 맺혀 있다. 최근에 제 아빠가 재혼한 사실을 알게 된 때문이다. 자기 또래 아이가 있는 여자와의 재혼이었다. 아빠가 다른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그동안 인영이 때마다 살갑게 아빠를 만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아빠의 재혼은 속이 아렸다. 그동안 도연이 아빠가 아닌 다른 남자를 만나도 치이, 하고 말았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그것이 결혼의 무게였다. 아빠가 완벽하게 다른 집의 가장이 되었다. 무조건 우선해야 할 사람들이 생겼다. 아빠에게 아빠라고 부를 아이, 아빠에게 여보 당신 할 여자, 끔찍했다. 소식을 들은 며칠은 그래서 어쩌라고 씨…… 하고 버텼다. 그러다가 기어코 눈물을 쏟았다. 도연이 그 소리를 듣고 인영의 문 앞에서 기다렸다. 울다가 울음의 무게에 눌려 쓰러질까 걱정됐다. 울도록 한 뒤 쓰러지기 전에 안아줘야 했다. 울음이 악에서 원망으로, 원망이 슬픔으로 변했다. 슬픔이 긴 울음이었다. 인영이 쇳소리로 숨을 몰아쉴 때 도연이 노크했다. 엄마야. 인영이 도연의 품에서 아기처럼 조금 더 울고 마침내 각오한 듯 소리쳤다.
“이제 아빠한테 양육비 같은 거 받지 마!”
“받은 적 없어. 우리는 우리가 해결하면서 살았어.”
요즘 인영이 자주 보는 TV 프로그램에는 아빠와 아이가 등장했다. 아빠가 어린 아기와 어울리기도 하고, 인영 또래의 딸과 어울리기도 했다. 근사하고 다정한 아빠들이 딸들과 함께했다. 엄마와 딸이 등장하는 것도 있는데 그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재방송으로 보고 또 보고 스마트폰으로도 계속 보았다. 도연이 보기에는 아무리 봐도 제 딸이 더 예쁜데, 인영은 그 딸들을 부러워했다. 아빠에게 투정 부리고 사랑한다 말하며 눈물짓는 그 딸들을 부러워했다. 그것은 도연이 만들어줄 수 없는 아빠였다.
“엄마도 저런 남자랑 결혼했어야지.”
“저런 남자가 엄마랑 결혼했겠니?”
“엄만 어떤 남자 좋아해?”
“가만히 섹시한 남자.”
“뭐래. 전에 거지 같은 화가 아저씨 보니까, 확 깨더만.”
“얼굴 보고 만난 건데, 이젠 그렇게 안 만나려고.”
“얼굴…… 씨, 본 중 최악이었어! 제발 슈트, 응? 슈트하고 만나.”
“그 사람 슈트발은 죽였어.”
“얼굴이 슈트를 잡아먹잖아요. 제발 눈 좀 높여. 눈이 아주 발에 달렸어.”
인영은 요즘 그런 아빠를 대신할 엄마를 원했다. 같이 이야기하고 같이 움직여주는 엄마. 알고 있었지만 도연 자신도 요즘은 뭐 하나 빠진 사람처럼 멍한 상태였다. 읽어야 할 책이 쌓였고, 마감 날짜를 넘긴 원고에 아직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고 손가락은 마비된 것처럼 글을 쓰지 못했다. 휴대전화는 일찌감치 꺼두었다. 메일은 제목만 확인하고 읽지 않았다. 선생님, 안부차 메일 드립니다. 거짓말. 내가 아니라 원고 안부가 궁금한 거지요? 편집자를 수신 차단해야 하나. 도연의 손가락이 조금만 용기를 냈다면 그렇게 했을지도 몰랐다. 마감 같은 거 몰라요,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써지지 않는 원고와 싸우며 밤을 지새웠다. 그런 마당에 인영과 놀아줄 여유가 없었다. 도연이 양치질한 칫솔을 내려놓고 물로 대충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래저래 아무것도 못할 거였다. 차라리 인영과 노는 게 나았다. 도연이 화장실에서 나왔다.
“인영아, 가자!”
“엄마 세수 안 했지?”
“양치질했어. 갔다 와서 샤워할 거야.”
“보통 사람들은요, 샤워를 하고 시장에 갑니다, 어머니!”
빨간 틴트를 예쁘게 바른 인영이 투덜투덜 먼저 나갔다. 기집애, 예쁘게도 하고 다니네. 도연이 빙글빙글 웃으며 인영의 뒤를 따랐다.
도연과 인영은 장을 보기 전에 시장 입구에서 순대와 떡볶이를 먹었다. 인영이 알아서 냅킨과 물을 챙겼다. 도연이 어묵도 먹을까? 했더니 군말 없이 그것도 챙겼다. 엄마, 몇개? 두개. 내가 딸은 잘 낳았지. 도연은 인영만 보면 흐뭇했다. 도연이 순대를 떡볶이 국물에 찍어 인영에게 내밀었다.
“저 앞에 전에 갔던 데보다 더 맛있다.”
“요 옆이야. 집은 어떻게 찾아오나 몰라.”
두 사람은 저녁을 순대와 떡볶이로 해결하고, 인영의 지휘로 장거리를 마련했다. 냉장고가 빈 것은 진즉 알았지만 식용유 같은 생필품까지 떨어진 줄은 몰랐었다. 그것도 없었구나. 뭐는 있을까봐? 도연이 괜히 한마디 했다가 인영에게 무안한 핀잔만 들었다.
“엄마는 맨날 집에 있으면서, 집에 뭐가 있는지 없는지도 몰라?”
“그게 엄마한테는 직장이기도 하잖아.”
“엄마가 직장인이 아닌 걸 하늘에 감사해. 그랬으면 벌써 잘렸어.”
“너 말 잘한다. 혹시 글 쓸 생각 없니?”
“추호도 없습니다.”
둘은 티격태격하며 집에 없는 것과 있어도 더 필요한 것을 더해 장바구니를 가득 채웠다. 양손에 든 짐으로 걷기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인영이 개중 더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었다. 그래도 도연이 걱정됐는지 자꾸 돌아보며 걸었다.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는 제 짐을 서둘러 엘리베이터 앞에 내려놓고 달려와 도연의 짐을 나누어 들었다. 도연이 이제 자유로워진 한 손으로 인영의 엉덩이를 툭툭 쳤다. 어이구, 내 새끼. 아, 쫌! 집에 와서는 인영이 장거리를 완벽하게 정리하는 것까지 도와주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제 각자의 시간이 필요한 때였다. 도연이 갈아입을 옷을 챙겨 화장실로 들어갔다. 단편 원고 하나가 이미 마감을 넘겼다. 씻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아야 했다.
도연이 노트북을 켰다. 그러고도 작업 파일을 열지 못하고 바탕화면만 멍하니 보았다. 왜 이렇게 집중이 안 되는 걸까. 얄궂게도 마감 코앞에서만 낄낄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분도 영 오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개 이때는 쫓기듯 미친 듯 뭐라도 죽죽 써내려가야 정상이었다. 마감을 넘기고 휴대전화까지 꺼두었으니 분명 시정에게 메일이 와 있을 터였다. 도연이 마구 머리를 굴렸다. 더 줄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혹시 그 안에 다른 작가를 섭외할 수는 없는지, 어떻게 말해야 깊은 고민 뒤에 내린 결정처럼 보일는지 따위를 궁리하느라 편두통이 다 찾아왔다. 아, 머리야. 도연이 담배를 물었다. 출판사가 비밀리에 작성한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면 우선순번으로 자신이 올랐을 터였다. 태도 불량, 마감에 대한 책임감 결여, 현 출판사에 대한 충성도가 부족함. 도연이 의자에 무릎을 세워 얼굴을 파묻었다. 처음부터 이번 원고는 고사하고 싶었다. 내면에서 울린 음성을 무시한 댓가가 이토록 엄혹했다. 도연이 한숨과 담배연기를 함께 내뱉었다. 그리고 메일창을 열었다. 역시 ‘선생님!’ 제목으로 편집자 시정에게 메일이 와 있었다. 그렇지, 암. 도연이 메일을 열었다. 선생님, 작업은 잘되고 계신지요? 안 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여러건의 문의로 연락드렸습니다. 먼저 EBS 라디오에서 출연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못합니다. 또 한건은 지난번 ○○시 올해의 책 주최 측 요청입니다. 선정된 책으로 독후감대회를 열었는데, 선생님이 심사가 가능한지 묻네요. 지금은 다른 분들 글을 볼 처지가 못 됩니다. 마감도 안 지키면서 심사하러 다닌다고 뭐라고 할 거잖습니까. 마지막으로 선포식 때 뵀던 진유철 의원님 기억하시는지요? 도연이 놀라서 담배연기를 꿀떡 삼키는 바람에 헛구역질이 났다. 그 의원님 보좌관께서 선생님 연락처를 묻는데 어떡할까요? 그 의원님 지역구 행사에 선생님을 초청하고 싶다고 합니다. 세부 일정은 아직 안 나온 것 같아요. 일단 그쪽 연락처는 받아두었습니다. 선생님 곤란하시면 저희가 잘 말할 테니 말씀만 하세요. 그리고 이번에는 진짜 마지막입니다. 선생님, 원고 마감이 살짝 지났습니다. 선생님의 옥고를 기다리며 시정 드림. 도연이 메일창을 닫았다. 그러고는 담배를 끄고 세운 무릎에 턱을 괴었다. 진유철. 도무지 이 남자가 정리되지 않았다. 그는 매끈하게 악수하고 떠났는데 자신은 악수한 그 손길이 잊히지 않았다. 더운 이스탄불에서도 줄곧 잡고 다닌 손이었다. 헤어진 남자가 이토록 떠오른 적도 없었다. 그런 중에 그의 보좌관이 연락을 해왔다. 그의 부름인지 보좌관의 사무적 연락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무엇이라도 도연이 즉각 답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쨌든 답은 해야 했다. 도연이 다시 메일창을 열고 시정에게 메일을 썼다. 라디오 출연과 심사 건은 정중하게 고사했다. 현재로서는 불가능한 일들이었다. 그리고 그의 보좌관. 보통의 경우 출판사에 세부 정황을 알아봐달라고 요청했다. 직접 통화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이번 건도 늘 하던 대로 했다. 무슨 일인지 보좌관님께 여쭤주세요. 지금은 제가 통화할 여력이 없습니다. 아시죠? 우선은 시정씨가 기다리는 옥고에 마침표부터 찍어야겠습니다. 하도연 드림. 벌써 아홉시였다. 이날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원고를 마무리해야 했다. 도연이 메일창을 닫고 작업 파일을 띄웠다. 이놈을 죽여 살려. 전개상 죽어야 하는데 악착같이 목숨을 붙들고 있었다. 짧은 소설에 불사조 하나가 나타나 제 창조주에게 덤비고 있는 것이다. 너무 악해서 도연은 소멸시켜버리고 싶었다. 이런 인물을 소설에서라도 죽이지 않으면 언제 죽이나. 보고 싶다. 원고 속에서는 악의 불사조가 날뛰고 있는데도 문득문득 유철이 떠올랐다. 미치겠네…… 불현듯 나타난 유철이었다. 혹시 유철은 알고 있었을까. 도연은 의심 섞인 기대도 했었다. 이스탄불에서 앙카라를 혼자 다녀왔을 때, 아타튀르크공항으로 마중 나왔던 그때처럼 혹시 한국에서도 어쩌면. 그때도 유철은 뒷짐 지고 서서 도연이 출구로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유철은 다른 볼일로 동행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도연이 기대도 하지 않은 마중이었다.
“도착시간 어떻게 알았어요?”
“도연씨 비행기표 봤잖아요.”
도연은 헤어진 연인들을 애써 떠올리지 않았다. 이유가 무엇이든 그럴 운명이었을 테니 헤어짐이 결정되면 깔끔하게 정리했다. 괜한 감정의 찌꺼기를 남기기 싫었다. 다시 찾아온 남자도 냉정하게 뿌리쳤다. 나를 사랑했기는 했니? 네, 과거에. 몸 한번 섞었다고 기고만장한 인간은 특히 싫어했다. 지금 나와. 당장 나오라고 했다. 너만 일해? 그런 남자와는 초장에 끝냈다. 하이고, 넌 그냥 딜도였어. 니가 내 사랑을 알아? 몰라, 모르는데 어떻게 사랑해. 사랑은 그냥 하는 거야. 콘셉 잡지 마, 촌스러워. 도연은 사랑으로 극복하고 용서한다는 자기희생성 낭만을 경멸했다. 사랑만능주의에 빠져 존중 없는 사랑으로 부리는 횡포도 끔찍했다. 그 때문에 과거 연인의 악다구니에는 일말의 배려도 없었다. 사랑하면 좀 꺼져. 너 때문에 한껏 불행하니까. 상대가 미련으로 다시 찾는 것을 극도로 꺼렸듯 자신도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 좋으면 좋았던 대로 싫으면 싫었던 대로 소멸된 과거로 남겼다. 인생이 원체 아이러니해서 도무지 영문 모를 관계가 맺어지기도 하고, 서로 좋게 바라보면서도 각자 타인의 품에 안기는 씁쓸함을 겪기도 했다. 유철은 후자의 연인이었다. 그가 아내에게로 돌아갔다. 더는 탐내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가세요. 갈게요. 둘에게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좋았던 기억으로 남긴 채 서로 무탈하고 행복하길 바랐다. 그렇게 사십시오. 지금처럼 단정하고 예쁘게. 헤어질 때 연락처 하나 주고받지 않았다. 사랑은 찾아나서는 것이 아니라 나타나는 것이다. 어느날 그곳에서 불현듯. 그런 사랑 또 오겠지요. 그랬는데 소멸된 이스탄불의 과거가 현재 시각으로 나타났다. 누가 누구를 부러 찾은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불쑥 나타난 거였다. 이런 경우는 어떡해야 합니까. 당신 생각은 어떤가요? 당신 때문에 하찮은 불사조 하나 처리하지 못하고 있잖아요. 하아…… 만사가 심란한 도연은 도저히 원고에 마침표를 찍을 수가 없었다.
(다음호에 계속)